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失

[빵준] 喪失 (起)

상실:desiderium

"야, 전영중. 문 열어."

 

인터폰 화면 너머에는 제법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이 누구인지 전영중은 쉬이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기억 속 마지막 모습과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 조금 달랐다. 앳된 고등학생의 티를 벗고 이십 대의 중반을 내달리고 있는 듯한 얼굴. 잘생긴 건 여전해서 분명 동갑일 텐데도 한두 살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전영중은 그게 못내 억울하기까지 했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찾아왔다.

무려 7년 만의 일이었다.

喪失

상실:desiderium

성준수는 얼빠진 표정을 한 전영중을 제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제집처럼. 야, 좀 비켜봐. 그 당당할 정도의 뻔뻔함에 전영중은 잠시간 성준수가 말한 그대로 옆으로 한 발짝 옮겨 서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의 뒤통수를 마주하고 나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준수야,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민폐야. 전영중은 한껏 곤란한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정말 곤란했으니까. 그 말에 성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나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문제였으나, 전영중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성준수는 픽 웃더니 덧붙였다. 거 봐. 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너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전영중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순간 느낀 어떤 강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그게 언제였는지,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찝찝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필시 꿈이다. 전영중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제가 아는 성준수가 아무리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마이페이스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7년 만에 예전 소꿉친구를 찾아와 집안을 활보할 놈은 아니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질 않았다. 플레이오프가 끝난 건 한참인데, 이제서야 그때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올 수도 있는 것일까. 결국 전영중은 남자를 등지고 집 밖으로 빠져나오길 택했다.

1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경쾌한 엘리베이터 알림 소리에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6월의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했다. 여름의 전조였다. 아침 드라마의 소재로도 쓰지 못할 정도로 흔하디흔하게 흘러가던 일상. 그 속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벤트는 전영중에게 자신의 인생이 어쩌면 어떠한 이야기의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전영중 자신이라면 악인은 누구인가. 단지 내의 산책로를 정처 없이 걸으며 고심하다 결론 내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영중이 아니라 성준수이며, 악인은 그를 집안에 모른 척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온 전영중 자신이라고.

피부 위로 와닿는 햇살과 선명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이제야 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전영중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이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다른 누구와도 아닌, 오로지 혼자.

사실 2년 전까지는 구단 내 숙소 생활을 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따로 독립해 있었다. 한 치 앞도 알기 어려운 게 사람 일이다. 전영중의 독립 또한 그러한 많은 경우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 전영중의 인생은 대체적으로 그러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원중고에 입학을 했고, 지속적으로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주전에 이름을 올렸고, 그 덕에 제 이름 아래 실적이 쌓여갔고, 당연한 수순으로 좋은 대학에 갔다. 프로 드래프트도 걱정과는 다르게 순조로웠다. 그 사이사이 남들은 잘 모를 위기 상황들이야 늘 있었지만, 전영중은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왔다. 전영중은 제 인생을 굴곡 없는 완만한 곡선이라 생각했다. 조금 전 겪은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먼 옛날부터 그랬다. 무난한 전영중의 인생에서 항상 변수를 만드는 건 성준수였다.

전영중은 현관문 앞에 서서 괜히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하하, 쫄지 마. 그렇게 괜히 스스로를 향한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천천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잡아당겼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자신이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준수가 가지런히 벗어둔 신발 한 켤레마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전영중의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크흠. 큼. 흠흠. 일부러 목청을 풀며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방으로 쓰기 위해 늘 비워두는 방에서 성준수가 나와 얼굴을 비췄다. 들어오는 소리 다 들었는데 뭘 또 오바하고 난리야. 짜증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말투는 퍽 다정했다. 전영중이 모르는 7년 동안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 전영중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는 것처럼, 성준수 또한 이전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준수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상대에게 전영중은 괜히 심사가 꼬이는 기분을 느꼈다.

 

"계속 여기 있으려고?"

"그럼 어쩌라고. 내가 나가길 바라는 눈치다?"

"집은 어쩌고. 갑자기 찾아오면 나도 당황스럽지 않겠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됐고, 나는 안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준수야, 통보만 하면 끝이야?"

"어. 그냥 그렇게 하려고."

"……."

 

원래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뻔뻔함에 전영중은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항상 집이 혼자 살기엔 너무 크지 않나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나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떻게 또 빈방인 줄 알고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성준수 눈썰미 하나는 여전했다. 아, 누가 쓰든 그 방 주인을 쫓아낼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자 전영중은 부러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생각을 감췄다. 그 모습을 본 성준수가 뭘 또 웃냐며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았다. 전영중은 웃지도 못하게 하냐고 반박하려다 말았다. 그 정도의 가벼운 말장난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야, 설마 옷 다 치웠냐?"

 

붙박이장 문을 열어 본 성준수가 물었다. 전영중을 혼란 속에 떠밀어 놓고 성준수 본인은 그저 태연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지러웠다.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성준수의 목소리는 계속 웅웅 울리고, 모든 것이 기가 차서 울컥 서럽기까지 했다. 머리가 아팠다. 전영중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몰라. 무슨 옷?"

 

겨우 내뱉는 말이 그거였다. 몰라. 성의 없이 툭 던지는 말. 말이라기보다는 음절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입 밖으로 나온 그 소리에는 어떠한 깊은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으니까. 의미가 없는 소리는 단어가 될 수 없다.

