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

고양이를 위한 클래식 동요

종뱅

hello world by no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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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시야가 단숨에 밝아진다. 병찬의 움직임에 현관 센서등이 반응했다. 둘러맨 기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병찬이 스트랩을 고쳐 맸다. 늦여름은 날이 저물어도 바깥이 후끈하다. 나 왔어. 턱가를 적시는 땀을 어깨로 대충 훔치며 병찬이 신발을 벗었다. 종수가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길게 뻗은 복도가 깜깜했다. 콩쿠르 일정이 잡히는 순간부터 동거인은 눈에 띄게 예민해진다. 오늘도 연습실에 박혔나. 연락 한 통 없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람 없이 빈 집 치고는 공기가 서늘했다. 에어컨은 끄고 갈 것이지. 데님 셔츠 아래로 드러난 살갗에 찬기가 돈다. 병찬이 팔을 쓸며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 소파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든 빛을 차단하고 싶은 사람처럼 불도 켜지 않고 커튼도 내린 채 종수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종수가 들고 있던 핸드폰이 아니었다면 어둠에 길이 들지 않은 눈은 사람의 윤곽조차 희미했을 것이다. 에어컨만 끄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던 병찬의 걸음이 멈췄다. 곧은 실루엣 위에서 영상의 빛이 일렁거린다. 병찬이 소파의 뒤로 몸을 옮긴다. 종수는 이어폰도 없이 맨 귀다.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거지. 병찬의 눈썹이 얕게 꿈틀거린다. 기타를 내리지도 않고 묵직한 상체를 기댄다. 두 손바닥을 종수의 머리 위로 포개고 턱을 괴었다. 형 왔어. 종수는 미동도 없다. 어깨 너머 자그마한 영상이 얼추 10초 단위로 반복된다. 한 파트를 넘어가기가 무섭게 종수가 영상을 뒤로 돌린다. 눈 나빠진다. 신경 꺼. 제가 왔다는 말에 반응도 하지 않더니, 귀찮은 걸 떨쳐내는 데에는 즉각이다. 기가 찬 웃음을 뱉고 상체를 일으킨다. 스트랩 아래로 땀이 찼던 게 식어간다. 나 씻는다. 병찬이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은 건 약간의 심술이었다.

병찬이 젖은 머리를 털며 다시 나올 때까지 거실의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종수의 미간이다. 판판했던 살갗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병찬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물기가 남은 머리를 종수의 어깨에 기댔다. 신경을 끄고 싶어도 거실 한복판에서 시위하듯 앉아 있으면 눈길이 가는 게 사람 맘이다.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이 차가운지, 종수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만다. 굳이 종수의 시선을 데려오는 대신, 병찬은 영상에 시선을 둔다. 10초, 뒤로 돌아가고, 다시 10초. 길죽한 새끼손가락이 검은 건반을 누르자마자 종수는 엄지로 되감기 아이콘을 눌렀다. 다시 10초. 종수네? 종수가 여전히 입을 다문다. 어깨 너머로 대충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인다. 배경은 종수의 연습실이고, 손가락은 종수의 것이었다. 건반 위에서 손이 튈 때마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콩쿠르? 피아노에게 말을 걸어도 지금보다는 대답이 잘 나오리라. 병찬은 입을 다물었다. 제 머리카락이 최종수의 어깨를 적시는 걸 느끼며 애인의 짧은 연주나 즐기기로 했다. 박자가 어긋나는 것 같지도 않고, 음이 튀지도 않는데 뭘 보고 싶어서 계속 돌리는지.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몇 번이고 같은 건반을 두드린다. 바짝 깎인 손톱이 흰 표면을 긁으면 매끈한 상아가 몸을 움츠렸다가 튀어 오른다. 제가 알 수 있는 건 종수의 손이 예쁘고 피아노를 잘 친다는 정도다. 피곤에 살살 감기는 눈꺼풀을 내버려둔다. 소음이라고는 고작 에어컨 바람 소리가 전부인 환경에서 숙면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잘 치네. 병찬이 중얼거렸다. 종수가 짧게 숨을 뱉더니 병찬의 고개를 밀었다. 힘 풀린 고개가 어깨 위에서 맥없이 밀렸다. 꺼져. 병찬의 잠이 완벽하게 달아났다. 뇌를 좀먹던 피로감을 순식간에 떨쳐내는 것도 재능이다. 얼빠진 눈이 종수를 쳐다본다.

