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준향대 어장파괴남

연하빵 | 태성은재 함유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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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수가 전영중을 잘 아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전영중은 제가 6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고, 중3일 때 기내중에 입학했고, 고3일 때...... 부산에 내려와 지랄했다. 형 왜 전학 갔어요? 당연히 원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랑스럽게 빨간색 저지를 입고 찾아온 새끼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저를 꼬나보며 하는 소리에 성준수는 뭐, 코웃음이나 쳤다. 야. 씨앗호떡 사줄게 먹고 서울이나 올라가.

농구 시작한 지 8년 넘은 이래로 같은 코트에서 공 튀겨본 게 딱 2년이다. 주장 형―하고 따르는 게 귀여운 것도 한 때지, 이제 저와 눈높이도 똑같고 변성기는 진작에 지나 농구부 걸걸한 아저씨 1, 2, 3이랑 다를 게 없는 녀석이 뭐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영중아. 네? 이러는 거 징그럽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뱉자 씨앗호떡을 공손하게 잡고 먹던 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더 베어 물지도 못하고 입 안에 있는 것만 우물거리던 녀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정말 최악이에요. 형 같은 사람한테 질렸어요. 지금 주장 형은 형보다 훨씬 착하고 잘생겼어요. 형 정말 질렸어요."

"한마디만 하자."

"하세요."

"그래도 나보다 잘생긴 애는 없지."

"형은 진짜 최악이에요."

성준수는 제 동생 말고도 속눈썹 밖으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도록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흐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죽죽 우는 녀석이 제법 불쌍해 보였다. 야, 울지마. 매운오뎅 사줄게. 안 먹어요. 물떡도 먹어. 안 먹는다구요. 울지마. 못생겨 보여. 형 진짜 엄청 최악이에요.......

전영중이 부산까지 내려온 이유? 당연히 좋아해서다. 야, 저기 네 팬 왔다. 준수야, 네 사생 왔다. 영중이 첫사랑아, 체육관 앞에서 애기가 기다린다. 농구에 미친 성준수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공공연한 전영중의 짝남이었고, 골키퍼 있는 골대 취급이었으니. 간혹 굴하지 않고 성준수에게 고백하는 학생이 있으면 귀신같이 알고는 기내초와 기내중을 가로지르는 담을 타고 넘어와 형! 사귈 거 아니죠! 저랑 농구해야죠! 라며 외쳤다가 선생님들한테 혼나고 돌아갔다.

물론 성준수는 사귈 생각 없었다. 고백한 친구도, 전영중도. 농구해야지 누구 사귈 시간이 어딨어. 그럼 전영중은 실연당한 얼굴을 했다가,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가, 성준수 옆에 달라붙어 핸드폰 화면 안의 농구 중계를 같이 보곤 했다. 형, 이제 덩크 해요? 아니, 못하는데. 왜 아직도 못해요? 이 시발, 지금 나 긁냐?

작금의 사태는 성준수의 탓도 있었다. 비록 저만큼 크고 아침마다 면도할 게 분명할 두 살 어린 농구부 동생이 달라붙으면 징그럽긴 했으나 싫지는 않았다. 성실하지, 연구도 많이 하지. 슛 봐달라고 붙잡으면 귀찮긴 했어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연습하는 부원을 어떻게 싫어할까. 솔직히, 그래, 일방적으로 사랑받는 기분이 좋아서 모른 척한 것도 있었다. 누가 봐도 애정이 넘쳐나는 시선에 눈을 맞춰주면 아닌 척 딴청 피우는 모습이나, 영중이가 너 많이 좋아하더라 하는 말을 들으면 꼭 제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성준수는 저 좋아한다고 티 팍팍 내는 애새끼에게 여지를 준 채로 12년을 보냈다.

