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

기다리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는 주파수

종뱅 전력 60분 | 연락

hello world by no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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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없세 

* 고증… 모릅니다. 사투리… 모릅니다. 국가조직… 모릅니다. 해커… 모릅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사람이 수년간을 위기 속에서 살다 보면 감이라는 게 생긴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그린라이트나 조상님의 급박한 레드라이트가 아닌 생존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본능적인 감각 말이다. 검은 봉투를 든 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나오던 병찬이 불현듯 걸음을 멈춘다. 편의점 앞 대로변의 가로등은 고장 난 지 오래였으나,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가게의 네온사인 덕에 어두울 날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사이사이의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은 안주할 가게 찾기에 바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 속에 미심쩍은 감각만이 살갗을 콕콕 쑤셔댄다. 아, 라면 안 샀다. 병찬이 부러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편의점의 유리문 안으로 다시 들어가며 카운터로 향한다. 혹시 여기, 뒷문도 있어? 예? 아, 쩌 취식대 안쪽으로 들어가면 직원들 댕기는 거 하나 있긴 한데……. 나 잠깐 써도 돼? 뭐 햄이면 상관읍죠. 땡큐. 근데 갑자기 뒷문은, 아, 햄! 오른쪽 문 아이고 왼쪽, 왼쪽! 

편의점의 뒷문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었다. 사람이 줄다 못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병찬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깊게 눌러쓰고 봉투의 남는 부분을 움켜쥔다. 가장 좋은 건 스스로의 오판으로, 단순히 체력을 주체하지 못해 달밤의 조깅을 즐기는 청년이 되는 정도였다. 슬리퍼, 아니고. 신발 끈도 안 풀렸고. 미세한 눈짓으로 본인의 상태를 체크하고 뒤를 힐끔 쳐다본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맘이 쫄리지. 대로변과 상반되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병찬은 다시 앞을 본다. 뻐근한 고개를 돌리기를 한두 번, 병찬이 냅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착각이어라. 속으로 되뇌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누가 소리를 냈다. 씨발, 하고.

자신의 속력과, 뒤로 따라붙는 발자국의 소리 간격 따위로 상대의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내는 건 진작 까먹었다. 기억나는 건 단 하나, 이 상황에서 바로 집으로 달려가는 건 ‘여기 내가 살아요.’ 자백하는 꼴이라는 정도였다. 병찬이 갈림길에서 몸을 왼쪽으로 튼다. 이 동네가 초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병찬은 아는 길이든 모르는 길이든 자신이 따라잡힐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발소리가 급박해졌다가 서서히 멀어진다. 이윽고 따라붙는 소리가 멎는다. 병찬이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완벽하게 걸음을 멈춰도 들리는 소리가 없다. 그제야 병찬이 숨을 몰아쉬었다. 간만에 뛰니까 빡세네……. 모자 아래로 흠뻑 젖은 머리를 털어낸다. 남은 길은 동네 산책이나 다름없다. 정확하게 집과 반대 방향으로 뛴 탓에 조금은 멀어진 길을 돌아 걸으며, 병찬은 봉투 내부 맥주를 확인했다. 갈증이 났으나 차마 꺼내어 열지 못한다. 지금 연다면 골목 한복판에서 홀로 맥주와 사투를 벌일 게 뻔했다. 집으로 접어드는 교차로, 빌라 방향으로 몸을 돌리던 병찬이 황급하게 벽 뒤로 숨었다. 빌라의 앞에 까맣고 커다란 실루엣이 우뚝 서 있었다. 눈이…. 

