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같이 사는 중

가비지타임 | 최종수X박병찬

※ 프로농구선수 사귀는 종이뱅이의 일상

시간 순서가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몇 편 더 추가 될 예정(아마도)

※ 현재까지 약 1만 2천자


갈색머리

종수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 텔레비전으로 연결한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농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곧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띡띡 울렸다. 박병찬이다. 종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그 사이에 제 손으로 어색하게 머리를 넘겼다가 다시 헝클인다. 누군가가 집에 들어올 때, 집안에 있던 사람은 현관으로 나와서 인사를 해준다. 병찬이 시작해서 종수도 따라 하게 된 습관이었다. 병찬은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도 종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고무장갑을 벗고 단숨에 현관 앞으로 왔다. 종수야 왔어? 문을 열고 들어온 종수를 보며 히이, 웃어준다. 병찬의 매일매일의 기분은 종수가 알 수 없다. 늘 좋아보인다.

오늘도 그럴 것 같았다. 문이 열렸고, 병찬이 들어오며 현관 앞에 서 있는 최종수의 발만 본다. 마트에 들렸다 오는지 짐을 건넨다. 종수가 받아든다. 아이고, 피곤하다. 종수야 형님 오셨다. 그렇게 말하며 신발을 대충 벗는다. 현관에 들어선 병찬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제가 건넨 짐을 받아든 종수와 눈이 마주친다. 병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끔벅인다.

……누구세요?”

“아.”

“뭐야. 종수 너 미용실 갔다 왔냐?”

……많이 이상해?”

병찬은 바로 대답했다. 어, 아니? 야 자세히 좀 보자. 병찬은 후다닥 안으로 들어와 어두컴컴한 거실 불을 환하게 켰다. 갑자기 환해져 눈을 잠깐 찡긋거리는 최종수는 병찬의 눈에 익은 검은 곱슬머리카락이 아니다. 갈색 곱슬곱슬머리로 변해 있었다. 종수 주변의 공기에서 미용실 특유의 파마약 냄새도 난다. 종수를 위아래로 훑어본 병찬은 히이 웃었다. 아 뭐야뭐야. 병찬은 손도 안 씻고 최종수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마구 만진다. 하지마! 종수가 어깨로 손을 쳐내자 병찬이 또 윽하하하하 웃는다. 종수에게 들려 있던 짐을 다시 받고 냉장고 앞으로 가져간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장 본 것들을 한꺼번에 쑤셔 넣은 후 종수에게 다시 온다. 둘은 소파에 앉는다.

“머리 이쁘다, 야.”

“만지지 말고 손이나 씻고 와.”

“참나 깐깐하긴.”

병찬은 연하남친의 말을 잘 듣는다. 화장실로 직행하자 쏴, 물소리가 들린다. 종수는 부끄러워서 핸드폰의 검은 액정에 자신의 머리를 본다.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겠어서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 앞에 앉아 병찬이 쑤셔 넣은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병찬은 푸른잎 채소와 버섯, 깐마늘, 쌈채소, 라면묶음, 타임세일 초밥, 달걀, 소화가 잘 되는 칼슘우유를 사왔는데 그걸 다 냉장고에 아무렇게나 넣어뒀다. 종수는 미간을 찡그리며 라면을 꺼냈다. 그 사이에 손을 씻고 겉옷을 벗어둔 병찬이 종수 옆에 쓱 다가와 앉는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종수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문다. 종수는 얼굴이 빨개져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뭐야. 내가 하지 말랬지.”

“너 이런 컬러가 얼굴에 잘 맞네. 초코색 푸들 같아.”

“내가 분명히 말했어. 하지 마.”

“어쩌다가 미용실에 간 거야?”

종수는 냉장고에 살짝 오래 방치된 반찬들을 잘 보이는 곳으로 꺼내둔다. 채소칸에 든 오이와 깻잎과 절반 잘린 애호박으로 박병찬이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 생각한다. 연인은 귀찮게 달라붙어서 계속 갈색 곱슬곱슬머리카락을 만진다. 종수는 병찬에게 채소 뭉텅이를 내민다.

“쌈채소는 왜 샀어?”

“고기 먹게.”

“고기 안 들었던데.”

“아, 깜빡하고 정육코너 안 들렸나?”

