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별반전 주의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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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의 크리스마스였다. 서양 명절이니 아침 식사는 계란 토스트에 의성마늘소세지, 찐감자, 땅콩으로 해결하고 (전영중은 K-브랙퍼스트라고 주장했다) 후식으로 매실차를 나눠마셨다. 습관대로 NBA 경기 채널로 착실히 움직이는 손아귀에서 리모컨을 뺏어 영국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1편부터 튼다. 매년 보는 거 안 질리냐? 차라리 나 홀로 집에를 틀어. 준수 고전파야? 크리스마스에는 해리포터지.

이미 여러 번 봤으니 지루할 만한데도 두 사람은 속절없이 빠져든다. 볼 때마다 개열받네, 저 돼지 새끼. 미안. 네가 왜 사과하냐, 돼지야. 실속 없는 농담을 쿵짝 주고받으며 성준수가 한쪽 다리를 세워 등받이에 기대고 전영중은 소파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앉는다.

맥주? 준수야, 아무리 휴일이래도 시즌인 선수가 해가 중천에 걸리기도 전부터 술 마실 생각부터 하면 어떡해? 싫음 말고. 갖고 올게. 미련 없이 포기하자 재미없어진 전영중이 일어나 카라멜팝콘과 맥주 두 캔을 갖고 왔다. 저 새끼는 먹을 거면서 꼭 한 마디씩 덧붙여서는.

"너도 슬슬 결혼해야지."

맥주를 성급하게 넘기며 묻는 목소리에 탄산이 턱 걸렸다. 그대로 뱉을뻔한 걸 가까스로 넘기고 돌아보자 캐러멜 팝콘을 입에 던져넣는 성준수가 눈을 마주쳤다. 왜.

"아니, 이정옥 여사께서 오셨나 했지."

"그게 누군데?"

"우리 엄마."

"아.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더라."

그리고 축축한 침묵이 이어졌다. 꼴깍거리자 500밀리의 긴 맥주캔이 금세 가벼워진다. 이상한 주제였다. 부모님 댁도 아니었고, 발화자는 성준수다. 때 되면 가겠지—습관처럼 대답하려다 다시 돌아보았다.

"네가 그런 말을?"

"나는 그런 말 하면 안 돼?"

"너도 결혼 안 했으면서?"

"이제 슬슬 해야지."

"너 애인 있어?"

빽 소리 지르며 아예 몸을 돌렸다. 아오, 돼지 화통. 성준수가 질색하며 소파에 떨어트린 팝콘을 주워 먹는다. 아니, 애인 있냐고. 전영중이 꿈지럭거리며 다가오자 발로 꾸욱 민다.

"없어, 새끼야. 있으면 크리스마스에 너랑 이 지랄 하겠냐?"

"없는데 갑자기 무슨 결혼이야? 좋아하는 사람 있어? 소개팅해? 아주머니가 선보래? 결혼정보업체 등록해?"

"없으니까 하지. 아, 돼지 대가리 치워라."

"뭔 결혼을 없으니까 해. 준수 달팽이야? 자웅동체? 독립심이 강해서 전부 혼자 해결해버리기로 한 거야? 그래도 결혼은 혼자서 하기엔 무리 아닐까?"

"아 이 새끼는 지가 하자 해놓고 왜 아가리를 털어?"

"뭐?"

너무 놀라 맥주를 떨어트리기 전에 테이블에 냉큼 내려놓았다. 엎으면 사고 친 쪽이 수습해야 하니까. 성준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맥주를 내려놓기 무섭게 걷어찬 걸 보면.

차가운 발이 뺨에 찰싹 감기며 밀어버린다. 우당탕 넘어진 전영중을 한심하게 보며 캐러멜 팝콘을 던진다. 얼빠진 놈의 눈에 팅, 팝콘이 튕겼다. 슈터다운 정확한 조준이었다.

"싫음 말고."

아니, 준수야. 무슨 결혼 하자는 얘기를 이렇게 대충 해....... 다소 억울했으나 성준수의 인내심은 길지 않다. 농구를 그만두거나 전학하거나, 코치의 권유를 받자마자 반나절도 안 돼서 냅다 오케이 전학 때려버린 쾌녀 성준수가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당장 대답하라는 눈빛이다. 네인지 아니오인지.

반면 전영중은 그때도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르지 않았다.

"내가 언제?"

"이 시발."

성준수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전영중이 도망쳤다. 침실 문을 잠그자마자 아래쪽에서 쿵, 문이 흔들렸다. 지금 무릎으로 찍은 거지? 잠금장치만 누르면 어차피 못 들어오는데도 전영중은 겁에 질려 손을 떼지 못했다. 덜컥거리며 미친 듯이 흔들리는 손잡이는 컨저링 이상의 공포였다. "영중아, 잠깐 나와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 바로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상냥한 목소리에 전영중이 부드럽게 답했다.

"준수야, 집에 가라."

"야아아아아이이 시발아 찢어버린다!"

쾅쾅쾅쾅쾅! 농담이 아니고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미친 듯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다 층간소음을 신경 쓰지 않는 발소리가 쿵쿵거리며 달렸다. 왜? 문 부숴버리게? 연장 챙기러 갔어? 그러나 멀어지지 않는 발소리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본다. 베란다 창문! 떠올리기 무섭게 베란다와 연결된 침실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새하얀 손이 창틀을 짚고 서리처럼 웃는 얼굴이 한 발 한 발 넘어왔다.