전영중은 기어코 성준수를 쫓아 준향대까지 왔다. 고등부 탑급 디펜더라느니,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준향대란다. 스카우터가 뭐 빠지게 뛰어 어디 하나씩 하자 있는 애들 모아다가 구멍 메우고, 아득바득 한 경기를 따내는 1부 어중간한 대학에. 전영중? 사이드스텝 좋고 탄력 좋고 속도 좋고 슛 좋고 센스 좋고....... 아무튼 다 좋은 녀석이 제 발로 들어왔으니 준향대로써는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성준수는 그게 꼭 제 덕 같아 우쭐했다. 전영중이 있으면 경기가 더 잘 풀리겠거니 안심한 것도 있고. 그 녀석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동 끝나고 연락할게. 이따 봐?"

그 녀석이 고개 숙여 뺨에 입술을 댄다. 그러니까, 그거지? CC? 너네는 씨씨 하지마라. 헤어지면 좆같으니까. 어느 선배의 조언이 떠올랐다.

"전영중, 너 쟤랑 사겨?"

"네? 네."

생각할 새도 없이 튀어 나간 말에 전영중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제 눈치를 살핀다. 설마, 대학생이어도 운동부는 연애 금지에요? 그런 건 아닌데. 연애? 할 수 있지.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연애하면 된다. 고등학생 때처럼 일 년에 대회가 몇 개씩 되는 것도 아니고, 운동 스케줄만 잘 지키면 된다지만. 그렇지만.......

"씨씨 하지마라. 헤어지면 좆같으니까."

"그거 경험담이에요?"

"아니."

"꼭 헤어지라는 건 아니죠?"

"씨바거, 알아서 해. 넌 누구 사귀고 헤어지는 것도 엄마한테 물어보고 하냐?"

꼬치꼬치 캐묻는 말에 성준수가 버럭 화내고 만다. 이 새끼는 헤어지라면 헤어질 것도 아니면서 뭘 자꾸 묻지? 순식간에 더러워진 기분에 성준수는 아무 욕이나 내뱉고 체대 건물로 향했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비이성적인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나랑 사귀어야 하는 거 아냐?

성준수는 고백한 적도 없는데 차인 기분을 맛보았다. 꼭 누구처럼.

전영중은 사귀는 사람이 있다.

애인은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아니다.

전영중은 나 아닌 놈과 사귄다.

그럼 시바 당연히 신경 끄고 공이나 튀겨야지. 애인 있는 어린놈을 뭐 한다고 자꾸 신경 쓰냐.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공을 던져 넣어도 전영중 생각이 머리에서 떨쳐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지금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저와 눈만 마주치면 해쭉 웃는 놈이 진짜로 날 안 좋아한다고?

성준수도 잘 아는 표정이다. 야, 너 레이업은 아냐? 하고 부르면 돌아보던 표정.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퍼져나가는 반가움, 기쁨 그런 것들이...... 초등학교 때랑 하나도 변하질 않았는데도 전영중이 저를 안 좋아한단다. 말이 안 되지.

말이 안 되거나 말거나 전영중은 다른 사람을 사귀었다. 성준수는 버스정류장 앞 카페에서 카페모카를 빨며 전영중과 그 여친을 보았다. 손깍지를 끼고 뭐라고 하는 전영중의 미소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 무슨 말 하면 안면근육 전체로 답하던 녀석인데, 지금은 한껏 끼 부리듯 진지한 표정에서 입꼬리만 움직이거나 눈웃음을 샐샐 친다. 전영중 한정 표정 감별사 성준수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아니, 저 새끼는 왜 끼를 부리지?

나는 왜 쟤 생각만 하고? 성준수가 가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다. 전영중이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끼를 부리든 내 공부하고 운동하면 되는데 전방 500미터 앞의 전영중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순간부터 그 녀석만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쳐다보면 누구라도 시선을 느끼고 돌아볼 만한데 전영중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꼭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성준수는 그것도 짜증 났다. 대체 왜?

