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ard Day to Die

A Hard Day to Die 7

마지막 편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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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다고 진짜 오냐?"

"당연히 와야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

"언제는 하고 싶은 말 못 해서 입 다물었나 보다? 야, 야, 뭐해?"

방 안에 저를 밀어 넣은 전영중이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헬멧. 장갑. 인이어. 방탄조끼. 급기야 전투복 지퍼까지 내리는 손을 붙잡았다. 왜? 뭘 왜긴 왜야. 미쳤나, 이게.

"준수, 그런 꼴로 여기서 어떻게 탈출하려고?"

"그럼 맨몸으로 나가서 총 맞고 죽을까?"

"무슨 소리야. 총을 왜 맞아?"

숲에 왔으면 숨 딱 참고 나무인 척해야지. 전영중이 구석에 놓았던 옷가방을 펼쳐 보인다. 검은 수트에 구두까지, 완벽한 풀세트다. 아, 마피아인 척하자고?

"되겠냐? 얼굴 다 팔렸는데."

"장담하는데 이게 확률 더 높아. 방금은 헬멧에 가려서 얼굴 못 봤을 거고, 쟤네 옐로우몽키들 구분 못 한다니까?"

물론 난 잘생겨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준수는 흔남이라 못하겠지만. 실실 쪼개는 얼굴에 수트케이스를 낚아챈다. 이 새끼 왜 이리 텐션이 높지?

물론 성준수도 정상은 아니었다. 묘한 고양감에 그래, 씨발, 괜찮겠지 따위의 대책 없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작전 중에 이런 기분이면 높은 확률로 좆되는데. 몰라, 전영중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전투복 지퍼를 쭉 내리고 옷을 벗는다.

"진재유, 들리지? 전영중이다. 성준수랑 합류했어."

옷을 갈아입느라 인이어를 빼둔 사이 전영중이 교신한다. 잠시 무전을 듣던 전영중이 얼굴을 구기더니 성준수의 무전기를 건넨다. 뭔데? 셔츠에 팔을 꿰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파일은 목표가 맞다는데......."

-업로드되다 끊겼다. 눈치챘던가, 아니면 아까 교전에 뭐가 잘못됐던가.

아, 씹. 성준수가 이마를 짚는다. 그럼 컴퓨터에 꽂아놓은 USB를 회수해야 한다.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파일 다시 실행시켜야 해?"

-업로드 끊기면 자동으로 스크래핑하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 안 그래도 된다. 다만 이제 파일 복사 시작했을테니.......

"얼마나 예상해?"

-30분.

이 건물에서 30분을 버티고 USB 회수까지 하라고. 당장 탈출해도 모자랄 상황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전영중을 보자 어깨만 으쓱인다. 당장 나가야 한다고 지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한 태도다. 너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 그 누구보다 과부하 걸리도록 머리 굴리는 놈이다. 그런 놈이 여기까지 쫓아왔다? 절대로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잘 안다. 제 생각에 해서 안 되는 일이라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접선했을 때 자료만 받아 가는 게 아니라 성준수를 기절시켜서라도 막았을 것이다.

정보부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나온 거다. 전영중만이 아니라 그 사람 역시 이번 작전에 자기 목을 걸었고. 그러니 지금도 안 말리지. 계획대로 증거를 확보해 정치인의 모가지를 물어뜯을 각오까지 마친 게 분명하다.

다 때려치우고 잠적하는 방법도 있지만, 전영중이 그런 계획은 마련해 뒀을 리 없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잘 알듯, 전영중 역시 성준수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

성준수는 의무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애인의 목숨까지 판돈으로 올라갔으니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러니 가야 할 곳은 정해진 셈이다.

딱 떨어지는 셔츠 위로 체스트벨트를 맨다. 수트 안주머니에 무전기를 넣고 귀 뒤로 돌려 끼운다. 검정과 푸른색이 교차하는 넥타이를 바짝 죄고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해봐야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백업 간다. 태성이. 다은이랑 희찬이 위치 파악하고 합류해.

-넵.

훌훌 벗은 옷과 소총은 방구석에 처박는다. 전영중이 창고에서 왁스를 찾아 손에 묻혀 문질렀다.