꺄아아아아아악! 날것의 비명을 내지르며 전영중이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성준수는 주먹으로 사람을 패지 않는다. 마냥 가녀리지만은 않은 팔뚝으로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까부는 놈들을 줘패 기내초 4학년을 평정한 것을 마지막으로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그랬다.

대신 다른 걸로 팼지.

성준수의 손에 찢어진 메모리폼 경추 베개가 들려있었다. 원심력을 감당 못 해 지퍼가 터진 커버는 부엌 바닥에, 뒤통수를 대는 얇은 부분에서 찢어진 반쪽은 옷방에. 그렇게 남은 반쪽을 쥐고 소파에 앉은 채로 씩씩거렸다. 전영중은 제 베개가 푹신한 줄만 알았지 그렇게 아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쩐지 존나 무겁더라니. 하긴, 만든 사람도 제 상품이 흉기로 쓰일 거라고는 짐작 못 했을 거다.

"근데 진짜 언제?"

"너 이......."

"시비가 아니라! 몇시몇분몇초 그거 하려는 거 아니고! 진짜로 기억 안 나서!"

번쩍 들어 올려지는 베개 조각에 전영중이 엉덩이로 뒷걸음질 치며 대답했다. 저 새끼는 엉덩이로 스텝을 쳐도 존나 빠르네. 베개를 집어 던진 성준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 이 시바거.......

"대학교 3학년때."

"......진짜?"

"니 지연이랑 헤어지고......."

"지현이?"

"지연이든 지현이든 암튼! 헤어졌다고 술 처먹었을 때, 서른까지 솔로면 같이 살자며."

그래서, 씨발, 빼지도 못하게 만으로 서른 살 꽉 채워 서른한 살 생일 지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기억이 안 나? 술 많이 처먹은 것도 아니었잖아? 기껏해야 소주 한 병이었는데?

"너 진짜 기억 안 나서 이 지랄이냐?"

끙....... 머리를 쥐어뜯은 전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무슨 맥락으로 튀어 나간 발언인지도 짐작이 안 되는 와중에 그때 아주 세상이 무너진 듯 군 것만은 기억났다. 그야 술을 1, 2, 3차 다 다른 애들이랑 마셔가며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온갖 염병을 떨어댔으니까.

"근데......."

말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하지 말아야 한다. 잊을만하면 누군가 알려주던 인생의 명언은 이 순간에 전혀 쓸모가 없었다. 전영중은 대체로 성준수 앞에서 주둥이를 제어하지 않았으므로.

"넌 왜 오케이 했어?"

퍽. 이번엔 소파 쿠션이 날아갔다. 투척물은 일단 잡고 보는 농구선수는 날렵하게 그걸 또 낚아챈다. 어, 잡으면 안 됐나? 전영중이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어지는 보복은 없었다. 평소의 성준수답지 않게 하고픈 말이 잔뜩 있는데 참는 얼굴이다.

"......나 간다."

"갑자기? 얘기하다 말고? 지금? 어딜?"

"내가 대답해야 하냐?"

옷방으로 들어간 성준수 뒤를 쫓자 빤히 바라보다 상의를 반쯤 들어 올린다. 아, 아아, 옷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라고? 문을 닫고 나가자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성준수가 나왔다. 제 잠옷과 가져다 놓은 속옷을 전부 가방에 쓸어 담는다.

"준수야. 갑자기 어딜 간다는 건데."

짐 챙기는 뒤만 쫓아다니다 기껏 내뱉는 말이 이거다. 신발에 발을 끼워 넣고 260사이즈의 슬리퍼까지 손에 든 성준수가 남은 손으로 얼굴을 마구 쓸었다.

"너는 씨발 아무 사이도 아닌 이성 친구네 집에 속옷도 갖다 놓고 매년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냐?"

"뭐......."

"야, 내가 '이성끼리 그냥 친구일 수 없다'는 주의는 아닌데."

이걸 진짜 내 입으로 말해야 한다고? 구질구질하게? 내가 뭐가 아쉬워서? 기가 차는 일이다.

"너랑은 그냥 친구 못해."

그러나 전영중은 성준수에게 예외였다. 이 새끼는 그걸 해내고야 만다. 브라보.

차 트렁크에 짐을 던져넣고 문이 부서져라 닫는다. 대리기사를 부르다 말고 분을 이기지 못해 휠을 퍽퍽 찼다.

아니 씨발 전영중 진짜 병신이야? 왜 오케이 했겠냐고!

차 뒷자석에 실려 가며 멍하니 밖을 본다.

다들 전영중이 져준다 생각하지만 성준수의 생각에는 아니다. 성준수에게 전영중은 어느 순간부터 예외였고 특별취급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말을 삐딱하게 해도 한 대 쥐어박고 말지.

성준수는 망설이지 않는다. 고를 수 있다면 최선. 여의찮다면 차악. 선택해야 할 순간이라면 빠르게 선택하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떻게 후회하지 않겠어. 사람인데. 그래도 골랐으니까,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니 나를 믿고 가는 거지.

그러나 여기에 전영중이 끼면 조금 달라진다.

