시스투스
빵준 포스트 아포칼립스AU
약간의 유혈주의, 논씨피에 가까움
시스투스
피 냄새가 가득한 방에 갇힌 게 며칠 째 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같이 여기로 끌려왔지만, 먼저 이 방을 나간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 나는 멍하니 어둠으로만 칠해져 있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두툼한 쇠창살이 덧대어져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나는 이 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깜깜한 새벽이었지만 아무리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 덕분에 바깥이 안 보이지는 않았다. 창문 바깥에는 울창한 나무로 가득 찬 숲이 있었다. 나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 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같은 자세로 창문에 기대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사람이 한 명 지나갔다. 그러자 다시 돌아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키는 나와 비슷해 보였고, 달빛에 비친 피부가 새하얗게 보였다. 쌀쌀한 밤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은 피부와 반대되는 검은 색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창문의 바로 앞에 서 무의식적으로 입이 열렸다.
'도와줘.'
밖에서는 들릴 리가 없겠지만 나는 누가 들을 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밖에 있는 남자애한테 도와달라고 말을 꺼냈다. 그 남자애는 입 모양을 보고 눈치챈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창문으로 더 다가와 입김을 한 번 불더니 무언갈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쪽에서는 거꾸로 보였지만, 분명히 '여긴 뭐 하는 곳인데.'라고 삐뚤빼뚤하게 적혀있었다. 나도 그 애와 똑같이 입김을 한 번 불어 잽싸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적은 걸 그 애가 가만히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내게 말했다. 아무리 열심히 입 모양을 바라봤지만 알아 낼 수 없었다. 그 애는 그냥 가 버렸고, 난 여전히 갇혀있었다.
몇십 분이 더 지나, 그 애가 다시 창문 바깥에 나타났다. 그 애는 검지손가락을 입에다가 가져다 대며 가만히 있으라 입 모양으로 말해주었다. 그 애는 다시 사라졌고, 나는 기다렸다. 곧 절그덕 소리가 들리며 철통처럼 단단하게 잠겨있었던 문의 자물쇠가 풀어졌다. 그 애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주었다. 나는 빼꼼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깥에는 나를 끌고 온 자식들이 뻗어져서 자고 있었다. 나와 그 애는 숨을 죽이며 한 발 한 발 움직여 오두막의 문까지 다다랐다. 그 애는 열쇠를 조심히 옆에 있는 조그마한 탁자에 내려놓고 내게 조용히 속삭이며 작은 칼을 내게 건넸다.
"야, 이제부터 숲속으로 달릴 거야. 이건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고."
그와 동시에, 그 애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그 오두막을 나갈 때, 귀가 밝은 것 같은 한 사람을 깨워버렸다. 그 사람은 식칼을 들고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씨발. 좆됐다. 그 애가 옆에서 중얼거렸지만 나는 공포로 인해 생각 회로가 멈추어 버려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이야, 먹을 거 없었는데 2명으로 늘어나고 좋네."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오던 그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으..으아악-!!!"
탕-
큰 소음이 어두움과 적막으로만 물든 이 숲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그 애의 손에는 처음 보는 쇳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 애는 쇳덩이를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들고 있던 팔을 내려놓았다. 우리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던 사람은 바로 앞에서 피를 튀기며 쓰러져 있었다.
"야. 뛰어."
"...어?"
"뛰라고!!!"
그 애는 주저앉아있던 나를 당겨 달려갔다. 숲속으로 뛰어간 지 정말 몇 초도 걸리지 않아 큰 소리를 듣고 오두막에 있던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숨어가며 추적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도와준 그 애의 이름은 성준수라고 했다. 그리고 준수에 의하면 나와 내 가족이 끌려간 오두막은 식인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라 했다. 너는 그 새끼들한테 먹히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라고. 그 말을 듣고 눈앞이 새카매졌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된 거지?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려 눈을 꾹 감았다.
