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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상] 사랑받는 것

그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여

Idyll Garden by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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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서쪽 바다에서는 날이 맑아질 때마다 조형 부족의 군가가 울려퍼졌다.

“잡았다!”

“이번 녀석은 꽤 큰데?”

서쪽 바다에 언제부터인가 나타나기 시작한 괴물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괴물들은 조형 부족의 주 사냥감이 되었다. 평화를 사랑해 싸움을 못하던 조형 부족이 그들을 위협하는 괴물들에 맞서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한 ‘영웅’의 출현이 있었다.

“병찬 형!”

박병찬.

그는 조형 부족에게 검술을 가르쳤고, 그 검술은 조형 부족의 바다 괴물 사냥 기술로 발전했다.

부족 사람들이 바다로 나왔을 때 괴물이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면, 박병찬은 기꺼이 배를 몰고 나서거나 배에서 뛰어올랐다. 그가 탄 배는 뒤집히는 일이 없었고, 하늘에서 바다 괴물을 향해 내지르는 걸음과 휘두르는 검은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조형 부족의 군가는 박병찬과 그를 따라 싸우는 이들을 위해 지어졌다.

그야말로 ‘영웅’의 이야기.

“병찬 형은 바닷속에서 왔을 거야!”

“에이~, 하늘에서 오지 않았을까?”

“그치만 바다 괴물들이 병찬 형만 나타나면 물러나잖아!”

그렇다면 그 ‘영웅’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조형 부족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얘들아~, 간식 먹어야지!”

“네에―!”

그러나 아이들답게, 그 관심은 쉬이 사라지고 수수께끼로 남았다.

 

“형, 정말 바닷속에서 온 거예요?”

“설마.”

“그쵸?”

박병찬의 배 ‘상호호’의 선장 이초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박병찬이 싸울 때마다 상호호의 이동과 선원들의 움직임을 책임졌고, 박병찬이 조형 부족에 나타났을 때를 기억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의 동심을 지켰다.

“사랑받을 뿐이야.”

아이들이 저마다 상상하는 이야기에 대해, 때로는 본인에게 직접 건네는 질문에 관해 박병찬이 내놓는 대답은 늘 한결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반드시 목에 건 갈색 로켓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그런 답에는 이런 질문이 따라오기 마련. 박병찬은 분명 조형 부족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사랑받는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이초원이 박병찬을 처음 만났을 때―조형 부족이 그에 대해 알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가지고 있는 로켓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고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 안은 채로 그랬다. 방금 전 로켓을 가슴에 딱 붙인 행동하고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초원아, 형도 간식 먹어야겠다.”

“아~, 또 이러시네!”

박병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초원은 저 로켓을 박병찬에게 준 이가 그 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름은 아마도, 상호호의 ‘상호’.

박병찬이 그를 위한 배에 직접 붙인 이름이 단순한 이름일 것 같지는 않다는 추론이었다.

 

 

“박병찬이라고 합니다.”

바다 냄새, 더해서 피 냄새. 박병찬이 나타났을 때 풍기던 냄새였다.

낯선 배에서 내린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집이어도 좋으니 잠시 쉴 곳 한 칸만 얻을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청했다. 조형 부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만큼 선함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그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 집을 내주었고, 그는 그곳에 짐을 풀었다.

그가 가지고 온 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항해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외하면 가장 눈에 띈 건 그가 배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보인 커다란 검이었다. 그 검을 본 부족 사람들은 의문을 느꼈다.

“이곳에는 괴물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더군요.”

박병찬의 말대로, 조형 부족이 사는 바닷가에는 언제부터인가 괴물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 그 괴물들의 발원지는 당연히 바다. 배를 타고 나가지 못하게 해일을 일으키고 폭우를 부르니 어업을 생업으로 삼은 조형 부족에게는 큰 문제였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요?”

그런데 그 괴물들을 뚫고 어떻게 왔는가. 당시 박병찬에게 부족을 안내해 줬던 이초원은 물었다. 박병찬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검신을 감싼 천을 풀었다.

“사랑받는 사람이라서요.”

날이 시퍼렇게 선 검에서는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졌고, 박병찬이 천으로 한 번 쓰다듬자 비늘 몇 개가 묻어나왔다. 박병찬이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명백해졌고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초원은 족장 이규후에게 달려갔다.

“괴물들을 퇴치해 드릴 테니, 저를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박병찬은 조형 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그의 첫 항해에 나타난 바다 괴물들을 썰었다. 나아가 자신의 검술을 조형 부족에게 알려주었다.

