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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상] 깻잎 나누는 사이

참깨 들깨 고소하게

Idyll Garden by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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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캐리어 끌리는 소리가 고속터미널 안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가는 사람 많고 오는 사람 많은 터미널에서 흰색 캐리어를 끄는 파란색 배낭 맨 남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흑발보다 드물다는 갈색 머리카락도 각종 염색이 넘치는 요즘 시선을 끌 요소가 못 됐다.

“기사님, 여기 이 주소로 가 주세요.”

남자는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는 남자가 보여준 휴대전화 속 주소를 보고 살짝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물어보지 않는 예의를 지켰다. 주소는 서울에서 알아주는 고급 아파트인데 손님의 복장은 고급스럽다기보다는 편안해 보이는 캐주얼 룩이었고 매체에 나올 만한 유명인으로 보이지도 않았으니 괴리감이 들 만했다.

“여기인가―”

도착한 아파트단지는 유럽의 옛 건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로 마치 귀족들이 있었던 시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렀다. 신분제가 폐지된 현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의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등은 부끄러울 것 없다는 듯 빳빳했다. 그는 110동으로 향했고 공동현관문에서 406호를 호출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전영중 씨. 저 기상호입니다.”

[아, 잠깐만.]

호출이 끊기고 몇 분 기다리자 문 너머의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이 있을 듯한 쪽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 기상호는 그를 맞이하러 온 전영중과 가볍게 목례하고 캐리어의 긴 손잡이를 줄였다.

“혼자 온 모양이네?”

“뭐, 짐도 몇 개 안 되고요.”

“저게 전부야?”

“네. 가구하고 인터넷은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옷가지하고 제 물건 몇 개만 먼저 가져왔어요.”

전영중이 캐리어를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기상호는 만류하고 계단을 올랐다. 전영중은 그보다 앞서가며 아파트 현관의 보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406호의 문은 마주보고 있는 405호의 문과 디자인이 달랐다. 원래도 고급이었던 디자인을 더 화려하게 바꾼 것은 일종의 과시인지에 대해 기상호는 생각했다. 전영중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것을 보고 뒤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자 탁자, 소파, TV 등 가구들이 보였다. 이제 막 박스에서 나온 듯 삭막해 보였다.

“그럼 좀 쉬고 계약서 확인할까?”

“좋아요.”

“와이파이 비번은 알지?”

전영중과 기상호, 오늘부터 두 사람은 동거할 것이다.

결혼 전까지 생활을 맞추기 위해.

 

 

기상호는 올해 만 나이로 25세였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고 그럼에도 선뜻 마음이 안 가는 시대에 그의 결혼은 매우 일렀다. 일단 약혼만 한 상태지만 그에게 파혼이라는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상대방과 집도 합치게 됐기 때문에 결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략결혼.

그 배경을 그가 즐겨 보는 대표적인 매체인 일본산 라이트 노벨 제목 느낌으로 요약하자면 『서민이었던 내가 대기업 오너의 손자였다。』 정도가 되겠다.

기상호라는 개인의 삶은 특혜와 거리가 멀었다. 양산에서 태어나 부산의 고등학교와 서울의 대학교를 나왔다. 빠른 생일이라서 교문을 좀 일찍 밟았다. 4학년 재학 중 학교의 진로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잠시 일했던 회사에 입사했고, 값싼 원룸을 구해 출퇴근했다.

“누구세요?”

“기상민 씨 댁이죠?”

“… 누구요?”

사건은 기상호가 간만에 형과 누나를 보러 본가에 내려갔을 때 일어났다. 부잣집 아가씨 아니면 도련님과 세트로 등장하는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남매의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다. Y그룹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이제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남매의 부모님 중 어머니가 옛적에 Y그룹 본가에서 뛰쳐나와 연인과 도망갔던 막내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럼 막내분이 결혼해 주셔야겠군요.”

“뭐요?”

“지금 뭐라 씨부렸노?”

결론은 Y그룹이 N그룹과의 협력을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자기들 아들딸 보내기는 싫으니 기상호네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기상호의 형은 기혼자였고 누나는 애인이 있다고 하니 대상은 기상호밖에 없다고 지껄였다. 강제로 이혼시키거나 이별시키지 않는 배려는 평화로운 세 남매의 만남의 장을 망친 시점에서 쓸모없었다.

“할게요.”