“야, 박병찬. 나와. 너 나랑 눈 마주쳤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착각이 아니었구나. 병찬은 무너지려던 벽 뒤의 몸을 억지로 세우며 혀를 찼다. 조졌네. 짧은 한숨과 함께 빌라 앞으로 느리게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상대의 낯이 분명해졌다. 채도 높은 눈이 병찬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기는 없는 것 같고, 키는 조금 더 큰가. 그리고 …….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세요.”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조직에서, 그러니까 결코 경찰과 대립하지는 않지만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비밀리에 나랏일을 하는 이상한 조직에서 나온 지 이 년째. 병찬은 그 이 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다. 화이트해커, 이름만큼 그럴싸한 업적을 세우며 몇 년간 살았더니 나라를 위해 일해보지 않겠냐며,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조직이었다. 비록 번듯한 명함이 생기는 일은 아니었으나 연봉도, 처우도 어지간한 회사는 비비지 못할 정도였으니 내밀어진 손을 잡는 건 당연했다. 일만 할 수 있다면 정년도 존재하지 않는 회사, 병찬은 어쩌면 이곳이 제 평생직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직의 뒤통수만 아니었다면.

병찬을 스카우트 한 건 조직의 고위 간부, 소위 말하는 윗대가리였다. 그는 병찬을 퍽 아끼는 듯 보였고, 병찬이 원한다면 봐주지 못할 편의는 없는 것처럼 굴었다. 병찬의 위치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기밀을 기꺼이 누설하고, 종종 의미 모를 술자리에 병찬을 데려가기도 했다. 병찬이 이 모든 것이 스스로를 향한 편애라 생각할 무렵, 병찬은 간부의 컴퓨터에서 파일 하나를 찾았다. 조직이 조직이고, 업무가 업무이니 암호화가 된 파일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흔했다. 간부의 컴퓨터에서 아무 폴더나 들어가 아무 파일이나 열어도 정치인 한둘 정도는 나락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찬은 아무렇지 않게 파일을 지나치지 못했다. 000으로 시작하는 파일의 이름이 묘하게 제 주민등록번호와 흡사하다는 점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해당 파일과 같은 폴더에 묶여있는 이미지들이 꺼림칙했다. 간부가 데려간 술자리의 사진, 스크린샷이 금지되어 있는 내부 메신저의 대화내역, 통장 입출금 기록과 자신의 등본까지. 

[아직이냐]

간부의 데스크 한 켠 놓아두었던 병찬의 노트북에서 알림이 깜빡거렸다. 간부는 ‘중요한 모임’이 있다며, 병찬에게 소소한 일이라 파일 전달을 부탁했다. 폴더 루트를 착각한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은. 금방 끝나요. 병찬이 답장을 하고 잠시 푹신한 의자 위로 등을 기댔다. 하나, 위험을 감수하고 간부를 의심한다. 둘, 간부를 믿고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한다. 두 가지 모두 제게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병찬은 파일을 복사했다. 훅여나 걸리더라도 파일을 착각했다는 성의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USB에 파일을 얼추 다 옮겨갈 무렵, 병찬은 부탁받았던 파일을 전달했다. 경로가 헷갈려 찾는 데에 조금 오래 걸렸다는 말을 덧붙이며. 

병찬은 간부의 보안을 뚫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임무를 대신 맡기는 허술한 사람들이다. 네트워크가 차단된 노트북에 USB를 꽂아 넣고 파일을 연다. 이미지 파일에 다른 장치가 되어있나, 포토샵으로 파일을 옮겨 이리저리 둘러보다 만다. 평범한 png 파일이라는 걸 확인한 뒤, 문서로 신경을 돌린다. 어떻게 풀어볼까, 마우스로 문서를 이리저리 옮기다가 잠시 손가락이 멎는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가능성에 회사의 복호화 프로그램에 파일을 넣는다. 회사 내부에서 돌아다니는 파일들은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사내의 사람들만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둔다. 만약 이 프로그램으로 파일이 열린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정말 별거 아닌 개인정보라거나. 둘, 그게 아니라면 그 위치까지 올라간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거나. 정답은 후자였고, 병찬은 자신이 스카우트 된 이유부터 조직의 폐단까지 모든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제물, 희생양, 일말의 가능성을 위한 폭탄처리반(허나, 폭탄과 함께 죽어야 하는). 간부들 사이에서 도는 병찬의 별칭이었다.