조형 부족은 처음에 망설였지만, 이규후가 박병찬을 인정하고 젊은이들을 손수 뽑아 그의 밑으로 보내자 점점 용기를 얻었다. 이초원처럼 자발적으로 박병찬에게 다가간 이들도 있었다. 이규후는 조형 부족이 이웃 부족들처럼 더 먼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박병찬처럼 적극적인 젊은이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형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음? 말하지 않았나?”

어느 날 이초원은 박병찬에게 물었다. 전에 듣기로 바다 너머에 또 다른 땅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조형 부족과 이웃한 원중 부족과 장도 부족에는 그 땅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섞여들었다. 하지만 이초원이 궁금한 것은 박병찬이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고 무엇을 하다 왔는지였다.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박병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건너온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이상 이초원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사는 싸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싸우지 못하는 전사, 아니, 싸울 수 없게 된 전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 자식들…!”

“반항이 심한 놈들이로군.”

“커헉!”

감옥에서 울리는 매서운 채찍 소리를 들으며 박병찬은 그런 생각이나 했다. 그는 한때 부연 부족 제일의 전사를 꿈꿨고, 그렇게 될 거라고 칭송받았던 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적들에게 잡힌 무력한 일반인이었다. 아니, 잡히기 전부터 전사라고 부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박병찬의 오른쪽 다리는 상관의 무모한 명령을 받고 이뤄진 싸움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예전만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전사의 자격도 잃었다.

얼마 안 지나 부연 부족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상대였던 태초 부족은 수많은 부연 부족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들은 특히, 수많은 동료들을 해친 부연 부족의 전사들을 요구했다. 박병찬만큼 태초 부족 전사들을 휩쓸고 다닌 이는 없었다. 설령 그가 지금은 싸울 수 없는 몸이 된 지 오래라고 해도 태초 부족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박병찬, 넌 분하지도 않냐?”

“…….”

“야, 잊었어? 쟤 다리가 왜 저렇게 됐는지.”

채찍에 맞은 옛 전우는 쓰러져 끌려 나갔고, 박병찬 무리를 관리할 태초 부족 놈도 자리를 비웠다. 박병찬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동료들이 저들끼리 속삭이는 걸 들으며 그는 오른쪽 다리를 다시 매만졌다. 상관의 무모한 명령, 희생당한 전우들, 독화살.

“찾아내서 죽일 거다….”

“뭐, 뭐?”

박병찬은 태초 부족에게 유감은 없었다. 싸우면 패배자가 생기고, 부연 부족이 그 패배자였을 뿐이다.

그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부연 부족이었다. 앞날이 창창한 전사들을 무모하게 갈아 넣은 결과가 박병찬의 추락과 부족 전체의 패배였다. 만약, 그에게 상관을 베고 전우들을 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태초 부족으로 끌려온 부연 부족 전사들의 다리에는 사슬이 걸렸다. 걷는 데에는 방해되지 않지만 뛸 수는 없게 하는 물건.

“우리 집에서 새로 일하게 될 녀석이다.”

박병찬의 거취는 빠르게 정해졌다. 그는 어느 부잣집의 하인이 되었다. 옛 전우 한 명 없이 혼자 일하게 됐지만 외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끌려오면서 태초 부족이 퍼부은 욕과 저주를 들었다. 말이 좋아 하인이지 실제로는 노예 취급일 거고,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을 것이다.

“내는 상호. 상호예요.”

그러다 ‘상호’와 만났다.

상호는 집 주인인 남자의 옆에 서 있었다. 복장을 보니 하인은 아니고 주인과 가족인 것 같았지만, 둘의 얼굴은 닮은 구석이 없었다.

박병찬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자, 상호의 갈색 눈이 그의 까만 눈과 마주쳤다.

박병찬은 상호의 시선이 자신을 훑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상대를 꼼꼼히 눈에 새기겠다는 듯 그 눈동자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부드럽게 움직였는데, 관찰당하는 것에서 나오는 불쾌감과 다른 감정이 가슴께에서 스물스물 올라왔다.

그날, 독화살을 맞고 퍼지던 독이 선사한 감각과 비슷하게―

“마이 아파요?”

“……!”

상호의 시선은 어느새 박병찬의 오른쪽 다리에 꽂혀 있었다. 동정에 가까운 듯한 말투와 다르게 박병찬의 감정은 머릿속을 잠식했고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선사했다.

