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취중어택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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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https://pnxl.me/za5yrx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때와 또 달랐다. 엉덩이 붙이면 자고 일어나면 공 튀기던 때와 달리 수업은 실전이고 시험은 심판이다. 그렇다고 본업인 농구까지 놓칠 수는 없기에 머리 깨지게 공부하고 몸이 박살 나도록 운동해야 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꿀잠자느냐? 당연히 아니다. 갓 성인이 된 그들은 성인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꾸역꾸역 모였다. 서교대 앞, 주익대 앞, 무슨 대 앞. 대학교 이름이 붙은 지하철역은 죄다 휩쓸었지만, 준향대 앞만큼은 가지 않은 게 전영중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준향대에는 걔...... 가 있으니까.

열렬했던 고백이 대차게 까이고 전영중의 사랑도 끝났다. 어제 내 세상이 무너졌어. 고백했는데 걔가 거절했어. 한순간에 남처럼 돌변하더라. 원래 남처럼 대하긴 했는데 어쨌든 웅앵. 목숨 호록 당할뻔한 미성년자 전영중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주일을 새벽마다 대모산으로 달려갔다. 산신령님 좀. 바나나 드시고. 오늘은 사과에요. 올해 마지막 망고입니다. 몸을 돌리자마자 사라졌던 과일이 파인애플에서 거절당했다. 징한 새끼. 작작 하라는 듯이.

그렇게 열심히 준향대를 피했는데 준향대의 그 형은 오늘도 술자리에 껴있었다. 조형 21번. 협회장기에 느닷없이 나타난 기대주... 였다 무릎이 박살 나고 쌍용기에 개같이 부활한 불사신.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리는데 의외로 연락처를 튼 동기는 얼마 없었다. 그런데도 온갖 술자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이 기인의 인맥은 신입생이 아니라 3학년 선배들에게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뻗어있었다. 준향대 그 형, 박병찬.

 

"또 보네!"

"안녕하세요, 형."

 

전영중은 박병찬이 껄끄러웠다. 플레이 매너 좋고 군더더기 없는 성격 탓에 대체로 만인의 형 취급 받는 박병찬이지만 그랬다. 매치업 한 번 안 해봤으니 거리감 +1. 간간이 튀어나오는 우리 팀 슈터, 지상고 친구, 준수가...... 할 때면 호감도 -10.

 

"원중 영중이!"

 

여기서 폭력성 +50. 동글동글한 라임이 죽인다며 원중영중이로 절대음감 게임을 했을 때는 씨발, 솔직히 한 대 칠 뻔했다. 3학년 선배들이랑 아는 사이만 아니었어도 분명히 쳤다. 그날 전영중은 간만에 생기를 잃은 채 알코올로 간을 적셨다.

하여간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박병찬은 몸 관리라며 술도 안 마시는 주제에 술자리면 꼭 꼈다. 술 게임은 기가 막히게 잘하고, 걸리더라도 술 대신 벌칙으로 노래를 신명 나게 불러서 기어코 기립박수를 받는다. 조건 없이 흑기사 자청하는 미친놈들도 한 타였다. 그리고 조재석 버금가는 인맥으로 한 자리에 30분 이상 있질 않고 테이블을 옮기는데,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이 있다. 제정신이 아닌 형.

박병찬의 합류로 급격히 술자리에 재미를 잃은 전영중은 슬그머니 제일 먼 자리로 옮겨 김치찌개에 주먹밥으로 식사에 가까운 음주를 했다. 전영중 미친놈아, 네가 주먹밥 리필해 와라. 동기의 구박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접시에 주먹밥을 산처럼 쌓아 돌아가는 길이었다.

 

"준수가 또?"

 

준 수 가 또.

네 글자가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아는 이름이어서가 아니라, 주변이 시끄러워 박병찬이 거의 소리 지르듯 통화 중인 탓이었다. 진짜로.

반대편 귀를 막고도 잘 안 들리는지 인상 썼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영중은 아무 데나 주먹밥 접시를 내려놓고 뒤를 따랐다. 그 준수가 내가 아는 준수겠지.

 

"종로?" 준수도 종로에 있대요?