"뭐하냐?"

"원래 마피아는 간죽간살인거 몰라?"

성준수의 머리를 쓱쓱 넘겨 정리하더니 웃는다. 음, 조금 잘생겨졌네. 그러더니 제 머리도 손으로 쓸어 반을 넘긴다.

"너는 이와중에......."

질린다는 표정이던 성준수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버려둔 옷가지에 손을 문질러 닦던 전영중이 올려다본다. 준수, 왜? 시발, 전영중 천재인가. 갑자기 왜 칭찬하지? 불안하게?

성준수가 넥타이를 당기며 목 끝까지 잠갔던 셔츠 단추를 하나 푼다. 전영중은? 목덜미를 잡아채는 손에 단번에 단추 두 개가 날아갔다. 하나를 더 풀고 성준수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꺄아아아악, 짐승!

쇄골을 강하게 빨아들이고, 이어 입을 크게 벌려 이빨 자국을 남긴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느라 벌어진 아랫입술을 씹고 빨아 빨갛게 터트리고 단정하게 정리한 뒤통수를 헤집어 놓는다. 마침내 손이 벨트에 닿았을 때 전영중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잡았다.

"주, 준수, 준수야, 우리 아직 적진......."

"뭐래."

막은 손이 무안하게 가차 없이 벨트에 바지 버클까지 풀며 목젖에 키스 마크를 하나 더 새긴다.

"성준수 진짜 미쳤어?"

물론 아니다. 제가 남긴 흔적을 흡족하게 본 성준수가 당당히 문을 열었고, 전영중이 옷을 추스르며 황급히 뒤를 따랐다. 건물로 돌아온 녀석들 몇이 둘을 쳐다본다. 누가 봐도 습격당한 와중에 창고에서 그 짓 하다 나온 꼬락서니였다.

이 비상사태에? 개념을 국에 말아 먹은 동양인들을 보고 입을 막 열려던 그때.

"他妈的, 你在看什么呢?"

욕설이 분명할 문장이 성준수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

두 사람은 너무나 쉽게 4층으로 돌아왔다. 저를 가로막는 놈을 중국어로 뭐라 하며 하나하나 걷어차고 컴퓨터가 있는 방에 입장한 성준수가 또 중국어―분명히 욕이다―로 놈들을 내쫓았다. 누가 봐도 깡패가 분명한 몸짓과 기백에 성준수의 완승이었다. 간혹 용기 있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놈들이 있었으나.

"说中文, 混蛋!"

라는 말만 하며 물건을 집어 던지는 성준수에게 쫄아 도로 닫았다.

"아까부터 뭐라고 하는 거야?"

"중국어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만 쳐다보고 할 일이나 하십시오."

―를 욕으로 했겠지. 하여간 준수, 욕 없이는 외국어도 못한다니까.

뜻밖의 무혈입성에 사실 성준수도 놀랐다. 무작정 벌인 일은 아니다. 브라츠크 마피아의 세력 확장은 5년 전, 중국공산당과 엮이면서다. 이르쿠츠크의 일로 화풀이랍시고 온갖 동양계 사업장은 다 박살 냈으면서 딱 중국인 사업장만큼은 피해가 없었다. 대가리가 중국인이거나, 중국인이 무시할 수 없는 사업파트너로 있거나.

중국어로 지껄이면 중국인으로 보지 누가 한국인으로 보겠는가? 대강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패악을 부리면 높은 위치로 지레짐작하고 설설 기겠거니 했지만 이 정도로 효과적일 줄은. 저 중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놈이 하나만 있어도 바로 벌집 신세였다.

슬쩍 컴퓨터를 확인하자 파일은 90%까지 복사된 상태였다. 앞으로 약 3분 후면 도망칠 수 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응?"

"하고 싶은 말 많아서 왔다며."

"아, 그거."

완강기를 확인하던 전영중이 몸을 일으켰다. 으음. 짧게 망설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성준수가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직후에 늘 미친 소리가 터져 나왔기에.

"우리 이혼하자."

이렇게.

"뭐?"

