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글

[희상] 개가 된 내 친구? 完

약 3.2만 자

전후편 합본

퇴고 및 오타 검수 안함


https://youtu.be/5vmJ_wq2NeA?si=xyP2BQT2ziBeDzS1

소원 빌래? 별 떨어진다
잠깐이라 또 놓쳤지만
금방 더 떨어지겠지
밤이 끝날 때까지
원하는 게 딱 하난데 난


Q. 사랑은 어떤 때에 빠지나요?

A. 아마도, 봄? 벚꽃잎 휘날리고, 같이 걸어가고, 겸사겸사 재밌는 이야기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나요?

Q. 자기 친구를 짝사랑하는 경우도 있나요?

A. 네.

Q. 동성 친구도 거기 포함되나요?

A. 아니요?

희찬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PC방 책상에 한 차례 이마를 찧었다가 고개를 든 희찬은 누가 볼 세라 지식인 질문을 삭제했다. 마, 인터넷에 구라쟁이가 많다카던데 지식인도 못믿겠다. 희찬은 의자에 양 발을 올리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기껏 같이 하교하자는 친구들도 뿌리치고 PC방에 와서 검색했건만 수확이 없었다.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의 구분이 점차 확실해지기 시작한다는 중학교, 그것도 온갖 상상력과 꼴값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해서 모두가 중2병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마의 15세. 태초중학교 농구부 포인트 가드 정희찬 군은.

그 누구도 정정하지 못하는 확실한

짝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은 사랑이고…아직 PC방 시간은 50분이 남았다. 겨우 지식인 하나를 확인해본다고 1300원이라는 거금을 쓴 희찬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테일즈런너 창을 켰다. 돈 아까우니까 닥터헬만 돌고 가야지.

희찬에겐 2살 많은 누나와 2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그 말은 즉슨 집에 단 한 대 뿐인 컴퓨터 쟁탈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치열하단 의미다. 누나는 희찬보다 힘이 강했고 동생은 틈만나면 엄마를 불러재꼈다. 그런 상황에서 정희찬이 동성 친구를 좋아한다는 지식인을 본다? 사생활이라곤 단 한톨도 존재하지 않는 3남매의 차남 정희찬에게 개미친비상상황 개시라는 의미였다. 대한민국 동성 연애 찬반조사에서 70%(기독교 신문이라 정확성이 떨어진다.) 반대라는 절망적인 수치를 기록한 곳에서 정희찬은 어린 나이임에도 기민하게 ‘음! 절대 말 안해야지!’라는 결심을 했다. 안그래도 남동생이랑 같은 방 쓰느라고 좁아 디지겠는데 그 시끄러운 등쌀과 잔소리를 듣고싶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정희찬 군의 짝사랑 상대는 누구인가.

같은 반 친구, 아니 이젠 같은 농구부 학생 기상호다.

희찬은 태초중 1학년 때부터 상호를 알고 있었다.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을 때면 상호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농구부원을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희찬은 상호의 빛나는 안광을 통해 그게 농구를 매우 좋아하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나 상호는 친근한 성격이 아닌지 희찬이 말을 걸라치면 쏙 체육관 밖으로 사라지거나 자리를 피했었다. 희찬은 그럴 때마다 든 손을 어색하게 내리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점마 우리집 뽀삐같네. 부슬거리는 갈색 머리털에 사람이 다가가면 지레 겁먹고 피해버리는 꼴이 딱 그쪽이었다. 물론 뽀삐는 쬐깐한 소형견이고 상호는 180을 훌쩍 넘긴 남자애니까 둘은 엄청 달랐지만 희찬은 어쩐지 둘만의 공통점만 눈에 밟혔다.

그 기시감이 문제였을까. 가끔 정희찬은 제 강아지 뽀삐가 기상호로 변해서 저와 같이 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기상호로 변한 뽀삐는 사람 말을 못해 사람 거죽을 쓰고서도 캉캉거렸다. 희찬은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하는 짓이 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뽀삐야 씁 안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낑낑낑낑!!!”

기상호의 몸으로 바닥에 있는 닭다리 입으로 물려는 뽀삐는 먹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뽀삐의 울음이 심해질수록 희찬은 기상호의 허리를 잡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희찬은 상호의 체급에 밀리면서도 훌륭한 견주의 모범을 보였다. 씨름은 견주인 희찬의 승리였다. 끙 하고 불만에 찬 뽀삐는 얌전히 희찬의 품에 안겨 공원을 지나갔다. 공원 하늘은 이상하게 핑크빛이었다.

…이게 뭔 꿈이고. 희찬은 동생의 발에 옆구리를 채이면서 깼다.

선명한 그 날의 꿈 덕분에 희찬은 더더욱 상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교류는 번번히 실패했다. 희찬이 말을 걸라 치면 상호는 날쎈돌이 소닉 수준으로 토끼기 바빴다. 희찬은 눈을 치켜떴다. 이런 식으로 회피 당한 게 10번이 넘었다. 저 놈의 시금치색 조끼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희찬은 농구공을 놓고 운동화 끈을 꽉 동여매었다. 어차피 오늘는 농구부 자율훈련 시간이다. 중간에 갑자기 이탈해도 무어라 혼낼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정희찬이 아는 기상호라면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을테다. 희찬은 무릎을 굽혔다 피기를 반복했다. 무릎관절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심호흡 한 번, 씁. 심호흡 두 번, 후. 그리고 창가에 포착된 갈색 머리통 하나.

“마, 니 어디가노!!”

“으아아악!”

희찬은 제 생애에서 가장 빠르게 달렸다. 기상호는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데도 전력으로 달려오는 희찬이 무서운건지 기겁하며 저도 달렸다. 상호가 간과한 것은 희찬이 전국 중학교 농구선수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빠른 학생이란 점이었다. 희찬은 손을 내밀어 상호의 조끼를 잡아챘다. 순식간에 뒤로 당겨진 상호가 넘어가는 선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희찬은 상호보다 덩치도 작고 가벼웠다. 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희찬은 상호의 등에 깔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희찬은 엉덩이가 욱씬거렸지만 상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숨을 거칠게 가다듬었다.

상호의 눈꼬리엔 아픔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 달렸다. 희찬은 괜히 울린 기분이 들어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기상호의 조끼는 놓지 않았다. 상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찬은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물었다. 니, 우리는 와 훔쳐보는데?

“거, 농구..하는 게 재밌어 보여가.”

당연한 이유였다. 농구에 관심이 있으니까 몇개월 내내 농구부 운동하는 걸 훔쳐봤겠지. 희찬은 궁금증이 해소되자마자 상호를 놓아주었다. 상호는 목을 죄는 조끼가 헐렁해지자 희찬에게서 떨어졌다. 희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고 보니 두 사람의 눈 높이 차이가 컸다. 희찬도 중학생 치고 키가 큰 편인데 상호는 더욱 큰 느낌이었다. 체감상 180은 넘으려나. 희찬은 손을 들어 제 정수리 끝과 상호의 키를 비교했다. 180은 확실하게 넘겠다. 그리고 상호의 어깨를 보니 자신이 잡아당긴 영향으로 엉망이 된 조끼가 보였다. 조끼는 쭈글쭈글하고 셔츠는 흙먼지로 더러웠다. 누가 보아도 린치를 당한 중학생의 옷차림이었다. 상호는 제 셔츠를 탈탈 털었지만 흙이 진하게 끼였는지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희찬은 그 모습에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야, 미안하다. 쬐끄맣게 중얼거렸다. 상호는 더 쬐끄만한 소리로 답했다. 아이다. 내가 쫓아다녀서 그런긴데.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를 보았다. 얼굴만 알고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다. 어색한 상황 속에서 희찬은 손가락으로 태초중학교 체육관을 가리켰다. 옷이 상한 김에 학교 세탁기와 건조기 쓰고 가자는 의미였다. 상호도 제 형제에게 괜한 쿠사리 먹기가 싫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전력질주로 추노를 찍은 탓에 진력이 빠져서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건 세탁기가 털털 돌아가는 동안 포카리스웨트를 마시고나서부터였다. 상호는 1학년 명찰을 달고 있어 희찬은 동갑이란 걸 알고있었지만 상호는 처음에 희찬이 선배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희찬이 교복과 명찰을 단 적은 별로 없었다. 상호는 희찬의 키가 큰 편이니 대충 저보다 연상일거라 넘겨짚었다. 매번 상호를 발견하고 상호에게 다가간 것도 희찬이었으니 그냥 선배가 사람 쫓아내는 거라고 추측한 탓이 컸다. 오해에 오해가 쌓여 생긴 추격전이었다.

“그럼 농구부에 오지. 니 키도 크고 달리는 것도 괜찮데.”

“부모님이 허락을 안해주신다…. 2학기 기말고사 점수 잘 나오면 농구부 가도 된다카던데.”

“와. 니 공부 못하나.”

“아니.”

상호는 책가방에서 재생지를 꺼냈다. 수업시간에 쪽지시험을 치룬 것 같다. 재생지에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가득했다. 점수를 세어보지 않아도 90점은 너끈히 넘겼다. 희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상호를 쳐다보았다. 그럼 걱정안해도 되겠네!

“빨리 드가고 싶으니까 글치.”

희찬은 상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희찬은 초등학생 때부터 농구를 배워서 그런가 뭔가를 빨리 배워보고싶다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도 잘 알았다. 희찬은 벤치 위에 앉아 털털 돌아가는 세탁기를 쳐다봤다. 세탁이 다 끝나려면 20분이 남았다. 그리고 제 발치의 농구공을 보았고, 그 옆에 앉은 티셔츠 차림의 상호를 보았다. 희찬은 상호의 팔을 툭 건드렸다. 쌍호. 그런 내랑 원온원 하까?

