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준] 관성의 종착지

[빵준] 관성의 종착지

23.12.02 빵준온 출간 회지 합본

🏐🏀 by 반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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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째 이별

전영중은 성준수와 헤어졌다.

 

벌써 17번째 이별이었다. 하필이면 17이라는 숫자, 전영중이 처음으로 성준수와 이별을 경험했던 그 열일곱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숫자였다. 대학생이 된 스무 살 때부터 프로 선수가 된 지금까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연애 기간 동안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했던 둘은 다시 사귈 때마다 연애 기간을 리셋하지 않고 누적하기로 합의했다. 이유는 100일이니 1주년이니 하는 이벤트들을 챙기는 걸 귀찮아한 성준수가 다시 사귀고 맞은 100일째 되는 날을 잊어버려 전영중과 또 싸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 기억나지도 않는 자세한 이별의 시기와 이유. 사소한 이유로도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이별한 후라고 일상이 크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운동선수의 하루 루틴은 일정했고, 휴일에도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와 조깅을 했다. 계속 몸 가는 대로 달리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아서 좋았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아침을 챙겨 먹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길 시간을 두지 않으려고 청소를 시작했다.

오래 사귄 사이인 만큼 서로의 집에 있는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준수와 헤어졌을 때마다 물건을 정리하는 방식은 다 달랐다. 어떨 때는 그냥 모른척하며 두었고, 요즘은 그냥 상자 하나를 꺼내 보일 때마다 상자 안에 넣어두는 것으로 눈앞에만 보이지 않도록 대충 정리했다. 성준수는 헤어진 후 자신의 물건을 찾으러 온 적이 없었으니 버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영중은 혹시 모를 연락을 대비해 느리게 물건을 정리했다. 빠르게 재결합하면 둘의 관계와 같이 그 물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대학 시절 처음 헤어지고 짐을 정리했을 때는 술에 취해서 질질 짜면서 정리했던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성준수가 미련 없이 남기고 간 물건들과 제 처지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는 그런 궁상맞은 생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열 번이 넘게 이별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는 모든 게 무덤덤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혼자 땅 파면서 평생 살던가.”

전영중은 다 질려버린 듯한 성준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라리 유치하게 욕하며 싸우고 헤어졌을 때가 더 나았다.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헤어지더라도 이 좁은 판에서 마주치지 않기는 어려웠으니까. 시즌 내내 질리게 보는 얼굴이었고, 본가도 같은 동네. 그렇게 또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고, 시비를 걸고, 그러다 대화를 틀고, 자연스레 화해하면서 다시 만났다. 영중은 준수와의 관계에서 아마 더 아쉬운 쪽은 제 쪽이라고 생각했고, 자존심이 상해 성준수를 잊겠다고 결심했던 여러 번의 시도는 성준수가 건네는 말 한마디와 연락 한 번에 모두 무너지곤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헤어지려나. 헤어지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예전과 달리 이별 후 맞는 일상이 익숙해진 것처럼,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성준수가 뭐라고. 준수는 지금 내 생각을 하고 있긴 할까? 난 지금도 너가 말한 대로 혼자 땅 파고 있는데. 전영중의 이별 후는 늘 비슷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해도, 속은 시커멓게 탄 채로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만 던졌다. 원래도 생각이 많은 성격인데 성준수와 관련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밝아지는 휴대폰 화면 위로 알람이 떴다. 빠르게 낚아채듯 확인한 영중의 얼굴에 실망이 깃들었다. 내심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한 기분이었다.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씹으며 몇 번이고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가 휴대폰 전원을 그대로 꺼버렸다. 전영중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쩌면 준수랑은 그냥 친구로 남아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성준수는 전영중과 헤어졌다.

 

몇 번째 이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성준수는 연애에 있어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사귀고 있는가, 헤어졌는가. 이미 지나간 것들을 붙잡고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성준수 역시 평범한 사람이라 전영중과 이별할 때마다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중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나, 그건 성준수가 냉혈한이라서가 아니라 원체 힘든 일을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 탓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탓하기보다는 다가올 상황에 익숙해지려고 애쓸 뿐이다. 그게 화해 후 재결합이든, 완전한 이별이든.

 

“준수 넌... 아마 평생 이해 못할걸.”

 

성준수는 전영중과 이별한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연애 기간도 짧지 않았지만 성준수가 전영중을 이해할 수 없는 것. 짝사랑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전영중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면이 있었다. 연애 초반에도 그런 이유로 자주 싸웠다. 어차피 더 좋아하는 쪽은 자기고 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쪽 아니냐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 누가 연애를 적선으로 하냐고 씨바 꺼. 그렇게 잘난 놈이 유독 농구와 연애에 있어서는 자기 확신이 그렇게나 없었다. 그래도 농구는 고등학생 이후로 망설이지 않게 된 것 같았는데, 연애는 아직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래 사귄 연인보다는 여전히 친구 같은 느낌이 강했고, 툭하면 학생 때처럼 싸웠다.

성준수 역시 전영중과 사귀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서로 잡아먹을 듯 싸웠던 최악이었던 고3 시절을 지나 나쁘지 않은 친구 사이로 회복하는 듯싶더니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꼈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일단은 사귀어보자고 밀어붙이듯 시작된 연애였지만 예상과 달리 영중이 연인으로서 보여주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싸우고도 매번 다시 만났을 정도로. 표현은 적었을지라도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그런데 그 새끼는 왜 모르지. 전영중이 솔직하지 못하게 굴면서 자존심 지키겠다고 긁어대는 소리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지만, 성준수는 문득 이 관계가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이 긴 연애의 흔적을 되짚어 올라가기엔 기억도 흐릿해졌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준수가 아직 전영중의 번호를 차단하지 않은 이유.

 

“답답한 X끼.”

 

성준수의 휴대폰 화면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새로운 연락은 없었다. 예전에 헤어지고 얼마나 갔더라, 다시 사귈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경기가 있어 계속 마주치다 보면 다시 말을 섞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인 지금도 어색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헤어지던 날의 전영중은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사람 속을 긁어대던 모습도, 입만 웃고 있지 눈으로는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퍼부어대던 모습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더 욕심나지 않는 척, 이미 단념한 것 같은 방어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표정은 울고 싶은 사람처럼 엉망이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헤어지자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미련이 넘치다 못해 대신 잡아달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전영중은 늘 그랬다. 뻔한 거짓말로, 날이 선 말로 그 동그란 머리통 안을 가득 채운 생각과 망설이고 있는 속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성준수가 전영중을 봐온 게 벌써 몇 년이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지만 대개 싸우고 충동적으로 이별한 후 다시 만난 전영중은 상태가 안 좋아보였고, 청승맞은 모습이 자꾸 시선에 밟혀 먼저 말을 걸면 금방 또다시 귀찮을 정도로 주변을 맴돌며 시비를 털어댔다. 연인 이전에 친구였기에 연인으로서 싸우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친구로서 관계를 회복하는 쪽이 더 쉬웠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 되기는 어려웠고, 분위기가 풀어진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다시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영중이 제 발로 찾아오기 전까지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지막 슛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했던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고, 꿈이 아니라고 하기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게 꿈이라면, 전영중은 성준수가 보고 싶다는 무의식을 들킨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성준수?”