가정 하나. 성준수는 개 꼰대라 입학하자마자 씨씨부터 사귄 대가리 터진 후배의 기강을 잡고 싶어 한다―후배든 선배든 경기에만 지장 없으면 애인을 사귀든 원나잇을 하든 아무 관심 없었다. 왜, 작년에도 센터 선배가 여자친구 임신시켰다고 중절하느니 마니 할 때 고민은 좀 했어도 경기력은 그대로라 살려놓지 않았던가. 패스.

둘. 전영중이 제게 치대지 않아 서운했다—걔랑 같은 학교에 있던 게 고작 2년이다. 바로 옆에 붙은 초중고였어도 스케줄 빡센 엘리트 체육인이 학교 오가며 만날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아무리 친해봤자 두 살 차이 형, 동생보다는 또래와 노는 게 좋았다. 실제로 전영중과는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패스.

셋. 성준수가 전영중을 좋아한다.

음.

짧게 침음한 성준수가 마지막 가정을 다시 떠올린다. 내가, 전영중을, 좋아한다. 그래서 전영중이 (아마도) 저를 쫓아 준향대에 왔을 때 기분이 좋았고,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귀었을 때 기분이 상했다. 말 되네.

근데 쟨 애인이 있다니까?

머릿속에서 의관을 정제한 시대 모를 유교맨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애인이 있대도! 그럼 성준수가 지지 않고 같이 소리 지른다. 저 새끼 나 좋아하는 거 맞다고! 그럼 나랑 사귀어야지 왜 다른 애랑 사귀냐고! 수염을 길게 기른 유교맨이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다. 말이 안 통하니 이길 방법이 없다.

"전영중."

"네, 형?"

이것 봐. 방금까지 말도 못 붙일 것 같은 표정 짓고 있던 놈이 부른다고 얼굴이 다 풀어져서는 쭐레쭐레 오는데. 전영중이 턱에 흐르는 땀을 대충 닦으며 아무 말 않는 성준수를 쳐다본다. 아, 그러고 보니 부른 용건이 없었다. 뭐 해줄 말 없나 고민하다 제가 마시려고 가져온 이온 음료나 내밀었다. 저요? 이거 주려고 부른 거예요? 몇 번이나 물은 녀석이 우물대다 음료를 가져간다.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빨갰다. 거봐, 나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너, 나 좋아하지."

그렇다고 이렇게 묻는 것도 계획에 없었다. 자제력을 프리패스해버린 발언에 두둑, 하고 밀봉된 뚜껑을 따던 손이 멈추고, 도로 닫는다. 성준수는 제가 실수했다는 걸 직감했는데, 한편으로는 어쩌랴 싶었다. 기왕 엎어진 물이니 하루 종일 전영중 생각만 할 바에야 끝장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안 마실래요. 괜찮아요."

대답 대신 녀석은 음료를 돌려줬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데, 저보다 키가 조금 큰지라 성준수가 무릎을 살짝 굽히자 대충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와 새삼 부끄러워한다고? 성준수가 몰래 코웃음 친다.

"마셔. 뚜껑까지 따놓고 뭘 안 마신대?"

"안 마셔요. 이런 거 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으면 그래도 친한 편이지."

"저 형 안 좋아해요."

고개를 든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그러나, 아, 성준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전영중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부끄럽다거나 하는 풋풋한 감정이 아니라 수치였다.

삼 년 전처럼 입술을 꼭 깨물던 녀석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형은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전영중은 얼마 못 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러나 경험자와, 경험자의 말을 옮겼던 사람의 예상과 달리 씨씨가 깨져도 그리 좆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업에서 같은 팀이었고, 시간이 맞으면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나중에 알았는데, 준향대 합격했다고 소개팅 받은 동갑내기 옆 여고 친구였단다. 성준수는 다른 사람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알고 싶지 않았으나 수소문한 사람이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법 구질구질했다.

