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失

[빵준] 喪失 (承)

상실:desiderium

일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전영중의 평범하던 일상을 박살 내고 그 틈에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한 성준수가 사라졌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원래 그 자리가 제 것인 양 들어앉은 성준수가 전영중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데, 성준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왔다. 흐르는 듯 찾아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본격적인 여름이었다. 아스팔트가 뜨겁게 달궈졌다가 한밤중에야 겨우 식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아침은 낮에 비해 선선했는데, 그마저도 하루하루 날이 지나며 거짓 명제가 되었다. 슬슬 시즌이 다가오며 훈련 일정은 빡세졌지만, 전영중의 일정은 남들보다 여유로웠다. 대신 주기적인 병원 예약과 재활이 잡혀 있었다. 지난 시즌 말에 왼쪽 어깨 부상이 심해진 탓이다. 그 덕에 성준수와 함께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원래라면 훈련 후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그대로 뻗었을 텐데, 병원에 다녀온 정도로 체력이 바닥날 리 없었다. 그래서 해가 다 지고 난 뒤, 그나마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함께 러닝을 했다. 전영중의 몸 상태를 알게 된 성준수가 무심하게 말한다. 무리하지 마. 덧나. 툭 던지는 듯한 말투지만 이제 전영중은 안다. 그것이 저를 향한 걱정이라는 것을.

수풀 깊숙한 곳 너머에서는 매미가 요란하게 울고, 팔에 달라붙는 모기를 쫓기 위해 연신 손바닥을 내리쳤다. 이따금 멈출 때 번갈아 쥐는 휴대용 선풍기와, 길가에 세워진 밝은 가로등의 불빛, 그 아래 끈적하게 일렁이는 여름 공기까지. 전영중은 이 모든 게 평화롭다고 느낀다.

 

"앗 씨, 물렸어."

"그러니까 미리 기피제 발랐어야지, 준수야."

"아 씨바거, 발랐거든? 나만 물고 지랄이야."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안 그래도 새하얀 성준수의 팔에 시뻘겋게 부은 모기의 흔적이 보였다. 그 와중에 벅벅 긁지는 않고 그 위에 손톱으로 십자 자국만 겨우 낸 게 웃겨서 전영중은 픽 웃고 말았다. 그 모습에 눈꼬리 단단히 치켜올리며 불만이라는 표정을 지은 성준수가 전영중 등을 한 번 내리쳤다. 아야야야야, 아퍼, 진짜 아퍼. 전영중은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손이 매워 아픈 건 맞지만, 이 정도로 오바 떨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전영중의 꼴값에 성준수는 다시 한번 손바닥을 준비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는 어깨를 언급하며 구차하게 빌었다. 준수야, 나 어깨. 어깨 안 보여? 책임질 거야? 그게 먹혔는지 성준수는 손을 스르륵 내렸다.

다시 만난 성준수는 참 이상했다. 지랄맞을 땐 지랄맞아서 초딩 때부터 일짱 먹던 그 성준수가 맞는데, 유할 땐 엄청 유했다. 그게 참 의아했다. 물론 전영중은 성준수가 단순히 입 험하고 싸움만 잘하는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주변인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성준수의 성격은 그저 입시 스트레스에 한껏 예민해졌을 때의 단편이라는 것도. 까칠해보이는 성격과 냉랭해 보이는 얼굴 뒤에는 누구보다 곧고 깊은 속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저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라. 어렸을 때야 눈물 많던 전영중이 울고 있으면 묵묵히 다가와 달래주는 일이야 많았지만, 최근 느끼는 다정함과는 또 다른 결이었다. 수도 없이 얽힌 복잡한 감정선의 무언가. 어쩌면, 혹시 만에 하나 어쩌면, 성준수가, 나를.

야, 너 귀 빨개졌다. 무슨 생각 하냐? 성준수의 고저 없는 목소리 놀라 전영중은 몸을 뒤로 물렸다. 금방이라도 귀를 물들인 붉은 빛이 피부를 타고 볼에서 목, 목에서 손끝,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물들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차라리 모기에게 물려 붉어진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영중, 오늘 좀 이상한데."

"뭐가."

"뭔 일 있냐?"

"없어. 아 빤히 보지 마. 뭘 들여다봐, 자꾸."

"그런데 너 어깨는 괜찮냐."

"어? 응. 별거 아냐."

"뭔 일인데. 부상이 별거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이거 다 나았는데 그 뭐였더라…."

 

내가 왜 계속 병원을 다니고 있었더라. 전영중은 그동안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되짚어 보았다. 그저 습관적으로,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나날이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다쳤는지, 왜 아직까지 병원을 다니는지, 아픈 곳은 없는데도 왜 재활치료를 하는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점점 아득해지면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왜 지금까지 의문을 갖지 못했는지. 왜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왔는지. 문득 깨닫고 나니 온통 앞뒤가 맞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아! 생각의 연장선 끝에 감탄사로 문장부호를 찍었다. 그 소리에 성준수가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전영중을 보았다. 왜, 또 무슨 일인데. 말없이 표정만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 교통사고 났었어."

"뭐?"

"작년에. 작년 8월 말이었나, 9월이었나. 크게 교통사고 났었어."

 

이 사실을 왜 잊고 살았지. 지방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생긴 제법 큰 사고였는데도. 사고 후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천운이었다. 대가리가 깨지거나 다리 하나가 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몸은 금방 회복했지만, 시즌 중에 경기는 많이 뛰지 못했다.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었다. 지금 전영중 어깨에 여전히 들어앉은 것도 그때 들러붙은 악귀였다. 한번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고 제법 오래 가는 성질 고약한 녀석.

