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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성준수가 산다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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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빵준온 발행

전영중의 생각에 자신의 인생은 꽤나 평탄했다. 운동계고 경기에 나가는 걸 제외하면—모든 경기에 자신만의 하이라이트를 말하느라 며칠이고 밤을 지새울 수 있지만 일단은— 자소서를 적을 때 인생 역경과 극복 방법 같은 어필할 무언가가 없었다. 갓 스물밖에 안 된 녀석이 남에게 말해줄 만한 인생 역경이 있으면 그것도 큰일 아니야? 싶지만 일단은.

그런 전영중에게 희귀한 시련이 찾아왔다. 너무 희소하다 못해 어디다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역경이 몸소 자취방의 벨을 누르고,

“며칠 신세 좀 지자.”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두툼한 숏패딩을 팔에 걸치고 성준수가 자신을 보았다. 성준수가 맞나? 꼭 감기에 걸린 것처럼 평소보다 조금 낮은 톤이었지만 일단 목소리는 맞았다. 볼살이 빠져 살갗이 올라붙은 게 피곤해 보이기도. 요새 아팠나? 이러니까 쟤네 아빠랑 더 닮은 것 같은데. 눈이 깊어진 것도 같고. 머리도 조금 셌는지 몇 가닥이 희끗했다. 준수가 새치 일찍 생기는 유전이었나? 실례라는 자각도 없이 눈앞의 성준수를 낱낱이 뜯어본다. 다크 서클마저도 잘생김으로 소화하던 녀석이 며칠 새 남이 맞아야 할 세월까지 몰아 맞은 것처럼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감독님한테 개같이 까였나?

“……무슨 일 있어?”

“많지. 많았어.”

허락은 없었지만 거절도 아니었기에 성준수는 집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패딩을 대강 걸쳐두고 자취방 아무 데나 주저앉아 말한다. 옷 좀 빌려주라. 이제 보니 패딩만이 아니라 터틀넥, 슬랙스도 계절감이 틀려먹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성준수를 위해 에어컨 온도를 내리고 아무 옷이나 갖다준다. 눈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어제껴도 새삼스레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락커룸이며 숙소에서 벗은 몸 본 게 몇 번인데. 다만 목 아래 길게 찢어진 상처가 신경 쓰였을 뿐이다. 아문 지 오래돼 보이는 상처였다. 언제 생긴 거지?

성준수는 헤매지 않고 세탁기를 찾아 제 옷을 집어넣는다. 빨래 바구니를 뒤적여 같이 빨만한 것들을 골라 집어넣고 작동시키기까지 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좁은 자취방을 메웠다.

“나 마흔둘이야.”

그렇구나. 전영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나이를 먹은 거였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라든가, 원래보다 탄력을 잃은 피부 같은 것들. 그래도 사십 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잘생긴 애들은 원래 천천히 늙나? 아니면 관리를 빡세게 했거나. 제가 아는 성준수는 세수하고 로션만 바르는 게 끝이었지만 나이 먹고 바뀔 수도 있지.

둥글게 돌아가는 모터 소리 사이로 문득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여기는 어떻게 온, 오셨, 왔어요……? 형?”

혼란스러운 어미에 성준수는 웃기만 했다. 제가 주인인 것처럼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건네고 자신은 커피를 꺼내 물었다. 순식간에 반을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연다.

“형은 무슨, 내가 일찍 결혼했으면 너만 한 애가 있는데.”

“와…….”

“아저씨라고 불러.”

마흔둘의 성준수는 꼰대가 분명하다고 전영중은 생각했다.

미래에는 타임머신이 개발됐단다. 대중에 알려진 지는 이 년쯤 됐고.

“그럼 관계자라 타임머신 쓴 거예요? 준수 농구 그만둬요? 이공계 그쪽으로 전향해요?”

준수가 농구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전영중은 아저씨 성준수의 말을 싹둑 자르고 물었다. 이게 어른이 얘기하는데. 당장이라도 욕할 거 같은 표정이었으나 스무 해 남짓을 더 산 아저씨는 한 번 참아주었다.

“농구해. 했어. 은퇴한 지는 좀 됐고. 타임머신이든 우주왕복선이든 돈만 내면 다 쓸 수 있지.”

