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활공

빵준 포스트 아포칼립스AU

落花流水 by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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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안해서 이상할 수 있어요. 논씨피에 가까움


Tempus fugit, amor manet.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좋은 문구이지 않나.

5년동안 너를 찾아 지구를 몇백번이나 빙글빙글 돌았지만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2300. 01. 31

"연료 얼마 남았어?"

비행기의 엔진소리와 에메랄드빛 바다의 넘실거리는 소리에 늦은 아침, 나는 몸을 일으켰다. 늘 하던 루틴대로 나는 조종석에 붙어있는 인공지능에게 남은 비행기 연료를 물어보았다.

"31시간 04분 비행할 수 있습니다. 남은 연료와 태양열 발전까지 더할 시, 5일 5시간 6분 비행 가능합니다."

남은 연료와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의 모든 육지는 바다에 잠겨 비행기를 세워둘 평평한 땅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옆에 있던 물통의 마개를 열어 입으로 들이부으며 말했다.

"일지랑 사진 다 클라우드에 백업해 줘."

"진행하겠습니다. 목적지를 정해주세요."

나는 한 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료 다 사라질 때 까지. 그냥 한 방향으로만 쭉 가."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바다로 추락하게 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비행기의 창문 쪽으로 걸어가 턱을 괴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바깥에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들로 가득 찬 바다만 존재했다.

"응. 실행시켜.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어짜피 멸망한 지구에 내가 갈 곳이 있기나 할까. 이 정도면 나는 지구에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한다. 너의 실종에 대해서도 다 알게 되었으니.


마지막 활공


지구가 기나긴 장마로 인해 망가져 버린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기술을 개발하기 전 까지는 지구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고, 2290년의 인간들은 거의 모두 화성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든게 잠겨버려 죽어가기 일보 직전, 나랑 준수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높은 산의 동굴에 들어가 서로에게 기대어 준수의 손에 들린 아무 말 없는 통신기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동굴까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서도 높은 쪽에 놓인 돌에 앉아있었지만, 벌써 발과 엉덩이가 잠겨 축축했다. 남은 것은 시간 싸움 뿐이었다.

"...준수야, 졸려?"

"...응. 존나."

"자지 말고 조금만 버텨봐. 곧 구조요원 온대잖아. 내일 내 생일인데, 축하라도 해 줘야지. 우리도 이제 화성에 갈 수 있어."

"시발... 그 새끼들이 언제 올 줄 알고... 우리 여기까지 다 잠기면 끝이야. 밖에 나가봤자 하루 이틀 차이라고."

준수의 말대로 벌써 수많은 구조용 우주선이 우리를 떠나갔다. 우주센터에서 일했던 나는 첫 번째로 화성에 갈 수 있는 특혜가 있었지만, 준수에게는 없었다. 준수가 배정된 우주선은 341번째로 화성에 갈 수 있었던 거지만, 어찌 된 일인지 준수가 배정된 우주선은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준수는 내게 나 먼저 화성으로 가라고 수천번을 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널 버려. 그렇게 531차, 1624차, 4718차. 이제 6431번째의 구조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더 이상의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벽이 오자 눈꺼풀이 마구 감기려 했지만 나는 꾸역꾸역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노력도 무거운 눈꺼풀을 버텨낼 수 없었다.

몽롱해지는 정신 속,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구조요원들이 다급하게 우주선에서 내려 나에게 뛰어오는 것 까지가 지구에서의 기억 마지막이었다.

우주선에서 눈을 떴을 때, 내 곁에는 준수가 없었다. 나는 구조요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팔을 움직이는 탓에 영양실조 수액이 빠져 팔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구조요원 한 명의 멱살을 쥐고 외쳤다. 성준수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성준수가 이 우주선에 있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환자분 곁에 있던 분은 우리가 환자분을 구조했을 당시 없었다는 말만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올 뿐이었다. 그래도 찾아볼 수 있지 않았냐 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을 듣는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연료도 없고 한시가 급한데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니. 물론 이게 맞다. 내가 이기적인 게 맞다. 하지만, 정말 사람 한 명도 못 찾을 만큼 열악했던 것이었을까. 나는 몸을 움직여 우주선의 조종대로 향했다. 우주센터에서 일했던 모든 상식을 동원해 비상 우주선을 가동했다. 뒤에서 지금 다시 돌아가도 도착하면 다 잠겨있을 거라면서, 다시 지구로 돌아오면 화성으로 갈 수 없다면서 나를 말렸지만 그딴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비상 우주선이 후져도 그저 최대한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상 우주선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빠르게 지구로 돌아갈 모든 준비를 마쳐 좌표를 찍었다.