 

"왜 또 짜증이야."

"몇 년 만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마음대로 방을 차지하질 않나, 옷 내놓으라고 하질 않나. 그런데도 내가 짜증이 안 나겠어? 준수야, 아직도 상식이 고등학생에서 멈춰 있냐고."

"그래서 아까 물었잖아. 그냥 나가줄까? 근데 니가 아무 말도 못 했잖아. 너 또 후회할 거잖아."

 

그놈의 또. 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또 짜증이야. 또 후회할 거잖아. 전영중은 성준수를 전혀 모르겠는데, 성준수는 자꾸만 전영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척을 한다. 전영중도 성준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7년의 공백은 그 치기 어린 자신감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존심 세워가며 네 생각쯤은 훤히 보인다고 큰소리치던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었기에, 전영중은 오기 대신 질문을 택했다. 연락 한번 없다가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좀 더 정확하게는 전영중의 집 한 편을 무단 점거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우습게도 성준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뭐 하게, 라든가 그냥, 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얼버무린 것도 아니었다.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보인 건 명확한 표정 하나였다. 전영중은 그 표정의 뜻을 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치켜 올라간 눈. 당장에라도 탄식을 뱉을 것 같이 약간 벌어진 입. 명백히 어이없다는 의미다. 그 표정에 전영중은 캐묻기를 포기했다. 더 물어봤자 똑같은 대답만이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야, 나와 봐. 그렇게 말하며 성준수는 방문 앞을 가득 막고 있는 전영중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괜한 심통에 힘을 줘 버텨볼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제 질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명해 주지 않는 성준수가 무엇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반쯤은 체념한 마음도 있었다. 옛날이라면 어떻게든 성준수를 이겨 먹고 싶어 했을 텐데. 스물여섯의 전영중은 그때와는 달랐다. 성인이 되며 여유를 얻은 덕도 있었지만, 그냥 너무 오랜만에 보게 된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예전만큼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다.

성준수가 향한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제집처럼 단 한 번 헤매지도 않고 잘도 찾아내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전영중은 근처 벽에 삐뚜름 기대선 채로 성준수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전영중 옷이라도 뺏어 입을 심산인 것 같았는데 계속 두리번거리는 꼴을 보니 무언가 찾는 것이 있어 보였다.

 

"와, 진짜 다 치웠냐."

"대체 뭘."

"내 옷."

"뭔 소리야, 준수야, 아까부터 계속."

"전영중, 너야말로 계속 모른 척이잖아, 지금. 적당히 해라. 개빡치니까."

 

그러더니 성준수는 드레스룸 구석에서 제법 부피가 있는 박스를 찾아냈다. 위에 먼지가 제법 쌓인 박스를 대충 털어내고 테이프를 뜯어냈다. 박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릴 듯이 고개를 박고 뒤적거리더니 옷을 뭉텅이로 꺼냈다. 검은색 무지 티셔츠와 아무리 생각해도 전영중에게는 조금 작아 보이는 옷들. 그런 것들을 정리한 기억이 없는데 참 이상했다.

성준수는 그제야 만족한 듯이 옷을 가득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손님용 방으로 빼둔 공간이었던 곳으로. 전영중의 곁을 스치듯 지나치는 성준수의 뒤로 방안의 냉기와는 조금 다른, 그런 바깥 공기의 향이 늘어졌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이 익숙하면서도, 바깥의 후덥지근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낯선 향. 전영중은 말없이 성준수를 졸졸 뒤따라갔다. 모든 게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라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거실의 큰 창 너머로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풍경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전영중은 어느 날의 짙은 여름을 겹쳐 보았다. 여름 내내 물과 햇빛을 잔뜩 머금어 새파랗게 잎을 틔운 교정의 나무. 그 아래 생긴 깊은 그늘과 그물 같은 햇빛 무늬. 하복은 나 몰라라 사복을 입은 채, 나를 기다리던 성준수. 학교가 조금 더 멀던 나를 기다리기 위해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던 성준수. 나를 발견하고 살며시 고개를 들던 얼굴을 보면 나는 속절없이 기뻤다. 가끔은 아침잠이 부족한지 눈이라도 감고 있을 때면, 네가 오래 기다릴까 봐 연습 시작도 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오던 것도 잊고, 햇빛이 그물처럼 무늬를 새긴 그 잘생긴 얼굴을 조용히 훔쳐보다가, 또 훔쳐보다가, 들키기 직전에야 이름을 불렀다. 준수야, 성준수. 빨리 아침 연습 가야지. 너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거야? 정했어? 그럼 너는 무심히 말한다. 원중 가겠지. 뻔하지 않냐. 너도 그럴 거잖아. 같이 가겠지. 그럼 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곤 했다. 같이. 같이 가겠지.

 

"야, 뭘 그렇게 멍때려."

 

그 부름에 전영중은 퍼뜩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때의 앳된 성준수는 사라지고 낯선 모습의, 다 커버린 성준수가 눈앞에 서 있다. 어디 아프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때를 떠올렸다고 말하기엔 쪽팔려서 그랬다. 대신에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같이, 라는 마지막 말은 혼자 삼켰다. 그 말에 성준수는 뭘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전영중이 했던 질문들 중에 그나마 유의미한 답변이 돌아온 것이었다.

