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상호병찬
딸깍, 소리가 나면 조명이 켜진다. 방 한 가운데에 의자가 놓여있다. 살짝 높고, 발 받침대가 있으며 높이 조절도 가능한 미용실용 가죽 의자.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먼저 걸음을 뗀 남자가 의자로 향한다. 입고 있던 하얀색 특공복을 흘리듯이 벗으면 뒤에서 따라오던 스카쟌을 입은 남자가 급하게 받아 든다. 의자에 늘어지게 누우면 목 받침대가 정확히 목을 감싼다. 특공복을 잘 접어 근처의 고급스러운 소파 위에 둔 남자가 다가온다. 작은 카트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자 옆에 섰다. 카트에는 물을 담은 대야와 고전적인 면도기, 면도할 때 쓰는 크림, 그리고 얼굴을 닦아줄 수건 등이 올려져 있었다.
별다른 말 없이 늘어져 있던 남자가 눈을 감는다. 따뜻하게 적신 수건이 그 말끔한 얼굴을 닦아낸다. 턱 밑까지 부드럽게 닦아내면 다음 차례는 면도 크림을 바르는 것이다. 귀밑까지 꼼꼼히 발라준 뒤 손에 들리는 것은 날카로운 면도용 나이프. 면도날이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으로 향한다. 턱과 목의 경계선에 멈춘 날이 피부를 스치듯 지나간다. 크림과 함께 깎인 수염이 밀려 올라가면 보이는 것은 허여멀건한 피부다. 면도를 해주는 손길은 조금 느릿하지만 정확하다. 날이 몇 번이고 목 주위를 긁고 지나가는데도 감긴 눈은 떠지지 않는다.
깔끔히 면도를 끝마친 후 다시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한 번 닦아준 뒤 마지막으로 피부에 무언가를 바른다. 뭐라고 했더라, 애프터…. 어쩌고였는데. 시킨 적도 없건만 면도 몇 번 하더니 홀랑 사 와서 그 뒤로 꾸준히 발라주던 것이다. 그 과정까지 마치면 손이 떨어지고, 이어 카트 바퀴가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과정 내내 미동도 없던 남자가 그제서야 감은 눈을 뜬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소파에 가지런히 놓인 특공복을 입고 나면 정리가 끝난 이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는 얼굴로 다가온다.
"잘했어. 갈수록 잘하네."
"병찬햄에게 해드리는 건데 더 잘해야죠."
"좀 더 빨리하면 좋겠는데."
"아우, 상처 날까 무서워서 못 해요.“
간드러진 목소리가 애교를 한껏 담고 있다. 칭찬을 하는 듯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이어 먼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면 웃고 있던 남자도 그 뒤를 따라 나간다. 딸깍,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힌다.
조형모터스 상무 박병찬. 이쪽 업계로 뛰어든 지는 5년이 넘었다. 웬만한 인간들은 그쯤에서야 겨우 따까리를 벗어날 텐데 워낙 난놈이어야지. 잡아 족친 것도 많고 담근 것도 많아서 아직 20대인데 회장님이 벌써 다음 대가리로 찜해놨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특이사항은, 피 묻을 일이 생기면 굳이 흰 특공복을 입는다는 것. 그리고 민간인도 사채 일도 손 안 댄다는 거. 평소에는 하늘색 셔츠에 베스트, 검은색 넥타이에 깔끔한 실버 넥타이핀, 거기다 더블 투 버튼 정장까지 깔끔히 빼입으니 모르는 사람은 그 뒷모습을 상상도 못 한다. 간드러진 그 목소리 탓일 수도 있고….
이쪽 업계에 사는 인간들이 가진 기묘한 취미야 다들 하나쯤은 있겠으나 박병찬이 가진 취미는 소문이 차단되어있다. 보통 취미의 대상자가 된 놈들이 죽는 탓에 그렇다. 박병찬을 옆에서 돕는 이 초원은 질색하는 취미다. 아무리 자신이 있다지만 그렇게 위험한 짓을 굳이 해야 하냐고 왁왁해도 재밌잖아~ 라는 말로 물려버린다.
박병찬의 취미는 간단하다. 딱 봐도 어디서 굴러들어온 끄나풀 새끼를 제 면도 담당으로 부른다. 면도기는 흔한 휴대용도 아니고 전기면도기도 아니다. 날이 바짝 선, 맘먹으면 모가지 하나 뚝딱하기 딱 좋은 면도용 나이프다. 신중한 놈들은 눈치 보다가 되겠다 싶으면 힘을 준다. 겁 없는 새끼들은 냅다 휘두른다. 공평하게 그 자리에서 개처럼 처맞고 골로 갔다. 살기는 귀신같이 알아서 얌전히 있는 놈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손목부터 부숴놓고 조졌다. 탓에 박 상무 목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회사 안에 알 만큼 아는 인간들은 박 상무 목에 붕대가 둘러싸여 있으면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는다.
