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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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연상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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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중이 군대런을 결정하기까지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골절

"—입니다."

엑스레이 사진에서 단절된 쇄골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했다. 침대와 간이의자에서 진단을 들은 두 사람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골절이요?"

"완전히 부러졌어요."

그나마 안 움직이셔서 어긋나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자세한 건 외과에서 다시 얘기할 텐데, 이 정도면 비수술 치료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낙관적인 말들이 이어졌으나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골절이라니? 당장 내일이 경기인데? 주전이 갑자기 부상? 물론 스피드스터스에 슈터가 성준수 하나는 아니다. 그래도 주전의 갑작스러운 부상 소식에 팀 분위기가 어찌 될지는 명확했다.

난 죽었다. 전영중은 야차로 돌변한 성준수가 제게 성질대로 쏟아부으리라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되지. 형, 저는 형과 구단, 팬들의 개쌍놈의 새끼가 될 각오를 마쳤습니다. 인정합니다. 제가 잘못했죠. 제 고추가 뭐라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켰을까요. 형이 까라고 하면 거기가 설령 광화문 광장이라 하더라도 당장 까야 했거늘.

성준수는 당장 욕설을 뱉기보다 침착하게 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비수술 치료는 어떤 건가요? 어깨보호대를 착용하고 생활하시면 됩니다. 불편하겠지만 어깨를 최대한 안 써야 어긋나지 않고 예쁘게 붙어요. 회복 기간은요? 최소 6주 봅니다. 더 짧게는 안 됩니까? 그게 최소에요. 운동선수라고 하셨죠? 뼈가 붙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검사하면서 재활도 하셔야 하고요.

이야기를 마친 의사가 커튼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야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의느님이 유예시켜주신 꾸지람이 시작될 타이밍이다.

"영중아."

"네......."

전영중이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눈을 깔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반성하는 아이 모드였다. 후우.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감독님께 전화 좀 걸어봐."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전영중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가 생략되지 않았나? 욕...이라든가? 시키는 대로 전화 거는 대신 멀뚱히 쳐다보자 목을 움직이기 불편한 성준수가 곁눈질로만 전영중을 쳐다보았다. 한계까지 돌아간 눈이 희번덕했다.

"형, 화 안 내요?"

"야."

"네?"

"존나 참고 있으니까 전화나 걸어."

"네."

그래서 전영중은 얌전히 감독님께 전화나 걸었다. 감독님. 저 전영중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지금 준수 형이랑 병원에....... 성준수가 손을 까닥이자 공손하게 귀에 갖다 댄다. 예, 감독님. 하, 씹....... 골절이라고 합니다. 왼쪽이긴 한데 경기는 아무래도... 쇄골이요. 6주 본다고....... 예, 죄송합니다. 알고 있어요. 아, 그게요.......

"거기, 계단에서 저기해서....... 아니, 지어내는 거 아니구요."

침착하게 설명하던 성준수가 버퍼링이 걸린다. 형, 지어내는 거 진짜 티 나요. 없는 말 쥐어짤 때 엄청 더듬잖아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전영중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았다.

왜 거짓말해요? 제가 걷어차서 부러진 거잖아요.

"야, 전화기."

"네."

물론 성준수는 남의 눈물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고, 제 위치를 벗어난 전화기가 더 거슬렸다. 흘러내린 전화를 다시 귀에 딱 붙이며 전영중은 눈물샘을 잠갔다. 다른데는 멀쩡해요.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데, 외과의랑 다시 얘기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쇼.

어른스럽게 전화를 마치고 성준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성준수도 전화하기 싫었다. 시즌 시작하자마자 부상? 심지어 골절? 이건 구단주, 감독, 코치, 팬이 돌아가며 하루 종일 까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시이바, 해야지 어쩌겠어. 이게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최대한 빨리 얘기해야 구단도 대비를 하지.

무엇보다 제 옆에서 죽상을 한 녀석을 보면 곤란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쟤한테 전화하라 할 수도 없고. 각도 못 재고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할텐데. 괜한 말 하는 것보다 덮어도 상관없는 건 적당히 덮고 지나가는 요령을 전영중이 벌써부터 알 리 없다. 연하 데리고 살기 존나 힘드네.

"죄송해요......."

"됐어."

'미안해요'도 아니고 '죄송해요'다. 가만두면 무릎 꿇고 석고대죄할 기세라 성준수는 냉큼 용서했다. 전영중의 잘못이 없냐면 아니라고도 못하겠지만, 죄송해야 할 만큼이냐 하면 그 역시도 아니었다.