고1 말, 전학 권유 이야기가 나왔다. 그만두거나, 전학 가거나. 남아봤자 벤치만 데울 미래가 선명했다. 그만두면 농구 못하는데 그럼 씨바 당연히 전학 가서 주전 따는 것밖에 없잖아. 그때부터 성준수는 여자 고교농구 영상을 돌려보면서 전학 갈 학교를 찾았다. 저녁에 같은 통보를 받은 전영중을 만났다. 원중남고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야기가 나왔나 보더라.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면서 넌 어떡할 거냐 묻길래 성준수는 전학 가야지 뭐, 하고 대답했다. 이미 학교도 찾았으니까.

넌?

......난 여기서 살아남을 거야.

그것도 괜찮지. 아직 고1이니까 더 클 수도 있고. 그래, 힘내라. 하고 우는 얼굴 보이기 싫다고 푹 숙인 동그란 머리통이나 북북 쓰다듬었다.

만약, 전영중이 너도 서울에 남아 같이 힘내자고 하면 기꺼이 남았을 것이다. 부산까지 떠나는 게 어디 쉽겠어. 내심 붙잡아주기를 바란 것도 있고. 그 핑계로 눌러앉아 원중여고에서 더 버둥거릴 수도 있었겠지. 기적처럼 뒤늦게 키가 더 클 수 있잖아?

전영중은 제 결정을 번복시킬 권한이 있었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전영중은 그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지 말란 말도, 가서 힘내란 말도. 훌쩍거리다 숙소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씹새끼는 1년 후 지옥의 아가리 파이터로 각성했다. 이 새끼를 왜 좋아했지? 어렸을 땐 고분고분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성준수는 생각보다 전영중을 많이 좋아했다. 그러니 입을 털어대도, 여자친구를 소개해 줘도 응 그렇구나 하고 말았지. 여자친구가 여자사람친구 번호는 다 지우래서 헤어졌다는 말에는 제법 기분 좋았고. 밤 11시에 술에 꼴아 전화해도 꼬박꼬박 받아줬고, 바다 보고 싶다는 말에 주말 약속도 취소하고 같이 인천에 가줬는데.

대가를 바란 건 아니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쟤가 뭐 하자니까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뿐이다. 그러다 날 좋아해 주면 좋은 거고, 아님 마는 거고.

성준수도 이렇게까지 진심일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농구에 매달리느라 다른 데 쓰는 에너지가 적어 전영중을 좋아한다는 자각이 늦었다. 그래서 저 좋다는 사람이랑도 사귀어 봤는데 얼굴이 전영중보다 못하네. 성격이 전영중보다 못하네. 입 터는건 전영중보다 덜한데 매너가 전영중보다 덜하네. 뭘 하든 전영중이랑 비교됐다.

아빠, 엄마랑 왜 결혼했어요? 자꾸 보고 싶고, 안 보니까 짜장면 물 때 단무지 안 문거 같고....... 누가 인터넷에 올린 일화가 생각났다. 딱 그 기분이었다. 뭐가 하나씩 부족한 새끼들을 보면 전영중이 그리웠다. 심지어 다정한 말투에 '조신해서 좋네'가 아닌 '입 안 털어서 재미없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잘못 꿰였다 싶더라. 성준수는 이마를 치고 지연이(지현이다)를 찾으며 우는 전영중을 보며 존버메타를 택했다. 저 새끼가 서른둘까지 솔로면 바로 채갈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뭐, 내가 언제?

화도 나지 않는... 건 아닌데, 그보다는 기가 찼다. 성준수, 여자프로농구선수 32세. 외모 가꾸는 데 관심이 없지만 제 얼굴 잘난 건 알았다. 태어나 자아가 성립된 이래로 쭉. 예뻐서 쫓아다녔다던 기억에도 없는 어린이집 친구 승호를 시작으로 저한테 쥐어 터져 코가 깨진 채로 좋아해서 괴롭혔다고 엉엉 울던 놈, 지나가다 번호 달라던 놈, 훈련 끝날 때까지 체육관 앞에서 기다리던 놈, 아침저녁으로 학교 셔틀을 자처하던 놈 등등이 알아서 줄을 섰다. 길 가다 기획사 명함 받고, 학교 브로슈어 표지 찍고, 인터뷰 몇 번 따이고, 비시즌마다 들어오는 방송, 광고 제의는 외모에 대한 확신을 얻는 과정이 아닌 사실 확인이었다. 역번 없는 정변 일로, 굴욕 없는 축복받은 얼굴은 한순간도 시든 적이 없었다.

그럼 시바 지가 뭔 소리를 지껄였는지 기억 못하더라도 같이 살자 했으면 '그럴까?'가 튀어나와야 정상 아니야? 쟤는 무슨 생각으로 매년 단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냈지? 여친을 사귈 거면 진득하게 사귀든가, 왜 꼭 크리스마스 언저리만 되면 헤어져서 불러내고 지랄을? 이럴 거면 작년에 사귀었던 수영인지(수연이다)를 불러서 같이 놀든가. 아무 사이도 아닌 이성을 집에 들이고 생일축하 겸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게 말이 되냐고!

그래 놓고 결혼하자니까 홀라당 까먹어? 뭐? 왜 오케이를 해? 저 좋을 때만 불러서 놀고 버리면 땡이야?