태평한 소리 한다. 종수는 냉장고를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를 끝내고 일어난다. 병찬도 따라서 일어났다. 미용실 왜 갔어? 너 평소에는 그냥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고 올 때가 더 많잖아. 종수는 부엌 구석에 굴러다니는 장바구니를 쭉쭉 펼쳐서 접는다.

“엄마 친구가 청담동에서 미용실 하는데…….”

“응.”

“거기 미용실에 연예인 전문샵 되면서 사람들이 진짜 많거든.”

“종수야 앞에 내용 다 자르고 본론만 말해주면 안 돼?”

……엄마 친구분이 하시는 미용실에서 헤어 모델 하고 왔어.”

병찬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학학학 웃었다. 종수가 머리 염색 하나 한 것만으로 사람이 이렇게나 즐거워 하다니. 어디 가서도 박병찬은 최종수의 애인 티를 숨기긴 힘들겠다. 병찬은 평소보다 더 빠안히 종수를 본다. 좋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종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오늘 갑자기 불려간 거야?”

“응. 오전에 엄마한테 전화 와서.”

“그러면 나한테도 말해주지. 너 머리하는 거 사진 보내달라고 했을 텐데.”

병찬은 종수의 곱슬곱슬하게 구부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졌다. 병찬의 손끝에 종수의 갈색 머리카락이 몇 갈래로 갈라진다. 병찬의 손에서는 레몬향의 손세정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너 웃을까 봐.”

“웃으면 안 돼? 비웃는 것도 아니고 예뻐서 웃는 건데.”

“그냥. 사진 찍는 것도 좀 그렇고.”

“이건 무슨 펌이래?”

“몰라. 거기서 샘플 만들어야 하는 남자 연예인 머리로 한 거래.”

“사진도 찍혔어?”

“유튜브에 영상 올라가는데 얼굴은 가려주겠대.”

“기럭지가 최종수인데 얼굴 가린다고 퍽이나 모르겠다, 사람들이.”

“모를 걸. 그냥 키 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말 것 같은데.”

“오냐 그래그래. 우리 종수도 머리하니까 진짜 연예인 같다.”

가끔씩 ‘최종수’는 병찬의 핸드폰에 얼굴을 들이민다. 농구 경기를 할 때 뿐아니라 광고를 촬영 후 관련 영상이 업로드 될 때가 있다. 종수가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자라서 계정을 공유하는 병찬은 종수의 M신사 셋업 수트 광고를 일부러 직접 찾아봐야 했고, 찾아본 광고 때문에 한동안 두 사람의 인스타그램 광고는 M신사 광고만 엄청나게 쏟아졌다. 이제 또 한동안 최종수 머리 관련으로 남자들이 미용실을 드나들게 될까? 최종수 셰도우 펌 한 거 맞나요? 맞으면 니가 뭘 어쩔 건데요. 그런 대화를 상상해본다. 병찬은 히죽대며 어깨를 들썩들썩거린다.

“고기 사러 가야지.”

종수의 말에 병찬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병찬이 소파에서 일어나 종수에게 물어본다. 같이 갈까?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근처 정육점 갈까 아니면 그래도 좀 큰 마트 갈까?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가 어색한 제 갈색머리를 만지작거리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다.

“야, 신경 쓰지 마. 예쁘다니까.”

병찬이 종수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만지려고 손을 뻗었을 때 종수는 고개를 아래로 숙여주었다. 병찬은 어렵지 않게 종수의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과 파마약을 먹인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병찬은 종수의 이마에 뽀뽀했다. 정말 예뻤다. 고기 없이 쌈채소만 씹어 먹어도 될 만큼 종수가 예뻤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오후의 침대방. 병찬은 책을 읽고 종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수는 이어폰도 한쪽을 끼고 영상을 봤다. 댓글을 읽다가 또 혼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액정을 노려본다. 병찬이 페이지를 넘길 때 종수도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병찬보다 종수의 손길이 훨씬 부산스럽다. 이어폰 소리를 줄이거나 연락이 왔을 때 바로 답장을 해주거나, 뭘 읽고도 답장을 안 하거나, 광고 문자는 삭제도 좀 하고 혼자 바빴다. 종수가 액정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으면 병찬은 팔을 넓게 펼친다. 최종수의 콧등과 이마 사이로 오른손이 살포시 내려와 짙은 눈썹 사이를 살살살 펴준다. 그러면 종수는 긴장했던 어깨도 쭉 내려가고 한숨을 푹 쉰다. 병찬은 그런 종수를 이해 못하는 건 또 아니어서 내버려두게 된다. 종수는 핸드폰 속 화면을 계속 응시한다. 병찬이 페이지를 넘겨도 계속 보고 있길래 뭘 보나, 흘긋 봤더니 자신의 실수가 많았던 이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날이었다. 감기몸살로 이마에 열이 끓는데도 곰처럼 무식하게 식은 땀을 쭉쭉 흘리며 코트에 나가서 3쿼터 내내 뛰다가 마지막에 벤치로 들어와 봉지에 먹은 물까지 다 토했다. 4쿼터 때 종수 대신 뛰었던 그 막내선수는 그 마지막 쿼터에서 혼자 날아다니며 15점차로 벌려놓고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날의 경기가 감독의 마음에 들었는지 이제 주전으로 꼽혀 현재는 종수와 스타팅 멤버가 되었다.