다만, 전영중의 웃는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제가 부르기만 하면 만 하루 만에 주인을 만나는 멍멍이처럼 활짝 웃으며 오던 녀석이 눈을 마주쳐도, 이름을 불러도 '네, 형.'하고 마는 것이다. 성준수는 그게 못내 불만이었다. 왜? 시발, 모르겠다. 전영중에게 너 나 좋아하냐고 냅다 질러보는 걸로 전영중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려 했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전영중 생각만 한다. 그렇지만, 저와 있을 때는 이제 웃지 않는 녀석이 동기들의 시답잖은 말에 눈을 접으며 웃는 걸 보고도 어떻게 모른척해.

아아메 먹을 거지? 아니 난 자허블 아이스. 닥쳐. 아아메로 통일해 오래 걸려. 왁자지껄하게 들어오던 무리가 창가 바 자리에 앉아있던 성준수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침묵한다.

"......난 여기 원두 셔서 별로더라."

"그럼 자허블 사줄게. 영중이 친구들도 같은 거 마실래?"

아뇨. 생각해 보니 학교 오면서 커피를 마셔서. 저도요. 붙잡힌 전영중을 두고 우르르 빠져나간다. 의리 없고 눈치 있는 새끼들.

전영중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제게는 보인 적 없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이다. 어쭈? 물론 성준수는 불편한 기색은 내든 말든 알 바 아녔다.

손수 얼굴만 한 자몽허니블랙티 아이스를 대령했는데도 전영중은 가져가지 않았다. 지난번부터 제가 주는 건 손끝도 대지 않는다. 땀수건, 음료수, 뭐든 간에. 굳이 내미는 걸 무시하고 아이스박스에서 꺼내는 유치한 짓거리에 어디까지 하나 지켜본 지 한 달이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갚으라는 소리 안 하니까 그냥 마셔."

"저 형이 사주는 거 먹기 싫어요. 부담돼요."

"다른 애들한텐 넙죽넙죽 잘 얻어먹고 다니는 새끼가?"

"다른 형들은 안 그러잖아요."

"뭘 안 그러는데."

시선을 피한 전영중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다는 항의에 성준수가 짜증 낸다.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불만 있으면 말을 해. 넌 꼭 그러더라."

"저 형 안 좋아해요."

"그건 지난번에 말했고."

"형 안 멋있어요."

이건 조금 충격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데, 성준수는 일평생 감정을 숨겨본 역사가 없기에 그대로 얼굴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성준수가 할 말을 잃자 전영중이 묵혀놓았던 말을 와르르 쏟아놓는다.

"형 키도 그대로고 벌크업도 잘 안되죠? 기복 있는 것도 여전하잖아요. 덩크도 못 하고, 디펜스도 별로고. 옛날엔 형이 뭘 하든 멋있었는데, 저 고1 때 우리 학교랑 경기하면서 게임 안 풀린다고 태성이 형이랑 싸우던 거 진짜 꼴사나웠어요. 형 작년까지 주전 못 뛰었다면서요. 지금도 제가 밀면 날아가던데 그런 몸으로 무슨 농구를 해요."

순간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주먹을 꾹 눌러 참는다. 이 새끼가 할 말 하라니까 갑자기 평가질을? 그러나 하나같이 맞는 말뿐이라 반박할 수조차 없다는 게 더 분했다. 그래도, 시발,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아는 놈이 그런 말을.......

―모를 수 있지. 내가 발버둥을 치든 말든 전영중이 알 바가 아니다. 내가 뭐라고 전영중의 이해를 구해. 저 녀석과 나는 처음부터 학교 선후배, 그나마도 고등학교부터는 아무 연도 없어졌으니. 고작 2년짜리 선후배라는 건 얼마나 얄팍한 관계던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성준수는 몰래 쌓아두었던 모래성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타인의 애정과 이해를 기반으로 쌓은 이기적인 성이었다. 그만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자존심이 튀어나와 그를 긁었다.

"그럼 준향대는 왜 왔냐?"