상호는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어!

그날부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농구가 너무 즐거워서 세탁시간이 끝나고도 한 시간을 더 놀아 옷에서 쉰내가 났다. 급하게 건조기에 돌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쉰내에 상호는 비닐봉지에 교복을 욱여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희찬은 그날 또 상호에 대한 꿈을 꾸었다.

“뽀삐~ 누나 방에서 뭐하노. 누나 체육복 먹으면 뽀삐 혼난다.”

“캉캉!”

어김없이 상호. 아니 뽀삐는 개 짖는 소리를 내고 개 같은 짓을 했다. 현실에서 누나 방에 들어갔다면 누나에게 쿠사리를 먹었을테지만 지금은 꿈이었다. 희찬은 꺼리낌없이 제 누나의 방에 들어갔다. 희찬과 남동생 방보다 좁았지만 누나는 뭔가 꾸미는 걸 좋아해서 아기자기한 인형과 연예인 브로마이드로 가득했다. 뽀삐는 원래 거실을 가장 좋아했지만 누나 방도 좋아했다. 뽀삐는 누나 방에 있는 것들 중에서 누나 체육복을 가장 좋아했다. 누나 체육복이 개껌인가. 기상호의 모습을 한 뽀삐는 누나의 체육복 바지 밑단을 이로 물고 손으로 잡아당겼다. 누나 체육복이 상삐의 침으로 척척하게 젖어가는 걸 본 희찬은 상삐의 입에서 체육복을 빼냈다. 상삐는 으르렁거렸다. 희찬은 익숙하게 얼렀다.

상삐의 흥분이 가시자 희찬은 침대 위에 앉아 상호의 어깨를 쓸었다. 꿈 속인데도 의식은 멀쩡했고 희찬은 솔직히 할 짓이 없었다. 티비랑 컴퓨터도 먹통이고 바깥은 나갈 수도 없고. 희찬은 누나 침대에 벌러덩 누워 제 위에 덥석 엎어진 상삐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상삐는 사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가 개인지 헥헥거리며 개 웃음소리를 내었다. 희찬은 창문 밖의 분홍 무지개와 파란 구름이 뿜어내는 오로라가 누나의 방을 비추었다.

“우리 상삐는 언제 사람되냐. 형아는 너 감당하기 힘들다.”

“캉캉캉캉!”

그새 별명을 붙인 희찬은 자신의 가슴을 압박하는 상삐를 토닥였다. 형아의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강아지는 각자의 방식으로 불만을 표했는데 뽀삐의 경우에는 몸으로 치대는 것이었다. 다만 꿈 속의 뽀삐는 180이 넘는 기상호의 겉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단 덤이었다. 희찬은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개일 때보다 목청은 적어서 귀청이 나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희찬은 누나 침대 위에서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꿈 속인데도 이상하게 졸렸다.

상호와 희찬은 거의 매 주말마다 만나서 농구를 했다. 딱히 놀거리가 없었기도 했고 뭔가를 할 만큼 용돈이 풍족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농구가 제일 즐거웠다. 아침 일어나면 밥만 먹고 바로 농구하러 갔다. 농구를 하고 나면 상호나 희찬의 집에 놀러가서 점심밥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또 나가서 농구를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도 두 사람은 한여름 처럼 땀에 폭싹 젖은 채로 집에 돌아갔다. 비가 와서 농구를 못하는 날에는 한쪽의 집에 들어가 만화책을 읽거나 TV로 영화를 봤다. 오씨엔에서는 비슷비슷한 영화를 틀었다. 전연령가 로맨스나 12세 이용가 블록버스터. 두 남중딩은 눈이 즐거운 블록버스터를 더 좋아했지만 로맨스가 나왔다고 채널을 돌리진 않았다. 돌려봤자 뉴스나 더 재미없는 드라마가 나왔다.

그 사이 희찬이 편해진 상호는 희찬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선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서사에 대해 논평하거나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에선 혀를 빼내밀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입술 부비는 거 뭐가 재밌다고. 입냄새 날 것 같다 아이가. 희찬도 맞장구를 쳤다. 둘 다 스킨쉽에는 낭만이 없었다. 연애보다 노는 게 더 좋을 나이였다. 이 날 본 로맨스 영화는 뭔가 결이 달랐다. 로맨스 영화는 시리즈물이었는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이어지는 엔딩 이후로 바로 2편이 방영되었다. 머꼬. 광고 안하네. 개꿀. 상호도 희찬도 바닥에 붙어서는 움직이질 않았다. 리모컨을 찾아서 채널을 바꾸는 것도 나가서 PC방을 가는 것도 귀찮았다. 창 밖은 겨울비가 억수처럼 쏟아내리는 중이었다. 

희찬의 집은 드물게도 희찬과 상호 빼고는 비어있었는데 희찬의 누나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며 연락을 해두었고 희찬의 동생은 태권도장 수련회가, 희찬의 부모님은 주말 출장 중이었다. 두 사람과 강아지 뽀삐 뿐이었다. 희찬은 느낌이 이상했다. 몇 주 전에 꾼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상호와 뽀삐가 따로 존재한다니(두 객체는 원래 따로였다.) 희찬은 뽀삐 대하듯 상호의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상호는 기겁했다.

“미친. 징그럽게 뭐하는데!”

“아. 너거 개털이랑 우리집 개털이랑 헷깔렸다.”

그러면서도 상호는 희찬의 허벅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희찬은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소파 위에 두었다. 영화는 잔잔했지만 무슨 매력이 있었는지 산원숭이 같은 두 남자애를 조용하게 만든것도 모자라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희찬은 손에 닿은 리모컨을 들어 TV 볼륨을 높였다.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커졌다. 영화는 특이하게도 30분 내내 여자주인공을 보여주지 않았고 두 남자 주인공만 보여주었다. 상호는 눈을 찡그리며 여자주인공이 숨어있나 화면 구석을 쳐다보았고 희찬은 무언가 짐작이 가는 지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 주인공 둘이서 이상한 신호를 보내던 영화는 두 사람을 키스시키는 걸로 확정했다.

상호는 당연한듯이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희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두 사람은 남자 주인공 둘이 키스하는 게 싫어서라기보단 키스라는 행위 자체에 싫음을 담은 목소리였다. 둘 다 수위가 있는 장면에는 면역이 없었다. 불쾌하면 TV를 껐어도 되었는데 상호도, 희찬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가슴 속이 콩닥거렸다. 속마음은 달랐으면서도 그것을 들키기가 싫어 둘은 좀 더 오버했다.

“드러운 주둥이 와 부비는데! 아 씨,”

“내 눈깔이 드러워진 것 같다.”

그리고 두 남학생의 고함을 들은 뽀삐는 캉캉 짖으며 달려왔다. 뽀삐는 처음 상호를 보았을 때는 온갖 경계를 했었는데 자주 보니까 그새 경계심이 풀렸는지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큰방에서 나와 희찬과 상호를 쓱 보고 들어가기도 했다. 뽀삐는 큰 소리가 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컹 짖고 뒤로 한 번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개를 키워본 적이 없는 상호는 놀라서 희찬을 불렀다.

“희차이. 뽀삐 와 저러냐.”

“우리 소리 지른 게 맘에 안들어서 글타. 냅둬라 지 알아서 진정한다.”

희찬의 말대로 뽀삐는 몇 번 짖다가 곧 조용해졌다. 희찬은 뽀삐에게 손짓했다. 일로와바라 뽀삐야. 뽀삐는 희찬의 손 앞으로 다가와 손가락 끝을 핥았다. 상호는 희찬의 옆에 앉았다. 희찬은 뽀삐를 끌어안았다. 상호가 쓰다듬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상호도 겁이 많았다. 상호는 뽀삐가 물까봐 손을 느릿하게 내밀었다. 뽀삐는 상호의 손 냄새를 조금 맡더니 상호를 받아들여주었다. 손 끝에 부드러운 털이 감겼다. 뽀삐는 미용할 때가 되어서 털이 길었다. 따뜻한 강아지의 체온에 상호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희찬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꿈 속에서 뽀삐와 상호는 하나였는데 분리되어있는(?) 모습을 보니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니 손에 이상있나. 야 털이랑 내 머리랑 어디가 비슷한데.

“그 느낌이 있다. 니는 모르는 이상한 느낌.”

“니 느낌느낌에 내 너갱이가 나가는 기분이다.”

“뽀삐랑 12살 2월 부터 같이 살아온 그 형아만의 느낌이 있는거다. 가족만 알 수 있는 느낌.”

“알겠으니까 느낌느낌거리지 마라.”

두 사람 다 하릴없이 집에서 놀다보면 저녁시간대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배꼽시계가 알아서 꾸르륵거렸다. 희찬의 집은 하루종일 비어있을테고 희찬도 상호가 자고가길 원했다. 상호는 휴대폰을 들어 부모님에게 희찬의 집에서 자고간다는 허락을 받았다.

희찬과 상호는 이런 식으로 징글맞게 붙었다. 친구가 가족보다 좋을 나이 14살. 그래도 초딩 딱지는 떼어냈으니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줄 알겠지 하는 중학생. 희찬은 그래도 가족 없이 혼자 지내라고 하면 조금 무섭고 조금 외로움을 타는 14살이다. 상호가 엮여서 이상한 꿈을 수차례 꿔대도 꿈은 꿈일 뿐이라고 무감하게 넘어갔다. 솔직히 친구에게 야 너한테 우리집 개가 빙의되서 너 네 발로 달리고 왈왈짖고 우리 누나 체육복 작살내는 꿈 꿨어. 라고 털어내기에도 뭐했다. 보통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 니 머선 고민 있냐…로 넘어가 진솔한 진실게임의 진지한 제제를 시작해야하니까. 희찬은 어색한 상황이 싫었다.