“호야!”

“니 미쳤나?! 누군지 알고 하겠다 하노!”

하지만 세 남매는 알았다. 상대는 거절한다고 물러날 작자들이 아니었다. 집을 알아내자마자 냅다 쳐들어온 놈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막내보다 밥 몇 년 치를 더 먹은 형과 누나가 잘 알았다. 단지,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 때문에 동생이 희생하는 것이 싫었다. 부모님의 장례식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 돈만 내밀면 다 되는 줄 아는 싸가지 없는 놈들.

“걱정 마라. 설마 죽기야 하겠나.”

“너……”

“돈 많이 받아올게.”

기어이 기상호의 형은 동생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면서 훌쩍거리는 소리는 숨기지 못했고, 서로밖에 없는 세 남매는 몸을 가까이 붙였다.

 

기상호와 전영중의 첫 만남은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기상호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못 올 장소였다. Y그룹이 보낸 정장을 입고 리무진을 타면서 울렁거렸던 속이 더 나빠졌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탔든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기상호 님 맞으십니까?”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영중에 대해 주어진 정보는 이름을 제외하면 N그룹 사람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상호는 그가 자기처럼 서민은 아니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자신과 격이 같은 사람이었으면 Y그룹이든 N그룹이든 이런 장소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 같았다. Y그룹의 횡포를 겪고 나니 편견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실제로 만난 전영중은 미남이었다. 눈에 확 띄는 화려함 없이 가지런한 이목구비만으로 저런 미모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단정한 옷차림과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 숙이는 인사도 가산점이 되었다. 교환으로 받은 명함에는 번듯한 회사의 이름과 직급이 적혀 있었다.

“회사 다니시는구나….”

“기상호 씨.”

“네?”

“이 결혼 하고 싶어서 나온 것 아니죠?”

전영중의 발언은 둥그런 인상과 달리 꽤 단도직입적이었다. Y그룹은 이런 발언에 대처하는 방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기상호는 어디에도 눈을 굴리지 않고 가만히 전영중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고요.”

“잘 알아요.”

기상호는 직감했다. 이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도 결혼하고 싶어서 나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략결혼은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키는 결혼이었으니 전영중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확률도 낮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영중은 기상호에게 불호의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부분에서 흥미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그러죠.”

전영중 말마따나 해야 하는 일, 기상호는 부정적인 점보다 긍정적인 점을 찾기로 했다. 테이블의 메뉴판 속 메뉴는 0이 4개도 아니고 5개였다. 이런 비싼 메뉴를 돈 걱정 없이 먹을 일은 일생에서 몇 번 없을 것이다. 기상호는 신중히 메뉴를 골랐다.

 

 

약혼식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반지를 맞추고,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는 어감과 다르게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전영중 말로는 어차피 둘이 결혼하고 나면 동거하든 별거하든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결혼을 시킨 당사자들인 Y그룹과 N그룹도 포함되었다.

“어차피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거래로 얻는 이득뿐이니까.”

“건조하네요.”

“이 바닥에서는 다 그래.”

기상호는 형의 결혼식을 보고도 이렇다 할 로망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삭막한 결혼 생활을 바라지도 않았다. 전영중은 그런 생활이 일상이라고 말했다. 사실 기상호 세 남매도 이 결혼으로 Y그룹의 재산을 약간 ― 서민 기준으로는 큰 금액 ― 받는 이득을 얻긴 했다. 물론 기상호의 형과 누나는 질색하며 죽어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생활 규칙이라고 생각해.”

“규칙 쪽이 좀 더 무거운 느낌인데요.”

“상호는 모범생 타입이었나 보네?”

“그랬다고 생각해요.”

전영중은 테이블에 계약서를 두고 펜으로 항목을 하나씩 적었다.

“일단 내가 참석하는 N그룹 공식 행사에는 필수적으로 동석해야 해. 나도 네가 참석하는 Y그룹 공식 행사에 동석할 거고.”

“Y그룹 사람들이 저를 부를까요?”

기상호의 얼굴만 보면 시니컬하게 들릴 발언이었지만 전영중은 그 이면에 재벌과 무관하게 살아온 일반인의 마인드가 깔려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Y그룹과 N그룹이 공동 주촉하는 행사에는 자신들을 필수적으로 부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결혼으로 두 그룹 간의 동맹이 성립되었으니 그 증거를 내보일 거라고.

