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챤] 정희찬 증량 프로젝트

펜슬로 이주할까싶은데 올릴게 없어서 일단 합작참여했던거 올려봄

수춘 by 건안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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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기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올해만 해도 대회가 몇 개는 남아 있었고, 쌍용기에서 장점을 꽃피워낸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대표적으로 기상호) 할 일도 명확한 편이었다. 그래도 크게 다른 건 없었다. 3학년들은 언제나 그랬듯 웨이트에 집중, 공태성은 빼도박도 못하게 체력 훈련에 던져졌고. 기상호는 슛 연습에 김다은은 이때껏 그랬듯 기본기를 착실히 연마. 그리고 정희찬은…



“빨리 좀 무라. 이라다 급식실에서 쫓기나겠다. 식판 설거지 니가 할끼가?!”

“아 햄… 이거 진짜 많다. 좀만 대신 무 주면 안되나?”

“니 증량하라고 묵는긴데 내가 먹어서 뭐 어쩔긴데? 니대신 내가 증량하고 나중에 근육 떼갈기가?”

“내 토할거같다 진짜~…”


당연히 증량이다.

정희찬 본인은 원체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 반항했으나 지상고 농구부 내에서 제일 적게 먹는 것도 사실이라, 점심시간마다 이렇게 감시를 받으며 지정량을 먹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감시를 받자 오히려 부담스러운 모양인지(다른 사람들은 진작에 제 식사를 해치우고 정희찬 먹는 것만 보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밥을 깨작거리고만 있었다.


“오늘 반찬 맛없는 것도 아이고 고긴데 와이래 못 먹노?”

“그거를 8인분이나 받아놓으니까 글치… 내 더주세요만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아나? 눈치 보이가 죽는 줄 알았다 진짜.”

“님, 난 12인분 받아왔음. 운동부 체육복은 급식 많이받기 프리패스권인거 모름?”

“운동부고 뭐고 햄은 덩치부터가 12인분이다이가!”


항상 긍정적인 정희찬이 드물게 울상을 지은 채 불평해도 남은 음식이 절로 사라지진 않았다. 게다가 점점 식어가고 있었으므로 더 시간을 끌면 먹기만 힘들어진다.


“이래 많이 무가 속도 떨어지면 우야노…”

“근육이 생기야 더 빨라지지. 낸 아직도 니가 우예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내도 근육 있거든!”

“뭐라노? 재유햄한테도 처발리는게.”


정희찬은 농구부가 아닌 애들과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았으므로, 혹시라도 사정 모르는 애들이 대신 먹어줄까 감시라는 목적 하에 1학년 전원이 정희찬의 밥 먹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주게 되었다. 물론 각자 자신의 몫은 다 해치운지 오래였다. 쌍용기 전이었으면 새X들이 연습 쨀 핑계만 찾는다며 성준수에게 욕 좀 얻어먹었겠지만, 지금은 1학년들도 자주 야간 자율 훈련에 알아서 참가했으므로 제법 유해진 그들의 주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감시 수고했다며 매점에서 빵을 사주기도 했다(이미 배가 터지기 직전인 정희찬 외에는 좋아라 하며 받아먹었다. 무려 그 공태성마저도!).

그러니까, 이렇게 농구부 1학년들끼리 모여 정희찬 먹방쇼를 단체관람하게 된 건 하루이틀 째가 아니었다.


“하루이틀도 아닌데 아직도 묵을때마다 깨작깨작 먹는다는게 어이가 없다. 니 먹는거 보면 식욕 다 떨어진다. 아나?”

“식욕 다 떨어진 사람이 식판 싹싹 비워놓나?”

“니 먹는거 보기전에 비웠다이가.”


입으로는 식욕이 떨어졌네 어쩌네 해도 눈으로는 정희찬 식판 위의 고기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직도 배고픈 모양이었다. 물론 급식 배식은 이미 샤따 내렸다. 더 받아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내내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기상호는 형들이 고기에 미친 폭주 남고생이 되기 전에 매점이든 어디든 이 그림의 떡 앞에서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감시 목적으로 남은 사람들이 오히려 밥 뺏어먹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햄들, 희차이는 제가 보고 있을테니까 먼저 들가세요.”