기씨에 이름은 상호. 사원으로 새로 들어온 놈이다. 뒤가 너무 깨끗해서 되려 꼬리가 잡혔다. 당연하게 박 상무가 면도 좀 해달라고 불렀다. 일주일 동안 얌전하길래 이번 놈은 신중한 놈이네. 했더니 이제 한 달째다. 얌전히 면도나 해주면 될 텐데 시키지도 않은 고급 면도 크림이나 애프터 쉐이프? 따위를 사 왔다. 날도 항상 날카롭게 벼려놓는다. 어지간히 신중한 놈이다 싶었는데, 옆에서 초원이가 그냥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요? 라고 말한 것에 진심으로 그런가? 라고 답해버렸다.
박병찬 목숨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정보나 더 윗대가리를 노리나 싶었는데 병찬의 옆에 딱 붙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굴길래 현장에 한 번 데려갔더니 벌벌 떠는 척하는 주제에 시선 하나 흐트러지는 게 없어 끄나풀 맞네. 싶었다. 근데 이게 짭새 끄나풀인지 다른 쪽 끄나풀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병찬은 이 새끼가 얼마나 옆에서 알랑거릴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옆에 끼고 다니기 시작했다.
박병찬이 저렇게 끼고 다니면 둘이다. 오래 갈 인연이라서 키워주거나 아니면 각 잡고 들고 다니면서 배신할 기회 잔뜩 준 다음 직접 조지거나. 어떤 경우든지 가만히 놔두면 나중에 뭘 할지 모르니 밀착감시다. 그리고 기상호는 당연히 후자였다. 뻔히 아는 눈깔이면서 모른 체 실실 웃는 꼬락서니에 병찬도 같이 웃어주었다.
기상호. 박병찬이 예상한 대로 끄나풀 맞다. 어디 끄나풀이냐, 저기 지상파 끄나풀이다. 지상파는 경찰들이 신분 숨긴다고 가짜로 만들어놓은 조직이니 결론적으로 경찰 쪽 끄나풀 되시겠다. 조직인 척 구린 일에 발 담그고 확실한 증거 잡으면 모른 척 지상파 쪽은 쏙 빼고 다른 민중의 지팡이 놈들로 조지는 게 일인 곳에서 대가리 굴리는 걸로 1등이었던 기상호가 어쩌다 조형모터스 사원으로 입사했나?
머리 굴리는 놈은 밖으로 안 보인다. 근데 그놈의 조형모터스, 그쪽도 머리 굴리는 것엔 소질이 있는지 몰래몰래 집어넣은 끄나풀들이 하나같이 시체로 나왔다. 짬 좀 찬 사람들은 얼굴이 팔린 지 오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게 기상호였다. 무섭다고 훌쩍거리면서도 다른 사람이 들어가봤자 시체도 못 찾을 수 있으니 별수 있나. 그냥 가야지. 죽으면 부모님에게 보낼 유서까지 정갈하게 적고 들어왔다.
깡패 새끼로 들어왔을 텐데 들어온 날 기 좀 죽일 겸 신고식으로 개처럼 처맞은 뒤 하는 게 없었다. 거즈랑 반창고 덕지덕지 붙은 채로 낮엔 회사 업무 처리하고, 그다음 날부턴 대뜸 새벽부터 불려서 박병찬이 면도 좀 하라고 해서 했다. 이런 걸 나한테 시켜도 되나? 그 궁금증은 날을 목에 대는 순간부터 풀렸다. 범의 아가리가 쩍 벌려지고 그 안에 제 대가리를 밀어 넣어 날카로운 이빨이 목에 닿는 기분이었다. 하도 손을 떨어서 상처를 세 개는 냈는데 박병찬은 미동도 없이 얌전히 받았다. 조금만 맘을 달리 먹었으면 죽는 건 기상호 본인일 것을 알았다. 죄송하다고 벌벌 떨며 어린이용 아기상어 반창고 붙여드렸더니 눈물 나도록 웃더라. 다치면 쓰라고 희찬이가 챙겨줬는데 그 희찬이니 멀쩡한 것을 챙겨주지 않았을 거란 걸 까먹었던 탓이다. 어쨌든 웃어주니 기상호도 웃었다. 하하….
그 뒤로도 계속 면도 담당이었다. 태어나길 담대하게 태어났으니 여기 들어올 생각을 했지. 맘을 달리 먹었으면 죽는다. 다시 말해 맘 안 먹으면 산다는 뜻이었다. 기상호 신조는 길게 살자다. 어차피 박 상무 죽이라고 보낸 것도 아니다. 옆에서 동태 좀 살펴보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좀 보라는 거지. 대단한 임무 맡겼으면 애초에 오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이 안 믿었을 테니까.
사흘 차부턴 담담하게 수염을 깎아줬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리면 목덜미를 드러낸 체 가만히 감긴 눈이 보인다. 속눈썹이 가시나처럼 길진 않았는데, 화려한 맛 하나 없는 얼굴이 예쁘기는 까리한게 끝장날 만치 예뻤다. 어디선 피로 목욕하며 젊음을 유지했다는데 이 사람은 피로 가끔 씻어서 이래 이쁜가. 갈수록 면도가 오래 걸렸다. 많이 내려다보고 싶은 탓이다.