"응, 근처니까 금방 갈게. 미안하기는 무슨." 왜 형이 걜 챙기러 가요?

"당연히 내가 해야지. 조금만 기다려." 그게 왜 당연해요?

"영중이, 왜?"

"둘이 사귀어요?"

 

급발진에 박병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핸드폰을 보여줬다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막 통화가 종료된 화면에 노수민 세 글자가 떠 있다.

 

"수민이랑 그런 사이 아닌데."

"아니, 노수민이 아니라 주... 준......."

"준수?"

 

차마 맞다고 대답할 수 없어 전영중은 침묵하기로 한다. 아하. 시야 넓고 눈치 빠른 박병찬이 씩 웃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

"근데 왜 형이, 준, 걔를......."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준수 두 음절이 한번에 나오질 않는다. 무슨 나쁜 말을 처음 하는 어린애처럼 버벅거리는 전영중을 향해 턱을 치켜든다.

 

"네가 신경 쓸 일인가?"

 

이래서 전영중은 박병찬이 싫었다. 쓸데없이 남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물고 늘어진다. 박병찬이 쓸데없이 선수처럼 굴면 전영중도 봐줄 필요가 없다. 시합용 멘탈을 장착한 전영중이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다. 박병찬 대 전영중, 첫 비공식 매치업. 물론 전영중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네. 저 준수랑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데요."

"그래도 나 혼자 가는 게 좋겠다. 준수도 만취해서 우는 모습 초등학교 동창한테 보이긴 싫을 거 같은데?"

"울어, 네? 준... 수가요?

 

성준수가? 만취? 해서 울어? 함께할 수 없는 단어 셋이 조합된 문장에 뇌가 입력을 거부했다. 삑. 캐붕입니다. 테크니컬 파울 선언을 위해 심판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응. 준수 고삐 풀릴 때까지 마시는 스타일인데 주사가 우는 거라서. 준수 성격 알지? 다른 애들한테 보이긴 싫은지 나한테 매달리더라고."

"형이 뭔데요!?"

 

파울 선언하기도 전에 전영중은 알아서 자살골을 넣었다. 목소리가 뒤집어지도록 외치는 소리에 홀의 모두가 흘끔 돌아보았다. 박병찬은 최종수 앞에서 덩크를 꽂았던 그날처럼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뭐 그냥 가끔, 같이 땀 흘리고 한방에서 잔 사이?"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박병찬은 철저하게 전영중 놀리기에 몰입해 있었고, 땀 흘리고 한방에서 잔 건 조형고와 지상고의 합동훈련 때문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전영중은 당연히 속아 넘어가다 못해 기절하고 싶었다. 아니면 저 형을 기절시키든가.

 

 

 

박병찬의 거절에도 전영중은 끈질기게 뒤를 쫓았다. 준수에게 미련......도 있지만, 반년이 넘어가는 제 소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성준수가 저 때문에 울게 해주세요. 일주일을 끈질기게 빌었던 소원. 산신령에게 버림받고도 별똥별은커녕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낀 하늘을 보며 빌었던 소원. 아직도 밥 먹을 때, 과제 할 때, 공 튀길 때 종종 떠올리는 바로 그 소원. 성준수가 나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 나는 걔 때문에 몇 번이나 울었는데. 여지만 주고 뻥 찬 나쁜 놈이 한 번이라도 울어야  수지가 맞지!

 

"병찬 형! 여기요!"

 

노수민의 어깨에 팔을 감은 성준수는 널려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병찬 형이란 말에 팔을 풀고 비척비척 걸어오더니 슬그머니 박병찬 옆에 선 전영중을 무시하고 정확하게 그에게 팔을 둘렀다. 성준수가. 박병찬에게. 폭 안기다 못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준수, 뭐 하는 거야. 박병찬 형 무겁잖아."

 

뒷덜미를 잡아채자 그새 어깨에 눈물자국 두 개가 찍혔다. 별 반항 없이 잡혀 온 쪽에서 흐윽,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맛이 간 눈 한 쌍이 이쪽을 쳐다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눈물을 달고서.