“그래도 됨? 감독님이나 햄들한테 걸리면 털릴 것 같은데.”

“매점 갔다가 바로 체육관 가면 안 그럴걸요. 어차피 지금 점심시간 다 끝나가잖아요.”

“니 임마 밥 대신 무줄라고 하는거 아이가?”

“아이라니까요. ‘고시엔의 전설’ 23권을 걸고 희차이 다 묵게 하께요.”

“고시 뭐? 그거는 또 뭔데.”

“저희 반 애가 빌려주는 만화책이요.”

“임마 이거 지 거도 아닌 거를 거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공태성과 김다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대낮에 건물 안에 틀어박혀 남의 밥 먹는 거 구경하고 있기엔 그들은 지나치게 기운 넘치는 운동부 남고생들이었다. 연습 시간엔 늦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매점으로 사라졌다. 학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급식실엔 이제 괴로워 하면서도 꾸역꾸역 밥 먹는 정희찬과 그 꼴을 지켜보는 기상호만 남았다. 보는 눈이 줄어 부담이 줄어서인지 그새 먹은 게 좀 소화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정희찬은 다시 속도를 내서 먹기 시작했다. 물론 애쓰고 있다는 티가 나는 건 변하지 않았다.


“…밥먹기가 그래 싫나.”

“밥이 싫은 게 아이라… 너무 많다 이거지.”

“그래도 좀 무라. 니 너무 말랐다.”

“먹어도 살이 잘 안 붙는걸 우야란 말이고? 글고 빠르니까 된 거 아이가?”

“병찬햄한텐 발맀으면서.”

“그거는 그 햄이 규격 외인거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찔리는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기상호는 굳이 채근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느라 방치된 정희찬의 숟가락을 들었다.


“우리가 솔직히, 협회장기 때까지는 개 허접팀이었다이가.”

“허접은 무슨 허접이고? 쫌 사정이 있어가 본실력을 발휘 못한 것뿐이지 원래는 그만큼 할 수 있는 팀이었다.”

“대회에서 누가 사정 봐주고 잠재력 봐준다대? 지면 다 끝이고 허접이지.”


기상호는 진짜 그렇게 안 생겨서 싸한 발언 하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아니, 사실 얼굴 자체만 보면 냉해 보이는 데가 있는데 평소 본인이 얼굴을 그렇게 쓰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얼굴에 걸맞게 말한다고 할 수도 있긴 한데….


“니 다른 데 가서 그런 말 하면 클난디. 준수햄이 방금 그 말 들었으면 니 죽있을끼다.”

“준수햄도 별 말 안할 걸? 맞는 말이다이가. 아무튼, 중요한 건 다음 대회에서는 다들 우리를 허접팀이라 생각 안 해갖고 연구해올거라고. 그래서 감독님이 우리 싸인도 싹 갈아뿐다 안했나.”

“뭐… 그건 글치.”

“그만큼 우리 각자도 다른 팀한테 파악당할끼란 소린데, 우리는 여섯명빼끼 없다이가. 털리는거 금방이다. 털리도 뭐 교체할 멤버도 없고. 그니까 그동안 우리도 많이 바끼야 되는데….”


기상호의 시선이 정희찬의 손목을 향한다. 쌍용기 때 다쳤던 왼쪽 손목은 아직 완치되지 않아 아직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 경과를 보고 완전히 푼다지만 얇은 건 변하지 않아서, 여자애들 중에 건장한 애들과 팔씨름 같은 걸로 붙으면 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상호는 솔직히 정희찬 3점 슛은 근력만 좀 길러도 지금보다 반은 더 들어갈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니한테는 주로 힘으로 밀어뿌는 전술로 나올 거 같은데, 이대로 갔다가 잘못하면 진짜 어데 뿔라질 거 같아서 겁난다.”

