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우려먹은 케이크
재유준수 쟁준 생일 축하기념. 준짝쟁 쟁짝준
생일을 챙긴다는 건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다.
재유와 준수가 가진 공통된 생각이었다. 12월 23일과 24일, 크리스마스와 며칠 차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둘의 생일은 '퉁'쳐지고는 했다. 크리스마스를 꽤 정성들여 챙기던 어린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은 두 개 받을 선물을 하나로 만족해야 했고, 시간이 흘러 산타를 믿지 않게 되었을 때도 온전한 생일축하보다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다른 이의 생일도 함께 축하받고는 했다. 그러나 재유도, 준수도 그런 일에 불만을 갖는 성격은 아니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보다는 슛 하나 드리블 하나가 더 중요했으니까.
결국 올해도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다. 특별하지 않은 게 생일이었기에.
크리스마스에 대해 먼저 물어본 것은 재유였다. 준수는 선약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본가에 올라가는 거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준수는 서울엔 1월에 간다고 했다. 재유가 맞나...하고 물러섰다.
원래대로라면 크리스마스 전, 학교가 방학을 하고 나서 본가에 올라갔을 터였다. 3학년 겨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고 학교 근처 자취방이나 체육관 위치 등 알아봐야 할 게 많았다. 그러나 준수는 그걸 1월로 미뤘다. 이곳에 재유가 있으니까.
재유의 생일이 23일이라는 건 고작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재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시기도 그 즈음이었다.
23일? 신기하네. 뭐가요? 내 생일은 24일이라서. 헐, 그러면 파티해요. 크리스마스도 겸해가.
항상 이런 식, 겸사겸사 하는 식. 준수는 제 생일을 그렇게 여기는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재유의 생일까지 특별하지 않은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니까.
"재유, 너는?"
"어?"
"넌 크리스마스 약속 있냐고."
"없다, 그런 거."
그래.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준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핸드폰 불빛을 쬐었다. 크리스마스를 재유와 함께 보내려면 지금부터 계획을 짜놔야 했다. 아, 부산은 나보다 재유가 훨씬 더 잘 알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재유가 맛있었다고 한 음식, 괜찮다고 했던 카페, 가보고 싶다고 한 곳. 그런 것들을 모조리 떠올렸다. 두세 장소를 중심으로 동선과 일정을 만들자, 순식간에 봐줄만한 크리스마스 계획표가 완성됐다. 그러나 준수는 그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것보다 더, 좀 더 나은 계획은 없나 고민했다. 식당을 예약하고, 카페 메뉴판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갈 공원의 벤치 개수까지 알아낸 후에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재유, 생일 축하해."
"아, 준수. 고맙디. 근데 우예 알았노? 니한테 말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기상호가."
"아아."
기상호도 아는 정보를 저 혼자 몰랐다는 게 서운했다고는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준수가 말을 삼키고는 재유에게 선물을 건넸다. 언젠가 재유가 혼잣말로 말했던, 다 낡은 암슬리브를 대체할 신형 제품이었다.
"이거 필요한 건 또 우째 알았노. 준수 니 뭐 독심술 하나?"
"뭔 소리야."
킥킥 하고 웃는 재유의 표정이 꽤 기분 좋아 보였다. 준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재유. 크리스마스에 여전히 약속 없지? 나랑 좀 놀자."
"니랑?"
응. 준수가 재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유가 약속을 거절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재유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 함 보자. 준수 니 여서 할 것도 없다 아이가."
툭, 저보다 훨씬 큰 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유가 미소지었다.
준수와 태성의 생일 역시 재유가 그랬던 것처럼 소소하게 지나갔다. 재유에게서 선물을 받고, 어제 썼던 케이크로 한 번 더 파티를 하고. 이제 먹어도 되냐는 상호의 물음에 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느그 크리스마스도 기념해야 하지 않겠냐. 시무룩해진 상호를 다은이 위로했다.
하루 남았구나. 준수 역시 상호처럼 내일을 기다렸다. 삼 일을 묵은 케이크 따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준수는 잠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학교 앞에서 11시, 이동해서 밥, 카페... 결국 밤늦게까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다 잠들었다.