‘이 녀석― 아니, 이건 뭐지?’

상호는 미동 없는 표정으로 말을 고르더니, 몸을 돌리고 남자에게 부탁했다.

“이 형, 제 방에 주세요.”

 

박병찬은 의심 속에서 상호의 방까지 따라갔다. 상호에 대한 생각으로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 미안해?”

“근데 진짜 아파 보여서…”

상호가 방에 들어가고 처음 꺼낸 말은 의외로 사과였다. 제 방 침대에 앉은 상호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박병찬에게는 낯선 행동이었다. 상대의 약점을 드러낸 것을 사과하는 것, 전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의 약점을 거침없이 파고들어야 전사답다고 할 수 있었다.

“됐어. 사실이니까.”

박병찬은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언어를 꺼낼 수 있었다.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일부러 움직여 보였다. 시간 때문인지 많이 무뎌지긴 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도 여 사람 아니에요.”

“뭐?”

“영윤 부족, 알아요?”

이어진 상호의 말은 조금 뜬금없었지만, 박병찬의 시선을 다시 끌기엔 충분했다.

영윤 부족, 바다를 숭배하는 부족으로 3년 전 다른 부족과의 전쟁으로 멸망했다고 알려졌다. 부연 부족과는 교류가 없었지만 부연 부족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이곳저곳 정찰하던 걸 생각하면 언젠가 부딪혔을지도 몰랐다.

“난리 통에 가족들하고 헤어졌어요.”

전쟁으로 멸망한 부족의 결말은 뻔했다. 죽거나, 흩어지거나. 그래도 상호는 박병찬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항복해도 재수 없으면 박병찬처럼 끌려오게 되는 게 전쟁인데, 목숨을 부지하고 부잣집 도련님이 되지 않았는가. 박병찬은 다시 비뚤어지려는 속내를 숨겼다.

“저 아재가 거둬주긴 했는데…, 속내가 기분 나빠가.”

“속내?”

그때 상호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속내는 결국엔 스며나왔을 것이다.

“오만해요.”

오만하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고아를 거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현이었다. 말투가 오히려 저렇게 말하는 상호가 오만해 보이는 투였다. 다시금 박병찬의 마음이 비뚤어지려는 순간, 상호의 목소리가 박병찬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뭣도 모르면서 모든 걸 자기 아래에 두려는 게……”

갈색 눈동자가 늦은 밤 깊이를 잊는 바다처럼 새카맣게 물들었다.

박병찬은 전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에 무심코 침을 삼켰고, 다시 상호의 눈을 보자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튼, 잘 지냅시더.”

박병찬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첫 인상이 그랬으니, 박병찬은 상호가 그를 험하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친절한 편이었다. 그는 양아버지 ― 밖에서는 아재가 아닌 아부지라고 불렀다 ― 를 따라 밖으로 나갈 때를 제외하면 계속 집에 있었고, 책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주로 읽는 책은 영웅이 활약하는 이야기였다.

“이거, 멋지지 않아요?”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탄 어린 표정. 박병찬은 상호가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아이임을 실감했고, 벽이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그가 마음을 완전히 열게 된 건 상호가 검을 쥐어주었을 때였다.

“이건…”

“저 좀 지켜주시라고. 아, 당연히 비밀이에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박병찬은 부연 부족 제일의 전사가 되고 싶었다. 검을 들고 계속 싸우고 싶었다.

“사슬 가지고는 힘들겠죠.”

상호는 박병찬의 다리에 있던 사슬도 풀어주었다. 열쇠도 없는데 사슬이 모래알 부서지듯 툭툭 끊어졌지만 박병찬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쩐지, 상호가 사슬을 풀고 한 번 쓰다듬은 오른쪽 다리가 전보다 가벼워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따 다시 채워야겠지만―”

“상호 너는…”

“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박병찬은 상호가 태초 부족에서 얼마나 지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평소 또래들과 모나게 지내는 것 같진 않았으니 부족에 대한 정이 없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태초 부족을 해친 자신에게,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주고 있다.

“햄은 영웅이 될 거거든요.”

“영웅?”

“내는 다 알아요.”

상호는 조용히, 맑게 웃었다.

타인에 대해 알게 되면 미워하기 어려워진다고 하던가, 박병찬은 더이상 상호를 경계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상호는 박병찬을 데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로 나갔다.

“왜 온 거야?”

“오늘따라 답답해져서요.”

“답답해?”