이제서야 전영중은 제가 운전을 오랫동안 그만둔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아마 사고 이후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운전대에 앉으면 그 사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를 테니까. 자신의 농구 인생을 끝내버릴 수도 있었던 그 찰나의,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할, 그 순간에 갇혀 살아야 할 테니까.

전영중은 가슴이 잔뜩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정상 궤도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도(正道)를 벗어난 끝없는 망각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제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성준수보다, 당장 작년의 일조차 무의식에 묻어버린 자신에게 큰 위화감을 느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곱씹을수록 불안했다. 이 사실을 잊고 살 수가 있나?

 

"야, 너 또 혼자 생각하지."

"어?"

"전영중, 내가 너 혼자 앓는 버릇 좀 고치라고 했지. 너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지는."

"내가 뭐."

"준수야, 너는 너무 고민 없이 직설적이잖아."

"원래 반대여야 잘 맞는다며."

"누가 그래."

"네가."

"언제?"

"옛날에."

 

하지만 그 옛날이 언제인지 전영중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 옛날이라 잊어버렸나. 누가 봐도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전영중의 얼굴에 성준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기억 못 할 줄 알았어. 그 말에 전영중만 머쓱해졌다. 성준수는 다시 작년의 교통사고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는 좀 괜찮아? 얼마 전에 보니까 운전은 잘하던데.

전영중은 어깨를 으쓱이며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때야 사고에 대한 걸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 때라, 다시금 생각난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성준수도 답답하게 애매한 답변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별말이 없었다.

 

"왜? 나 운전 힘들다고 하면 준수가 대신 해주게?"

"어. 해줄게."

"…진짜로?"

"아 씨, 뭘 자꾸 놀라. 드라이브 그거 뭐 어렵다고."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 집에 얹혀사는 거 미안해서 그런 거야? 양심은 있나 보다."

"쓸데없이 입 좀 놀리는 버릇 좀 고쳐야 돼, 너는."

 

전영중의 가슴팍을 툭 치면서 말하는 성준수. 약간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통해서 성준수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꺼낸 말이 농담 가득 섞인 채로 건네는 진담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어렵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렇게 한참을 시시덕거리며 걸었다. 현명한 답을 얻고자 한다면 현명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오늘 이 둘의 대화는 정확히 그 말의 대척점에 있었다. 고민과 깊이가 있는 질문과 답이 아닌, 대화 자체가 목적인 질문과 답. 7년의 벽은 전영중의 생각보다 훨씬 쉽게 허물어진다.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하는 건 어쩌면 전영중 혼자였을 테니까.

둘 다 천천히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매미가 몸 안을 움직여 짝을 찾는 소리가 선명했다. 후덥지근하고 끈적한 여름밤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로 여전히 이야기를 나눈다.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피부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공기가 오늘만큼은 불쾌하지 않다. 신기한 일이다.

"너 오늘 저녁에 일정 없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 당당한 태도는 뭐야?"

"없는 거 아니까."

"준수야, 진짜 뻔뻔하다."

"싫어?"

"어?"

"요새 왜 자꾸 얼빠진 대답이야. 싫으면 안 한다고."

"싫은 게 아니라, 아, 그냥 모르겠다. 그냥 살아. 그게 너다워서 좋아."

 

성준수는 싱겁다는 듯이 웃었다. 전영중은 여전히 자신이 알던 성준수와 제가 모르는 성준수, 그리고 가끔 마주하는 성준수가 아닌 것 같은 성준수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성준수였다. 준수, 준수, 성준수. 어떨 때는 게슈탈트 붕괴라도 왔는지 그 이름 석 자가 붕 뜬 듯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렇게 묻자 성준수는 이야기했다. 드라이브하러 가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전영중은 이미 정해진 일정을 자신이 까먹고 있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했다. 얼빠진 말만 한다고 지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성준수 네가 먼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나아간 채로 이야기하잖아. 그래서 그 거리를 메꾸기 위한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번듯한 모양새가 아닌 투박한 돌다리라도 좋으니까.

 

"약속했잖아."

 

어? 또다시 얼빠진 대답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기억을 더듬자 얼마 전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드라이브 그거 뭐 어렵다고. 그저 빈말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성준수는 그 말 하나 지키겠다고 며칠 동안 타이밍만 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전영중은 그 사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또 처웃는데. 뭐가 또 웃겨."

"하하. 아니, 그냥 너무 준수 너다워서."

 

이건 전영중이 아는 성준수. 제가 내뱉은 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지키고야 마는 성준수. 약속 하나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어쩌면 스스로의 말에 죽도록 최선을 다하는, 그런 성준수. 이런 식으로 제가 모르던 모습에서 느끼던 위화감이 벗겨질 때마다 웃음을 숨길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7년 그거, 별거 아니네. 딱 그런 감상.

갈 건지 말 건지 채근하는 성준수에게 전영중이 대답한다. 당연히 가야지, 가자.

지하주차장 한편에 주차되어 있는 전영중의 차로 향하는 내내 조용했다. 건넨 대화라고는 어디에 주차해 놓았냐는 물음과 방향을 알려주는 대답 정도였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차를 몰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고, 성준수의 생각은, 글쎄, 잘 모르겠다. 흥분할 때야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다 보니 성준수만큼 얼굴에서 생각이 읽히는 사람이 없었는데, 감정적 동요가 없는 성준수의 생각은 도통 읽어낼 수가 없다. 이건 전영중이 잘 모르는 성준수의 모습이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성준수가 운전석에, 전영중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서 바라본 성준수의 모습은 또 새로웠다. 시동을 걸고 액셀을 조심스레 밟아 조심스레 주차된 차를 빼내는 그 순간.