"목적지를 정해주세요."

"지구, 대한민국 서울로. 얼마나 빨리 갈 수 있는 지 말해줘."

"현재 위치로부터 지구의 대한민국 서울까지 최소 17일 4시간 31분 걸립니다. 운행하시겠습니까?"

"응. 최대한 빨리."

하지만 내가 지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잠겨있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2295. 5. 24

지구의 대기권 아래로 내려와 나는 우주선을 비행기 모드로 돌려 비 오는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벌써 대한민국의 좌표를 벗어나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울했다. 창밖의 저 날씨처럼. 서울은 남산타워의 꼭대기만 남긴 채 모두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더 일찍 깨어날 걸. 아무리 우주선을 최고 속력으로 가동해도 17일이라니. 하하. 비상용 우주선이라고 해도 너무한 속도 아닌가. 큰 우주선으로 왔으면 최소 3일 안에 귀환했을 텐데.

준수가 보고 싶었다.

2296. 12. 24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창한 날씨를 마주했다. 쏟아지는 밝은 햇살과 겨울인데도 따뜻한 기분이 드는 분위기까지. 100년만의 장마가 끝이 났다.

오랜만에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안 들은 지도 너무 한참 전이었던지라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늘이 준수의 생일인지라 생일 축하 노래를 듣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내일 올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내 보았다. 또 안 마신 지 오래된 코코아를 뜯어 창문에 기대 한 입 마시며 바스라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클라우드에서 옛날 사진 구경도 해 보고 준수가 나오는 영상도 보았다. 너도 여기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2297. 1. 1

"전영중님. 오늘은 2296년의 첫 번째 날 입니다."

12시가 지나자 인공지능이 홀로그램 창을 띄워주며 말했다. 이 비행기 안에서 6년을 살았다. 우와 시간 진짜 빠르다. 빠르게 컴퓨터로 일지 갈겨준 뒤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 그대로 잠에 들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

2297. 8. 16.

꽤 넓고 평평한 육지가 보여 비행기를 착륙시켜 거의 2년 만에 땅을 밟았다. 얼굴을 스치는 선선한 바닷바람이 기분 좋았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 앉아 멍하니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비가 오지 않은 육지를 밟아보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겪는 경험이었기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며칠 간은, 이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숨쉬기가 살짝은 불편했지만, 앉아만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대충 배가 고파져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뭐 먹지? 오랜만에 라면이라도 끓여서 먹을까? 행복한 점심 고민을 하며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인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칼을 든 채로 말이다.

"가진 거 모두 다 내놔!!!"

이게 뭔 강도질이냐. 하긴 이 평평하고 꽤나 넓은 땅에 사람 한 명은 있겠지라고 생각하긴 했다. 다행히도 비행기에 보안 모드를 걸어놔서인지, 천장에서 총이 내려와 외부인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니 머리나 조심해. 나가라 할 때 나갈래?"

그러자 그 사람은 머리 뒤쪽을 흘긋 보더니 사색이 된 상태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칼 내려놓고 나가."

어련히 아무것도 못할 것을 꼭 개기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아무 일만 없으면 짜증 나긴 하지만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그냥 도망치는 것만 보고 다시 조종석으로 다가가 비행기를 띄웠다. 아무래도, 육지는 잘 안 올 것 같았다.