마흔둘이면 은퇴하고도 한참 지났을 나이긴 했다. 끄덕이다 이번엔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 떠올랐다.

“근데 왜 타임머신 탔어요?”

그것도 제 눈앞에. 고1로 되돌아가 전학 가려는 자신에게 ‘야, 너 뭐 되니까 전학 가지 말고 원중고에 찰싹 붙어있어라’ 그런 말이라도 하면 몰라. 이제 막 입시 마치고 교체멤버로도 안 쳐주는 대1짜리 그냥 친구 전영중에게 마흔둘의 성준수가 왜?

“너랑 헤어졌거든.”

미처 넘기지 못한 오렌지주스가 주륵 흘러내렸다. 준수 영중이 깔이에요……. 그런 말을 떠올렸다가 부정한다. 저요? 나? 내가? 그쪽이랑? 준수요? 예의 없는 검지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킨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지도 않은 성준수와 헤어졌다는 20년짜리 스포일러부터 들어버렸다.

“그래서 죽여버리려고 했어.”

이어진 살인 예고는 더 충격적이었다. 전영중이 오렌지주스 뚜껑을 닫고 뒤집어 잡았다. 선빵 치려는 건 아니고, 죽이려 들면 막아보려는 용도였다. 성준수는 한다면 하는 남자였으니까. 델몬트면 유리병이라 타격감이라도 있을 텐데 아쉽게도 플라스틱이었다.

“진정하고 생각해 보니 후회되길래 취소하려 했는데.”

“취소요?”

“어. ……너 설마 내가 직접 널 죽일 거라 생각했냐?”

어른 성준수가(전영중도 법적으로 성인이긴 하지만)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아니, 준수 말버릇이 죽여버린다, 찢어버린다 뭐 그런 거니까 언젠가 해낼 줄……. 일단 오렌지주스 병은 내렸다.

“청부업자 썼지.”

여기서 전영중은 모든 판단을 포기했다. 전문가를 썼다고……. 나약한 일반인(전영중은 자기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의 몸으로 청부업자는 막을 수 없는 재난이었다. 그냥 자신을 살려주기로 결심한 아저씨 성준수의 아량에 감사하며 재앙같이 쏟아지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과거로 출발했다길래 내가 왔어.”

“왜 굳이 직접…….”

“다른 사람 또 보내면 비용이 따블이라.”

아. 사람 죽이는 데 얼마든 쓸 수 있지만 살리는 데 그만큼 쓰자니 그건 아쉬웠나요. 평소처럼 튀어 나가려던 반박이 나이 차 앞에 가로막혀 가만히 고개만 조아린다.

턱을 괴고 무감하게 얘기하던 성준수가 웃었다. 어깨를 두드리고, 머뭇거리다 끌어당기더니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오랜만에 너도 볼 수 있겠다 싶었고.”

우리 헤어졌다면서요? 이 스킨십 뭔데?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미운 거 아니었어? 제 정수리를 누른 전영중이 경악해서 쳐다본다.

“업자가 정확하게 며칠에 찾아올지 모르니까 한 달만 같이 지내자. 이 시대 연락처를 몰라서 얼굴 보고 의뢰 취소라고 말해야 하거든.”

맨입으로 눌러앉겠다는 건 아니고. 그러더니 패딩에서 지폐뭉치 한 다발을 꺼내 얹는다. 신사임당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전영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월세지만 내 집처럼 모시기에 부족함 없는 금액이었다.

“근데 왜 한 달이에요? 꼭 이 시점에 죽… 와야 했던 이유라도 있어요?”

침착하게 말을 잇던 성준수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리를 피하거나 욕이 날아오지 않는 걸 보니 고민하는 모양이었다—지금 준수의 버릇을 비추어 보자면 그랬다.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이던 그가 짧았던 고민을 마쳤다.

“네가 한 달 후에 나한테 고백해.”

마침내 오렌지주스 병이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바닥과 충돌한다. 콰광! 플라스틱병이었는데 어쩐지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전영중 인생 두 번째 스포일러였다.

“아예 고백하기 전에 죽여버리려 했지. 너 나 좋아하잖아.”