원래도 좋은 피부이지만 더 좋았으면 해서 대충 마트에서 집어 왔을 법한 싸구려 면도 크림을 치우고 인터넷에서 월급을 쪼개 비싼 면도 크림을 샀다. 기상호 본인도 써본 적 없는 고급 템이었다. 애프터쉐이브라는 것도 처음 사봤다. 면도가 끝나서 일어나려는 병찬의 어깨를 잡고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한 뒤 발라주니까 박병찬이 또 웃었다. 원래 이렇게 아양을 떨지 않아도 되는데 병찬이 웃어주는 게 좋아서 아양을 떨었다. 옆에선 줄을 잘 못 섰다고 수군거리지만 애초에 제 줄은 여기가 아니었으니까 신경도 안 썼다.
그렇게 아양을 떨어대니 다가가는 게 쉬워지긴 했다. 이제 박병찬은 깡패 짓 하러 갈 때마다 기상호를 데려갔다. 하지만 기상호는 착각하지 않았다. 박병찬 옆에 있던 새끼들 어떻게 됐는지 정도는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박병찬이 저를 보는 눈에 호의는 없다. 잘 키워서 써먹겠다는 의도는 이 바닥에선 호의지. 그냥 건덕지 잡으려고 하는 게 뻔했다. 맘에 안 들면 그냥 담가도 다들 쉬쉬할 텐데 굳이 들고 다니면서 물어뜯어 보라고 목덜미 들이미는 건 개인 취미인 모양이다. 기상호는 얌전히 그 취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휩쓸려드렸다.
병찬의 머리는 대부분 적당히 방치했다가 귀찮아진다 싶으면 아무 미용실에나 들어가서 짧게 잘라버리곤 했다. 얼굴이 되니까 그러고 살아도 언제나 간지가 났다. 박병찬의 머리 길이가 미묘할 때 들어온 기상호는 예의 그 병지 머리가 딱이다 싶었다. 시간 날 때 미용학원을 덜컥 등록했다. 하면서도 미쳤나 싶었지만, 기상호는 하고 싶은 건 못 참았다. 오래 배운 것도 아니다. 머리 감겨주기랑 커트만 깔끔하게 배웠다. 두 달 다니고 금방 그만뒀다. 마침 병찬의 머리를 자를 때가 다가오길래 기상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병찬햄, 머리 잘라드릴까요?"
"머리?"
"네, 슬슬 짜를 때 된 것 같은데요."
"그런가? 근데 너 머리 자를 줄은 알아?"
"배웠죠.“
기상호가 학원 다닌 거 뻔히 알면서 묻는다. 그런 거 모른다는 듯이 답했다. 이미 제 전용 미용가위도 샀다. 의도를 가늠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병찬이 가볍게 웃더니 그러던가, 라며 짧은 말을 남기고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았다. 미용 천은 좀 오바다 싶어서 수건만 간단히 둘렀다. 다이소에서 2천 원으로 산 분무기로 물 칙칙 뿌리면 원래도 단정한 머리가 더 숨이 죽는다. 비싼 미용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린스도 안 쓰고 살 사람이 머릿결은 엄청 좋았다. 머리카락이 잘려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가득 찬다. 한참을 다듬고 숱까지 쳐낸 뒤 거울을 대주면, 기상호가 처음 봤던 그때의 길이다.
"확 안 치고?"
"병찬햄은 이 모습이 젤 예쁜 거 같아가…."
"이러면 또 금방 잘라야 하잖아~"
"...제가 또 잘라드림 안 돼요?“
순진한 눈망울로 그리 말하면 어쩐지 병찬은 할 말이 궁했다. 저 속에 뱀 몇 마리 거뜬히 처넣은 거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자기가 잘라준다는데 상관없나? 거울 속의 제 머리카락을 살핀다. 많이 자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잘라야 할 것이 뻔하다. 근데 뭐, 애초에 면도한다고 맨날 만나니 시간을 따로 뺄 것도 없고. 병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상호는 히죽 웃으며 수건을 치우고 병찬의 목덜미 쪽에 있는 짧은 잔해들을 툭툭 털어준다. 수건을 물에 적시는 것까지 보고 나면 병찬은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쨌든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으니 병찬도 굳이 데리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정보는 애초에 말단 사원이 손댈 권한이 없고 병찬은 정보를 주로 다루는 편이 아니었으니 건덕지도 없었다. 얻어내고 싶은 게 있으면 병찬이 느슨해졌을 때 다른 곳에 줄을 대야 하는데 상호 이 새끼는 어느새 별명도 생겼다. 깡패 새끼들 식으로는 박 상무네 개새끼일 텐데 하도 아양을 떠니 반쯤 조롱, 반쯤 우스갯소리로 애완견이라고 붙였다. 인상은 싸한 놈이 자주 처웃고 싸울 땐 허우적거리니 개새끼로 불리기엔 분위기가 안 맞단다. 듣는 주인도 듣는 애완견도 기분 나빠하질 않으니 다들 시시덕거리며 그렇게 불렀다.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쑥스러워하는데 그리 안 불러줄 이유도 없다.