하루 종일 도망치던 와중,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이 아니라 폐허가 된 건물들이 보였다. 준수는 익숙하다는 듯 건물 잔해들을 밟으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무너지지 않은 건물들은 여러 식물과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작은 동물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와... 멋지다... 비행기 잔해 아래서 지냈던 내겐 새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준수가 비슷하게 생긴 이 건물 숲의 길들을 다 알고 있다는 게 멋져 보였다.
"들어와."
"우와..."
준수가 입구 쪽에 걸려있던 천 쪼가리를 옆으로 들추니 아지트가 나왔다. 구하기 힘든 통조림과 과자 같은 것들이 많이 쌓여있을 뿐더러 여러 도구들과 푹신해 보이는 쿠션들이 한 데 쌓여있었다. 또, 큰 유리창 너머로 아침햇살이 들어와 어두울 것만 같은 아지트 내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아지트의 바로 바깥에는 동그랗게 쌓인 식어버린 나무 장작들이 있었고, 아지트가 있는 건물에는 예쁜 꽃들이 달린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준수는 자연스럽게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지내든지."
"진짜? 여기서 살아도 돼...?"
준수는 말 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쿠션이 놓여있는 곳에 앉았다. 하루를 넘게 걸어서 그런가 본지, 편한 곳에 앉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
푹- 푹- 푹-
"음... 너무 잔인한 거 아닐까...?"
"어차피 익숙해 져."
이 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와 준수는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러 밖에 나가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해 죽이고 있던 참이었다. 맥가이버 칼로 익숙한 듯 야무지게 토끼의 숨통을 끊어놓은 준수는 토끼 다리 쪽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먹을 때에는 맛있게 먹을 거잖아."
"...응"
준수는 자연스럽게 토끼를 들어 가방에 걸려있는 뾰족한 갈고리 같은 것에 토끼를 끼웠다. 솔직히 토끼가 좀 많이 불쌍했지만 나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토끼를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으으, 미안해.
"맛있냐?"
"...웅"
토끼가 미안하다는 마음은 차곡차곡 칼 각을 맞춰 접어서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거의 오랜만에 먹는 고기인지라 원래도 맛있는 게 정말 맛있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 맛있냐. 그러게 어차피 맛있게 먹을 거 내가 토끼 죽일 때 왜 그렇게 봤냐고. 준수도 고깃덩어리를 쭉 찢어 입에다 집어넣었다.
조용히 타고 있는 장작불을 바라보았다. 가을이었기에 밤은 몹시 쌀쌀했다. 나는 후드집업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저녁을 먹은 직후인지라 몸은 노곤노곤했다.
"준수야."
"왜."
나는 내 옆에 앉아있던 준수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이 곳에 왔을 때에도 준수는 혼자였다. 혹여나 외롭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는 계속 혼자 산 거야?"
"응."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준수를 바라보았다. 준수의 무덤덤한 얼굴이 살짝 슬픈 것 처럼 바뀌어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됐어, 전영중. 빨리 자기나 해. 내일 물 뜨러 가게."
"...그래, 너도 잘 자."
나는 쭈그려있던 몸을 쭉 피며 일어나 쿠션 더미로 움직여 몸을 던졌다. 부들부들한 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올리니 매우 포근했다. 손을 쭉 뻗어 옆에 있던 조그마한 랜턴의 스위치를 누르고 몸을 돌렸다.
이맘때 쯤 이었나. 그때는 곧 겨울로 바뀌는 지점의 날이었다. 아침과 밤은 굉장히 쌀쌀했고, 한 낮에는 선선했던 날. 몇 년 전, 그러니까 한 9살 쯤 됐을 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일 것이다. 잊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영중을 만난 그날, 그때의 생각이 났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날은 평온했고, 그 평온이 박살 나는 건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자고 있었을 때, 쳐들어와 우릴 끌고 가던 그 새끼들의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나는 모두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지수가 끌려갔을 때에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끝까지 지수를 붙잡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날, 나는 내 전부를 잃었다.