 

"몰라. 그래도 아마 올해 말까지는 있겠지?"

 

그 말끝에 성준수는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전영중이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어떤 존재였는가.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존재였다. 언젠가부터 항상 함께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고작 4학년이면서 6학년을 때려눕혔다길래 엄청 무서운 놈인 줄 알았는데 지내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성질 더러워 보여도 사실은 누구보다 열정적이면서도 다정하고.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전영중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는 늘 붙어 다녔다. 친구들은 성준수를 찾기 위해 전영중을 찾아왔고, 전영중을 찾기 위해 성준수를 찾아갔다. 관심사도 같았으니 매일 함께 공 튀기며 살았다. 말 그대도 종일 붙어있다는 게 과언이 아닌 사이였다. 그땐 그게 참 당연했다. 성준수가 부산으로의 전학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애는 무슨 상황에서든 농구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전학을 가서 성공할 확률이 얼마든, 성준수는 개의치 않았다. 전영중도 알고 있었다. 사실 남는 것보단 떠나는 것이 더 높은 확률을 갖는다는 것을. 그러나 전영중은 확신이 없었다. 농구를 계속해도 될지, 혹은 그만두어야 할지. 그래서 선택을 미뤘다. 선택을 미루면 외부 상황이 어떠한 결정을 전영중 대신 해주게 될 것이니까. 운 좋게 주전이 되긴 했지만, 전영중은 내심 성준수가 부러웠다. 성준수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망설임 없이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경과 열등감은 정말 한 끗 차이라서, 그때부터 참 헷갈리기 시작했다. 성준수를 좋아하는지, 미워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원래 감정이라는 건 이렇게나 다채롭고 복잡하다. 그때는 그 사실을 몰라서, 하나의 답을 내리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애초에 같은 것을 두고 구분하려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는데도. 그래서 답이 없는 문제를 안고 골머리를 참 많이도 썩였더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대회에서 얼굴을 보게 된 성준수. 그 모습에 괜히 심사가 꼬였던 것 같다. 중요한 시기에 전학 가버려 출전 정지 먹고 경기는 뛰지도 못하고, 답도 없는 팀에 남은 제 소꿉친구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동정하기엔 그 누구보다 그런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성준수를 알아서. 전영중은 비꼬는 것으로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대신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어렸던 나날이다. 어쩌면 쌍용기 지상고와의 시합에서 깨달았던 것도 같다. 제가 알던 성준수는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고. 서울을, 원중고를, 전영중의 곁을 떠나던 그날로부터 성준수는 이미 닿지 않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을 것이라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버렸을 것이라고.

그 이후 대통령기 때는 어땠더라. 성준수에 대한 전영중의 기억은 이쯤부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화해를 했었나.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 같긴 한데. 본가 가려던 성준수 따라 대책 없이 서울 올라왔던 지상고 애들 덕분에 수학여행에 가까운 합숙 훈련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으니, 사이가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입시로 인해 삐그덕대던 관계의 회복기였다.

그 이후로 전영중은 성준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사실 소식을 알아보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접할 수 있었겠지만, 전영중은 굳이 알아보지 않았고 성준수는 굳이 전달하지 않았다. 소중한 관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필요에 의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결국 필요해지는 사이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만큼은 아니라서.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지금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모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듯이 성준수와의 인연 또한 성인 이후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된 이 모양새가 어이가 없었다. 뻔뻔한 태도와 다르게 말로는 집주인인 전영중의 나가라는 말 한마디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줄 것처럼 굴어서 더욱 그랬다. 올해 말까지 있겠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인지. 그 말을 할 때의 성준수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기묘해서, 전영중은 제 앞에 있는 것이 진짜 성준수가 맞는 것인지 의심까지 했더랬다. 이전만큼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으면서도 자꾸만 고민하게 되었다. 어쩌면 전영중의 바짓가랑이를 자꾸만 붙잡고 나아가지 못하게 묶어두는 과거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마주한 성준수와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과 반가움이 금세 사라져 버릴까 봐. 또 성준수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까 봐. 그 뒤의 허전함은 오로지 전영중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 생각에 전영중은 문득 때아닌 공허를 실감한다. 그래서 잡아보고 싶었다.

이번엔, 조금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성준수가 내 곁에 남아 있을 엔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전화번호를 얻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언제인지 기억도 흐릿한 조잡한 합동 훈련 이후 번호를 교환했던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다들 번호를 바꾸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받는 일이 생겼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조재석에게 연락하기. 비시즌의 뜬금없는 연락임에도 조재석은 반갑게 전영중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연락처 하나를 얻는 대가로 나중에 밥을 사기로 했다. 귀에서 피 좀 흐르겠네. 전화번호 하나 치고는 좀 비싼 값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본인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곧이어 톡방에 열한자리의 숫자가 도착했다. 그리고 하나의 말풍선이 더 도착했다.

 

【010-XXXX-XXXX】

【안 받으면 여기로도 해보세요】

【010-XXXX-XXXX】

【근데 어디에 쓰시려구용?】

 

그 메시지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영중이 형? 왜 읽씹해요? 그 아래로 말풍선이 연달아 올라왔지만, 그 또한 앞에 붙은 1을 없애기만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대신에 먼저 받은 열한 자리의 숫자를 눌러 통화 연결을 시도했다.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익숙하고 정형화된 여자 목소리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전영중은 곧바로 두 번째 번호로 연락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꽤나 오랫동안 연결음이 이어졌다. 바빠서 받지 못하는 건가. 끊고 메시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연결음이 뚝 끊겼다.