"아 이 씨발......."

나지막하게 뱉어지는 그루브 가득한 욕설에 대리기사가 움찔 떨었다. 턱을 괴고 밖을 본다. 푸른 버스 옆면에 붙은 광고의 커플이 성준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결혼해, 듀얼.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저거다. 비무장 상태의 남녀 단둘이 만나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두고 진검승부 보는 자리.

그래, 승부를 봐야겠다.

"그래서 짐 싸서 온 거야?"

이야기를 들은 성지수가 눈썹을 구기고 쳐다본다. 이게 어떤 거대한 씹타쿠 세계관이면 '언니 병신이야?'라는 말풍선이 붙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싸우고 친정 온 것처럼 말하냐?"

"언니, 영중 오빠가 서른 넘으면 그냥 같이 살자고 했다고 나한테 난리 치고 자랑했던 건 기억나?"

"나도 나 병신인 거 아니까 그만 갈궈."

"근데 영중 오빠는 기억도 못 한다?"

"나도 짜증 나 죽겠다고!"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에도 이제 성지수는 기죽지 않는다. 이 언니가 또 지랄하는구나 하고 말지. 엄마와 언니에 비해 유약하다 뿐이지 성지수 또한 같은 핏줄이었다. 혈육이 좋아하는 남자의 공수표만 믿고 있다 홀라당 차여 돌아온 걸 보고 화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복수해야지."

"점이라도 찍게?"

"응."

이 언니, 드디어 농구 그만두기로 결심한 건가? 가지지 못할 남자는 죽여서라도 소유하려고?

"제가 걷어찬 게 얼마나 끝내주는 건지 알려줘야지."

그리고 성지수의 화장대를 툭 건드린다. 아하, 화장 가르쳐달라고? 그제야 성준수가 왜 제 방까지 들어와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했다. 땀 흘리고 운동하는 사람이 무슨 화장이냐며 스킨 에센스 로션에 발라봤자 선크림까지였고, 방송용 화장은 샵에서 받아왔으니 이번에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성지수 역시 그녀와 핏줄이 이어진 가족이다. 지고는 못 산다는 뜻이다. 제 언니가 받은 모독은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저를 모독한 것과 같다. 그래, 영중 오빠가 버린 게 어떤 얼굴인지 알려줘야지. 장서희 님, 우리 자매에게 힘을 주세요. 성지수가 화장대 뚜껑을 열었다.

[전영중]

[뭐하냐]

[나 차 태워줘]

성준수가 그렇게 나가고 3일 만에 도착한 문자였다. 워치를 흘긋 본 전영중이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저 멀리 던져둔 핸드폰을 가지러 뛰어갔다.

아니, 잠깐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어? 나도 바쁜 몸인데. 미리보기에 떠 있는 [나 차 태워줘]는 금세 [빨리]로 갱신되었다. 그렇게 나가서 오랜만에 보낸 연락이 운전 부탁이라는 게 괘씸해 전영중은 애를 태울 생각이었다. 딱 10초만. 1... 2... 3... [바빠?] 45678910.

[준수 차는 어쩌고 나한테 태워달래?]

[엄마가 끌고 나갔어]

[바쁘냐고]

당연히 바쁘지. 리그 중인 선수한테 무슨 당연한 걸 물어? 준수는 안 바쁜가 봐? 은퇴할 때 돼서 관리도 놓은 거야? 연말이라고 풀어져서 경기 준비도 안 해? 어제 경기 마쳤다고 그새 풀어졌어?

그러나 사흘 전, 성준수가 떠나기 직전 내뱉은 말을 떠올리면 지금은 깝칠 때가 아니었다. 성준수 한정 필사즉생 노예정신에 길들여진 전영중은 알아서 기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 인생에서 그냥 친구 하나를 잃는 줄 알았으니까.

[언제까지 어디로]

[30분 후 집으로 올 수 있어?]

[서래마을 가야돼]

그렇지만 이건 너무 빠듯하잖아 준수야. 물론 안 된다고는 안 했기에 전영중은 샤워실로 뛰어갔다.

한겨울에 머리가 얼든 말든 물기만 턴 채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갔더니 성지수가 정장을 차려입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성준수, 시간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동생만 내보냈네? "지수야!" 그러나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 이는 성준수였다. 엑?

"준수 옷 뭐야?"

"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성준수가 또각또각 걸어와 옆좌석에 올라탔다. 화장에 문외한인 전영중조차 대충 봐도 오늘 빡세게 세팅했구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힘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웬일로 화장을 다 했어? 옷은 지수 거 뺏었어? 가방은 그게 뭐야? 핸드폰 말고 다른 게 들어가긴 해?"

"그럴 일이 있어. 네비 내가 찍는다?"

"준수 진짜 날 기사로 써먹을 생각이었어? 양심 없나? 나 운동하다 말고 뛰어왔는데? 이럴 거면 택시 타지?"

"그러니까 바쁘냐고 먼저 물어봤잖아. 좋다고 와놓고 지랄은. 택시는 시끄러운 기사님 만나면 귀찮아서 싫어."

익숙하게 잠금을 풀고 레스토랑을 목적지로 설정한다. 만나자마자 대뜸 입부터 털어대는 모습에 욕이 날아올 만한데 성준수는 되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리며 웃는게... 진짜 내가 아는 성준수 맞아? 낯선 느낌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전영중 개지랄 10년으로 축적된 빅데이터에 의하면 말이 많아지는 건 아니꼬운 게 있어서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성준수의 모습이 문제였고.