전영중을 지나치지 못했던 것도 이때의 일이 생각이 나서였다. 근거지를 옮겼나. 전영중을 만났던 날은 그저 단순히 좀 멀리 이동한 것이었다. 사람이 있나 없나. 내가 살던 곳 보다 더 좋은 곳이 있나 없나. 그런 이유로 산에 발을 들였지만, 생각보다 산의 크기가 컸다. 결국 밤이 되어버렸고, 나는 주변에 휴식을 취할 곳이 있는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갇혀있는 전영중을 보았던 것이었다. 뭐야, 쟤. 왜 저기에서 갇혀있는 거야?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 답지 않은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걔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때 내가 제일 바랬던 한 줄기 빛이 되길 바라며.
"으아아아-"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고 물병을 열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준수가 어제 말한 대로 우리는 물을 뜨러 갈 예정이었다. 우리 아지트 근처에는 내천이 있었다. 나와 준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양동이를 두 개씩 들고 내천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목은 콘크리트 더미 때문에 험했지만, 그래도 선선한 가을바람 덕분에 기분은 상쾌했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물에 손을 담그자 쌀쌀했던 밤공기 때문인지 매우 차가웠다.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양동이를 집어넣어 물을 담았다. 윤슬 아래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흐르는 물을 따라 움직였다. 준수는 옆에서 손으로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손을 담그며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우와, 이거 준수랑 완전 닮았다. 나와 준수는 아지트 근처에 있는 여러 물건들이 잔뜩 쌓인 건물에서 먹을 것들과 옷가지를 챙기던 중에 성준수를 닮은 조그마한 검은 고양이 인형을 찾게 되었다. 진짜 신기하다. 완전 성준수 아냐?
"준수 준수. 이리 와봐."
"뭔데."
나는 준수가 내 옆으로 오자 인형을 들이밀며 활짝 웃어 보였다.
"완전 너랑 닮았다. 그치."
성준수는 조용히 내가 건넨 그 인형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단답으로 말했다.
"그러네."
나는 준수의 눈치를 힐끔 보다가 준수의 손을 끌어당겨 인형을 쥐여주었다.
"자. 선물."
"나 이런 거 필요 없는데."
"그냥 가져. 가방에 걸어두던가."
준수는 언짢은 듯이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가방 안에 고양이 인형을 집어넣었다. 나는 헤헤 웃으며 필요한 것들을 찾으러 먼저 뒤 돌아 앞서나갔다.
"음... 어떡하지?"
"에라이 씨바거."
집에 가던 길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에취-
비가 그칠 때 까지 건물 잔해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가 후다닥 아지트로 들어와 불을 때고 앞에서 몸을 말렸지만 웬걸, 한 번 터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도 몽롱했다. 성준수는 내가 기침을 시작하자 내 옆으로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야, 너 열나."
"어...? 진짜?"
"일단 빨리 자. 약 찾아볼게."
나는 내 스스로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우. 뭐야. 완전 뜨겁네. 감기인가. 이 곳에 오기 전에도 감기에 걸린 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감기는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비적비적 걸어가 쿠션에 몸을 파묻었다. 푹신한 곳에 눕자마자 몸은 나른해졌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 씹, 어디 있는 거야.
이것 저것 넣어놓는 상자에서 약을 찾으려 상자를 뒤집어엎었다. 아무래도 약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대라 보니 약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가 매일 물건을 구하는 건물에서도 약은 구하기 힘들었다. 아주 가끔 진통제나 해열제가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알기로는 전영중이 오기 전에 하나를 더 찾은 걸로 알고 있었지만 분명히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나는 좁은 아지트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약을 찾았다.
"아, 뭐야. 여기 있었네."