 

"여보세요."

─아, 네, 혹시 누구신지…?

"갑작스럽게 미안하다. 나…,"

─헉, 영중 햄?

 

기상호였다. 어쩌면 대통령기 이후의 성준수에 모습에 대해 저보다는 잘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학교 포인트 가드였던 진재유랑 더 가까웠겠지만, 그쪽은 아무래도 전영중 본인이 조금 불편해서. 대학 때도 그렇게 가까운 느낌도 아니었고. 차라리 햄이니 뭐니 처음 듣는 낯선 호칭으로 저를 부르는 기상호 쪽이 물어보기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빠? 바쁘면 나중에 연락하고."

─헉 그런 건 아니고…. 지금 히차이랑 놀고 있었어요, 햄.

"아, 그래서 안 받았구나."

─근데 영중햄, 무슨 일이에요? 저 번호도 바꿨는데 우예 아시고.

"미안, 조재석한테 물어봤어. 멋대로 알아내서 미안. 그냥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

─넵, 뭐든 물어보십쇼.

"우리 쌍용기 끝나고 있잖아."

─네.

"대통령기 때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 이후로 성준수랑 연락한 것도 없고. 그냥 어떻게 지냈나 아는 게 있나 싶어서. 그것 좀 물어보려고.

─…네? 그, 그,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아는 거 없어?"

─와 그러는데요?

"하, 나도 연락 하나 없던 놈 신경 쓰고 살기 싫었거든. 근데 걔 지금 우리 집에 와 있어. 7년 만에."

─잠깐, 잠깐만요. 참말로요?

"어. 내가 거짓말하겠냐."

─잠깐만요, 영중 햄.

 

야, 정히차이, 술 그만 먹고 들어봐봐. 영중 햄이 미쳤다! 휴대폰 너머로 그런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뭐라 뭐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더니 짧고 굵은 외침이 들렸다. 뭐? 진짜가? 그 뒤로 쑥덕이는 말들이 이리저리 뭉쳐 잘 들리지 않았다. 전영중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성준수의 안부를 내가 묻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괜한 억울했다. 아무리 고등학교 때 만나기만 하면 괜히 빙글빙글 웃는 낯짝으로 시비 아닌 시비를 걸긴 했다만, 잘 풀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아직도 남았길래.

 

─여보세요?

"응. 편하게 말해."

─준수 햄은 대학 가서 프로 갔고, 지금은 저희랑도 연락을 잘 안 해갖고…, 잘 모르겠네요.

"그게 그렇게 당황할 일이야, 상호야?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와하하, 내가 그 정도로 우스워 보이나 봐?"

─영중 햄, 저 지금 햄의 돌아있는 눈동자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데여.

"와, 알면서도 지금 그러는 건가, 상호는?"

─술자리 스페셜리스트 the 기상호, 지금 다른 사람들이 찾고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크크큭.

"야, 정희찬이랑만 있다면서 뭔 개구ㄹ…, 와 끊었어."

 

다시 전화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투성이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열린 거실 창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실 창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발걸음을 돌렸다. 닫혀 있는 성준수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얘기한다. 비 와, 창문 닫아. 그 말에 성준수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통화 소리 다 들리더라. 그 말에 걱정이 앞섰다. 다 들었을까. 여전히 성준수에게 의문만을 가득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영중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결국 도망치듯 제 방으로 피신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발단은 며칠 전이었다. 공식적인 대학 동창회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익대와 오랜 라이벌 포지션인 성연대가 대학 농구 리그에서 맞붙는 날이었다. 두 팀 모두 무패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리그 1등을 놓고 겨루는 자리이기도 했다. 과장 조금 곁들이면 농구뿐만 아니라 대학 자체로도 주성전이니 성주전이니 시끄러운 것을 온 국민이 다 알 정도였으니까. 이런 자리에 졸업생이 빠질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에서 뛰고 있는 선배들이 응원석에 앉아 후배들 기를 살려주는 행위였다. 너희 대학보다 우리가 더 낫다. 그런 식의 암묵적인 기 싸움이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본다면 참 우스운 꼴이긴 했다. 전영중도 이 행위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지국민 같은 애들이나 목숨 걸고 참여할 이벤트. 딱 그 정도의 감상. 그래도 동기들이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같이 가자는 이야기에 대놓고 바쁘다거나 싫다는 이야기는 못 했다. 기 싸움이 의미 없다 느끼는 것이지, 후배들 응원도 못 해줄 정도로 박한 선배는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에 보는 동기들은 서로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으니, 서울에서 다 같이 얼굴을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전영중은 학교에서 관계자석으로 따로 빼준 자리에 앉아 동기들과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나 나눴다. 옆에 앉은 지국민은 다음 주에 이휘성도 서울 올라온다던데 같이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비시즌인데 시간 내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전영중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 앉은 동기가 전영중을 툭 치며 인사를 해왔다. 전영중은 꽤 오랫동안 머리를 굴린 후에야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야, 전영중. 오랜만이다?"

"그러게. 재완이, 너는 잘 지내?"

"그럭저럭. 소식을 좀 늦게 전해 들었는데, 좀 괜찮냐?"

