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 찰나의 난발
나무 아래에 꽃송이는 묻히지만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최종수의 경우,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동네에서 무섭기로 소문이 자자한 어느 할머니에게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할머니는 늘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못된 짓을 보면 상대가 누구건 버럭 호통을 쳤다. 희한한 건 누구도 그에게 대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는 점이었다.
최종수는 어른들이 말하는 요즘 애치고 예의가 바라 그 할머니의 호통을 들은 적은 없었다. 가끔 지나가다 길에서 담배 피는 아저씨나 어린 애들을 괴롭히는 형들이 할머니 앞에서 맥 못 추는 모습을 봤을 뿐이었다. 그 할머니와 최종수의 눈이 마주친 것도 그날 어머니와 함께 나온 산책이 처음이었다.
“아가, 전생에 멀 해서 운이 꼬였노.”
최종수는 보고 들은 것이 있어 그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보면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눈은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한 마귀 같은 눈이 아닌 자애로운 눈이었다. 물론 최종수가 어떻게 느꼈든지 제 자식을 향하는 말에 민감하지 않은 부모는 없어서, 최종수의 어머니는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고 그 할머니는 순순히 답해주었다.
“야는 산 사람과 맺어질 팔자가 아이다. 그 맺어질 아 팔자도 만만찮다만…”
“네?”
“그래도 다행이다. 야가 자네하고 자네 남편 닮아서 제 짝에게는 상냥하겠네그려.”
산 사람의 반대말이 죽은 사람 말고 더 있겠는가, 최종수의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광인이 막 지껄이는 말로 듣고 흘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그 말에서 뭔가 느낀 것인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최종수의 작은 손을 꼭 쥐기만 했다. 할머니는 몸을 낮춰 최종수와 눈높이를 맞췄고 어머니를 쏙 빼닮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가,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있다. 명심하그라.”
그날 뒤로 최종수는 그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아예 동네에서 나갔는지 다른 사람들도 요즘 그 할머님이 안 보인다고 조잘거렸다.
기이한 것은 동네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 할머니가 어디서 왔는지는커녕 어느 집에 살았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말씨는 경상도 사람 같았다고 누가 말했다. 단체로 귀신이라도 본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는데, 최종수는 그 할머니와 연이 있었던 이들 중 가장 기묘한 경험을 한 인물이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가슴 속에 있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최종수가 영안靈眼이 트여서 각종 잡귀에게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수는 본인에게 다행스럽게도 영적인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는 것들만 알고 자랐다. 2m가 넘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무럭무럭 자라서 1.9m를 넘겼다. 아버지의 강골 체질 덕인지 흔한 잔병치레도 하지 않았다.
“햄들!! 비상 사태!!”
최종수가 처음으로 귀신을 본 것은 그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고 맞이한 봄날, 중고거래로 구한 즉석사진기로 찍은 한 사진을 봤을 때였다. 본래 꽃이 만개한 나무와 그 위의 하늘만을 담아야 했던 사진에는 웬 갈색 머리 남자도 들어 있었고, 어느새 나무 앞에 나타난 그 남자는 얼빠진 몸짓을 하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있다.’
어째서 옛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났다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는지 최종수는 알지 못했지만,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적지 않은 사람이 지나다니던 길에서 그 남자에게 반응한 것은 최종수 한 명뿐이었다.
“저승사자?”
“차사라고도 하죠.”
최종수의 즉석사진기에 찍힌 남자, 정확히는 최종수 때문에 묶인 것 같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자신을 그냥 귀신이 아닌 저승사자 기상호라고 소개했다. 미디어 속 이미지와 달리 기상호는 새카맣지도 창백하지도 않았다. 옷도 길다란 로브나 두루마기가 아니고 캐주얼한 녹색 티셔츠와 청바지여서, 액면가와 합지면 고등학생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생김새였다.
“저승사자면 높은 귀신 아냐? 근데 왜 이렇게 된 건데.”
“지금 햄들이 알아보러 갔어요.”
“햄들?”
“아, 못 알아듣나? 형들이요. 3인 1조로 다니거든요.”
평범하게 살아 있는 인간은 저승사자를 인식할 수 없다. 저승사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단지 꽃나무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기상호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고 했다. 최종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상호!”
“태성햄! 다은햄!”