이 양반들, ……날 호구 새끼로 보고 있었네. 알차게도 쌓아놓은 적폐의 향연을 보며, 병찬은 마우스 휠을 움직였다. 한도를 넘은 접대와 뇌물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사규에 어긋나는 정보거래와 이익 추구, 민간인 사찰, 개인의 이익을 위한 폭력, 살인까지. 가장 우스운 건 모든 사건이 정말 교묘하게 병찬과 엮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어후, 나 진짜 무서운 사람이구나. 병찬이 파일을 하나씩 재암호화하며 웃어대었다. 자신의 알리바이만 증명한다면 이 모든 것은 반대로, 간부를 엿먹일 수 있는 증거가 되는 파일들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병찬은 간부의 컴퓨터를 완벽하게 망가트려 놓고 튀었다, 파일을 복구도 할 수 없도록 날리는 건 덤이었다. 자신의 노트북과 USB만 든 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장 육 개월, 간부의 산하 인원이 병찬을 찾아 헤맸으나 병찬은 잡히지 않았다. 병찬이 어떤 연유로 파일을 날렸는지, 왜 해당 간부의 컴퓨터를 건드렸는지는 당연히 극비로 부쳐졌다. 조직 내부에서 병찬은 그저 사고를 치고 갑작스레 사라진 폭탄이 되어 있었다. 

그 뒤로 1년, 최종수가 들어왔다. 일종의 특채라는 점은 병찬과 같았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단단한 뒷배경의 존재였다. 종수의 조직 생활은 순탄 그 자체였다. 종종 직원들과 마찰이 있었으나 종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굳이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박병찬’이라는 단어였다. 잘하네, 이렇게 일 괜찮게 하는 거 병찬이 이후로 드물었는데. 칭찬 뒤로 극히 드물게 붙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의 존재감은 신발에 들어간 모래알 정도였다. 걷는 데에 지장이 없고, 통증도 없으나, 자각한 순간 끊임없이 인식하게 되는 것. 모래알을 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저 거슬렸으니 문득 더는 참지 않고 신발을 뒤집어 털 뿐이다. 종수는 유일하게 병찬의 이름을 언급하는 상사에게 물었다. 박병찬이 누구예요. 상사가 얇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웃었다. 옛날에, 내 윗 선배 컴퓨터 터트리고 튄 애 하나 있어. 일도 잘하고 똘똘했는데, 갑자기 뒤통수친 새끼. 종수는 자신과 그런 사람이 같은 선상에서 언급된다는 게 살짝 불쾌해졌다. 상사의 눈이 옅게 찌푸린 종수의 미간을 본다. 그렇게 터트리고 선배 아래 애들이, 물론 나도, 뭐 빠지게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머리카락 하나 못 찾았지. 그래봤자 사고 치고 도망친 새끼다. 종수의 눈이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향한다. 상사가 종수의 뒤통수를 보며 굳이,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 니가 찾으려고 해도 못 찾을걸. 종수가 고개를 돌린다. 그 새끼, 언제 사라졌는데요. 