아닌가? 시즌 시작하자마자 주전 쇄골을 빠개놨으면 역시 대역죄인이겠지. 괘씸한 새끼. 그깟 고추가 뭐라고. 불같은 주먹이 자기의 쓸모를 주장하는데, 냅다 쥐어박기에는 그의 쇄골이 온전치 못해 참았다.

2. 연패

당연히 경기는 죽 쒔다. 공을 못 넣은 건 다른 선수인데, 원망스러운 시선이 제게 닿는 게 느껴졌다. 왜. 뭐 어쩌라고. 내가 뛰어? 나도 그러고 싶다. 벤치에 앉아있던 성준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야, 정신 안 차려? 이 씹......!"

전영중의 주된 역할이 이거였다. 성준수의 입 막기. 저 하나 안 뛴다고 기강 빠진 팀원을 참다 참다 마침내 참아주지 못하고 거센소리를 뱉으면 목 아래로 충격이 가지 않도록 입을 꼬옥 눌렀다. 우리 형 월급 지켜. 아니, 형. 감독님도 참으시잖아요. 형도 참아요. 형이 안 참아서 감독님이 참는 건가?

푹 쉬라고 해도 성준수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무조건 경기장에 나왔다. 자리에서 못 일어날 부상도 아니고, 하루 종일 집에 있어봤자 누워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바에야 경기장이라도 나가는 게 낫지. 그런 논리였다. 전영중은 그런 성준수를 말리면서도 내심 좋아했는데, 팔도 제대로 못 드는 성준수의 옷을 직접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겨줄 수 있어서였다.

교체로 들어가는 저를 독려해 주는 것도 좋았고.

3쿼터 중반, 48대 63의 점수차로 전영중이 투입됐다. 명백히 좋지 않은 상황에 감독이 신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뭔가 해내야지. 기대하지 않는다 해서 대충 뛰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신인에게는 플레이 한 번이 계약 연장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되기도 하니까. 중압감에 가슴이 답답해 심호흡하고 있노라면 성준수가 색과 디자인이 같은 운동화를 맞대며 말했다.

"평소대로만 해. 니가 쟤네보다 잘 하니까. 기회 왔을 때 망설이지 말고."

성준수의 말에는 의심이 없었다. 정말 내가 저들보다 잘 하니까 그렇게 말한다는 담백한 믿음이었다. 전영중은 그게 좋았다.

전영중이 투입되면서 2쿼터부터 연달아 점수를 내던 상대팀 슈터가 활약하는 걸 막았지만 경기는 결국 스피드스터스의 패배였다. 15점이던 점수 차를 8점으로 줄이는데 그쳤을 뿐이다.

오늘도 졌다. 준수 형이 나갔으면 달랐을까? 달랐겠지.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꿈만 같게도 최근의 스피드스터스는 연패였다. 바닥만 보며 벤치로 돌아오면 성준수가 저를 맞아준다.

"잘 했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 안다. 전영중의 기분은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그야 울 틈도 없이 바빴으니까.

눈물은 무슨, 전영중의 몸에 있는 수분은 땀으로 빠져나갈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울 것 같아? 그럼 가서 달려. 그래도 눈물이 나와? 스킬훈련 더 하자. 아직도 슬퍼? 쟤랑 일대일 해. 지는 놈은 웨이트 추가다. 이제 잡생각 안 들지? 패배 팀에게 휴식은 없는 법이다. 고강도 훈련이 이어졌다.

훈련 후에 형들이 퍼지는 시간에 전영중은 수업을 들었다. 그야 아직 졸업 전이니까. 4학년에 드래프트에 나갈 생각이었으니 마지막 학기에 들어야 할 학점은 최소로 맞춰놓긴 했지만, 개중 전공필수가 두 개 껴있었다. 저 휴학할까요. 전영중의 말에 성준수가 지랄 말고 졸업장이나 따오라고 혼냈다. 이미 시월인데 두 달만 더 고생하라면서.

그렇게 강의도 듣고, 과제도 하고, 팀플 자료조사까지 도맡은 와중에 마트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꽉 채워 장도 봤다. 팔이 불편한 준수 형 먹일 음식이었다. 빨래도 했다. 팔이 불편한 준수 형 뽀송한 옷 입히려고. 목욕도 시켜줬다. "너 지금 뭐...... 집에 안 가냐?"

"형, 저 집에 갈 기운도 없어요......."