잠시 후 기상호는 누가 온 것을 느꼈는지 이름을 외쳤다. 최종수의 눈에는 태성햄인지 다은햄인지 모를 다른 저승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잉잉 우는 소리를 내는 기상호를 통해 누가 왔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기상호의 동료들은 손을 휘휘 저어 최종수가 그들을 못 본다는 것을 확인했고, 기상호에게 그들이 알아낸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런 사례가 없었다고요?”
“그래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음.”
“맙소사.”
“일단 그 카메라에 붙어 있으랬다.”
최종수의 귀에 들리는 것도 기상호의 목소리뿐이었다. 물론 그 말투와 어휘로 일이 잘 안 풀렸다는 것, 혹은 귀찮아질 것이라는 건 예감할 수 있었다. 동료 중 한 명은 최종수의 뺨을 콕콕 건드려보았는데 최종수에게는 귀 뒤쪽으로 넘긴 머리카락이 살짝 움직이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못 느낄걸요.”
“맞나.”
“뭐야, 누가 뭐 했어?”
“아무것도요!”
시치미를 뚝 떼는 기상호의 표정이 최종수는 왜인지 얄밉게 느껴져서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그때의 둘은 몰랐지만 최종수의 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기상호의 머리통을 한 번 살렸다. 최종수는 무거운 카메라를 든 채 몇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 최종수 씨.”
“뭐.”
“아무래도 당분간 저를 데리고 있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최종수가 문제의 사진과 즉석사진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뒤, 기상호가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기상호는 즉석사진기에 묶인 것 같았다. 즉석사진기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가 없었다. 당사자가 표현하기를 자기 옷자락을 붙들고 안 놓아주는 것 같은 느낌.
“사진기만 손을 통과해버리네.”
기상호가 즉석사진기를 들고 다니려고 하면 손을 슥 통과해버렸다.
한편 최종수는 그 즉석사진기로 집의 다른 물건들을 찍어보았다. 기상호가 그래도 더 찍히는 것 없을 거라고 했고 그의 말대로 새로 나온 사진들에서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기상호와 함께 찍혔던 꽃나무 앞으로 돌아가 다시 그것을 찍었을 때도 꽃나무와 그 주변의 풍경만이 찍혔다.
“너 왜 그 앞에 있었던 거냐?”
“저승사자도 꽃놀이는 올 수 있거든요.”
그러니 최종수는 기상호가 왜 거기에 있어서 이 상황이 되었는지를 묻게 되었다. 기상호는 자기가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억울한 말투로 저승사자의 일과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승사자의 기본 업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답게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저승사자는 지령을 받고 출동하는 일보다 이곳저곳에 잠복해 있다가 죽는 사람이 생기면 즉각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럼에도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 역시 사실이므로, 죽는 사람이 많지 않은 여유로운 날에는 꽃놀이 등을 즐기러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기상호도 동료들과 같이 꽃 좀 보러 왔다가 최종수에게 걸린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고,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중고거래 앱으로 샀는데.”
최종수는 중고거래 앱의 거래 기록을 보여주었다. ‘시스터샤크’라는 판매자와 거래했는데, 이상한 점은 그와 거래하기 위해 만들었던 채팅방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 리가 없는데.”
“뭐?”
“아니, 이거 돈 주고 살 물건은 못 되는 것 같은데요?”
기상호는 닉네임을 보고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즉석사진기로 타깃을 바꿨다. 그는 그 즉석사진기의 상태가 돈 주고 살 수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땅바닥에 한 번 이상 굴러서 난 듯한 흠집과 붙은 지 오래 된 듯한 자그마한 팬시 스티커들이었다. 상어, 농구공, 별 등 모양도 다양했다.
“…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잠깐, 말이 그렇게 돼요? 어어, 손! 손!”
최종수는 자신의 안목을 욕하는 말이 되는 기상호의 말에 손을 올렸다가, 자신이 어째서 다른 물건들을 두고 기상호 말마따나 저 잘 쳐 봐야 C+급인 물건을 골랐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 만나서 거래하셨어요?”
“어.”
“어떤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불과 어제 만나서 즉석사진기를 건네준 ‘시스터샤크’의 모습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진 촬영이 영혼을 가둔다는 속설 아시나요?’
‘네?’
‘그건 틀렸지만, 마음이 담긴 물건 중에는 그 마음의 주인을 가두는 것도 있지요.’
기억에 남은 것은 오직 목소리. 여자의 것이었는데, 우아한 말씨였지만 억양이 조금 있었다.