전영중은 마침내 허니자몽블랙티를 가져갔다. 갈증이 난 듯 한참을 빨아들이던 녀석이 입을 떼고 중얼거렸다.

"......그중에 가장 최악은 제가 좋아한 거 알고 이렇게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거예요."

거대한 파도가 성준수를 덮쳤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쟤한테 무슨 소릴 한 거지?  남아있던 모래성은 파도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형 좋아해서 쫓아온 거 맞아요. 근데 저 이제 형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하기로 했어요. 그만 좋아할래요."

훌쩍. 전영중이 기어코 코를 울렸다.

"제가 너무 불쌍해서요."

성준수는 차였다. 고백한 적 없는데 벌써 두 번이나 차였다. 직진 외길 인생, 선택을 후회한 적 있어도 시발 내가 해내고 만다며 어떻게든 극복해 낸 성준수가 처음으로 시간이 되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좆같은 소리를 하는 저를 기절시키고 솔직하게 고백이라도 할 텐데. 영중아. 내가 생각보다 널... 널...... 시발, 그거 했다.

생각을 바꿨다. 그냥 전영중 속 긁지 말고 지금처럼 지낼걸. 좋아한다는 말 하나 못하는 정신 빠진 애새끼가 나라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어도 자신이 제법 개새끼라는 건 알겠다. 그래도 성준수에게는 객관적인 시선과 타인의 의견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서울 근교의 지상고 출신들을 모은 건 그래서다.

"전하 시발, 쓰레기소서?"

"쓰레기 둘."

"셋. 니 쓰레기가."

"삼진 쓰레기로 개쓰레기가 되셨습니다."

"뭐, 이 새끼들아?"

울컥 내뱉는 말에도 이제 겁먹는 녀석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만 주워 먹는 놈 중 서은재를 쫓아 기어코 서교대를 뚫고 연애까지 성공한 공태성만 애꿎은 머리를 쥐어짜며 '진짜가? 진짜 제정신이가?'를 반복했다.

"원중 4번, 걔 하향 지원해서 전하 쫓아간 미친 사랑꾼 그걸, 낚시대도 안 꽂았는데 알아서 어장에 입주한 물고기를 방생시키다 못해 궁둥이까지 차버렸잖아요!"

"뭐라는 거야?"

"갖다줘도 못 먹을 거 보니 전하는 그냥 남한테 상처 주지 말고 평생 혼자 사소서."

"내가 미련 남았으면?"

"양심이 없네."

대패삼겹살 다섯 점을 한 젓가락에 집은 진재유가 고요히 말했다. 조금 전까지 미련 철철 넘치던 성준수가 드디어 내가 잘못된 건가? 라는 사고를 하게 된다. 진재유는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그 나이엔 원래 입시가 제일 힘들다)를 함께 극복한 전우이자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프로급 포인트가드니까.

"저, 제가 괜찮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별로 안 궁금하지만 상호, 말해봐라."

"야구방망이로 뒤통수쳐서 기억 리셋하고 호감도를 처음부터 다시 쌓는 건......."

"네가 먼저 맞아보고 얘기하자."

아닙니다. 기상호가 경건하게 고개를 내리고 대패삼겹살을 불판에 올린다.

별 소득 없이 성준수는 쓰레기 판정만 받았다. 그것도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쓰레기. 걔한테 날 좋아하냐고 사실 적시성 질문한 것만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쓰레기가 될 수 있나?―이 말에 공태성은 그럴 거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왜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세상엔 타인이 들추어도 괜찮을 게 있고 아닌 게 있다고.

누군가 성준수에게 전영중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데, 전영중은 아니었나 보다. 물은 게 그 당사자라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해서? 동성연애가 흠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찾아가 다시 물을 수도 없기에 성준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나 좋다는 새끼를 뻥 차서 내쫓은 쓰레기고, 전영중은 나를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전영중이 스스로를 불쌍하다 생각하게 만든 개쓰레기다.