그야 남의 집 빨래에 청소에 밥까지 처 하니까 그렇지. 아니, 혼자 천천히 씻으면 된다니까 화장실은 왜 따라와? 지 고추는 소중하면서 남의 고추는 막 보려고 들어?

그러면 전영중은 또 풀이 죽어 말했다. 형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 어떻게 모른척해요....... 고추 관람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성준수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수줍어 어쩔 줄 모르던 게, 매일 출근하기 시작하더니 일주일 만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아무 데나 픽픽 드러눕고 난리다. 이 새끼를 죽일까, 하다가 고생하는 걸 알기에 가만 놔뒀다.

"그러니까 사람 쓰겠다고 했잖아."

"저 형 병수발 드는 게 꿈이었어요."

왜 그딴 게 꿈이었지. 얘의 머릿속은 인생이 어디까지 흘러간 걸까. 전영중이 가족묘까지 알아봤다는 건 노년이 되어서야 들을 이야기니 지금의 성준수는 이 일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그냥, 꿈이 특이하네 하는 정도.

지금 이렇게 퍼져있다 뿐이지 전영중의 기량은 그대로였기에 놔두긴 했다. 집안일 해준다고 컨디션 무너졌으면 성준수가 먼저 내쫓았을 테니까.

"야. 잘 거면 침대 가서 자."

뭐 대단한 말이나 했다고 고작 그 말에 얼굴 붉히는 꼴이 웃기기도 했고.

"......형 옆에서요?"

"그럼 침대 주인 내쫓고 독차지하게?"

"아뇨, 아니, 그게 아니라......."

후다닥 몸을 일으킨 녀석이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저, 저 잠옷으로 갈아입고 올 게요. 그렇게 말하는데, 피가 얼굴에만 몰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 희한한 새끼. 어느 부분이 꼴린 건지.

하여간 이 시기의 전영중은 주변을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학교에, 경기에, 간병까지. 제 눈앞에 쌓인 일만 한가득이었으므로.

3. 은퇴

"안 되겠죠?"

"안 될 게 뭐 있어? 어차피 이번 시즌은 어려울 거 같으니까 적당히 잡음 되지. 네 상태가 더 중요하지 않겠냐."

어깨보호대를 푼 성준수가 재활훈련을 시작하고 얼마 후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전영중이 걸음을 멈췄다. 준수 형이랑 감독님?

"팔은 언제부터 써도 된대?"

"한 달은 더 조심하래요. 충격 가는 일은 자제하라던데."

"그럼 경기는 안 되겠네."

"그렇죠."

경기 나갈 생각하고 있었나. 이번 시즌은 푹 쉬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전영중은 가만히 서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엿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엿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화제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대화가 끝난 성준수와 같이 가려 했을 뿐이다.

호록.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감독이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팀 스타인데 은퇴 경기도 안 하고 보내면 서운에서 어떡하냐."

은퇴 경기 얘기하고 있었구나. 누구 말하는 거지? 하도 정신없이 보낸 탓에 다른 사람의 소식은 거의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스타는 무슨. 됐어요. 다쳤는데 무슨 경기에요."

그렇지. 다쳤으면 푹 쉬어야 하는데...... 어?

"형 은퇴해요?"

전영중이 불쑥 튀어 나갔다. 회사의 모든 풍문을 들을 수 있다는 진실의 장, 자판기 앞은 스포츠업계에서도 통했다. 그 풍문이 성준수의 은퇴라는 게 문제였지.

호롭. 나란히 커피와 코코아를 마신 두 사람이 느리게 긍정했다.

"어."

"부상 때문에요?"

"아니, 나이 때문에."

"서른셋이면 많은 것도 아니잖아요!"

"많지. 그리고 해 바뀌어서 이제 서른넷이다."

"만나이로는 서른둘인데!"

"뭔 나이로 흥정을 해? 숫자 깎는다고 나이 먹은 게 없어지냐?"

"너희 내 앞에서 나이 얘기 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다 말고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달달해야하는 자판기 커피가 이상하게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에이, 씁.......

"아무튼 은퇴 경기 여부는 네가 생각해서 결정해라."

종이컵을 구겨 버리고 감독이 자리를 떴다. 예 가세요. 인사하고 성준수는 남은 코코아를 해치웠다. 밑바닥에 진하게 남은 코코아 가루 탓인지 여전히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제 앞에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찌그러진 녀석 탓일 수도 있고.

"제가......."

"아냐."