"준수 너무 충동적이고 목숨 안 아껴서 심장 떨어질 거 같아. 같이 사는데도 나랑 상의 같은 거 하나도 안 하잖아. 그렇게 혼자 결정하다 어느 날 덜컥 보증이라도 설까 봐 겁나서 같이 못 살겠어."

이게 무슨, 설마 출장 미리 말 안 했다고 이래? 커플링 뜯어서 너 줬다고?

근데 시발, 영중아 우린.......

벌컥. 문이 열렸다. 비상식적인 발언에 미쳐 돌아가던 생각이 끊긴다. 슬라브계 둘을 데리고 나타난 동양인 남자가 전영중과 성준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你他妈的是谁?"

진짜 중국인의 등장이다. 당혹스러움을 숨기고 전영중이 팔짱을 끼며 성준수를 본다. 3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의심을 살 것이다. 아니면 대응하기 전에 제거하거나.

눈이 마주치자 성준수가 엄지를 튕긴다. 전영중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셋, 둘, 하나.

홀스터에서 튀어 나간 권총 두 정이 미간을 노린다. 러시아인들의 몸이 동시에 허물어졌다. 성준수가 총구를 옆으로 옮기고, 전영중이 철제 책상을 세워 밀어붙인다. 픽! 바람 빠지는 싱거운 소리에 중국인이 쓰러지자마자 문이 틀어막혔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바깥쪽에서 총을 쏴댔다. 총알이 책상에 박히며 상판이 개성있게 우그러졌다.

"미친, 내가 누굴 먼저 쏠 줄 알고 다짜고짜 카운트다운이야!"

"우리 준수 습관은 다 알지. 당연히 오른쪽부터잖아?"

방 안의 가구들을 옮겨 문을 막으며 전영중이 답한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지. 파일은? 모니터의 숫자가 99까지 올라갔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두드리던 성준수가 100에 달하자마자 USB를 뽑았다.

"이탈해!"

"진재유, 큰길 쪽 엄호 가능해?"

-가능하다.

"지금 바로 나간다."

지지대에 완강기 고리를 건 전영중이 벨트를 붙잡았다. 창틀에 몸을 반쯤 걸치고 남은 부분에 성준수의 손을 쥐여준다. 우리 합쳐서 근 200킬로그램인데 완강기가 버티겠냐? 재수있음 버티고, 없으면 못 버티고. 어차피 순서대로 내려갈 시간은 안된다. 벨트를 단단히 붙잡고, 남은 손으로 성준수의 허리를 감싼다.

"우수진, 내려!"

창틀을 박차며 지시한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불씨를 꺼트린 것처럼 도시의 모든 빛이 일순 사라졌다. 전기가 차단되며 사위가 완벽하게 침묵한 가운데 오직 완강기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중량 초과로 설계보다 빠르게 내려가던 완강기의 고리가 뜯어지며 막판에 두 사람을 내동댕이쳤다. 바닥을 굴러 충격을 줄이고, 벌떡 일어나 새카만 도로를 달린다. 저들을 쫓는 발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조용한 총성과 함께 하나씩 줄어든다.

"어디로 가야돼!"

-......25분 후 중앙공원 옆 쇼핑몰로 오시면 됩니다.

-차량 나왔다. ......한 대는 타이어 터트렸고, 위험하니 나도 이탈한다. 너희 위치는 못 잡은 거 같으니 알아서 숨어.

"재유, 지금 합류할 거야?"

-난 따로 움직일게. 몰에서 보자.

미약한 달빛이 흐릿하게 도시를 비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량 소음이 들린다. 새카만 어둠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골목 사이로 비쳤다.

-추적 붙었습니다. 샛길로 안내할 테니 큰길은 지나치세요. 카페 옆 골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5미터, 3미터...... 지금!

전영중이 성준수를 잡아 밀어 넣었다. 전력으로 달리던 몸이 부딪히며 좁은 골목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거 누구야? 우리 팀 막내. 굉음을 내며 상향등을 킨 차가 도로를 연달아 지나간다. 좁은 골목을 번쩍거리며 몇 번 비추고 나서야 전영중이 깔아뭉개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비상전력이 돌아가며 도시에 희미한 빛이 하나둘 돌아온다. 좁은 골목을 한 번 더 꺾어 들어가고, 에어컨 실외기 안쪽에 앉아 등을 기댔다. 쇼핑몰은 쪽은 넉넉잡고 10분이면 갈 수 있다. 잠시나마 숨돌릴 시간이 생겼다.

