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거짓말쟁이

23.06.25 빵준전력 | 거짓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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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시작 전 마지막 휴식을 즐기고 첫 훈련에 참여한 성준수의 모습이 처참했다. 턱에 커다랗게 거즈를 붙이고 오른팔은 손부터 팔꿈치 직전까지 퍼렇게 멍이 들어 한가운데에 붕대를 감았다. 미리 연락받은 스태프진은 이마만 짚었고, 들은 바 없는 선수들이 우르르 입구로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건 전영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뭐라 묻기도 전에 빠져나와 체육관 가장자리를 달리는 성준수의 옆에 딱 붙어 뛰는 게 분명히 아까 마친 러닝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준수, 팔에 그거 뭐야? 선수가 팔을 다 갈아왔네? 그 팔로 슛은 가능해? 피 터져서 실려 가는 거 아니지? 앰뷸런스 미리 불러둘까? 이번 시즌은 시작과 동시에 끝내려고? 재계약은 어떡하지? 어머니가 빌딩 사줄 테니 은퇴하고 관리나 하래? 농구선수 위에 조물주 위에 건물주?"

"전영중. 닥치고 뛰든가 걱정하든가 하나만 해라."

"내가 왜 준수 걱정을 해? 내가 팔을 갈아버린 것도 아니고 준수가 갈고 나타난걸? 준수 이번 시즌 컨셉은 지팔지꼰이야?"

"준수야, 영중이 울겠다. 한번 안아줘."

어느새 따라붙은 박병찬이 뒤에서 말한다. 이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수 없다고 러닝을 다시 하는 놈 2호다. 성준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질린다는 듯 속도를 올렸다. 당연히 그 정도로 뒤처질 사람들도 아니었기에 그냥 러닝만 빨리 마친 게 되어버렸다. 준수 이 정도로 지치면 어떡하지? 비시즌이라고 체력 관리 안 했나 봐? 철썩! 긴 스포츠타월이 전영중의 얼굴에 차지게 적중했다.

"그냥 타박상이니까 그만 좀 지랄해라. 관절 멀쩡하고 다섯 바늘밖에 안 꿰맸다."

"다섯 바늘이나 꿰매? 성준수 진짜 미쳤어? 손 안 쓸 거야?"

"관절부 찢어진 거 아니라 운동해도 된댔어."

"근데 뭐 하다 다친 거야?"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요."

"아, 준수 건물주가 아니라 사이클로 전향하려 했구나? 근데 나자빠지는 별 볼 일 없는 몸으로는 경기 못 나가겠다. 그래서 다시 농구하러 왔나?"

"보호구 안 했어? 멍이 꽤 심한데."

"보호구 했는데 재수 없게 보도블럭 경계에 팔 찍어서 다친 거고요, 넌 시발 닥치고 가서 제발 공이나 던져."

"준수야, 프로선수가 다른 운동 하는 거 외도야. 조신하게 헬스나 하지 무슨 싸이클을......."

"뼈는 안 부러졌고? 금 간 건 아니지? 쉬어야 하는 거면 푹 쉬고 빨리 회복하는 게 좋......."

"아! 남한테 신경 끄고 제발 할 일 하라고!"

성준수가 듣기 싫다는 듯 공을 튕기며 골대로 달려간다. 두 발 굴러 점프. 통, 백보드를 튕긴 공이 뒤이어 날아온 공에 맞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아 시발, 전영중! 그중 오른쪽으로 튕긴 공을 잡아 박병찬이 덩크를 꽂는다. 니네 진짜 웃기다! 순서대로 착지한 세 사람이 또 도주와 추격을 개시했다. 우리 준수. 준수야. 다 꺼져 제발! 유난히 시끄러운 셋을 보며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쟤네 뭐하냐.

체육관에서 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소리인지 시비인지 모를 말을 해대던 전영중이 기어코 집까지 쫓아왔다. 준수, 그딴 팔로 용케도 운전은 했네? 차도 팔처럼 보도블럭에 갈아버리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성준수을 제 차에 밀어 넣고 모셔다주기까지. 전영중과 박병찬에게 시달리다 지친 성준수는 어디까지 하나 볼 요량으로 대꾸도 앉고 소파에 앉았다.