내뱉어질 말이 짐작 갔기에 성준수는 일단 부정부터 했다. 제가 더 열심히 뛰어야 했는데. 제가 형 쇄골만 안 부러뜨렸어도. 이번 시즌 제가 다 망친 거 같아요. 기껏 뽑혔는데, 팀에 도움은커녕 폐만 끼치는 거 같아요.

전영중은 힘들다는 말 대신 자책을 쏟아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너 하나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너 때문에 말아먹을 게임이었으면 너 없어도 말아먹었어. 두 번 다시 그딴 얘기 하지 마. 으름장을 놓으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이후로는 우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납득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늦은 시간까지 스킬훈련을 하던 녀석이 손 아래서 튀던 공을 놓치고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을 봤다. 티셔츠에 땀흘린 얼굴을 파묻고 한참이나 있던 녀석의 눈가에 눈물자국은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은 갔다.

시원하게 이기기라도 했으면 전영중이 저렇게까지 힘들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선수로 살면서 연패로 인한 좌절감은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네 탓 아냐."

위로를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성준수는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예정이었다. 전년도부터 슈터 라인을 보강하고 있었고, 전영중도 좋은 윙맨에 3점슛도 쏠쏠하게 챙겨서 뽑힌 거였다. 그리고 경기 말아먹는 거야 뭐. 전 시즌 1위 했던 구단이 다음 시즌에 하위권에서 빌빌거리던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저 빠졌다고 성적 꼬라박고 있는 놈들을 보면 괘씸한 건 별개지만.

"미리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요. 1월에 이게 뭐야......."

"내가 말 안 했나?"

"한 적 없어요."

"하지 않았어? 다른 애들한테는 한 거 같은데."

그러니까 광고 찍으라고 아이슬란드도 보내줬지. 상식적으로 시즌 직전에 시차 9시간 이렇게 나는 델 보내주겠냐. 은퇴하면 몸값도 내려가니까 그 전에 바짝 벌라고 구단이 특별히 보내준 건데. 주절거리는 말을 듣던 전영중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저한텐 한 적 없다구요."

"알았...... 너 이 새끼, 어디 형한테 눈을 부라려?"

정말 안했나? 싶으면서도 하늘 같은 연장자에게 눈을 희뜨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전영중이 꿈뻑거리며 공손히 눈을 까는 대신 입술을 쭉 내민다. 얼씨구? 덩치는 문짝만한 게 이러면 귀여운 줄 아나? 어떻게 알았지? 누가 말해줬나? 쭉 나온 입술을 잡고 흔들자 싫다는 듯 얼굴을 뺀다. 이 새끼는 왜 다 커서도 귀엽지. 어르듯 매끈한 볼을 주물럭거리다 자연스레 머리를 토닥였다.

"저는 형이랑 같이 뛰고 싶었단 말이에요."

"이미 같은 구단이잖아."

"그거 말고요. 같은 코트에서......."

"준향대 놀러 가서 뛰었잖아."

"아, 혀엉!"

놀리는 게 분명한 말에 발끈하자 성준수가 웃는다. 알았어. 주변을 살피고 투정처럼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 그걸 또 가만히 버텨준다. 영중아, 언제 클래. 다 컸는데도 그런 얘길 하며.

마지막 시즌을 부상으로 날려버린 게 아쉽거나 화나지 않냐 하면 물론 아니다. 그러나 과한 욕심─성관계 혹은 순결 어느 쪽에 대한 건지는 굳이 코멘트하지 않겠다─을 부리다 얻은 부상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두가 원하는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지. 선수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뿐이지 농구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기에.

물론 모두가 깨끗이 마음 정리를 한 건 아니니 문제였다. 특히 이 순간 성준수에게 안겨있는 한 남자가 그랬다.

성준수의 부상. 구단의 연패. 은퇴 경기 없는 은퇴식. 전영중은 좋아하던 선수의 마지막 시즌을 모두 망쳐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준수 형과 함께 뛰고 싶었는데 제가 성준수의 자리를 채웠다. 뼈는 붙었지만 시즌 내 복귀는 어렵고, 복귀한다 하더라도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확률은 낮은데도 성준수는 재활에 매진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운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은 가중됐다.

