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나비효과

가비지타임 최종수 드림

최종수랑 강규리가 헤어진 건 볕이 쨍쨍한 날이었으면 좋겠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찾아온 이별... 두 사람은 언제나 몰아치는 태풍 속에 있되 안락한 우산 밑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꼭꼭 붙어있었으니까. 긴 장마와 함께 둘의 사랑도 끝났어. 징하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 규리 탓에 갑자기 내리는 비에 익숙한 두 사람은 새삼스레 날씨를 따질 필요가 없는데, 밖에 비가 온다느니 우산이 없다느니 핑계를 댈 때 끝을 직감한 거야. 비가 그치지 않던 2주 내내 얼굴 한 번 안 보다 무지개가 걸린 날에 겨우 만나서 한다는 말이 헤어지자. 그마저도 격한 말싸움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싱겁게 끝. 이렇게? 정말?

돌아와서 종수는 땀이 비오듯 흘릴 때까지 달렸고, 규리는 눈물을 빗물처럼 흘렸지만 다시 연락하는 일은 없었어. 변한 것도 없어. 헤어진 후에도 종수는 계속 농구선수로 잘 나갔고 규리도 기자 일을 관두지는 않았으니까. 글을 쓰다보면 종종 '이 일은 오로지 최종수 때문에 시작한 거였는데' 하고 떠올렸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이별로 인해 알게 된 건 딱히 종수가 없어도 자신은 누군가에 대한 기사를 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뿐었지. 별로 다행이라거나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러다 결국 웬 축구선수랑 결혼하면 좋겠다. 소식은 조금 늦게 전해졌어. 이미 기사도 다 났는데 이규랑 대화하다 나지막히 청첩장 받았냐는 얘기를 듣고 알았어. 웬 청첩장? 되묻자 그제야 창백하게 질리는 규의 얼굴. 누가 결혼해?

"왜 빨리 안 알려줬어."

"너 그래도 신문은 잘 챙겨보니까… 아."

그 신문 뉴스를 왜 챙겨봤는데. 읽지 않게 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진작 스포츠면에 여러번 실리고 포털 메인에도 올랐는데 최종수만 몰랐어. 하기사 축구 선수 이름을 봤다한들 종수가 알 리도 없고 상대가 규리인지도 몰랐겠지. 중요한 건 그만큼 규리가 종수와 멀리 떨어져버렸다는 거야. 예전에는 듣지 않아도 알았는데 이제는 들어도 모를만큼. 불변의 진리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비틀리며 종수의 세계도 어긋나기 시작해.

야, 너 축구 틀어놓으면 항상 졸았잖아.

축구는 아무리 봐도 재밌는지 모르겠다며.

농구가 좋다고 했잖아. 기사를 쓰겠다고,

…넌 내 글을 쓴다고 했잖아.

결국 종수는 결혼식에 안 갔을 것 같아. 청첩장이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도 안 해봤어. 어차피 안 갔을 거니까. 그러자 규도 '다녀와서 소식 전해줄게.' 그러고 말았어. 오히려 가겠다고 하면 말리려는 눈치였겠지. 하지만 강규리가 결혼할 나이가 된 것처럼 최종수도 그 애를 처음 만났던 나이의 두배가 된 거야. 더는 다음날 피곤할 걸 뻔히 알면서 밤늦게 핸드폰을 들여다 보지 않아. 강규리의 결혼식도 마찬가지였어. 가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게 분명한데 얼굴을 들이미는 건 멍청한 짓이지. 앞질러나가는 충동과 뒤처지는 미련을 접어두고 억지로 잠을 청했어. 핸드폰은 뒤집어 저 멀리 밀어놓고. 아, 속 시끄러울 때마다 오버워크 하는 건 네 나쁜 습관이라고 누군가 꾸준히 잔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체육관 가는 대신 고른 낮잠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 듯해. 꿈에서 누군가와 버진로드를 함께 걷다가... 아, 씨발 하고 잠에서 깼어. 일어나자마자 까먹었지만 누구였을지는 뻔하지. 덕분에 잠들기 전에 어렴풋이 떠올렸던 잔소리도 누구 목소리였는지 알게 되어 두배 세배로 좆같아졌어. 그리고 그날 오후 규가 다시 종수네 집으로 와서 얘기해주겠지. 저녁인데도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종수 기분을 예민하게 살피면서 말을 고르는 거야. 예상보다 기분이 저기압이었지만, 오늘은 이해해주자며.

"와, 나는 당연히 규리 결혼식에는 농구 선수들이 잔뜩일 줄 알았는데 축구 선수들이 더 많더라."