상호는 익숙하게 이불보를 펼쳤다. 상호도 희찬처럼 형제자매가 둘이었다. 그리고 누나가 하나 있고 남자 형제가 하나 있다. 공간이 한정된 집안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상호도 잘 알았다. 공간 잡아먹기 쉬운 2층 침대보단 토퍼와 이불보를 깔고 잤다. 둘은 친구라고 요를 붙이고 나란히 누웠다. 겨울비는 그치지 않고 창문을 한참 때렸다. 잘 시간이 되었으니 눕기는 누웠는데 눈은 말똥말똥했다. 결국 희찬과 상호는 어둑한 방 안을 영화관 삼아 서로 상상하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파방향에 대한 가정, 덩크에 대한 상상, 며칠 전 본 농구 경기에 대한 과몰입, 교생 선생님 예쁘더라, 농구부는 레크리에이션 보나, 테일즈런서 신캐릭터 구리더라, 누나야가 자꾸 내 저금통 삥 뜯어간다, 남동생이 힘겨루기하자고 귀찮게 군다, 방학 언제하냐, 내일 비 그쳤으면 좋겠다, 나중에 실내 농구장 가보자, 오늘 본 영화 별로였다, 로맨스 영화는 왜 다 징그럽게 입술 부비냐, 그게 그렇게 좋나.

어, 좀 궁금한데. 해보까?

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상호는 호기심이 많았다. 영윤초 과학의 날 트리플 크라운의 소유자 기상호는 궁금한 것은 직접 해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라디오의 구조가 궁금하다고 할아버지의 휴게소산 효도라디오를 망치로 박살 낸 적이 있었다. 체코 전통복장이 그렇게 편하다매. 하고 누나의 교복 치마를 뺏어입은 적도 있었다. 상호는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질렀다. 어린 나이의 치기는 원래 다 그랬다. 뇌의 발달이 덜 되어서 2층에서 뛰어내려도 자기는 사지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다고 자기 효능감에 젖어있다. 어렸을 때 했던 미친짓들이라고 구글링 조금만 하던 나오는 말이 ‘그 때는 뭔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였다. 결국 어른이 되면 그 뒷이야기가 멀거니 예상이 되거나 아주 미지에 속해 시도하지 못하게 된다.

기상호의 불도저 호기심 머신 모드는 그런 의미에서 나이스한 타이밍을 지녔다. 얼마나 나이스 하냐면. 고등학생 기상호라면 10년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마음 정리하지 못해서 오밤중에 몰래 고백하는 찌질인간 짝사랑 생을 시작했을 머뭇거림을 미연의 방지할 정도였다. 뽀삐는 큰 방에 있었다. 의식할만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희찬과 상호는 서로를 마주보고 누워있었다. 주택가의 주황색 가로등이 불투명 창문 너머로 네모난 빛을 뿜었다. 흐린데 각이 져 있고 동그란 애들의 볼따구는 또 부드럽게 비추었다. 희찬의 볼은 주황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본래 피부색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말똥거리는 두 눈은 희찬이 확실하게 깨어있음을 나타냈다.

상호는 꾸물꾸물 움직여 희찬의 입에 제 입을 붙였다. 희찬은 눈을 끔뻑였다.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막 세상이 바뀌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하면서 웃던데. 희찬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겨울 공기에 버석한 피부결이 느껴졌다.그 피부결에는 타인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손을 잡거나 몸을 껴안는 것관 다른 기분이었다. 상호도 눈을 뜨고 있던 터라 눈맞춤만 진하게 한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미묘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긁었다.

“영화는 다 가짜네.”

“혀 넣어봐야하는 거 아이가.”

불도저 호기심 모드 기상호. 궁금한 것은 a부터 z까지 다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효도라디오를 망치로 박살 낸 다음에는 맨 손으로 회로를 만지작대고 일일히 분해도를 펼쳐놓아 할아버지에게 무릎꿇고 손들어 벌을 받아 본 열혈남아다. 희찬은 상호의 말에 이게 똥인가 된장인가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니 양치했나.”

“했지.”

“혀 닦았나.”

“목구멍까지 박박 닦았다.”

마 그럼 함 해보자. 새벽 졸음에 취한 희찬도 10대 청소년이었다. 함가의 스케일이 달랐다. 부스럭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붙인 두 사람은 혀를 내밀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입술로 층을 쌓고 혀도 얽고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생소한 감각에 둘 다 입맞춤에 한참을 집중했다. 두 사람이 떨어진 건 침이 베갯잇을 적시고 난 뒤였다. 희찬은 침범벅이 된 이불로 훔쳤다. 상호는 쓰읍 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키스 별거 아이네. 맞나…. 말은 덤덤하게 해도 속은 간질거리는 지 상호는 제 가슴을 긁적였고 희찬은 열 오른 이마에 손등을 대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키스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컹컹컹컹!!!”

“아, 으븟, 뽑, 뽀삐야. 그만 핥아라.”

“컹컹컹컹컹컹컹!”

“형아 말 들어라.”

오늘도 똑같은 꿈이다. 희찬은 묘한 기분이 들어 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불이 흐트러져있는 걸 보니 상삐인지 상호인지는 몰라도 누가 누웠던 건 확실했다. 희찬은 상삐의 입을 밀어냈다. 뽀삐는 개고 개의 애정표현은 핥기였다. 뽀삐도 심심하면 가족들 얼굴을 핥았다. 뽀삐! 뽀뽀! 하면 뽀삐는 발발거리면서 희찬의 볼을 침범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상호의 가죽을 쓴 뽀삐의 뽀뽀는 받아주면 안될 것 같았다. 자기 전의 키스가 떠올랐다. 사람 주둥이는 강아지 주둥이랑 달리 짧아서 얼굴이 부벼졌다. 콧대가 부딪치고 몸무게에 짓눌렸다. 무거워. 코 얼얼해. 희찬은 양 다리로 상삐의 허리를 감고 꽉 껴안았다. 동물은 특이한게 온 힘을 다해 끌어안으면 금방 진정했다.

상삐는 희찬이 껴안고 대꾸도 안해주자 핥는 걸 멈추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단 식으로 희찬을 쳐다보았다. 희찬은 상삐를 놓아주었다. 상삐는 거실로 기어갔다. 희찬은 꿈과 현실이 흐릿해선 자연스럽게 상호 걱정을 했다. 점마 저러다가 무릎 도가니 다 나가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다시 확인해주자면 이것은 정희찬의 꿈이다.

네모난 불투명 창문은 온통 분홍빛이었다. 희찬은 창 밖을 보고 나서야 이게 꿈인 걸 확신했다. 그래 기상호 쟈가 미쳤다고 자는 사람 얼굴을 핥겠나. 희찬은 이불에서 벗어나지 않고 멍 때렸다. 같은 꿈을 연속으로 꾸다보니 어느정도 매커니즘을 알겠다. 실내에서 꾼 꿈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실외에서 꾼 꿈은 온통 희찬과 상삐 뿐이었다. 하늘색은 분홍색. 구름색은 파란색 왜 있는건지는 모르겠는데 오로라 색은 아무튼 무지개색.

그렇다고 그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희찬은 인터넷에 검색했던 같은 꿈 안 꾸는 법을 떠올렸다. 쓸모없었다.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정작 희찬은 인생에 그리 거대한 고충 따위는 없어서 머리털 빠지고 살이 내리고 잠을 못 자는 스트레스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거 설마 루시드 드림인가. 희찬은 안 될걸 알면서도 에네르기파를 쏘는 베지터 처럼 양 손을 앞으로 내밀고 흡!하는 기합을 냈다.

그대로였다.

희찬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희찬은 거실로 간 상삐가 조용한 데에 불안을 느끼고 제 방에서 나와 상삐를 불렀다.

"상삐. 뭐해."

"......낑."

"누가 휴지곽 갖고 놀랬지."

상삐는 거실 휴지곽을 자기 장난감 삼아 도륙낸 뒤였다. 상삐가 조용했던 건 사고를 치는 중이어서였다. 희찬은 꿈 속인데도 불구하고 상삐를 혼냈다. 상삐는 흰 눈을 뜨고 희찬의 말에 얌전히 혼났다. 희찬은 한참 말하고 나서야 꿈 속이니 치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희찬은 으휴하고 과장스레 한숨을 쉬더니 상삐의 상체를 껴안았다. 반성했으면 됐다는 투였다. 상삐는 희찬의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희차이."

희찬은 자신이 꿈에서 깬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거실이었다. 바닥에 깔린 꺼슬한 카페트가 그러했고 뽀삐가 언젠가 박박 긁어놓은 갈색 가죽 소파가 그러했다.

"희차이."

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상호의 것이었다. 희찬은 제 상체를 감고있는 상호의 얼굴을 보았다. 상호는 그 특유의 냉한 눈꼬리로 희찬을 마주보았다. 상호의 눈물점이 희찬으로 하여금 낯설은 감각을 일으켰다. 상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차이."

"우리 뽀삐가 사람 말을 하네!"

"처돌았나."