가방의 맨 앞주머니에 넣어놓고 열어보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물통과 약을 집어 들어 전영중에게로 걸어갔다. 걔는 담요를 목 끝까지 덮고 끙끙 앓으며 자고 있었다. 야, 일어나 봐. 약 먹어. 하지만 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다시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전영중의 이마는 마치 불가마 같았다. 하 씹,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허겁지겁 수건을 찾아 물병에서 물을 들이붓고 전영중 이마에 얹어주었다. 이제 물 다 떨어졌는데. 바깥은 어두웠지만 나는 양동이를 주워 들고 내천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냥 빼주고 내 갈 길을 가자는 생각으로 전영중을 도와주었다. 그저 과거의 기억들이 내 몸을 움직였던 것이었으니까. 중간에 죽을 뻔하기도 했기에 순간적으로 괜히 도와줬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뭐 구해줬으니까. 전영중은 나쁜 새끼는 아니었다. 좀 모자란 것 같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잠깐 아지트로 데려왔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렇게 바라보는데. 나는 그렇게 전영중이 이 곳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하루 온종일 전영중이랑 부대끼며 이 짓거리 저 짓거리 안 해봤던 뻘짓거리 다 해보니까 점점 전영중은 내 하루에 스며들고 있었다. 침묵이 어색했던 사이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금세 침묵이 감돌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전영중이 바깥을 돌아다녀 나만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지트가 너무 휑하게 느껴졌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휑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전영중을 받아들였다.
허억- 허억-
5분 정도를 족히 뛰어 내천에 다다랐다. 쌀쌀한 밤공기 때문에 물은 차가웠다. 나는 양동이 한가득 물을 퍼담고 쏟아지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으으..."
아침 햇살이 밝게 아지트 내부를 비추었다. 나는 담요를 들추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이게 뭐야. 축축하게 젖은 미지근한 수건이 머리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 수건을 바라보다 바로 내 옆에서 엎드려 자는 준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내가 덮고 있던 담요를 준수의 어깨에 조심스레 걸쳐주었다. 음... 자나? 준수가 깨지 않게 쿠션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물병을 주워들었다. 물병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약 먹어. 라고 적혀있었다. 해열제인가? 나는 이마를 내 손으로 짚어보았다. 다행히도 열은 나지 않았다. 안 먹어도 되겠지 뭐. 얼마 지나 않아 성준수가 일어나고 내게 약을 먹으라 협박했지만, 나는 안 그래도 약 구하기 힘들고 아프지도 않은 데 왜 먹냐며 준수를 설득했다. 준수는 미심쩍게 쳐다보다가 알겠다며 웬일로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몇 년이 지났다.
매일 가던 내천의 흐르는 물처럼. 조용한 건물 잔해들의 숲 사이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의 시간처럼.
매일 지나던 길에 있는 작은 소나무의 키를 넘게 되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 늘 지내왔던 작은 집의 천장은 낮아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 때문에 작아져 버린 지 오래된 옷가지들을 버리고 새 옷을 찾으러 아침 일찍 집 입구에 걸려 있는 천을 걷었다. 하필이면 신발 밑창도 갈려서 무늬가 없어져 버렸다. 나는 가방의 옆쪽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목을 스치며 내려갔다. 한창 여름인지라 햇빛은 쨍쨍하게 머리를 비추었다. 성준수도 검은 워커의 끈을 꽉 묶으며 일어났다.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갔던 건물을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입구에는 콘크리트 잔해가 많이 깔려있어 처음 갔을 때는 몇 번 넘어질 뻔하기도 했었다. 나는 계단 옆에 있는 조그마한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가판대 앞에서 대충 목 아래에 티셔츠를 대서 얼추 맞아 보이는 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입을 만 한 것들을 집어넣은 뒤 폐허가 되어버린 매장을 둘러보았다. 마침 벽에 빨간 운동화가 걸려있었다. 아무래도 신발은 거적때기가 된 지 오래였기에 빨간 운동화를 집어 들어 신어보았다. 오, 괜찮은데? 사이즈가 얼추 맞아떨어졌기에 예전에 신던 신발은 그 자리에 내려놓고 새 신발의 끈을 꽉 묶었다. 헤헤, 맘에 든다.
"다 챙겼냐?"
"응. 어느 정도."
"아래로 내려가자."
