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23.05.16 영중준수

뱀파이어 AU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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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어 표현 주의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독에 마비된 듯 옴짝할 수 없는 몸과 그럼에도 구속하듯 짓누르는 무게가 기껍다. 제 위에 올라탄 짐승을 안아주고 싶은데 손끝조차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더 깊이 이빨을 박아넣도록 상체를 안아 올린다. 전영중은 멍한 눈으로 제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갈급하게 움직이는 목울대 아래로 맞닿은 두 개의 심장 중 하나만이 맥동한다. 그 하나마저 멈추면, 비로소 저를 끌어안은 짐승과 같은 길을 걸을 자격이 주어진다.

죽음은 이렇게나 달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전영중이 짐승을 만난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구석에 아무렇게나 박혀있던 그것 위로 뽀얀 먼지가 앉아있었다. 적어도 일 년은 넘게 방치된 것 같았다. 그래서 전영중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시체였다면 먼지가 앉을 리 없으니 누군가 버리고 간 예쁜 인형이라 생각해서다. 어느 부자의 악취미라 생각할 만큼 짐승은 창백한 피부에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말할만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자 밀도 있는 말랑한 감각이 생경했다. 인형의 피부도, 박제의 느낌도 아니었다. 온기를 지니지 않은 가죽의 느낌을 다시 확인해 보려는데, 하얀 먼지가 쌓인 속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흑요석 같은 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람 같지 않은 모습에 머리가 다 큰 어른이라면 괴물이라 소리치며 도망쳤을지 모르나 전영중은 아니었다. 그는 괭이와 횃불을 들고 괴물을 태우는 대신 제 보석을 집으로 초대했다. 외로움에 지친 짐승이 그 초대를 받아들인 게 첫 번째 실수이리라.

가정교사로 집에 녹아든 짐승이 순진한 도련님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 지식은 우습게도 흡혈종을 만났을 때 해야 할 행동이었다. 해를 찾아 도망친다. 큰 소리로 주변에 도움을 청한다. 불이 있으면 지져버린다. 무엇보다, 먼저 말 걸지 않는다. 그럼 전영중은 짐승의 허벅지 위에 궁둥이를 붙이며 되물었다. 깊은 숲속이라 햇빛이 안 들면? 주변에 어른들도 없으면? 불은커녕 라이터도 없었는데? 그리고 말은 안 걸었는데? 그럼 괴물은 피식 웃으며 동그란 뒤통수에 딱밤을 놓았다. 최소한 집에 초대하지는 말아야지. 그럼 난 가정교사를 잃게 되는데도?

전영중이 보았을 때 책에 적힌 내용은 전부 엉터리였다. 오랜 잠에서 깨면 피부터 갈구한다던 짐승은 제 앞에 살이 연한 어린 인간이 얼쩡거려도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온몸의 피가 사라져 죽은 괴변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이도 없었다. 볕에 나서기는 꺼렸으나 구름 낀 날이면 함께 산책도 했다. 만월이 뜬 날에 일가족을 살해하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달이 기울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굳이 책과 같은 부분을 찾아보라면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외모가 변하지 않는 정도? 한참 어른으로 보이던 그와 점점 눈높이가 비슷해지고, 열아홉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아, 그의 시간은 이즈음 멈췄구나.

"넌 왜 계속 혼자 있던 거야?"

"몇 번을 물어? 흡혈종 여럿이 몰려다녀봤자 사람 잡아먹다 사냥당하기만 한다니까."

그렇구나. 전영중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짐승을 뒤에서 끌어안고 하얀 목에 입을 맞췄다. 짐승은 직전에 그런 이유로 동료-클랜이라고 표현했다-들이 모두 사냥당했고, 도망치는 것에 질려 잠들기를 택했다고 한다. 우리 클랜은 사람을 헤친 적도 없는데, 단순히 무리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냥당했다고. 짐짓 슬프다는 어조였지만 전영중은 혹여나 짐승이 잠든 사이 누군가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을까, 하는 생각에 매몰되어 그를 달래주지 못했다. 이 짐승을 제가 찾기 전에 누군가 죽였다면, 하는 가정만으로 속이 뒤틀려 안은 팔에 힘을 더한다.

그와 동료들이 사냥당한 것도 모두 나와 만나기 위한 높으신 누군가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운명론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시간이 멈춘 몸에 난 유일한 두 개의 상처에 이를 세운다. 두 마디 간격의, 피부가 찢어진 상흔을 깨물자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참아주던 짐승이 얼굴을 눌러 뗀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억센 힘으로 밀어내는 와중에 제 얼굴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너와 같으면 좋을 텐데."

"도련님. 인생이 편하니까 대가리 터진 소리 막 하지?"

"하하, 아니야. 정말 너랑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래."

"그거 수집욕이야. 부자 새끼들 인생이 무료해서 특이하고 이상한 거 모으기 좋아하던데, 네가 딱 그 꼴이라고."