기상호의 것과 같은 억양.
“너 어디 출신이냐?”
“살아 있었을 때를 말하는 거라면, 양산이요.”
“경상남도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최종수가 거래 상대의 목소리를 녹음해둔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거래 상대 한 명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이분한테 다시 연락해 봐요.”
“그래.”
안 그래도 찝찝해진 최종수는 ‘시스터샤크’와의 채팅방을 다시 만들려고 했다.
그 순간, 앱이 갑자기 ‘응답하지 않습니다’라는 팝업을 남기고 꺼져 버렸다. 팝업을 없애고 다시 앱을 켜 똑같이 시도했지만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
“너도 따지자면 귀신 아니냐?”
“…….”
최종수의 반문에 기상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최종수는 기상호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싸한 인상임을 깨달았다. 우연히 찍힌 사진 속 기상호는 누구와 대화하는지 웃는 얼굴이었고 최종수를 따라 집에 들어온 후에도 어두운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기본값이 어두워 보였다.
“저승사자에 대한 언어폭력은 저승윤리협회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X랄.”
그러나 그 값이 유지된 시간은 짧았다. 기상호는 최종수 듣기에 순 멍청이 같은 말로 응수했고 최종수는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결국 ‘시스터샤크’를 통한 추적은 흐지부지되어 최종수는 즉석사진기를 서랍 안쪽에 봉인하고 방법이 나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기로 했다.
최종수는 사진작가로서 밖에 있는 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많았다. 저승사자가 들어앉든 갈색 머리 인간이 들어앉든, 더 쓰지 않는 즉석사진기가 생기든 그의 생활 패턴에 큰 변화는 안 생긴다는 뜻이다.
“다녀왔어.”
“어서 오세요.”
최종수가 돌아오자 기상호는 보고 있었던 휴대전화를 껐다. 기종은 무려 스마트폴더, 폴더블 스마트폰 말고 폴더폰을 개량해 만든 폰이었다. 그 스마트폴더는 저승사자가 되면 지급받는 기본 물품 중 하나로 기상호는 저승사자가 된 지 약 1년쯤 되었기에 바꾸지 않고 쓰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냐?”
“햄 인스타 염탐이요.”
“당당히 보고 있었으면서 염탐은 개뿔.”
“히히.”
기상호는 천생 인도어파인지 최종수가 집에 없는 동안 혼자서 잘 노는 모양이었다. 최종수가 돌아오면 TV나 스마트폴더를 보고 있었다. 그가 스마트폴더로 주로 하는 일은 최종수의 인스타그램 감상. 최종수의 인스타그램은 주인의 작은 갤러리와 같아 사진과 간결한 줄글의 조합만으로 10K 단위 팔로워를 찍었다.
“작업 볼 거야?”
“네.”
“들어와.”
최종수는 카메라와 함께 작업실로 들어갔다. 기상호는 최종수를 따라 작업실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 사진도 아니고…”
최종수가 매일 촬영하고 가져오는 사진들은 노트북으로 들어가 다양한 이름의 폴더로 분류되었다. 최종수는 어제 은사의 추천으로 참여하기로 한 사진 전시회에 출품할 사진을 고르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가지 않고 전시회에서만 공개될 사진이어서 기상호도 흥미를 더 가졌다.
“하아……”
전시회의 취지는 10대와 20대를 위로하는 것.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어려운 주제였다. 최종수는 손을 이마에 올렸다가 작업실 책상에 올려둔 진통제 통으로 뻗었고 기상호는 잽싸게 부엌에서 컵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저승사자도 귀신이라고 벽을 통과해 다닐 수 있었다.
“많이 고민되세요?”
“보다시피.”
기상호가 처음 최종수의 작업실에 들어왔던 날에도, 최종수는 작업 때문에 두통을 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한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보다 못한 기상호가 그에게 속사포로 말을 뱉으며 자고 일어나서 하라고 강권했고, 다음 날 일어난 최종수는 기상호의 작업실 출입을 허락했다.
“누구는 죽지 못해서 살았는데…”
“뭐?”
“아. 제가 전에 만났던 망자가 그랬어요.”
10대와 20대 시절을 고통스럽게 보내서 죽고 싶었다. 기상호가 전하는 말은 무섭도록 담담했다.
“… 다 그랬다는 거야?”
단 최종수는 그 말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의 10대 시절이 평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시절은 아니었다.