그날 상호는 양아버지와 함께 밖에 나갔다 왔다. 박병찬은 그런 날이면 상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이제 상호를 순수한 마음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기에, 언제인가 뭘 하고 오는지 물어봤지만 상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꼬치꼬치 캐묻자니 그 웃음이 걸렸다.

“햄.”

“응, 왜?”

“저 믿어줄 수 있어요?”

그랬던 상호가 저렇게 물어보는데, 어떻게 부정의 답을 낼 수 있을까.

“믿어줄게.”

박병찬이 답하자 상호는 몸을 돌려 바다로 걸어갔다.

“상호야?”

그런데, 상호의 몸이 가라앉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멀어질수록 바닷물이 깊어지는 건 당연한데 상호는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 점점 작아질 뿐이었다.

“상호!”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박병찬이 소리쳤을 때,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상호는 걸어간 자리―해수면에 멈춰 있었다.

상호가 손을 들자 그의 발밑으로 빛줄기가 모여들었다. 달빛이 아니었다. 그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보아 발광하는 바닷속 생명들이 분명했다. 이내 상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점점 빨라지다가 마지막엔 뛰어다녔다. 가볍게 몸을 날리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의 흐릿한 경계에 힘입어 헤엄치는 것 같기도,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름답다. 박병찬은 멍하게 상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햄도 이리 오세요.”

“나도?”

“저 믿어줄 거잖아요?”

상호는 어느새 박병찬에게 돌아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상호의 표정은 위아래에서 비치는 빛 덕분에 뚜렷했고, 박병찬은 머뭇거리다 손을 붙잡았다.

“어, 어!”

“잘 따라와요, 햄!”

상호에게 끌려간 박병찬이 바다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다리의 사슬은 어느새 흩어졌다. 박병찬은 상호를 따라 바다 위를 달렸고, 중간 중간 상호와 양손을 맞잡은 채 돌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는 박병찬이 앞섰고, 그러면 상호는 장난스럽게 몸을 뒤로 젖혔다. 세련된 무용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박병찬과 상호는 어느 인간들보다도 자유로운 존재였다.

“상호야, 너는―”

인간이 맞아?

박병찬은 물어보려다, 어떻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상호와 계속 춤추었다.

달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뒤로도 상호와 박병찬은 간간이 밤하늘과 바다에 몸을 맡겼다.

“햄, 저희 저― 대륙까지 갔다 올까요?”

“그러다 지쳐서 빠지면?”

“무서워요?”

상호가 말한 대륙은 부연 부족도 한때 진출을 꿈꿨던 곳이었다. 원중 부족, 장도 부족 등 유명한 부족들이 있는데 상호는 그곳에서 수입되는 영웅 이야기를 좋아했다. 아쉬워하는 것은 원중 부족이나 장도 부족 출신의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질린다는 것. 약소 부족 출신이 강해지는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냐고 했다.

“말했잖아요, 햄. 사랑받는다니까요.”

“그래서 빠져도 안 죽는다?”

“안 빠져요!”

상호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박병찬은 상호에게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편으론 상호가 양아버지와 함께 나갈 때마다 그 힘을 착취당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럼에도 웃음으로 숨기려고 했던 거라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만남의 기억은 이제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상호는 두려워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닌 걱정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다른 말로는―

“햄은 영웅이 될 거니까.”

조금, 사랑스러운 존재.

박병찬은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사로서의 그는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해치는 것에 익숙했었다. 물론 그가 다리를 다친 것은 동료를 지키기 위한 행동 때문이었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는 희대의 바람둥이가 될 터였다. 그가 지키지 못한 동료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수십 명은 넘어갈 것이다.

그가 상호에게 품은 감정은 상호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상호의 옆에 있고 싶다는 마음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좀 더 특별했다. 상호의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상호 본인은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고민하는 것마저 귀엽게 보였다. 그 귀엽다는 감정은 주인을 위해 애쓰는 동물을 볼 때 느끼는 것과 달랐다.

“내가 어떻게 영웅이 된다는 거야?”

“내는 다 안다니까요.”

“그럼 말해줘.”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모든 걸 알 수 없다. 그러나 상호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 거짓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박병찬은 이제 상호가 인간이든 아니든 괜찮았다. 바다가 제 침대라도 되는 듯 누워 버린 상호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지 오래.

“햄은 사랑받으니까요.”

박병찬의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랑받아? 누구한테?”

“알고 싶어요?”

박병찬은 이제 그것도 두렵지 않았다. 천연덕스럽게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할 정도로, 상호와 가까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상호는 대답해주려는 듯 일어나더니, 바닷물을 걷어차 박병찬에게 튀겼다.