이게 네 탓이라고 하면 차라리 낫겠는데, 아무도 전영중 탓을 하지 않았다. 구단은 (믿지는 않았지만) 성준수가 계단에서 굴러 쇄골이 부러졌다 알고 있었고,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성준수는 전영중이 미안하다 할 때마다 됐다고 일축하지 않던가. 차라리 자신을 매도해줬으면. 천하의 ○같은 ○○를 ○○해도 시원치 않을 ○○새끼라고 욕하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러지 않았다. (물론 전영중에게 그런 류의 패티시가 있는 건 아니다.)

형은 그냥 나를 버텨주는 것 아닌가.

어디에 말하지 못해 공감도, 위로도, 비판도 받지 못한 고민은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져나간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거 같아. 형은 내가 뭘 해도 심해봤자 '씨발새끼'까지만 욕하고 금세 용서해 주잖아.

형 욕 잘하는 거 아는데 왜 그것밖에 안 해요? 내가 형과 동등한 관계긴 해요?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요. 그럼 화도 내고, 싸우고, 울고, 고민하고, 용서해야지. 형은 나를 용서하기만 해.

그게 더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지친 형이 어느 날 떠나버릴까 무서워요. 꼭 형의 자리를 뺏은 거 같아. 내가 성준수를 밀어내기 위해 있는 거 같다구요. 여기 있는 게 옳은지 모르겠어.

달칵거리는 마우스질 몇 번에 입영 신청이 이루어진다. 192cm에 신체 등급 1등급의 성인 남성을 병무청에서 마다할 리 없었다. 빵빠레 불어가며 모셔가도 아깝지 않을 인재는 신속하게 제 306보충대대로 초대받는다.

그런 연유로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향도 안 날 빡빡이가 얻어맞았다. 아직 봄이 아닌지라 벚꽃이 아닌 거베라와 소국이 나풀거린 게 유감이고 비극이었다.

잘 넘긴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징징거리는 걸 한 번은 제대로 들어줘야 했나? 제게 말도 못 하고 가을부터 내내 곪았을 속이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기에 성준수가 이마를 짚었다.

"......농담이지?"

"제가 왜 이런 거로 농담을 해요."

"씹...... 근데 왜 대가리는 벌써 밀었어?"

"......마음의 준비?"

"처맞을?"

아뇨. 형과 헤어질....... 그러나 전영중의 생존본능이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꽃다발이 아니라 주먹으로 죽을 때까지 맞을 거라 직감하며 입을 틀어막는다. 저 여린 꽃다발에 한 대 맞은 것도 겁나 아팠는데 뼈마디가 불거진 주먹에 맞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갔다. 맞아서 광대가 무너져도 재건하면 그만인데, 성준수가 폭력 사태로 잡혀갈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형도 구단이랑 계약하고 다음 해에 군대 갔잖아요."

애써 생각한 핑계가 그거였다. 잘못한 게 있으니 전영중이 눈을 깔며 중얼거렸다.

"너 그거 따라서 입대한 거냐?"

"그건 아니지만......."

" ......미친놈아, 난 구단이랑 협의 했고! 너 했어?"

"......안 했는데요."

"그럼 너랑 나 빠진 자리는 누가 메우는데?"

"어......."

원일이 형? 얼마 전까지 야투율 바닥 찍고 농구 그렇게 할 거면 때려쳐라 소리를 들었던 녀석을 입에 올린다. 진짜 죽일까. 성준수가 이마를 짚었다.

"너랑 내 빈자리 메운다고 다음 드래프트 때 포지션 겹치게 뽑으면 복귀해서 어떡할래?"

"어......."

기본 계약기간이 있으니 군대 다녀온다고 쫓겨나진 않겠지만, 이런 돌발행동을 한 선수를 구단이 곱게 볼 리가 없다. 3월에 입대면 18개월 빠듯하게 다녀오고 바로 이듬해 리그에 들어갈 수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단순 계산이고, 공을 놓고 있던 기간만큼 훈련은 해야 할 텐데.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전영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쩌죠."

금세 꼬리를 내리고 어쩔 줄 몰라 저를 보는 모습에 성준수가 긴 한숨을 뱉었다. 내 말이 그거다, 이 새끼야. 이걸 어쩌냐. 오랜만에 주먹을 꽈악 쥐었다가, 엉망이 된 꽃다발이나 안겨주었다.

"뭘 어떡해. 싹싹 빌어야지."

그래서 구단주님과 감독님 앉혀놓고 정말 싹싹 빌었다. 전영중은 무릎까지 꿇었다. 사실 그렇다고 뭐가 나아지진 않았다. 일개 스포츠 구단이 어찌 국가의 부름을 거절한단 말인가. 해외 진출한 스타 선수조차 메달 못 따면 얄짤없이 입대인데. 심지어 자진해서 국가한테 자기 좀 불러달라고 꼬리치지 않았던가.