“...저 아세요?”

 

평소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간 시선에는 기내초 시절의 성준수가 있었다. 어린 준수는 영중을 수상하다는 듯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꿈도 왜 하필 이런 꿈을 꾸는지.

 

“어.. 난 영중이 친척 형인데.”

“영중이는 오늘 먼저 갔는데요.”

“그냥 근처 지나가다 들렸는데 엇갈렸나 보다.”

 

영중은 기내초 농구부 성준수라고 써져 있는 농구화 가방을 핑계로 같은 농구부 친구라고 들었다며 핑계를 댔다. 처음에는 전영중을 수상하게 여겼던 성준수도 자기가 아는 전영중과 꽤 닮은 어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친척이 아니라 친형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자기 친척들은 다 키가 크다고 자기도 나중에 더 클 거라고 말했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학생들은 대부분 하교한 뒤였고, 체육관에서의 공식적인 농구부 연습도 모두 끝난 시간이었다. 성준수는 집에 가기 전 운동장에 있는 농구 코트 위에서 슛 연습을 더 하고 있었다. 영중이 아닌 골대로 다시 시선을 옮긴 준수가 슛을 던졌다. 골대에 맞고 튕겨 나온 공을 잡은 전영중이 슛을 던졌다.

 

“형도 농구해요?”

안정적으로 들어간 슛에 성준수가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꿈이면 그냥 대충 말해도 될 텐데, 현실처럼 생생한 느낌이라 대답하는 게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나중에 초등학생 전영중한테 친척 형을 만났는데 너네 형도 농구하냐 질문할지도 모르니까. 초등학교 시절 친척 형들과 어떻게 놀았는지를 떠올리던 영중은 명절에 밖에 나가서 축구나 농구를 했던 것을 떠올리며 가끔 한다고만 둘러대고, 슛은 잘 던지는 친구를 보고 따라 하면서 배웠다고 설명했다. 전영중이 본격적으로 슛 연습에 투자하게 된 계기, 그 당사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게 어쩐지 이상했지만.

 

“연습 도와줄까? 대신, 오늘 만난 건 영중이한테는 비밀이다.”

 

혹시 몰라 조건도 덧붙인 후 영중은 준수가 슛을 던질 때마다 골대 근처에서 농구공을 잡아 던져주며 연습을 도왔다. 손에 붙는 농구공의 무게가, 코트에 공이 튕길 때마다 나는 소리 같은 것들이 꿈치고는 생생했다. 초등학생 성준수의 슛은 지금보다 어설펐지만 공을 쫓는 눈빛은 지금과 달라진 게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잔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성준수의 농구 연습이 끝나고 헤어진 직후,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지지직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전영중이 있는 곳은 농구 시합이 열리는 체육관 안이었다. 관중석 구석에서 내려다 본 코트 위에는 익숙한 기내초 유니폼이 보였다. 방금 전 봤던 어린 성준수는 물론, 기내초 시절 자신의 모습까지. 공식 경기는 아니고 연습게임, 초등학생 수준의 경기이긴 했지만 나름 접전으로 흘러갔고 후반이 되었을 때 전영중은 이 경기가 어떤 경기였는지 깨달았다.

체격 좋고 운동 신경 좋고, 아니면 싸움 좀 한다 싶은 깡 좋은 녀석들을 수소문하던 농구부 코치의 영입에 넘어가 시작했던 농구. 초등학교 시절 6학년도 이겼다는 소문의 주인공인 성준수를 전영중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다른 반이었던 준수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농구를 시작한 후였다. 그렇게 시작했던 농구는 재밌었다. 같이 농구를 시작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키도 크고 실력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농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뭘 해도 비난보다는 칭찬이 많이 쏟아졌을 시기였으니. 그리고 처음으로 겪은 위기가 바로 이 경기였다.

1점 뒤지는 상황, 마지막 공격을 앞둔 작전타임. 코치가 어린 영중에게 지시를 내렸다. 멀리 있어 들리지 않는데도 마지막 슛을 지시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난생처음 부담감과 중압감을 느꼈던 어린 영중이 우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준수는 거기서 손을 들었다.

 

 

영중은 어린 준수가 슛을 던질 준비를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준수가 마지막 슛을 던졌던 오늘, 전영중의 인생에서 성준수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된 최초의 기억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아있는 기억임에도 그때 골이 들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합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런 순간에 망설이지 않고 공을 던지던 그 무모함을 동경했으니까.

정말 과거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한 꿈에서, 성준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이 천천히 영중의 눈에 담겼다. 원래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여기서 끝이 나야 하는데, 공이 림과 가까워진다. 들어갔던가, 들어가지 않았던가. 희미했던 기억은 곧 골대를 통과하는 공과 함께 선명한 색으로 바뀐다. 경기장 안에는 환호성이 가득 울려 퍼졌다. 서로 달려가서 안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전영중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꿈에서 깰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소란스러운 체육관 안이었다.

어떤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 된다. 너에겐 수많은 마지막 슛 중 하나였겠지만, 나는 항상 이때를 떠올린다. 몇 번이고 이 기억으로 돌아오게 될 만큼.

 

평소보다 더 선명한 과거의 잔상 속 어린 성준수는 여전히 한결같고 겁 없는 놈이었다. 전영중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잊을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희미해진 기억의 부분마저 다시 이렇게 생생하게 덧입히고, 이번엔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다짐하자마자 그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준수가 나오는 꿈을 꾸는 이유가 뭘까.


전영중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이곳에서 성준수를 처음 만났던 농구 코트 위였다. 이번에도 농구 연습을 하고 있던 준수는 영중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금은 그 연습 게임이 있고 나서 바로 다음 날인 것 같았다.

 

“넌 겁 안 났어? 전영중은.. 울었잖아.”

 

제 입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상황이 어쩐지 민망했다. 당연히 떨리긴 한데, 누군가는 넣어야 하는 거잖아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대답치고는 듬직했다. 성준수가 덧붙여서 알려준 비결에는 티맥타임 해설도 있었다.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경기, 가장 좋아하는 선수라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성준수의 표정은 지금까지 봤던 표정 중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이번에 성공했으니까, 시합에서 긴장할 때마다 써먹으려고요.”

 

전영중의 머릿속에 당시 성준수가 마지막 슛을 던지기 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던 장면이나 고등학교 시절 쌍용기 경기에서 눈앞에서 보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성준수가 프로 선수가 된 지금도 종종 나오는 습관이었다. 이제는 꼭 직접 슛을 넣기 전에만 중얼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마인드 컨트롤용이었다.

 

“...그래, 그거 효과 좋은 것 같더라.”

 

전영중의 눈앞에서 림에 꽂히던 성준수의 수많은 슛들을 떠올리며 영중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웃었다.


성준수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꿈인가 싶었다.

 

기내초 시절의 꼬마 전영중. 하교길에 분식집에서 산 피카츄와 떡볶이가 손에 들려 있는 모습까지, 제 기억 속에 있는 얼굴과 똑같았다. 어린 영중 역시 성준수를 보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중이 알기로 준수는 여동생밖에 없었다. 형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렇다고 저 얼굴이 흔한 얼굴일 리는 없었다.