눈깔 보니 꿍꿍이는 있는데 그 꿍꿍이를 섣불리 꺼내진 않을 것 같고. 반년이나 데리고 있으니 슬슬 병찬은 상호를 의심하지 않았다.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신중한 놈이어도 수작 부릴 거면 진작 부렸어야 했다. 박병찬 덕에 관심도 많이 받고 있으니 전처럼 끼고 살면서 아가리에 약점 들이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그래서 면도 담당을 바꿨다. 일주일 가려나 했더니 첫날에 지랄하길래 드럼통 하나 버렸다. 면도도 제대로 못 해서 결국 내일부터 일찍 올 필요 없다고 했던 상호를 불러서 마무리했다. 예전엔 허구한 날 바꾸니까 혼자 알아서 할 줄 알았는데 반년 동안 오냐오냐 받으니 그게 편해서 새벽에 불렀다. 멀끔한 낯인 게 깨어있던 게 분명해서 별말은 안 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바꿨는데 기상호가 반년을 해서 그런가 그 뒤에 줄줄이 길어봤자 이 주 내에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줬다. 그러다 한 번 좀 크게 베여서 치료 받으러 갔더니 기상호가 옆에서 따라오는 내내 엉엉 울었다. 뒤질 뻔한 건 전데 왜 지가 저리 쳐 우는지 모르겠으나 박병찬은 그냥 어깨동무 한 번 해주고 토닥토닥도 한 번 해줬다. 방금 지 앞에서 시체 하나 치웠는데 목 좀 베였다고 이러는 꼴 보니까 병찬도 좀 웃었다.
기상호가 단두대에 올라가 오래오래 멀쩡히 살아있다 보니 처리되지 못한 끄나풀이 쌓였다. 덕에 박 상무는 취미 생활 좀 오래 즐기셨다.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면도는 기상호 불러서 처리하니 기상호는 언젠가부터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 면도 끝난 새끼가 멀쩡하게 나오면 마저 들어가서, 박병찬 머리 한 번 확인하고 깎을 때가 된 것 같으면 제 품에서 정갈한 미용가위 꺼냈다. 그러면 병찬은 다시 앉았고 그 희여멀건하니 쭉 뻗은 목에 수건 한 장 둘러지는 것이다.
머리 만지는 게 더 늘어나니 어느 새부턴가 기 사원이 아니라 기 비서가 됐다. 머리가 좋으니 초원 대신 병찬의 일정 수행을 같이했다. 수작 부리기 딱 좋은데 여전히 수작을 안 부렸다. 이제는 가끔 병찬이 꾸미고 나갈 때 왁스로 머리 넘기는 것도 했고, 병찬이 뒤처리 귀찮아하면 머리를 감겨주는 것 역시 기상호가 했다. 병찬은 자주 귀찮았고 기상호는 병찬의 집까지 자주 찾아갔다. 병찬이 욕조에 기대어 앉으면 왁스 가득 발린 머리를 감겼다. 왁스를 안 발라도 감겨달라면 감기곤 했다. 그게 당연해졌다.
번듯한 취향이 없던 병찬 대신 상호의 취향으로 병찬의 집이 차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그때그때 샀는데, 상호가 집을 들락날락하니 알아서 채웠다. 치약도, 바디워시도, 샴푸도, 스킨이나 로션, 심지어는 향수까지 상호가 사다 주는 걸로 썼다. 향수는 난생처음 써보는 향이었는데 나쁘지는 않아 바꾸게 내버려 두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적당히 때우던 병찬의 저녁을 상호가 챙겨주기 시작했다. 깡패짓하러 나갔는데 점심때 되니 준비했다며 도시락을 꺼냈을 땐 좀 어이가 없었다. 맛이 좋아서 더 어이가 없었다. 얌전히 잘 먹었더니 그 뒤론 회사에서도 도시락을 내밀었다. 여전히 맛있어서 얌전히 먹었다.
회사의 구석 방에서 하던 면도를 집에서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상호가 깨우러 와서 면도해주고 얼굴 닦아주면 상호가 챙겨주는 아침밥 먹고 상호가 추천해주는 코디대로 입은 뒤 출근했다. 점심엔 상호가 싸준 도시락 먹고 저녁에 상호가 운전하는 차 타고 일하러 가던지 그대로 퇴근했다. 저녁도 상호가 만들었고 가끔 야식도 만들어줬다. 병찬의 스케줄은 초원이 정리해서 상호가 시행하는 꼴인데 어쨌든 상호가 처리하니까 하루 내도록 상호랑 붙어 다녔다. 간단히 내일 스케줄 말해주는 거 듣고 자고 일어나면 또 하루의 시작이 상호였다.
깡패 짓 할 때도 비서랍시고 옆에서 따라다니니 이제 병찬의 취향을 완전히 꿰고 있는 탓에 담그는 것까지 상호가 알아서 했다. 여전히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의심도 안 했다. 글쎄, 그게 믿는다는 소리일 텐데. 병찬은 거기까진 생각 안 했다. 병찬은 이 업계 뛰어들고 처음으로 큰 실수를 했다. 자연스럽게 파고든 옆을 눈치채지 못했다. 눈빛이 점점 깊어지는데 그걸 받아줄 생각은 없었으면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 탓이 크다. 아니, 사실은….