식장이 얼마나 넓었는지, 제법 괜찮았던 뷔페에서는 뭐가 가장 맛있었는지... 그런 얘기를 늘어놓으며 눈치를 보다 웨딩드레스 얘기도 꺼내봤어. 아,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구나. 종수가 별 반응이 없으니 규도 다행이다 생각하는데 갑자기,

"근데 너 왜 걔 얘기는 안 하냐?"

걔가 입은 웨딩드레스 말고, 걔. 강규리.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놨지만 중요한 건 하나도 말하지 않았어. 보통은 신랑신부가 좋아 보였다는 말을 하지 않나? 종수가 찌르고 들어온 점은 그거였어. 걔 표정이 어땠는지 말해보라고. 행복해 보였는지, 그렇지 않은지... 상대와 사이가 좋아보였는지, 아닌지... 근데 이규도 보통내기가 아닌 거야.

"음… 몰랐는데 규리도 키가 꽤 크더라."

그렇게 흘러넘겼어. 문제는 그 사소한 말조차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었다는 거지. 잠깐 움찔했지만 드레스 때문에 안 보였는데 힐을 신은 거 아니겠냐는 말에 꾸겨넣듯이 납득했어. 시간이 늦어져서 이규가 현관을 나서는데, 잠시 망설이다 말하는 거야.

"부케도 정확하게 던지고… 성격대로."

문이 닫히고 혼자 쇼파에 앉아 곱씹어 보는데 어디 성격이 똑부러진다고 던지는 게 정확하게 들어가나. 아마 농구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농구를 했으니, 오래 봐왔으니 부케도 곧잘 던진다고. 그렇게 오래 봐와놓고 축구선수 옆에 서니 커보인다는 것도 누구와 비교한 건지 모를 수가 없어서 심란해졌어. 여지껏 규리가 어떤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었는지. 그런 생각들이 차올라 누군가는 허니문을 보낼 때, 종수는 혼자 밤을 지새웠네. 

근데 1달도 안 되어서 규리 남편이랑 만나면 어떡해? 모르는 척 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어, 해버렸어. 그러자 상대방이 팔자 좋게 웃으며 인사해오는 거야. 최종수 선수 맞으시죠? 이러면서... 제법 넉살이 좋은 성격인지 말씀 많이 들었다며, 청첩장을 보냈는데 안 오셔서 한 번 만나뵙고 싶었대. 아, 청첩장 보냈었구나. 그때 알았을 것 같네. 어쩌면 신부측 몫은 규리가 보냈는데, 남편 몰래 뺐을 수도 있고... 종수가 평이하게 답하자 남편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아내가 썼던 기사들을 읽어봤는데 최종수 선수에 관한 게 많더라고요. 팬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대요."

그래서 궁금했대. 난 아닌데.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들었는데 맞냐니까 왜 이런 것까지 물어보나 하면서도 종수는 좀 더 오래 알았다고 답하는 거야. 새삼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규리와 보낸 시간이 얼마야. 그러자 남편이 웃으며 말해. 그럼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요. 마치 똑같이 시간을 보내면 규리가 자신의 스포츠도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게 괜히 꼬와서 속으로 '걔가 네 축구를 좋아할 일은 없을 거다.' 중얼거리는 최종수. 이제 그만 갈 길 가라는 의미로 지금 연습 가는 거냐고 묻는데 신혼의 새신랑은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나봐. 

"네~ 아내는 보러 오겠다고 했는데, 제가 쉬고 있으라고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와달라고 할 걸 그랬네요."

안 궁금해 병신아. 스치는 생각을 꾸역꾸역 집어삼키고 왜냐고 대꾸해줬어. 

"그게, 아내가 제 훈련을 보러 와주면 항상 비가 내리더라고요. 결혼 준비니 뭐니 하느라 몸이 굳어서 오늘은 연습에 오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비 내리면 훈련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내가 젊을 때는 축구 취재를 안 왔다며 다음에 함께 경기 보러가겠다며 멀어지는 규리 남편... 그 뒷모습을 일별하고 종수는 나섰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오며 소리를 내서 중얼거려. 

"그러니까 내가 계속 농구하라고 했잖아. 나랑 있으면 비가 오든 태풍이 불든 상관 없었잖아." 

나는... 네가 옆에 있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 보러갈 수 있어도 보러가지 않아서 헤어졌던 과거지만 나는, 정말, 너를… 어느새 계절은 축구 잔디밭이 유난히 푸르러 보이는 초여름이야. 장마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최종수는 바람에 실려 느껴지는 비 냄새를 맡으며 빨리 퍼붓기를 바랐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서, 

그게 안 된다면 지금 너와 그 사람에게 구름이 꼈으면 해서. 마지막 말은 누구도 듣지 못하게 꾸욱 삼켰네. 어딘가에서 마지막 남은 봄나비의 날개짓 하는 소리가 들렸어― 이제 곧 태풍은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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