대모산 산신령님 이과세요? 나 때문에 울게 해달라는 소원이 내가 빈 소원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아니, 그것도 맞는데, 우는 이유가 나 때문이어야지! 독해 능력이 그렇게 떨어지세요? 혹시 외국산이세요?

 

"씨바거. 뭐야 이 새끼."

 

갑자기 눈물이 쏙 들어간 성준수가 전영중의 쳐냈다. 아, 술 깨네. 말과 달리 몸은 비틀거리다 지저분한 건물 외벽에 그대로 쿵, 머리를 박는다. 대각선으로 선 성준수가 해명해 보라는 듯 박병찬을 본다. 박병찬은 웃음을 참느라 폐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수민이 전화 받고 오는데 하필이면 영중이가 들어서. 혼자 오겠다는데도 멋대로 따라온 거야. 그치?"

"네."

"영중이가 할 말 많아 보이더라고. 그치?"

"네?"

"내일 보자 준수야. 잘 정리하고 와라?"

"느에."

 

마지막은 어떤 꽐라가 대답했다. 오지 말라고 한 주제에 너무 홀가분하게 넘기는 거 아니에요? 전영중이 배신감 혹은 낚인 느낌을 받은 사이 박병찬은 남은 동생들을 데리고 홀라당 가버린다. 우리 2차 갈까? 오예! 대학 생활에 미친 사람은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형, 왜 말을 그따위로 해요? 꼭 내가 성준수의 엑스고, 형이 현남친인 것처럼? 물론 물을 기회는 없었다.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서 있던 성준수가 또 좀비처럼 걸음을 옮겼다. 등대처럼 밝은 편의점 앞에서 미시오라 쓰여 있는 문을 굳이 당기다 쓰러지는 걸 전영중이 잡아 유리창에 세웠다.

 

"뭐 먹게?"

"상쾌환. 젤리로 된 거."

"그래......."

 

어디 가면 안 된다? 당부에 성준수는 가만히 눈만 감았다. 불안하게 쳐다보다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매장 안에서 잘 보이는 자리니 여차하면 튀어 나가 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쾌환 세 개를 잡아 계산하려던 손이 멈췄다.

성준수는 꽐라가 되면 운다. 마침 성준수는 꽐라 직전이다. 여기서 술을 더 마시면 꽐라다. 그럼 성준수가 내 앞에서 운다. 기적의 사단 논법을 마친 전영중이 한 손에 상쾌환을, 다른 손에 장바구니를 든다. 참이슬 플라스틱병 하나, 이슬톡톡 하나, 홍차음료 하나,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술을 담고 얼음컵 다섯 개를 챙긴다. 상쾌한 세 개까지 더해 뿌듯하게 계산을 마친 전영중이 편의점을 나선다. 잡아끄는 손에 눈을 뜬 성준수가 봉지를 보고 한 줄 평을 남겼다.

 

"돼지 새끼, 또 얼마나 처먹으려고."

 

응, 아니야. 다 너 먹을 거야. 평소라면 이 새끼 눈깔이 왜 이러냐며 기겁하며 쳐냈을 성준수였지만 그 정도 판단력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청계천에 잠깐 앉았다 가자는 제안에 순순히 끄덕인 걸 보면. 전영중은 정중히 청계천까지 성준수를 에스코트했다.

오늘 내가 성준수 잡는다.

 

 

 

"물 없냐?"

 

있지, 왜 없어. 전영중은 소주를 얼음컵에 따라 주었다. 한 입 마시고 물맛이 미심쩍은지 잠시 노려보다 벌컥벌컥 들이킨다. 취객의 특징 하나. 물과 술을 구분 못 한다.

 

"하 시바, 왜 마셔도 목말라."

 

그야 내가 물이 아닌 술을 줬으니까. 이번엔 이슬톡톡을 부어준다. 핑크색 탄산수인 줄 알고 잘도 넘긴다. 크으. 목을 때리는 탄산수에 아저씨 같은 소리가 난다. 취객의 특징 둘. 주는 대로 먹는다.

 

"진짜 짜증 난다. 내가 왜 너랑 이러고 있어야 하냐."