언제는 쉬웠냐마는 이번 일은 유독 빡셌다. 끊은 지 한참 된 담배가 생각날 정도로. 가상의 연초를 입에 무는 상상을 하다 어금니만 악물고 얼굴을 쓸어내린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준수가 생각할 때도 있어? 아, 생각이랑 결정을 너무 혼자서만 해서 문제였나?"

"넌 말을 좆같이 하는 재주가 있어."

푸핫! 전영중이 웃음을 터트리며 성준수를 봤다. 아직 거칠게 숨을 쉬며 말하는 사람은 늘 그랬던 것처럼 미간을 구기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누가 프로포즈를 수동적으로 해?"

이혼은 무슨, 결혼도 안 한 사이에. 세상에 이런 거지 같은 프로포즈를 하는 놈이 다 있나 싶은데 그게 내 애인이다. 오늘 왜 이리 신났나 했더니 이딴 되먹지 못한 프로포즈나 하려고 타이밍 노리느라 들떠있던 거다. 진짜, 또라이인가.

"프로포즈 아닌데? 이혼하자니까?"

"결혼도 안 한 사이에 무슨 이혼이야?"

"그랬어? 할 거 다 한 사이라 이미 결혼한 줄? 에이, 어쩔 수 없이 결혼부터 해야겠네."

뭐 이딴 게 있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헛소리만 하는데, 짜증보다도 그냥 어이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귀여워 보였다. 빡빡 우겨대는 저 커다란 놈의 어디가 귀여운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근데 어쩔 수 없지.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하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몸을 던져 대는 놈을 어떻게 미워하라고.

"내가 몸 막 쓰는 거 솔직히 네 잘못이라고 본다."

"이걸 내 탓을 한다고?"

"네가 구해주러 올 걸 아니까 그러는 거 아냐."

신나서 벌어져 있던 입이 다물린다.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이지만 기저에 깔린 신뢰는 묵직했다. 성준수는 달래주려고 입바른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영중. 내가 제일 믿는 건 언제나 너였어. 풀리에서도 네가 제일 먼저 달려왔잖아."

"그건 애초에 내 실수로......."

"네가 신도 아닌데 걔가 소년병인지 민간인인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이제 어쩔 수 없는 일로 자책은 그만하고. 몇 번이나 말해도 소용없었지만 기어코 같은 말을 내뱉는다. 전영중이 같은 일로 계속 후회하는 한 성준수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의식이었다.

“내가 기절하기 직전에 무슨 생각 한 지 알아?"

"좆됐다겠지."

성준수가 웃었다. 하여간 성준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맞긴 했다. 당연히 그 생각도 했는데.

"네가 구하러 오겠지—였어."

다행히 직격은 피했으나 기둥이 날아가며 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 무너졌다. 문으로 달려 나가는 와중에 발밑이 꺼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에 왼쪽 눈이 맞아 터지고 급소를 가리며 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영중이가 구하러 올 것이다.

"그리고 진짜 네가 구하러 왔잖아."

"......맨날 과보호한다고 나한테 지랄했으면서."

"평소에 존나 오바하는 것도 맞으면서."

"모르겠는데? 준수는 별 볼 일 없는 유리몸이라 내가 지켜줘야 하는 게 맞는데?"

"또 까분다."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이것 봐. 완전 물주먹인데 내가 지켜줘야지 어떡해?

"아무튼 네 잘못이니까 이혼은 못 해주고, 결혼만 해."

우기기에는 우기기로. 성준수가 막무가내로 결론 내며 전영중이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내뱉는다. 멋대가리 없는 프로포즈에 어울리는 초라한 대답이었다. 전영중이 눈을 감았다.

".......그렇네. 내가 성준수 버릇을 잘못 들여놨네. 내 잘못 맞네."