2298. 3. 18

오늘도 좁아터진 이 비행기 안에서 할 일을 찾다가 몇 년 만에 이메일을 확인했다. 이메일을 잘 안 쓰다 보니 알림창에는 이메일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었다. 우주에 있는 정부에서 날아온 주택 배정 관련 문서와 뭐 이것저것이 내가 우주에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착각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미친놈이 구조 우주선 타고 화성 가다가 갑자기 비상우주선타고 지구로 돌아오겠는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수백통의 메일을 내리다가 익숙한 이메일을 발견했다. 조재석인가. 나는 형 제발 봐주라는 제목으로 적힌 메일을 들어가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곧 화성으로 온다 했으면서 왜 이렇게 감감무소식이냐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보낸 날짜를 확인하니 2295년 11월 28일이었다. 거의 3년이 다 되어갔다. 나는 잽싸게 재석이한테 메일을 보냈다.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에서 비상용 우주선 타고 다시 지구로 돌아갔다고.

얼마 되지 않아 조재석에게 다시 메일이 날아왔다. 형 미쳤냐고. 뭣 때문에 다시 지구로 돌아갔냐고. 지구 완전 다 잠기지 않았느냐고. 나는 괜찮다고 이제 지구는 화창하다고 말했다. 태블릿으로 화창한 하늘을 찍은 사진도 넣어서.

재석이는 진짜의 푸른 하늘이 신기하다고 했다. 화성 내에서는 스크린으로 하늘 사진을 띄워 낮과 밤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이 세상에서 푸른 하늘을 보는 사람은 아마 나와 아주 극소수의 생존자들일 것이다.

2299. 12. 23.

준수야, 이게 뭐야..?

비행기 안에서만 거의 4년을 지내니 할 것도 지지리 없었다. 패드로 다른 사람들과 두는 체스? 이제는 질렸다. 가끔 재석이와 연락은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할 수 없었다. 노래를 듣는 것도, 요즘 유행하는 영상을 봐도, 아무 생각 없이 반짝이는 바다를 봐도,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인공지능이랑 별 의미 없는 대화를 해도. 외롭고 지루하고 쓸쓸했다. 24시간은 너무 길기만 했고 하루는 달팽이가 달리는 속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해 보기라도 하려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상에 엎어져 있자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준수의 클라우드를 보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터 붙어 지냈기에 준수의 클라우드 닉네임, 아이디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밀번호는 아리송했지만 준수는 이런 것에는 단순하니 대충 junsu1224라고 생각하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사생활 침해일 수도 있지만, 워낙에 일지나 사진 같은 것을 잘 찍지 않았기에 아마 텅텅 비어있을 것이었다.

"오, 이게 진짜 맞네? 우리 준수 생각보다 단순한 게 맞았네, 하하."

junsu1224/를 입력하니 준수의 클라우드 홈이 펼쳐졌다. 영상이 많은 편이었는데, 아주 옛날의 농구선수 한 명이 혼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점수를 터트렸던, 준수가 할 일이 없을 때마다 보던 영상 하나와 준수의 슈팅 연습 영상이 여러 개 있었다. 준수, 농구 선수 되고 싶어 했는데.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덮어버리고 사진 폴더를 열었다. 사진 폴더에는 나랑 준수가 어렸을 적 찍었던 사진, 고등학교 농구부 사진. 준수네 가족사진과 마지막으로 나랑 같이 놀러 갔을 때의 사진이 있었다. 우와 2291년도가 언제 적이야. 그때의 생각도 나고 새록새록 하니 좋았다.

"뭐야, 성준수 일지도 썼어? 대박이다 진짜."

일지 폴더 옆에 1이 있는 걸 본 나는 호기심 100%로 그 폴더를 열었다.

[2290년 5월 6일]

폴더를 열자, 내가 구출되었던 날의 날짜가 제목에 기입되어있었다. 분명 그때의 준수는, 내 곁에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어쩌면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는 일지를 눌러 읽기 시작했다.


[2295년 5월 6일]

전영중. 생일 축하한다.

일단 니가 언젠간 내 클라우드 볼 것 같아서 이렇게 써 둔다. 아마 얼마 안 지나서 볼 수도 있고, 몇십 년이 지나서 볼 수도 있겠지.

솔직히 니가 나를 왜 안 두고 끝까지 화성에 안 갔는지, 아직도 이해 안 된다. 니 우주 센터에서 일했어서 거의 첫 번째로 가는 거였잖아.

나도 어련히 알아서 갈 텐데.

오늘도 내 구조 우주선 번호가 밀렸더라고. 죽기 일보 직전인데 말이야.