"이거야?"

현관 구석에 놓인 자전거를 보고 전영중이 묻는다. 내가 사이클 선수도 아니고 다른 게 있겠냐. 고개를 끄덕이자 가만히 만져보던 녀석이 결심한 듯 말했다.

"버린다?"

"그게 얼마짜린데 버려?"

"그럼 당근 할게."

"아니 시발, 내 물건을 왜 네 마음대로 처분하지?"

"팔 갈아먹고도 자전거 또 타려고?"

"내년 비시즌에 탈거야."

"너 진짜 미쳤어? 다음에 어디를 어떻게 다칠 줄 알고 자전거 타겠다는 소리를 또 해?"

"아니 남이사,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남의 취미로 왜 이렇게 간섭질이지?"

참다못한 성준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영중아, 시발 전영중.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서 지랄하는 놈에게 다가가 어깨를 밀친다.

"너 나 좋아하냐?"

"미, 쳤어?"

"나랑 사귈 거야?"

"무슨... 소리야 진짜."

"근데 왜 눈을 그렇게 떠. 사겨주리? 아니면 함 떠?"

잘만 나불대던 녀석이 갑자기 시선을 피한다. 순식간에 목까지 빨개져서는. 그 와중에 자전거는 포기 못 하겠는지 안장에 얹은 손은 그대로다. 쯧. 매정하게 손을 쳐내고 전영중을 밀어낸다. 들어올 생각 없으면 꺼져. 쭉쭉 미는 대로 현관 밖까지 밀려난 녀석이 문 사이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래도 자전거는 타지마. 사고 나서 죽으면 어쩌려고."

"자전거가 언제부터 그렇게 위험한 운동이었냐?"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

"혹시 몰라서 죽을 게 걱정되면 밖에는 어떻게 나가냐? 너 과민증이야 그거."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어."

"뭐래. 철학 하냐?"

쏘아붙이는 말에 반박은 없었다. 입을 일자로 닫고 있던 녀석이 발을 뺀다. 갈게. 내일 9시에 데리러 올게. 어, 꺼져. 택시 타고 갈 거야.

다음날 8시 반, 아파트 출구에 전영중의 차가 서 있었다. 미친 새끼. 몇 시부터 와있었냐? 8시. 여기 주정차위반 단속카메라 있는데. 택시비보다 범칙금이 더 나올 멍청한 새끼가 가엾어 별말 없이 옆자리에 몸을 실었다.

전영중의 문제는 하나였다. 고백을 안 한다.

성준수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주제에 좋아한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한다. 성준수의 착각이라기에는 친구도 알고, 동료도 알고, 코치도 알고, 감독도 알고, 구단주도 알았다. 우리 전영중 친구가 성준수 선수를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기 부끄러워 말을 꽈배기처럼 두번세번네번 꼬고 있구나.

참다못한 성준수가 친구 동료 코치 감독에게 재차 확인받은 후 (저 새끼 저 좋아하는 거 맞죠?) 전영중에게 돌격해 너 나 좋아하냐? 사귀고 싶냐? 라고 물었다. 동그란 녀석의 눈이 동그랗다 못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더니 말했다. 아니? 준수 미쳤어?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왜겠냐. 날 네 마누라처럼 대하는 걸 사돈의 팔촌까지도 알게 생겼는데.

이 짓거리를 대학 농구부터 프로까지 2년에 한 번꼴로 했다. 성준수도 징한 게, 그때마다 전영중 간접 공개처형을 했다. 2년마다 주변인에게 저 새끼 저 좋아하는 거 맞죠? 라고 묻고 다녔다는 뜻이다. 성준수도 이유는 있었다. 저 새끼가 날 도끼병으로 몰아가는 건 싫으니 나름의 확신이 필요해서다. 모두에게 YES를 듣고 실행한 '너 나 좋아하냐?' '나랑 사귀고 싶냐?' 아웃풋이었으나 어쨌든 '준수 도끼병이야?' 라는 대답을 듣긴 했다. 그럼 니는 정신병이냐.