“사람을 완전 종잇장 취급하네.”

“아니, 진짜로. 양훈이랑 붙었을 때 재유햄 발목 다칬다이가. 재유햄이라 그 정도로 끝났지 니였으면 뼈 상했을끼다.”

“과장도….”

“과장같나? 근데 한 번 부딪히서 클나겠다 싶으면 니도 무의식적으로 몸 사리게 될 걸. 와, 병찬햄도 그랬다이가.”

“기상호 주전 달드마 잔소리도 늘어삤네…”

“희차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드립이 아닌 말을 길게 늘어놓던 기상호가 정희찬과 눈을 마주쳤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앉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 한산해진 급식실에서 서로를 마주보다가 기묘한 분위기가 피어나는 게 문제였지. 지금 대화 주제만 아니었더라면, 혹은 기상호가 조금만 더 늦게 말을 이었더라면 정희찬은 손 안 대고 밥 먹는 법! 외치고는 냅다 식판에 얼굴을 박았을지도 몰랐다.


“진훈이랑 붙을 때… 니랑 같이 코트 위에서 뛰어가 좋았다. 신유고랑 붙었을때도 글치만서도… 앞으로도 종종 같이 뛰게 될 거 아이가?”

“음… 뭐, 글치?”


정희찬의 포지션은 분명한 가드고, 기상호도 지금에 와서는 가드 포지션에 가까우니만큼 진재유가 신유고와 붙었을 때처럼 탈진해서 교체되거나 공태성이 또 5파울을 쌓아 퇴장당하거나… 뭐 그런 돌발상황이 아니라면 올해 또 같이 뛰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정희찬은 굳이 그 점을 짚지 않고 동의했다. 증량을 위한 식단 중에 굳이 그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중학교 때도 함도 같이 안뛰어봤다이가. 그러다 보니까… 감회가 남다르대.”

“와, 니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아씨, 사람이 기껏 멋있는 말 하고 있는데… 됐다. 말 안할란다.”

“상호 삐짔나? 멋쩍어서 그랬지. 알았다, 알았다. 뭔데, 말해봐라.”

“으은다.”

“아, 진짜 미안하다니까네. 이번엔 제대로 들으께.“

“…….”

“싫음 말고. 낸 먹던 밥이나 계속 물란다. 숟가락 치아라.”

“…별 건 아이고.”



실랑이를 하느라 잠시 내려두었던 숟가락을 도로 쥔 기상호가 웅얼거렸다. 원래는 그냥 툭 던질 수 있을 것 같던 말이었는데 정작 (밀당이 섞인)판이 깔리니 좀 쪽팔렸다. 괜히 숟가락 위에 얼마 안 남은 밥만 꾹꾹 더 눌러담다(정희찬은 그 꼴을 보고 밥 갖고 떡 만들라 그라나! 했다.) 진짜로 떡이 되기 직전에야 들어올렸다.


“걍… 언제까지 니랑 내랑 이래 같은 팀에서 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그사이에 부상으로 못 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아깝다이가.”

“…….”

“그니까 니도… 협조 좀 해 도. 그냥 이 말 할라캤다.”


자, 무라. 기상호의 낯간지러움을 죄다 긁어모아 눌러담은 밥숟갈이 정희찬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제가 한 말이 보통 남고생 기준에서 닭살 돋는 말인 건 아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는 있지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정희찬은 뭐라고 하려다가 본인도 같은 심정이 되어버려 그냥 합, 하고 받아 먹었다.


“다뭇네. 가자 이제.”

“어… 어.”


손 안 대고 밥 먹기를 기상호에 의해 해냄으로써 기회를 잃은 정희찬은 머쓱한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사실, 분위기만 좀 민망해서 그랬지 기상호가 한 말은 정희찬도 똑같이 생각한 거였다. 기상호가 그런 표정을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건 좋았지만… 기왕이면 코트 안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체육관으로 갔을 땐 벌써 연습 시작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학년 상 밥도 먼저 먹고 즉시 체육관으로 직행하는 3학년의 기준에서 따지자면 지각이었으나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먹다 체했냐?”