씨발 아저씨, 그런 건 좀 비밀로 해주세요. 나도 캐묻지 않을게……. 그러나 아저씨 성준수는 재밌어 죽겠는지 허리를 접고 웃어댔다.


오늘 준향대에서 시합 있어요.

그래?

전영중의 집에 눌러앉은 성준수가 익숙하게 옷장을 뒤진다. 어웨이 유니폼을 꺼내고, 출전 안 하겠지만 챙길 거지? 하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암슬리브를 집어넣는다. 스포츠 양말과 속옷까지…… 아니, 팬티는 제가 챙긴다구요! 달려들어 속옷을 빼앗자 성준수가 큭큭 웃으며 쉽게 밀려났다. 새끼, 부끄러워하기는.

전영중의 집에 눌러앉은 어른 성준수는 손님 대접을 바라지 않았다. 원래 이 집에 살던 것처럼 식사를 차리고 청소했다. 지나치게 능숙해 보이는 게 성준수 같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성준수 같았다. 원래 집안일 잘했어요? 제가 아는 준수는 기껏 해봐야 숙소 빨래 바구니에 빨래나 집어넣을 줄 알았던 녀석이었다. 자주 하니 손에 익은 거지. 아저씨는 제법 세월로 빚어진 듯한 대답을 내놨다.

그마저도 뭐랄까, 꼭 엄마 같았다. 밥 먹는데 제 계란후라이를 양보하고 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것들이 너무나 손윗사람의 애정이었다. 일찍 결혼했으면 너만 한 애가 있을 거라던 아저씨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일순 소름이 돋아 부르르 몸서리친다.

“야, 전영중.”

“어, 응?”

“왜 넋을 놓고 있어?”

스무 살의 성준수가 말을 걸었다. 자신이 잘 아는, 존댓말 하지 않아도 괜찮은 성준수가. 이 성준수가 지금 결혼하고 속도위반이 아닌 혼후 관계로 한두 해 내에 애를 가지면 딱 마흔둘의 성준수에게 자기만 한 애가 생기는 거다. 그건 좀… 징그러운데.

눈앞에 사람을 두고 딴생각하느라 미적지근한 반응에 어김없이 미간이 구겨진다. 야, 야. 정신 차려. 발끝이 거침없이 전영중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농구화를 걷어찬다.

“옷 갈아입고 나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 요 앞 뚝배기 제육덮밥 먹어봤냐? 치즈도 넣어주는데 니 환장하게 좋아할 거 같더라. 주익대는 경기 끝나고 선배들이랑 같이 밥 먹어야 하냐? 그딴 거 없지? 대답도 없는데 성준수는 길게 말을 이었다. 원래 준수가 이렇게 많이 말했나? 어른 성준수는 이러지 않았다. 먼저 하는 말이라고는 밥 먹을래? 과제 했냐? 경기 언제야? 내일 몇 시에 깨워줘? 정도였다. 전영중이 묻는 말에 곧잘 대답해 줬지만, 미래에 대한 건 대부분 스포일러라며 입을 다물었고. 그러니까, 주도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른 성준수와 지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지금의 성준수가 새삼 낯설다.

“이 시발, 정신 안 차려?”

툭툭, 앞코를 차던 농구화가 기어코 종아리에 박혔다. 악! 근육 사이를 노린 절묘한 킥에 참을 새도 없이 비명이 터졌다. 일제히 시선이 꽂힌다. 전영중은 멋쩍게 웃었다가 하나둘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허리 숙여 종아리를 문질렀다.

“준수 진짜 폭력적이다.”

“네가 할 말이냐? 경기 내내 정신 빼놓고 있더니 아직도 이러네.”

그야 네가 지금 결혼하면 나만 한 애가… 아니, 준수 나랑 사귄다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 근데 우리 헤어졌대. 사귀긴 했다는 거네? 내 고백을 받아줬나? “이 씹…….” 짜증스러운 욕설에 부유하던 잡생각이 싹 가라앉는다.

“얼른 씻고 나올게.”

“경기도 안 뛴 게 왜 씻냐? 땀도 안 흘렸는데 샤워는 지랄, 니 물 낭비하다 진짜 물 부족 국가 되면 어쩔래?”