"그럼 그렇다고 해.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게 너인걸."

그러면 에휴, 하고 한숨과 함께 넘겨버리는 너라서. 짐승이 얼마나 살아왔는지 알 수 없으나 터무니없이 어린 애 취급하기에 무례를 눈감아 주는 것도 있다. 어느덧 그의 키를 훌쩍 넘었으나 짐승은 여전히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혼자 놀러 다니는 10살 어린 애처럼 다뤘다. 전영중은 그것이 좋으면서도 견딜 수 없었다. 진짜 어린애라면 이런 음습한 소유욕 따위 자각조차 못 할 테니까.

그 저택에는 늙지 않는 가정교사가 산다. 자꾸 저택의 하인이 바뀌고, 주인 내외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어린 도련님을 홀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하인을 죽여 제 배를 채우는 뱀파이어가 있다.

오래된 흡혈종에게도 귀는 있다.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에 그는 지도를 펼쳤다. 혹시나 이 집에 불미스러운 일이 닥칠까,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사냥꾼들의 동향은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거점. 최근 사냥이 있었던 장소. 탈출로를 찾던 그의 손가락이 멈춘다. 현상금에 미친 사냥꾼이 들이닥쳐도 사람만 산다는 걸 알면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정한 그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방을 나섰다. 처음부터 가진 것 없이 왔으니 떠나는 길도 그러했다.

"아직 초저녁인데 어디가?"

"너도 알잖아. 사냥꾼이 근처까지 왔어. 내가 적당히 유인하면서 도망치면 이 집에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거 내가 낸 소문 듣고 온 거야."

저택의 하인이 바뀌는 거?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이 고되다고 그만두는 사람이야 매주, 매달 나오니. 주인 내외? 장성한 아들이 있으니 저택에 붙어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휴양지에서 긴 휴가를 만끽하는 중이다. 어린 도련님을 홀리고 배를 채우는 뱀파이어? 이건 어느 정도 맞다. 전영중은 그의 짐승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뱀파이어는 소중히 키운 정원의 꽃들로 주린 배를 채워 정원사를 울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이 집에 피가 뿌려진 적은 없었다. 그러니 소문 중 옳은 것은 늙지 않는 가정교사뿐이었다.

"너 미쳤어? 내가 걔네는 미친 족속이라 엮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렇지만 우리가 피로 묶이면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였잖아. 안 그래?"

"뭐?"

짐승은 기이하게도 흡혈종의 본능을 지나치게 잘 억누를 줄 알았다. 전영중은 아무리 기다려도 제 목덜미를 뜯지 않는 짐승에게 조바심이나 책을 뒤졌다. 그들이 가장 위험할 때. 이성을 잃고 닥치는 대로 생명을 앗아갈 때.

등 뒤에 들려 있던 은검이 갈빗대를 가르고 비스듬히 몸속을 파고든다. 감히 날 두고 가버리겠다는 짐승이 원망스러웠다. 침범한 이물에 멈춰버린 짐승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격통에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아 내던진다. 은검과, 그의 주인이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처박히고 피가 터져서야 전영중은 짐승이 저를 정말 많이 아끼고 봐주었구나, 생각했다.

은에 찔린 자리에서 새카맣게 죽은 피가 터져 나왔다. 최소한으로만 유지하던 생명이 걷잡을 수 없이 새어나갔다. 피가. 살아있는 것의 피가 먹고 싶었다. 눈앞이 어지럽다. 짙은 혈항을 좇고, 그것이 제가 아끼던 아이에게서 난다는 것을 깨닫고, 그 피를 터트린 것이 자신임을 아는데도.

아이는 너무나 달아 보였다.

10년 전 미처 하지 못했던 의식을 한다. 무방비한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고 배어 나온 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곳에 있는 동안 죽은 짐승의 살도 먹어봤으나 살아있는 인간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성이 날아가는 황홀한 맛에 그 고기를 주었던 것이 누구였는지도 잊은 채 짐승은 사냥감을 안아 올렸다. 더 깊게 이를 박고 턱을 당겨 찢자 한입에 삼키기도 어려울 만큼의 혈액이 쏟아진다.

한참 고개를 처박고 식사하던 짐승이 거의 말라가는 상처에 아쉬워하며 길게 핥았다. 그제야 붉게 물들었던 눈이 아이가 좋아하는 흑요석 빛으로 돌아왔다. 피가 빠져나간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아. 짐승의 턱이 떨렸다. 그의 후회는 늘 이런 식이었다. 차라리 죽을걸. 타인의 생명을 연료 삼아 살아가느니 진작 죽어야 했는데. 왜 그와 가까운 이들은 항상 그의 손에 죽게 되는지. 그의 두 손이 자신이 아끼던 아이의 목을 감싸 쥔다. 이대로 죽으면 제 혈족이 되어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살 바이야, 너도 나처럼 비참하게 살 바에야.