그날 경기를 뛰고 종수는 옷도 못 갈아입고 전화로 병찬을 불렀다. 손가락이 얼얼해서 자판을 못 치겠다는 게 이유였다. 병찬이 차를 몰고 혼자 훌쩍거리고 있을 종수를 데리러 갔다. 종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지금 병찬과 함께 앉아있는 이 침대에서 꼬박 사흘 동안 끙끙 앓았다.

병찬은 아픈 종수를 생각하면 어째 막막하기도 하고 좀 안타깝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몸뚱이가 재산인 선수들이 몸 관리를 안 해서 경기를 엉망으로 하면 안 되니까 ‘아픈 것도 자기관리 못한 것’이라는 말은 체육계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었지만. 병찬도 종수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말이었지만! 그러나 정작 아플 때 그런 말을 듣는 건 사람이 퍽 서러워지기 좋은 말이어서. 종수는 아파서 우는 건지 서글퍼서 우는 건지 계속 울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병찬을 불렀다. 박병찬. 약도 못 먹겠어. 입맛이 하나도 없어. 너무 아파…….

병찬이 옆으로 슬쩍 책을 내밀었다. 종수는 화면에서 눈을 떼어내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뭐야? 하고 묻는 듯이 날카로운 눈이었다. 또, 또 못 된 눈이다. 또. 병찬은 피곤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침대 이불 속에 파고 들었다.

“종수야 이거 읽어줘 봐. 형 노안 와서 눈이 뻑뻑해.”

종수가 짜증스러운 듯 병찬을 밀어냈다. 병찬은 밀려나지 않는다. 종수의 가슴 위로도 이불을 둘러주었다. 이전의 ‘정말로 농구를 잘하던 감각’은 병찬에게 거의 다 잊혀졌으니 스스로 성실하게 노력해서 잘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잘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병찬은 분명히 잘하게 된다. 상대 팀을 제치고 시원하게 덩크를 넣고 림을 잡은 채 두 발로 살짝 내려오는 느낌마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 병찬과 다르게 종수는 자신이 제일 못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실패를 보상하듯 농구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농구를 못했던 저 경기를 땔감으로 만들어 제 안의 불을 붙이고 재가 될 때까지 뛰는 타입이었다. 장도고등학교 농구부에서 뛰던 때엔 국내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동기부여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게 종수에게 효과가 꽤 좋기도 하다. 실제로 이번에 새로이 스타팅 멤버로 뽑힌, 최종수의 대타로 뛰었던 그 선수는 여전히 종수의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빛에 가려져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으니까. 종수의 질투와 열등감. 불안…….

병찬은 손으로 종수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흠칫 놀란 종수가 꽥 소리를 지른다.

“아 진짜,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저리 가.”

“넌 노안 온 형이 불쌍하지도 않냐?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주라니깐.”

“처 자, 그냥.”

“어허 우리 종수. 형님한테 말뽄새가 나쁘구나.”

병찬이 이불 속을 파고들어 종수를 간지럽힌다. 아 하지 마. 종수는 간지러워 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워 하는 듯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종수는 병찬의 손을 피하려다가 침대 아래로 데굴,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에 병찬이 아하하 웃었다. “안 다쳤어, 종수야?”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병찬에게 종수가 냅다 소리쳤다.

“너 손가락 분질러 버릴 거야, 진짜!”