“뭐야, 난 칭찬도 못해?”

“지금 좆같이 쳐서 보고 있는 거 안 보여?”

“말도 안 섞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게 좆같아서 보는지, 니 잘하는 자기과시인지. 너 지금 나 오고 신경 꺼, 꺼져. 딱 두 마디 했어.”

“뭘 모르면 입 다물고, ……됐다. 니가 뭘 안다고.”

“종수야, 형도 귀라는 게 있거든? 내가 너한테 좆같다고 한 것도 아니고,”

“뭔 소린지 모르면 신경 끄라고.”

종수의 눈이 핸드폰에 박혔다. 혈관을 타고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열이 올랐다. 씨발, 그래. 이 새끼 예민해지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병찬은 괜한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대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걸 선택했다. 제 애인이지만 가끔은 미련할 정도로 한 곳만 본다. 얼마나 오래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는지, 핸드폰 아래 손바닥이 벌겋다. 어깨에 내내 기댄 탓에 눌린 머리를 털고 병찬은 발을 뗀다. 비록 음악의 ㅇ도 모르는 머저리 취급당한 건 억울했지만, 손가락 끝의 굳은살이 다 아렸지만. 병찬이 잠시 자리에 섰다. 생각해 보니까 더 억울하네. 부스스한 뒤통수 뒤로 병찬이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야, 나라면 그렇게 삽질하는 시간에 가서 연습이나 더 하겠다. 씨발, 누군 그걸 몰라서 … ! 또 한 귀로 듣고 흘리겠지, 짐작했던 것과 다르게 종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좁혀진 미간 그대로 낯 위로 울분이 보였다. 연습한 만큼의 아웃풋이 안 나오는 것 이상으로 답답한 일이 또 뭐가 있을까. 짊어진 눈길이 많다면 더더욱. 어리광을 어디까지 받아줄까, 병찬이 머리를 굴린다.

“그러니까 왜 안 되는데 혼자서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끙끙거리냐고,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기적처럼 해결이 된대? 눈으로 봐서 뭘 하냐고, 종수야.”

애꿎은 입술만 씹는다. 가뜩이나 건조한 게 앞니에 씹혀 뭉그러졌다. 종수는 말없이 병찬을 노려보다 핸드폰을 소파 위로 집어 던졌다. 거센 발소리가 병찬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간다. 애새끼, 성질하고는.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다 병찬이 시선을 돌렸다. 나동그라진 휴대폰이 아직도 딩동거린다. 저러다 방전이라도 되면 귀찮은 건 본인일 텐데. 병찬이 거실 소파에 눕는다. 한손에 종수의 핸드폰을 쥐고 팔걸이에 다리를 걸쳤다. 동영상의 타임라인을 가장 처음으로 당겼다. 화면이 잠시 덜걱거리다 종수가 의자 위로 앉는다. 몇 번 손가락을 꾸물거리다 건반 위로 손을 얹었다. 무덥지도, 흐리지도 않은 산 중턱에서 시냇물이 흘렀다. 병찬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잘만 치는데. 빽빽한 가지에 덮여 미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여린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흐르는 물은 몽돌 몇 개를 이끌며 아래로, 아래로 내달린다. 종수의 플레이리스트에서 한번쯤 들었던 선율을 흥얼거리다 병찬이 불현듯 눈을 떴다. 종수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구간에서 제대로 웃음이 터졌다. 시냇물이 흐르다 못해 범람한다. 빳빳한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소리만 들어도 티가 나는데. 병찬은 끙, 작게 앓으며 소파에서 선다. 제 귀로 들어도 이 정도면 종수가 모를 리 없다. 혹은 대놓고 맘에 안 드는 구간만 고집하여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도 모를 수 있다. 어쩔까, 화가 잔뜩 나서 토라진 애인을 위해 귀찮은 걸음을 딛는다. 핸드폰을 끄고 종수의 방 앞에 선다. 종수가 알고 있으면 욕이나 한번 더 먹고 말지. 병찬이 종수의 방문을 열었다. 커다란 등짝이 침대 벽에 딱 붙어 옹동그라졌다. 종수야. 병찬은 슬슬 종수의 침대로 걸었다. 최종수. 이름을 부르고 침대에 눕는다. 침대가 움푹 들어가며 종수의 몸이 살짝 기운다. 고개는 돌리지도 않고 벽으로 더 딱 붙는 게 웃겼다. 귀여운 새끼. 병찬이 종수의 등을 끌어안았다.