기어코 머리를 말려주던 상호가 드러난 목덜미에 이를 들이댔을 때. 병찬은 자신이 언젠가는 이럴 것임을 예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리 쪽에서부터 감아오는 팔이 위로 올라와 옷 속을 파고든다. 더운 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병찬이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멈출 텐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무언의 허락에 저쪽에서 먼저 그 애교 섞인 목소리로 병찬을 불렀다. 응, 상호야. 여상한 목소리에 이어지는 것은 다정한 손길이다.
눈을 뜨면 옆에서 자는 얼굴이 보인다. 귀여울 곳 하나 없는 얼굴인데도 언젠가부터 하는 행동들을 모두 귀엽다고 적당히 넘겨주게 되었으니 뻔한 결말이다. 병찬은 손을 들어 아직 말랑한 끼가 있는 볼을 만지작거렸다. 수작은 이미 오래전에 성공했다. 노리는 게 박병찬이 맞았는데, 목숨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심지어 아주 깊은, 그 누구도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던 속마음. 좆됐네…. 병찬은 그냥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상호를 제 집까지 들이기 전부터 대부분 그랬다.
여전한 하루를 지낸다. 지상파 새끼들이 경찰 집단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덩치가 커졌는데 그쪽에서 제대로 알기 전에 조져놓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놈들이 있었다. 조형모터스는 뭐, 그 쪽에게 어디 물릴 만큼 체급이 작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날뛰는 놈들 체급 보면 빨리 알리지 않으면 지상파 이름 석 자 날아갈 것이 뻔하다.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스케줄 좀 확인하다 잠자리에 누웠다. 근래엔 자주 제 위에 올라타더니 이번엔 자는 것을 볼 셈인지 침대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다정하다. 아까 자른 참이었다. 평소보다 더 짧게 잘랐다. 뒤 꽁지가 없어질 정도로. 병찬은 그 행동을 용인한다. 타인을 두고 잠을 자는 게 익숙한 것이 퍽 웃기다.
병찬도 머저리가 아니다. 처음에야 그 속이 가늠이 안 되어 까보려 노력했지만, 기상호가 박병찬을 오래 본 만큼 박병찬도 기상호를 오래 봤다. 박병찬이 기상호에게 제 옆을 내준 만큼 기상호 역시 자신의 옆을 내줄 수밖에 없다. 박병찬 역시 기상호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엔 도가 텄다. 원래도 눈치가 좋았으니까. 오늘 이후 조형모터스의 기 비서는 없다. 둘 다 그 사실을 알았고, 박병찬이 안다는 사실 역시 둘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병찬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제 옆의 사람을 본다. 상호가 허리를 숙인다. 담담한 눈이 병찬의 속을 파고든다. 병찬은 그 시선을 마주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햄."
"응."
"왜 이런 곳에 왔어요?“
알아야 하는 정보일 리가 없다. 짭새들이야 병찬의 옛 과거가 얼마나 절절한 신파극일지 관심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묻는다. 그럼 이 물음은 오롯이 기상호의 궁금증일 것이다. 병찬은 여전히 눈을 감았고 상호는 재촉하지 않았다. 고른 숨이 섞인다. 병찬이 입을 연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왜요?"
"...나 예전에 농구를 했거든. 너도 알잖아. 예체능 하는 애들 뒷바라지하려면 돈 많이 드는 거."
"네."
"그러다…,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 재활에만 돈을 잔뜩 썼거든. 여유 있는 집안이 아니라 그걸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웠어. 그 와중에 아버지한테 병이 생겨서 더 이상 운동하긴 힘드니까 그만뒀어. 그러고 나니까 어쩐지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
그 후엔 아버지 병원비를 대기 위해 돈을 빌리던 어머니가 기어코 사채를 끌어다 썼고 사지 멀쩡하다 못해 건장한 병찬을 담보 삼은 게 전부였다. 내장을 털어먹고 버리기엔 아깝다며 주워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에도 상호는 답하지 않는다. 웃을 얘기는 아니었고 병찬도 그다지 웃어주었으면 했던 것은 아니라 병찬마저 입을 다물자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상호는 지금 날 동정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동정하고 있다면, 그러면…. 익숙한 손길이 다시금 제 머리를 정리해주는 것을 느낀다. 앞머리는 더 이상 눈을 찌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병찬은 그것도 내버려 두었다. 병찬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 이야기도 좀 해봐.“
잠깐 고민하던 상호는 단란한 가정에 태어나서 머리 좋고 운동능력 좋아 명문 대학 나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진 사실인데 대학 이름은 말해도 그게 경찰학과인 건 안 말했다. 그 뒤는 다 쌩 구라다. 깡패 새끼들 사정이야 비슷비슷하니 흔한 레퍼토리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 말한다. 대단히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병찬도 구라인 거 아니까 쓸데없는 짓이었다.