“혹시 의상이 걱정된다면 Y그룹 측에서 지원할 거야.”

“의상이요? 정장 있는데요.”

“그건 출근용 복장 아니야? 파티용 복장으로는 못 써.”

전영중의 역질문에 기상호는 재벌과 관련된 사항 관련으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정장이 다 비슷한 정장이라고 생각한 그에게 출근용이 있고 파티용이 따로 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전영중이 타인을 함부로 깔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 나쁘지 않게 들었다.

“애인은 없다고 했지?”

“네.”

“혹시 생긴다면 말해. 연예인만큼은 아니지만, 기업도 이미지라는 게 있거든.”

애인과 관련된 항목에서 기상호는 무례함보다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마치 사랑이 싹틀 일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 같았다. 직접 체험하면서 환상이 깨지기는 했지만 매체에서는 상류층끼리 정략결혼을 해도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를 내보냈다. 게다가 전영중 정도의 미남이면 호감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을 터였다.

“전영중 씨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으세요?”

“…….”

전영중의 펜이 멈췄다. 그 얼굴이 굳어지는 게 꼭 정곡이 찔린 모양새여서 기상호는 제 입을 가렸다. 하여튼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전영중의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날카로운 언어가 튀어나왔다.

“상호는 로맨틱한 면이 있구나.”

“…….”

“없어서 미안.”

상처받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해봤자 하나도 비꼬는 것 같지 않은데. 역시 픽션은 픽션으로만 봐야 한다고, 기상호는 생각했다.

 

계약서의 나머지 항목은 정말 두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규칙들로 채워졌다. 다행히 그 규칙의 조율 과정에서 전영중은 웃는 얼굴로 돌아왔고 기상호는 고등학생 시절의 4인실과 대학생 시절의 2인실을 떠올렸다. 물론 그들이 살 아파트는 큰 침대가 있는 안방 말고도 작은방이 2개나 더 있으니 비교가 안 됐다.

“일어났네? 주말 잠은 챙겨야 한대서 안 깨웠는데.”

“맛있는 냄새가 나서요.”

“맛있게 느꼈다니 다행이다.”

다음 날 아침 기상호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눈을 떴다. 냄새의 근원을 쫓아 부엌으로 가니 전영중이 전기밥솥의 밥을 그릇에 덜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김과 깻잎장아찌, 반숙 계란프라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붉은 콩나물국이 담겨 있었다.

“이 요리들 직접 하셨어요?”

“김 빼고 다. 너도 지금 먹을래?”

“네, 네.”

자기 몸 씻을 때 아니면 물 한 방울 안 묻혔을 것 같은 사람이 가정식을 요리하는 모습은 기상호를 얼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전영중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계란프라이를 더 부치기 시작했고 기상호는 밥솥에서 자신이 먹을 밥을 펐다. 슬쩍 전영중의 밥그릇을 보니 밥이 봉우리처럼 쌓여 있어 재벌의 이미지와의 부조화를 심화시켰다.

“맛있어요.”

게다가 요리의 맛은 훌륭했다. 콩나물국은 텁텁함 없이 개운했고 계란프라이도 간이 잘 맞았다. 기상호는 처음 만난 호텔에서 코스 요리를 먹었을 때 전영중이 모든 음식을 소스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해치웠으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떠올렸다. 요리 실력과 고봉밥을 보면 질도 양도 성에 안 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장아찌 맛이 다르네요.”

“다르다니?”

“간장으로 담근 맛이 아닌데.”

“된장으로 담갔어.”

이어서 기상호는 깻잎장아찌 맛을 보았다. 지금까지 먹은 간장 양념의 장아찌와 다른 독특한 풍미가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떼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 원래 이런 건 눈 감고도 떼는데―”

“자.”

한 번 됐는데 두 번 안 되는 머쓱함에 아무 말 뱉었을 때, 전영중의 젓가락이 깻잎을 떼 주었다.

“안 먹어?”

“머, 먹어요.”

기상호는 서둘러 깻잎을 자기 밥그릇으로 가져갔다. 이런 것에 두근거리는 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Y그룹과 N그룹을 대표해 약혼했어도, 두 사람의 직장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기상호는 여전히 자기 회사에 다니며 신입다운 직급으로 일했고 전영중도 제 회사에 다녔다. 기상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심플한 약혼반지는 잠시 관심을 끌었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의 연애 소식이 그렇듯 금방 식었다.