성준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 곳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가 몇 층 아래로 내려갔다. 자주 들르는 마트 층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먹을 것들을 챙겼다. 전기가 나간 것 때문에 냉동식품들의 썩은 내가 옅게 진동했다. 안 그래도 났던 냄새는 여름의 더운 날씨의 탓까지 더해졌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캔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대충 부풀어 오르지 않은 캔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쌓아 집어넣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가방에 넣을 곳이 없어 스위트콘을 챙기진 못 했지만, 오늘은 첫 번째로 진열되어있는 스위트콘을 두 개 담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황도와 꽁치 캔, 참치 캔을 담았다.
"...뭐야?"
아지트로 들어오니 웬걸, 초면의 사람들이 쿠션 더미에 앉아 우리가 먹으려고 남겨놓은 식량을 먹고 있었다. 우리가 문에 걸려있던 천을 옆으로 치고 들어오니 그 사람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준수는 개 빡쳤는지,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빠따를 들어 올리려 했다(막았다). 사람들이 뜯어 먹고 있는 것들 중에서는 내가 매일 한 개씩만 먹는 아끼는 알록달록한 초콜릿도 포함이었다. 하...
"누구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 사람들은 눈치를 보더니 대가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잽싸게 총을 주워 들어 장전해 내 머리에 겨냥하며 말했다.
"여기서 나가. 가방에 있는 거 다 내려놓고."
"..."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인가. 하하,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게 이런 말 이구나. 대가리가 머리에 총을 들이대자 주먹 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대가리가 먼저 움직이니, 다른 따까리들도 옆에 있던 무기를 주워들었다. 다행인 것은, 따까리들은 총이 없었고, 우리보다 머리 하나 차이가 나게 작았다. 원래 다구리 앞에서는 장사 없다 하지만, 침착하면 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잽싸게 권총을 뺏어 대가리에게 한 발 쏘았다.
탕-
총 소리에 맞춰 성준수는 야구 빠따를 들어 올려 남은 잔챙이들에 달려가 하나씩 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아지트에는 피가 여기저기 튀어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머리에 피 흘리며 죽은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이게 뭔 일이야. 옆을 돌아보자 준수는 자연스럽게 침입자들의 가방과 주머니를 뒤져 찾을 만 한걸 찾고 있었다. 나는 준수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말을 걸었다.
"준수야, 뒤지는 건 나중에 하고 빨리 치워. 설마 농땡이야?"
"뭐래. 다 챙기고 버려야지. 니나 빨리 해."
우리는 티격태격하며 수건을 하나씩 쥐고 피가 튀어서 더러워진 벽을 빡빡 닦았다. 아주 빡빡. 빡빡빡빡.
며칠 뒤, 나는 건물 뒤쪽에 있던 작은 산에서 산책을 하던 중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길로 산책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새로운 산책로를 개척하던 중 토끼가 갑자기 뛰쳐나와 깜짝 놀라긴 했지만 별일은 없었다. 산은 쥐똥만큼 작았었기에 길을 잃을 위험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길 한번 잘못 들어도 다시 내려가면 어딘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걸었을 때, 분홍색의 특이하게 생긴 줄기가 매우 길쭉한 꽃이 있었다. 오, 되게 예쁘네. 특이하다. 나는 그 꽃의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뽑아내었다. 집 앞에다가 심어놔야겠다.
"뭐하냐. 청승맞게."
"그냥, 처음 보는 꽃인데 특이하고 예뻐서. 안 예뻐?"
"...예쁘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뿌리가 들어갈 정도로 흙을 팠다. 성준수는 무심하게 벽에 기대서 쳐다보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파내린 흙 속에 꽃을 넣은 뒤, 다시 흙으로 묻었다. 그리고 가방 옆에 꽂혀 있던 물병을 열어 흙이 촉촉해질 정도로 물을 부었다. 여름 바람에 스쳐 팔랑거리는 꽃잎이 예뻤다. 나는 한번 피식 웃은 뒤에 손을 몇 번 털어준 뒤에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휘익~ 휙~
경쾌한 음으로 휘파람을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마 전에 새로 개척한 산책로를 걸었다. 슬슬 늦가을에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인지라 아침 바람은 선선했다. 아으 상쾌하다. 나는 작은 산을 두 바퀴 정도 돌아준 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어? 뭐야. 성준수 없네?"