 

"준수야, 잠깐만."

"왜, 전영중."

"나랑 바꾸자. 그냥 내가 운전할게."

"왜 또 시비지?"

"시비가 아니라, 그냥 내가 할게."

"운전 못 할까 봐? 나 자주 했어. 설마 안 미덥냐?"

"평소처럼 시비 걸거나, 딴지 걸거나, 비꼬거나, 아무튼 그런 의도 전혀 없고 그냥 내가 한다고."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건 또 무슨 신종 개소리지."

"…멍멍."

"……."

"내가 할게. 빨리 내려."

 

결국 전영중은 성준수를 운전석에서 반강제적으로 쫓아냈다. 제가 운전을 해야겠다고 극구 고집을 피운 건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운전하는 성준수의 모습을 본 순간, 어떠한 강렬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준수가 운전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무시하기엔 목덜미까지 서늘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의 불길한 기운이라. 성준수만큼은 아니어도 전영중 또한 미신 같은 것들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무시할 수 없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준수에게 욕 한 바가지 얻어먹을 것 정도는 각오하고 억지를 부렸다.

사고의 기억이 떠오른 이후로 운전대는 처음 잡아봤다. 그 후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줄곧 택시를 탔기 때문이다. 조수석에 앉은 성준수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야, 그냥 안 가도 돼.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지만 전영중은 그걸 '쫄?'로 받아들였다. 그게 문제였다.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숨기려 괜히 핸들을 고쳐 잡았다.

사실 반은 객기였다. 남은 반은 괜찮을 거라는 허세였고. 그런데도 일단 액셀을 밟은 건 그 옛날 성준수의 말 때문이었다. 머뭇거리지 말라던 말.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그 말을 꽤나 자주 했었다. 아니, 자주는 아니고 딱 한 번. 단지 전영중이 그 말을 너무나 자주 곱씹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전영중에게 끈기가 있고 항상 중심을 지키는 아이라고 말했지만, 전영중은 그것이 제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영중은 아주 곤란한 상황들에서는 선택을 미루며 현재에 남기를 택했다. 눈물 많고 여린 속을 감추는 종의 가면이었다. 그게 남들에게는 끈기이니 의지이니 하는 것들로 비쳐지곤 했다. 역시 꿈보단 해몽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로지 성준수만이, 그 가면 너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해 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후련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영중은 그 말을 자주 되뇌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차에서 내릴 것인가, 일단 달려볼 것인가. 이왕 직감을 고른 마당에 전영중은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하기로 했다.

원래 어디로 갈 거였는데. 성준수가 차를 돌리지 못하게 큰 대로변까지 나와서야 물었다. 따로 생각해 둔 곳이 있으니 운전석을 차지한 것 아니냐는 반문에 고개를 저었다. 혀 차는 소리가 들리길래 멋쩍게 웃었다. 준수야, 그럴 수도 있지 왜 무안하게 그래. 성준수는 대답 대신 핸드폰으로 어딘가의 주소를 찍었다. 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고저 없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도로를 내달렸다. 8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도 서울 곳곳은 여전히 막혔다. 유난히 차가 많았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20분이나 넘게 달린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익숙한 곳이었다.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곳.

 

"진짜 들어가?"

"어. 차 댈 곳도 없어. 주정차 위반으로 딱지 떼이고 싶어?"

"맞는 말이긴 한데…."

"방문 차량이라고 하면 돼.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부모님 집 내가 온다는데."

"준수야, 너 진짜 대단하다."

 

X동 XXXX호요. 운전석 쪽으로 몸 쭉 빼밀고 호수 말하는 성준수 옆에서 전영중만 입 꾹 물고 식은땀을 흘렸다. 세대로 연결되면 난감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전영중에겐 그랬다. 다행히 별일 없이 아파트 단지 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 주나. 의문은 많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주차 후 향한 곳은 다행히 성준수네 부모님 댁이 아닌 지상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이라는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걸으니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낮은 상가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기내초가 보였다.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와볼 생각을 안 했다. 닫힌 교문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이 새삼스레 좁았다.

 

"준수야, 뜬금없이 여기 온 이유는 뭐야?"

"그냥이라고."

"그냥이 어딨어."

"하 씨, 생각나는 곳이 별로 없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농구만 하지 말고 좀 놀러도 다니고 그랬어야지."

"대학 가겠다고 부산까지 처갔는데 서울에서 어떻게 놀아. 네가 더 잘 알았지."

"진짜 사람 할 말 없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지는."

"…너 혹시 졸업 후에 와본 적 있어?"

"어."

"혼자?"

"아니. 누구랑 같이."

 

누구랑 왔는데? 전영중의 질문에 성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질문을 하는 전영중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누구와 이곳을 찾아왔을지,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바빴다. 그 오만가지 생각이 눈동자에 너무나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성준수는 그걸 굳이 지적하며 작게 웃는다. 그렇게 조금 더 걷다 보니 1층이 빈 건물이 보였다. 임대 글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자리가 안 나가는지 제법 그 자리를 오래 지켰던 것처럼 보이는 종이였다.

이제 없네, 분식집. 전영중이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 여기 분식집 떡볶이랑 피카츄 맛있었는데. 그 말에 동의하듯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없어진 지 좀 된 것 같은데. 그러게.

그 순간 전영중은 어떠한 기시감을 느낀다. 정말로 겪은 일인지, 꿈에서 어렴풋이 본 것인지, 혹은 비슷한 경험을 착각한 일인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가 없어서 찝찝하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 하나하나 세어 보고 싶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불쾌함에 전영중은 대신 목을 긁었다.