외치고도 본인이 더 놀랐는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실수인 척 밟아서 네 손가락 분질러 버린다’는 말은 트래쉬 토크 레퍼토리 중 하나였고 종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병찬이 코트 위에서 듣는 말이었다. 종수도 예상하겠지만 병찬에게 들먹거리는 트래쉬 토크 넘버원은 다리 병신.

병찬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종수가 입까지 틀어막는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이라는 게 무섭다. 뱉어버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래서 병찬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 아래의 종수에게 손을 뻗었다. 쓸쓸해진 표정의 종수는 귀여운 맛이 있다. 종수는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또 한 편으로 신경질 긁는 데엔 도가 튼 연인의 손을 잡아쥐고 침대로 올라왔다. 병찬이 종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우, 종수 네가 너무 놀라니까 내가 다 당황스럽네. 괜찮아, 괜찮아. 운동선수는 그런 기세가 있어야지.”

“박병찬. 너 왜 자꾸…… 자꾸 나 건드려? 내가 하지 말랬잖아.”

“뭐래냐. 최종수가 하지 말라는 거 다- 들어줬으면 이 형아는 너랑 연애도 못 했어, 인마.”

“그거 말하는 게 아니잖아.”

“엉, 시끄럽고. 핸드폰 그만 보고 옆에서 책이나 읽어줘.”

결국 국가대표 농구선수 최종수의 보이스로 책에 인쇄된 문장을 읽는다. 실시간 박병찬 1인 한정 오디오북서비스. 병찬은 평소와 다르게 최종수의 왼쪽 팔 안쪽으로 몸을 구겨서 집어 넣고 가슴과 어깨 사이에 뺨을 댄다. 병찬이 읽고 있던 책은 일본 작가가 쓴 유명한 소설이었다.

병찬의 노안 연기는 뻥이다. 책을 읽다 보니 종수도 대충은 알아챈 느낌이었다. 구라쟁이. 말을 속으로 삼킨다.이번에는 병찬을 밀어내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하나로 자라나는 두 그루의 나무처럼 붙어 있다.

종수가 매몰되어 가는 마음의 세계를 이해한다고 해도 병찬은 종종 그 세계에서 종수를 건져올려 준다. 종수를 세상 모든 것과 차단하고 자신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는 일을 떠넘긴다. 종수는 책을 계속 읽어준다. 병찬은 종수의 듣기 좋은 음성이 책을 읽을 때엔 억양이 딱딱해져서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종수는 제 팔에 병찬의 콧김이 닿는 걸 느끼며 문장을 느릿느릿 읽어내려간다. 이미 병찬의 눈은 페이지 끝에 머물러 있다.

“종수야. 방금 대사 실감나게 연기해줘.”

“싫어.”

양말

최종수는 박병찬과 살면서 집안일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병찬이 ‘내가 다 할 테니까 종수 너는 안해도 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종수도 집안일은 할 수 있는데 병찬이 다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종수네 부모님이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할 수 있는 구축 아파트 쓰리룸을 대출도 없이 전세로 계약해주셨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을 이리저리 쪼개서 겨우 방 세개를 만들긴 했으나 구축이라 방음이 좋댄다. 종수와 함께 살기로 했을 때 처음 생각했던 병찬의 예상과는 사뭇 비껴나간 결과였다. 병찬은 쓰리룸 아파트는 생각도 못했는데.

아파트에 내는 관리비 약 25만원. 이것도 최종수가 통장에 계약일에 맞춰서 자동 이체를 걸어뒀댄다. 심지어 세대 내 수도세와 전기세 등등 모두 계산 되어 관리비에 포함되어 나온다. 여름의 에어컨 비와 겨울의 난방비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자잘한 금액은 병찬이 내려고 하는데 결국 식비다.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박병찬의 보험비나 소액을 넣고 있는 청년청약 같은 건 더는 중요한 게 아니다. 병찬은 자신에게는 달리 큰 즐거움도 없는 식사를 종수를 위해 기꺼이 참여한다. “종수야. 너 지금 당장 폰에서 배달 어플 지워. 내 폰에서 내 카드로만 결제하게.” 병찬이 늠름하게 어깨를 펴며 말하자 종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야. 너 없으면 난 어떻게 주문해서 밥 먹으라고.”