뽀삐가 사람 말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상삐가 아니라 상호였다. 정희찬이 아는 중학교 예비 2학년 기상호. 상호는 희찬의 허벅지를 짚고 일어서서 사람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상호는 뽀삐가 들어차 있던 기억이 없는 지 찢어진 휴지가 눈처럼 쌓인 거실을 보곤 뽀삐 화났냐하고 가볍게 묻기만 했다. 희찬은 차마 상호의 거죽을 쓴 뽀삐가 했다고 해명하지 못하고 바보같은 거짓말을 했다. 원래부터 이랬다. 그래?

희찬은 턱을 괴고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꿈의 양상이 바뀌었다. 상삐가 상호로 진화(?)하다니. 희찬은 자신의 앞에 있는 기상호가 저의 꿈으로만 나타난 상상 속 기상호인지 옆에서 자고 있는 기상호와 어떤 텔레파시, 어떤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꿈 공유라는 별 이상한 현상을 겪고 있는 자신의 친구 기상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호는 희찬의 눈 앞에서 박수를 쳤다. 눈에 초점이 퍼뜩 들어온 희찬은 눈을 치켜떴다.

"니 진짜 기상호 맞나."

"맞다. 내 아니면 니 방송실에서 테런한 거 전교실 TV에 생중계 된 거 누가 알겠노."

"악!! 진짜 기상호네!"

상호가 아무렇지 않게 희찬의 흑역사를 말하자 희찬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상호는 돌아보지 않고 거실 창문과 씨름했다. 희찬은 열리지 않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상호의 씨름을 구경했다. 상호는 온 힘을 다해도 창이 꿈쩍하지 않자 포기하고 이마를 붙여 창 밖을 구경했다. 근데 여기는 하늘이 왜 이런데. 희차니 니는 아나. 희찬은 소파 각에 뒷목을 기대며 대충 대답했다. 모른다. 내 꿈 속이라 그른가보지. 상호는 희찬의 꿈 속이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니 꿈 속이라고? 기상호는 희찬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와선 희찬의 볼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찬은 상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뻘쭘한 얼굴로 상호의 시선을 피했다.

희찬은 상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상호의 정신세계가 남들보다 특이한 면이 있다. 희찬은 상호보다 범인에 가까웠기에 상호가 기발하거나 위험한 발상을 저지르면 가끔 상호의 머리통을 따서 관찰하는 상상을 했다. 희찬이 딴 생각을 오랫동안 하자 상호는 자비없이 희찬의 볼을 잡아당겼다. 우악스럽게 볼이 당겨지자 희찬은 소리를 질렀다. 

“아악!”

“뭐 뭐꼬.”

희찬의 비명에 상호는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희찬은 얼얼한 볼을 감쌌다. 창문 밖은 파랬다. 현실이었다. 희찬은 어이없는 얼굴로 상호의 볼을 잡아당겼다. 꿈 속의 상호가 너무 아프게 꼬집은 탓이었다. 상호도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한바탕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갑자기 꼬집힘 당해서였고 희찬은 꿈 속에서 꼬집힘 당해서였다.

투닥거림이 멈춘 건 배꼽시계가 울리고 나서부터였다. 상호는 희찬이 왜 꼬집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았지만 희찬은 입에 자물쇠를 찬 듯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희찬이 라면이나 먹으라며 젓가락을 내줬을 때 상호는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도 얌전히 라면 면빨을 흡입했다. 

희찬은 심란한 기운을 감추고 너 혹시 무슨 꿈 꾸지 않았냐며 물어볼까 말까 머뭇거렸다. 그러나 상호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묻지 않았다. 꿨든 안꿨든 바뀌는 일이 생기진 않을테고 또 꾼다는 보장이 없을테니까. 희찬은 입 안이 간질거려 괜히 좋아하지도 않는 요거트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그 뒤로 희찬이 상호의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또 상호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으니 희찬도 꿈 생각은 차차 잊어버렸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상호는 드디어 부모님께 농구부에 드는 걸 허락받았다. 상호는 농구부 입부 신청서와 부모님 동의서를 들고 담당교사에게 달려갔고 교사의 도장과 전화로 순조롭게 학생 선수가 되었다. 상호는 그 소식을 가장 먼저 희찬에게 알렸다. 희찬도 뛸 듯이 기뻐했다. 농구부까지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은 징글맞다고 할 정도로 붙어다녔다. 등하교도 같이. 급식도 같이. 놀러가는 것도 같이. 24시간 중에서 12시간은 서로가 있었다. 오죽하면 희찬의 누나가 너 상호랑 사귀냐며 극혐할 정도였다. 

희찬이 뽀삐의 하네스 끈을 잡아당겼다. 뽀삐는 오랜만에 보는 상호의 얼굴을 까먹었는지 상호에게 캉캉 짖어댔다. 상호는 그거에 겁을 먹어서는 한 걸을 뒤로 물러나 뽀삐에게 쩔쩔매었다. 희찬은 익숙하게 뽀삐를 말렸다. 희찬이 일상적으로 한번만 봐주자, 한번만 봐주자. 라고 달래니 뽀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호에게 흥미를 잃고 땅바닥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상호는 뽀삐가 얌전해지고나서야 희찬의 옆에 섰다. 희찬은 데자뷔를 느꼈다. 

“기상호 니 이상한 꿈 꾼 적 없나.”

“꿈? 뭔 꿈.”

“아니, 아이다.”

상호는 희찬의 말에 김이 샌 듯 할딱거리며 돌아다니는 뽀삐를 관찰했다. 상호는 뽀삐를 보고 뭔가 떠오른 듯 아, 하고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개가 되는 꿈은 꿔본 적 있다.”

희찬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상호의 입에 집중했다.

“너거집 개가 돼서 살았는데… 재밌었던거 같다.”

“그기 뭐꼬.”

문맥을 보아하니 희찬이 꿨던 꿈과는 달랐나보다. 희찬은 어쩐지 김이 새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같은 꿈 꿨었다면 재밌었을텐데. 말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구나. 희찬은 뽀삐가 싼 똥을 비닐봉투에 잠았다. 상호는 할 일이 없었는지 희찬과 같이 산책로를 걸었다. 뽀삐는 상호에게 관심이 사라졌는지 발발발 뛰어다녔다. 뽀삐는 가는 길 모든 게 관심이 많았다. 풀떼기 하나를 지나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냄새를 한 번씩 맡았다. 눈 앞에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니면 꼭 나비를 먹으려고 따라 달렸다. 희찬은 뽀삐를 말리면서 걸어가는 길목이 무언가 모험을 하는 과정 같았다.

일상적인 한 파트가 아니라 특별한 비일상의 일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동네 한 바퀴를 떠돌고 나서야 상호는 집으로 돌아갔고 희찬도 뽀삐를 안고 귀가했다. 그날 뽀삐의 발을 씻고 저녁을 먹고 잠에 들기까지 희찬은 일시적 멍청이가 되었다.

오늘은 정말 드물게 상호에 대한 꿈을 꾸었다. 사박이는 촉감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잔디였다. 태초중은 잔디 운동장이었고 또 운동부로 농구부 말고도 축구부도 운영했다. 희찬은 분홍빛 하늘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적갈색 벽돌을 보고나서야 여기는 꿈 속이고 태초중학교 운동장인 걸 자각했다. 희찬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몇 개월 만인지 속으로 세던 희찬은 가물한 날짜감각에 손가락으로 셈 하던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상삐 안오려나.

희찬은 이런 꿈을 꿀 때마다 존재했던 상호의 겉가죽을 싄 뽀삐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잘 모르는 친구를 자기 집 강아지가 빙의(?)한 걸로 만든 것인가. 희찬은 누나의 인소를 너무 많이 읽은 것인가 고찰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무리 읽은 책이 별로 없다고 해도 누나의 인소를 가지고 꿈을 꿀 정도로 희찬은 낭만이 심하지 않았다. 그냥 뭐에 씌인 것 같다고 치는 게 나을 성 싶다.

“희차이. 희차이.”

“상호…?”

희찬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기상호인가 싶어 하늘 위로 고개를 고정시켰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상호는 계속 희찬을 불렀고 희찬은 몸을 일으켜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뽀삐였다. 기상호가 뽀삐가 되었다. 희찬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고는 뽀삐를 들었다. 뽀삐 아니 뽀호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 개가 되어뿟다 희차이. 희찬은 미친, 미친, 미친! 하고 뽀호를 여기저기 만지작댔다. 뽀호는 희찬의 손길을 귀찮아하다가 결국 희찬의 손을 물었다. 뽀삐의 거죽을 뒤집어 쓴 상호는 진지하게 말했다. 희차이 니가 도와줄 게 있다.

희찬은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주의 깊게 뽀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지금 자기는 저주를 받았고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의 키스.

“아니 와 키쓴데!?”

“말 끊어먹지 마라. 이게 유구한 전통이자 전국 어린이 동화 협회에서 정한 기본적인 저주 해주법이다.”

아무튼 진정한 사랑의 키스가 필요하다.고 뽀호가 설명했다. 이전에 상삐의 모습으로 나온 것도 뽀호가 저주를 받아서였다며 뽀호는 희찬의 무릎에다가 제 앞발을 올렸다. 희찬은 뽀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물었다. 그럼 상삐랑 한 거는 의미 없다. 상삐는 개라 안된다고 한다. 뽀호는 최근 미용을 해서 주둥이 입술이 보였다. 뽀호는 단호하게 부탁했다. 내 도와도 희차이. 희찬은 어차피 꿈 속인데 못할 것도 없을 것이라 결심하고 질렀다.

뽀호를 양 손으로 들고 희찬은 입술만 쭉 내밀어 뽀호에게 뽀뽀했다. 강아지의 촉촉한 입술이 닿자 선물상자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희찬의 얼굴을 뒤덮자 희찬은 켁켁거리면서 연기를 흩어냈다. 연기가 났으니 뭔가 성공한 것 같다. 희찬은 연기가 매워 눈을 찡그렸다. 희찬은 눈을 뜰 수가 없어 켁켁거리면서 상호를 불렀다.