원래라면 성준수도 산책하고 돌아왔을 시간이었지만, 왜인지 이번에는 집 안에 있던 쿠션 위에 앉아있지 않았다. 뭐야, 좀 늦네. 미리 아침으로 먹을 것 좀 까 놔야겠다. 나는 나무판자로 되어있는 선반에서 참치 캔과 간만에 발견한 비스킷을 조금 뜯어 엉성하게 만든 작은 테이블 위에다가 놓았다.
"..."
꼬르륵. 배에서 음식을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약 1시간 쯤 기다렸지만 성준수는 오지 않았다. 뭐야, 이상한 길로 새서 늑대한테 물어뜯겼나? 내가 분명히 조그만 거라도 아무거나 들고 다니라고 431번 넘게 말했는데? 어디 간 거야? 나는 쿠션 위에 던져놓은 가방과 모자를 집어 들어 다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천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건너편으로 지나가도 엇갈리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내천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뛰어갔다.
하지만 성준수는 없었고, 걔가 맨날 지니고 다니는 조그마한 맥가이버 칼과 피 몇 방울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천 주위를 계속 돌아다니며 성준수 석 자 만을 외쳤다. 이미 내천 옆에 있는 산은 한 번 돌았고,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은 채로 더 깊숙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야~ 여기에 이런 도시가 있었네. 그치? 내가 씨발 총 한 발이나 얻어맞고 겨우겨우 살아났었는데. 날 총으로 쏜 새끼가 여기 있었네?"
"뭐라는 거야. 니가 누군데."
"모르는 척 하지 마, 씨발. 이런 세계에 사람이 살아있다면 또 얼마나 살아있다고 모르는 척을 해."
"아니라고 씨발아. 니가 누군지 좆도 모르는데 내가 왜 니를 쏴. 그 새끼가 병신인 거지 왜 나한테까지 지랄이야."
나는 있는 힘껏 부인했다. 아주 옛날 옛적에 전영중을 식인충 새끼들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다가 한명 총으로 쏜 게 이 새끼였나 보다. 안일했다. 그저 하루 정도만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는데. 이사를 한 번 할 걸.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 없었다. 이미 저 좆같은 새끼가 들고 있는 파이프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아 머리는 깨질 듯이 어지러웠고, 난 묶여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씨바거 그냥 주위에는 나무 천지였으니까.
"그리고 한 명 더 있지 않았냐?"
"누구."
얼마 정도 지나니 저 새끼가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하다가 내게 지껄였다. 저 새끼 기억력은 도대체 뭘까. 존나 사소한 것 까지 기억하는 게 좀팽이 같았다. 깜깜한 밤이었을 텐데 그걸 기억하네. 머리에다가 쏠 걸.
"아니, 니랑 다른 꼬맹이랑 같이 도망쳤잖아. 진짜 모르는 척 하는 거 존나 티 나는데 왜 그러냐, 개 빡치게?"
이 새끼가 우리가 사는 곳 주위를 뒤지면 전영중은 금방 나올 수 있었다. 그 새끼 집에 있으려나. 아직도 산책하려나. 제발 나 찾으려고 내천까지 오지는 말아줬으면 했다. 내천에서 머리 한 대 맞고 기절해서 끌려온 게 여기었으니, 이 곳이 어딘지는 알지 못했지만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내천이 있을 것이었다.
"몇 년 전에 싸워서 갈라졌어 씨발. 그 새끼가 어디 있는 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니한테 총 쏜 거 나 아니라고."
"구라까지 마라. 니 씨발 그때랑 존나 똑같은데 뭐가 아니야."
"니가 잘 못 봤나 보지. 내가 뭐 했는데 씨발."
그렇게 씨발 씨발 거리는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 새끼가 한숨을 쉬며 쪼그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갈 생각 하지 마라. 죽이기 전에."
"야, 씹. 니 어디 가는데?"
나는 버둥거리며 그 새끼를 커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미친새끼야. 어딜 가는데.
"알 바 아니잖아."