“아뇨… 그냥 먹는데 쫌 오래 걸렸어요.”

“그럼 됐어. 감독님이 새 패턴 사인 짜오셨다니까 복사본 한 번 훑어봐. 자세한 설명은 좀 이따 해주신댄다.”

“앗, 넵.”


각각 한 장씩 나누어 줬는데도 굳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보는 키 180대의 남고생들을 보면서도 성준수는 딱히 입을 대지 않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장땡이라고 고작 종이쪼가리 두 개로 나눠보든 반쪼가리 나눠보든 외울 것만 잘 외우면 됐지.


“오, 쉿도 다른 걸로 바뀠네요.”

“그거 깐지나고 좋았는데. 그래도 여러 번 써먹긴 어려운 사인이긴 했다. …좀 아깝기는 하네. 준수햄 그거 기깔나게 썼잖아요.”

“뭐, 상대 팀 응원단 닥치게 하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인이랑 세부사항만 좀 바뀌었지 패턴 자체가 싹 갈아치워진 건 아냐. 조금 있다가 감독님 오셔서 상세설명 하실 거니까 잘 듣고 익혀놔.”

“옙!”


쌍용기 이후로 성준수는 상당히 유해졌다. 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았는데, 뭐랄까, 예전보다 잘 웃고(그나마도 이전에는 진재유나 박기철을 통해서만 무슨 전설처럼 성준수가 웃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1학년들은 기가 차서 헛웃음 치는 거나 비웃는 거 외엔 직접 본 적이 없는 수준이었기에 지금도 객관적으론 자주 웃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이 무던해졌다고나 할까… 옛날이면 무조건 화냈을 일을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쓸데없는 쿠사리 덧붙이기가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인상은 쉽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건, 성준수는 졸라졸라 멋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세리머니(라고 쓰고 상대팀 도발이라고 읽는다)에는 특유의 기백이 있었다. 조재석-정희찬 루트로 흘러들어온 소문 중엔 그가 농구하기 전에는 일짱이었다는 믿거나말거나도 있었는데, 1학년들은 전원 그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남아 퍼포먼스에 영향을 주는 게 분명했다… 말투에까지도.


“이번엔 무슨 세리머니 하실지 궁금하다 진짜.”

“어지간히 멋진 거 안 해주시겠나. 그나저나 내도 준수햄처럼 까리한 거 하나 하고싶다…”

“와, 그거 안 있나? 그, 달밤에 미친놈 기상호? 그거.”

“달밤의 피에 미친 폭주 기상호거든!”

“그게 그거 아이가?”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별명을 갖고 농구부 막내 둘이 싸우는 사이, 이현성이 체육관에 도착했다. 평소엔 그리 늦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교무회의인지 교장독대인지로 늦는다고 미리 주장인 성준수가 공지했었으므로 다들 별 말 없이 맞이했다. 이현성은 묘한 표정으로 들어와 새 사인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중엔 협회장기와 쌍용기에서는 쓰지 않았던 새 패턴도 몇 개 있었기에, 앞으로는 이것도 연습해봐야 할 것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이현성이 공지할 것이 있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그 내용이 패턴 시험을 위한 연습시합 안내라고 생각했다.


“그기… 하, 이걸 미리 말해주는게 맞는 건진 모르겠는데. 내 오기 전에 교장쌤이랑 면담하고 온 거는 알제?”

“……? 네!”

“교장쌤이 그라는데 다음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 그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은 4강? 그 안에 들면은 숙소 바까준댄다. 그렇게 좋지는 안해도 지금보다는 넓고 좋을 기다.”

“헐, 진짜요?!”

“그래. 사실 4강도 운빨이 좀 따라줘야 할낀데… 에이씨, 야구부가 기대치를 너무 올려놔갖고. 4강이 무슨 옆집 개 이름도 아이고… 아무튼 니들이 이거 없다고 대충 할 아들은 아일낀데 그래도 의욕 좀 올리볼라꼬 말해봤다.”