"서래마을은 뭐 하러 가는데? 남자라도 만......."

"응."

"응?"

"남자 만난다고. 나 듀얼 등록했어."

멀리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재빨리 앞차 꽁무니에 바짝 붙여 세운 전영중이 돌아보았다. 뭐, 뭘 등록해?

"듀얼?"

"어."

"결혼정보업체?"

"어 그거."

"결혼하게?"

"슬슬 해야지."

"준수 미쳤어? 시즌 중에 무슨 연애 사업이야? 그렇게 입고 가서 조신한 척 하하호호 하다 올 건 아니지? 준수야, 그거 사기야. 원래 선 자리는 내숭 깔고 간다지만 준수 성격 처음부터 공개 안 하고 얼굴로 밀고 나갔다간 배우자 귀책 이혼 사유 될 수 있다고. 준수 매칭 1순위 조건 부처님이라고 적어 냈어? 아니면 준수 성격 어떻게 감당하지?"

평소라면 적당히 하라고 나불대는 입을 쳤을 테지만 지금 성준수는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저 개소리가 꾀꼬리의 지저귐, 천상의 아리아처럼 들렸다. 더 짖어보렴, 마이리틀라쿤. 배알이 꼴린 꼬라지가 아주 보기 좋구나.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전영중이 몸서리쳤다.

"준수 어디서 세뇌당한 거 아니지? 결혼라이팅 그런 거."

"다 생각해서 등록한 거야. 지금부터 괜찮은 남자 찾아 연애 3개월 하고 봄부터 결혼식 준비해서 가을 시즌 전에 식 올리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오면 딱이잖아."

헉. 허억. 성준수의 말 한마디마다 전영중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운전대를 쥔 손이 위태하다.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괜찮냐?"

"괜찮, 아. 근데 너......."

결혼하자며. 입술을 꼭 깨물자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나보고 결혼하자며! 급하게 차 태워달래서 호구 새끼처럼 머리도 덜 말리고 달려왔는데 지금 나한테, 내 앞에서, 결혼할 사람 고르러 간다는 거야? 이유 모를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제가 성준수의 말에 제대로 답하지도 않은 건 홀라당 까먹고.

"저기 세워줘. 태워줘서 고맙다."

"아니, 준수 진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힌다. 창문 너머 성준수가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모던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더니 번듯하게 차려입은 남자에게 다가간다. 하필이면 자리가 또 길가다.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대화하다 아직도 떠나지 않은 저를 흘끔 보고 손을 작게 저었다. 쟤 억지로 웃는 거 못하는데. 연하로 보이는 남자는... 솔직히 준수한 편이라 못생겼다고 까기에는 양심이 아팠다. 명치께가 꽉 막히는 느낌에 핸들만 쥐어짜다 뒤에서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에 그제야 차를 출발시킨다.

"웬일로 누나가 무슨 밥을 사준대?"

"과장 진급했다며."

"누나, 안 하던 짓 하니까 나 무서워."

"어, 사실 내가 먹고 싶어서 불렀으니까 닥치고 먹고 가라."

"히히 응."

눈을 흘겨 하얀 SUV가 떠나는 것을 본 성준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미련 뚝뚝 떨어지는 출발시간, 아주 좋네. 성준수의 듀얼 상대는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듀얼은 무슨, 애초에 등록도 안 한 거. 외탁인 성준수와 달리 친탁인 사촌 동생은 겉보기에 완전 남이었다. 전영중 속여먹기로는 딱이다.

성준수는 트러플 버섯 리조또를 사촌 동생 앞으로 밀었다.

"여기 마싯당. 담에 여친 데려와야지."

"그래, 많이 먹어라."

만면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누구 속 뒤집히는 꼴이 재밌어 죽을 거 같았다.

성준수는 미친 결혼지망생처럼 구는 걸 멈출 줄 몰랐다. 준수, 영화 보러 갈래? 어, 미안 나 그때 듀얼 가. 준수, 헬스장 몇 시에 올 거야? 찬영 씨 보고 가면 오후에 갈듯. 운동스케줄이 꼬이고, 안 하던 화장하느라 시간을 허비해도 아깝지 않았다. 톡에 1이 사라지고도 20분이나 답장이 없다 '알써' 두 글자만 뜨면 불만 가득해서 앉아있을 녀석이 떠올라 엔돌핀이 치솟았으니까. 도발 개재밌네. 이 재밌는 걸 이제까지 전영중만 했네. 이기적인 새끼.

"언니, 요새 남자 생겼어요?"

샤워 후 파운데이션을 두드리는 모습에 후배가 묻는다. 이대로 퇴근해서 발 닦고 잠이나 자면 되는데 최근 들어 안 하던 화장까지 하니 팬서비스로는 과했다. 그런 걸 챙겨서 하던 사람도 아니고.

아니. 생기면 좋겠어서 수컷처럼 존나 구애의 춤을 추고 있긴 해. 성준수는 남미새 결혼지망생 코스프레에 전영중이 금세 자기 실수를 깨닫고 준수야내가잘못했어내가너아니면누구랑같이살아그날은내가실언했어 라며 구질구질하게 5번만 빌면 깔끔하게 과거를 잊고 같이 살아주려 했다.