 

‘꿈이니까 뭐.... 둘러댈 필요 있나.’

 

무심코 전영중의 이름을 불렀다가 어린 영중과 대화를 나누게 된 성준수는 자신이 미래에서 온 성준수라고 밝혔다. 분명 성인 전영중이 옆에 있었다면 분명 시비를 털었을 거다. 준수야, 비밀을 숨기려는 노력이라도 해 봐. 너무 성의 없잖아. 하긴 준수가 연기에는 진짜 재능이 없지. 씨바 꺼. 자연스럽게 헤어진 연인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상황이 짜증 났다. 하도 오래 만났더니 이제는 전영중의 잔소리가 자연스럽게 귀에 들리는 게 X 같았다.

 

“저 계속 농구하고 있어요? 준수.. 아니 형이랑 같이?”

“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볼걸.”

 

성준수의 원래 시간을 기준으로는 전영중과 헤어진 상태지만, 프로 선수로 같은 업계에서 뛰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시합에서는 지겹게 볼 사이였다. 농구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심지어 친구끼리는 할 수 없는 짓까지 웬만한 건 다 같이 해본 사이. 하지만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

 

“그럴 것 같았어요. 코치님이 저희 학교 농구부는 다 기내중이랑 원중고 간다고 했거든요.”

“...그렇지.”

 

전영중과 사귄 후 영중이 당시 자신의 전학에 꽤 충격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성준수는 차마 순수한 눈빛을 보내오는 꼬마 영중 앞에서 나중에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필 지금보다 더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인상, 지금처럼 배배 꼬아서 속을 긁는 말투도 아니고 형이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는 어린애를 상대로 성준수는 어색하게 답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나이에 한두 살 차이가 커 보이던 그 시절에도 6학년 선배들에게 맞서 싸웠을 정도로 위아래 상관없이 할 말 다하고 한 성깔 하는 성격인 성준수도 약해지는 상대가 있었다. 오랜 체육계 생활과 K-장남이라는 배경의 영향으로 어른들 앞에서는 은근히 예의 바른 편이었고, 잘 울고 여렸던 여동생 성지수의 영향으로 어린아이나 여자 앞에서는 말을 가렸다. 원래의 전영중은 성준수의 기준에서 그런 배려를 받을 리 없는 사람이나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초등학생 전영중. 머릿속에서 전영중을 떠올리면 따라붙는 쌍욕이 입버릇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성준수는 뇌에 힘을 빡 주었다.

그래도 같이 농구를 하는 건 맞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대학리그는 물론 프로리그에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같은 팀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다른 팀이라도 같이 농구 코트에 서있으니까. 매번 코트 위에서 싸우는 게 일상이라도 애한테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적당히 얼버무리고 떠나려던 성준수는 그 외에도 다양한 질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궁금한 게 많은 어린 전영중은 지금보다 더 말이 많았다.


“오늘 준수 진짜 멋있었어요.”

 

어린 영중은 미래에서 왔다는 성준수의 말을 믿어주면서도, 자신이 아는 준수와 일치시키기에는 어른 성준수가 낯설어 둘을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만난 장소는 영중의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였다. 울었는지 영중의 눈은 살짝 부어 있었다. 성준수는 모른 척해 주기로 하고 영중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영중이 말하고 있는 경기는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 후 첫 연습 경기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마지막 슛 지시를 받고 겁을 먹은 영중이 울었던 날이다. 어린 영중은 자기 대신 마지막 슛을 자원해서 넣은 준수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뭔가, 히어로 같았어요.

 

팀을 구하는 슈터, 라는 로망은 성준수 역시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늘 제게 시비를 걸고 있는 전영중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성준수는 낯간지러운 기분에 괜히 목 뒤를 긁었다. 그렇게 성준수의 활약을 성준수 본인에게 전해 주고 있던 전영중은 한참을 더 떠들었고, 자기도 더 열심히 연습할 거라고 했다.

 

“그래, 다음엔 머뭇거리지 말고.”

 

성준수는 영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차갑던 인상이 옅은 미소가 깔리자 한층 부드러워졌다. 어린 영중은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성준수의 시야가 빠르게 흩어졌다.


겁 없는 놈

전영중이 다음에 도착한 곳은 원중고 기숙사였다. 주변을 살피다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에만 쌓여있는 상자들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달력을 보자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 이 꿈이 계속 이어진다면 보게 될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성준수가 전학 가던 날.

 

잠시 고민하던 영중은 밖으로 나갔다. 졸업한 지 몇 년이 흘렀는데 자연스레 체육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익숙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을 마주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초등학생인 준수를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확실히 고등학생인 준수나 자신을 마주쳤다면 더 해명하기 어려웠을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도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원래 꿈인 걸 자각하면 보통 바로 깨지 않나? 깨기는커녕 긴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짐은 다 싸놓고 볼 던지냐?”

“어.”

 

토요일 아침,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가로 돌아가 학교는 조용했다. 체육관에는 슛 연습을 하는 성준수와 준수를 찾아갔던 고등학교 시절의 전영중뿐이었다.

 

“지상고랬나? 어디 있는 학교더라.”

“부산.”

“와~ 멀리도 가네.”

 

성준수의 전학은 코치님의 권유 후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농구를 해왔던 다른 친구들은 농구를 그만두었다. 이제 성준수까지 떠나면 원중고에 혼자 남기로 한 게 실감이 날 것 같아서, 부산으로 떠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괜히 주변을 맴돌며 말을 붙였다.

 

“... 겁 안 나냐?”

“뭐가?”

“전학 가는 거.”

“겁나면 어쩌게.”

 

그렇게 바로 전학을 결심하고, 심지어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혼자 떠날 수 있다는 게. 나는 그때 농구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선택하는 것도 무서웠는데. 잘하는 놈들 사이에서 비주전으로 밀려났던 상황은 모두가 똑같았고 사실상 농구를 계속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성준수에게는 농구를 그만둔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던질 수 있는 제일 확률 높은 슈팅이야.”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마지막 슛을 던지러 갔던 그때처럼, 성준수는 망설임 없이 슛을 던졌다. 전영중은 고등학생인 자신이 농구공을 던져 성준수가 던진 공을 맞추는 것을 지켜봤다. 유치한 질투였다.

 

“야, 야! 이 XX아 돌았냐?”

“와하하 재밌다~!”

“방해할 거면 꺼져 XX아.”

 

성준수의 욕설을 뒤로하고 고등학생 전영중은 돌아섰다. 옆으로 지나쳐가는 과거의 제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그때 지었던 표정을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성준수는 전영중이 나가고도 몇 번 더 슛을 던지다가 체육관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체육관을 돌아보는 성준수와 시선이 마주치고,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전영중은 가만히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혼자 남겨진 체육관의 풍경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전영중. 너 진짜 개못하더라.”

장도고와의 시합에서 패배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러 세운 목소리는 익숙한 시비조의 성준수였다.

 

“너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난 만족해. 4점 차면 할 만큼 했지 뭐. 얘기했잖아. 최종수는 못 막는다고.”