아프면 제일 먼저 헐레벌떡 뛰어와 놓고. 화장실 간 사이 간식이 들어오면 제 것과 성준수 것 두 개를 꼭 쥐고 기다렸으면서. 12월 24일 00시 00분에 그 누구보다 먼저 생일축하 문자를 보내놓고서. 지금도 팔 다쳤다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시켜 주는데? 그 외의 수많은 유사남친짓을 해놓고 죽어도 자기는 성준수를 안 좋아하고 사귈 생각 없단다.

내가 너무 철벽 쳤나. 성준수는 잠시 반성했다가, 안 했다. 성준수는 연장자나 위 직급이 아닌 이상에야 공평하게 지랄했고, 오히려 전영중에게는 유한 편이었다. 그러니 전영중이 제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수시로 자전거를 버리겠다 노려도 현관 비밀번호를 안 바꾸고 놔두지. 그리고 사겨 줄 생각이니까 너 나 좋아하냐? 따위의 질문을 2년마다 하는 거고. 성준수도 자기 싫다는 남자랑 사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냥 쟤 마음 확인하고 내 마음 확인해서 맞으면 오케이, 오늘부터 1일. 근데 아니라잖아.

아. 불현듯 성준수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그래. 질문이 잘못된 거다. 오늘도 집 앞까지 모셔다 준 전영중이 안전벨트까지 풀어 주고 얌전히 기다린다. 도착했는데도 바로 내리지 않는 성준수를 보고 또 제가 뭘 잘못했나 눈치 보고 있었다.

"너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이게 애들처럼 좋아함으로 그칠 감정인가. 제가 아프거나 다치면 세상 다 무너진 것처럼 구는데 그런 가벼운 감정일 리가. 좋아함 따위로 치부해서 속상했구만? 내가 전영중을 또 몰랐네. 최고의 슈터 성준수, 오늘도 날카로운 3점 슛이었죠? 성준수가 의기양양하게 전영중을 보았고,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려."

울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눈물샘만 연 것처럼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뭐지? 성준수는 당황했다가, 일단 그의 말대로 내렸다.

"내일은 택시 타고 가. 미안."

"어어......."

닫히는 문 너머로 핸들에 머리를 박는 게 보였다. 아는 척하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걸음을 돌려서 단지 안의 벤치에 앉았다. 차 후미등만 겨우 보이는 위치였다.

차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 주정차위반 단속카메라에 찍히는 자리라니까.......

전영중은 30분이 지나서야 떠났다.

성준수조차 눈치챈 감정을 자각 못 했을 리가.

서운함인 줄 알았던 것은 부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성준수를 보고도 여전했기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집이 가까우니 부르는대로 나가서 같이 운동하고, 평소처럼 시비를 걸었다. 성준수는 니는 말을 왜 그따위로 하냐고 욕을 박으면서도 매번 불러냈기에, 전영중도 그냥 얘한텐 이러고 싶은가보다 생각했다. 악우라고 해야 하나? 험담 같은 말로 우정을 확인하는 부류. 성준수에게는 그게 나구나.

아니었다. 나란히 카페에 앉아 준향대 합격발표를 기다리며 다리를 달달 떨고, 마침내 합격을 확인한 성준수가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카페에서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는 성준수의 가슴팍에 안겨 흥분으로 빨라진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야 전영중은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

-내가 너한테 미친놈처럼 군 것도 알고, 못된 말 많이 해서 이럴 자격 없는 건 아는데....... 좋아해. 말이라도 하고 싶었어. 네가 나 좋아한다는 기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차도 괜찮아. 그냥 전처럼 똑같이 친구로 대해줘. 티 안 내고 혼자 좋아할게. 미워하지만 마.

흥분한 성준수에게 안겨 그따위 초라한 고백을 했다. 카페에서 소리 지르던 성준수가 조용해졌다. 검은색 맨투맨을 축축하게 적시는 모습에 냅킨을 냅다 눈에 박아버렸다. 준수야, 좋아하지만 이런 거친 모습은 진짜 정나미 떨어진다. 거친 냅킨으로 눈물을 꾹꾹 찍는데 성준수가 물었다.