근데 이 수컷 새끼는 꼬나보기만 하고 별 반응이 없네. 확 모가지를 꺾어버릴까.

해 봤자 1시간 후 클렌징오일에 닦여나갈 화장을 왜 해야 하나 매번 허무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눈썹 그리고 입술까지 바르는 이유는 오늘 경기를 전영중이 보러 왔으니까.

"......하하, 준수 오늘은 누구한테 잘 보이게?"

반쯤 돈 눈깔로 제 더플백을 받아 가는 녀석을 보면 1시간용 화장도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팬서비스 겸. 작년에 결혼한 언니는 매일 경기 보러 오시던 배우분이랑 눈 맞았는데 나한테도 그런 연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하하하, 하하, 진짜 안 어울린다."

하하하! 하하! 존나 웃기다! 조금도 웃지 않는 눈으로 애써 웃는 전영중을 보고 속으로 파안대소하며 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가세요. 감사합니다. 성지수에게 배운 인사하며 머리카락 넘기기 여우짓에 전영중의 눈이 빙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전영중 경기는 시합 없는 날이면 꼬박꼬박 찾아갔다. 당연하지. 걔 보라고 이 번거로운 짓거리를 하는데. 캐주얼한 정장에 코트를 걸치고, 난간에 매달려 몇몇 눈에 익은 선수들에게 눈웃음 샐샐 치며 어, 오랜만에 본다. 잘해라. 따위의 인사를 건넸다. 이 짓도 처음에나 어색했지 하다 보니 자연스러웠다. 림을 부술 듯이 덩크 하는 전영중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빡! 어디선가 날아온 공이 난간 아래를 맞고 튕긴다. 아씨, 뭐야. 공이 날아온 방향에 전영중이 팔을 당기며 보다 고개를 팩 돌린다. 저 돼지 새끼, 죽고 싶어 작정했나. 그치만 앙탈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넘어가 주마. 성준수는 웃으며 손이나 흔들어줬다. 전영중의 얼굴이 구겨진다. 웃는 놈이 이기는 싸움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업데이트가 느린 성준수는 이제 서른셋인 전영중을 기내초 동글이와 원중고 아가리 파이터를 섞는 것으로 캐해에 대차게 실패했다. 전영중 역시 남과 경쟁하여 승과 패로 나누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승부욕 45%, 향상심 35%, 과시욕 35% 도합 115%의 선수 인생을 즐기는 전영중은 포켓몬 트레이너처럼 걸어오는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 장난삼아 시작했던 10점 내기 길거리 농구에서 3연속 2점을 처맞았다고 성준수에게 포스트업을 해버리던 성질머리다.

성준수가 뭐 때문에 제 심기를 쿡쿡 찔러대는지 이해는 못 했지만 역치를 넘었다는 소리다.

"뭐냐?"

촉감 좋은 캐시미어 코트에 데크슈즈를 신고 머리를 넘긴 전영중이 반질거리는 낯으로 나타났다. 아니, 경기 끝나고 왁스는 선 넘었지. 머리 다시 감아야 하잖아? 눈발 섞인 바람이 훤히 드러난 성준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을 움츠리자 버건디색의 부드러운 목도리가 감겼다. 전영중의 목에 걸려있던 것이.

"끼 부리냐?"

"뭐, 내가?"

"어."

"너한테?"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끄덕인다. 맨날 트레이닝복에 롱패딩 입고 퇴근하던 놈이 오밤중에 왁스질까지 하고 나타나 목도리 감아주면 끼 부리는 거지 뭐야. 드디어 전영중을 함락시켰다고 내심 기뻤는데.

"준수, 별 볼 일 없는 몸뚱아리로 감기 걸릴까 봐 동정한 거지."

"뭐?"

"그리고 나도 해보려고. 팬서비스."

"씨...... 뭐?"

"그러다 좋은 인연 만날 수도 있잖아."

아, 씨발!

"언니......."

버건디 목도리를 목에 건 성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펀치를 세게 얻어맞고 멘탈이 녹아내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병신이야? 성지수는 동정 대신 경멸을 보였다. 그 얼굴로 그렇게 당하기도 힘들겠다.

"아니, 하... 씹......."

제 수컷이 드디어 구애의 춤을 추나 했더니 그 춤을 씨발 등 돌리고 추고 있을 때의 기분이란.

"그걸 또 목에 걸고 와?"

그 말에 정신 차린 성준수가 목도리를 뜯어내듯 풀어 던졌다. 아아아아악! 꾹꾹 누른 화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어떻게 죽이지?"

왜 죽인다는 소리부터 튀어나오는 거야.......

"언니, 영중 오빠 꼬시려 했다는 자각은 있는 거지?"

"아니지! 걔가 날 꼬셔야지!"

이건 또 뭔 소리래. 꼬시려고 성찬영 밥까지 먹여가며 별 쇼를 다 해놓고 영중 오빠한테 자길 꼬시라니. 아, 이 언니 설마 그거 한 건가? 밀당? 근데 언니가 그런 걸 할 줄 알던가?

"언니, 밀당할 때 여지는 줬어?"

"뭔 밀당. 내가 걔랑?"