“상호 성공했나.”

“어.”

희찬은 눈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곧이어 자신을 덮치는 힘에 뒤로 넘어갔다. 희찬은 중력변화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앞을 확인했다. 사람이 된 기상호였다. 희찬은 상호에게 무겁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상호는 곧장 고개를 숙여 희찬의 입술에 제 입을 부볐다. 희찬은 또 한 번 데자뷔를 느꼈다. 상삐로 변한건가 하는 가정까지 치솟았을 때 상호는 입술을 떼고 희찬의 얼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희차이 니 방심 잘하네.”

“왜. 왜. 우. 워. 와?”

“그거아나. 꿈은 자기 마음을 반영한다꼬.”

희찬은 놀라 상호의 어깨를 밀었다. 무슨 힘이 나오는지 상호는 밀려나오지 않았다. 상호는 상체를 푹 숙여 희찬과 품을 맞추었다. 희찬의 콩닥거리는 가슴이 상호보다 빠르게 뛰었다. 희찬의 얼굴이 익었다. 상호는 희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쯤 되면 눈치채라 빙시야. 언제 내 꼬실래?”

“악!!!!!!!!”

“정희찬 또라이야 시끄러워!”

희찬은 시원하게 비명을 질렀고 희찬의 누나는 방문을 발로 찼다. 희찬은 새빨간 얼굴을 양 손으로 덮었다. 망했다.

아 시발 꿈이다.



내 친구는 개?

https://youtu.be/Je-AOvGZVso?si=p0ArjstFPZ8pTovb

사랑은 이렇게 생기는 게 아니겠어
어쩌면 내 맘의 반쪽을 네게 걸어보는 건데
나는 오늘도 네게 차일 것만 같아도
난 한번 더 너에게 다시 달려가 볼 거야



이게 뭔 꿈이고.

부시시한 머리카락이 털면 터는대로 비죽거렸다. 이불보 옆자리에선 막 제대한 상호의 형이 배를 드러내고 드르렁거렸다. 상호는 눈을 찡그렸다. 꿈의 내용을 기억하려 애써도 수증기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상호에게 남은 것은 꿈 속의 '내'가 즐겁고 반갑고 행복했단 점 뿐이었다. 딱히 나쁜 꿈도 아니었기에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부엌에는 먼저 일어난 부모님이 부산스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호 잘 잤나."

"네."

비척거리며 화장실로 가던 중 상호의 엄마가 아침 인사를 해주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상호는 거실 티비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보니 나 개가 되었던 것 같다. 번개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상호가 발을 멈추자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상호의 누나가 상호를 재치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상호는 입을 벌린 그대로 소리를 질렀다.

"아!! 누나! 내도 똥 쌀거다!"

"화장실에 니꺼내꺼가 어딨냐. 누나 급하다 빨리 나올게."

상호의 누나는 단호하게 상호의 흰소리를 차단했다. 급똥신호는 살금살금 오고있었는데 상호는 그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나이차도 많이 나면서 막내와 장녀가 말다툼을 하자 상호의 아빠가 상호를 부르며 밥부터 먹으라고 그릇에 공기밥을 퍼주었다. 상호는 투덜거렸다. 밥부터 먹으면 안 상쾌한데. 그러면서도 고슬한 흰 쌀밥에 스팸과 김치를 야무지게 얹어서 크게 한술 떴다. 식탁에는 상호 남매의 것만 차려져있었다. 상호의 부모님은 일찍 식사를 끝낸 탓이었다. 한 손으로는 잠옷 티를 들춰 배를 긁고 한 손으로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반찬을 집어먹었다.

아침부터 먹성 좋게 손을 움직인 덕인가 상호의 누나가 나왔을 때 상호의 밥그릇에는 밥이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상호의 누나는 물기 서린 손으로 상호의 머리통을 닦았다. 머리통이 축축해지자 신경질적으로 코를 훌쩍였다. 상호의 누나는 직장인이 되었으면서 상호의 형보다 더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상호의 누나가 상호의 옆에 앉아 나물을 짚었다. 상호의 누나는 연이은 회식과 약속으로 부쩍 찐 살이 부담스럽다며 고기를 마다했다. 상호의 엄마는 그 사이 아직도 자고있을 상호의 형을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방에서 상호의 형이 끙끙대며 잠투정을 했다. 아, 아, 아, 아. 엄마 나 저번달에 제대했잖아 오분만 아. 형의 단말마를 듣자하니 엄마한테 귀를 잡혔나보다. 상호는 다 먹은 밥그릇을 개수대 위에 놓고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

농구하고 싶다.

등교하면서 본 농구코트를 보자 불현듯 농구에 대한 욕구가 타올랐다. 그냥 농구가 하고싶다.

상호는 예전부터 농구가 정말 즐거웠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은 찾지 못했다. 가족이 반대한다던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상호는 학생 선수라던가 농구부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막연히 직업을 가진다면 농구선수가 되고싶다.라고 결심만 한 상태였다. 등교길에는 태초중학교 학생들로 그득했고 상호는 유난히 성장이 빨라 머리 하나는 불쑥 위에 있었다. 남들보다 키가 크다보니까 상호는 멀리 있는 것을 빨리 발견하기도 했다. 상호는 태초중학교 농구부 학생들을 보고 불현듯 한 가지 해답을 떠올렸다. 저거다!

상호는 그날로 부모님에게 선언했다. 엄마, 아빠. 내 농구부 들어갈끼다.

“안돼.”

“아. 왜!”

상호의 부모님은 단칼에 NO를 외쳤다. 상호는 불만을 터뜨렸다. 큰방 바닥에 드러누운 상호는 내도 농구부우~를 외치며 떼를 썼다. 상호의 부모님은 이것이 익숙한지 가만 서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상호 이전에는 상호의 형이 있었고 상호의 형 이전에는 상호의 누나가 있었다. 상호의 떼쓰기 단계는 두 번이나 겪었기에 부모님은 당황하지 않고 상호가 뻘쭘함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상호는 부모님이 별 말을 하지 않자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상호는 씩씩거리면서도 의아했다. 분명 형이랑 누나야가 이럼 들어주신댔는데. 제 손윗형제의 족보가 통하지 않자 상호는 부모님을 올려다보았다. 상호의 부모님은 상호가 진정하고 나서야 상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가 다니는 학교 농구부 거기는 동아리가 아니라 선수 될라고 가는데다.”

“내도 선수 될꺼다.”

“아니, 니는 공부도 잘하믄서 무슨 농구 선수고.”

“요새는 머리 좋아야 선수도 잘한다!”

상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상호의 부모님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상호를 쳐다보았다. 상호는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고 입술을 꾹 닫았다. 부푼 눈알이 희번뜩했다. 반드시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나타났다. 상호의 부모님은 서로 말없이 의견을 나누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정말. 반사적으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상호의 아버지는 숱 적은 뒤통수를 긁었다. 처음에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아예 막을 것도 없었다. 상호는 허우대가 높았고 가끔 상호를 본 친척이나 친구들도 상호 보고 ‘마, 호야 니 농구선수나 배구선수 해바라.’, ‘아이다. 아가 얼굴은 깔끔하니 모델 시켜보면 안되겠나.’라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상호는 뭔가에 꽂히면 끌고 갈 때까지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상호가 농구 선수가 되겠다고 한 것도 그러한 꽂힘의 연장선일테다. 상호는 호오를 따지기가 어려운 아이이나 그만큼 싫증을 내는 것도 굉장히 드문아이였다. 상호의 부모가 걱정한 건 그 꽂힘 때문에 공부까지 손에서 놓아버릴까봐였다. 상호의 부모님은 좀 옛날 사람이었고 운동선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머리도 좋은 아 운동 시키겠다고 괜히 그 머리 썩혀버리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상호의 어머지는 씁, 하고 숨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상호의 부모님은 빠르게 마음을 정했다. 막는다고 하더라도 애가 멈추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형, 누나에게 부탁해서 부모님 대신 동의해달라는 사고를 칠까봐하는 염려도 있었다. 상호의 부모가 내놓은 협상은 간단했다.

“니 그라믄. 이번 기말고사 때 성적 안 떨어뜨리고 유지하거나 올리면 허락해주마.”

“진짜로?!”

상호의 성적은 상위권에 속했다. 더 올리려면 전교권에서 놀아줘야하는데 상호 실력이나 집안 사정상 학원을 더 들일 수는 없었다.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상호는 눈을 반짝거렸다. 벌써부터 흥분되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성적 떨어뜨리면 농구부 안된다! 엄마가 분명히 말했다.”

“알았데이!!”

“뛰지 마라 기상호.”

상호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경고했건만 상호는 농구부에 정신이 팔려서 들리지 않나보다. 상호의 아빠와 엄마는 서로 기상호가 누굴 닮았는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상호는 그날부로 자신의 성적표를 벽에 붙였다. 대부분 80점대였고 몇몇 과목은 90점대 초반이었다. 상호는 샤프를 꾹 쥐고 불타올랐다. 상호의 형은 강력하게 의욕을 발산하는 동생을 보고 잘들  논다며 배를 까고 긁적였다.