박병찬의 마음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뭐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아직 연애 사실을 밝히지 못한 남자친구와 같이 살기로 하며 반쯤 독립하려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선물주고 싶은 게 있다면 뭘까. 결국 서울살이에 제일 중요한 집이다. 에어컨과 세탁기는 오래 되었지만 깨끗하게 썼다며 집주인이 싸게 팔았고 집에 없는 냉장고랑 서큘레이터는 또 새로 샀댄다. 자신과 함께 살 집을 최종수가 부모님과 보러 다니고 혼자서 계약하고 올 줄 알았으면 병찬은 같이 안 살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와서 네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게 싫다, 이러면 내가 네 눈치를 많이 봐야 하지 않냐 그런 말은 안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최종수와 그의 가족들 나름의 최선이 이런 형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병찬은 뭘 해야 하나.

“집안일은 내가 다 할게.”

“뭐? 왜? 너 청소 잘 해? 너 전에 원룸 개 드럽게 사는 거 내가 보고 얼마나 충격……”

“그…… 종수야 형아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않겠니.”

병찬은 가슴에 손을 얹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해보고, 내가 너무 어렵거나 네 마음에 썩 안 차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조율해보자. 형아는 한다면 하는 남자다, 종수야.

그렇게 병찬은 이 집에 제 옷이 든 캐리어 하나만 덜렁 들고 온다. 병찬은 종수와 살기로 결정하면서 무엇을 상상하고 원했던가. 이제 그런 건 다 상관없다. 이곳은 최종수의 집이고 박병찬은 몸만 온 셈이다.

*

베란다에 빨래건조대에서 널어놓은 양말과 수건을 손으로 만져본 후 병찬은 옆에 세워둔 작은 바구니에 담아 거실 안으로 돌아온다. 종수는 이미 거실 바닥에 앉아서 병찬이 마른 빨래를 바닥에 놓아두길 기다리고 있다. 병찬은 친절한 표정으로 종수 근처에 수건과 양말을 한 가득 내려놓는다.

“안 비키냐. 내가 한다니까?”

“너 전에 내 셔츠 뜨거운 물로 빨아서 작아졌잖아. 하나하나 다 검사해야 해.”

“아…… 네네 그러셔요.”

병찬은 다시 베란다 안쪽으로 들어가 남은 수건과 양말과 티셔츠를 꺼내왔다. 구축 베란다에는 작은 통돌이 세탁기가 있었고 건조기는 따로 없었다. 건조기는 여름과 겨울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전이라고 종수가 강조해서 말했지만 병찬은 듣는 척도 안 했다. 듣는 척 안 했더니 종수가 통보했다. 사는 게 별로면 대여하는 걸로 했다고. 요즘은 가전도 구독할 수 있다며 다음주에 설치기사님이 오신다고 했다. 이 빨래는 병찬이 아마 마지막으로 손수 건조대에 널은 빨래가 될 것이다. 병찬은 건조대를 접어 구석에 세워두고 돌아왔다. 종수는 이미 양말을 개고 있었다.

“종수야. 이렇게 사람이 점점 기계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어떡하냐.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너 혼자 타임머신 타고 석기시대 가서 고인돌 쌓으면서 살던지.”

“그러다가 나중에 농구하는 기계가 생기면 너 어떡할 건데.”

“농구하는 기계가 왜 생겨. 스포츠는 사람이 하는 건데.”

“그럼 이세돌이랑 알파고는 바둑 왜 뒀는데?”

투닥투닥 말을 이어가며 꼬투리가 길어진다. 남자 둘이, 매일 같이 운동 하며 아침 저녁으로 씻어대니 수건이 산처럼 쌓여 있다. 종수는 수건을 두 개 썼다. 몸 닦는 수건과 얼굴을 닦고 머리를 말리는 수건. 병찬은 그런 거 없고 수건 하나로 머리카락과 몸과 발바닥까지 전부 닦았다. 수건은 몇 개를 사도 모자란 것 같았다. 딴 생각에 빠진 병찬은 하얀 양말에 회색 빛 먼지가 묻은 줄 알고 탈탈 털었다. 그러나 먼지가 떨어져 나가지를 않는다. 병찬이 다시 본다. 구멍이다. 깨끗한 흰 양말에 회색빛으로 안쪽 천이 드러나 보일 만큼 큰 구멍이 난 것이다. 병찬의 양말이 아니다. 병찬은 이번에 양말을 살 때 발목에 브랜드 로고가 박힌 걸로 몇 켤레 산 게 전부다. 이건 종수의 양말이었다. 매끈하고 도톰한 게, 얼마 전에 잔뜩 산 새 양말 같았다.