 

전영중은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성준수가 대치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어야 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재현되는 것을 본다.

 

“어디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4점 차보다 더 줄일 수 있는지 두고 볼게 준수야.”

“4점 차 같은 소리 하네.”

 

하지만 이 다음 대사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이길 거다. 우리는.”

 

겁이 없는 건지, 지나치게 낭만적인 건지. 성준수는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앞에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협회장기 때 보여준 모습과 비교하면 지상고의 변화와 활약은 이변 그 자체였다. 그래도 장도고를 상대로 이길 거라고, 우승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게.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니, 청춘 스포츠물에서나 나올 법한 낭만이었다.

 

“현실감각 없는 건 여전하네. 너답다. 너다워.”

 

하지만 그 무모함과 낭만은 어릴 때부터 봐왔던 성준수의 모습 그 자체라서, 한결같은 모습에 전영중은 어쩐지 안심했다.


00 : 00

장도고 지상고

4

90 : 91

 

경기를 끝내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상고의 우승, 그 이변에 체육관은 충격과 흥분으로 휩싸였고 뜨거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영중의 시선은 그대로 주저앉은 성준수의 뒷모습에 고정된 채였다. 그때는 화면으로 봤던 풍경이 지금은 바로 눈앞에 있다.

 

겁 나면 어쩌게.

 

전영중은 성준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겁이라고는 모르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성준수가 영웅병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애를 가장 영웅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저였다. 성준수가 특별한 거라고, 특이한 거라고, 이상한 거라고. 마지막 슛을 던졌던 그때부터 전학을 결정하는 순간까지, 전영중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선택을 하는 성준수를 동경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성준수를 부정했다.

힘이 풀려 무너진 뒷모습을 보며 전영중은 성준수 역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모든 것을 걸었던 가장 확률 높인 슈팅이 성공할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겁이 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서, 간절한 거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으니까.

 

“너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난 만족해. 4점 차면 할 만큼 했지 뭐. 얘기했잖아. 최종수는 못 막는다고.”

 

우승 욕심이 없다고?

 

“이길 거다. 우리는.”

 

아니, 가장 갖고 싶은 것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가질 수 없는 결과가 겁이 나 욕심 없는 척했을 뿐이다.

 

지상고도 해냈는데 나도 어쩌면 우승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상고의 우승을 보고 욕심이 났다. 그 후로 대학을 거쳐 프로 선수가 된 지금까지, 여전히 고민하고 어려움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전영중은 농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욕심이 생기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전영중이 욕심을 내서 얻은 결과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농구와, 성준수와의 연애다. 하지만 농구와 연애의 차이를 비교하자면 하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도 같은데 다른 하나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다.

대학에 붙고,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고, 프로 선수가 되어 코트 위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계속 선택을 받는 것. 학생 때보다 실적과 사람들의 평가가 더 잘 보이는 만큼, 그저 관성처럼 살았을 뿐인데 주전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고등학생 때와 달리 이제는 성장하는 걸 느끼고 대체될 수 없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게 실감이 났다. 새로운 유망주는 늘 등장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경쟁인 이곳에서 버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선수 전영중’을 필요로 하는 곳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건 쉬웠다. 이제 농구에서는 어떤 목표를 잡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 연애 상대가 성준수 한 명뿐이었기에 연애는 비교군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겁이 났다. 나는 이제 성준수가 아닌 사람과의 연애를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성준수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영중이 성준수에게 품은 감정에는 사랑 외에도 동경과 열등감, 집착과 애증 같은 것들이 있었다. 연인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기엔 아름답지 않은 불순물이 섞여 있었고, 생각보다 성준수에게 느끼는 감정의 무게는 무거웠다. 아무리 성준수라도 이런 시커먼 속내를 들키면 질색하지 않을까. 지금도 충분히 불리한 상황인데 약점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쩌면 그냥 친구로 남아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성준수를 처음으로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부터, 성준수와의 관계를 욕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는걸. 처음부터 이 관계는 지는 싸움이었다.


성준수의 농구는 고등학교 시절 가장 큰 변화를 맞이했다.

 

기내초에서 기내중을 거쳐 원중고로 진학하는 코스. 살던 동네를 크게 벗어난 적 없던 성준수가 연고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부산으로 전학을 선택한 것은 열일곱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다. 출전 금지가 풀리고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새로운 감독님이 부임하고, 방해라고 생각했던 팀원들과 진짜 팀이 되고, 공의 무게를 깨닫고, 간절하게 바라던 우승도 했다. 그때의 경험은 성준수의 농구 인생에 꽤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처음에는 이렇게 자주 연락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지상고 팀원들과 졸업하고도 질리도록 보는 사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생에서 맞은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전영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영중이랑 사귀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마 고등학생 성준수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악할 게 분명했다.

 

어린 전영중과 헤어진 후 성준수가 다음에 도착한 곳은 고등학교 1학년인 성준수가 있는 방이었다. 갑자기 본가에 떨어졌는데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해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 이상한 꿈은 깰 기미도 보이지 않아 성준수는 짐을 정리하고 있는 제 모습을 구경했다. 벽에 걸린 달력과 원중고 체육복 같은 것들을 보아하니 전학 가기 전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인 것 같았다.

 

“오빠 짐 정리 다했어?”

“아니, 아직 정리 중.”

 

방 앞을 기웃거리던 성지수가 슬쩍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현실에서 성준수가 얼마 전에 만난 지수는 대학교 졸업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긴 머리가 아닌 짧은 단발머리와 앳돼 보이는 얼굴이 여기가 과거라는 걸 실감하게 했다.

 

“이건 거의 새거인데 버릴 거야? 아깝다.”

 

고등학생 성준수와 어른 성준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원중고 체육복과 유니폼에 맞춰 새로 샀던 농구화. 검은색인 체육복 바지 정도는 딱히 일상에서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고, 농구화도 굳이 새로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구석에 버리려고 모아둔 짐들에서 빼내 그것들을 챙겼다. 최대한 간소하게 챙긴 짐 주변에는 남기고 가는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전학을 가게 되면서 두고 가는 것들. 이제는 쓰지 않을 원중고 명찰이라던가, 몇 번 입어보지도 않은 교복. 학교 행사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운동부 특성상 교우 관계가 넓지는 않았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같이 농구했던 친구들도, 가족들도 다 이곳에 있다. 말이 기숙사지 거의 작은 자취방이라고 들었던 단체 숙소에 덩치 큰 운동부 남학생들끼리 몸 구겨 넣고 살 거 생각하니 혼자 쓰던 방이라던가, 항상 벽에 걸려있는 맥그레디와 밀러의 유니폼까지. 천천히 훑어본 방에는 남기고 가는 것들이 더 많았다.

 

침대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고등학생 성준수가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응했다. 힐끗 훔쳐본 화면에 뜬 문자는 전영중에게 온 것이었다.

 

[전학 가도 연락해.]

 

체육관에서는 배웅하다 말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 가더니, 영문 모를 녀석이었다. 나중에 지상고와 원중고가 시합을 하면 종종 마주칠 일은 있겠지, 마저 짐을 정리하는 고등학생 성준수를 지켜보며 성준수도 그때 했던 생각들을 곱씹었다.