익숙한 힐난이 업보처럼 돌아왔다. 준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뒤끝 있는 타입이구나……. 전영중은 알겠다며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성준수의 말대로 샤워는 생략한다. 이 상태라면 생각에 잠겨 한참 물만 맞다 기다리다 못한 누구에게 귀를 잡혀 끌려 나올 것 같았다.

체육관에서 나오자 흡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던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성준수는 수수한 셔츠에 모자를 눌러 쓰고 곧잘 학교에 따라왔다.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업자가 찾아와서 너 죽여버리면 안 되잖냐. 걱정 한번 살벌했다.

그래도 밀착마크는 아니고, 지금처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정도다. 목숨이 걸렸으니 전영중도 그 정도는 이해하기로 했고.

담배를 비벼 끄려던 그는 전영중의 동행인을 알아보고 반쯤 남은 꽁초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나, 얘랑, 밥. 몰래 손짓하며 뻐끔거렸으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러나 아저씨는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몇 개 안 되는 단어를 다 뱉기도 전에 대강 손을 젓고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하라는 거다.

“너 요새 고민 있냐?”

전영중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뚝배기 제육 곱빼기 두 개를 주문한 성준수가 묻는다. 뚝배기 불고기 먹는다던 거 아니었나? 무슨 제육이 뚝배기에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전영중은 메뉴도 제대로 기억 못했다. 야, 야, 이거 진짜 왜 이래? 코 앞에서 하얀 손가락이 딱딱 부딪힌다.

“코치가 농구 때려치래?”

“무슨 미친 소리야? 쥐약 먹었어?”

“아니면 뭔데? 너 이렇게 정신 빼놓고 있는 거 처음 본다.”

고1 때도 안 그러던 녀석이. 성준수가 고1의 어느 날을 이야기하는지 정확히 짚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일이었으니.

얼굴에 걱정이 선연하다. 그게 익숙하다가도 낯설다. 날 걱정하는 성준수? 원중고 현관 계단에 앉아 울든 말든 전학 갈 학교나 알아본다던 녀석이? 눈썹을 찡그린 모습이 아침 먹으라며 제 엉덩이를 걷어차 깨우는 마흔둘 성준수와 겹친다. 묘하게 다정한, 강도 높은 훈련에 잔뜩 굴려지고 아무렇게나 뻗어있으면 말없이 근육을 눌러 풀어주던 성준수. 비록 그 성준수가 나타난 계기는 저를 죽이려 해서였지만…… 한때나마 사귀는 사이였다니까 전남친의 귀여운 과거버전에게 아량을 베풀어준다 치자. 그런데 이 성준수는 왜?

“……너 혹시,”

아저씨 성준수는 제가 한 달 후—지금 시점으로는 삼 주 후가 된다—자신이 고백할 거라 말했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야 자신은 성준수에게 고백한다는 생각 따위 해본 적 없으니까. 그런데 만약, 내가 고백하는 계기가 이 순간 성준수의 다정함을 자각해서라면? 사실 준수도 날 좋아하고 있어서 받아줬다면?

그런데 아저씨가 그때 고백 받아줬다고 말했던가?

혹시—성준수가 그다음 말을 기다린다. 때마침 고봉으로 쌓인 뚝배기 제육덮밥 두 개가 나온다. 손님이 없어 주방을 보던 작은 체구의 이모가 제 얼굴만 한 뚝배기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서빙했다. 배가 고팠던 스무 살 두 명은 뚝배기가 등장한 순간부터 좇다, 테이블 가까이에서 받침대 하나가 뚝 부러지는 걸 목격하고 만다. 얄궂게도 운동선수의 반사신경이 재빨리 낙하하는 뚝배기를 받아…….

“미친, 야! 뭐해!”

앗, 뜨거!

식당 이모가 만들어 준 얼음주머니를 절그럭거리며 전영중은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야 너는 운동하는 새끼가 정신 빠져서 미친 새끼처럼 뚝배기를 손으로 받냐 멍청한 새끼야? 한 문장에 새끼 네 번을 찾던 소동물 애호가 성준수에게서 받은 걱정을 어른 성준수에게 다시 들을 각오를 마쳤다. 다 준수준수들이 날 걱정해서 하는 소리니까 뭐라 하든 존나 상처 안 받아야지. 내 실수도 맞고. 아니 근데 다친 건 난데 왜 준수가 더 난리람.