……종수야. 이거 양말 빵꾸 났다.”

종수는 느릿느릿 수건을 개다가 고개를 들었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건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불편한 표정으로 변했다. 종수는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개진 채 병찬의 손에서 양말을 빼앗았다.

“버릴 거야.”

“응?”

“버릴 거라고.”

병찬은 그제야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종수가 옆으로 밀어둔 양말을 병찬이 허리를 숙여 가져왔다. 종수가 버리겠다는 양말은 정말로 일주일 전에 산 양말이었다. 이 정도면 사실 종수가 구매한 양말의 질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병찬은 그저 웃겼다.

“야아, 멀쩡한 양말인데 왜 버려?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네가 한 무더기 주문한 양말 아니야?”

“구멍난 양말을 어떻게 신어.”

“아이고 뭔 소리야, 종수야. 갑자기 또 최 도련님 빙의했냐.”

그리고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구멍난 가슴에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어어 흐어어 잡아보려해도오, 가슴을 막아도오,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이다. 구멍 말고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노래 선곡에 종수는 미간을 꽉 찡그린다. 병찬이 짜증스럽다.

종수는 손도 크고 발도 크다. 손가락도 길고 매번 가지런히 정돈해두는 손톱도 크고 발가락은 뭐 말할 것도 없다. 농구는 뛰기도 많이 뛰는데 버티는 힘도 필요하다. 가만히 서서 상대 팀이 힘으로 밀어붙일 때 잘 버텨내고 공을 패스하거나 그들을 추월해야 한다. 농구화 안쪽에서 양말은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 결국 최종수가 뭘 크게 잘못하지 않아도 엄지 발가락 쪽에 뻥 구멍이 나기도 한다. 국산 양말이 질이 좋고 도톰하지만 발 모양새가 날카롭다는 이유로 구멍이 날 때도 있으니까. 병찬은 마른 빨래 속에서 구멍난 양말을 찾기 시작한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야 종수야. 형아가 양말을 단단히 꿰매주마.”

“뭐? 됐어. 대량으로 산 양말이라 그럴 필요 없어.”

종수의 말은 또 못 들은 척 하고 병찬은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야. 저녁 드셨죠. 나? 나도 잘 챙겨 먹었지. 응응. 아 엄마 드라마 보는 중이야? 어 나 짧게 물어볼게. 바느질 해야 할 일 생겼는데 반짇고리? 그런 건 어디서 팔아? 다이소? 아 다이소에 파는구나. 봉제 인형 파는 곳? 어 알겠어. 응 엄마도요. 또 전화 할게. 병찬은 전화를 뚝 끊고 핸드폰으로 시계를 본다. 이제 막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매장 문이 닫힐 때까지 시간은 넉넉했고, 세대 수 많은 구축 아파트 주변이라 근처에 삼층 짜리 다이소가 있었다.

“종수야. 다이소 다녀 오자.”

“너나 가.”

“그래. 빨래 다 개고 나가자. 너 먼저 옷 갈아 입어도 돼.”

“안 간다고.”

“야 우리 다이소에서 뭐 살 거 없었나? 너 빨래 개지 말고 유튜브에 다이소에서 사야 하는 추천템이나 찾아 봐.”

*

병찬과 함께 도보를 걸으며 종수는 밤바람이 끈적하긴 해도 한결 편안해졌다고 느꼈다. 차 한 대가 느리게 지나갔다. 신호가 바뀌자 라이더박스에 배달 전문 브랜드 로고가 붙은 오토바이가 여기저기서 질주한다. 주중의 늦은 저녁을 챙겨먹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병찬도 바람이 시원하고 좋은지 낮게 콧노래를 부른다. 한손에는 집에서 챙겨온 장바구니에 가벼운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다.

병찬은 결국 반짇고리 하나 사러 왔으면서 끝내 계산대에서 2만 8천원이나 카드를 긁었다. 제품명이 쭉 적힌 흰 영수증이 목도리처럼 길었다. 병찬은 집밖을 나서기 전에 종수와 함께 스마트TV를 켰고, 유튜브로 들어가 한 주부가 정리해둔 ‘다이소 추천템 종결편’을 끝까지 다 보고 나서야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땐 이미 시간이 9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종수는 도로 안쪽에 서서 털레털레 걷는 병찬을 따라 걷는다. 앞서서 걷던 병찬은 종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다.

