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에서 온 남자, 수성에서 온 남자 上

인외AU

PITA BREAD by 22
511
25
6

전편:

전영중은 인천공항 1터미널 입국장에 나와 있었다. 약간 상기된 얼굴 아래로 한 손에는 아담한 타블렛pc가 들려있었다—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아담한 크기였다. 농구선수의 커다란 손은 12인치 타블렛을 8인치로 둔갑시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 12인치 타블렛에 박힌 문자는 단 세 개였다.

준수♡

최대 밝기로 키워져 짙은 파란색으로 빛나는 글자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피곤한 낯으로 입국장으로 빠져나오던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친다. 저거 남자 이름 아닌가? 하트는 뭐지? 게이? 환하게 빛나는 타블렛 위의 발간 얼굴을 보고, 다시 타블렛에 적힌 준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음, 뭐, 그래. 좋으신가 보네.......

"어후 씨발, 뒤지겠다."

정작 당사자는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그란 귀가 움찔거리더니 인파 속에서 정확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발광하는 타블렛 화면을 보고 움찔 멈췄다가, 오른쪽으로 캐리어를 밀어 나온다.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펜스를 따라 그를 졸졸 쫓은 전영중은 성준수가 보지도 않고 밀어낸 캐리어를 받았다.

"물."

"여기."

기다렸다는 듯 전영중이 한쪽 팔에 끼고 있던 1.5리터 생수를 넘긴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병뚜껑부터 뜯고는 곧장 입에 물고 부지런히 꼴깍댔다. 크게 신경 안 쓰던 이들도 남자의 목과 물병이 점점 뒤로 젖혀지자 무슨 묘기를 보듯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 통을 거의 비워내서야 성준수는 개운하게 입을 뗐다.

"미친, 비행기 존나 건조해. 건어물 되는 줄 알았네."

"많이 힘들었어?"

"어. 팔자에도 없는 비행하느라 온몸이 쑤신다."

야멸찬 대답에 전영중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쪽 바다는 건너지 않겠다 선언한 이후 처음 있는 귀국이었다. 그럼 들어올 방법은 항공기나 배를 타는 것뿐인데, 성준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고민과 짜증을 거듭했다.

"씨발, 무슨 바다 끼고 있는 나라를 가는데 비행기를 타냐고 비웃더라. 자존심 상하게."

"그래도 네 몸이 더 중요하지."

"알아. 그러니까 비행기 탔잖아."

슬그머니 제 허리를 감싸오는 손과 어깨에 얹어지는 머리의 무게를 느끼며 성준수가 생수통을 마저 비웠다. 어휴, 이 개새끼(욕설이 아니라 애칭이다). 생수통을 구기고 머리를 쓰다듬다 살짝 당겨 뺨에 입을 맞춘다. 연인의 짜증에 시무룩해 있던 전영중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보고 싶었어, 자기야."

전영중이 뺨이며 목에 얼굴을 문지르고 입을 맞췄다. 온몸에 제 냄새를 묻히고 싶었지만 공공장소라 꾹 참은 게 이 정도였다. 아니면 진작에 귀며 꼬리며 튀어나와 사진 찍히고 난리가 났겠지. 다 큰 성체가 돼서 그런 채신머리 없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 그렇지만....... 못 참아도 별수 없는 것 아닌가? 무려 반년 만에 보는 건데. 매일 영상통화 하긴 했지만, 화면으로는 준수 냄새를 맡을 수 없었으니까.

전영중이 거의 파묻을 듯 비벼대는 통에 성준수의 몸이 조금씩 밀렸다. 버거운 갯과 동물의 애정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성준수가 동그란 뺨을 토닥였다. 그래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임마.

전영중은 스페인에 못 갔다. 못 갔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만. 변명하자면 전영중은 진짜 제 짝의 이민 소식에 눈이 돌아가 농구고 뭐고 때려치우려 했다.

감독님, 저 이번 시즌까지만 할게요. 프랜차이즈 선수의 뜬금없고 영문 모를 선언에 감독이 말을 더듬었다. 다, 다른 데서... 오래? 저 스페인 가려구요. 스페인에서... 오래? 아뇨, 은퇴하게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 한창 때인데 뭔, 무슨 은퇴. 농담이지? 싶은데 전영중의 얼굴에는 예의 이상의 웃음이 없었다. 시바, 진심이구나. 지난 재계약 때 전영중에게 짜게 굴었던 업보가 이렇게 몰아치나 싶었다. 연봉 올려달라고 대놓고 말할 애가 아니긴 하지만, 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갖다댈 건 또 뭐람. 전조증상도 없이 찾아온 위기에 감독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비상사태였다. 집에서 저녁을 먹던 구단주가 밥숟가락도 놓고 달려왔다.

재계약 때 1억 증액 어때. 저 연봉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알았어, 1억 5천. 아니, 2억. 저 진짜 스페인 가야돼요. 그래, 영중아 우리가 잘못했다. 2억 5천으로 봐주면 안 되겠니? 돈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단호한 태도에 구단주가 최후의 협상안 꺼낸다. 그냥 샐러리 캡 찍어줄게. 사실상 항복이었다. 전영중은 바란 적 없는.