“이번에도 구라고 그런 거 아이에요?!”

“짜슥이, 감독님을 뭘로 보고. 내 농구로는 거짓말 안 한다 안 했나? 희차이 니는 숙소에 살지도 않으면서 말이 많노.”


정희찬이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는 했으나, 이현성이 말했다시피 그들이 이제 와서 그런 보상 없다고 대충 할 녀석들은 아니었기에 성준수와 진재유가 연습 시작하라고 주의를 줄 때까지 다들 들떠서 새 숙소로 가면 뭘 들여놓을 건지 떠들어 댔다. 드럼 세탁기와 커다란 냉장고와 전자렌지, 컴퓨터에 게임기에 킹사이즈 침대까지… 그걸 살 재력은 차치하고서도 다 들여놓으려면 105평짜리 아파트라도 부족할 가전가구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근데 이라다 예선에서 장도고랑 원중고랑 같은 조 되면 어떡해요?”

“아, 님!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셈!”

“맞다! 니 설마 쫄리나? 그 새X끼들이랑 다시 붙으면 질 거 같아서?”

“아니근데 다음에는 다칬다던 원중 주전도 나올 거 아이에요? 저번보다 빡실 거 같은데….”

“그럼 우리도 빡시게 연습해서 조지면 돼. 신경 꺼.”


사감이 전혀 안 담기진 않은 것 같은 성준수의 말에 결국 기상호는 입을 닫았다. 그라고 해서 초를 치고 싶어 친 것도 아니고 좀 더 넓은 숙소에서 살고도 싶었으나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아닌가. 옆에서 정희찬이 맞다 상호! 어느 팀이 상대든 지금 우리가 할거는 안 변한다! 하는 말을 들으며, 그냥 예선에서 양훈을 또 만나지 않기만을 빌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다치지는 말아야지.


그 뒤엔 당연하게도 연습의 연속이었다. 설명 듣는 동안 배 꺼졌으니 운동장 좀 돌고, 뽈 던지고, 패턴 연습하고… 한 번 승리를 맛본 어린애들은 이전보다 훨씬 의욕에 차서 연습했다. 게다가 이번엔 좀 더 가깝고(물론 4강이 옆집 개 이름이 아닌 건 맞으나)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오늘은 기상호의 야간 자율 3점슛 연습에 정희찬도 어울렸다. 기상호에게 볼을 던진 정희찬이 그대로 달려와 컨테스트를 하는 식이었다. 지나치게 빠른 정희찬의 다리 탓에 몇 번인가 컨테스트가 아니라 블락이 되어버리는 불상사가 몇 번 있기는 했으나 이후로는 그럭저럭 잘 됐다. 코너가 아닌 곳에서의 기상호 슛은 여전히 에임이 구렸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긴 했다(기상호는 초반 블락만 아니었어도 슛 성공률 30퍼센트는 올랐을 거라고 우겼고 정희찬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택도 없는 소리 말라며 일축했다.).


“10분 휴식!”

“수고하셨습니다~…”


의욕의 유무와는 별개로 훈련이 고된 건 맞는지라, 휴식 안내를 하자마자 대부분이 벽으로 가서 기대 앉거나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다못해 대자로 뻗어버린 정희찬의 곁에 기상호가 쪼그려 앉은 다리를 감싸고 앉았다. 공태성의 슛을 봐주던 성준수가 뭐라고 한 건지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욕만 좀 섞였을 뿐 그다지 살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상에 가까운 기분… 물론 좋은 쪽으로.


“아~ 이라고 있으니까 우리 되게 청춘만화 한 페이지 같다.”

“기상호 임마 이거 또 뭐라노.”

“와 있다이가. 볕 좋은 날에 열정을 다해 연습하다가 누워서 쉬는 스포츠만화 주인공의 한 때의 여유~ 이런거.”