솔직히 지랄도 병이라고 왜 존나 나를 뒤로 미루는 건지는 모르겠어. 걍 정부가 좆같은 게 맞는 거 같다. 그래서 나 화성 못 갈 것 같다.

니는 제발 좀 살라고 니 폰으로 구조 우주선 신청 해 뒀다. 니 폰으로는 구조 우주선 신청이 되더라고. 지금 온 것 같은데 화성 가서 잘 먹고 잘살아 좀.

솔직히 화성에 가면 다시 농구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라도 재밌게 해라.

-성준수가-


"이게 뭐야..."

나는 결국 손에 힘이 풀려 그대로 태블릿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준수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물론 성준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떻게 너 없이 살 수 있겠냐고.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을 미동도 없이 그저 누워만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감정은 충격.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배신감. 세 번째로 느낀 감정은 내가 깜빡 잠에 들어 너를 놓쳤다는 자괴감이었다. 나는 너랑 함께라면 죽어도 상관없었다. 더 살아봤자 별다른 의미는 없었기에.

2299. 12. 24.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기나긴 밤을 지새웠다. 세수를 하러 작은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다크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연료가 부족하다는 알림만이 귀를 맴돌았다. 어쩔 수 있겠나. 5년이면 많이도 버텼다. 태양열 전지와 남아있는 비행기 특수 연료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었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이었다. 남아있는 연료는 고작 2통. 태양열 전지까지 빡세게 돌리면 아마 2월 초까지는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실내에 있는 연료 충전 장치에 새 연료를 꽂고 태양열 전지를 풀로 가동시켰다. 할 것을 다 하자 어제 떨어뜨린 태블릿이 보였다.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아작이 났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망치로 두드려 팬 것만 같았다. 나는 태블릿을 대충 들어 쓰레기통으로 던져 골인 시켰다.

여분으로 있던 새 태블릿을 들어 성준수의 클라우드로 들어갔다. 어제 보았던 너의 마지막 편지만 끊임없이 돌려보았다.


준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11살 때 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이미 장마로 인해 모든 게 아작나있는 지구에서, 성준수는 꿈을 품으며 농구에 도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구 밖에서 살면 비가 오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우주선을 만드는 과학자를 꿈꿔왔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나는 과학고로, 너는 원중고로 갈라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학교가 가까워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8살 때, 과학고를 조기 졸업해 남들보다 일찍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어렸을 적 꿈은 바뀌지 않았고, 나는 우주센터를 목표로 이를 갈고 공부했다. 남들이 다 기피하는 대학원도 우주센터를 위해 들어갔다. 운이 좋게 석사 논문이 잘 받아졌고, 어린 나이로 당당히 우주센터에 취직했다.

준수는 말 없이 원중고에서 지상고라는 부산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오랜만에 기분도 낼 겸 준수랑 농구 한 판 하려 학교 앞에서 준수를 기다렸던 내게 키가 2미터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말해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말 안 하고 가 버린 게 속상했다. 하지만 농구를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 간 것이었으니 준수 입장에서는 전학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겠나. 나는 엘리트 스포츠라고는 하나도 모르는데.

준수의 학교가 결승에 갔다길래 버스를 타고 경기장으로 찾아가 경기를 구경했다. 와, 준수 저런 애였구나. 코트 위의 준수는 내가 알던 준수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정말 많이.

준수는 대학도 잘 갔다. 농구로 괜찮은 1지망 학교도 가고. 대학리그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이 사이에 전보다 훨씬 다른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1층 건물이 반이나 잠길 만큼. 준수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와 4학년이었을 때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로 육지가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고지대로 대피했고, 생사가 갈리는 상황에 드래프트를 할 리가 없었다. 나는 센터에서 1주일 동안 몬스터를 꽂으며 야근을 해, 이 지구에서 도망칠 프로젝트를 열심히 마감을 했다.