2년 동안 카드 안 썼고, 출금 기록도 없어. 본인 명의 핸드폰은…… 전부 정지했고. 주변 인물들도 행적을 모른다고 하고. 해외 입출국 기록 당연히 없고. 이 정도면 도망치다가 어디서 사고사한 거 아닐까? 규가 서류를 책상에 던지며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댔다. 의자가 잠깐 삐걱거리다 만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담당 업무도 아닌 파일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무리하지 말라. 도와주겠다고 나선 인물이 이규였다. 종수의 눈이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출생신고서며,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따위를 훑어보다 아래로 스크롤을 쭉 내린다. 사망신고서 들어온 거 없어. 실종은? 실종도. 개방에서 춘삼이 찾는 게 더 쉽겠다. 규가 뻑뻑한 눈을 문지른다. 박병찬은 박병찬이고, 그들의 일은 일이었으니 제대로 박병찬을 찾으려면 일이 끝난 뒤의 시간을 이용해야 하는 처지였다. 규가 의자 위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종수야, ……벌써 한 달이야. 이 정도면 안 찾는 게 낫지 않아? 선배들도 손 놓고 있는 처지에 자는 시간 쪼개가면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이 이상 하면 지금 업무에도 반드시 지장 생겨. 종수의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적막한 공기 사이로 규가 일어난다. 선배들이 왜 아무도 안 찾는지 잘 생각해 봐, 나 먼저 들어갈게. 종수가 마우스를 쥔다. 규가 자리를 벗어나면 서류 창을 끄고 CCTV 복사본 하나를 열었다. 박병찬과 관련된 영상은 아니었다, 조금 더 중점에 두어야 할 조직 내부 업무의 CCTV였다. 

규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그러나 규의 말과는 별개로,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순위도 고려하고 있고, 찾게 되면 규에게도 어느 정도의 포상이 돌아갈 일이었다. 결국 찾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병찬의 서류를 내려두고 종수는 5초 단위로 CCTV를 돌렸다. 부산 동래구 명곡동 근처에 거동수상자가 이상행동을 보인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말이 명곡동 근처지, 날짜 정보만 존재할 뿐 정확한 목격담 없는 첩보는 사실상 동의 CCTV를 모조리 까보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 스쳐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입술을 부비다 CCTV를 가리키며 킥킥거리는 커플들, 벽에 붙어 바지를 까는 미친놈. 종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의 하루하루를 건조하게 눈에 담는다. 바라보나 반영할 수 없는 일상을 풍경처럼 여기며 의자에 깊숙하게 앉는다. 5초 단위로 넘기던 영상을 조절한다. 다음 영상은 대로변 편의점 앞 CCTV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봉투를 들거나, 물건을 들거나, 빈손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문득 영상을 멈춘다. 늘어져 있던 상체가 각도를 세운다. 파란 후드티의 사내가 모자 하나 없이,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봉투를 들고나온다. 익숙한 실루엣에 사내의 얼굴을 당겨서 본다. 명곡동 23-2, 23-3, 23-4. 수많은 영상 중 사내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찍힌 CCTV를 골라낸다. 마침내 사내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종수의 낯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찾았다, 박병찬.

종수는 날이 밝자마자 휴가를 냈다. 업무용 차량 대신 자차를 끌었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병찬의 이야기를 하면 휴가를 쓸 것도 없이 업무로 인정이 될 테지만, 그 사이 병찬이 부산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성과 없이 돌아오는 대신 쌓인 휴가를 쓰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동래구 명곡동 JS25 명곡점, 편의점 앞 CCTV에서 박병찬을 발견한 시각은 밤 9시 즈음. 종수는 다섯시 즈음부터 편의점 근처에 차를 세우고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여섯 시가 조금 안 되었을 무렵, 아르바이트가 바뀐 걸 확인하고 차에서 내린다. 알바생이 편의점 조끼를 고쳐 입다 급하게 인사했다. 말 좀 물어보려고요. 예, 뭐. 종수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뒤척였다. 입사 당시 병찬의 증명사진이 액정 위로 뜬다. 혹시 이 사람 알아요? 알바생이 미심쩍은 눈으로 종수를 쳐다본다. 알긴 아는데……. 여기 자주 와요? 한 일주일에 서너 번? 보통 언제 오는데요. ……왜 자꾸 이런 걸, 경찰이에요? 이런 거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는데. 종수의 말문이 막힌다. 당장은 챙겨온 공무원증도, 위장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무엇도 없다. 종수가 액정을 끄고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이 사람 ……애인, 인데. 병찬 햄 애인 없다켔는데요. 싸우고 잠적해서. ……참말로예? 