 

고꾸라질 듯이 휘청거려도 어떻게든 혼자 세우고 있던 몸이 슬그머니 멀어진다. 슬쩍 어깨를 잡아당기자 그대로 제게 기댄다. 취객의 특징......이고 나발이고 전영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준수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얼음컵에 홍차음료와 남은 소주를 부어 마셨다. 물 흐르는 소리가 평화로웠다. 단숨에 절반 넘게 마신 전영중은 머리가 조금 마비되는 걸 느꼈다. 준수야, 너.......

 

"박병찬 형이랑 무슨 사이야?"

"농구부 동기지."

"동기는 나지, 준수야. 초중고 같이 농구한 찐 동기 두고 누구한테 동기래? 동기라는 말이 그렇게 가벼워? 그리고 왜 아무 남자한테 덥석덥석 안겨? 남의 어깨가 그리 쉬워 보여?"

"아...... 뭐라는 거야. 입학 동기, 새끼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대답한다. "니가 나랑 대학이 같냐, 뭐가 같냐. 대학 농구부가 학교 다르면 그, 뭐냐, 라...... 라이벌이지." 만취한 뇌로도 철저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 무언가 울컥한다. 내가 왜 라이벌이야? 우리 고등학교 1학년까진 같은 팀이었잖아. 3학년 경기 전까진 코트에서 다른 색 유니폼 입고 만난 적도 없었어. 나는 너랑 라이벌 하기 싫었어. 기껏 부산까지 가서 그 고생해 가며 입시 성공했으면 좀 좋은 데로 가든가. 과감하게 높은데 찔러볼 수도 있었잖아.

 

"그러게 누가 변변치 않은 대학 가래?"

"이 새끼 아직도 좆같이 말하네."

 

너무 평화로운 목소리여서 잠꼬대라 착각할 정도였다. 부스스 몸을 세운 성준수가 전영중을 더듬었다. 준수야, 지금, 가슴을, 우리 밖인데? 누가 볼세라 좌우를 살폈지만 덜 취한 사람과 더 취한 사람만 있는 청계천은 다 큰 남자가 가슴을 성추행당해도 관심 없었다. 성준수는 마침내 옷깃을 휘어잡고서 꾸욱 밀었다.

 

"어어, 준수야......."

"내가 대학 와서 존나 후회한 게 뭔지 알아?"

 

청춘드라마처럼 풀썩 쓰러진 전영중 위로 성준수가 올라탔다. 가로등을 등져 보이지 않는 표정 너머로 눈물이 떨어졌다. 울어? 준수 지금 울어? 설마 나 때문에?

 

"......뭔데?"

"그때 널......."

 

그때가 언젠데? 부산? 추계대회 예선? 나 뭐? 받아줬어야 했다고? 단전에서부터 차오르는 비명을 입술을 씹어 참는다. 성준수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서 비명 지르면 평생 쪼다 취급받겠지?

 

"광안리에 묻어버렸어야 했는데."

 

취객의 특징 셋. 힘 조절을 못 한다.

188cm 농구선수의 주먹이 전력으로 왼뺨에 꽂혔다. 반사적으로 이를 악문 전영중은 세계가 새하얗게 변하는 경험을 한다. 머릿속에서 또 다른 전영중이 속삭였다. 이거 두 번 맞으면 좆된다.

백화된 세계에서 정신을 잡고 조금 전까지 분위가 좋았던 첫사랑 상대를 보았다. 그리고 제 착각을 깨닫는다. 성준수의 눈물은 자신을 죽여버리지 못해 흘린 분노의 눈물이라는 걸.

마운팅 자세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린 기내초 일짱에게 몸을 일으켜 달라붙었다. 턱에 박치기를 꽂아 넣고(의도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가슴팍에 매달려 꽉 끌어안자 온갖 육두문자를 뱉는 성준수에게  빌었다. 준수야. 한 번만 봐주자, 응? 한 번만 봐주자. 등 뒤로 주먹이며 팔꿈치가 사정없이 꽂혔지만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은 힘을 더했다. 잘못해서 놔버리면 취한 성준수의 스트레이트에 진짜 강냉이가 털릴 수도 있다.