"……? 뭐가?"

"아니, 그 뭐냐, 작년에…,"

"야, 한재완, 그걸 왜 물어ㅂ,"

"선수님, 혹시 사진 같이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리둥절한 전영중을 대신하여 오지랖 넓은 지국민이 대화를 덮으려 할 때, 한 팬이 말을 걸었다. 한재완 입장에서는 모르겠으나, 지국민 입장에서는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전영중에게도. 건네는 핸드폰을 들어 셀카 한 번 찍어주자, 그 뒤로 놀이기구 대기줄마냥 긴 줄이 생겨났다. 전영중에게도 나이스 타이밍이라는 이야기 취소. 제법 많이 몰려든 팬들과 사진을 찍는 내내 한재완이 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경기 시작 10분 전, 사진 찍을 순간을 기다리던 팬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덕에 다들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시합을 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후반부터는 주익대로 흐름이 완전히 넘어가 일방적인 경기가 됐다. 15점 차로 경기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후배들에게 격려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회식이 잡혔다.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에서 혼자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다들 절주하겠다고 했으나, 체육계 사람들답게 조금만의 기준이 남달랐다. 종래엔 전영중도 술을 좀 마시고 나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재완이 묻고 싶던 작년의 일이란 무엇인지 찝찝함만 남은 채로.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취한 것도 아닌데 술 냄새 가득 풍기며 들어온 전영중 모습에 성준수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사실 전영중은 입만 댄 수준이었는데도. 제법 억울했으나 농구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자기관리 엄격한 성준수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비시즌이라고 운동 안 하냐?

 

"준수야, 안 하겠냐?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도 매일 출근해서 오전부터 꼬박꼬박 개인 연습 죽도록 하다가 오거든? 준수 너는 집에만 있어서 잘 모르나 봐?"

"뭔 말을 못 해. 알아, 너 열심히 하는 거. 비꼰 건 미안하다. 아니면 너도 나랑 아침에 러닝 같이 나가든지."

그 이후로 매일 아침 러닝을 함께 했다. 구단 체육관까지는 먼 거리도 아니라 잠도 깰 겸 제법 효과적인 운동이었다. 예전에도 종종 뛰어서 출근을 했던 것 같은데, 전영중은 그 사실을 왜 새카맣게 잊고 살았는지. 체육관 앞에 도착하면 성준수는 전영중을 배웅해 주고 돌아갔다. 도통 무얼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데도 전영중은 여전히 성준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오늘도 전영중은 더플백 둘러메고 신발 끈 꽉 조여 매고 집을 나섰다. 성준수도 검은색 러닝화를 신은 채였다. 해가 뜰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도 구름이 많이 낀 탓에 어두웠다. 절반쯤 달렸을 때, 길에 하나둘씩 작은 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였다. 금방 그치겠거니 싶어 몸을 피할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보이질 않았다. 비는 점점 굵어졌다. 전영중은 일기 예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뛰다가 겨우 편의점까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비라 우산 재고가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작은 투명 우산 하나가 다였다. 아쉬운 대로 그것이라도 사야만 했다. 우산은 전영중이 들었다. 성준수는 어쩔 수 없이 전영중 가까이 붙었다. 190 언저리의 두 운동선수가 들어가기에 우산은 너무 비좁았다. 장난감 우산처럼 보일 정도라 가엽기까지 했다. 이미 머리며 옷은 다 젖은 상태였다. 욕조에 푹 담갔다 꺼낸 상태와 다름없었다. 결국 전영중은 체육관에 가기보다는 집으로 향하는 걸 택했다. 시즌이 코앞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겠거니와 전영중 본인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6월이었으니까.

손바닥만 했던 우산은 여러 번 바람에 뒤집힐 위기를 겪었다. 너무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전영중은 뻣뻣하게 굳었다. 어후 씨, 추워 죽겠네. 옆에서 성준수는 달달 떨면서 중얼거렸다. 원래도 하얀 놈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전영중은 쓰나 마나 한 우산을 익숙하게 성준수 쪽으로 기울였다.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비속에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늘 완전히 텄네. 집에 도착해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고 성준수부터 욕실로 밀어 넣었다. 성준수는 괜찮다며 순서를 양보했지만, 시허연 얼굴을 한 놈의 순서를 뺏으면 전영중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전영중은 닫힌 욕실 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잘못 봤으려나. 그렇게 생각을 해도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푹 젖은 옷과 다르게 하나도 젖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 성준수의 머리카락이.

"게살매콤리조또 하나랑 찹목살스테이크랑 또 감자크림뇨끼랑 어니언 감자튀김이랑 오므라이스랑…,"

"지금 주문을 하는 거야, 메뉴판을 읽는 거야?"

"당연히 주문을 하고 있잖아. 준수야, 파스타도 더 시킬까?"

"네 맘대로 해."

"핫스파이시해산물 파스타까지 주세요."