 

사실 그때 전영중도 농구를 그만두지 않는다고 해서 동질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농구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학 권유와 함께 그동안 느껴왔던 위기감이 한 번에 덮쳐왔다. 오히려 이곳에서 더 출전 기회를 얻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 정리는 빨랐다. 전학은 바로 결심했지만 앞으로 대학을 갈 수 있을지,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지 착잡하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계속 말이 없던 전영중은-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거야.”

 

원중고에 남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지 않은 선택지였다. 성준수가 보기에 실적 하나라도 아쉬운 지금 원중고에 남는 것은 큰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영중이 성준수와 똑같이 선택한 것은 농구를 계속하는 것, 다른 선택은 남느냐 떠나느냐. 그럼에도 살아남을 거라는 그 마음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성준수도 살아남기 위해 전학을 갔다. 티맥타임 영상을 보고 멀리서 슛을 계속 넣어서 승부가 뒤집히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판을 뒤집으러 가기 위해.


1 on 1

1월 1일을 맞아 이제 갓 성인이 된 학생들로 거리의 술집은 온통 만석이었다. 네 번째로 방문한 가게에서 겨우 자리가 나서 들어갔고, 전영중과 성준수는 어색하게 민증 검사를 받고 술을 시켰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영중도 구석에 앉아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문득 찾아오는 정적이 숨 막혔다.

 

대학 합격 소식을 서로 공유한 후 먼저 만날 것을 제안한 사람은 성준수였다. 겨울 방학에 서울 본가로 돌아가니까 같이 술이라도 먹자고. 전학을 간 후 간간이 연락을 하긴 했지만 각자 팀에 적응하느라 바빠 연락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입시가 끝난 후에는 시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여유가 생겼고, 예전처럼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각자 진학할 대학인 주익대와 준향대의 거리 역시 멀지 않은 편이었다 보니 통학과 기숙사, 자취 중에 어떤 것을 택할지 같은 주제들로 금방 공통 화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둘이서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자 영중은 살짝 긴장했다. 그동안 농구 시합이나 경기 전후로 마주쳤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대부분 시비를 걸거나 싸우고 있었기에 이렇게 둘이서만 같이 놀자고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던 탓이다.

 

술잔이 부딪치고, 전영중은 술이 들어가면 좀 낫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빠르게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전영중과 성준수는 초등학생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벌써 술 마실 나이가 되었다는 게 새삼 낯설면서도 어른이 된 느낌에 들떠 있었고, 그 첫 감상은-

 

“웩,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

 

더럽게 맛이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구석에서 전영중은 둘의 반응을 보며 옛날 생각에 잠겨 웃었다. 지금도 몸 관리가 필수인 운동선수라는 직업 특성상 술을 자주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성준수와 둘이서 마셨던 걸 떠올렸다. 이때는 이런 걸 왜 돈 주고 사 먹나 싶었는데... 모든 건 적응하기 나름이다.

전영중과 성준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쨌거나 합격 축하하고 대학리그에서도 잘해보자는 이야기, 중학생 때까진 서로의 집에 놀러 가서 알고 있던 가족들의 근황이라던가, 심지어 초등학교 앞에 있던 동네 분식집의 근황까지. 옛날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추억들부터 비교적 최근인 고등학생 때 서로 시비를 털었던 걸 회상하며 너 그때 진짜 짜증 났다거나 그런 거. 술기운이 오를수록 입은 더 술술 열려서 전영중은 제정신이었으면 말하지 않았을, 성준수가 전학 간다고 했을 때 꽤 충격을 받았던 것까지 다 불어버렸다. 사실 농구를 계속할지 그만할지 선택하는 게 무서워서, 원중고에 남아있으면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 선택을 미룬 것뿐이라고.

“준수 넌 그렇게 멋있는데 난 엄청 한심하지.. 아니.. 누가 너 혼자 전학 가래.. 누가 계속 농구 하래!!!”

 

취기가 올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성준수를 칭찬했다가 원망하기를 반복하는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하나만 하라며 욕했다. 이 새끼 이거 술버릇은 아니겠지, 대학 들어가기 전에 미리 체크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성준수는 앞으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고통받는 건 비단 성준수뿐만이 아니었다. 성준수한테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술주정을 부리는 과거의 제 모습이라니, 어차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태이지만 전영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깼냐?”

 

몇 번 깜빡거리던 전영중의 눈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부릅 떠졌다. 시끄러웠던 가게의 소음은 없어지고 주변은 고요했다. 익숙한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의 벤치,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마시라며 생수병을 건넸다.

 

“너 옮기다가 뒤질 뻔했다. X나 무겁네.”

“준수야.. 그 정도로 지치면 웨이트 더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대학 가서 어쩌려고.”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이제 멀쩡하네.”

 

익숙한 일상이다. 성준수와 투닥거리며 처음의 긴장감은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전영중의 시선이 사람 없는 놀이터 옆에 있는 농구 코트로 향했다. 옆에 있는 성준수의 시선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성준수가 말했다.

 

“야, 원온원 할래?”

 

 

 

술 먹고 동네 길거리에서 농구라니. 전영중도 성준수도 맨정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제대로 된 농구화를 신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신경 써서 입은 옷은 농구를 하기엔 거슬렸다. 아직 취기가 남아있어 어이없는 실수는 계속 나오고, 서로 붙었다가 같이 슛 연습을 하면서 점수 내기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둘 다 더는 못한다고 쓰러질 때까지 한참을 뛰었다.

즐거웠다. 농구 코트 위에 드러누운 채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찬 바람에 땀이 식고 술에 취해 몽롱했던 열기도 조금씩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 보자, 전영중.”

 

 

성준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영중의 예상을 깬 것이었다.

 

“대학 리그도, 프로 리그도, 지겹도록 계속 만나서 같이 농구하자. 같은 팀이 아니라도 너랑 농구하는 거 꽤 재밌으니까.”

 

전영중은 옆에서 들리는 성준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차마 고개를 옆으로 돌릴 자신이 없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성준수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심장이 코트 위를 달렸을 때처럼 뛰기 시작한다.

 

그래, 같은 팀이 아니라도 농구는 같이 할 수 있다. 리그에 계속 남아있는 한, 전영중은 앞으로도 성준수를 지겹도록 마주칠 수 있을 거다. 성준수가 오래 보자는 말에는 같이 농구로 살아남자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농구를 했던 친구들 중 이제 계속 농구를 하는 것은 서로뿐이었고, 비주전이었던 시기를 거쳐 농구를 계속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를 몇 번이고 넘겨왔던 이들이었다. 늘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구석이 없는 정반대의 성격으로도 전영중과 성준수가 서로를 자연스레 제 경계 안에 넣은 것은 쌓아 올린 시간과 이런 공통점들 덕분이었다.

 

버텨서 살아남는 것은 전영중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계속 도전하는 것은 성준수가 가장 잘하는 것이다.

 

한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온다. 대학에 붙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곳에서도 주전 자리와 프로가 되기 위한 고비가, 프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오래 살아남는 선수가 되기 위한 고비도 분명 앞으로 넘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 질리도록 보자.”