‘저 좀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누군가 최종수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는 첫 번째로 열 살이 차기도 전에 만났던 한복의 할머니, 두 번째로 중학생 때 어느 소년이 내밀었던 카메라와 그것으로 찍은 사진을 말할 것이다.
기상호의 말은 최종수의 작업 방향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팔청춘에서 스물로 넘어가도록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전시회. 죽은 사람을 인도하면 그만인 저승사자에게는 와닿지 않는 주제였을지도 모른다고 최종수는 감히 생각했다.
“그 망자 말고 다른 사례는 없었……”
“…….”
그러나 그 생각이 말의 형태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시 묻는 말은 기상호의 꽁꽁 얼어붙은 낯에 미끄러졌고, 최종수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가 기상호에게 작업실 출입을 허락한 이래 본 적 없는 서슬 같은 시선과 대조적으로 굳게 다물린 입술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긴 그렇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까…”
“기상호.”
“저 오늘은 여기까지만 볼래요.”
“뭐? 잠깐―”
기상호는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어차피 작업실 밖으로는 나가도 집 밖으로는 못 나가겠지만, 최종수는 불안해졌다. 본래 기상호는 저승사자고 순리대로라면 어디에 묶이는 일 없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최종수가 작업실에서 나왔을 때 기상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수에게는 고등학교 동창회 약속이 있어 기상호의 행방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여기야, 종수.”
“어.”
약속 장소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최종수가 중학교 시절부터 깊게 어울려 온 친구 중 한 명, 이규였다.
“잘 지냈어?”
“어.”
“그런 것치고 표정이 안 좋은데.”
“잠을 좀 설쳤더니.”
최종수는 기상호가 사라지고 작업실에서 잠들었다. 그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처음 집을 구할 때는 작업실을 곧 침실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업실과 침실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견을 수용해 집을 골랐고 작업실에는 간이침대를 가져다놓았다. 그 간이침대가 더 침대처럼 쓰였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잠을 설쳤다. 기상호가 그를 재운 이래 없어진 줄만 알았던 불면이 그를 덮쳤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 동거인하고 좀 싸웠어.”
“동거인?”
최종수는 이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본래 이규는 입이 천 근 같아 예전부터 최종수가 몇몇 고민에 한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내가 이번에 전시회 출품하는데, 의견이 좀 갈렸어.”
“같은 문파야?”
“아니.”
“그런데 신경이 쓰여?”
이규의 말은 최종수의 머리에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기상호는 같은 문파, 본래 의미로 작가가 아니었다. 사실, 관람객도 되지 못할 존재였다. 어차피 떠날 기상호의 언어는 최종수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 기상호가 인스타그램에 무엇을 남기겠는가, 현세에 무엇을 남기겠는가. 최종수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기상호를 매우 의식하고 있었다.
“… 그러게, 왜 신경 쓰이지.”
단지, 기상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만으로 의식하는 것도 이상했다. 물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꼈을 때 상대에게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최종수가 100% 잘못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최종수의 말투가 본래 날카로운 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상호는 까불거리고는 했다.
“죽지 못해서 살았던 시간…”
최종수는 그의 10대 시절을 다시 생각했다.
사람들은 최종수를 보고 아버지의 우월한 신체 조건과 중등부 시절까지 쌓인 탄탄한 실력, 우승 경험을 뒤로하고 어째서 사진작가가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소수지만 어머니의 아름다운 미모와 키즈 모델 경험이 있으면서 연예계가 아닌 농구를 선택했던 것, 끝내는 사진을 선택한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시선이 괴로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감사해요, 햄!’
그러다 사진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중학생 무렵, 기이한 할머니를 만났던 동네에 한 번 더 갔었다. 그 동네에서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복사꽃 아래 한 소년이 서 있었고, 그의 부탁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 번 더 찍고 싶다, 한 번 더 소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이규, 나 가야 할 것 같다.”
“음? 그래. 나중에 연락해.”
생각을 마친 최종수는 곧바로 동창회 장소를 빠져나왔다.
기상호와 대화를 해야 했다.
“기상호, 집에 있어?”
다행히, 최종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상호는 평소처럼 거실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TV도 스마트폴더도 아닌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종수햄.”
“할 말이 있어.”
“죄송해요.”
“미안해.”
동시에 나온 말에 기상호와 최종수는 놀라움을 숨기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아니, 나도… 네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그거… 제 얘기예요.”