-
약속 당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이례적인 폭설이 예고된 날이었다. 준수가 찾아둔 동선이 전부 걸어서 이동하는 길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십 분 전 미리 도착한 준수가 학교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재유는 오는 길일까? 오늘 내 계획이 잘 될까? 이미 수십 번 들여다본 지도 앱이 닳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다리를 떨었다. 아. 떨린다. 게임의 마지막 슛을 던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준수! 저 멀리서 재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재유가 짧은 패딩을 입고 뛰어오고 있었다.
"준수. 니 안 춥나? 웬 코트고?"
"괜찮아. 재유 그 패딩 잘 어울린다. 새로 샀어?"
재유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배고프제? 밥부터 무러가자."
"아, 그래. 내가..."
"저짜 맛있게 하는 곳 안다. 따라온나."
재유가 척척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까지 해뒀던 준수가 어어, 하는 소리를 냈지만 재유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잠깐, 재유. 잠시만. 하고 준수가 팔을 붙잡자 그제서야 재유가 와. 하고 돌아보았다.
"그, 내가...예약한 곳 있는데."
"뭐? 예약?"
재유가 멈칫, 놀라더니 이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데?"
"저쪽에, XX 레스토랑."
"맞나..."
"응, 맞아. 그래서..."
"근데 우야지. 내도 예약했는데."
이후는 쭉 그런 식이었다. 취소가 가능한 준수네 레스토랑 대신 재유가 예약한 곳에서 밥을 먹고 나오니, 또 서로가 알아둔 카페가 있다며 이끌기 바빴다. 결국 준수의 선택에 따랐는데, 애초부터 준수가 짜둔 동선에서 이미 많이 벗어난 상태였고 준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면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은데. 불안감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꾹 참았다. 오늘 같은 날, 특히 재유에게는 제 성질을 다 부릴 수 없었다.
"...맛있어?"
준수가 제 앞에 앉아 커피를 쭉 들이키는 재유에게 물었다. 재유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 하고 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밀며 제 몫인 초코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디저트는? 묻는 준수에게 재유가 고개를 저었다. 점심 많이 먹어서 배부르다. 둘 다 음료를 다 비웠을 때, 준수는 케이크 한 조각을 포장했다.
"아들 줄라꼬?"
"아, 뭐..."
"준수 니도 억수로 정 많다."
카페를 나와서는 또 재유와 준수의 경쟁이었다. 저쪽 오락실에 재밌는 거 많다. 아니다, 이 영화가 요즘 유행이라더라. 영화보단 오락실이 낫지. 사람 때문에 미어터질걸? 서로의 계획이 더 낫다며 우겨대는 탓에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리기도 했다. 이미 준수의 계획은 한참이나 틀어졌다. 재유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내 계획이 별론가. 나름대로 생각해서 밤새 짠 건데. 속상했다. 그렇지만 역시, 티를 낼 순 없었다.
결국 영화도 보고, 오락실도 가기로 했다. 준수는 미리 봐둔 계획의 마지막 코스, 공원에서의 불꽃놀이가 다 끝날 것 같아 불안해했지만, 아무도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기에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준수가 고심해서 고른 영화는 졸릴 정도로 재미없었고, 재유가 가자고 한 오락실은 사람으로 꽉 들어차 어느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오락실을 나오자 시간은 9시였고, 예정되었던 불꽃놀이가 이미 끝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오락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그쳤던 눈발이 거세지기까지 했다. 완전히 망쳤다. 준수가 그런 생각에 조금 침울해졌다.
"으음...눈이 마이 오네."
"...재유. 마지막으로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래, 그라자. 가자, 준수."
준수의 기분을 살폈던 건지, 아니면 재유도 지쳤던 건지. 재유가 순순히 준수를 따라왔다. 공원은 오락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지만, 불꽃놀이가 끝난 후라 꽤 한산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와 불꽃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아, 하나도 분위기 없다.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아. 준수가 땅을 쳐다보았다.
"여긴 그래도 사람이 좀 없네."