"상호야."
"네."
"나 잘 때까지만 옆에 있어."
"네.“
상호는 약속대로 병찬이 잘 때까지 옆에 있었다. 병찬은 깊은 잠이 들어 상호가 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어나면 빈집이다. 오지 않을 것을 알아 아침은 스스로 챙겨 먹었다. 음식을 해두었으니 꺼내 먹는 게 전부다. 옷을 입는데 뭘 입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멀끔히 보다가 그냥 맨 왼쪽부터 순서대로 입었다. 나쁘지 않은 배치라고 생각하면서 반쯤 쓴 향수를 뿌리고 나온다. 초원이를 부르니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차를 운전했다. 이 새끼 어디 간 거냐고 묻는 말에 그러게. 라고 대답한다.
오랜만에 점심을 사 먹고 하던 데로 깡패짓 좀 하다가 저녁 먹으러 가니 초원이가 오늘 면도 안 했냐고 묻는다. 아, 그렇네. 짧게 대답하고 저녁 먹은 뒤 집에나 갔다.
지상파는 그날 이후로 사라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놈들 치겠다고 간 새끼들이 다 짭새한테 잡혀갔으니까. 그날 이후로 상호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다시 박 상무의 취미 생활이 시작되려다…, 말았다. 면도는 스스로 했고 머리는 글쎄. 자라게 두었다. 며칠 옷을 입다 보니 괜찮은 조합대로 순서를 정리해놓은 것을 깨달았다. 샴푸 통을 들었더니 묵직한 것이, 그제야 새 걸로 바꿔둔 것을 알았다.
기상호가 도망갔고 정체가 경찰 끄나풀임이 밝혀지자 밑에선 한바탕 뒤집어졌으며 가장 옆에 오래 붙어있던 병찬을 오랜만에 회장님이 부르셨다. 그래봤자 병찬은 상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병찬의 스케줄을 최종적으로 관리한 것은 초원이고 그것을 이행만 했다는 증거밖에 없었다. 깡패짓을 나가면서도 상호와 단둘이 남은 적은 없었다. 병찬 집에 찾아온 것은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병찬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웬일로 끄나풀 하나 눈치 못 채고 오래 데리고 다닌 것을 책망하는 자리였으니 사지 멀쩡하게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흘러 새것으로 바꿔둔 것들을 모두 쓰고 개수가 맞지 않아 기상호가 안배해둔 코디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때. 병찬은 기억나는 조합을 돌려 입고 똑같은 제품을 사두었다. 여전히 면도는 혼자 했고 머리는 점점 길어져 어느 순간부터는 묶고 다녔다. 그러다 귀찮아지면 대충 엉성하게 잘랐다. 기상호가 두고 간 미용가위는 다루는 방법을 몰랐지만 그래도 머리를 자를 때면 썼다.
미용가위가 든 케이스 안에는 쪽지가 있었다. 행복하세요. 그 한마디가 적힌 쪽지를 굳이 이 안에 넣어둔 것이 웃기다. 꼭, 병찬이 열어볼 것을 알았다는 듯이. 그 꼴이 같잖지만 열었으니 얹을 말은 없었다.
기상호와 함께했던 1년 반이 지나고 기상호가 사라진 반년을 지내는 동안 병찬은 아주 뒤늦게야…. 지루함을 느낀다. 변한 것은 사람 하나 없어진 것뿐이었는데 그랬다. 사람 하나 시체 만들면 손이 떨리면서도 꼿꼿이 쳐다보는 그 눈깔이 참 좋았는데. 더 빨리할 수 있으면서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이나, 뒷머리를 잘라줄 때면 모른 척 목덜미를 스치는 온기들도 모두.
아, 병찬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상호가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을 때 목을 그어주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믿지 않았으니 배신감은 들지 않았겠지. 애초에 살고 싶어서 사는 삶도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그 취미의 끝에 죽는 것을 바라오긴 했다. 그런 주제에 감각을 바짝 세우고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잘 감지하는 탓에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바람이었지만 어쩌면 네가 마음을 먹은 것은 몰랐으리라고….
회장님이 먼 곳으로 튀신단다. 뒷배 봐주던 놈들이 하나하나 빵에 가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탓이다. 아끼는 측근들은 데려가기로 했고 병찬도 그중 하나였다. 물품이야 거기 가서 새로 사면 되니 챙길 것은 몸뿐이다. 준비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기다리며 오랜만에 집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상호는 갈 때 제 흔적들을 거의 챙겨가 버려서. 기상호가 두고 간 것은 그가 바꿔놓은 취향과 좀 무뎌진 미용가위. 그리고 전화번호부에 번호 하나 저장되고 모든 게 초기화된 휴대폰 하나가 전부였다. 나가면 영원히 못 보려나. 병찬은 천천히 이불 위에서 늘어진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어지는 것은 죽음이다. 병찬은 아주 오랜 길들임으로 도망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도망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도망가봤자 남는 것은 죽음이다. 그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사방에서 목을 죄일 것이다. 깡패들의 은혜가 그렇다. 받아먹을 때는 좀 달콤할 수 있는데 그게 다 독이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병찬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상호가 두고 간 휴대폰을 꺼냈다. 저장된 전화번호를 빤히 쳐다본다. 이제 병찬이 결정할 때다.