이내 기상호는 자신이 그랬던 배경을 밝히기 시작했다.
“저 사실 살아 있어요.”
그는 망자가 아니었다.
그의 10대와 20대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님과 형, 누나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깊은 고뇌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사자조차도 그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워 고뇌가 더해졌고,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 상태에 빠졌다. 스물세 살의 일이었다.
어째서 그가 저승사자가 되었는지는 몰랐다. 저승사자에 대한 것도 그의 동료로 배정된 다은과 태성에게 들은 것만 알았다. 그래도 저승사자로 사는 것이 보람 있어서, 죽어서 완전히 전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직업 하나 구하기 힘드니까, 삶의 수단 하나 구하기 힘드니까,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은햄과 태성햄 만났어요. 그거, 제가 쓰던 물건에 묶인 거래요.”
“네가 쓰던 물건?”
“그 즉석사진기 제 거였어요. 시스터샤크는 제 누나가 자주 쓰는 닉네임이고…”
마음이 담긴 물건 중에는 그 마음의 주인을 가두는 것도 있다.
“햄이 부러워졌어요.”
최종수와 함께 살면서, 기상호는 밝은 화면의 인플루언서 뒤에 있는 어두운 작업실의 사진작가 최종수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잠조차 자지 않고, 약을 먹어가며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작업실 벽에 머리만 통과시켜 훔쳐보다가 완전히 통과해 최종수를 재운 이유였다.
동시에, 10대를 지나 자신은 다 누리지 못한 20대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최종수가 부러워졌다.
“기상호, 내 10대를 위로해준 건 너였어.”
“네?”
“네가 사진을 보고 고맙다고 했잖아.”
그 최종수의 모습은 기상호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의 기상호.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시기가 있댔어.”
최종수는 20대에 꽃을 피운 자신과 다른 기상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기상호의 인생이 꽃피지 않는다고 폄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알았다.
“종수햄.”
“어.”
“그 즉석사진기, 제 육체로 가져다주실래요? 그러면… 저 살아난대요.”
다은과 태성은 돌아가기 전 기상호에게 알려주었다.
즉석사진기를 육체에 가져가면 영혼이 돌아가 살아날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죽어서 저승사자로 계속 지내게 될 것이다.
“약속할게.”
최종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기상호는 그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기상호의 육체는 서울의 병원에 있었다. 기상호는 서울에 소재한 어느 대학에 다니던 중 사고를 당했고, 1년 가까이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연락드린 최종수입니다.”
최종수는 다시 한 번 중고거래 앱의 ‘시스터샤크’와의 채팅방을 만들었고, 정상적으로 메시지가 전송되는 것을 확인했다. 누가 어떻게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상호의 누나의 계정이 맞았다.
기상호의 가족들은 막내가 사고를 당한 현장에서 유일하게 없어진 물건인 즉석사진기를 줄곧 찾고 있었다. 경찰이 현장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해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보냈다. 그 즉석사진기는 기상호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행복해 보여서, 기상호의 누나가 사 준 물건이었다.
“틀림없네예. 울 막내가 꾸민 거….”
기상호의 누나는 최종수가 내민 즉석사진기를 가슴으로 가져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기상호의 형은 여동생을 달래려고 했지만 눈물의 전염성은 무시무시했다.
“기상호.”
최종수는 기상호의 손을 감쌌다.
그러자 의료기기 화면의 활력 징후가 생명력을 띠었고, 기상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호야!!”
“오빠야, 너스 콜!”
“그, 그래. 니는 어무이 아부지 불러온나!”
기상호의 형과 누나가 감격하며 해야 할 일들을 하는 사이, 최종수는 기상호의 손에 살포시 힘을 주었다.
“기상호, 나 알아보겠어?”
“… 종수햄.”
“그래, 기상호.”
최종수를 담은 기상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최종수는 재촉하지 않고 기상호가 다음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고마워요.”
이윽고 기상호가 꺼낸 말은 짧았지만, 그 마음은 진하게 느껴졌다.
“이제 알 것 같다. 10대와 20대를 위로하는 법.”
“정말요?”
“전시회 보러 와. 기다릴게.”
산 사람이 아닌 자와 맺어질 팔자. 그 말이 저승사자 기상호와 맺어진다는 의미였다면, 산 사람 기상호와 다시 맺어질 의미였다면, 아주 정확했다고 최종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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