“그거는 내 또 알지. 오, 생각해보니 맞는 거 같은데? 우리 이제 ‘진짜’ 팀이다이가. 그런 만화에 나오는 거.”


기상호와 정희찬이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한 명은 앉아 있고 한 명은 누워 있었으나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러고 보이까 우리도 되게 많이 바뀠네. 한달 전만 해도 분위기는 맨날 살벌하제, 팀은 맨날 지제, 내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어갖고 벤치만 뎁혔다이가.”

“그래도 니 엉덩이로 뎁힌 벤치는 따시드라.”

“여름 다되가는 5월이었는데 따시갖고 뭐 우짤낀데.”

“그래서 이젠 코트에서 뛴다이가!”


쾌활하게 웃는 정희찬은, 정희찬만은 그 5월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변한 게 없다고 기상호는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그린 듯한 열혈 캐릭터의 귀감으로, 이걸 뭐라더라… 태양캐? 아무튼 뭐 그렇게 부르던데, 정희찬과 퍽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니는 진짜 바뀐게 하나도 없네.”

“글나? 상호 니는 음청 바뀠다. 그건 니도 알제?”

“어. 근데… 나는 지금이 더 좋다.”

“내도.”


둘 사이의 대화가 잠시 멈추고, 각자 휴식중인 다른 사람들의 소박한 소리가 체육관 내부를 울렸다. 저 밖에서는 체육시간인 반이 축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일상 파트, 일상의 소리다. 기상호는 문득 정희찬에게 ‘초를 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싶어졌다.


“요새는 숙소도 분위기 좋다. 준수햄이랑 태성햄 사이도 글케 안 살벌하고… 감독님도 설거지랑 청소나 빨래 담당 같이 돌아가면서 해주시고.”

“잘됐네. 나중에 또 함 놀러가야겠다.”

“놀러오지말고 걍, 니도 들어온나.”

“…짐싸고 들어가 살라고?”

“어. …싫나?”

“그 쫍아 터진 데를 들어가가 뭐하노. 내보고 신발장 앞에서 자라 이 말이가.”

“그게 아이고… 아까 감독님이 그러셨다이가. 다음 대회 잘 하면 숙소 옮긴다고. 그럼 니 들어와도 될 것 같아서 하는 소리다.”


거게는 방이 여러개일수도 있다이가. 글면은 햄들이랑 다른 방에서 잘 수도 있고… 숙소에서 살면 태성햄이 해주는 밥도 물 수 있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설득의 근거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기상호가 고개를 슬쩍 들자마자, 언제 일어나 앉았는지 같은 눈높이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휘어진 눈이었다.


“아~ 쌍오~ 이 행님이 집에 가고 나면 그래 그립더나?”

“아씨, 그게 아이라 니 없으면 내가 막내라갖고 감독님 부채질도 도맡아서 해야된다고!”

“내 있어도 막내는 닌데 뭐라노.”

“글고 니 집에서 밥 제대로 안 묵는 거 안다. 점심을 그래 먹는데도 하나도 안 찌는거 보면 확실하다. 니 야간훈련 안 하는 날에는 집에 일찍 가가 저녁도 쥐꼬리만큼 먹제?”


구석에 몰린 기상호의 혼신을 다한 필살기에, 각자 떨어저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희찬을 바라보았다. 정희찬은 정곡을 찔린 듯 펄쩍 뛰어올라 기상호의 입을 막으려 들었으나 체급에서부터 역부족이었다.


“이, 임마는 뭔 헛소리를 하고 있노? 루머 퍼뜨리지 마라!”

“루머는 뭔 루머고? 야간훈련 안 하는 날마다 굳이 신청해둔 석식 빼고 집 가는 거 보면 딱 싸이즈 나오는데.”

“정희찬, 기상호 말이 맞아? 사실대로 대답해.”

“아니, 그….”


쌍용기 끝나서도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몸에 근육 붙이겠다고 따로 닭가슴살까지 사서 삶아 먹으며 웨이트를 하는 성준수의 웃음기 하나 없는 말에 쫄아버린 정희찬이 우물거리는 사이, 기상호가 재빠르게 팔을 뻗어 허리를 감쌌다.