-사귈래?

-시발 사랑해.......

성준수와 입을 맞췄다. 깍지 껴 손을 잡고 카페를 나왔다. 잠깐 핸드폰으로 지도를 본다고 손을 풀었을 때였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제동 소리와 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빙글빙글 돌던 차가 기적처럼 전영중 옆에서 멈췄다. 와, 골로 가는 줄. 개놀랐네. 무릎 바로 옆에서 멈춘 찌그러진 차체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준수야, 괜찮아?

그런데 차가 여기 있으면 준수는?

타이어가 빠진 차체 밑에서 피 웅덩이가 번졌다.

깨진 차체 파편이 손을 찌르든 말든 일단 손을 밀어 넣고 들어 올리려 애썼다.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 사람, 사람이 깔렸어요! 다 뒤집힌 목소리로 소리 지르자 사람들이 몰려오고, 돕지는 않고 전영중을 붙잡아 뒤로 당겼다. 사람이 깔렸다니까! 평균을 훌쩍 넘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다섯 사람에게 사지를 붙잡혀 간다. 찌그러진 보닛에서 불길이 일고 기름이 길게 도로를 따라 흐른다.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저기에 준수가, 준수가 깔렸는데....... 멍하니 제 손을 보자 엉망으로 찔린 손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아, 안 아픈거 보니까 꿈인가보다. 이거 꿈 맞지? 철썩, 뺨을 치자 그건 또 아팠다. 아프면 안 되는데. 꿈이어야 하는데.

눈앞이 흐릿해졌다. 보도블럭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제발 꿈이라고 해주세요. 누군가 서럽게 우는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왜 울고 지랄이야?

고개를 들자 멀쩡한 낯의 성준수가 보였다. 핸드폰에는 합격 알림 메시지가 보였다.

-내가 준향대 합격한 게 그렇게 못마땅하냐? 그럼 너도 주익대 말고 준향대 쓰든가 했어야지.

주변을 둘러보자 카페 안의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 새끼는 도통 이해를 못 하겠네. 카페 냅킨을 냅다 눈에 박아버린다. 대충 문질러 닦고 성준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야, 뭔데? 갑자기 왜 이래? 사고 났던 거리를 피해 빙 돌아간다. 혹시나 해서 귀를 기울였지만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나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꿈이었나 봐.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다.

-합격 축하한다.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진짜로. 그리고 나.......

꿈에서 했던 것처럼 볼품없던 고백을 다시 한다. 두 번째에는 조금 멋있게 수정했다. 성준수는 이번에도 물었다. 사귈래? 준수야, 진짜 사랑해....... 깍지를 끼고 한겨울의 강남을 걷는다. 끼긱. 위태롭게 달려있던 간판이 성준수 위로 떨어졌다.

더 이상 고백이니 뭐니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시 성준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카페로 돌아왔다. 어어 준수 준향대 합격 축하축하. 그 길로 집에 준수를 쑤셔 넣고 돌아왔다. 준수야, 인도에서는 꼭 안쪽으로 걷고,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모르니 건물에 너무 붙지는 말고. 시바 안쪽으로 걸으란 거야 말란 거야? 적당히 네가 알아서 잘....... 전영중이 10분에 한 번꼴로 안부 문자를 보내다 급기야 작작 하라는 전화를 받기까지.

타이밍을 놓친 고백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 한 해를 넘긴다. 학기 중에는 바쁘게 지내다 방학 되면 종종 동네에서 만나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는 게, 준수에게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거 나름... 연인간 데이트 같지 않나? 하고 충족감을 느꼈다. 자각하고 나니 성준수도 제법 전영중을 우리 집 똥강아지처럼 따스하게 봐준다는 걸 알겠더라.

그리고 이듬해, 주익대 대 준향대 경기에서 처참히 발린 성준수가 물었다. 너 나 좋아하냐? 전영중의 대답은 흐어어어어어으으응이었다. 너 너무 좋아해. 언제부턴지도 모르겠어. 최소 입시 끝나기 전부터야. 근데 왜 고백을 안 했냐, 미친놈. 사귈래?