첫 번째의 구조 우주선이 발사되며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같은 고위급 간부들 50명이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향했다. 첫 발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점점 더 많은 발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인들을 화성으로 대피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형 구조 우주선을 타고 화성으로 향했고, 내게도 우주선이 배정되었다. 나는 성준수에게 전화를 걸어 몇 번에 배정되었는지 물었다. 화성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들은 랜덤으로 추첨을 돌렸기에 오로지 운으로만 승부했다. 성준수는 운이 좋게도, 341번째 우주선에 배정되었다. 1달에서 1달 반 사이에 지구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성준수의 순번은 자꾸 밀리게 되었다. 나는 관련 부서에 물었지만,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바닥으로부터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이건 비리다. 비리가 분명했다. 말도 안 된다. 끝도 없이 밀리는 게 가능한 것인가. 누가 분명히 돈을 처먹고 많이 내는 순으로 우주선을 배정시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 질 수 있는 걸까.

웃겼다. 성준수가 가족으로 등재되어있지 않아 같이 타고 갈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75%가 물에 잠겼다. 바닥에서 차오르는 물은 점점 남아있던 사람들의 목을 천천히 죄여갔다.

성준수의 구조 우주선을 기다리다 결국 우주센터마저도 잠기기 시작해 많은 센터 직원들이 화성으로 떠나 그 곳에서 일하였다. 모두가 가족과 같이 화성으로 떠났을 때, 나만 혼자였다. 그래서, 나도 성준수를 향해 떠났다.

그 후로부터는 성준수와 계속 같이 있었다. 이번에는 순번이 밀리지 않길 바라며, 부디 화성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라며. 꼭 살아남기를 바라며.

"..."

나는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입을 서서히 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성준수."

2300. 1. 1.

새해가 밝았다. 2995년에 지구로 온 것 같았는데, 거의 5년이 다 되어갔다.

2300. 2. 5.

"연료 고갈까지 3시간 1분 남았습니다."

"전에 써놨던 일지 다 백업해놨어?"

"네. 클라우드에 모두 백업해두었습니다."

내 모든 기록들이 백업이 된 것을 확인하고, 성준수의 몇 안 되는 기록들도 싹 다 백업해두었다. 죽으면 못 볼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몸은 모든 기록들을 다 백업해두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조재석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태블릿의 전원을 꺼두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팬트리에서 아껴두었던 간식을 꺼내 봉투를 뜯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소비기한이 3년 전 이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다행히도 관리를 잘 해두었던 덕분에 맛의 변화는 딱히 없었다.

와작-

이제 이 지구도 마지막이었다. 윤슬 때문에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도. 바다 사이에 힐끗 보이는 고층 건물들의 꼭대기도. 노을이 질 때 가장 아름다운 수평선 저 너머도.

"연료 고갈까지 10분 31초 남았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낙하지점은 어디 쯤이야?"

"낙하지점은 태평양의 동쪽, 아메리카 대륙과 320km 떨어진 곳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연료 떨어지면 바로 추락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태블릿을 켜 마지막 일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준수야, 네가 이걸 볼 리는 없겠지만 만약 이걸 본다면 내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지금은 널 원망하는 마음을 버렸어. 그냥, 날 살리고 싶었다는 마음으로만 여길게. 근데 난 이제 끝인가 봐.

사실 무섭지는 않아. 이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몇백바퀴 돌면서, 인상 깊은 경험도 하고 기나긴 장마가 끝나는 것도 봤으니까.

너도 이 장마가 끝이 난 걸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화창한 햇살은 항상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어. 우중충하고 춥기만 했던 그때와는 달라.

아침햇살이 얼마나 좋은지, 넌 모를걸.

최대한 빨리 지구로 오겠답시고 왔는데 네 흔적을 한 개도 찾지 못해서 너무 아쉬워.

네 마지막은 어디였는지, 어땠는지. 물에 잠길 땐 무섭지 않았는지가 너무 걱정돼.

하하 준수야, 이제 진짜 나 죽나 봐. 이 넓은 바다에 가라앉아서.

폐에 물 들어가면 아프다던데. 괜찮겠지?

벌써 비행기가 덜컹거려. 약 1분 남았대.

내가 죽어서 물방울이 된다면, 바닷속으로 들어가 스러져버린 너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비행기가 세차게 덜컹거림과 동시에 귀를 울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o

O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마치 이 깊은 바다의 끝이 보일 것 처럼.


마지막 활공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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