그런 전영중을 성준수가 응시했다. 심해를 떠오르게 하는 깊은 눈으로. 덕분에 전영중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자신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대신 그 심연 아래 잠들어 있을 그의 생각 따위를 추측했다. 또 모기야? 아니, 그냥 전에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서. 그 말에 성준수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것인지, 혹은 생각에 잠긴 것인지 모를 그 어딘가의 표정. 이건 성준수가 아닌 것 같은 성준수.

"아녜요, 가야죠. 지금 가실 거죠? 같이 가요."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는 분주했다. 막 씻고 나온 성준수가 무슨 일이냐 물었다. 전영중은 짐을 챙기다 말고 대답했다. 장례식장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밤중에 온 전화. 발신인을 보니 엄마, 라고 저장된 두 글자가 보여 급하게 받았더랬다. 전화가 걸려 온 시각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부고였다. 엄마의 이모, 그러니까 이모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단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많이 슬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릴 때야 가끔 외갓집에 가서 얼굴을 뵀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방학 또한 개인 훈련하랴 대회 참여하랴 바빠서 친척들 얼굴 볼 시간이 손에 꼽았다. 그래서인가. 생각보다 그 부고가 굉장히 먼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제가 눈물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걸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참 덤덤해졌다 싶었다. 나쁘게 말하면 냉정한 것이고. 마치 일부러 감정의 저수지 문을 꽉 틀어막아 단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막아둔 것 같았다.

 

"언제쯤 올 거야?"

"상주는 아니니까. 금방 오지 않을까."

"밤인데 운전 조심하고."

"응."

"다녀올게."

 

톡으로 받은 장례식장 위치를 찍고 밤의 도로를 내달렸다. 저번 주, 옆자리에 성준수를 태우고 운전을 할 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손끝이 떨리는 걸 숨기느라 제법 애를 먹었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는 차에서 내리니 긴장한 탓인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서 곤란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단 한 순간에 그러한 공포심이 사라질 수 있는 일인지 의아했다. 그러한 생각은 도로 위의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흔적도 없이 빠르게 흩어졌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전영중은 허전함을 느꼈다. 빈 옆자리가 너무나 가벼웠다. 성준수를 조수석에 태웠던 게 몇 번이나 된다고. 누군가 앉았던 흔적이 있는 공간의 여백이 주는 존재감은 제법 강렬했다. 이렇게나 7년의 간극은 생각보다 빠르게 메워진다. 다음번에는 성준수를 태우고 한강 드라이브를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장례식장에 가면서도 성준수 생각이라니. 전영중은 스스로가 조금은 우습게 느꼈다.

오랜만에 들린 본가였다. 얼마 전 주차장을 빌린 성준수네 본가도 스쳐 지나갔다. 주차장에서 부모님을 태우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보자마자 운전하는 건 괜찮냐고 물었다. 반년이 훌쩍 넘도록 운전대 잡는 걸 못 봤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이 세상에서 전영중 혼자만 자신의 사고 소식을 잊고 산 것 같았다. 알지 못하는 타인의 일이 아닌 본인의 일인데도. 전영중은 그저 웃음으로 답답하게 타들어 가는 속을 감췄다. 좀 많이 지났잖아요, 이젠 괜찮더라고요. 두 분도 그 얘기에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 차 안이 고요했다.

장례식장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분당에 위치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분주했다. 울고 있는 사람들, 위로하러 달려가는 부모님, 그리고 슬픔을 덮으려 작위적으로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까지.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언제 와도 적응되지 않았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는 탓이다. 그것들은 썩고 곪아 한이 된다. 한이 된 슬픔은 감정의 수렁을 만든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고 깊은 늪에 빠지는 착각을 겪는다. 그래서 전영중은 장례식장에 오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이곳엔 모두 슬프고 힘든 사람들밖에 없으니까. 우두커니 서 있다 보면 그 감정들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싫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런 날에는 기분이 좋지 않아 잠을 깊게 못 잤다. 아마 오늘도 그렇겠지. 내일 병원 예약은 오후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뒤척거릴 새벽이 선명했다.

단상 앞에서 절을 하는 어머니 뒤에 서서 인사를 한 뒤 헌화까지 마쳤다. 그녀는 꽤 많이 울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을 테니까. 전영중은 연신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바쁜 와중에 식장까지 데려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아들에게 전했다. 늦은 시간에 엄마가 더 고생이죠.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오는 게 나중에 후회로 남아. 조금이라도 일찍 와서 마지막 인사는 전해야지.

그 말을 전영중은 천천히 곱씹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었을 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면 그것이 큰 후회로 남는 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장례식장의 우울한 분위기는 조그마한 걸림돌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전영중을 보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괜한 말을 했네.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생각하는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나. 무표정으로 있을 땐 차가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지금 제집에서 지내고 있는 누구보다는 아니었지만. 전영중은 금방 굳은 표정을 풀어내고 말한다. 생각 좀 하느라고 그랬어요. 심각한 거 아니에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박자 늦게 거두었다.

엄마는 좀 더 있다가 가려고. 먼저 들어가라. 전영중은 조심히 들어가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식장을 떠났다.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의 말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오지 못하는 게 훨씬 후회될 거라고, 와서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왜 그 당연한 말이 자꾸만 걸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한 건 새벽 3시가 좀 넘어서였다. 어둠조차도 무겁게 가라앉는 시간. 그래서일까. 온통 불이 꺼진 집의 밀도가 높았다.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겁이 날 만큼. 오래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미약한 소리와 함께 센서 등이 꺼졌다. 까만 시야가 고요했다. 그 찰나에 전영중은 기이한 감각들을 되새겨본다. 한 달을 넘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지울 수 없는 찝찝함. 그 시발점에는 성준수가 있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집 안은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 집에 사는 것은 전영중 혼자였다는 것처럼. 새벽이라 그런가. 생각이 뒤숭숭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갑자기 센서 등이 틱 켜지더니 전영중 앞에는 성준수가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등골이 서늘하다 느끼던 차에 일어난 일이라 전영중은 전신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덕분에 심장이 제 자리가 아닌 조금 더 깊숙한 곳, 비명을 삼켜낸 자리에서 펄떡이며 뛰었다.