*

상호는 무표정인 척 하면서도 속으로 낄낄거렸다. 기말고사 가채점 상 성적은 확실하게 올랐고 이제 부모님한테서 농구부 입부 확인서 싸인만 받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희찬은 한 손으로 상호의 가채점 표를 들고 읽으면서 한 팔로는 상호의 어깨에 둘렀다. 중학교 1학년 가을 즈음에 친구가 된 희찬은 꽤 스스럼없는 친구다. 친구가 된 날은 한 달 정도 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몸을 붙여오는 꼴은 한 2년 넘은 베프 그 자체였다. 희찬은 상호의 성적표가 신기했다. 희찬은 절대로 받아본 적 없는 성적이었다. 상호는 희찬이 들고있던 가채점표를 가져가서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기말고사의 마지막 3일째가 끝난 뒤라 주변의 학생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상호는 동네 농구코트를 가리켰다. 공부한다고 상호나 희찬이나 거진 2주 동안 농구를 하지 못했다. 점심 때라 그런지 동네 농구코트에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농구코트는 저녁 시간부터 사람들이 모였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아재(청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으나 중학생인 상호나 희찬에게는 어차피 똑같은 아저씨다.)들이 차지하고 앉아있기에 둘 다 마음껏 써본 적이 없었다. 초록색 우래탄 코트와 칠이 조금씩 벗겨진 흰색 선이 두 사람 보고 이리 와서 볼 튀겨보라는 듯이 아른대었다.

근데 우리 볼도 없는데 어케 농구하노. 희찬은 교복에 책가방을 진 정석적인 학생 차림이었다. 어디에도 농구공을 가지고 올만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상호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에어 농구? 하고 아무말을 했다. 희찬은 공기 터지는 소리를 냈다. 

“니 먼소리하노! 투명뽈로 퍽이나 농구가 되겠다.”

“에이씨 농구 땡기는데.”

“그럼 학교로 빽하까? 체육관에 농구공 있는데.”

상호는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학생들이 우수수 학교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 중의 절반 정도는 버스 정류장에서 펭귄무리처럼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상호와 희찬은 집이 가까워서 굳이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이 있는 인도는 좁았고 이를 뚫고 지나가려면 피곤할 거 같았다. 상호는 희찬과 어깨동무를 했다. 상호의 가방도, 희찬의 가방도 기말고사 마지막날이라 매우 가벼웠다. 굳이 집까지 안 들려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빽하자 빽.”

“기쌍호 농친놈이었네.”

“지는.”

두 사람은 인파를 역류했다. 목적지는 같았지만 서로를 잃어버릴까봐 서로의 손을 꽉 붙잡고 달렸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지만 싫지 않았다.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막상 도착한 체육관은 문고리가 자전거용 자물쇠로 감겨서는 굳게 잠겨있었다. 상호도 희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좌절했다. 희찬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상호는 문고리를 어거지로 잡아당겼다. 체육관에 공이 있다는 생각만 했지 그 곳이 잠겨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상호와 희찬은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단단한 유리문과 유리문 너머로 가려진 팥죽색 커튼이 야속했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우리 인제 어뜩하노. 수위 아저씨는? 벌써 퇴근하셨지. 수위실 창문도 닫혀있다 아이가. 흥분이 가시자 손이 얼얼했다. 희찬과 상호는 엉덩이를 붙이고 계단 턱에 앉았다. 12월 초의 겨울 바람은 두 아이들의 마음을 시렵게했다.

상호는 포기하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찬이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니 뭐하게? 상호는 희찬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있어바라. 햄아가 함 해보께. 희찬은 상호의 말에 감동받기는 커녕 흥미 잃은 얼굴로 상호의 말을 정정했다. 빠른이 무신 햄아고. 상호는 희찬의 말을 무시했다. 체육관 창문은 여러개고 그 중에 하나 정도는 열려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상호는 문 오른쪽 창문부터 시작해 손을 대기 시작했다. 창문은 대부분 잠겨있었다. ‘대부분’은. 결국 하나는 열리는 창문이란 소리였다. 상호는 창문때를 손바닥에 묻히고 다니면서 실없이 웃었다. 이것 보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에 희찬은 이를 환히 보이며 웃었다. 니 머리 좋네!

화단 흙이 신발에 묻든 말든 열린 창문 앞에 선 두 사람은 가방을 체육관 안에 던졌다. 텅 빈 체육관은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음을 울렸다. 상호가 망을 보는 동안 희찬은 창틀을 잡고 짧게 뛰었다. 배가 창틀 위로 올라가자 희찬은 익숙하게 한쪽 다리를 넘겼다. 양 다리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자 희찬은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한 두번 뛰어넘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상호도 뛰어넘기 위해서 창틀을 배에 대고 다리에 넘겼다. 하지만 창틀 넘는 게 익숙치 않은 지 바깥에 있던 발이 벽에 걸렸다. 어어 하다가 몸이 넘어갔다. 희찬이 상호의 등을 잡았다. 거하게 떨어질 뻔 했지만 간발의 차로 상호는 떨어지지 않고 희찬의 품을 잡고 착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와씨, 대가리 박을 뻔 했다.”

“니 안 다쳤나.”

“개안타.”

두 사람은 아까의 사고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지 체육관에 드러누워선 서로의 팔과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체육관은 냉골이었고 열린 창문으로는 더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심장을 진정시킨 두 사람은 창문을 닫았다. 체육관 창틀은 청소를 한 지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냐면 희찬과 상호의 롱패딩과 손이 먼지로 얼룩덜럭하게 때가 묻을 정도였다. 상호와 희찬은 롱패딩을 대충 털고 체육관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화장실 물은 얼음물 수준이었다. 희찬은 물에 손을 대보고는 미친!이라고 외쳤다.

체육창고는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농구공까지 빌린 상호와 희찬은 롱패딩도 벗고 교복 차림으로 텅 빈 체육관에서 일대일을 했다. 두 사람은 교복 차림으로 뭐가 재밌는지 깔깔거리고 슈퍼울트라라이트닝슛 따위의 개인 필살기를 외쳤다. 동네 똥강아지 같은 두 사람이 농구를 멈춘 건 한시간 뒤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배가 고팠다. 둘 다 남중생이라고 위생관념은 어디다가 갖다버렸는지 화장실 세면대로 갈증을 해결한 두 사람은 체육관 구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땀 마르니까 춥다.”

“여 말고 창고에 있으까?”

희찬이 양 팔을 손으로 마찰시키자 상호는 체육창고를 가리켰다. 곧바로 어. 하고 답한 희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롱패딩을 들었다. 상호는 자기 책가방 지퍼를 열고 뒤적거리더니 초콜릿 바 하나를 챙겼다. 아침에 기말고사를 본다고 하니 누나가 챙겨줬던 에너지 바였다.

체육창고는 좁았고 이런저런 용구들이 마구잡이로 보관되어있었다. 체육창고의 작은 창에는 햇빛이 직격으로 쏟아졌다. 한 줄이 햇빛이 체육 창고 안에 있는 먼지를 반사시켰다. 희찬은 매트 위에 있던 뜀틀을 치우고 상호는 쌓인채로 접힌 매트들을 통으로 펼쳤다. 짙은 파란색 매트에서는 텁텁한 고무냄새가 났다. 크기는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만큼 넓었다. 희찬이 배게 대용이라며 조립식 매트를 들고왔다. 희찬과 상호는 각자 조립식 매트를 베고 널부러졌다. 대자로 누웠지만 파란색 매트는 두 남중생을 수용하기엔 버거웠는지 약간 좁았다. 희찬의 다리는 상호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고 상호의 팔은 희찬의 팔을 휘감았다. 몸을 바싹 붙인 채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부유하는 먼지를 구경했다. 먼지는 오후의 햇살 때문에 새하얗게 빛을 냈다.

상호는 주머니에서 초콜릿 바의 포장지를 까서 한 입 먹었다. 희찬이 옆에서 말했다. 내도. 자. 상호는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초콜릿바를 건냈다. 초콜릿 바는 크기가 작았다. 상호 한 입에 반 절 사라지고 희찬 한 입에 증발한 초콜릿 바 포장지는 고스란히 상호의 주머니에 도로 들어갔다. 캬라멜과 초콜릿의 감미로운 맛에 한참을 우물거렸다. 상호는 입에 음식이 있으면서도 눈이 감기는 걸 막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체육 창고 안은 마법처럼 사람을 졸립게 했다.

*

“끄응, 낑..”

“뽀삐야. 왜. 어디 아프나.”

희찬이 갈색 요크셔테리어를 들어안았다. 뽀삐는 낑낑거리기를 멈추고 희찬의 볼을 핥았다. 희찬은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야가 와 이라노. 오늘은 형이랑 노까? 컹! 뽀삐, 아니 상호는 맑게 짖었다.

아, 이거 꿈이구나. 상호는 자신의 입에서 난 소리가 선명한 개소리임을 깨닫은 뒤에야 이 곳이 꿈 속임을 확신했다. 상호는 개상호, 갈색 머리가 개털같네, 아이고 이 똥강아지, 저, 저 개새끼. 라는 개와 관련된 명사와 형용사를 숱하게 들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호는 개 흉내를 제일 못했다. 개 짖는 왈왈소리 잘 내는 친구 옆에서 같이 개 짖는 소리를 따라할 때마다 너는 성대모사의 재능이 없다는 놀림을 받았던 상호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상호의 생각 논리 체계가 이상한 건 여기가 꿈이기 때문이다. 기상호가 꿈에서 깨어있었다면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냐며 미쳐돌았을 것이다.