 

고작 두 명이면서도 4인석 테이블에 앉은 이유가 충분했다. 한가득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외출다운 외출은 처음이라서 그랬다. 적당히 친했던 고등학생 때는 마주 앉아 급식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전영중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 선명하게 기억날 리 없었다. 참 이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준수에 대한 기억 하나만 흐릿하다는 것이. 전영중은 그것이 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세월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월이 지워가는 기억에 대해서는 선택하는 법도, 거절하는 법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흐릿한 건 당연하다. 어린 시절 지겹도록 붙어 다니던 성준수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여전하네. 혼자서 머리를 핑핑 굴리고 있는 전영중을 향해 성준수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무엇이 여전하냐는 전영중의 말에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냐며 질문으로 대답했다. 성준수에 대한 무엇 하나 알아내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쫄딱 비에 젖고 온 그날 이후로 전영중은 그 많은 궁금증을 그저 눌러놓을 수 없었다. 대화할 기회라도 만들어 보고자 노력한 결과가 오늘의 외식 자리였다. 매장 안에 있는 자리가 다 차자마자 줄줄이 웨이팅 생기기 시작하는 인스타 맛집 분위기의 식당에 성준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예약까지 해 둔 수고로움을 생색낼 명분이 없어졌다. 왜 만인의 데이트 장소 같은 곳에 왔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왜 많고 많은 식당 중에 여기였을까. 대화라면 집에 있는 넓은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충분히 가능했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전영중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꼬였다. 이걸 풀어서 깔끔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혼자 생각하다 괜히 시무룩해진 전영중 표정을 눈치챘는지 성준수가 말했다. 야, 싫은 게 아니라 또 너 알아보는 사람 있어서 불편할까 봐 걱정됐던 거야. 표정 풀어. 그 담백한 말 하나에 마음이 풀렸다. 전영중이 안도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준수가 여전히 자신이 아는 성준수 같아서였다. 성준수는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이 전영중이 알던 성준수.

전영중은 성준수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타이밍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칫상처럼 세팅되는 음식들을 바라만 보다가 포크부터 들었다. 먹으면서 조금씩 눈치보다 적당한 타이밍에 그동안의 의문들을 하나씩 물어볼 생각이었다.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니 입은 오히려 조용했다. 성준수는 웬일로 조용한 전영중을 빤히 쳐다봤다.

 

"잘 먹네."

"너는 어때?"

"괜찮네. 맛있어."

"다행이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컥."

 

전영중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힘들겠다. 다 티 나. 성준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전영중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성준수 앞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결국에는 뜸을 들이고 또 머뭇거리다 겨우 한 가지 질문을 내뱉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전영중, 너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뜬금없이 찾아와서 내 집까지 차지하고 있는데,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어?"

"……."

"어떻게 지냈어?"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해?"

"어? 뭐라고?"

 

전영중은 억울했다. 단순히 가십을 캐기 위해 물어본 것도 아니고 진심 가득한 걱정과 관심을 담은 질문이었는데. 게다가 누구라도 궁금하지 않겠는가. 7년간 연락 끊긴 소꿉친구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어쩌다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런데 돌아오는 게 고작 저런 대답이라서.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아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누그러진 말투였다. 전영중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느물느물 사람 깔보는 것도 아니고. 역시 제가 알던 성준수가 아닌 것 같았다.

 

"준수야, 내가 왜 쳐다보고 있겠어."

"왜? 뭐가 또 불만인데."

"뭐가 불만이냐니. 너 방금 그렇게 말하고도 그런 얘기가 나와?"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왜 또 짜증이야, 전영중. 뭐 물어볼 거 있다며. 안 묻고 멀뚱멀뚱 보기만 하길래 왜 보냐고 물어본 게 화낼 일이냐?"

"어?"

"……?"

 

성준수의 표정은 진심으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지, 내가 진짜 잘못 들었나. 전영중은 그렇게 생각하며 멋쩍게 뒤통수나 긁적였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아냐, 그냥 잘 지냈나 물어보려던 거지."

"뭐 당연한 걸 묻냐. 보이는 대로지."

 

그러냐. 전영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접시에 애매하게 남은 구운 가지나 포크로 쿡쿡 찔렀다.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대화가 이상하게 엇나가거나 겉돌 것 같다는 예감만 들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어색함. 전영중은 그저 캐묻지 않기를 택했다. 그러한 무던함은 전영중의 장점이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전영중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성준수는 조수석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운전대를 잡은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가 보였다. 성준수의 옆모습이, 그 배경과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전화 기다려? 왜 자꾸 핸드폰을 봐."

"아니 뭐, 그냥…."

"애인 생겼냐? 그새?"

"교진아, 그만 해."

 

짓궂게 묻는 박교진을 제지한 건 이휘성이었다. 전영중 놀리기에 동참할 줄 알았던 지국민도 괜히 눈치나 보고 있었다. 전영중은 묘하게 낯선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원중고 친구들이었다. 얼마 전 후배들 경기에서 본 지국민이 오랜만에 다 같이 보자던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법 구색을 갖춘 모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짐승 같은 위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메뉴는 한정적이었다. 서로의 알몸까지 공유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하루도 빠짐없이 공유한 사이인데 만남의 장소는 편할수록 좋았다. 결국 이야기의 배경은 언제나처럼 자주 가던 단골 고깃집이었다.

소주 두 병 추가로 주문하면서도 전영중은 핸드폰을 연신 바라봤다. 이유는 성준수였다. 외출하는 전영중을 두고 운동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서던 성준수. 생각해 보니 도어락 비밀번호를 성준수에게 공유해 준 적이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마음대로 집에 들어왔다며 어이없어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할 성준수가 내심 걱정이었다. 물론 전영중이 아는 성준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지만, 끈적끈적해지기 시작한 이 여름밤의 공기 속에 홀로 내버려질 성준수가 자꾸만 머릿속에 불편하게 들어앉아서. 비가 올 수도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우산은 챙겨갔으려나.