어딘가 착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성준수의 기분과 상관없이 해는 떴고, 늘 그랬듯이 체육관으로 출근했다. 주말이라고 감독은 팀을 나눠 연습경기를 진행했다. 같은 팀이 된 박병찬이 팀원들에게 일일이 주먹을 맞대며 분위기를 올렸다. 전영중은 1학년 중 유일하게 스타팅으로 뽑혀 원정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성준수의 반대편 코트에 섰다. 문득 눈을 마주치자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저것도 본 적 있는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상대 팀을 이겨 먹으려는 표정. 적어도 제게 향한 적은 없었다. 농구공이 높게 던져졌다.

기복 있는 슈터라고 해서 성준수가 만만한 건 아니었다. 전도유망한 슈팅가드에게 스몰포워드가 달라붙어 도통 공을 만질 기회가 없었다. 박병찬을 막으러 헬프디펜스를 가다가도 성준수가 공을 받을 공간이 생긴다 싶으면 바로 붙는다. 망할 자식. 몸으로 밀어도 꿈쩍도 안 해 성준수는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형, 오늘 공 만져볼 수는 있겠어요?"

"이 새끼가 형한테 트래시토크를 하네? 너 디펜스 잘한다고 칭찬이라도 해줘?"

"걱정돼서 그래요. 뛰어다니다가 체력 떨어져서 슛도 못 하고 벤치 갈까 봐."

중앙으로 빠지려던 성준수가 단단한 몸에 틀어막힌다. 조급하게 한 번 더 부딪힌 성준수가 몸을 돌려 코너로 뛰었다. 곧장 쫓아오던 전영중이 센터의 스크린에 걸렸다. 덩치 둘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코트 반을 가로질러 들어온 패스를 받아 뛰어오른다. 깔끔한 호선을 그린 농구공이 림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3점이 더해진다.

"걱정마라. 이딴 몸이어도 슈터는 할 수 있거든."

짧게 숨을 들이킨 전영중이 뒤돌아서 뛴다. 거구의 남자 아홉이 순식간에 하프코트를 점령했다. 멀리서 천천히 공을 튀기며 오던 포인트가드가 전영중에게 공을 돌렸다. 돌파하는 녀석을 견제하던 파워포워드에게 스크린이 걸렸다. 스위치! 성준수가 외치며 달려가 손을 뻗었다. 멈칫한 녀석이 코트를 빠르게 훑는다. 코너? 센터? 전영중 스타일로 보면 돌파는 아니다. 최대한 손을 뻗어 패스를 방해하는데 녀석이 어깨를 들이밀었다.

 "욱!"

 여기서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온다고? 숨이 막히는 충격에 몸이 휘청였다. 저를 비켜 돌파하는 전영중에게 따라붙어 뛰어올랐다. 쿵! 공중에서 부딪힌 몸에 성준수가 거의 튕겨 나가듯 바닥을 굴렀다. 전영중이 안정적인 자세로 훅슛을 날린다. 깔끔하게 들어간 공이 성준수의 옆에 떨어져 통통 튀었다.

 "오늘따라 영중이가 거치네. 괜찮아?"

 "그러게요. 포스트업 잘 하지도 않더니."

 박병찬이 내밀어 준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공중에서 얻어맞은 가슴께를 몇 번 주무르고 만다. 근육이 잘 붙어 단단한 어깨였다. 뛰는 자세가 다 무너졌었다지만 똑같이 공중에서 부딪혔는데 저만 나자빠진 게 생각보다 체급이 많이 차이 나나 싶었다. 저보다 근육이 잘 붙는 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냥, 잘 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애라 그런가.