희찬은 터그놀이용 하늘색 밧줄을 들고 왔다. 뽀삐가 된 상호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는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희찬의 놀이에 동참해주기로 했다. 강아지의 성대로는 사람말을 못 하는데다가 꿈 속인데 괜히 어지럽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왜, 인셉션에서도 꿈인걸 함부로 의식하고 제멋대로 했다가 가게가 터지고 사람들이 달려들고하지 않았는가. 은근히 쫄보기질이 있던 상호는 꿈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1306가지 공포스러운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상호가 짧은 고민을 끝낸 사이 희찬이 영차영차하자. 뽀삐, 영차영차.하고 상호의 주목을 끌었다. 상호는 하늘색 밧줄에 공처럼 매듭진 부분을 이로 물고 잡아당겼다.

“뽀삐 힘 쎄다~ 영차, 영차. 잘 한다. 뽀삐야.”

“으르르르르릉! 깡깡.”

상호는 고 사이 터그놀이에 빠져선 희찬이 밧줄에 힘을 풀 때마다 뒤로 확 잡아당기고 뒷걸음질 쳤다. 희찬은 상호가 잡아당기면 이리저리 칭찬을 했다. 상호는 자신의 인권이 어느순간 나락가는 걸 무시하고 꼬리를 헬리콥터처럼 휘둘렀다. 15분을 그러고 놀았을까 상호가 헥헥거리면서 밧줄을 입에서 놓았다. 희찬은 상호의 머리와 등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우리 뽀삐 천하장사네! 상호는 기뻐서 한 바퀴 돌고 앞발로 서고 개로서 할 수 있는 기쁨의 행위를 마구 발산했다.

그러다가 희찬의 입을 혀로 마구잡이로 빼서 핥았다. 희찬은 으브븝하는 소리를 내며 익숙하게 상호를 붙잡았다. 개가 혀로 애정표현하는 게 익숙한 모양이었다. 희찬은 그만. 그만이라고 말하며 상호를 진정시켰다. 희찬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상호가 희찬의 양반다리 둥지에 들어가자 희찬은 상호를 만지작거리며 티비를 켰다. 한차례 논 뒤라 그런지 상호는 어느순간 차분해진 얼굴로 헥헥거렸다. 희찬이 킨 티비에는 익숙한 음악 소리를 냈다.

[나 오늘부터 너랑 썸을 한번 타볼 거야~

나 매일매일 네게 전화도 할 거야~]

“아.”

그것은 희찬의 알람소리였다. 순식간에 잠에서 깬 상호는 눈을 끔뻑거렸다. 겨울 공기가 목을 근지럽게 했다. 상호는 감기지 않은 팔로 대충 매트를 휘저어 휴대폰을 찾았다. 시간은 2시였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배에서 천둥같은 음이 울렸다. 배가 고프고 마침 알람도 울려서 깬 거였다. 희찬은 알람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눈썹만 찡그렸다. 상호는 희찬의 얼굴을 응시했다. 꿈 속에서 본 희찬의 얼굴과 지금의 희찬의 얼굴은 별 차이가 없었다.

상호는 희찬의 하관을 보고 꿈 속의 일을 떠올렸다. 핥았던 감촉이 지금도 생생했다. 상호는 희찬에 입술에 닿을락 말락한 거리를 유지했다. 희찬의 콧바람이 상호의 인중을 간지럽혔다. 상호는 잠시간 그 거리감을 유지하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하고 난감한 기색으로 희찬의 입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꿈이 진짜 같다고 해도 자는 친구 입에다가 자기 입 부비는 건 좀…. 그거같았다. 성추행범.

상호도, 희찬도 로맨틱을 몰랐다. 모른다기 보단 로맨틱을 품기에 어렸다. 두 사람은 중학생이고 남들 선덕거린다 낭만적이다 소리를 지를 때 그래서 언제 끝나냐고 묻는 눈새였다.

상호가 조용히 일어나서 앉자 희찬도 잠에서 깼다. 미친 개춥다. 희찬의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희찬은 자는 내내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 연신 목에서 크흠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널부러져서 잔 탓인가 두 사람의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대충 마른 세수를 하며 눈꼽을 떼어낸 두 사람은 느릿하게 체육 창고를 빠져나갔다.

“상호 밥 뭐 먹을건데.”

“라면 땡긴다.”

상호는 스마트폰을 들어 가족 단톡방에 들어갔다. 부모님이랑 누나는 일하고 있을 테고, 형은 오늘 친구들이랑 여행 간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다. 상호는 자연스럽게 머리의 결론을 입으로 내뱉었다. 희차이 우리 집에서 라면 먹자. ㅇㅋㅇㅋ.

*

기말고사 점수는 예상한대로 조금 올랐다. 상호의 부모님은 가채점 표를 보고 별다른 말 없이 상호의 농구부 입부를 허락해주었다. 상호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담임 선생님한테 말했다. 쌤요, 저 농구부 입부 신청서 주세요!

상호의 농구부 입부 허락을 가장 크게 축하한 건 희찬이었다. 두 사람은 겨우 농구 하나로 로또를 맞은 사람처럼 좋아했다.

농구부에 입부하고 나서 변한 것은 바뀐 커리큘럼이었고 그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희찬과 함께있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징하다고 할 만큼 붙어다녔다. 물론 상호의 성격 상 타인과 어울리기가 어려운 면도 있지만 2학기 막바지, 12월에 입부한 탓인가 농구부 부원들이 어수선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애들이라고 상호는 농구 초보래도 키가 187이라 그런지 환영받는 부분이 많았다. 마, 상호 니 인제 14, 15살 밖에 안됐으니까 키는 더 클 기라. 농구코치는 상호의 기초체력을 가르치면서도 제법 칭찬을 자주 했다. 사람은 칭찬 하나로도 백텀블링을 한다고 상호는 쉽사리 늘지 않는 기술에 힘들어하면서도 칭찬과 농구 하나로 열심히 달렸다.

희찬은 상호의 큰 응원군이자 농구 메이트다. 상호와 다르게 오랫동안 농구를 해서 상호의 커리큘럼을 따라할 필요가 없을텐데 희찬은 기초가 단단해야 잘 할 수 있다며 혼자서 볼 튀기는 상호의 옆에서 같이 볼을 튀겼다. 볼만 튀겼다면 계속 좋은 친구로 남아있었을텐데 상호는 그게 잘 안되었다.

사춘기는 흔히 질풍노도라도 칭해지기도 하고 감정의 폭격기라고 정의되기도 했다. 상호는 사춘기가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왔다. 대한민국 남학생의 사춘기 연령은 평균 만 13세 경에 시작된다고 하는데 상호는 그것보다 딱 1살 먼저 시작했다. 그런데 상호는 빠른년생이니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칠 수 있다. 오오. 사춘기, 그것은 감정이 성숙해지고 몸이 자라고 수염이 나고 어쩌고저쩌고. 중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 학기초에 반 강제로 들은 보건 성교육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자기 객관능력이 높고 관찰력 좋고 대중과 궤를 달리하는 감성의 소유자 기상호는 약 5시간 동안의 한정적인 교실 체류시간 속에서도 남자애와 여자애들 사이의 조숙한 감정 알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상호는 키 때문에 교실 맨 뒤에 앉았기에 그런 알력이 너무 잘 보였다. 책상 밑으로 주고받는 쪽지, 쪽지를 연결고리 삼아 살짝쿵 닿는 손가락 끝에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라던가. 말 한 적도 없는데 너 목마르다며 하고 ‘오다 주웠다’ 식 딸기우유 주기. 상호는 저것이 썸이고 풋사랑인걸 알았다. 그리고 저것에서 기시감도 느꼈다. 상호가 희찬에게, 희찬이 상호에게 하는 것과 닮아있었다.

상호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티 낸 적 없었는데 챙겨준다. 이퀄 희찬이 배고플 때 상호가 간식을 준다.

쪽지를 건내줄 때 장난으로 손가락을 잡는다. 이퀄 희찬은 포스트업 연습을 할 때 가끔 껴안는 장난을 친다.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빨개지고 왜 쳐다보냐며 흐흐 웃는다. 이퀄 상호가 희찬을 관찰하면 희찬의 얼굴이 빨개진다.

이 모든 행동은 짝사랑의 신호다. 이퀄 희찬과 상호는 서로를 짝사랑하고 있다..?

상호는 감았던 눈을 흡떴다. 상호는 고개를 들고 상체를 일으켰다. 깨달음이 벼락처럼 내리쳐졌다. 상호는 전원 코드가 빠진 로봇처럼 이마를 책상 위에 박았다.

이게 짝사랑이구나. 상호는 그제야 두근거리는 심장이 귓가를 울리는 걸 들었다. 체육복 안이 열기로 찼다. 근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상호는 처음으로 다다른 미지의 공간에 고장이 났다. 남들이 사랑에 대해 묻노라면 그것은 같이 있으면 만지고 싶고 보면 웃기고 하루종일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연애를 어떻게 하냐고 묻노라면 상호는 얼굴이 벌게져선 ‘그거…그.. 저기, 서로 좋다고 말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라고 불확실한 대답 밖에 내놓지 못했다. 상호는 쑥맥에 연애에 ‘연’자도 모르는 모태솔로다. 고백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기상호의 14년 얄팍한 하드웨어 데이터베이스 상으로는 꽃다발 주고 너 나랑 사귈래?! 하고 묻는 게 전부다. 한 마디로 낭만이 없다. 상호는 자신의 누나와 형의 연애경력을 떠올렸다. 토가 쏠렸다. 회상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근데 서로 좋아하면 그걸로 장땡 아닌가.