그 새끼는 뒤 돌아서 숲을 나갔고 난 묶여있는 채로 그 새끼를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
성준수, 너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나 버리고 어디로 튀었는데. 별 볼 일 없는 몸뚱아리면서 아무것도 안 들고 그냥 조그마한 맥가이버 칼만 달랑달랑 들고 가면 어쩌라는 거야. 설마 짐승한테 잡혀갔어? 아니잖아. 그럴 리가 있냐고. 그러면 왜 내천 주변에 없는데?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 거야? 이 주변에 새로운 곳이 또 어디가 있냐고, 성준수. 니가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떠날 애는 아니잖아, 그치?
나는 내천 앞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디 간 거야... 몇 바퀴나 내천을 빙글빙글 돌았고, 늘 가던 건물들도 둘러보고, 혹시 몰라 예전에 같이 산책했던 숲길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고, 내가 쥐고 있는 건 성준수의 맥가이버 칼 밖에 없었다.
난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 주변에 없으면 저 숲에 있는 거겠지. 나는 한발 한발 내디디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대낮이라 그런지, 작은 동물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 숲속으로 들어가는 와중, 주위에서 자꾸만 부스럭 소리가 났다. 분명히 작은 동물의 나뭇잎 부스럭 대는 소리는 아니었다. 짐승인가?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빠따를 더욱 더 꽉 움켜쥐었다. 몇 분이 지나도 그저 계속 부스럭부스럭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찰나의 궁금하다는 생각 때문에 조심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죽이며 걸어갔다.
"...성준수? 너 뭐야?"
"아, 미친. 니 왜 여기 있어?"
뭐야 미친. 넌 또 뭐야. 준수는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준수의 이마에는 피가 딱딱하게 굳어 검붉은색이 되어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데.
"야... 너 괜찮아?"
"응. 근데 씨발 일단 이거부터 풀어봐. 그 새끼가 언제 올 지는 모르니까 묶여있는 것 처럼 보이게만 해줘."
나는 밧줄에다 대고 혹여나 성준수가 베일 까봐 조심히 칼질을 했다. 결박이 풀리자 성준수는 밧줄이 풀린 걸 보이지 않게 정면으로 드러누웠다. 야 넌 멀리 좀 가 있어. 왜? 너 뭐 하다가 이런 건데? 아 씹, 제발. 니 죽는다고.
"야, 숨어."
그 말과 즉시, 쇠 파이프를 손에 쥔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진짜네."
"진짜라고 했잖아 씨발아."
"..."
한 동안의 적막이 온 숲을 휘감은 듯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숨소리도 죽인 채 그 장면을 그저 숨어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새끼랑 성준수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파이프를 쥔 사람이 허리춤에 달린 식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 뭐야? 준수도 놀란 눈치였다. 도대체 이게 뭐야. 나는 쪼그리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 새끼가 칼을 든 손을 번쩍 들었다. 세상이 점점 느리게 보였다. 안 돼. 안 돼. 성준수. 도망 안 치고 뭐 해. 제발. 제발. 한 발 한 발을 내디뎌 준수에게로 달려갔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는 시간 속, 나는 준수에게로 달려가 준수를 옆으로 힘껏 밀쳤다.
"성준수!!!"
그와 동시에, 차가운 금속이 내 등을 가로질렀다.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뜨겁다.
푸욱-
씨발. 내가 뭘 본 거지? 내 눈 앞에서 날 밀친 전영중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붉은 선혈을 흩뿌리며. 씨발. 씨발. 씨발. 이게 뭔데. 나는 바지 주머니를 허겁지겁 더듬었다. 조거팬츠의 주머니 안에서 단단한 감촉이 들었다. 나는 권총을 꺼내 빠르게 장전했다. 철컥-, 탁-. 씨발. 씨발. 씨발. 제발, 전영중.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저 개씹좆같은 새끼 대가리를 향해.
성준수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멋진 건 자기 혼자 다 하고, 어디 하나 생채기 나서 와도 별것 아니라며 약이나 아끼라고 하면서 내 상처에는 끈질기게 집착하고. 내 안의 성준수는 복합적인 애였다.