이혼은 내 귀책이라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웃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손을 내밀고, 힘을 주어 일으켜 세운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었다.

걸어서 몰에 도착하자 전력이 복구됐다. 우수진이 복구시켰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한창 쇼핑하다 밖으로 내쫓긴 인파에 섞여 자연스레 몰에 입장한다. 멀리에 백팩을 맨 진재유가 보였다.

"공태성. 오고 있어?"

-3분 후 도착입니다. 옥상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설마 헬기야? 어디거 훔쳤어?"

-말하면 화내실 거 같은데.

이번엔 정희찬의 목소리였다. 화낼 거 같다니, 설마 박병찬 거? 옆에서 전영중이 입을 떡 벌리고 본다. 준수야, 너네 팀원 진짜....... 하지도 않은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무사히 탈출했으면 됐지. 옥상에서 보자."

박병찬이 또 죽이네 찢네 하겠지만 나중 일이다. 지금은 탈출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훗날 일은 애써 미뤄놓자 이번엔 우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리 붙었습니다. 인파가 많으니 당장 습격할 거 같진 않은데 주의하세요.

-내가 갈까?

"됐어. 알아서 처리할게. 옥상에서 봐."

비상구를 가리키자 전영중이 따라온다. 문이 닫히기 직전, 뛰어오는 발소리가 여럿이었다. 둘, 셋? 성준수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간다. 벌컥 열린 문으로 세 명이 난입하며 품에서 총을 꺼냈다. 그 중 맨 뒤에 있던 남자의 뒷덜미가 붙잡혔다. 쾅! 머리가 벽에 처박히고 턱을 쥔 단단한 손에 목이 돌아간다. 우드득.

이제 제법 익숙해진 러시아 욕이 귀에 박힌다. 문 뒤에 숨어있던 전영중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던 성준수가 난간을 잡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릎이 정확하게 관자놀이에 박힌다. 그대로 머리를 밟아 착지하고, 총을 겨눠 남은 한 명까지 쓰러트렸다.

"피 튀었냐?"

"아니."

시신을 들어 피를 막은 전영중이 계단에 으깨진 머리 위에 몸을 던졌다. 자리를 벗어나려다 말고 갱단원의 몸을 뒤집어 품을 헤집더니 무전기를 꺼낸다. 흥분한 목소리로 엄청난 양의 대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설마 죽일 때 무전 살아있던 건 아니겠지?"

-맞는 거 같은데요. 무장하고 진입합니다. 차 두 대...... 세 대. 인원 열셋 정도 됩니다. 더 오고 있어요.

문 너머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비명도. 이제 봐줄 것 없다는 태도다. 경찰이 오든 군대가 오든 우리는 끝장내겠다는 거겠지. 좆됐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계단을 튀어 올라갔다. 3층에서 끝난 쇼핑몰 비상계단에 문을 열고 다시 몰로 들어간다.

"우수진, 어떻게든 해봐!"

부팀장님, 절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해드려야겠지만. 우수진이 쇼핑몰 도면을 펼쳤다.

-위치 어떻게 되십니까?

-진재유, 사무동 5층이다.

"전영중, 성준수, 쇼핑몰 3층 메인홀!"

-쇼핑몰 쪽 방화셔터 내리겠습니다. 사무동으로 진입해서 옥상으로 올라가세요. 스태프 구역 들어가기 전 계단입니다.

방화셔터가 내려가고, 총성에 몸을 피했던 사람들이 방화문 너머로 갈지 아니면 남아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몰을 가로질러 스태프 구역으로 뛰어가자 에스컬레이터로 소총을 쥔 무리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수진아, 에스컬레이터 막아!"

-에스컬레이터 막고, 엘리베이터 정지시킵니다.

상하행이 교차하던 에스컬레이터가 예고 없이 방향을 바꾸며 둘 다 아래를 향한다. 중심을 잃은 남자들이 앞으로 넘어지고, 둘을 발견하자 아무렇게나 총을 갈겼다. 총격으로 천장에서 떨어져나오는 콘크리트 파편에 전영중이 반사적으로 성준수의 어깨를 잡아 몸을 낮춘다. 또, 버릇대로 과보호하지. 눈먼 총에 맞겠냐고. 손을 치우고 스태프 구역 옆 비상계단으로 달려간다. 관성을 못 이기고 바로 앞의 문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열었다.