 

그래도 이제는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옆에 있는 성준수한테 옮은 건지, 겁이 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전영중은 계속해서 과거의 자신과 성준수의 잔상을 쫓았다. 분명 많은 시간과 장소를 거쳐가고 있음에도 영중은 따로 배가 고프다거나 피곤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이런 꿈을 꿀까 싶을 정도로 괴롭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현실이 생각나지 않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일을 지켜보며 다시 선명해지는 기억 속에서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곱씹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 팀원들, 그리고 다른 팀으로 만났던 익숙한 얼굴들이 섞인 대학리그에서 예상외로 친해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특히 성준수와는 더 자주 만났다. 어느덧 다시 겨울이 돌아와 입학하고도 1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요?”

“준향대 성준수, 너랑 친하지 않아?”

 

전영중은 순간 굳어질 뻔한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같은 팀 선배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며칠 전 준향대 농구부와 같이 놀고 찍은 사진을 올린 선배의 SNS 계정이 보였다. 내가 아는 동생이 사진 보고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고. 혹시 여자친구 있어? 아니요, 근데 준수는 연애에 별로 관심 없을걸요. 영중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아무렇지 않은 척 응대했다. 결국 물어보기만이라도 해 달라는 부탁과 그 사람의 SNS 계정 같은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넘겨받았다.

 

성준수는 원래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 초등학생 때는 물론 중학생이 된 후에는 옆 학교 학생한테 고백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영중은 늘 성준수와 함께 다니며 성준수에게 호감을 보이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다. 보통 성준수의 신경질적인 성격이나 험한 말투를 알게 되면 잘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여린 성격의 여동생 성지수가 있어서 그런지 여자애들한테는 그렇게까지 성격 파탄자처럼 굴진 않았다. 늘 날이 서있고 위협적이던 모습 대신 무심한 듯 챙겨주는 모습에 짝사랑을 앓는 피해자들이 생겼다. 정작 그런 쪽으로는 관심도 눈치도 없는 성준수는 유죄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일단 만나보지 뭐.”

 

너랑 같은 팀 선배 부탁이라며, 저번에 만난 적도 있고. 바로 거절하긴 좀 그렇지. 성준수가 덧붙이는 말은 하나도 전영중에게 들리지 않았다. 왜? 성준수가 소개팅을? 너 언제부터 이런 데 관심 있었다고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건데? 목구멍이 콱 막힌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까지는 수업이나 학교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는 운동부였고, 딱히 연애할 시기도 연애할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지금까지는 그냥 상황상 못한 거였고 대학에 오니 연애가 하고 싶어졌나? 성준수는 한 번도 그런 대화 주제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대학에 입학한 후 더 노골적으로 성준수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스멀스멀 불쾌함이 올라왔다. 성준수가 연애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불쾌함은 곧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설마 내가 성준수를 좋아하나?

 

 

성준수에게 소개팅을 할지 물어보고, 성준수가 승낙하고. 그 순간에 자각하게 되는 오랜 짝사랑이라니. 한심한 타이밍이다. 선배한테 자기가 연락해 보겠다는 성준수의 말을 끝으로 전영중은 도망치고 싶었다.

 

“준수는 농구 빼고 재미없는데 소개팅 망하면 어떡해? 얼굴이 다가 아닌데.”

“넌 또 왜 갑자기 시비야 씨바 꺼.”

설마 소개팅이 잘 되겠어, 분명 머릿속에 농구밖에 없는 성준수랑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도 관심이 떨어질 거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전영중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성준수처럼 잘생긴 사람은 흔치 않으며, 길 가다 본 미남을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그런 얼굴을 가진 일반인을 그냥 놓칠 사람은 없다는 거다. 적어도 성준수의 소개팅 상대의 이상형은 얼굴이 다였다. 그리고 체육과는 상관없는 학과의 대학생이지만 농구부인 선배와 계속 친하게 지낼 정도로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취미는 농구 시합 보러 가기. 성준수가 좋아하는 티맥타임 영상도 알고 있다고 한다. 소개팅이 있고 다음 날 바로 성준수를 찾아간 전영중에게 쏟아지는 정보들은 영중을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농구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처음엔 어색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같이 시합 보러 가자고 해서 다음 주말에 또 만나기로 했어. 무덤덤하게 말하는 성준수를 보며 전영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성준수의 애프터날이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전영중은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전영중을 구경했다.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고 성준수가 소개팅 상대랑 보러 간 농구 경기를 검색했다가 막 침대에 드러누운 채였다. 벌써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성준수한테 소개팅 후기와 애프터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성준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한 후부터 전영중은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다.

 

성준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의 자각은 꽤 충격적이었으나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의 이유 모를 답답함의 원인을 찾고 나니 오히려 속 시원했다. 다만 전영중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택을 미뤘다. 성준수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성준수한테 고백하거나 사귀는 그림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영중은 성준수와 거의 10년을 친구로 지냈고, 그 관계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영중이 주로 그것들을 접했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나 영화 같은 것들에서 보았던 사랑은 같은 남자에 어릴 때부터 툭하면 시비를 걸고 싸워댔던 친구와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는 남고였고, 중학생 때 고백을 받은 적은 있지만 거절했다. 전영중이 상상했던 연애는 대충 대학교에 간 후, 혹은 선수가 되고 소개를 받거나 자연스레 만난 여자와의 연애였다. 그러다 때 되면 결혼하고, 가족을 만들게 될 거라고.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성준수는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준수는? 걔는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나? 어차피 준수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확률이 0에 수렴한다면, 전영중은 적어도 성준수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성준수가 연인이 생기면 어떨까, 전영중의 곁에 친구로 계속 남아있는다면 적어도 한 번은 얼굴을 볼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연애하는 성준수를, 내가 모르는 낯선 성준수의 모습을 아는 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훗날 성준수가 모르는 사람과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상상까지 했다가 전영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가 두려웠다.

 

그리고 미래를 알고 있는 전영중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시간이 두려웠다. 오늘은 스무 살, 그 해에서 가장 최악과 최고의 순간을 동시에 맛본 날이었다. 전영중에게 성준수와 관련된 모든 일은 불가항력이라는 걸 깨달았던 날.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던 시간은 어느새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영중의 성준수한테 보낸 카톡의 숫자 1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경기 시작 시간이 4시였으니 경기가 끝나고 저녁도 먹고 아직 같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영중은 몸이라도 움직이면 생각이 덜 날까 싶어 밖으로 나갔다. 가볍게 주변을 달리자 차가운 겨울 공기에 뿌연 입김이 나왔다. 숨을 고르며 멈춰 섰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영중?”

 

돌아본 곳에는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성준수가 있었다. 애초에 대학가 근처, 전영중의 자취방과 성준수의 자취방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같은 동네이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향한 곳이 성준수의 집 근처라니.

 

“...소개팅은 잘 다녀왔나 봐?”

 

뭐, 같이 경기 보고 할 말은 많아서 좋았지. 성준수는 힐끔 전영중을 훑었다. 야 근데 너 안 춥냐? 이 추운 날씨에 밖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건지 영중의 코와 귀 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쩐지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 성준수는 전영중을 집으로 데려갔다. 얇은 외투 하나만 대충 걸치고 나온 모습이라 옷 하나라도 더 던져줄까 싶어서였다. 준수 옷 어차피 내가 못 입잖아,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저 입을 한 번 때려줄까 하다가 무시로 일관했다.