 

"와, 기절할 뻔했네. 그새 사람 놀래는 취미라도 생겼어?"

"시발, 뭔 소리야. 한참 전에 들어와 놓고도 기척 없길래 서서 죽었나 보러 나와줘도 지랄."

"이 시간까지 안 잤어?"

"어. 너 장례식 갔다 오는 거 싫어하는 걸 내가 아는데."

 

초등학교 때였나. 죽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와닿기 시작하던 때. 기억력을 핑계로 모든 일을 잊어버리기엔 조금 커 버렸을 때.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입관이며 화장 후에 유골함에 담겨 나오는 모습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는 과정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기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라는 것도. 오랜만에 학교에 나가 만난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하며 엉엉 울었던 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전영중도, 성준수도. 우리는 이런 오래된 기억의 집합체를 공유한 사이다.

그렇기에 성준수의 질문에 약간은 어색한 침묵이 생겼다. 다음 말이 오기까지 존재하는 부자연스러운 공백. 전영중은 잠시간의 대치 끝에 말 따옴표를 그려 넣었다. 걱정했냐? 물음표가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전영중은 그사이에 성준수의 대답을 예상했다.

 

"어."

'내가 걱정을 왜 해.'

 

두 개의 대답이 갈리는 지점. 이번에도 전영중은 성준수의 답을 예측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니까. 언젠가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취한 탓에 스스로가 듣고 싶은 대로 왜곡해서 들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저 편한 대로 받아들이고 왜곡하여 기억하고 있던 것임이 분명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아까 삼켜낸 비명 위로 이번에는 질문을 꾹꾹 담아 눌렀다. 혹시라도 듣게 될 대답이 조금은 무서워서. 괜히 부산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를 때가 오면 자꾸만 대답을 피하는 것은 어째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

침묵하는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장난스레 말했다. 소금이라도 뿌려줘? 그 말 덕에 조금 웃었다. 준수야, 너 그런 미신도 믿었어?

 

"넌 아니야?"

"난 그런 거 안 믿어."

 

믿을 거면서. 이상하게도 확신을 담은 말. 그 말에 전영중은 성준수를 홱 돌아보았다. 성질을 내거나 무엇인가에 열중할 때가 아닌, 평소의 심드렁한 표정의 성준수. 시답잖은 말장난이라 생각하며 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 전영중의 등 뒤로 성준수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꾸만 물음표를 갈고리처럼 이용해 전영중을 붙잡는다.

 

"야, 전영중. 너 바로 잘 거야?"

"모르겠는데. 일단은 그래야지. 내일 노는 게 아니잖아."

"영화 볼래?"

"왜? 내가 잠 못 들까 봐?"

"어."

"내가 아직도 애냐."

"기분 안 좋은 티 내는 지금은 그래."

"……."

"너 나랑 다르게 묵묵한 척 잘하잖아. 그런데 지금은 다 보여."

"…그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거실에서는 성준수가 리모컨을 누르며 영화를 고르는 게 보였다. 마치 원래부터 제집인 것처럼, 제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실 배경에 녹아있는 모습. 전영중은 그 고요한 평화를 깨고 들어가 옆자리를 차지했다. 뭐 보게? 지루한 거. 굳이 시간 들여서 왜 그런 걸 봐. 그래야 보다 잠들 거 아냐, 영화 보고 싶었으면 정신 멀쩡한 낮이나 저녁에 봤겠지.

성준수는 항상 그렇게 무심한 배려를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 한두 마디씩 덧붙인다. 그게 더 티 나게 하는 줄 모르고. 전영중이 모르던 시절, 다른 사람들도 성준수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툭툭 던지는 말들이 하나하나 상대방을 향한 성의였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그 생각에 이상하게 마음이 꼬였다. 그래서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 전영중도 성준수의 말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선의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뭐, 그러면 이 시각에 공포 영화라도 볼 거냐? 결국 성준수가 미간을 구기며 날 선 대답을 했다. 여기서 눈치 없이 말을 더 얹으면 성준수가 정해둔 인내심의 한계를 넘는 일이다. 성준수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인내심의 하한선이 낮았다. 친하다고 함부로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좀 더 솔직한 모습이 쉽게 드러났다. 전영중은 그 선을 알았다. 다행히 그 기준선은 서로를 모르고 지내던 시간이 바꾸어 두지 못한 것 같았다. 덕분에 앞선 문장은 여전히 사실이다. 전영중은 여기서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아냐, 준수 고르던 거 마저 골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빙글빙글 웃는 낯은 여전했다.

어두운 거실에 TV 불빛이 깜박깜박. 왜 이 영화를 골랐냐 물으니 포스터가 재미없어 보였다는, 훨씬 더 재미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별한 남자에게 커플이 되기를 강요하는 이상한 사회. 정해진 숙박 기간을 늘리기 위해 숲속에 홀로 사는 사람을 사냥해 와야 하는 이상한 호텔. 극적인 부분은 없었으나 보는 내내 잔잔한 불쾌감이 함께였다. 섹스를 빙자한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에 동할 나이도 아니거니와 꼴리는 장면 또한 아니었음에도 전영중은 성준수의 표정이 궁금했다. 그저 자신과 같은 찝찝함을 느끼고 있을지, 그때의 성준수 표정은 어떨지. TV 화면 탓에 음영이 더 짙어진 그의 옆모습은 의외로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전영중은 언젠가 그 옆얼굴을 마주했던 것만 같았다. 이렇게 밤에 영화를 보면서. 그마저도 지금처럼 훔쳐보는 것이 들킬까 봐 오래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틀어야 했던 지난날.