성준수가 우는 건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떤 날의 야심한 밤, 나는 목이 타서 물을 마시려 잠시 일어났다. 옆에 있는 쿠션에 누워 자야 할 성준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천으로 만든 문. 그 곳에는, 성준수가 앉아있었다. 성준수는 가만히 앉아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는 듯했다. 내 발소리는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성준수에게 들리지 않았었나 보다.
"어?"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얼굴을 짓는 것은 처음 봤었다. 차갑고 딱딱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죽을 때 까지 다신 못 보겠지. 준수가 우는 모습을 보았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탕-
명중. 머리가 뚫린 개씨발좆같은 새끼는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는 총을 그대로 던져 버리고 영중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난, 떨리는 손으로 전영중을 끌어안아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등을 꾹 막았다.
"하하... 준수야... 주위를 잘... 봤었어야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씨발, 너 여기 왜 왔는데. 너 안 보여서... 그럼 기다리든가 했었어야지... 걱정되니까... 전영중을 안고 있는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은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해는 점점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태양이 지고 있었다.
"준수야."
"...왜"
"이걸로 네가 지켜준 내 목숨을, 갚을 수 있겠지?"
"뭔 소리야...?"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나를 감싸 안던 전영중의 손이 맥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 야. 전영중. 장난 하지 마. 너 뭐 하는 거야. 전영중을 몇 번 톡톡 쳐 보았다. 하지만 전영중은 묵묵부답이었다. 전영중... 제발...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내 품에 안긴 넌 아직도 따뜻하기만 한데. 네가 죽은 게 맞기나 한 걸까. 나는 전영중을 끌어안고 괴성을 질렀다.
나는 땅을 팠다. 이 시대 사람치고 전영중은 너무 크고 기다랬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땅을 파냈다. 파고, 또 파고. 그리고 전영중을 힘겹게 옮겨 땅을 판 곳에 잘 넣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해가 뜰 때까지 나는 그 앞에 앉아 하염없이 평온하게 누워있는 전영중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몸을 끌고 집에 돌아왔다. 밝은 햇살이 밝고 환하게 내부를 비추었지만, 나는 어둡고 깜깜했다. 전영중이 며칠 전 청승 떨며 심었던 기다란 꽃의 줄기가 꺾여 쓰러져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숙여 꽃을 벽에 기댄 채 서 있도록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작은 테이블 위에는 열어져 있는 참치 캔과 비스킷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멀뚱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결국 테이블을 부여잡은 채 오열했다.
가방에다가 짐을 쌌다. 이런 좋은 곳을 다시 찾기에는 힘들겠지만, 이 곳에서 계속 사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자꾸만 전영중 생각이 났다. 쿠션 위에서 흐무적 대며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그 얼굴이. 이 집이 적적할 새도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에게 말을 거는 그 모습이. 나는 먹을 것들과 옷가지 몇 개. 맥가이버 칼과 야구 빠따. 물병과 모자. 응급처치 도구와 어렸을 때 전영중이 날 닮았다고 가져온 고양이 인형까지. 나는 고양이 인형을 꽉 쥔 채, 조심히 가방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게.
며칠을 꼬박 걸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쉬지 않고 비를 뚫으며 계속, 계속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 건물 잔해가 쓰러져있는 새로운 작은 도시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 곳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유난히 무너지지 않은 채 지붕만 조금 뜯어져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내 발걸음이 온 건물에 울려 퍼졌다. 건물 안에는 기다란 나무 의자가 여러 개 대칭을 이루며 놓여있었고, 가운데에는 십자가에 걸려있는 사람의 장식이 걸려있었다. 나는 나무 의자에 조용히 앉은 채 멍하니 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무너진 지붕 사이로는 햇빛이 들어왔고, 햇빛으로 밝아진 실내는 고요했다.
예전에 이런 곳 들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곳을 성당이라 하던가.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고요한 건물 안에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몸이 점점 나른해지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전영중. 다음 생에서는, 내가 너를 대신해 죽을게.
시스투스
The end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