머릿속을 채운 걱정은 떠날 생각을 하질 않는다. 전화번호조차 달라고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뒤늦게 후회했다. 머뭇거리다 후회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그래도 마음속 어딘가에 성준수는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저장되지 않을 번호로 메시지가 도착하지는 않을지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애인이냐는 박교진의 말에 파드득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심코 한 행동이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였을까. 나쁜 짓을 하는 어린아이마냥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쿵쿵. 술 때문인가. 귓가에서 심장박동이 울렸다. 전영중은 그 요란함을 숨기려 웃음을 긁어모았다. 자신에게만 들릴 소음을 무던한 표정으로 덮으려 애썼다. 왜냐하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성준수는 전영중의 애인이 아니었으니까. 성준수는 전영중의 걱정이 없어도 멋있게 살아갈 놈인데 괜히 원치도 않는 걱정을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결국 전영중은 폰을 테이블 끝으로 치워버렸다. 걱정해 줘봤자 욕만 할 텐데, 뭐 예쁘다고. 순간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야, 전영중, 딴생각 중이냐? 고기 타잖아. 그럴 거면 집게 넘겨. 그 말에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던 전영중이 현실로 돌아왔다. 테두리가 조금 탄 고기를 불판 가장자리로 빼두며 그냥 자기가 먹겠다고 했다. 이 새끼 고기 혼자 다 처먹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는 장난에 전영중은 그저 사람 좋게 웃으면서 얘기한다. 얘들아, 고기 더 시키자.

선홍빛 생고기가 테이블 옆에 놓였다. 불판 위에 고기가 닿는 소리가 주변의 소음에 묻혀 금방 사라졌다. 전영중은 소리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홀로 고요했다.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것을 내보여도 되는지 혹은 그저 묻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표정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눈치챈 지국민이 장난스레 물었다.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성준수 말인데."

"……."

"걔 지상고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농구했었나?"

 

결국 전영중이 묻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해도 되는 말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문장 끝에 물음표까지 찍은 후에, 전영중은 자신의 판단이 오답이었음을 깨달았다. 순간 자리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사이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옅은 책임을 느낀 지국민이었다. 프로 뛰긴 했었지. 그 대답마저 시원치 않았다. 전영중은 왜 애매한 과거형이냐고 되물어 보려다 말았다. 이것만큼은 물어보아선 안 될 것 같았다. 뭐든지 타이밍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지금, 이 공간에서는 부적절한 대화였다. 전영중은 대신 다른 질문을 택했다.

 

"혹시 여기서 최근에 성준수 뭐 하고 살았는지 아는 사람. 걔 졸업 후에."

 

우리 중에서는 네가 제일 친했잖아. 너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아. 셋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전영중은 금방 수긍했다. 맞아, 그랬지. 준수는 거의 나랑만 친했었지. 그렇게 말하며 괜히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라도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숨기려고 애썼다.

 

"영중아,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좀 됐긴 한데, 갑자기 성준수가 찾아왔어. 뭐 하고 지냈냐고 물어도 전혀 말을 안 하더라."

"그냥 그러다 갔어?"

"아니? 걔 지금 우리 집에 눌러앉았어."

"……."

 

불판을 앞에 두고도 어쩐지 싸늘했다. 넷을 휘감는 이상한 기류. 한여름이 다가오는데도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전영중은 저를 쳐다보는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의문은 침묵이 된다. 모두가 어떠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입을 다문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

화르르륵. 오랫동안 방치된 고기에서 떨어진 기름을 먹고 몸집을 키운 불이 더 많은 것을 집어삼키고자 했다. 욕심이 과했다. 그 모습에 침묵은 산만하게 깨졌다. 황급하게 집게를 들고 고기를 불판 위에서 떼어 놓고, 불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 나서야 뒤집어 내려앉았다. 숯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잠잠했다. 참 자비롭기 짝이 없다.

 

"그런데 너 안 친했다며. 우리 3학년 때 만났을 때 걔 성질 장난 아니었잖아."

"적당히 친했어. 그러니까 지금 찾아왔겠지. 그리고 교진아, 네가 먼저 준수 속 박박 긁었잖아."

"야, 그건…,"

 

네 성질머리가 더 했어. 그 말에 나머지가 크게 웃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장난스러운 대화 톤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전영중은 해소되지 못한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까끌까끌하게 걸리는 것 같았다. 그게 못내 불편했다. 그래서 괜히 고기를 입에 욱여넣고, 술잔을 들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유 모를 두려움의 식욕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스무 살 이후의 첫 과음이었다. 그때야 주량도 몰랐고, 선배들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목구멍에 털어 넣었으니 그랬다 쳐도. 스물여섯의 전영중은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대리 기사를 부르고 깜빡 잠이 든 순간 도시는 어둠에 푹 가라앉아 있었다. 다행히도 집 근처에서 귀신같이 깬 것을 보니 귀소본능이라는 게 있긴 한가 보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전영중의 이마를 간질였다. 곧 비가 올 것처럼 잔뜩 습했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습기에 많은 것들이 연상됐다. 여름. 비. 바다. 술 때문에 안 그래도 많은 생각이 맥락 없이 꼬이며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세상이 핑핑 돌았다. 졸음이 쏟아져 당장에라도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신이 모스 부호처럼 끊겼다가, 이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대리비를 건네고 눈을 길게 깜빡이자, 공동현관 앞.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엘리베이터 안. 한 번 더 눈꺼풀을 내렸다가 힘겹게 올리니 현관 앞이었다.