취객들의 소동은 일대를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발견하면서 종료됐다. 두 사람을 떼는 과정에 한쪽이 명치를 차이고 구르긴 했으나, 그렇게 끝난 게 다행이라고 누구는 생각했다.

 

 

 

"진짜 접수 안 하실 거예요?"

"네에. 술 먹고 말실수해서 조금 치고받은 거예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주취 폭력 피해자가 연신 사과하는 옆에서 가해자가 태연한 낯으로 비닐봉지에서 상쾌환을 꺼내 먹었다. 젤리를 한입에 삼킨 그는 남은 두 개를 찢어 넘긴다. 그걸 또 넙죽 받아먹는 모습에 주취 사고가 많은 파출소의 경찰들은 신경 끄기로 한다. 쓰레기만 남은 봉지를 들고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파출소에서 단잠까지 잔 탓에 날이 바뀌고 해가 뜬지 오래다. 집에 가긴 틀렸으니 학교에서 대충 씻고 갈아입어야겠다. 락커에 여벌 속옷이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영중이 손을 잡는다.

 

"왜."

"나한테 할 말 없어?"

 

인내심 없이 튀어 나가려던 욕설을 한번 참는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자신은 전영중의 얼굴 반쪽에 시퍼런 멍을 남긴 가해자였다.

 

"미안하다."

"그것뿐이야?"

"아씨, 그럼 또 뭐? 네가 좆같은 말투로 살살 긁었잖아! 반년 전에 그 짓 안 한대 놓고 한 네가 잘못 아냐?"

"준수야,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그건 니가 잘하는 거고."

"그래서 너 진짜 박병찬 형이랑 사귀어?"

"아이 씨발, 야!"

 

건물 사이를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에 출근하던 이들이 돌아보았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파출소에서도 들었는지 경찰들이 문을 반쯤 열고 쳐다보았다.

 

"아냐! 아니라고! 씨발 아니라니까! 니가 나 좋다매! 좋다면서 고백은 안 하고 왜 자꾸 삽질이야! 그 형이랑 안 사귄다고! 씨발 니 고백 기다리다 늙어 뒤지겠다고!"

"주, 주, 준수야, 목소리가 너무 큰......."

"어쩌라고! 고백하든가 아예 꺼지든가!"

 

와우.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빌딩 숲에 메아리치는 꺼지든가- 소리에 직장인들과 경찰들은 각자의 자리로 꺼졌다. 뭐야, 사랑싸움이었네. 행복하세요.

한순간 종로 일대의 모든 이목에 집중 당한 전영중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수치스러운가?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보다는, 꼭 저 말이 성준수가 자기도 좋아한다는 의미 같아서.......

 

"그러면 왜 그때 거절......."

"대학가서 보자던 말은 기억 하나도 안 나지?"

"맞아 그랬지."

 

전영중은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제 잘못이 맞았다. 성준수는 언제 고백하라고 시기까지 알려줬다. 근데 내가 나사 빠져서, 너무 설레서, 아무 생각 못 하고 바보처럼 그렇게. 아니, 사람이 사람을 너무 좋아하다 보면 망가질 수도 있지?

 

"이게...."

"야. 빡치는 소리 할 거면 그냥 물이나 사와."

"응."

 

저것도 8년 지기 친구라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헛소리 타이밍을 감지한 성준수가 잘라냈다. 편의점으로 뛰어간 전영중이 큰 손에 물과 이온 음료를 두 개씩 들고 달랑달랑 뛰어오는 모습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제 그 지랄을 했는데도 귀여워 보이니 단단히 미쳤네.

 

"......고백은 나중에 해도 돼?"

 

어차피 마음 튼 사이에 사귀는 걸로 쳐도 되는 거 아냐? 싶었지만 내뱉지 않았다. 전영중은 쓸데없이 섬세하고 귀찮은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물만 사 와도 되는데 꼭 이온 음료까지 같이 사 오지. 갈증 난 속에 음료수를 집어넣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한 달 이내로만 해라."

 

그렇다고 지금의 유예가 이온 음료 덕에 생긴 건 아니었다.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무르다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운 전영중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재빠르게 포옹만 하고 가려는 걸 성준수가 잡았다.

멍청한 새끼. 이럴 땐 키스를 갈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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