그렇게 전영중과 성준수는 사귀기로 했다. 키스하고, 체육관을 나가던 성준수가 계단에서 머리부터 굴렀다. 범인은 [Caution! Wet Floor]였다. 개새끼들. 한국어로 좀 적지. 두 사람의 교제는 또 없던 일이 되었다.

이번 생은 글렀나 보다. 세상이 내 사랑을 이렇게 억까할 수 있나? 전영중이 베개를 퍽퍽 쳤다. 시간까지 되돌려 가며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다고? 이걸 뭐라 그러지? 회귀물? 가슴이 옹졸해지는 짝사랑 훼방 회귀물에 전영중은 신을 찾았다. 그냥, 개너무하시네요. 그 말 하려고.

그래도 돌아간 시간에서 성준수가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두 발로 저벅저벅 내려간 게 다행이었다. 대신 호들갑 떨며 달라붙던 전영중이 쭐떡 미끄러져 엉덩이로 계단 다섯 개쯤 내려가긴 했는데, 머리도 아니고 고작 엉덩이였으니 됐다. 게다가 제 사랑, 성준수가 배를 잡고 깔깔 웃기까지 하는데 그 정도면 남는 장사지.

전영중의 고백은 그렇게 끝났다.

성공확률 100%. 전영중의 고백은 성준수가 받아주고, 성준수가 죽는다. 그래서 아예 안 했다. 아무렴 내 사랑보다 너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내 사랑은 숭고하게 짝사랑으로 남겨둘게.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네가 살아있어야 할 것 아니니.......

성준수를 향한 제 사랑을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적인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는 성준수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다. 나의 사랑은 성준수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마음이다. 그러나 3점 슈터 성준수는 걸핏하면 전영중의 가슴에 그 무거운 농구공을 퍽퍽 던져대며 들쑤셔 놓았다.

-너 나 좋아하지.

-아닌데.

-나 볼 때 어떤 표정인지는 아냐? 근데 나 안 좋아한다고?

-준수 도끼병이야? 하라는 농구는 안 하고 남의 표정만 보고 있어?

-니가 존나 사랑에 빠진 표정인데 어떡하라고. 멜로눈깔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너 보니까 알겠다.

이때 전영중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아가페의 탈을 쓰고 있던 제 사랑이 탈을 부욱 찢고 나는 씨발 에로스고 성준수를 존나 사랑한다고 외쳤기 때문이다.

-너 나 사랑하지.

이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지만 자세하게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또 볼품없게 사랑 고백을 한데 더해 내가 고백하고 네가 받아줄 때마다 네가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는지 아냐고 구구절절 말했기 때문이다. 기억에도 없는 제 죽음을 모두 들은 성준수는 고맙게도 미친놈 취급 대신 미칠 만큼 힘들었던 놈 취급을 해줬다. 그렇게 성공확률 100%의 고백은 또 성공했다.

그날 밤, 집에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고 한다. 몇 시에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성준수가 죽으면 오래되지 않아 시간이 돌아갔으니까.

어서 꿈에서 깨길 바라며 제 뺨도 치고, 잘못했으니 차라리 시간을 돌려달라고 신에게 기도도 했으나 사흘이 되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되돌아갔던 시간에 대해 말해서? 이유는 모른다. 이유가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기어코 성준수의 유해가 담긴 관이 소각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탈진할 만큼 울다 정말 기절했다.

-너 나 사랑하지.

전영중의 에로스가 주섬주섬 아가페의 탈을 썼다. 오늘은 각오했다는 듯 성준수가 결연하게 전영중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을 힘주어 떼고 눈썹을 구겼다.

-준수야, 남의 표정 살필 시간에 농구나 해. 그러다 주전 밀린다.

빠악! 커다란 손이 전영중의 머리를 갈겼다. 그래도 괜찮았다. 준수가 칼에 찔린 건 아니니까. 그거 진짜 아팠을 텐데.