 

전영중은 계속 성준수를 떠봤다. 잘 될 것 같냐는 질문에 성준수는 안 그래도 오늘 헤어지는 길에 상대방이 먼저 고백했다고 말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관심사가 비슷해서 대화가 딱히 끊기는 느낌도 없었고, 처음부터 성준수에게 호감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나왔던 그 사람은 딱히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성준수 역시 생각보다 이 만남이 불편하지는 않았으나 고백을 받은 후에도 이 사람과 사귈 수 있겠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꽂히는 느낌이 없다고 해야 하나? 늘 주변에서 들었던 말로는 그렇게 처음부터 다 맞는 운명적인 만남은 드물다고, 만나다 보면 정이 들고 맞춰가고 그런 게 연애라고는 하던데. 그렇다고 한다면 일단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넌 남의 소개팅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성준수의 질문이 전영중에게 날카롭게 박힌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소개팅 상대와 만날지 고민하는 성준수를 보니 울컥해서, 전영중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

 

그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입 밖으로 낼 계획은 없었는데. 하지만 전영중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그렇게 많은 고민과 걱정들은 막상 성준수를 앞에 두고 있으니 사라지고 없었다. 성준수를 두고 선택이라니, 이미 전영중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오늘 하루는 매 순간이 최악이었다. 친구로 남아 성준수가 연인이 생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을 상상하자 이 하루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데 평생을 그럴 자신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는다. 전영중과 성준수의 시선이 마주친다. 예상치 못한 고백이 충격적이었는지 성준수의 표정은 꽤 놀란 것 같았다. 할 말을 찾는 듯 생각에 잠기는 표정에, 전영중은 갑자기 현실감이 덮쳐 왔다.

 

성준수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순간, 전영중은 밖으로 도망쳤다.


성준수에게 고백했다.

 

도망친 전영중은 빠르게 뛰다가 멈춰서 숨을 골랐다. 방금 전 벌인 일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고백의 답을 듣기 무서워서 도망이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휴대폰은 아까부터 계속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꺼내서 확인하자 성준수의 이름이 화면 위로 뜬다. 전영중은 전화를 받았다.

 

“준수야, 그게...”

“야 미친 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전화 너머로 잔뜩 화가 난 성준수의 살벌한 욕이 박힌다. 전영중은 얼떨결에 지금 위치를 답했다. 고백하고 도망치는 사람이 어딨냐, 거기서 딱 기다려. 또 도망치면 죽여버린다. 협박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전영중의 심장도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까지 숨도 안 고르고 달린 탓인지, 성준수가 고백의 답을 하러 오고 있다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건지. 성준수는 뭐라고 답할까. 차라리 성준수가 진짜 죽이려고 오는 게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전영중.”

 

잠시 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영중은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달려온 것 같은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춤하는 영중의 멱살부터 잡아 올렸다. 방금까지는 어두운 거리에 보이던 인영이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가로등 불빛에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 할 말만 다 하고 도망가면 다냐?”

 

성준수는 짜증을 내며 잡았던 옷깃을 놓았다. 답은 듣고 가야 할 거 아냐. 미안, 전영중의 대답에 성준수도 더 화를 내지 않았다. 방금까지의 화난 목소리 대신 성준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야 영중아.”

“.....”

“솔직히 난 지금까지 너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거든.”

 

그런데,

 

네 고백받고 생각해 보니까 너랑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성준수는 지금까지 여러 번 고백을 받았지만 결말은 항상 거절이었다. 오늘만 두 번 받은 고백, 성준수는 전영중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스러웠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사귀어볼까에 대한 문제도 소개팅 상대의 고백에는 쉽사리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전영중의 고백에는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불가능할 것도 딱히 없지 않나, 전영중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미친 생각을 하고 나서야 성준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자각했다. 그동안 전영중이 그 난리를 칠 때마다 화가 나긴 했어도 전영중이 싫지는 않았던 이유를. 그렇다고 성준수가 전영중을 연애 감정으로서 열렬히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관계를 선택지에 넣은 것처럼 또 모를 일이다.

 

“괜찮으면 일단 만나볼래?”

 

일단 시작해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

 

성준수의 제안에 전영중은 말문이 막혔다. 사귈 수 있을 것 같다는 또 뭐야. 하지만 성준수의 말에는 어떠한 비꼬는 의도도 느껴지지 않아서, 일단 시작해 보자는 제안 역시 싫지 않았다. 성준수도 전영중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무르기 없기다.”

 

너나 도망치지 마, 성준수의 말에 전영중은 작게 웃었다.

 

 

전영중은 성준수와 함께 성준수의 집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근데 너 언제부터 나 좋아했냐? 그러면서도 그 X랄을 떨었다고?”

 

갑작스러운 고백만큼이나 서로의 감정 자각도 갑작스럽긴 했으나, 전영중이 생각해 보면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하자 어이가 없었다. 학창 시절에 지 마음도 모르고 난리 쳤던 건 그렇다 쳐. 그래도 자각한 타이밍이 그때라면 이 새끼가 조금만 더 빨리 말했어도, 망설이지 않았으면 소개팅 나갈 필요 없었던 거 아니야? 일단 저지르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소개팅 상대에게도 거절 연락을 보내야 할 생각에 성준수는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준수야, 너는 고백한 사람한테 말을 왜 그렇게 해... 진짜 최악이야...”

“아니 궁금한 것도 못 물어봐?”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씨바꺼 따지는 것도 X나 많네.”

“우리 사귀기로 한지 3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말이 심하다..”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한마디 더 하려다가 욕먹으면서도 좋다고 헤실거리는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전영중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괜히 낯간지러운 느낌에 기분이 이상했다. 전영중이 미쳤다면 저 성가신 놈이 싫지 않은 나도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성준수 역시 사귀는 첫날부터 전영중과 싸운 기록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스무 살 인생 처음으로 하는 연애, 그 연애의 1일차. 낯선 감각과 설렘이 공존하던 그때의 전영중과 성준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전영중은 두 인영이 시야에서 저 멀리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 때는 사귀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아서 걱정할 게 없었다.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막상 연애가 길어질수록 전영중은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고, 성준수는 그 불안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가 익숙해지고 맞춰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다투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고 담아두지 않는 것이 성준수라면,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 정리에 시간이 필요한 타입인 전영중. 정작 성준수는 집 가면 까먹을 게 분명한, 성준수가 했던 한마디에 늘 흔들리고 잠 못 이루는 건 저였다.

전영중은 그 불안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안다. 성준수는 말투는 험하고 딱히 생각을 숨기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이었지만, 원래 힘든 일을 잘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성격도 강했다. 연인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라 성준수의 곁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때때로 영중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영중은 괜히 억울한 마음에 늘 성준수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귀기 전에도, 사귄 후에도 성준수는 항상 지독하게 싸우더라도 전영중을 내치진 않았다. 성준수의 허용범위가 되는 것, 남들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라는 재확인.