병찬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게 웃었다. 어쩐지 상호가, 들어가자마자, 햄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 다고, 말 사이사이로 웃음이 섞여 한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는 게 드물다. 종수는 짐 없는 방 내부를 연신 둘러본다. 아, 요새 일하기 빡세졌네. 모르는 사람 애인도 해야 하고……. 병찬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한다.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내 주위를 둘러보는 종수의 행동에 병찬이 자리에서 선다. 뭐, 물이라도 줄까? 아니면 맥주? 방금 사 온 거. 병찬의 태도에는 위기감이 없었다. 

니가 컴퓨터 터트리고 튄 박병찬이지. 아니, 왜 자꾸 반말이냐니까? 꼬우면 니도 하던가. 그러지, 뭐. 근데 그거 아는 거 보면 너 회사 사람이구나. 나 잡으러 왔어? 누가 나 찾아보래? 마주하고 나서도 연신 실실 웃어대는 낯이 아니꼬웠다. 병찬은 종수의 주위를 몇 번 둘러보다, 손에 든 봉투를 흔들었다. 맥주 식겠다, 들어가서 얘기할까? 도리어 바짝 긴장하여 날을 세우는 건 종수였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 병찬이 한 발자국 다가서면, 몸을 굳힌 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빌라의 입구 센서등이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자꾸 이러면 주인 어르신이 화낼 텐데, 어쩔 거야. 박병찬을 마주친 뒤의 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도망치는 박병찬을 잡아 차에 처넣고, 서울로 귀환하는 계획까지는 세웠으나, 이런 병찬을 마주하는 건 종수의 계획에 없었다. 종수는 새하얗게 빈 머리로 병찬을 쳐다보았다. 병찬이 종수의 팔을 쥐었다. 종수가 손을 세게 쳐내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병찬은 고갯짓했다. 안 들어갈 거면 문 막지 말고 옆으로 좀 꺼지든가.  

테이블도 없는 집에서 병찬은 맥주 두 캔을 바닥에 내려둔다. 하나는 종수의 쪽으로 밀고, 남은 하나는 제 몫이었다. 그래서, 누가 날 찾았는데? 알아서 뭐하게. 잡혀가는 처지에 이런 것도 안 알려주고, 팍팍하다. 팍팍해… 나 그래도 니 선밴데. 파일이나 터트리고 도망간 새끼 주제에. 병찬의 눈썹이 얕게 들썩였다. 그게 다야? 왜, 니가 생각해도 찌질해서 아닌 것 같냐? 아니, 파일을 터트린 건 맞는데……. 병찬이 말을 잇지 못한다. 잠시 침묵하던 병찬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간다. 한심한 새끼들. 중얼거리며 병찬이 맥주 캔을 들었다. 캔을 따는 순간, 봉투 속에서 한참을 흔들리던 맥주가 위로 시원하게 솟구쳤다. 아씨. 놀란 병찬이 캔을 놓친다. 부글거리며 끓는 맥주가 종수의 바지로 쏟아졌다. 씨발……. 야, 진짜. 진짜 미안하다. 병찬이 손에 집히는 천을 아무거나 끌어와 바닥을 닦았다. 

옷 준다니까. 닥치라고. 뭐, 그럼 나가서 츄리닝이라도 사 올까? 카드도 못 쓰는 새끼가……. 아, 그래. 너 온 김에 말해야겠다. 회사 가서 나 금융거래 좀 풀어달라고 해 봐, 찾기 힘들다고. 뭔 소리야, 니가 안 쓰는 거잖아. 멀쩡한 캔을 냉장고에 넣어둔 병찬이 종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휴지로 몇 번을 문대도 맥주 냄새가 빠지지 않는다. 병찬은 양반다리를 한 채 몸을 앞뒤로 흔들다 벽에 머리를 기댔다. 종수가 비스듬히 기댄 병찬의 말을 곱씹는다. 아까부터 말에 미묘하게 공백이 많다. 회사에서는, 내가 그냥 컴퓨터 터트리고 쫄아서 잠적한 새끼인가? 종수의 눈썹이 찌그러진다.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나 잡아 오라고 시킨 새끼가 다른 말은 안 하디? 머리 반쯤 벗겨져서 느물거리는 그놈. ……뭐? 반응 보니까 그 새끼가 보낸 건 아닌가 보네. 안면도 안 튼 새파란 애새끼를 다 보내나, 했는데. 그럼 너 나 안 잡는 게 맞는 거야. 꼴에 머리 굴리나 본데, 입 다물고. 후배님, 내가 지금 널 생각해서 말하는 거잖아. 