한참이나 말이 없던 감독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영중아, 이빨 열 개만 뽑을까? 전영중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성준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얘 이미 신검 끝났고, 이빨 뽑아 면제받는 거 없어진 지 10년 넘었어요. 그래? 아쉽네....... 순식간에 강냉이 10개를 털릴 뻔했던 전영중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가 일 년 더 해볼게요."

"너 쇄골 부상이야, 인마."

"왼쪽이잖아요. 재활 빡세게 해서 한 시즌 더 뛸게요. 할 수 있어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구단주가 피곤한 듯 중얼거렸지만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지켜본 성준수는 하겠다 말한 건 정말로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으니까.

좋아. 그럼 이쪽 일은 대강 마무리 됐고. 조금 전과 달리 눈을 치뜬 성준수가 부러 사납게 말했다.

"전영중 넌 휴가 나오면 놀 생각 하지 말고 무조건 체육관으로 오고."

"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자기 직전까지 운동만 죽어라 할 각오 해."

"네에......."

"부대에서도 놀지 말고 체력 훈련 알아서 해라."

"예......."

상병 달고 좀 편해졌다고 해이해지면 끝이야, 어? 니 감 잃으면 바로 나가리니까 알아서 처신해. 특별히 봐주신 거라고. 말로 신랄하게 패는 동안에도 전영중은 무릎을 꿇은 채로 네에, 네, 고개만 끄덕이며 순순히 얻어맞았다. 잘못한 건 맞았기에 구단주, 감독 그 누구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저 새끼 저거, 더 혼나야 돼. 성준수의 꼰대 발언을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평가하며 침묵으로 동의를 표할 뿐이었다.

그래서 성준수랑은 헤어졌느냐?

못 헤어졌다. 오늘은 말해야지. 어떻게 형한테 1년하고도 6개월 동안 고무신을 신겨. 제가 프로 될 때까지 3년을 기다려준 사람인데 여기서 18개월 추가? 이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물론 시도를 안 한 건 아니다. 형,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오늘은 꼭, 진짜로. 할 말이. 진짜 중요한 건데. 그렇게 부르면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에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말을, 해야 하는데. 헤어지자고. 군대 다녀오는 동안 기다리지 말라고. 형 좋다는 여자, 남자, 바이, 트랜스, 아무튼 누구라도 만나라고.

그러면 성준수는 짐작이라도 한 듯 선수를 쳤다. 잘 생각하고 말해. 경고 같기도 하고, 아량을 베푸는 것도 같았다. 너 하고 싶은 말 그거 아니잖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수로 알겠냐마는, 대뜸 그런 말부터 했다. 그럼 전영중은 지레 찔려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며 그새 빡빡이에서 털부숭이로 불릴 만큼 자라난 머리를 푹 숙였다.

어느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뒤늦게 정신 차린 팀이 괜찮은 실적을 챙겼지만 어쨌든 플레이오프 진출은 요원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남은 경기에 후회를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접전이 이어지는 경기에서 3쿼터를 마무리한 전영중이 벤치로 돌아가다 저지를 벗은 성준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조심스레 왼팔을 당겨 스트레칭하는 모습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4개월 만에 다시 코트로 돌아가는 스타 선수의 모습에 저지만 벗었는데도 홈 팬들의 우려 섞인 환호가 들렸다.

성준수의 투입으로 감독이 바쁘게 말을 잇는 동안에도 전영중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전영중이 코트로 걸음을 떼서야 옆에 달라붙어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형, 아직 뛰면 안 되잖아요."

"돼. 뼈 붙은 지 2개월도 넘었고, 그동안 재활 열심히 했잖아."

"몸싸움은 조심하라면서요."

"조심하면 되지."

"형이 언제 몸 사리는 플레이 했다고."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대신 하든가."

"네?"

자리 잡으라고 밀어내는 손에 전영중이 뒷걸음질 쳤다. 얇은 보호대를 한 어깨에 시선을 두었다가 뺨을 두드렸다. 성준수가 아니라 경기에 집중할 때였다.

아무리 재활을 했어도 그새 몸이 둔해지긴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준수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하던 가닥이 있는지라, 하프라인을 조금 넘어 공을 받자마자 뛰어올라 공을 던졌다. 이건 들어간다. 손끝의 촉감만으로 확신하면 공이 빨려 들어가듯 림을 통과한다.