아무리 짐승이어도 사랑하던 아이를 두 번이나 죽일 수는 없었다. 짐승은 차라리 사냥꾼들이 아이를 빨리 발견하여 저처럼 짐승이 되기 전에 죽여주기만 바라며 저택을 떠났다.

"준수야, 보고 싶었어."

그러나 신은 늘 성준수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신을 등진 지 오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차라리, 씨발, 그때 이 새끼 목뼈를 부러트리고 왔어야 했는데. 바닥에 박힌 손을 빼내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미친, 흡혈종이라는 새끼가 은으로 된 말뚝을 써? 미친 또라이 새끼.

하체를 구속하고 올라타 그를 지켜보던 전영중이 만족한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난번에는 철로 된 말뚝으로 손을 박았더니 제 손이 박살 나든 말든 그대로 전영중을 후려치고 도망갔다. 은을 쓴다는 게 꺼림칙했지만 끝을 나무로 마감한 은말뚝을 사용한 게 정답이었다. 저 정도 상처면 회복하는데 큰 부담도 없을 테고. 전영중은 신이 나서 성준수의 셔츠 단추 몇 개를 풀고 얼굴을 묻었다.

"씨발아, 깨물기만 해봐."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자식 이 지랄. 그럼 너 이거 근친이야."

"호적에 안 올라갔으니 괜찮아. 그보다 옛날처럼 다정하게 불러주라. 영중아, 하고."

"내가 언제 영중아라고 불렀, 아! 씨발아!"

깨물지 말라니까! 입버릇 나쁜 애새끼가 기어코 목덜미를 깨문다. 두 마디 간격의 찢어진 상처. 어렸을 때부터 거기만 집요하게 만지작거리니 이제는 틈만 나면 상처를 내고 헤집기 바빴다.

흡혈로 인해 뱀파이어가 된 관계는 으레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전적으로 새겨진 경외라고 해야 하나, 부모보다는 조금 더 절대적인 애착 관계다. 전영중은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유일한 클랜은 자신이고, 그를 두고 죽을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준수, 나 먹버했으면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다정하게 대해줘야 하는 거 아냐?"

"먹버는 씨발. 니 꼬라지를 봐라. 내가 다정하게 대해주게 생겼나. 조그마할 땐 귀엽기라도 했지."

"나 귀여웠어?"

"아니, 징그러웠어."

물론 성준수는 우리가 같이 있으면 사냥당한다며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막 흡혈종이 되었을 때도 버리고 가더니, 전영중 머리 한 올만 보여도 기가 막히게 잘 튀었다. 사냥꾼들 피해서 둘만의 세이프 하우스도 만들어 놨다는데 들은 척도 안 해서 몇십 년째 이 숨바꼭질 중이다.

아,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막 죽었던 참이긴 했는데....... 일어나자마자 배는 고프지. 밖은 소란스럽지. 제 주인이 죽은 줄 알고 몸을 옮기던 하인의 목을 물어뜯고, 사냥꾼도 하나씩 잡아먹었다. 성준수가 넘겨주고 간 힘이 꽤 많아서 다행이었다. 본인도 경황이 없어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제 목덜미를 물고 장난치기 바쁜 전영중 아래로 무릎을 세운다. 음, 준수야 그렇게 하면 아래가 조금....... 몸을 굳히고 눈을 마주치자 생기는 공간으로 성준수가 재빨리 발을 넣어 걷어찼다. 우드득, 하고 뼈나 나무 따위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힘 조절 안 해도 되는 몸이라는 거 하나는 좋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 대신 몸을 일으키자 깊게 꽂혀있던 은말뚝이 손과 같이 뽑혀 나온다. 나무 손잡이를 이로 물어 빼낸 성준수가 징그럽다는 듯 멀리 말뚝을 던져버렸다.

"준수야, 나 아파......."

"더 안 패는 걸 다행으로 여겨. 너 오늘 더 열받게 했으면 척추 뒤로 접어버리려고 했으니까."

"이미 접힌 거 같은데......."

뭐? 성준수가 뒤돌아보자 부러진 나무에 기대앉아 앞으로 꺾인 무릎을 수습하는 전영중이 보였다. 저 새끼가 틈만 나면 구라를 치네. 질린 표정을 지어도 제 아들놈은 나 걱정한 거야? 하고 미친 소리만 지껄인다.

"나 간다. 찾지 말고."

"응. 크리스마스 전에 또 봐, 자기야."

불쑥 올라오는 중지에 전영중은 설레설레 손만 흔들어 배웅한다.

처음에야 자신을 밀어내는 성준수가 원망스러웠지만 그의 불안을 아는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무서워 떠나는 거라면, 전영중은 몇 번이고 성준수를 찾아 자신의 불멸을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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