준비가 끝나고 회장님과 측근들이 모인 곳은 비행장이다. 전용기를 타고 멋지게 나르신단다. 병찬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뒤를 따른다. 조금 있으면 소란이 일어난다. 저 멀리서 개떼처럼 뛰어드는 놈들이 보였다. 늙으신 회장님이 막 발을 뗀 상태라 다들 마음이 급해진다. 급하게 힘센 놈 하나가 회장님 둘러업고 계단을 뛰어오른다. 병찬은 뛰어드는 놈들 쪽으로 간다. 빨리 높으신 분들부터 태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허겁지겁 타지만 비행기라는 게 이륙시간이 좀 필요하더라고. 기어코 타는 계단을 떼지도 않았는데 비행기가 먼저 달린다. 급 좀 낮은 놈들은 망연하게 그걸 쳐다보고 병찬은 쳐다도 안 봤다. 개처럼 달려든 새끼들이 넋 놓은 새끼들 잡고, 병찬은 쉽게 잡혀주면 면이 안 사니 주먹 좀 쥐고 쳐다봤는데 사이에 서늘한 인상 보이자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봤자 대가리 잡혀서 바닥에 박히는 꼴은 못 면한다. 미란다 원칙 읊어주며 수갑 채우는 거 가만히 받고 있으니 무릎을 꿇린다. 아, 소리를 내니 움찔거리던 몸이 슬쩍 저를 엉덩이 대고 앉을 수 있게 주저앉힌다. 병찬은 작게 웃었다.
유치장에 처박혀서 적당히 누워있으니 딱 봐도 급 높아 보이는 짭새 하나가 회장님 타시던 비행기 터졌다고 알려준다. 어디서 꼬라박았는지 몰라서 시체도 못 찾았단다. 그 말에 낄낄 웃으니 주변 놈들이 제가 실성한 줄 아는지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씨발, 성공했다. 밤늦게 직접 들어간 게 정답이었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 내가 지 뭐 예쁘다고, 뭘 안다고 비행기를 살펴봐? 병찬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른다.
이어 붙잡혀 끌려가 아는 거 다 말하라고 하는데 병찬은 까라면 까는 쪽이었지 정보를 다루는 쪽은 아니었던데다 중요 자료들이야 그 비행기랑 같이 저승 갔을 테니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뭐, 아예 없진 않지만 굳이 말해주고 싶지도 않았고. 병찬은 제게 소리 지르는 새끼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 열 내던 놈이 휴대폰 보더니 혀를 차고 나간다. 이어서 상호가 들어왔다.
원래 이런 곳 들어오는 새끼들은 조폭 아니면 형사 새끼라 보통 차림새가 헐렁한데 병찬은 외국 간다고 멋지게 정장을 빼입었고 상호는 정복은 아니어도 셔츠 입고 들어오니 태가 났다. 병찬은 손을 위로 올린 채 방긋 웃는 얼굴로 상호를 쳐다봤다. 앞에서 노트북을 연 상호가 제 손목을 쳐다보기에 병찬은 부러 보채는 어투로 말했다.
"상호야, 형 손목 아파."
"혐의 없으면 풀어드릴 수 있어요."
"내가 무슨 혐의가 있어? 내가 뭐 했는지는 네가 다 알잖아."
"아니까 하는 말이죠. 다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그 말에 병찬이 히죽 웃는다. 정보를 다루는 쪽이 아니긴 했지. 그렇다고 모를 리는 없었다. 애초에 병찬을 데려가려던 이유가 뭔가? 아는 게 많아서다. 가족으로 인질 삼고 있으니 써먹기도 유용한 탓에 회장은 병찬을 직접 키웠다. 깡패 회사라고 상무를 아무나 달아주진 않는다. 병찬은 매우 말을 잘 듣는 난놈이었다. 얼마나 그랬냐면, 중요한 일을 몇 번 맡길 정도로. 병찬은 웃는 얼굴로 보다가 다시금 말했다.
"나 머리 자를 때 된 것 같은데."
"형, 잘 협조를 해주셔야…."
"협조해주려고 하잖아.“
상호가 한숨을 쉰다. 타닥타닥 자판치는 소리. 이어 상호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다. 손에는 수건 하나와 제 품에 들어있던 미용가위가 들려있었다. 새 수갑을 꺼내어 끼고 있던 수갑 가운데에 하나를 걸고 다른 쪽을 팔걸이에 건다. 목에 수건을 두르면 준비는 끝난다. 병찬은 가만히 앉아있었고 상호가 뒤에 선다. 분무기는 없었던 건지 책상 위에 있던 물병을 열어 손에 부은 뒤 머리에 문지르는 것으로 차분히 만든다. 이어 주머니에 있던 빗을 꺼내어 깔끔히 빗어 내린다. 목덜미를 완전히 덮다 못해 날개뼈까지 자란 머리를 한 번에 친다. 가위질 한 번 하니 병찬이 입을 연다.