전영중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가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걔도 스물여섯인데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비밀번호를 몰라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것까지 전영중이 시시콜콜 챙겨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 어디에도. 도어락에 손등을 가볍게 가져다 대자 빛이 들어오며 키패드가 빛났다. 제대로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요란하게 경고음이 울렸다. 전영중은 괜히 허공을 보고 숨을 깊게 뱉었다. 끈적한 공기 사이로 술 냄새가 짙게 번졌다.

경고음이 잦아들고 난 뒤, 전영중은 다시 한번 비밀번호 누르기를 시도했다. 여덟 자리의 비밀번호 중 겨우 두 자리를 눌렀을 때, 저절로 문이 열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전영중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문 안에서 저를 마중 나온 얼굴을 보고서야 어색하게 웃었다.

 

"야, 시끄러. 내가 귀신이라도 되냐?"

"하하, 준수야. 그렇게 갑자기 문을 열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까? 나 문에 박을 뻔했어."

 

꼴사납게 비명 지른 게 쪽팔려서 연신 헛기침을 했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적인 움직임이라고 변명하려다 말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구차해진다는 것을 현재의 전영중은 알고 있다. 물론 그건 다짐뿐이라 취한 입은 제멋대로 생각을 웅얼웅얼 내뱉고 있었다. 그걸 들은 성준수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이다.

 

"전영중."

"어?"

"너 술 마셨냐? 내가 전에도 적당히 마시라고 했을 텐데."

 

네가 언제 그랬냐고 말꼬리 잡으려다 입을 닫았다. 저번 주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마신 게 아니라 정말 입에만 댄 수준이라 정말 억울한 경우였지만. 이 나이 먹고 동갑내기 친구한테 잔소리나 듣고 있자니 입이 댓 발 나왔다. 물론 성준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농구에 진심이고, 그만큼 자기 관리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으니 지금도 그렇겠지. 7년이라는 공백 사이에서도 전영중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부분이었다.

 

"야, 왜 억울한 표정이야. 걱정해 줘도 난리네. 아오."

 

성준수는 익숙하게 컵을 꺼내 정수기 물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를 더 얹었다. 탁.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지금 걱정을 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전영중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건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매가리 없는 팔과 축축 처지는 다리. 성준수와 대치하며 기 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순간 술기운에 머리가 핑 돌아 식탁 가장자리를 짚었다. 마주 선 성준수가 흠칫 놀라며 다가올까 말까 고민하는 낯빛을 띄웠다. 야, 너 괜찮아? 그 물음에 전영중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휘적였다. 빨리 들어가 자라는 의미다. 성준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야, 물 많이 마시고 자라."

 

전영중이 고개를 들자, 성준수의 등이 보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지겹게 보던 등. 같은 색의 유니폼이었던 적도, 다른 색의 유니폼이었던 적도 있었던 그 등. 참 많이도 봤던 등인데도 무척 낯설었다. 2주 전, 성준수가 저를 찾아온 처음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한 일투성이다. 성준수를 불러보려다 도저히 엄두가 안 나 물끄러미 그 등을 보고만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성준수가 홱 돌아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야, 뭘 멀뚱히 서 있어. 들어가서 자.

 

"……."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준수야."

 

그 뒤로 밖에서는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7월. 바야흐로 장마의 시작이었다. 비 떨어지는 소리가 소란하게 둘 사이의 거리를 채웠다. 공기 중에 가득 찬 습기가 전영중의 안에 울컥울컥 쌓였다. 그렇게 차올라 둥둥 뜨게 된 속마음이 난데없이 왈칵, 밖으로 내뱉어졌다.

 

"준수야."

"왜."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니면 자기 관리 못 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보여서 화내는 거야?"

"내가 화내는 걸로 보여?"

"아니었어?"

"하 씨, 걱정해 줘도 난리…."

"왜?"

"왜냐니."

"왜 걱정해 주냐고.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 아니잖아."

"영중아."

 

성준수가 퍽 다정하게 전영중의 이름을 불렀다. 전영중은 그것이 제 이름이 아닌 것만 같아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전영중은 자기가 생각보다 심하게 취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준수의 지랄마저도 부드럽게 들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왜?"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니까."

"…준수야, 혹시 나 많이 취했냐?"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서 자라. 아침에 해장 잘하고. 해장국까지 끓여줄 실력은 없다."

 

성준수의 등이 방문 너머로 사라진다. 거실에는 난데없는 성준수의 말에 얼빠진 전영중만 남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성준수가 내려놓고 간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컵 표면에 맺힌 물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여전히 빗방울들은 세차게 창문을 때렸다. 창문에 맺힌 그 무늬들을 세고 있다가, 전영중은 이날 밤이 오랫동안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깜빡깜빡. 찬물을 마셨는데도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가 올라오길 반복했다. 전영중은 졸리다. 아니, 어지러운가? 사실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영중은 혼란스럽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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