“상호 너!”

“햄은 몰라도 되거든요!”

“잡히기만 해!”

둘은 다시 바다 위를 뛰어다녔다.

 

 

다시 생각해도, 박병찬은 운이 매우 좋았다.

다른 곳으로 끌려간 옛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생각도 못할 정도로, 상호의 곁에서 편안한 날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가 태초 부족에게 원망의 감정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오른쪽 다리가 거짓임을 증명하겠지만 ― 그런데 정말 이젠 많이 아프지 않았다 ―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야, 박병찬.”

“너는…”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그래서 옛 전우가 자신을 은밀히 불러냈을 때, 그 목적을 바로 짐작할 수 없었다. 그의 주인 되는 이는 상호의 양아버지에게 볼일이 있다고 했고, 그를 내버려 두었다.

“이거 봐.”

“이게 뭔데?”

“잔소리 말고 얼른.”

두루마리는 부연 부족이 쓰는 매듭 암호와 함께였다. 해석하면, 반란.

“이거 진짜야?”

“진짜가 아니더라도 어떠냐?”

두루마리에는 부연 부족이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내용과 끌려간 전사들에게 전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외부에서 공격할 때 내부에서도 공격하면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박병찬의 옛 전우는 그 내부 공격을 함께 맡자고 제안하러 왔다. 설령 진짜가 아니더라도, 태초 부족에 끌려오고 나서 겪은 수모를 생각하면 해야 하지 않겠냐는 느낌이었다.

“네 다리, 결국 태초 부족 독화살 때문에 그렇게 됐―”

옛 전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박병찬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그를 벽에 박아버렸다.

“너……”

“말 안 할 테니까, 조용히 가라.”

주변에 다른 하인들은 없었다. 박병찬은 손을 털고 자리를 떠났고 옛 전우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걸 무시했다.

 

“햄?”

“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아무것도 아냐.”

상호의 양아버지의 손님이 돌아간 뒤, 상호는 박병찬을 찾았다. 박병찬은 상호가 연습할 때 쓰라고 준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친구 만나고 왔어요?”

“친구?”

“같이 끌려온 사람 아이에요?”

상호는 자주, 모든 걸 안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는 박병찬의 떨림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박병찬이 태초 부족을 아예 원망하지 않는 게 아니듯, 부연 부족을 완전히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가족들이 있고 전우들이 있었다. 상관에 대한 증오와 전우에 대한 우정은 계속 공존해 왔다. 그가 전우의 비밀을 지킨 것도 우정의 일환이었다.

“맞는데…, 그게……”

“괜찮을 거예요.”

상호의 손이 박병찬의 오른쪽 무릎으로 향했다. 상호가 만지고 나면 아픔이 많이 가시는 곳.

“뭐가 괜찮다는 거야?”

박병찬이 지금 아픈 곳은 다리가 아니고 머리였다. 동료들의 고통, 이해했다. 자신이 상호의 옆에서 아팠던 적이라고는 비가 오는 날마다 오른쪽 다리가 쑤신 것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상호의 손길에 나아졌지만 동료들은 자신과 달랐다. 고통받다 못해 죽은 동료도 자신이 보지 못했을 뿐 있을지도 몰랐다.

“자, 여기 부적.”

“부적?”

상호는 박병찬에게 무늬 없는 갈색 로켓을 건넸다. 로켓 속에는 상호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만들면 효과가 좋대요.”

“…….”

나는 태초 부족과 부연 부족은 몰라도, 상호는 절대 미워할 수 없겠다.

“고마워.”

박병찬은 로켓을 목에 걸었다.

 

“반란이다!!”

부연 부족 전사들의 반란은 끝내 일어났다.

“상호야, 이쪽이야.”

“…….”

박병찬은 혼란을 틈타 상호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상호는 덤덤히 박병찬의 다리의 사슬을 풀어주고 그 조각들을 멀리 치워버렸다. 상호가 양아버지도 데려가자고 하지 않은 점이 빨리 피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어딜 가냐?”

“너……”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전사들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들은 박병찬의 오른쪽 다리가 그를 자신들에게 데려올 거라고 생각한 듯 계속 제안을 해 왔지만 거절당했다. 박병찬은 다른 탈출로로 갈 걸 그랬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비켜. 너희와 싸울 생각 없어.”

“배신자를 우리가 봐 줄 것 같냐?”