“우리 종수, 형아가 종수 마음을 몰라줘서 삐졌어?”

“……나가.”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나갈게.”

“…….”

“나비야 쳐주라.”

“……난 씨발, 진짜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적어도 병찬은 종수의 고개를 돌리기에 성공했다. 힐끔 돌아본 볼에 병찬이 냉큼 입술을 부볐다. 하지 마, 종수가 고개를 꺾는 동안 병찬은 종수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준다. 한 번만. 형아 평생소원이다. 지랄 좀 하지 마……. 언능. 인간이 왜 이렇게 찰거머리 같은지. 서늘한 병찬의 몸이 등에 찰싹 붙었다. 종수는 그 위로 이불을 던진 채 핸드폰을 연다. 가비지밴드. 종수의 손가락이 앱을 누르자 병찬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종수가 노려봐도 태연하게 재촉하는 게 전부다. 성의 없는 손가락이 액정 위로 건반을 눌렀다. 나비야, 나비야. 어린아이 장난처럼 단조로운 음색 위로 병찬이 흥얼거렸다. 이게 뭘 하자는 건지. 종수가 마지막 음을 누르고 핸드폰을 배게 위로 올리니, 병찬이 허리 위로 팔을 올렸다. 잘 치네. 너 내 신경 긁으려고 왔냐? 아니, 잘 친다고……. 이렇게만 쳐도 최종수인데, 손에 왜 이렇게 힘이 빡 들어갔어. 종수는 문득 제가 영상을 끄지 않고 왔다는 걸 자각한다. 병찬의 손이 살금살금 종수의 손을 쥐었다. 마디마디를 부드럽게 누르며, 너덧 살 꼬마라도 달래듯 얼러댄다. 누가 그랬어, 누가. 어깨 위로 닿는 숨만 뜨끈하다. 종수는 몇 번이고 병찬이 제 손가락을 누르는 것을 두다가 한순간 손을 짧게 털었다. 멍청하게, 박병찬도 듣는 걸 듣지 못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너 진짜 짜증 나. 종수가 병찬을 밀며 상체를 세웠다. 병찬이 손쉽게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 나도 너 사랑해. 종수가 베개로 병찬의 얼굴을 덮었다. 침대가 얕게 기울더니 이내 되돌아온다. 야, 나 나갔다 온다. 병찬이 베개를 치웠다. 엉, 연습 잘하고 와. ……. 오면서 형 맥주 한 캔만. 종수가 대답 없이 방문을 닫았다.

까똑. 지판을 쥐던 병찬의 손이 멈췄다. 슬슬 줄을 갈아야 하나. 팽팽한 줄 위를 더듬던 손이 책상 위 핸드폰을 잡는다. 종수는 영상 하나만 덜렁 보내고 말이 없다. 뭐야. 병찬이 동영상을 누른다. 건반 위 가지런한 손가락이 기깔나게 나비를 날렸다. 흐학, 병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굳이 제가 쳐달라던 곡을 보낸 것도, 영상을 녹화해서 보냈을 종수의 모습도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진짜 귀여운 새끼. 병찬은 이리저리 핸드폰을 만지더니 적당한 각도로 세워둔다. 카메라의 동영상 녹화를 틀고, 기타 피크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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