그러니까 전영중은 괜찮았다. 성준수는 언제든 제 마음을 받아준다는 확신만으로 인생 저당 잡힌 머저리등신호구새끼 같이 굴어줄 수 있었다. 비록 사랑하냐는 말에는 죽어도 답할 수 없지만.

준수야, 내가 사랑한다고 했다가 네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나, 네 장례 두 번은 못 치러. 네 영정사진 못 본다고. 나 사랑한다는 기적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제발 죽지만 마.

차라리 내가 사랑하지 않을게. 그런 척이라도 할게.......

택시를 타고 출근한 체육관에 전영중이 없었다. 진짠가. 코치가 성준수를 보자 대뜸 '영중이 오늘 아파서 쉰댄다.'라는 말을 전한다. 천장을 한번 보고, 바닥을 한 번 보고. 뒤이어 출근하는 박병찬에게 더플백을 넘겼다. 준수 어디가? 전영중 잡으러요.

며칠째 성준수의 차는 체육관에 주차돼있었으니 굳이 택시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네비도 찍지 않고 전영중의 집으로 가 바로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어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누르고, 마침내 핸드폰에서 전영중이 옛날 옛적 보냈던 현관 비밀번호를 찾아 누르고 들어갔다.

집에 없는 척 숨죽이고 있던 전영중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뛰어나오다 딱 걸린 자세로 서 있었다.

"준수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니가 알려줬잖아. 장난하냐?"

"당연히 기억 못 할 줄......."

기억 못 한 건 맞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영중의 더플백을 찾아 대충 짐을 쑤셔 넣었다. 속옷에 슬리브, 타이즈, 운동복만 넣고 지퍼를 잠그려는 걸 막더니 작은 손가방을 하나 더 들고 와 넣는다. 뭔데? 로션 그런 거. 섬세하시다 진짜.......

그 와중에 파우치는 챙긴 놈에게 더플백을 안겨주자 가만히 끌어안고 있다. 다 불어 터진 만두 같은 얼굴이었다. 허우대 멀쩡한 게 최대 장점인 놈이 왜 이런 꼬라지냐.

"울었냐?"

"......안 울었어."

"이게 안 운 얼굴이겠다? 밤새 수도꼭지 틀었구만. 뭐가 그렇게 서러웠냐?"

 붙잡아 소파에 앉히고 이마며 목에 손을 댄다. 옷깃 안으로 집어넣어 더듬는 손길에 그제야 화다닥 성준수의 손을 떼냈다.

"준수 왜 이래? 미쳤어?"

"열은 좀 있는 거 같다? 너무 울어서 그런가? 진짜 어디 아파? 아니지?"

"아니니까 좀 가, 제발. 오늘 쉰다고 연락 넣었잖아."

"쉬기는 무슨, 천하의 전영중이."

가라는 말에 성준수는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발을 대고 아빠 다리로 앉더니 빨갛게 터진 얼굴을 쓰다듬는다. 하여간 말은 더럽게 안 들어. 뭐에 울컥했는지 코를 훌쩍이는 전영중을 대신해 눈가를 꾹꾹 눌러준다. 그만 울라고.

"내가 어젯밤 실언했어. 미안하다."

"......그게 미안할 일인가."

"내가 너 사랑해."

전영중이 데인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성준수를 보다 큰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뭐야?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해?"

뭐가. 전영중의 손바닥 안에서 웅얼 대답했다가, 손을 치워버린다. 왜 남의 입을 막고 지랄이야.

"뭐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고."

"사랑하니까 사랑한...."

"사랑한다고 하지 마!"

텁. 이번엔 성준수의 목을 잡고 더 단단하게 입을 덮었다. 꼭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천장과 제집 구석구석을 돌아보더니 성준수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 몸을 돌려 제 다리 사이에 끼우고 그 위를 덮는다.

"뭐하냐."

"나 너 안 좋아해. 사랑한 적 없어. 너한테 사랑받는 기적 같은 것도 바란 적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 네가 뭘 안다고 사랑한다고 말해?"

"......그게 이 꼬라지로 할 말이냐? 펭귄이 제 새끼 숨기듯 가랑이 사이에 처 집어넣어 놓고?"