"들어가!"

에스컬레이터에 총을 갈겨 정지시킨 마피아가 그들을 쫓는다. 5층. 6층. 도착했습니다. 부팀장님 합류 완료요. 무전기 너머 정희찬이 유쾌하게 말한다. 7층. 8층. 무수한 발소리가 그들을 쫓아 올라온다. "정희찬, 헬기 띄워!" 9층. 반 층 아래의 성준수를 돌아본다. 꺼지라는 듯 거칠게 손짓하자 마저 뛰어 올라간 전영중이 문을 열고 기다렸다. 10층. 마침내 옥상.

지상에서 조금 떠오른 헬기는 형광 초록색이었다. 가시성 미쳐버렸네.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그 안에 탑승해 이쪽을 쳐다보는 팀원들이 그제야 보였다. 옥상 문을 잠그고 건물 밖으로 미끄러지는 헬기를 쫓아 뛴다. 아까부터 혹사당한 관절이 삐끄덕댔다.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지끈거리는 감각을 무시하며 달린다. 전영중이 자꾸만 뒤처지는 성준수를 돌아보았다.

"머뭇거리지 말고 뛰라고, 전영중!"

다섯 걸음 뒤에서 성준수가 소리친다. 이를 악문 전영중이 건물을 막 벗어나는 헬기의 스키드에 올라탔다. 다리를 단단하게 걸고, 프레임을 잡고 남은 손을 쭉 뻗는다. 그래, 그렇게 손을 뻗으면 되잖아. 그걸로 충분한데.

옥상 문이 열리자 공태성과 진재유가 사격한다. 머리 위로 스치는 듬직한 지원을 믿고 망설임 없이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서로의 팔목을 붙잡은 손은 헬기가 요동치자 더욱 단단히 옭아맸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힘줄 선 팔뚝이 성준수를 끌어올렸다.

이것 봐. 준수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이러지. 전영중의 목에 팔을 감아 매달리자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니가 살려줄 거 아니까 이러지. 허공에서 맞닿은 시선이 축축했다.

"……고마하고 들어와라."

조금만 더 놔두면 입술이라도 비빌 기세에 진재유가 끼어들었다. 진재유와 공태성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헬기 안으로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차장실에서 나오자 5층에서 근무하는 멀대가 서 있었다. 넌 왜 여깄냐, 쏘아붙이려는데 이마 한구석이 찢어진 게 보였다. 하얀 손이 철썩, 양 볼을 잡아 내린다. 아야.

"누가 이랬냐?"

"우리 부장님 뵙고 오는 길."

"뭐로 맞았어. 재떨이?"

"준수, 지금이 80년대인 줄 알아?"

"뭐로 처맞았냐고."

"......결재판."

영감탱이, 기술도 좋네. 쇠가죽 같은 피부인데 용케도 찢어놨다? 상처를 만지는 손길을 얌전히 받던 전영중의 눈이 가늘어진다. 준수야, 그게 욕이야 칭찬이야?

"다른 일은 없었고?"

"별건 없고, 1개월 정직."

"잘됐네."

"잘돼? 잘돼애? 내 불행이 잘됐어?"

"닥치고 바다 산 도시 중에 골라봐."

"뭔데?"

"골라보라고. 니 묻을 장소 정하게."

"그럼 바다. 촉촉해진 준수라도 보고 죽게."

부루퉁하게 답한 입술 사이로 뒤늦게 풋, 웃음이 샜다. 하, 진짜 변태 새끼. 성준수가 덩달아 웃는다.

"진짜 뭔데?"

"내일부터 휴가야. 힘들어서 이번 일만 마치고 잠깐 쉬겠다고 딜 했거든. 열흘 받았으니까 티켓 있는 데로 괌이든 사이판이든 다녀오자."

"준수, 내 커리어 끝장내려고 작정했어? 징계받은 김에 신난다고 해외 나가면 내가 뭐가 돼?"