그럼 그렇지! 그런 걸 할 리 있나! 성지수가 깊게 탄식한다. 보통의 친구였으면 이쯤에서 걔한테 마음 접든 사귀든 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통보했겠지만 슬프게도 이 삽질의 주인공이 혈육이다. 언니라고. 평생 이런 고민 한 번 안 해봤을 언니가 인제 와서.

"하, 그 새끼한테 어떻게 복수하지?"

"복수......."

—를 해야 하나? 무엇에 대한 복수? 그게 중요해? 영중 오빠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꾸민 거랬다며. 똑같이 당했네. 이건 언니가 졌다. 해 봤자 분노만 더 키울 말들은 삼킨다.

근데 이상하지 않나? 언니가 부른다고 운동하다 말고 달려와 기사를 자처하는 영중 오빠도 제정신은 아닌데. 꼬박꼬박 언니 경기 보러와서 퇴근까지 기다려 가방 들어주고. 남농 선수랑 친하게 군다고 성질내고. 이게 남친 아니면 유사 남친 짓 하는 썸남이지 뭐야.

"보통 친구가 추워한다고 하던 목도리 풀어주고 그래?"

"뭐래. 걔랑 나랑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언니... 그게 친구면 난 친구가 없는 것 같아. 어렴풋하던 둘의 관계를 뭐라 정의하면 좋을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국 사귈 거 염병 떨며 주변인만 괴롭히는 사이.

손 떼야겠다. 여기서 더 도와줘봤자 이득 볼 게 없다. 옷 빌려달랄 때 옷장만 열어주면 되지 뭐. 그리고 성지수의 예상대로라면 둘의 사이는 알아서 정리될 터였다.

[형]

[준수 누나랑 사겨요?]

케흑.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초콜릿 맛 프로틴이 역류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입을 닦으며 생각한 전영중이 결론 내린다. 헛소리구나. 무시하려는데 이어서 사진 파일 하나가 도착한다. 이건 미리보기가 안 되는데. 궁금함에 톡을 열자 핑크빛 열애 어쩌구 하는 헤드라인과 제가 웃으며 성준수에게 목도리를 감아주는 사진이 보였다. 아니 이게 뭐야.

[아니라고 하지마요 누가 여친 아닌데 저런 표정 지어]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다 알았다구요]

[결혼식 언제에요?]

[갠톡으로 한명씩 물어보면 형 힘드니까 제가 대표로 묻기로 했어요]

[고맙죠?]

[저한테 말하면 전파할게요]

[저녕중씨, 대답]

[아 형 빨리]

뭘 전파해. 이게 무슨 소리야. 재석이 얘는 혼자 소설을 쓰고있네. 아니, 목도리 둘러주는 게 뭐라고 사진을 찍어 가? 이거 사생활 침해 아냐?

[안 사귀니까 톡 그만 보내]

[아니 저게 안 사귀는 사이에 할 짓이냐구요 구라 ㄴ]

[친구 사이에 목도리 빌려줄 수도 있지]

그럼 애가 한겨울에 목덜미 훤히 보이게 입고 있는데 그걸 놔둬? 요새 신랑감 찾는답시고 얇게 입고 다니는 것도 맘에 안 드는데 놔뒀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 와중에 제 목도리에 폭 감긴 성준수가 예쁘긴 해서 기분이 좋았다, 다시 나빠진다. 저렇게 안 입어도 좋다는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거 아냐? 준수 선수잖아. 몸 관리 해야지!

[저게 친구 사이면 재석이는 친구 없어요]

[친구 좀 만들어]

[이 형 진심인가]

이어지는 메시지는 무시했다. 성준수의 경기에 맞춰 가려면 지금 씻고 나가야 시간이 맞았다. 그래도 친구 사이에 괜한 오해 사기는 싫으니까 오늘은 평범하게 갈까. 어제 경기 끝나고 왁스질 한 건 오버 맞는 거 같아. 옷을 챙겨오긴 했지만, 트레이닝복도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땀을 닦는다. 그래, 누가 친구 경기 보러 가면서 꾸미고 가. 그것도 같은 선수끼리. 아니, 그렇지만 성준수가 먼저 시작했잖아. 걔도 내 경기 보러 올 때 꾸미고 왔는데? 남자한테 별 관심도 없으면서 듀얼 등록하고, 그걸 또 부러 말하고. 빤히 나 보는 앞에서 남미새마냥 애들한테 추파 던져대는 게 누가 봐도 너 말고 다른 남자랑 만날 테니 배알이나 꼴리라고 티 팍팍 낸 거잖아. 퇴근길 팬서비스, 살갑게 인사하기 이런 거 안 했던 애가. 이상한 소문이 나든 말든 내 손해인가? 성준수 손해지. 어차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다고 그냥 친구도 아니지만.

그냥 친구가 뭐지. 전영중은 그게 어려웠다. 성준수의 성별이 다르다고 동성 친구들과 다르게 대한 적 없었다. 집에서 티 안 입고 있다 걔 오면 입는 건 뭐, 동성 친구들이 놀러 와도 그랬으니까. 속옷 갖다 두는 거야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았고 자주 자고 가니까. 칫솔도 그래서 있는 거고. 그럴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너는 여자친구 두고 다른 여자랑 크리스마스 보내게?'