전영중의 다리 사이에서 성준수가 말했다. 우리 가족이랑도 이런 자세는 해본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이 새끼 쥐약이라도 주워 먹었나, 왜 이러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물이 방울진 눈과 마주쳤다.

"준수야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마음 접을 테니까 나 좋아한다고 하지 마. 너 죽는 거 이제 보기 싫어......."

이마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부러 비시즌에 연락도 안 했다. 괜히 만나서 놀라나갔다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데이트하는 기분을 느끼기 싫었다. 준수 그런 생각으로 좋아하지 않기로 했잖아. 실수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죽으면 어떡해. 그랬더니 알아서 몸을 박살 내고 돌아왔다.

다 벗겨진 턱이랑 멍든 팔을 보면서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말했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최근에 성준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연락도 일부러 줄였다. 문자는 최대한 건조하게, 좋아한다는 소리는 당연히 하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안 되나? 잠꼬대가 아니면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죽지 마. 나 때문이 아니어도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준수야. 위험한 것 좀 하지 말고. 그날 무슨 생각으로 운동을 마쳤더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이게 저주지 뭐야. 시간을 되돌려주면 뭐 해. 결국 말도 못 하는데.

"내가 널 사랑하면 죽어?"

"내가 널 사랑하면 죽어."

"진짜?"

"어."

"......이미 죽었냐?"

전영중은 답하지 않았다.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던 사라진 시간을 전영중은 기억해서다. 네가 가장 느리게 죽고 늦게 회귀했던 시간이었어. 침묵에 성준수가 그의 머리를 당겨 어깨에 눌렀다.

"불쌍한 새끼."

"왜, 내가 미친 거 같아 불쌍해?"

"아니, 혼자 마음고생 많이 했겠다 싶어서."

"그걸 믿어?"

"믿지. 너 울 땐 거짓말 진짜 못해."

그러니까 말이 안 돼도 믿어야지 어떡해. 동그란 머리를 토닥인다.

"좋아하는 놈이 하는 말인데."

그 말에 울면서도 손으로 입을 막는다. 진짜 끈질긴 새끼.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떼고 전영중의 머리를 들어 올린다. 고개를 젖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네가 날 사랑해서 안 되면 내가 널 사랑할게."

"......나 이제 너 죽는 꼴 못 봐."

"내가 널 사랑하는 게 기적이라며. 그럼 네 기적 한번 믿어봐. 믿음직하면 그때 사랑하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뺨을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를 뒤져 아이스팩을 꺼내온다. 그마저도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는 전영중의 양 빰에 아이스팩을 꾸욱 누르자 팅팅 부운 얼굴이 이제는 터진 만두보다 복어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푸흡, 웃는 성준수의 모습에 전영중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날 사랑한다고......?"

전영중의 물음에 성준수가 아이스팩을 꾸우욱 누른다. 하여간 지능은 농구에다 다 써버린 새끼. 중요한 눈치는 다 터트려서 길에 질질 흘리고 다니는 새끼.

"나 네 고백 10년 전부터 기다렸어."

시즌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가진 가벼운 회식 자리였다. 배를 채운 성준수가 늘 그런 것처럼 제일 먼저 일어났고, 전영중이 당연하게도 뒤를 따랐다. 말없이 손을 찾아 깍지를 끼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나지막이 묻는다.

"어때, 이제 사랑할 만한 것 같아?"

시선을 조금 내려 제 사랑을 쳐다본다. 여전히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깍지를 풀고 온몸으로 그를 감싼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록 불로 바뀌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도 그를 껴안았다.

"응. 사랑해. 나랑 사귀자."

눈을 감는다. 신님, 죽일 거면 차라리 같이 죽여주세요. 준수만 데려가지 마세요. 차라리 절 데려가세요. 그냥 아무도 안 죽고 사랑하게 해주세요.

다시 빨간 불로 바뀌고, 무수한 차들이 그들 앞을 지나친다. 사방으로 한참을 지나치던 차들이 다시 멈추고 초록 불이 들어온다. 포개진 손 풀어 맞잡고는 길을 건넌다.

성준수는 그의 기적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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