병찬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야기 사이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건, 종수도 자각하고 있던 사실이다. 병찬은 처음보다 풀어진 자세로 종수를 대하고 있다.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누가 보냈는지, 모호했던 실루엣이 뚜렷해질수록 죽어도 잡히지 않을 사람처럼 군다. 안 잡는 게 맞는 거라고. 후배, …… 아, 자꾸 후배라고 부르니까 입에 안 붙네. 이름이 뭐야? ……임승대. 그래, 승대야. 느물거리는 놈 아니면 뻔하지. 너 지금 나 잡아가면 호구 된다. 윗대가리 날리고 싶어서 머리 굴리는 새끼한테 식은 죽 불어가며 떠먹이는 거야. 중점 없이 겉면만 돌아대는 얘기에 종수가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병찬이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무엇인지 파헤칠 수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는 종수를 보며 병찬이 작게 신음한다.

입사 과정부터 파일의 내용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편이 사실상 병찬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러나 제 입방정으로 엉뚱한 사람에게 불씨가 튀는 것은 바라지 않아, 차마 입을 열기가 꺼려졌다. 병찬이 끝내 제 후드 주머니를 뒤진다. 신분증과 카드 몇 장 사이에서, 흰색 신용카드를 꺼낸다. 카드 위로 병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병찬이 컴퓨터를 터트렸다던, 제 상사의 선배. 종수도 익히 알고 있는, 몇 년째 간부직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의 이름이었다. 사연이 긴데, 아무튼.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돼?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간부의 파일을 모조리 날리고 도망친 지 일주일, 누군가에게 도망을 쳐본 적도, 그럴 이유도 만들어본 적 없던 병찬은 쉽사리 꼬리가 잡혔다. 입안이 너덜거릴 정도로 얻어맞고, 술잔을 맞대던 손이 뒷덜미를 잡았을 때 병찬은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보다, 이 새끼를 날리고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억울했다. 그렇게 키워줬더니, 어떻게 니가, 모든 개소리가 귓구멍으로 들어와 귓구멍으로 나갔다. 병찬이 입안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뱉었다. 대신 죽을 개새끼 하나 예뻐해 주신 거면서, 뭘 그렇게……. 간부의 밑창이 병찬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분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리를 내리찍어대다 불현듯 발을 멈췄다. 병찬을 찾았던 상사가 간부의 옆에서 무어라 속삭였다. 여기서 뒤지면, 파일, 흥미를, 귀가 먹먹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내용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상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부가 병찬의 배를 발끝으로 누른다. 하나만 묻자. 옆으로 쓰러진 병찬이 숨만 몰아쉰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껌벅거린다. 간부의 어깨 너머로 상사의 낯이 보인다. 파일, 니가 가진 게 있지? 상사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병찬은 찢어진 입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간부의 멍청함을 시험하는 마지막 도박이었다. 남겼으면, 가져가서 자수나 하라고요? 내가 미쳤다고……. 상사가 얇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웃었다. 간부가 병찬을 내려다보다 낯 위로 카드를 던졌다. 뒤진 것마냥 살어. 상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 자리를 뜬다. 대신 자리를 지킨 상사가 병찬의 관절을 휘감았던 테이프를 끊었다. 일도 잘하고 똘똘했는데, 왜 그런 걸 찾아서. 상사가 카드를 병찬의 주머니에 넣는다. 기특하게. 파일 잘 가지고 있어, 내가 찾을 때까지 죽지 말고. 병찬의 생존에 상사의 입김이 들어간 건 명확했다. 상사가 멀어지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박병찬 아직 못 찾았어? 씹새끼, 대체 어디로 숨었길래……. 