상호는 효율만을 따졌다. 오늘 하교하면서 물어봐야겠다. 마 정희찬, 내 남친할래? 빈 말로 전달하면 또 멋이 없으니까 상호는 분식집 치떡 쏘면서 말해야겠다. 상호는 드라마의 달콤한 긴장을 몰랐다. 자고로 고백이란 밤의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 애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좋아한다는 말 하나 속살거리는 게 진리건만. 물론 상호의 누나가 남자 아이돌 나페스 썰을 읽으면서 외웠던 진리였다. 상호는 적어도 누나에게 고백하는 법을 물어보았어야했다. 그게 아니라면 부모님의 연애 썰이라도 들었어야했고.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로 상호의 형이 했던 망한 고백 일화라도 들었어야했다. 그랬다면 기씨집안 최악의 망고백이 기상호로 갱신되지 않았을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상호의 고백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냅다 정희찬을 분식집으로 끌고오더니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정희찬 내 남자친구 해줄래.’라니. 상호의 불도저같은 추진력에 희찬은 마시던 물을 뱉었다. 희찬은 치즈 떡볶이를 앞에 두고 떡볶이 만큼이나 빨개진 얼굴로 상호의 고백을 장난으로 치부했다.

“미친 똘게이가!! 상호 니는 와 갑자기 그런 말은 하는기고?! 혹시 이거 쪽팔려 게임이냐?”

“아닌데. 진심인데.”

“아, 싫다!”

희찬은 자지러졌다. 격렬한 거부에 상호는 은근히 시무룩했다. 꼴에 쿨한 남자가 되고싶다고 상호는 더 이상 매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말 없이 치즈 떡볶이를 다 먹은 두 사람은 어색하다고 따로 간다거나 하지 않았다. 기상호가 기상호 한 거지. 희찬은 상호와 작년 겨울에 키스를 한 뒤로 미묘하게 상호를 의식했다. 정작 상호는 그런 때에 쓸 눈치는 다 버렸다. 적어도 무드만 챙겼다면 희찬은 사귀자는 말에 수락이라도 했을텐데. 상호는 다음에 한 번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희찬과 하굣길을 걸었다.

*

상호는 성대에 힘을 주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가늘고 결 좋은 터럭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상호는 자신의 발을 보고서야 개가 된 걸 깨달았다. 이 꿈은 또 오랜만이네. 상호는 몇번씩 희찬의 강아지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서 꾼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호는 바닥에 철푸덕 앉아 뒷 발로 목을 긁었다. 조금 있으면 희찬이 와서 자신을 보아줄 것이다. 뽀삐가 된 상호가 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물건을 어지럽히고 희찬의 발목을 깨물기 뿐. 상호는 꿈 속이라고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더 들이댄다던가 하지 않았다. 천생 이과뇌를 타고난 상호는 꿈 속의 정희찬이 현실의 정희찬과 동일하지 않은 걸 인지하고 있다. 내 꿈 속인데. 그러면 내 욕망만 충족되는거지. 꿈 속에서 성사된다고 그게 현실에서 사귄다고 할 수는 없지. 꿈을 꾸는 상호는 뇌가 반쯤 잠들어있는 사람 답게 흘러가는대로 휩쓸렸다.

상호의 예상대로 희찬은 뽀삐를 부르며 거실로 나타났다. 상호는 대충 컹. 하고 대답했다. 희찬은 낄낄 웃으면서 상호를 품에 안았다. 상호는 희찬의 팔에 안긴 게 불편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희찬의 양반 다리 위에 엎드렸다. 희찬은 상호가 뭐라고 반응하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긁어대었다. 상호는 희찬의 손가락에 푸르르 숨을 뱉었다. 개가 된들 어떠하고 꿈 속인들 어떠하리. 희찬이 개구지게 웃고있는데. 상호는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욕망을 한 껏 즐겼다.

희찬은 상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허벅다리 위에 올리자 희찬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톡 소리가 시끄러웠다. 희찬은 한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다가 양 손으로 바꾸고 메세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희찬이 집중하고 있는 표정을 보며 누구일까 가늠했다. 그래도 제 꿈 속이니 저가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했다. 상호가 아는 희찬의 지인이란 농구부 친구들, 가족들, 같은반 중학교 친구들 뿐이다. 상호가 아는 선에서 희찬이 저렇게 집중할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상호는 호기심에 앞 발을 들었다. 요크셔테리어의 갈색 짜리몽땅한 앞발이 희찬의 손등을 긁었다. 희찬은 상호의 발을 이리저리 피하며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뽀삐야~ 형아 연애사업 방해하면 안되지.”

“왕…?”

상호는 충격을 받았다. 연애사업이라니? 마, 정희찬 내랑 썸 타고 있는데 느그 연애 사업은 또 언제 몰래 시작했노! 뽀삐 모습의 상호는 발광한 개가 되었다. 미친듯이 짖으며 달려들자 희찬은 기겁했다. 희찬은 뽀삐의 이름을 연신 부르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상호는 잇몸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연적의 이름이라도 알아내려 휴대폰에 주둥이를 들이댔다.

[!상호]

순간적으로 고장이 난 상호는 입을 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이름이 왜 여기 있는거지 근본적인 의문이 머리를 덮쳤다. 상호의 뇌는 고장이 났다. 그 사이에 희찬은 휴대폰을 소파 위로 올렸다. 작은 요크셔테리어는 소파 위로 올라가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뽀삐의 몸을 번쩍 들고 주방으로 옮겼다. 희찬은 상호가 간식이 먹고 싶어 그런 줄 아는지 찬장 문을 열고 육포 하나 꺼냈다. 희찬은 제 손 위에 육포를 올리고 상호에게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기다려. 상호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았다. 척수반사인건지 당황한 나머지 지시에 따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희찬은 3초 있다 육포를 내밀었다. 잘했어, 먹어. 상호는 머뭇거리다가 희찬의 손에 올려진 육포를 물었다. 육포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휴지조각 같이 밍밍한 육포를 씹고 나서야 상호는 머쓱하게 꿈 속인 걸 다시 자각했다. 의식이 흐릿해서 그런건지 아님 희찬에 대한 마음이 선명해서인지 여기가 자신의 꿈 속인 걸 자꾸 깜빡했다. 김이 샌 상호는 육포를 짭짭 다 먹고는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다. 강아지의 뽀얀 분홍빛 뱃살이 드러났다. 희찬은 그 배를 만지작거렸다. 강아지 뱃살은 탱글하고 말랑했다. 따뜻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상호는 손길이 귀찮았지만 부러 희찬을 거절하지 않았다.

“뽀삐는 좋겠다. 고민이 없어서.”

자조적인 희찬의 말에 상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어차피 쌍방으로 결론 난 거 아닌 관계인가. 아니면 상호의 꿈 속이니 아마 고백 실패에 대한 기억이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된 걸지도 모른다. 상호는 일부러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사람 말을 할 수 없으니 개의 말로 더 말해보란 의미로 낸 소리였다. 희찬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한쪽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그 손으로 턱까지 괸 희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에 계속 아른거리고, 없으면 한없이 보고싶고. 손이라도 잡으면 속이 시끄러워지고. 근데 기상호 이 똘게이는 장난인 줄 알고.”

“컹!”

“맞나. 원래 그랬제, 상호는.”

“컹컹컹컹!”

상호는 반박했지만 개 울음소리로는 상호의 긴 뜻을 담지 못했다. 결국 상호의 말을 오독한 희찬은 저 좋을대로 상호의 말을 해석했다. 상호는 답답했지만 달리 방법도 없어 희찬의 팔만 벅벅 긁었다. 희찬은 따갑다며 상호의 앞 발을 쥐었다. 상호는 힘을 주어 앞발을 뒤로 빼내었다. 상호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던 희찬은 손쉽게 상호의 발을 놓아주었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뽑아야하지 않겠나. 해야제.”

희찬은 결심한 듯 콧김을 빼내었다. 상호는 희찬의 얼굴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꿈 속이니까 의미없는 거 아닌가. 이곳은 상호의 꿈 속이다. 상호의 꿈 속에서 희찬이 무슨 생각을 한 듯 현실의 희찬은 아무 생각 없을텐데.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아니면 상호가 결심을 해야한다는 무의식적 표출일지도 모른다. 상호는 입을 다물고 다시 드러누웠다. 이젠 내도 모르겠다.

*

“마, 기상호. 니 언제까지 자고 앉아있을낀데?”

희찬은 손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감돌았다. 상호는 텁텁한 모래냄새가 코를 막고서야 무얼 하다가 잠든건지 깨달았다. 지금은 오후 4시였고 훈련이 막 끝난 뒤의 방과후였다. 상호도, 희찬도 체력을 키운다고 한계까지 달린 뒤라 둘 다 기진맥진했다. 상호는 그런 와중에 좀 더 편하게 쉬겠답시고 희찬의 허벅지를 점거하고 누웠던 터였다. 희찬은 짜증을 내면서도 상호의 머리를 털지 않았다. 딱 30분까지만이라며 희찬은 허공을 바라봤고 상호는 희찬의 먼 배경 바라보는 눈을 응시하다가 잠들었었다.

상호는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찬은 상호가 갑자기 일어나자 뭐지, 하는 얼굴로 상호가 하는 양을 관찰했다. 상호는 가만히 앉아서 고민했다. 지금 당장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고백의 가능성이! 희찬이 상호를 부르자 상호는 몸을 훽 돌려서 희찬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볐다. 희찬이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희찬은 깜짝 놀랐으면서 상호를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다. 희찬도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좋았다. 입술이 부벼지는 순간이 단지 순간이 아닌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상호는 제가 만족할 때까지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니는, 언제까지 모른 척 할건데?”

희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상호는 희찬을 양 손으로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반드시 답을 듣겠다는 상호의 단호한 의지였다. 희찬은 이제 도망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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