[점심 뭐 먹었어요?]

[저 사내식당에서 먹을 예정]

기상호 자신은 연애한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전영중과는 친한 형 동생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도 막내 걱정을 하고 있을 형과 누나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영중은 동거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었다. 요리, 빨래, 청소, 가사 전반에 능숙해 보였다. 기상호도 원룸에서 지내는 동안 가사를 직접 했지만 요리만큼은 전영중을 따라갈 수 없었다. 냉장고 속 반찬이 전영중이 살던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열이 좀 나서]

[반차 내려고]

[열이요??]

환절기는 지났고 날씨는 더워지고 있었다. 전영중은 세 끼를 든든히 챙겨먹고 저녁에는 운동도 다니는 사람이었다. 기상호도 컨디션이 괜찮으면 그 운동에 동참해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체련 공원을 끼는 코스로 조깅을 했다. 둘이 학생 시절 운동을 좀 했다는 이야기도 알았다.

[해열제 드시고 쉬세요]

[그럴게]

그렇게 건강한 열이 나다니, 사람 몸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기상호는 생각난 김에 해열제를 하나 더 사 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약국에 들러볼까.

 

저녁 시간까지도 전영중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기상호는 불안한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저, 영중햄?”

집안은 불이 꺼져 있어 어두컴컴했다. 낮에 거실 불을 켜 두지는 않으니 전영중이 돌아오자마자 어디로 직행했는지 예상이 갔다. 조심스럽게 안방의 문을 열어보니 과연 후우, 후우, 얕은 숨소리가 났다. 침대에 가까이 가 보자 땀에 젖은 전영중이 누워 있었다.

“영중햄, 괜찮아요?”

“상호…?”

전영중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기상호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고 주머니를 만들었다. 오늘 아침 전영중이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밥도 적게 먹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알아채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

“약 먹었어요?”

“어……”

“밥은요?”

“아직…”

아픈 사람을 끌어다가 식탁에 앉혀놓을 수는 없으니 가져다줘야겠지. 기상호는 누나가 보내준 여러 레시피 메모에서 흰죽 레시피를 찾았고 분주히 움직였다.

한편, 전영중은 기상호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삭막했던 친척들의 결혼 이야기를 떠올렸다. 버젓이 정부를 두던 사람들, 사생아인지 친자인지 모르는 사람들. 전영중 그는 친자였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사랑받은 것도 아니었다.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한 이유도 사람의 온기를 담은 음식이면 뭔가 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의 결말은 정략결혼이었다. 상대는 Y그룹에서 익히 알던 얼굴도 아니고 전혀 낯선 얼굴,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기상호.

괜찮은 상대 한 명 내놓을 자신 없는 Y그룹이 우스워서, 팔자에 없던 자리에 끌려왔을 기상호에 대한 가여움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기상호는 야무졌고, 기죽지 않고 비싼 코스 요리를 요구했다. 어디 데려다놓아도 기는 죽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고급 아파트에서 발 뻗고 잘 지내는 모습으로 증명되었다.

만약에 자신이 사랑하게 된다면―

“영중햄, 죽 다 됐어요. 가져다 드려요?”

“아니야, 갈게.”

기상호의 목소리에 전영중은 부엌으로 나갔다. 참기름을 넣은 듯 고소한 냄새가 나는 흰죽, 얼마 전 전영중이 간장으로 담가 본 깻잎장아찌가 놓여 있었다. 전영중이 깻잎장아찌를 떼려고 젓가락으로 줄기를 잡았지만 기력이 없는 탓인지 쉽지 않았다.

“자요.”

“이번에는 네가 떼 주네.”

“그러게요.”

그러자 기상호가 젓가락을 가져가 깻잎을 떼 주었다. 전영중은 픽 웃고 깻잎을 찢었다.

“상호.”

“네?”

“우리 결혼…,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깨 쏟아질 정도는 아니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깻잎장아찌는 전영중 자신이 직접 담근 만큼 입맛에 맞는 것이 당연했지만 오늘따라 입에 착 달라붙었다. 같이 먹는 것이 밥이 아니고 죽이라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사실, 저도요.”

기상호도 전영중처럼 웃었다. 그 입이 그리는 곡선이 참 고와 보였다.


(소장용 결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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