 

그냥, 준수 너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나이기를 바랐다.

내가 너를 의식하는 만큼 너도.

나만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면 비참할 것 같아서.

 

전영중이 성준수에게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열등감과 동경, 우정과 사랑, 집착과 애착, 불안과 안정,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단 한 명에게만 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전영중의 것은 성준수의 몫이 맞았다.

 

 

너나 도망치지 마

 

 

연애의 시작부터 성준수는 정말이지 성준수다웠다. 겁먹고 도망쳤던 전영중을 붙잡은 것도, 망설이고 있던 영중에게 기회를 준 사람은 성준수였다. 전영중은 지난 이별과 재결합들을 다시 떠올렸다. 성준수와 헤어지고 미움받는 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곁을 맴돌기만 하면서 망설였을 때, 원하는 건 따로 있으면서 친구 사이로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만족하려고 했을 때, 그때마다 전영중이 도망치지 못하게 불러낸 것은 성준수였다는 걸. 성준수도 늘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차라리 너도 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처음부터 몰랐다면, 친구에서 더 욕심내지 않았을 텐데. 너도 날 좋아해 줬잖아, 준수야. 내가 널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해 줬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다고... 그러니까 너가 책임져.

 

전영중은 애꿎은 성준수의 탓으로 돌린다. 놓아주려고 할 때마다 이 관계를 다시 놓지 못하게 만든 건 성준수 덕분이었으니, 전영중은 앞으로도 절대 성준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관성의 종착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방학 숙제도 안 해도 되고 매일 게임하고 공놀이만 할 수 있다던 초등학교 농구부 코치의 꾀임에 넘어가서였다. 나중에 농구선수가 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멋있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냥 친구들이랑 농구하는 게 재밌어서 계속 농구를 했고, 기내초에서 기내중으로, 기내중에서 원중고에 이르기까지 정해져 있던 대로 진학을 하며 다른 미래를 떠올려본 적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했을 때, 저를 둘러싼 환경이 급격히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던 고등학교 시절은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떠날 때 그곳에서 남기를 선택했고, 살아남아 제 자리를 만들었다. 대학에 가고 꿈에 그리던 선수가 된 지금까지, 전영중은 항상 자신이 있을 자리를 지켜냈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영중이 농구를 제외하고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은 성준수와의 관계였다. 성준수와 같이 농구하는 것, 연락이 끊기지 않는 친구로 지내는 것, 마침내 연인으로서 그 옆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만들기까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전영중은 늘 성준수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관성은 항상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전영중은 늘 관성처럼 살아왔다. 관성처럼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지키고 있어야 할 자리로, 몇 번이고 돌아간다. 이 긴 여행의 끝에서 관성의 종착지는 어디일지 뻔했다. 다시 성준수의 곁으로, 생각과 동시에 눈앞의 형상들이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전영중이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자취방, 침대 위였다. 휴대폰 전원을 키자 화면은 원래의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예약 취소 알림 하나. 12월 24일, 성준수의 생일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예약한 레스토랑의 예약 취소가 완료되었다는 확인 문자였다. 이거 엄청 고생해서 예약한 건데. 하필 생일은 또 크리스마스 이브라 어딜 가도 예약 전쟁에 사람이 많았다. 며칠 전 홧김에 취소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전영중은 뒤늦게 후회했다. 침대 옆 서랍을 열어 버리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전영중은 결심한 듯 성준수에게 연락했다.


전영중과 성준수가 화해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 후, 첫 데이트는 그로부터 한참 후인 성준수의 생일날이었다. 시즌 중이라 경기 일정을 소화하기 바쁜 데다가 연말 일정이 겹쳐 서로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던 탓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북적거리는 거리의 연인들 사이에서 우뚝 선 키와 운동선수의 체격은 눈에 띄었다. 만석인 가게들에서 여러 번 퇴짜를 맞고 나서야 겨우 식사를 마치고 인파를 가로질러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았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익숙한 캐럴 송, 화려한 불빛 장식들로 가득했던 풍경을 벗어나 한적한 공원으로 가자 방금까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서, 오늘 꼭 하고 싶다는 말이 뭔데?”

 

주변에 아무도 없어졌을 때쯤 발걸음이 멈췄다. 마주 선 채로 전영중은 성준수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번에 너랑 헤어지고 예전 일들이 많이 떠오르더라고.”

 

우리는 분명 또 싸우고 헤어질지도 몰라. 항상 그랬으니까.

 

전영중의 말에 성준수가 설마 또 시작인가 하는 의심의 눈빛으로 영중을 바라본다.

 

“그래서, 네 곁에 다시 돌아올 이유를 하나 더 만들려고.”

영중이 꺼낸 것은 작은 케이스 안에 담긴 반지였다. 원래는 헤어지기 전에도 오늘 데이트할 때 프러포즈할 계획으로 준비했던. 그때 예약했던 레스토랑은 헤어지면서 예약을 취소해 버렸지만, 날짜만큼은 그대로 계획에 맞추고 싶었다.

사실 정석대로 분위기 있는 곳에서 건네주고 싶었는데... 원래 몇 달 전부터 식당도 예약하고 준비 엄청 많이 했거든? 근데 너랑 헤어지고 취소했더니 다시 찾으려고 해도 괜찮은 곳은 다 예약 끝났더라. 괜히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말이 많아졌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손을 잡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오래된 커플링을 빼내고 새 반지를 끼웠다. 처음의 고백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에 가까워 엉망진창이었고, 사귀자는 말은 성준수가 먼저 했다. 그러니 다음 차례는 꼭 먼저 말하고 싶었다.

 

“준수야, 나랑 결혼해 줄래?”

 

이런 타이밍에 맞게 영화처럼 내려주는 첫눈이라던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이라던가. 그런 무드나 낭만은 없지만. 전영중의 인생에서 가장 영화 같은 순간이다. 긴장한 전영중의 모습을 본 성준수가 입을 연다.

 

“영중아, 넌 예전부터 생각이 너무 많아.”

 

곁에 있고 싶으면 있는 거지 무슨 이유를 만들어.

 

핀잔을 주면서도 성준수는 전영중이 나름대로 불안을 극복할 방법으로 내린 결정을 지켜본다. 항상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이 연애의 끝에도 마침표가 있구나. 연애의 끝이 이별이 아닌 다른 관계로 변할 수도 있었다. 이별보다는 낭만적인 결말이었다. 성준수 역시 낭만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므로, 남은 반지 하나를 꺼내 전영중의 손가락에 끼웠다.

 

“무르기 없기다.”

 

성준수는 과거에 전영중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얼마 전에 꾸었던 꿈, 전영중과 과거에 있었던 일이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게 느껴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는 안 도망쳐.”

 

전영중의 대답에 성준수가 환하게 웃었다. 가장 처음의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하면서도, 그때와는 달라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보기 드문 표정에 전영중은 성준수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시선을 옮겨 단단하게 맞잡은 손에 걸린 한 쌍의 반지를 본다.

 

돌고 돌아서,

다시 성준수의 곁이었다.

 

전영중은 웃었다. 비로소 관성의 종착지였다.

- <관성의 종착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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