다시 화면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화 소리마저 작게 설정해 두었더니 영화는 절정을 향해가고 있음에도 현실의 분위기는 나른하게 풀어졌다. 영화의 주제와 빗나간 생각만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자신이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한다면, 그 뒤에 어떤 선택을 할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날지, 기억을 붙잡으며 매달릴지. 답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전영중은 보기보다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모호한 양자택일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두 가지의 답 사이를 오가며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있노라니 조금씩 잠이 오는 것 같았다. 눈이 감기며 영화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다. …일 남았어. 잠이 드는 전영중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다.

"요즘 준수 형이랑 지낸다고요?"

"어."

"진심으로요?"

"그래."

"영중이 형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그게 왜 이상한데. 그렇게 묻는 말에 조재석은 어물쩍 답을 하지 않았다. 애매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래서 웬만해선 넘어갈 일도 굳이 더 캐묻고 싶었다. 재석아, 그게 왜 이상하냐고.

 

"아니 고등학교 때 본 모습으로는 그렇게까지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아서요?"

"쌍용기 때까지는 좀 살벌하긴 했지. 준수가 그때 예민하기도 했었고. 나도 괜히 긁어본 것도 있고."

"하긴, 그 뒤에는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나빠 보이진 않긴 했어요."

 

그러면서 그사이에 어쩌다 화해했냐, 졸업 이후에도 연락을 계속했었냐 등등을 분주하게 물어댔다. 오래간만에 만난 조재석은 사석에서도 여전했다. 코트 위에서 요란하게 세레머니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진작에 연락 끊긴 성준수의 지상고 후배들 연락처 넘겨받은 대가로 밥을 사주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형, 저 서울인데 오늘 저녁에 괜찮아요? 대뜸 전화해서 묻는 말이 그거였다. 그 결과가 오늘의 이 자리였다. 일대일로 텐션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친구 데려오라 하면 친하게 지냈던 동기부터 자기 구단 사람들 한 버스 가득 데려올 것만 같은 놈이라. 그건 생각만 해도 더욱 피곤한 일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라 조재석은 몇 년간 담아왔던 궁금증을 모두 풀고 갈 심산으로 보였다. 자기 얘기 잘 안 하는 전영중이 더더욱 이야기를 아낀 주제가 바로 성준수였으니까. 제삼자로서는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한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원중에서 일 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3학년 끝물까지 남은 이들 중에서 성준수를 잘 아는 건 결국 전영중 하나였다.

 

"우리 그때 비공식 합숙도 했었잖아요. 사실 진짜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감독님이랑 코치님들이 용케 다 괜찮다고 해주셔서."

"언제?"

"기억 안 나요? 대통령기 시작하기 전에 잠깐."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각조각 흐릿하던 기억들이 맞춰졌다. 그제야 선명해지는 큰 그림의 기억.

장도고와의 인상적인 경기로 실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남긴 성준수가 오랜만에 본가로 올라온 게 시작이었다. 성준수 따라 서울 구경이라도 해보겠다고 후배들이 하나둘 나섰고, 결국 여섯밖에 없던 지상고 농구부원 모두가 서울행이었다. 대회가 괜찮게 끝난 뒤로 조금 여유가 생긴 성준수도 하루 정도는 같이 다녀주겠노라 후회할 약속을 했다. 그러다 원중고 주전들과 서울 한복판에서 마주했었고. 여기까지 오기의 상황을 설명하는 성준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전영중만 웃음을 힘껏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농구부원 전원과 서울까지 온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서울에서 놀러 다녀 본 적 없는 성준수가 그들을 원중고가 가까운 자기 동네 쪽으로 이끌었던 것도, 그러면서 본인들을 만났다고 역정을 내는 것도, 그냥 그 모든 게 참 단순하다 싶어서. 면상 갈기고 싶으니까 기분 나쁘게 처웃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성준수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언제는 무서워했던 적이 있나 싶지만. 이전보다 훨씬 유해진 미묘한 분위기. 그걸 전영중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 숙소 잡았어? 아뇨, 이따 저녁에 다시 내려갈라하는데…. 그런 대화 소리에 뒤를 도니 이미 상황은 벌어져 있었다. 농구부 숙소에 진짜 따라가도 되냐는 지상고 1학년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뒤로 하고 조재석을 나무랐다. 외부인 출입 금지잖아,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어? 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했다. 그럼 감독님 허락 있으면 괜찮죠? 3학년 중 누가 제지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들고 후다닥 달아나는 조재석. 날다람쥐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에 성준수가 웃었다. 원중 군기도 다 옛말인가 봐? 비웃음은 아니었다. 조금 후련해 보이는 그런 웃음.