“준수햄, 희차이 허리 한 팔로 다 감기는 거 보세요! 숙소에 잡아두고 아침부터 태성햄이 해주는 걸로 한거 먹여야 된다니까요?!”

“이거는 니 팔이 길어서다이가…!”


버둥대는 정희찬은 안타깝지만 전혀 기상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래서야 몸싸움이 좀 심하게 붙는다 치면 어디 하나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현재 지상고 농구부원은 총 6명이었다.


“야.”

“…옙.”

“둘 중 하나 골라. 집에서도 밥 제대로 먹고 증량해내기, 숙소에 들어와서 공태성이 해주는 밥 먹기.”

“밥 하는 내 의견은 아무도 안 물으시는거소서?”

“넌 얘 꼴을 좀 봐라. 이대로 경기 나갔다가 근육덩어리 새X한테 잘못 처맞으면 죽어. 얘도 니가 한 밥이면 좀 먹겠지.”


분명 조금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오글거리고 훈훈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감독님까지 가세해선 니 그렇게 안 먹으면 키도 안 큰다, 체력도 근육에서 나오는 건데 그렇게 밥도 안 먹고 무리하면 근육이 빠져서 몸 상한다…  같은 온갖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기상호가 원망스러워졌다. 임마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갖고선… 여전히 기상호 품에 끼어있는 채, 즉 체육계 기합과는 동떨어진 자세로 예… 네… 따위의 대답을 하고 있자니 현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정희찬은 백기를 들고 숙소 건은 엄마한테 얘기해보겠다는 말을 했고, 그도 모자라 저녁식사까지 감시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임마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와 이라노? 내한테 원수 짔나… 게다가 이 짓을 하느라 쉬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물론 정희찬 입장에선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체력이 더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이왕 이래된거 좋게 생각해라. 태성햄 밥 맛있다.”

“그거는 내도 아는데… 왜 갑자기 내를 숙소로 집어넣을라고 하냐고.”

“숙소 옮긴다캐서…”

“아직 확정도 아이다이가!”

“니 아까는 자신있게 굴더마… 와? 갑자기 쫄리나?”

“야, 야! 잡담은 나중에 해!”


아무렴 악당 얼굴로 쫄? 하는 기상호보다야 성준수의 일상 불호령이 몇 배는 쫄렸다. 둘은 냉큼 네! 대답하곤 정희찬은 진재유에게로, 기상호는 김다은에게로 쪼르르 갔다.



둘이 다시 합류한 건 저녁 급식실에서였다. 나이 순으로 숙소 화장실을 쓰다보니 마지막으로 남은 게 막내들이었기 때문으로, 정희찬은 오늘 저녁 꼭 먹고 가라고 엄포를 놓은 3학년들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급식실로 향했다. 겨자라기엔, 석식은 보통 추가금 내고 신청한 사람만 먹는 거라 괜찮은 메뉴인 경우가 많았다만. 언제나 문제는 양이었다.

점심과는 달리 먼저 씻은 순으로 급식실에 갔기 때문에 막내 둘이 급식실로 갔을 땐 이미 형들은 없었다. 오히려 굳이 정희찬을 기다린 기상호가 특이한 경우였다.


“감시 한 번 지독하다 지독해.”

“감시라니! 친구끼리 밥 좀 같이 먹을라 그라는거지. 내 니 없을 때 외로워가 울뻔했다.”

“…….”


같이 식사할 때마다 꼭 지나가는 몇몇과 인사를 나누는 정희찬과 달리 기상호는 딱히 누구와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는 타입이었다. 반에서 겉돈다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라 굳이 교실이 아닌 데서까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사이인 애가 없다는 게 맞겠지만. 어쨌든 그러다 보니 증량 때문에 강제로 급식 8인분 형에 처해진 정희찬이 학교 석식을 슬그머니 거르고 집에 튀어갔을 땐 기상호는 혼자 먹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안한 감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니 설마 아까 이래서 그 난리를 칬나?”