"그럼 뭐, 전업주부라도 하든가."

"미쳤어? 내가 일 때려치우면 준수는 누가 지키라고?"

이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가늠할 필요가 없어서 저 새카만 속을 들여다보기는 그만뒀다.

"휴가 다녀오면 차장님이랑 재유가 정리해 놓을 거야. 네 정직도 없던 일 될 거고. 그거 물어보려고 내려왔지?"

해외부에서 대놓고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전영중이 정식으로 승인받고 출장갔던 형태라면 정보부에서도 얽힌 인원이 꽤 된다는 뜻이다. 타 부서의 도박에 같이 목숨을 걸었으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궁금할 만하지.

질질 끌 이유가 없으니 바로 정리할 예정이었다. 마침 정치싸움에 휘말린 자식의 앙갚음을 해주려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도 있고.

"쉬는 김에 혼인신고도 하자."

성준수의 뒤를 따르던 전영중의 걸음이 멈춘다. 뭐야? 돌아보자 좋아할 줄 알았던 전영중의 낯빛이 오히려 어두웠다.

"왜? 하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출장지에서 결혼하자는 말을 한 것도 맞는데.......

“이렇게 바로 혼인신고부터 하자고?"

"바빠 죽겠는데 언제 결혼식 준비해서 절차대로 다 하냐? 우선 신고부터 하고 식은 나중에 올려."

"성준수, 너 진짜......."

얘는 법률혼 적 관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국가가 인정해 준, 완전한 타인이 가족이 되는 가장 강력한 구속인데.

전영중은 법적 부부가 되면 이전처럼 성준수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과보호니 뭐니 핀잔 듣는데, 혼인신고까지 해버리면 이전보다 더 지독하게 구속하면 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적 부부 되면 나 진짜 성가시게 굴 거야. 네 인생에 아예 뿌리내리고 옭아맬 거라고."

"그러든가."

"뭐?"

"내가 너 지랄할 거 예상 못 하고 결혼하자고 한 거 같냐?"

퉁명스레 대답하고 가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저 새끼는 지가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서 남들은 뭐 고민도 안 하고 사는 줄 아나? 먼저 프로포즈해놓고는 혼인신고 하자니까 그걸 까? 아니, 이혼하게 결혼해 달라며?

"이 시발, 할 거야 말 거야? 꼬우면 신고만 했다가 니 원하는 대로 바로 이혼하든가."

"아니, 알았어. 해. 하자. 내일 바로 구청 가자고."

왈칵 성내는 모습에 전영중이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이혼하자던 말 진심 아닌 거 알면서?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하면 혼인신고고 뭐고 다 물러버릴 기세였다. 전영중이 자아를 잠시 내려놓고 원하는 대로 다 하라는 식으로 대답하자 씨근거리다 홱 돌아선다.

하여간 답답한 새끼. 저를 버리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성준수의 뒤를 쫓았다. 뒤늦게 전영중의 귀 끝이 빨개졌다. 혼인신고에, 해외여행이면.......

"그럼 우리 신혼여행 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든가."

해외 6팀. 명판 앞에서 성준수가 문틀을 잡아 진입을 막는다. 그제야 제가 어디까지 따라왔는지 알아챈 전영중이 고개를 들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멍청이같이 다 풀어진 얼굴로 웃더니 오늘 같이 퇴근하자. 차에서 기다릴게. 그런 말을 하고 비상계단으로 쏙 들어간다.

"전영중이는 갔나?"

"어."

컴퓨터를 두드리다 성준수를 본 진재유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준수 너도 일 없으면 일찍 들어가 쉬어라. 많이 아픈가, 얼굴이 빨갛네."

진재유가 능청을 떨며 말한다. 그제야 목뒤까지 빨개진 제 상태를 눈치챈 성준수가 아무거나 들고 부채질했다. 사무실에 진재유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른 놈들이 봤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별꼴이라고 놀려댈 게 뻔하니. 최대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맥없이 떠오르는 동그란 녀석에 성준수는 그냥 얼굴을 가리기로 한다. 좆같이 힘들었지만 이겨낸 날들의 보상이 지나치게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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