그래도 슛감은 그대로네. 성준수는 뿌듯하게 백코트 하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함성을 만끽한다. 시즌 내내 제 것이 아니었으니 새삼 달가웠다. 아, 마지막 경기라도 뛰길 잘했어. 전영중의 입대로 일 년 계약을 연장할 예정이라지만, 그대로 코트를 떠났다면 평생 아쉬워했을지도.

"나한테 마크 제대로 붙을 테니까 이제 네가 해야 돼."

전영중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자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뭐, 임마. 그럼 몸도 성치 않은 늙은 형이 하리?

"내 플레이 봤을 거 아냐. 그렇게 해. 몸도 튼튼한 새끼가 쫄지 말고."

"안 쫄았어요."

"알았으니까 기회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던져."

"그렇게 하고 있어요."

"토 단다?"

전영중이 입술을 비죽이며 자리로 간다. 저거 은근히 성깔 있다니까. 후, 앞머리를 한 번 불어 넘기고 코트를 훑는다.

정말로, 성준수는 전영중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넌 잘할 거야. 나보다도 잘 할 거야. 내 선수 생활의 일부는 네게 할애했으니까. 네게 부족한 걸 내 플레이를 보고 채울 수 있게.

마지막 경기 출전하고 싶습니다. 제 말에 감독은 선수 시절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저를 살폈다. 영중이 때문에? 그것도 맞는지라 부정은 하지 않았다. 너 경기 나가봤자 잘 해야 본전이야. 이겨도 득 보는 거 없고, 지면 환자를 왜 내보내냐 욕먹고, 부상이라도 당하면 나만 죽일 놈 된다고. 맞는 말이기에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한참이나 골몰하던 감독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나가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저와 코트에 서는 게 꿈이었대요. 걔 스피드스터스에서 불러줬다고 입이 아주 귀에 걸렸던데. 유튜브에서 그거 보고 얼마나 웃겼는지. 내년엔 군바리라 경기 못 들어오는데 그럼 올해밖에 기회가 없지. 내가 뭣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재활훈련을 했는데.

그래 그럼. 원래 욕 처먹는 게 감독 역할인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몸 성히 경기나 따와.

그렇게 했다. 고작 10분이었지만 후회 없는 경기였다. 제게 신경질적으로 부딪혀오는 몸마저 기꺼웠다. 핑계는 전영중이었지만, 성준수는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걸 느꼈다.

이겨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경기. 평소보다 줄어든 관중. 그래도 시즌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는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나는 평생 이 순간을 놓지 못해 코트에서 살아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제게 다가온 녀석을 보았다.

그 역시 제가 놓지 못할 순간이자 영원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있어요. 해야 하는 말. 전영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은 저의 영웅이었고, 우상이었고, 등대였어요. 사랑이고, 욕심이고, 과분한 보물이에요. 저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알아요. 형을 기다리게 하지도 않고, 다치게 하지도 않을 다정한 사람이 있겠죠.

지금 울면 이기고도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 다들 착각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전영중은 참지 않고 코를 훌쩍였다.

그래도 형이 탐나는 걸 어떡해요.

"저 군대 다녀오는 동안 바람피우면 안 돼요."

이제야 제법 연인다운 말을 할 줄 알게 된 녀석의 뺨을 문질렀다. 속눈썹 끝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눈을 깜빡이자 기어코 똑 떨어진다. 부숭한 머리를 감싸 어깨에 당겨 안자 금새 어깨보호대까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내가 언제 네 부탁 안 들어준 적 있냐."

그러면 흐어엉,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웃긴 새끼. 성준수는 아직도 어리기만 한 연인의 등을 토닥였다.

여기서 이야기를 뒤로 돌리자.

챔피언 결정전에 가지 못한 성준수가 반백수로 살고 있던 어느날 전화를 받는다. 현성이 형?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섭외는 들어왔는데 다 해외 가야 한대서 거절했어요. 네. 아, 형 준향대 감독 됐다 그랬지. 혹시 신입생 중에 영...... 아니에요. 갈게요. 당연히 술 한잔해야죠.

"형, 저 드래프트 때 운 좋았던 거 알죠."

성준수가 준향대를 찾은 첫날, 회식 후 이현성과 단둘이 2차를 갔다. 노포에서 노가리를 우물거리며 소주를 잔에 따랐다.

"그때 딱 스피드스터스 슈터 자리 비었지?"