2쿼터 중반 이후 박병찬이 빠지면서 홈팀 유니폼 쪽이 조금씩 밀렸다. 4쿼터에 박병찬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결국 5점 차이로 졌다. 3쿼터 이후 벤치에 앉아있던 성준수가 후배들 등을 두드려 줬다. 연습경기였으니 치열하게 할 것도 아니었으나 승부욕 강한 체육계 아이들이 아쉬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생했다고 원정팀 유니폼 녀석들도 두드려 주다 전영중과 눈을 마주하고는 머리만 쓸어준다. 녀석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준수 형!"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는데 전영중이 급하게 뛰어왔다. 해가 져도 이제 선선하지 않은 날씨였다. 버스가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급한 것도 없는데 전영중은 뛰어오느라 막 씻고 나온 얼굴에 땀이 맺혔다. 집에 가면 또 씻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죄송해요."

"뭐가?"

"포스트업 한 거요."

"플레이 잘해놓고 왜 사과해?"

"포스트업 안 해도 되는데 했어요. 형이라서."

"일부러 인성질 했다?"

전영중이라면 잘 안 하는 플레이긴 했다. 제가 돋보이기보다는 주변에 공 돌리기 좋아하는 녀석이 무슨 일인가 했지. 나름 쌓인 게 있으니 한번 박살 내보겠다고 들이민 거다.

성준수의 정곡인지, 왜곡인지 모를 정리에 전영중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잘했어."

"네?"

"너 성격 나쁜 거야 이미 알고.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밀고 들어가야 할 때도 있는 거잖아. 잘했어. 좋은 판단이었고."

"화 안 내요?"

"왜, 내가 포스트업 당했다고 화풀이할 속 좁은 놈으로 보여?"

화낼 줄 알았는데요.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전영중은 손가락만 움칠거린다. 저렇게 말해도, 못 막을 거 알고 포스트업 한 거니 기분 나쁠 만했다. 선수로서 알고도 못 막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성준수가 벤치 옆을 두드리자 전영중이 쪼르르 가서 앉는다. 성격 나쁘다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순둥이가 맞는 것도 갖고. 턱을 괴고 빤히 봐도 예전처럼 시선을 돌리거나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거 보면 무언가 달라지긴 했구나, 싶었다.

"미안하다."

"형이요?"

"너한테 나 좋아하지 않냐고 한 것들."

아. 겨우 침전되었던 감정이 진탕이 되었다.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대놓고 성준수 쫓아다니는 애 취급하는데 본인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성준수가 자신의 감정을 동경으로 착각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평생 고백하지 않아도 친한 동생으로는 남을 수 있으니까.

"......형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고백해봤자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차일 거 같아서 일부러 안 했고."

"잘 아네."

"그래서 대학 오면 고백하려 했는데......."

성준수가 원중고를 떠났다는 건 중2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겪어 보는 건 또 별개였다. 1학년까지는 있었다고 하니까 혹시나 3학년 형들이 가끔 준수형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오래전에 떠난 사람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입학 전 합숙이 끝나고 막간에 부산에 내려갔다. 그래도 계속 농구할 테니 대학 가서 만나자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형이 징그럽다고 했잖아요."

다 큰 남자애가 쫓아다니는 거. 생각해 보니 그랬다. 동경이라기에는 끈질겼고, 좋아하는 감정으로 가면 성적지향이 문제가 된다. 아니면 단순하게 자기가 성준수의 취향이 아녔을 수도. 열일곱에는 그게 그렇게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제가 가여워서.

"뭐,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징그럽다고?"

"그리고 대충 먹을 거로 무마시키려고 했어요. 매운오뎅이랑 물떡 사준다고. 형 맨날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먹을 거로 대충 때우려 드는 거 알아요?"

"야, 미친, 나 그런 쓰레기 아냐!"

"맞을걸요?"

이미 쓰레기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부정하자니 양심이 아프긴 했다. 그렇지만 정말 아니었다. 전영중한테 뭘 사주려는 건 쟨 울상이다가도 입에 뭘 넣어주면 오물오물 씹으며 방긋 웃는 게 귀여웠으니까. 볼이 터지도록 밀어 넣으면 동글동글하니 귀여웠으니까. 하여간 전영중은 어렸을 때부터 다 커서까지도 복스럽게 잘 먹는 게 귀여워 입에 자꾸 뭘 물려준 건데.......