“젠장. 상호야, 형한테 딱 붙어 있어.”

상호는 당황하지 않고 박병찬의 말을 들었다. 너무 침착해서 적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이 자식, 뭐야! 크헉!”

“어떻게 그 다리로 계속…!”

박병찬이 품었던 부연 부족 최고의 전사라는 꿈은 어린 날의 치기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날 전까지, 박병찬이 나설 때마다 부연 부족에게는 승리가 찾아왔다.

“햄, 피해요!!”

“……!”

그래, 화살이 쏟아지던 그날 전까지―

“상호야!!”

 

 

“상호야, 눈 떠, 상호야!”

“햄……”

상호가 맞은 화살은 독화살이었다. 누가 쏘았는지 모를 화살들 속에서 박병찬은 상호를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독은 이미 상호의 온몸으로 퍼졌다. 박병찬 자신이 맞아본 적이 있기에 잘 알았다. 해독제를 먹인다 해도 상호는 살지 못한다.

“햄한테, 말 못한 게, 있어요.”

“뭐?”

“햄, 궁금하지 않았어요? 제가 무엇인지……”

점점 옅어지는 상호의 숨이 그 증거였다. 박병찬은 상호가 차라리 아프다고 말했으면 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말할 것이 아니고.

“상호야, 지금 그게 중요해? 네가 지금, 지금!”

상호가 무엇이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박병찬이 두려운 것은 상호가 아닌 상호의 죽음이었다.

“지켜달라며…, 그래서, 나는…”

이내 박병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박병찬의 검은 상호를 지키기 위한 검이었다. 상호에게 마음을 열었던 순간부터 쭉 그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상대를 지킨 것은 박병찬이 아닌 상호였다.

“괜찮아요, 햄.”

상호는 박병찬의 뺨을 쓰다듬었다.

“잠깐만…, 잠깐만 자면 괜찮아져요. 저 믿어줄 거죠.”

믿음.

바다 위에서 건넸던 그 말에 박병찬의 시야가 트였다.

“전 모든 걸 알아요.”

“상호야, 제발.”

“햄은 영웅이 될 거예요. 사랑받으니까.”

하지만 박병찬의 대답을 기다려 줄 여유는 없다는 듯―

“또 봐요.”

상호의 눈이 감겼다.

“상호야?”

박병찬은 상호를 흔들었지만, 상호는 그 흔들림을 따르기만 했고 박병찬이 코를 잡아도 반응하지 않았다.

“상호야, 일어나, 응?”

축 늘어지는 상호의 몸이 그 숨의 끝을 알렸다.

“……!!”

잠든 이에게, 깨어 있는 이의 울음은 닿지 않았다.

박병찬이 상호의 침대로 삼기로 한 곳은 깊은 바다였다.

잠든 거라고 했으니까, 상호가 가장 좋아할 곳에 두고 싶었다. 하늘이 박병찬의 마음을 알아줬는지 바다는 노를 젓기 딱 좋게 고요했다.

“상호야.”

배가 모래사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지자, 박병찬은 상호를 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걸 안다고 했으면서 내 마음은 몰랐지.

난 너한테만 사랑받으면 됐는데.

헤엄치는 법은 과거 급류 속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도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깊은 바다는 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고 부드러운 흐름이 꼭 자신을 밀어주려는 것 같아 박병찬은 언제 숨이 막힐지 모르는데도 ― 사실 막히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웃음이 나왔다.

네가 정말 모든 걸 안다면, 저 대륙의 약소 부족에서 영웅이 될 테니까, 나 보러 와.

이내 박병찬은 상호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올라와 상호를 감쌌고, 상호는 천천히 멀어졌다. 박병찬은 그 빛이 바닷속 어둠에 온전히 녹아들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보자.

 

 

·

·

·

 

“족장님, 저 왔어요.”

“어서 와라.”

어느 맑은 날, 이규후가 박병찬을 불렀다.

“지상 부족에서 편지가 왔다.”

“지상 부족이면 남쪽 바다의?”

“그래.”

박병찬이 바다 괴물과 무관한 일로 불리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초원이 일일 텐데. 박병찬이 의아해하자 이규후는 직접 보라는 듯 두루마리를 건넸다.

“그런데 병찬이 네게 온 거라서.”

“저요?”

“보내는 사람이…”

두루마리에는 받는 이와 보내는 이가 적혀 있었다. 조형 부족의 박병찬. 지상 부족의―

“상호, 라고.”

파도 소리가 박병찬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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