그러나 아저씨 성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음주머니를 들어올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살펴보더니 편의점에서 얼음컵을 하나 사 와 손수건으로 묶어 쥐여줬다. 비닐봉지는 물새니까 이렇게 들어. 얼음 바로 쥐면 동상 걸린다. 응급실 들렀다 가자. 물집은 안 잡혔으니까 괜찮을 거야.

왜… 화를 안 내지?

이것이 어른? 이라고 넘기자니 아저씨는 몹시 빡친 표정이었다. 겨우 감정을 눌러놓는, 지금의 성준수에게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표정—그 빡친 이유 대부분이 전영중 때문이라는 건 차치하고.

“화났어요?”

화상연고를 바르고 다시 얼음컵을 쥔 전영중이 물었다. 다행히 손은 멀쩡했다. 응급처치를 잘해 2주 정도면 웬만큼은 회복할 거란다. 그동안 공 튀기는 것만 조심하고. 거즈를 덕지덕지 붙인 오른손을 흘끔 본 성준수가 얼굴을 쓸었다.

“미안.”

“네?”

“내 탓일 거야.”

그건 자의식 과잉 아닐까. 성준수에게 받아쳤을 말이 나이 차에 가로막힌다. 한참의 침묵 뒤에 성준수가 다시 입을 연다.

“규칙이 있어. 자신과는 만나지 마라.”

“시간 여행자의 규칙 같은 거예요?”

“시간 여행자라고 할 만큼 보편적인 건 아니고……. 아무튼 그래. 자신과 만나면 그 시간대에 불행을 가져온다든가.”

나도 주워들은 이야기야. 성준수가 자신감 없이 덧붙인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준수가 아니라 내가?”

“목적이 너여서? 몰라. 내 쪽도 시간여행과 관련된 건 이제 체계를 만들기 시작해서 정보가 적어.”

“그런데 아무나 막 타임머신 타고 그래요?”

“당연히 아니지.”

“근데 탔잖아요?”

“원래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건 대부분 할 수 있어.”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성준수가 당당히 자본주의적으로 타락한 것 같은 발언을 하는데? 평생 영웅병 걸려 세상과 타협 없이 살 것 같던 녀석이?

“타임머신 타는 거 불법이에요?”

“시공연구소 소속 지정 파일럿이 아니면.”

“해당돼요?”

“아니지.”

“불법이란 소리네?”

“니 죽이려고 계약한 건 합법일 거 같냐?”

잠자코 받아주던 성준수가 왈칵 성을 낸다. 맞다. 원래 나 죽여버리려고 했지. 전영중이 입을 다물었다. 성준수가 업자와 대면으로 계약 취소를 통보하지 않는 이상 살해위협은 진행 중이었고, 저를 살려두겠다 변덕을 부린 것처럼 언제 다시 죽이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지 모른다.

“어쨌든, 내가 주워들은 게 맞으면 멀리서라도 여기의 준수와 내가 마주쳐 발생한 불행이 네게 간 걸 수 있어.”

겨우 상황을 정리한 성준수가 깊은 한숨을 뱉는다.

“원래대로라면 너 오늘 화상 안 입었으니까.”

“그걸 기억해요?”

“눈앞에서 뚝배기에 손 지지는 꼴을 봤으면 내가 기억 못하겠냐? 별일 없이 다 먹었어.”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밥 먹으러 가서 친구가 뚝배기에 철사장 수련하는 꼴을 보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슈퍼콘까지 야무지게 얻어먹었으니까.”

그런 것치고 성준수는 이상했다. 관심 없다는 듯 말하면서 세세한 걸 기억했고, 지나치게 전영중을 보살폈다. 부모님 같다 느낀 행위는 동갑의 성준수로 치환해 한 꺼풀 벗겨내면 너무나 쉽게 단순화된다. 애정에 기반한 헌신.

미래의 성준수는 미래의 전영중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결별하고도 그에게 집착하는 걸까.

“내가 더 주의할게. 미안하다.”

이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 보일 모습은 아니라고, 전영중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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