아, 시발. 성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생각보다 전영중을 오래전부터 좋아했구나.

교내로 들어오는 유일한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회차 지점인 학교 정류장에 잠시 버스를 세우고 기사님이 자리를 비운다. 성준수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옆에 앉은 전영중 허벅지만 툭 쳤다.

"가라."

"형은 안 가요?"

"나는 좀 더 있다 갈게."

"형은 저 좋아해요?"

"어."

기습적인 물음에도 성준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한다. 오히려 당황한 건 전영중이었다. 성준수가 들춘 제 상처가 아파 홧김에 뱉어본 말인데 이렇게 담담하게 긍정할 줄은 몰랐다. 아니, 긍정이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지.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엉거주춤하게 선 전영중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근데 그건 내 문제고. 네가 신경 쓸 거 없다. 가라."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기사님이 버스로 돌아온다. 학생, 안 타요? 엉겁결에 버스에 올라탄 전영중이 카드를 찍고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학생 한 명을 태운 마을버스가 길을 달려 학교를 벗어난다.

언제부터 성준수를 좋아했더라.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대고 이미 망해버린 사랑의 기억을 헤집는다. 처음에는 그냥, 레이업 슛 알려주는 잘생긴 형이었다. 경기에 나가서 클러치 슛도 거침없이 던질 줄 아는 형. 팀을 구하는 슈터가 되고 싶다는 목표 의식 확실한 형. 나만의 시간을 만들 거라던 형.

언제였더라, 농구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마지막 슛을 던질 기회가 생겼다. 그때 준수 형은 왜 못 던졌더라. 부상이었나? 제게 공을 던지라던 코치의 말에 혹시나 못 넣고 경기를 망칠까 엉엉 우는데 벤치에 앉은 성준수가 불렀다.

야. 야, 전영중. 이리 와봐. 새끼야, 그만 짜고. 못 넣어도 괜찮으니까 그냥 던져. 아이 씨, 그냥 던지라니까? 아니, 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너 그거 넣으면 피카츄돈가스 사줄게. 두 개. 넣으면 피카츄돈가스 내가 사주는 거고, 아니면 네 돈으로 사 먹는 거야. 그래. 가서 피카츄돈가스 따와.

별 이상한 응원법이었지만 어쨌든 전영중은 인생 최초의 클러치샷을 성공시켰다. 승패의 중압감을 피카츄돈가스로 치환해서. 그리고 성준수는 군말 없이 피카츄돈가스를 두 개 사주었다. 같이 먹자며 하나를 성준수에게 내밀긴 했어도, 약속을 지키는 두 살 위 형이 엄청 부자 같고 멋있어 보였다. 그때부터였나보다. 점프력이 덩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도, 몸싸움에서 한참 밀려도 여전히 겁 없이 달려드는 성준수가 멋있어서.

삐익. 길게 하차벨이 울린다. 학교에서 두 정거장 지나 주택가에서 전영중이 내렸다.

"형, 저 영중인데요."

-어.

"오늘 경기 이겼으니까 피카츄돈가스 사주세요."

-뭐?

성준수가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새끼. 몇 년을 우려먹냐? 웃음기 섞인 타박에 전영중은 안도감을 느꼈다. 형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구나.

-클러치 슛 네가 넣은 건 아니니까 피카츄돈가스는 못 사주고, 떡튀순 어때?

"좋아요."

-지금 어디냐?

미지근한 초여름의 밤바람이 불었다. 형, 여기가요....... 다행히도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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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너무 좋아요 으아아아악 연하빵인것도 좋고 준수가 영중이 귀여워하는 것도 좋고 기어코 준향대까지 쭐래쭐래 따라온 영중이가 너무너무 커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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