 

「좀 많이 바뀌었지?」

「응, 그러네.」

「지국민 쟤가 저래 보여도 이런 분위기는 잘 잡아줘, 좋은 쪽으로. 그래서 조재석 쟤도 저렇게 날아다니고.」

「형들! 감독님이 오케이했어요! 온 김에 연습 경기도 같이하고 그러자시는데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조재석의 건의는 의외로 쉽게 통과되었다. 숙소에 있는 다른 애들한테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냐는 걱정도 들려왔다. 감독님이 오케이 했는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지국민이 대답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빼는 거 없이 숙소까지 따라왔으면서도 지상 애들은 낯을 가렸다. 이럴 거면 오늘 내려가지 왜 오겠다고 지랄을 해서. 그 말에 기상호였나, 아무튼 그 후배가 우는소리를 했다. 괜히 전영중은 사이좋게 지내라고 이야기했다가 닥치라는 욕이나 한 번 더 얻어먹었다. 오늘 밤 자고 내일 연습 게임까지 하기로 한 마당에 이런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일 순 없다고 생각한 남고딩들이 생각해 낸 건 새벽의 작은 일탈이었다. 무슨 영화를 볼 거냐는 말에 누군가 야한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딴 걸 왜 처 봐, 그럴 거면 농구나 봐. 보나 마나 성준수였다. 체력 관리 한다며 잘 줄 알았는데. 전영중은 그 옆자리를 슬그머니 꿰찼다. 결국 고른 것은 공포 영화였다. 악마가 나오는 엑소시즘에 관한 영화.

 

「그런데 어디서 들은 건데 진짜 악마 소환할 수 있다던데.」

「재석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진짠데. 가장 소중한 물건을 태우면서 뭘 하면 된다던데. 소원 들어준대요.」

「헛소리다, 진짜. 해봤냐?」

「에이, 저는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당연히 못 하죠. 알아내서 국민이 형 해보세요. 4cm만 더 커서 군 면제되게 해달라고 소원 빌면 되겠다.」

「야, 너 이리 와라.」

 

그런 소란스러운 가운데 전영중은 성준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용한 그의 표정이 궁금해서. TV의 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옆얼굴의 표정은 조용한 태도와 다를 것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왜 날 봐. 그 말에 전영중은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그 대신 무섭지는 않냐는 뻔한 질문을 했다. 쟤네 대화 진짜 황당하네. 성준수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저 말 진짜였으면 좋겠다. 이유를 묻는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무심히 말했다. 소원 빌게. 농구 잘하게 해달라고 하게? 대학 가게 해달라고 하게? 의아함을 담은 전영중의 질문에 따라오는 대답은 너무나 성준수다웠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부상 안 입고 오래 농구하게 해달라고 할 거야.」

 

이건, 정말이지 오래된 기억.

그다음 날에 단체로 걸려서 엄청 혼났죠. 그렇게 중얼거리는 조재석의 말에 전영중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바쁜 삶에 치여 흐려졌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결국 모든 원인은 너였잖아. 그 말에 조재석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웃기나 했다.

그 이후에는 근황 이야기나 주변 소식들이나 주고받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재석은 말했고, 전영중은 들었다. 사실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느라 깊이 있게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전영중은 조재석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아! 참, 그런데 영중이 형.

왜?

그때 영화 볼 때 있잖아요….

어, 말해.

훔쳐보려던 건 진짜 아니었거든요.

왜 자꾸 수상하게 말하지.

아, 쫌. 들어봐요. 그때 형이 준수 형 쳐다보는 걸 어쩌다 봤거든요.

…어.

그런데 그게 좀…,

…….

…형이 그 형을 좋아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순간.

…….

…좀 그렇죠? 이 말은 걍 잊어줘요.

야, 이거 네 거 맞지. 그렇게 말하며 휙 던지는 걸 받아보니 웬 필름 카메라였다. 카메라를 받아 든 전영중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채워졌다. 이게 뭔데. 표정만으로도 확실하게 의사전달을 하고 있었다. 전에 상자에서 옷 꺼냈을 때 거기 섞여 있던데. 성준수의 덤덤한 설명이 이어졌다.

전영중은 장난감처럼 생긴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에 여행을 가서 샀을 것이 분명한 조잡한 몸체. 언제 이런 것을 샀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남은 필름의 개수는 하나도 없었다. 허용된 모든 기회를 꽉꽉 눌러 담았을 일회용 카메라. 전영중은 그 필름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기억에도 없는 카메라를 여는 것이 맞는지 예전 같으면 한참을 고민했겠지만, 지금의 전영중에게 선택지는 확실한 두 개였다. 확인하거나, 될 수 있는 한 더욱 빠르게 확인하거나.

굳이 말하자면 생각의 방을 정리하는 시기였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어딘가에서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여 한참을 들여다보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내고. 그런 식으로 전영중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중이었다. 잊어버린 줄도 몰랐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공백을 채워갔다. 모르고 있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기억을 찾을 때마다 기분이 후련했다. 한편으로는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순간들을 어떻게 잊고 살았는지. 도대체 이걸 왜 잊고 살았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들인데도.

그래서. 그렇기에 이 필름도 하루빨리 현상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구석에 처박혀 잃어버렸다 생각하는 물건들처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작은 행동은 책상 뒤쪽에 손을 뻗어 더듬거려보는 행위와 결을 같이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데."

"현상 맡기러 갈 시간이 안 나서 생각 중이었어. 준수야, 나도 이제 시즌 준비는 해야지."

"…내가 대신 가 줘?"

"……."

"…뭘 그런 표정으로 봐. 내놔. 내가 근처 사진관 다녀올게."