“종수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고민하느라 대답이 늦은 종수를 거리에 내버려두고 병찬은 쌩하니 사람 없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혼자 이 길을 지나칠 땐 아이스크림은 생각도 안 나는데, 둘이서 같이 산책하면 꼭 저 가게를 들리게 된다. 저렴한 아이스크림을 신기한 듯 구경하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더라도 둘은 이 가게에 슬그머니 들어가 본다. 아이고, 요즘 이런 무인가게에 도둑질 하는 애들이 많아서 점주들이 진짜 머리 아프다더라. 병찬은 가게 문 앞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적힌 경고문을 눈으로 읽어보며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차고는 했다.

병찬은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좋아하지 않았으나 종수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자주 군것질했다. 종수는 체중을 유지하고 근육을 관리하는 중에는 단 것은 아예 먹지 않았다. 그러나 병찬이 아이스크림 먹자고 말하면 졸래졸래 따라가서 아이스크림을 고른다. 병찬은 종수가 고른 소다맛 뽕따 꼭지를 달라고 졸랐고 종수는 뚝 분질러서 병찬에게 준다. 그렇게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 찬찬히 돌아오는 길에 천둥이 친다. 쿠르릉,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 병찬이 씹던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먹어치운다. 뭐야. 번개 쳤나? 한쪽 손에 장바구니와 아이스크림 막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수의 빈 손을 잡는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계절은 서서히 바뀌어 간다.

“어휴, 종수야. 비 오겠다. 얼른 들어가자.”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병찬은 종수에게 요즘 진짜 날씨가 이상하다고 투덜거렸다. 영 오락가락 한다고, 너도 외출할 때 날이 맑더라도 삼단우산을 꼭 챙겨다니라고 거듭 말하는 병찬은 진지했다. 종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꽉 잡힌 손을 놓지 않아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친하게 지내는 농구선수 두 명이 이 아파트에 산다는 걸 아는 주민도 있고 모르는 주민도 있겠지만 종수는 병찬과 자신을 이 건물의 누구도 모르면 좋겠다. 슬쩍 병찬의 손을 놓으려는데 병찬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습기 탓에 삐질삐질 땀 흘리는 옆얼굴이 진지한 박병찬. 매일 같이 종수에게 헛소리 해도, 진실되고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도 사실은 모든 게 다 진지한 박병찬이다. 웅웅 소리내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종수의 먹다만 소다맛 뽕따는 손 안에서 다 녹아버렸다. 형태를 잃은 아이스크림은 미끈한 쭈쭈바 튜브 포장 안에서 찰랑찰랑 하늘빛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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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종수는 처음엔 이게 뭔가 했다. 병찬이 새벽 늦은 시간까지 침대로 오지 않아서 종수는 먼저 자버렸고 병찬보다 먼저 일어나서 양말 다섯 짝을 보고 있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병찬은 엉성하고 조잡한 솜씨로 종수의 양말 구멍을 꿰매뒀다. 흰 양말에 빨간색 실을 삐뚤빼뚤 박아 넣었다. 종수가 양말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보니 일단 구멍은 막혀 있었다. 일단은. 기능은 제대로 하는데 예쁘지가 않았다. 왜 하필 빨간색 실을 고른건지. 같이 반짇고리를 고를 땐 분명 무난한 색상의 실이 있는 걸 보았는데. 종수는 옆에서 자고 있는 병찬을 깨워서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양말을 목 아프게 내려다 보았다. 막 눈을 뜬 탓에 머릿속이 흐릿했다. 빨간실이 구멍이 없는 부분까지도 침범해서 존재를 드러내는 하얀 양말. 뭐지, 바보 라고 쓴 건가. 눈을 비비며 양말을 본다. 종수에게는 버려도 되는 양말이었는데. 그러려고 애초에 많이 산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제 박병찬이 종수가 가진 의류를 아무 것도 버릴 수 없게, 언제라도 제 옷과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어 줄 것처럼 실과 바늘을 사버렸다. 자꾸 그렇게 굴어대니까 종수의 구멍난 가슴도 그 형이 꿰매줄 것처럼 믿게 된다. 이 허술한 손재주가 나중에는 좀 볼 만 해지려나.

종수가 한참을 들여다보니까 그건 하트였다. 정확히는 하트 모양으로 기우려고 노력한 박병찬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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