내가 이 새끼 돈으로 목숨 붙이는 게 고깝기는 한데, 어차피 얼마 안 남았거든? 말을 잃은 종수의 앞에서 병찬이 말했다. 카드가 진짜라면, 병찬의 일거수일투족은 카드를 쓸 때마다 간부에게 전송되고 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사가 종수의 자존심을 긁어가며 일을 벌인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종수는 간부가 의도적으로 병찬의 위치를 숨긴다는 걸 깨닫는다. 이 년 사이 두 관계에 어떤 트러블이 있는지는 관심 없다. 다만, 이 상황에서 멀쩡하게 정신 붙이며 살아가는 병찬이 우스웠다. 동시에 멍청할 정도로 자신에게 패를 드러내는 병찬이 한심했다. 너 병신이야? 내가 가서 까발리면, 난 그냥 호구지만 넌 뒤지는 거야. 뭘 믿고 나한테, 승대야, 너 원래 그렇게 사람이 비관적이냐? 근데, 나는 니가 가서 분다고 했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야. 일 잘하다가 호구 되는 기분은 나 하나만 느끼면 되는 거잖냐. 종수는 병찬의 말을 듣고 완벽하게 맥이 빠졌다. 한 달간 뺑이 친 게 날아갔다는 허탈함과는 결이 다르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차고, 그러니까. …… 뭐 이런 게 다 있어. 종수는 한 마디를 끝으로 일어섰다. 더는 이 자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박병찬을 찾지 못했고, 이규의 말대로 앞으로의 업무에 집중하면 끝날 일이었다. 일어서는 종수를 따라 병찬의 고개가 들린다. 가게? 너랑 있다간 같이 멍청해질 것 같아서. 지금 버스도 없어. 차 가지고 왔어. 너 술 냄새 오지는데? 종수가 축축한 바지로 시선을 깐다. 다리를 살짝만 들어도 코끝까지 맥주 냄새가 풍겼다. 이건 술을 안 마셨다고 해도 단속에 걸릴 냄새다. 종수가 찢을 것처럼 노려보자, 병찬은 침대로 턱짓했다. 자고 가, 니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게. 차라리 근처에 방을 잡고 말지. 그러나, 아쉽게도 종수가 아침에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천장의 침대 위였다. 왜, 나도 후배 얘기 좀 듣자! 따위의 말로 사람을 잡아대던 병찬은 기어코, 종수를 침대 위로 눕혔다. 며칠이고 잠을 쪼개어 잤더니, 간만에 누운 침대가 달았다. 무의식적으로 병찬을 찾던 눈이 문득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제 지갑이 벌어져 있었다.

[ 승대가 아니라 종수네? 종수야, 형아가 현금이 똑 떨어져서 조금만 빌려 갔다! 곧 갚으러 갈게. 그리고 여기 상호네 집이니까, 너무 늦지 않게 나가야 해~ 상호 놀란다~ 010-xxxx-xxxx ] 

얇아진 지갑 사이로 메모 한 장이 남아있다. 메모조차 종수의 지갑에 있던 영수증이다. 종수는 메모를 한참 바라보다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무미건조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렀다. 와중에 카드며, 신분증은 손도 대지 않았다. 종수가 전화를 끊는다. 곧 갚으러 갈게.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부터, 갚으러 오겠다는 말까지. 박병찬은 내뱉는 말마다 이해가 안 되는 별종이란 생각과 함께 지갑을 챙긴다. 박병찬의 연락과 함께 회사는 퍽 떠들썩해지겠지. 종수는 기묘한 기분에 가슴팍을 긁었다. 간지럽고,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 씨팔 …… 아직도 맥주 냄새 나잖아, 박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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