재유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부러 밝게 말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준수가 불쑥, 재유에게 왼손에 들고 있었던 것을 내밀었다. 카페에서 포장해와 지금까지 고이 간직했던 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이건 와? 아들 줄 거 아이가."
"아니야. 처음부터 너 주려고 산 거야."
"뭐?"
준수가 고개를 팍 들었다. 제 표정이 이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생일이잖아. 생일 케이크로 그딴 거 먹지 말고 이거 먹어."
"그딴 거라니. 니 설마 숙소에 있는 그거 말하는 거 아이제? 야, 감독님이 우리 준다고 얼마나 고심해가..."
하아. 준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유가 움찔, 말을 멈췄다.
"그건, ...그건 재유 네 게 아니잖아. 그건 네 번 우려먹은 케이크라고. 재유 너랑, 나랑, 공태성 그 자식이랑, 크리스마스."
그리고 지금쯤 애새끼들이 다 해치웠을걸. 기상호 걔가 어제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거 못 봤냐. 준수가 덧붙이며 다시 한 번 케이크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거 먹어.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재유, ...생일 축하해."
"아니, 선물은 이미 받아뿟는데..."
재유는 미안해하는 기색을 물씬 풍기며 케이크를 받았다. 그 다정함이, 몰아붙이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주는 그 모습이 좋았다. 불꽃놀이 대신 쓰레기가 남은 공원, 방심하면 머리 위에 눈이 쌓이는 날씨,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은 계획. 좋은 날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에 우스꽝스러운 장식과 전구가 달리는 그런 날. 연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그런 날.
"재유, 좋아해."
준수가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안.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툭 내뱉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것보단 좀 더 멋있고, 낭만적이게 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차여도 할 말이 없었다. 준수가 다시 땅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때, 재유가 준수의 고개를 잡고 들어올렸다.
"준수."
"..."
"생일 축하한디. 내보단 니 생일이 더 가깝다아이가. 내보단 니가 축하받는 게 맞지."
"...재유."
"케이크 고맙디. 잘 무께. 근데 난 니랑 같이 먹고 싶은데."
어? 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유를 바라보았다. 재유가 준수의 볼을 만졌던 손을 옮겨 머리를 쓰다듬으며 또다시 미소지었다.
"준수. 내도 니 좋아한다."
먼저 크리스마스 약속에 대해 물은 건, 준수와 함께 보내고 싶어서였다. 준수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말했던 생일날, 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히 설렜다. 준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획을 짤 때, 재유는 준수와 등을 지고 누워 똑같은 일을 했다. 크리스마스 아침 눈이 내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막상 준수와 다닐 땐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게 많았지만...아무래도 좋았다. 준수가 데려가준 카페는 맛있었고, 지루한 영화 대신 몰래 준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며, 슈터 주제에 오락실 자유투 게임에서 낮은 성적을 낸 게 귀엽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준수가 데려온 공원은 놀랍게도, 재유의 계획에서도 존재한 장소였다. 어릴 적 언젠가 재유가 왔던 곳으로, 공원 한가운데 커다란 트리가 있다는 게 생각나서였다. 불꽃놀이가 있다는 건 와서야 알았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뛸 듯이 기쁘고, 종이 울리고, 천사가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그래, 재유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감했다. 연습 중 준수와 눈이 마주칠 때라던가, 숙소에 단 둘만 남아있을 때라던가, 생일날 선물을 건네주면서라던가. 재유는 알았다. 아, 나는 준수를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준수도 아마.
둘은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케이크를 몽땅 먹어치웠다. 아쉬운 건지, 좋은 건지 포크는 두 개가 들어있었고 맛은 적당히 달아 맛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눈보라가 막 그쳐서일수도, 아니면 손을 잡고 걸어서일수도 있겠다. 준수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재유, 저쪽에 안 밟은 눈 있다."
"내가 얼라가."
그러면서도 준수를 질질 끌고 굳이 그쪽으로 걸어가는 게 웃겨, 준수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야가 낮아졌다. 재유가 준수를 넘어뜨리고는, 그 옆에 따라 털썩 누웠다.
"춥다."
"응, 춥네."
펄럭, 팔다리를 휘저었다. 추위도 마냥 좋은 것. 이런 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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