그런 얘기도 듣긴 했다. 그치만 들어봐. 걔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브라니까? 술 마시고 놀다 보면 밤새울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국민이랑 논다고 하면 별말 안 할 거면서 왜 준수한테만 그래? 준수나 국민이나 나한텐 똑같은데. 그리고 원래 걔랑 매년 크리스마스 같이 보냈어. 매년 챙겨줬는데 여친 생겼다고 어떻게 안 챙겨줘.

'미친놈아! 여친이 있으면 당연히 여친이랑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그래서 매년 크리스마스만 되면 여자친구한테 뻥 차였다.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둔 성준수를 두고 펑펑 울기도 했다. 네 생일 한번 챙겨주기가 이렇게 힘드냐고.

'누가 친구한테 그렇게까지 하냐?'

그렇지만 우리 준수는 나 말고 이렇게 챙겨줄 친구가 없다니까. 나 아니면 누가 준수 챙겨줘. 성격 더러운 우리 준수를.......

......뭔가 이상한데.

[오늘 경기 오지 마라. 괜히 말 나오면 피곤하니까]

때마침 성준수에게서 도착한 문자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가던 이성을 다시 날려버린다. 준수 자의식 과잉이야? 왜 내가 당연히 갈 거라 생각하지? 왜 오지 말라 그래? 기사 때문에? 나랑 사귄다는 소리 듣는 게 피곤해?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해놓고?

인제 와서 내가 부끄러워?

"내가 부끄럽냐고!"

통. 골대를 훌쩍 지나친 공이 바닥을 튕긴다. 관중석으로 넘어간 공을 받아 자연스레 패스하는 195의 덩치를 어이없게 쳐다본다. 저 새끼는 오지 말랬는데도 데이트룩에 머리도 넘긴 게 작정하고 차려입은 모양새다.

언니, 사귀는 사이 아니라매요. 준수 니 거짓말했나. 경기장이 술렁인다. 게임 시작도 안 했는데 왜 벌써 피곤하지. 자꾸 전영중한테 말리는 느낌인데.

"전영중 선수, 여물고 경기나 보고 가세요."

"왜 오지 말라 그래?"

니가 이럴까 봐. 성준수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경기 전에 이러는 건 개매너 아니야?

"몸 풀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결혼하자며. 너 아무 남자한테나 그래?"

선수의 성량은 관중의 환호와 농구화 10족이 마찰하는 소음을 뚫고 팀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저 헛소리가 코트에 고스란히 울려 다들 들었다는 소리다. 왐마야. 누군가의 감탄사에 성준수가 공을 패대기치고 관중석으로 걸어갔다. 야, 일로 와. 손가락을 까닥이자 멀찍이 선 놈이 다가온다. 패기 넘치는 동작에 동료들이 움찔거렸다. 저거 패버리려는 거 아냐? 말려야 하나?

광고판 너머에 선 놈의 옷깃을 확 당겼다. 빙글거리며 웃는 놈의 얼굴을 바짝 붙이고 귓가에 으르렁거렸다.

"니가 까놓고 뭔 개소리야 시발아. 나 너랑 그냥 친구 못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게 남미새 흉내 내고 다녔어?"

"상관있냐?"

"상관있지. 지금 우리 남들이 볼 때 어떻게 보일 거 같은데?"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말했던 것도 이제 다들 알고, 이렇게 바짝 붙어서 소곤거리면.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 아냐?" 벗어나지 못하게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붙잡는다.

아, 이 새끼. 이성을 상실한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죽어도 질 생각 없는 거다. 감히 제가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꼴은 죽어도 두고 볼 수 없어서.

"준수, 여기서 나랑 염문 나면 천영 씨랑 헤어지고 듀얼 환불받아야겠다."

"찬영이다, 이 새끼야."

"천영이든 찬영이든 이제 다른 남자랑 못 만난다고. 내가 너 남친 있다고 다 소문낼 거야."

"해보든가. 누가 더 손해 볼 거 같냐?."

"준수 듀얼 취소 수수료 계산이나 하지?"

오냐, 그래. 어디 끝까지 해보자. 내가 네놈 혼삿길만은 막고 만다. 무릎 꿇고 제발 나랑 결혼해달라고 빌게 만들어주마. 목적을 상실한 승부가 빚어낸 대척점이 이상한 합의를 끌어낸다.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서 두 남녀가 이를 드러내고 호전적으로 웃었다.

적어도 너한테는 안 먹힌다.

"그래서 둘이 사귄다는 거에요, 아닌 거예요?"

전영중과 성준수가 밀착해 한참이나 이야기하던 걸 보던 동료가 물었다. 거리감에 비해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분명 연인 사이의 것은 아닌지라.

유일하게 전말을 알고 있으나 이 자리에 없는 성지수의 의견을 옮기자면, '알았으니까 결혼식 날짜 잡히면 연락해'였다. 남의 연애사에 함부로 끼어들어봤자 득 볼 거 없다니까.

하여간 받아주는 이 없이 서로 구애의 춤만 추는 기묘한 상황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었다. 덕분에 화려하게 꾸민 선수 둘을 볼 수 있는 크블 팬만 개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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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님 글이 너무 재밌어요😭😭😭 제발 후편을 주세요 쌍방 구애의 춤을 빙자한 질투작전의 승자가 누구일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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