"네. 주전이었던 가드가 여름에 사고 나서 한창 치료 중이었어요."

당장 다음 시즌 출전이 불투명한 와중에 대체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스피드스터스 눈에 띈 게 성준수였다. 적극적으로 슛을 만들 줄 알고, 몸을 날리며 대범하게 던지는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선수에게는 불행한 사고였으나, 그 일이 없었다면 제가 2라운드에라도 지명됐을까, 성준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가정이다. 그러나 온전히 제 실력이 아니라 운이 따랐다는 주변의 평가를 무던한 성준수라도 아예 무시할 수 없었다. 재활을 마친 슈터가 해가 넘어가기 전에 경기에 복귀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빈도는 늘었다. 그동안 코트에 선 시간은 60분을 넘지 못했다.

구단과 합의하고 도망치듯 입대했다. 그 슈터는 전성기였고, 코트에 설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질 것이다. 거품이라며 저를 조롱하는 말들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비참했다.

"그리고 복귀했는데, 관중석에 걔가 있었어요. 전영중."

웬 애가 핸드폰에 <성준수 선수 화이팅!>을 무지개색으로 띄워놓고 있었다. 기내 중학교 저지를 입고 있어서 제 후배구나, 생각했다. 눈이 마주쳤더니 핸드폰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내라 적힌 글씨가 잘 보이도록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제야 저 보여주려고 일부러 입고 왔나 싶었다.

"그날 결국 코트 한 번 못 밟고 돌아가는데, 저보고 멋있다고 하는 거예요."

부모님 손 잡고 농구 보러 온 기내중 꼬맹이가, 덩치에 맞지 않게 예쁜 색의 편지봉투를 내밀며.

처음 받아 본 팬레터도 아니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열여섯 소년은 뭐가 그리 수줍은지 고맙다는 말도 안 듣고 쌩하니 도망가 버렸다.

"그때가 스물여섯이었어요. 전역한 직후였으니까. 걔 편지 읽다 갑자기 형이 생각나는 거 있죠."

형 지상고 감독으로 온 게 딱 스물여섯이었잖아요. 진짜 어렸다. 형 그때 무슨 생각 들었어요? 고작 일고여덟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애들이, 이기게 해달라고 형만 쳐다볼 때 무슨 기분이었어요?

형. 영중이가 제 첫 팬은 아니에요. 대학 농구 때부터 저 따라다니는 애들 몇 있었다구요. 그래, 니 똥 굵다. 자랑하려고 얘기 시작했냐? 아니 들어봐요. 제가 걔를 왜 기억하냐면요.

영중이가 편지에 뭐라고 적었는지 알아요? 저 때문에 농구 시작했대요. 매일 절 보며 꿈을 꾼대요. 정작 나는 프로 되고 한 시간도 코트에 서질 못했는데, 코트에 선 내가 멋있대요. 무슨 플레이를 보여줄지 기대된대요. 나 같은 선수가 되고 싶대요.

그래서 힘냈어요. 주저앉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이 악물었어요. 걔가 내 플레이가 보고 싶다잖아. 누가 날 보고 따라오겠다잖아요. 그럼 없는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야지 어떡해. 다시 코트에 올라가야지. 걔는, 영중이는, 걔 응원이 날 만들었어요. 내가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줬어. 걔가 저한테 더 많은 걸 기대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형. 영중이 걔 좋아하는 걸 볼 때 어떤 표정인지 알아요?

"저는 걔가 바라는 건 다 해주고 싶어요."

술에 취한 성준수가 소주잔을 흔들며 말했다. 찰랑찰랑. 그렇게 말하는 성준수가 무슨 표정인지는 오직 이현성만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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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유영하는 수달

    아.......... 심장이 아파요................. 둘이 너무 사랑을 해........... 술취해서 하는 저 말 순도 100% 진심일거아냐.......................... 아 .......... 전편까지 낄낄거리면서 봤는데 심장이...심장이 너무 아파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용기있는 해달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이 된다니 너무너무 아름다운 연하연상이에요ㅠㅠㅠ 둘이 너무 서로를 사랑한다니... 감동적

  • 존경받는 코뿔소

    22님 영중이는 안그래도 귀여운데 연하가 되니까 너무 귀여워서 죽을거 같아요.. ㅠㅜㅜㅜ

  • 놀라는 백조

    너무 달달하고 아름다운 글이에요...둘이 서로를 너무 사랑하는게 느껴져요

  • 상상하는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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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손한 알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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