"너희 뒷공작 하던 XXX 있잖아. 그 새끼가 우리 뒷배 중 하나거든."
"네."
"걔도 우리 무사히 튀면 같이 나르려고 했을걸."
"그래요?"
"약하는 새낀데 한국에 들어오는 물량이 적다고 지랄해서.“
병찬은 제 앞에서 돌아가는 녹음기를 빤히 쳐다보며 담담히 풀어낸다. 상호는 그러는 동안 머리를 깔끔히 정리했다. 날이 많이 무뎌지기도 했고 그동안 남의 머리를 자른 적이 없어 실력이 많이 죽은 터라 다듬는 것이 오래 걸렸다. 이것보다는 좀 더 길어야 하는데…. 아쉬움을 가지고 깔끔히 정리한 뒤 수건을 거두고 손으로나마 흐른 잔해들을 날려 보낸다. 드러난 흰 목덜미가….
"나 면도는 안 해줘?"
"그거까지 해주자고 하면 준수햄이 날 죽일라할낀데…."
"나 증거도 있는데.“
금세 바구니에 물 담아오고 면도기랑 누가 쓰던 크림까지 들고 왔다. 전과 같은 거라곤 하는 사람밖에 없지만, 병찬은 고개를 뒤로했고 상호는 가까이 붙어 머리를 제 배에 기대게 했다. 천천히 크림을 발라주는 동안에도 녹음기는 돌아간다. 면도기를 댔을 땐 잠깐 말이 멈췄다. 깔끔히 남은 것을 닦아준 상호가 면도하느라 풀어둔 셔츠를 다시 꼼꼼히 닫아주고 건너편에 앉는다.
조직이 얼마나 구린지는 다 불어놓고 본인이 뭐 했는지는 말도 안 해주고 증거도 없었다. 같이 있던 놈들을 족쳐봐도 병찬만큼 알지는 못했고 어지간히 병찬을 무서워하는 통에 불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은 진작에 내보냈고 애매하게 아는 놈들은 담그거나 입 못 열게 했으니 결국 병찬은 유일한 증인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그나마 검사가 끌어 붙인 죄목은 자수 및 자백으로 감형되었다. 가진 돈이 많아 부른 비싼 변호사는 일을 잘했다.
해온 일에 비하면 출소는 빨랐다. 깡패일 하며 받아먹은 것이 적지 않아 당장 먹고살 걱정은 없었다. 마음고생하신 부모님 달래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살던 집에 다시 들어가니 모든 게 멀끔해서 조금 놀랐다. 괜한 일에 엮일까, 주소도 안 가르쳐드렸다 했는데 저녁에 기상호가 기어들어 온 것으로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
어지간히 오랜만이라 둘 다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찾아보니 집주인은 여전히 박병찬이라 저쪽이 손님이다. 한참 말없이 있다가 병찬이 먼저 입을 연다.
"상호야."
"네."
"짭…. 아니, 경찰 일 아직 하지?"
"네."
"이래도 돼?"
"...어차피 이제 죄도 없으시잖아요.“
그 말에 병찬이 코웃음을 친다. 머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 놈인데 1년 반 동안 옆에 있었으면 알만치 안다. 깡패 새끼도 어쨌든 사람이고, 사람을 족치고 담그면 그게 다 죗값이다.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겼다. 그래. 생각해보면 내가 마음을 먹은 만큼 쟤도 좀 먹어야 공평한 거다. 이쪽은 나름 깨끗해졌고 저쪽은 더러워졌다는 것이 다르지만 뭐, 잘 섞인 것 같으니 나쁘지 않다.
병찬이 일어나 상호의 옆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 상호는 계속 쳐다봤고, 병찬은 장난스럽게 그 눈 위에 입을 맞춘다.
"네가 꼬셔서 백수 됐으니까 먹여 살릴 거지?"
"제 평생 월급보다 햄이 가진 돈이 더 많을 거면서…."
"싫어?"
"아뇨. 완전 개이득이죠."
"얼씨구.“
둘이 낄낄 웃는다. 하나는 제게 내민 손 끌어당기며 올려왔고 하나는 그 손길에 버틸 생각도 없이 당겨져 내려왔다. 이젠 끼리끼리이니 꺼릴 것도 없다. 쓸모없어 내버려 둔 양심은 진작에 버려졌고 저쪽은 사랑에 눈이 멀어 양심 아픈 것도 외면하고 있으니 딱 맞는 꼴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이 서로를 꾹 안았다.
잘 지낼 수 있으려나. 작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올라도 병찬은 억지로 눈을 꾹 감았다. 이미 병찬은 선택했다. 상호도 선택했다. 뒤를 돌아봐도 남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지. 아직도 피 냄새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상호의 등을 긁어내린다. 너 역시 이제는 공범이자 가해자다. 나를 이렇게 만든 죗값을 치러야 했다. 병찬은 웃었다. 깡패 새끼에겐 너무 과분한 엔딩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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