그 말에 카메라를 다시 성준수에게 건넨 것이 일주일도 더 지난 이야기였다. 슬슬 정식 훈련에도 참여하던 터라 집에 들어오는 시각이 필연적으로 늦어졌다. 그래도 예전 같으면 적막뿐인 곳을 하나하나 밝혀야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구석구석 어둠을 털어내고 함께 지낸다는 게 제법 위안이 됐다.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니 거실 테이블 위에 인화 사진이 보였다. 준수야, 오늘 찾으러 갔다 온 거야? 그 물음에 저 방문 너머로 사진 상태는 보지 않고 찾아만 왔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전영중은 테이블 앞에 앉아 고작 스무 장 내외의 사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상을 늦게 해서인지 혹은 제대로 찍지 못한 것인지 날아간 사진들도 많았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사진들은 두 장 중 한 꼴이었다. 전영중은 이마저도 많이 건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진은 전부 바다였다. 동해인 것 같은데 강원도인가? 모래사장이며 깨끗한 바다, 맑은 하늘까지. 전영중은 계절을 가늠해 보았다. 8월 말에서 늦어봤자 9월 초의 바다. 마지막으로 바다로 여행을 갔던 것이 언제인지 되짚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풍경 사진 몇 장 뒤에는 같이 간 누군가가 찍어줬을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사진 속 모습으로 시기를 짐작해 보자니 지금으로부터 고작해야 일이 년 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여행을 갔다면, 그것이 고작 몇 년 전의 일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본격적인 시즌 훈련 전에 짬을 내서 다녀온 것이 분명하다면 더더욱. 그런데 기억 속 어디에도 바다가 없었다.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바다 사진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답을 찾지 못한 채 물음표들이 하나둘 나란히 줄을 섰다.

몇 장 더 넘겨보니 나오는 전영중 이외의 사람. 전영중이 모를 리가 없는 이의 얼굴. 낯익다 못해 눈매며 콧날, 입꼬리의 위치까지도 기억하는 얼굴. 그렇지만 절대 이 사진에서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 누가 봐도 카메라를 들이밀지 말라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익숙한 표정의,

 

성준수.

 

그때, 사진 아래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네 자리의 연도는 작년의 일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제야 천천히 떠오르는 속초의 기억. 속초 바닷가를 배경 삼아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누르던 그때가. 날이 흐린 탓에 엉망이 된 채도. 주위로 몰아치는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발걸음마다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모래. 사진을 찍다가 바다 근처에서 얕게 부서지는 파도에 의미 없는 발장난을 했다. 그게 다였다. 등을 확 떠밀어 물에 빠뜨리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성준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고, 전영중은 장난 뒤의 마주할 성준수의 성깔을 알았다. 시즌이 코앞인데 괜한 장난으로 컨디션 망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신발 끝만 계속 젖어 들었다.

그마저도 비가 오는 바람에 물장난을 자제한 보람도 없었다. 기껏 시간을 비웠는데,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날씨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우산이 없어 있는 그대로 비를 맞으면서 숙소까지 달렸다. 이미 몸이며 옷은 흠뻑 젖은 상태였다. 생머리가 푹 젖어 납작해진 꼴이 둘 다 웃겼다.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리며 재밌냐고 묻는 성준수는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 뒤에 따라붙을 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좋냐? 하, 네가 좋으면 됐다.

그 말끝에 성준수는 여분의 옷을 챙겨 들어 화장실로 향했다. 옷이 다 흡수하지 못한 물기가 발자국 옆으로 점점이 찍혔다. 성준수가 살짝 웃으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전영중은 속절없이 두근거린다, 여전히. 창밖을 보니 점점 더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날씨도, 바다도. 된통 습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서럽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좋은 성준수 하나 때문에.

그래도 밤에 불꽃놀이는 해보고 싶었는데. 전영중은 그 사실 하나가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괜한 심통을 부렸다. 준수야, 나 얼어 죽겠어, 빨리 좀 나와. 아 씨발, 방금 들어갔다고, 미친놈아, 불 끄지 마라. 샴푸 거품 뒤집어쓰고 왁왁대고 있을 성준수 모습이 선하게 그려져 쿡쿡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이 순간은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기에 되레 완전하게 느껴지는 모순. 우리 사이에는 이런 게 더 잘 어울린다고,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어느 여름의 끝물.

자신의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 기억에 전영중은 사진들을 내려놓았다. 늘어진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사진들을 붙들고 울었던 것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졌다. 무엇이 이전이고 무엇이 이후의 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억들 사이에서 전영중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야, 나와 봐."

 

결국 두드린 것은 성준수의 방문. 그에게 아까까지 자신이 들고 있던 사진을 건넸다. 인화한 사진인데, 작년이더라. 그런데 왜 네가 여기 있는지 말해. 너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부터 나한테 연락 안 했잖아. 그래 놓고 갑자기 찾아왔잖아. 그런데 이건 뭐야. 설명해 봐.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뭔지. 네가 숨기고 있는 건 뭔지. 준수야, 내가 그동안 많이 참았잖아.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전영중은 토해내듯 말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성준수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전영중보고 스스로 떠올려 보라고 종용하는 것 같은 표정. 전영중이 아무리 물어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생각 같았다.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해?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봤을 때의 낯선 대답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때와 달라진 생각은 단 한 줌도 없어 보이는 성준수.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있는 성준수의 얼굴이 낯설었다. 너 성준수 맞아? 그런 질문을 뱉으려다 겨우 삼켰다. 전영중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지워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어지럽게 반복했다. 순서도 뒤죽박죽 제멋대로. 자기들끼리 조립되었다 분해되기를 여러 번. 문득문득 떠오르는 많은 기억의 단서들은 전영중의 짧은 연대기에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억 속의 성준수는 분절적이다.

우리가 무슨 사이야? 복잡한 생각들에 밖으로 밀려나 말이 된 문장. 야, 전영중. 낮게 깐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탓에 괜히 움찔거렸다.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성준수의 그 말에 떠오르는 어떠한 문장.

 

나 너 좋아해.

 

분명 입 밖으로 내뱉은 기억이 없는 생소한 문장. 어쩌면 생각조차도 해봤는지 의문이 드는 문장. 그러나 전영중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속의 환상이나 현실의 착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이건 분명한 나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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