“뭐가?”

“햄들 앞에서 내 밥 안 먹는다고 꼰지른 거.”

“그거는~ 니 걱정되서 그렇지. 아까도 말했다이가? 부상땜에 같이 못 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부상 입기 전에 배 터지가꼬 죽겠다.”

“사람 배 글케 쉽게 안 터진다. 정 안 되면 스스로가 글X트니라고 암시 걸어 봐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쫌.”


본인 말로는 눈치 보이니 어쩌니 했어도 체격 탓인지 정희찬에게 눈치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식판 위에 반찬이 이미 산만큼 쌓여 있어도 좀 더 먹으라며 더 얹어 주면 줬다. 물론 정희찬에게는 그런 호의가 심히 부담스러웠으나 싹싹하게 웃으며 받곤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푹푹 쉬는 쪽이었다. 잔뜩 쌓인 음식에 먹기도 전에 기가 질린 탓이다.


“정 글면은 쪼매씩 여러 번 받는게 안 낫나? 왔다갔다하면서 배도 좀 꺼질 거 같은데.”

“…오, 그거 좋네.”

“아잠만 스탑. 니 먹는 속도 생각해보면 세 번 받고 끝이겠다.”

“아씨….”

“걍 좋게 생각해라. 많이 먹고 키가 여서 더 클 수도 있다이가. 내 솔직히 중학생때부터 니 키크는거 보고 되게 신기했다. 뭐 먹는 것도 없어 뵈는데 쑥쑥 크는게 죽순같드라 죽순.”

“이게 다 콜라를 안 무서 그렇다. 알겠나?”

“니 콜라 말고 사이다는 잘만 묵는다이가.”

“콜라랑 사이다가 같나?”


대화를 하거나 안 하거나 정희찬 밥 먹는 속도는 비슷했기 때문에 기상호는 일부러 말을 많이 하면서 제 식사 속도를 늦췄다. 오랜만에 같이 밥을 먹으니 좀 신났기도 했다.


“근데 니 진짜 숙소 들어와서 사는 건 진지하게 함 생각해봐라. 숙소 옮기면은 다은햄이 집에있는 플스도 갖고온댔다이가.”

“우리 집에도 있는데 무슨.”

“누나한테 맨날 밀려가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유치한 말다툼이긴 했으나, 어쨌든. 그러다 보니 정희찬도 감시받는다는 생각은 덜 드는 모양인지 먹는 속도도 제법 빨라졌다.


“니랑 할라고 겜도 하나 봐둣다. 올 가을에 나온다드라.”

“뭔데?”

“NBA 3.5K 613.”

“오, 그거 나도 관심 있었는데.”

“그제? 재밌을거라니까. 맞다, 희차이. 니랑 내랑 같이 세리머니 하나 안 만들래? 니 증량 성공하고나면 이제 전처럼 안 가볍다는거를 과시하는거다. 내가 니 안아들라카다 무거버서 떨어트리는 연출 어떻노?”

“하다가 다치면 준수햄한테 디질 것 같다.”

“…어떻게 안 다치게… 하는 척만….”


대화는 어느새 자연스레 새 숙소로 이사 간 후에 할 게임 이야기, 그리고 세리머니로 흘러갔다. 어쨌거나, 기상호가 있는 한 정희찬의 증량은 순조로울 것 같아 보였다.

이현성이 교장과 협상해서 얻어내기로 한 집이 사실은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 집값이 경이적으로 싼 곳이라는 사실은 선수들의 사기를 위해 차마 밝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전, 희망이 가득한 여름날이었다.


12년도 배경으로 썼습니다. 이유는 그냥 제가 작중배경 12년도 기준으로 지삼즈랑 동갑이라 학교배경설정 등등 표현이 그나마 용이해서…

갑타 완결 전에 썼던거라 쬐애애애애애끔 수정했습니다. 오탈자도 하나… 멋진 합작(무려 익명 참가가 가능한) 열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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