몸값을 천장까지 올려놨으니 빵끗 웃어도 부족할 마당에 전영중이 죽상을 하고 집에 왔다. 정말 기분이 안 좋은지 두툼한 귀를 드러내고는 축 늘어뜨린 채로 성준수를 끌어안고 하소연했다.

나는 준수 너랑 스페인에 가고 싶은 건데 왜 이렇게 구단이 붙잡는지 모르겠어. 내가 늑대인간이라 반려 곁에 있고 싶은 거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너만 스페인에 보내고 내가, 흑, 어떻게 살아. 전영중은 상상만으로도 슬픈지 눈물을 한 방울 떨구기까지 했다.

"얼마 올려준다는데?"

"3억 5천."

"미쳤나? 3억 5천을 더 준다고 하면 그냥 재계약 해. 니가 언제 앉아서 3억 5천을 벌겠냐?"

그러나 짝이 제 편이 아니라는 게 비극이었다. 돌았어? 3억 5천만큼 경기 당 넣어야 하는 공 개수 할당받는 것도 아니잖아? 개이득인데 왜 안 한다고 지랄이지? 말 한마디마다 서운함을 차곡차곡 적립하던 전영중이 급기야 제 품의 짝을 터트릴 것처럼 꽈악 끌어안았다. 아악! 당연히 비명이 뒤따랐고.

"왜 내 편 안 들어줘?"

"3억 5천 내다버린다는 새끼 편을 왜 들어주냐? 야, 헛소리 말고 찾아줄 때 열심히 뛰어. 여기서 그만두면 3억 5천이 아니라 연봉 전액이 날아가는 건데."

"나 광고당 받는 개런티가 얼만데. 그깟 돈이 그렇게 중요해?"

"니 선수 때려치면 광고회사에서 불러줄 거 같냐? 벌 수 있을때 바짝 벌어놔야지. 이민은 공짜야?"

"3년 계약인데? 너는 나 3년동안 못봐도 돼?"

"일년 내내 경기하는 거 아니잖아. 비시즌에 오든가."

"시즌일 때는 못 보잖아. 너는 그동안 나 못 봐도 괜찮아?"

"조선 시대도 아니고, 영상통화 다 되는 시대에 못, 악, 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이 개새끼야!(이건 욕이다)"

이 설전은 전영중이 성준수의 뒷목을 힘껏 깨물며 중단된다. 어린 날 만들어둔 잇자국을 깨물며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몸을 꽉 끌어안다 급기야 소파 위에 눕히고 짓눌렀다. 아파하는 모습에 일말의 죄책감이 든 전영중이 깨무는 와중에 목덜미를 슬쩍 혀로 핥아줬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은 듯 했다. 그 고운 입에서 죽인다, 회 친다, 갈아버린다 등 곱지 못한 온갖 협박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전영중은 사람 형태로 아르릉거리며 끝까지 달라붙었다. 비릿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마침내 성준수에게서 만나러 오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론 성준수의 대답이 어떤 극적 화해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적어도 늑대인간의 기분은 풀렸으나 뒷덜미가 너덜너덜해진 인어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 인생에 일방적으로 뛰어든 개새끼에게 가운뎃손가락 하나를 올리고도 성에 차지 않아 하나를 더 올려 기어코 쌍뻐큐를 먹인 성준수가 그날 강릉 바다로 빠져나가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시작된 반년의 독수공방이었다. 성준수를 쫓아 스페인으로 날아갈까 했는데 하필 시즌 중이었다. 짝이 보고 싶어 매일 숙소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우우 울었다. 동네 개 우는 소리가 심하다는 민원은 성준수가 한 달 만에 겨우 영상통화를 받아주면서 사라졌다. 다시는 함부로 뒷목을 물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준수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보고있어도 보고 싶은 인고의 시간을 지나, 성준수가 다시 전영중을 만나러 온 것이다.

"뭐부터 할래? 목욕, 식사, 아......."

"목욕. 입욕제 말한 거 사놨지?"

—니면 나? 라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라밴더향 배스솔트. 많이 사놓으란 말에 아예 박스로 사놓긴 했다. 전영중이 부루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칭찬하듯 턱과 귓불 아래를 긁어준다.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성준수를 끌어안았다.

"아......."

이 자식 또 치대네. 엉겨 붙는 게 늑대인간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아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밀어내려고 얼굴에 손을 올리자 냉큼 핥아온다. 저보다 커다란 놈이 눈치를 살피며 애교부리는 게 귀엽다는 생각 구석에 귀찮음이 스멀 피어오른다. 어쩔 수 없게도 성준수는 처음 겪는 장거리 비행에 심신이 잔뜩 지쳐있었다. 머릿속에는 몸이 익을 정도로 따끈한 물에 푹 담그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참으려고 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놈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는 싫어 분명 좋은 말로 타이르려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바로 목욕만 하려는 건 아니지?"

은근하게 허벅지 안쪽을 파고드는 의도가 선명했다. 흑. 정확히 역린을 누르는 손길에 힘이 풀리며 몸이 둥글게 말린다. 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바짝 안아 당기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 떼라."

"왜? 너 여기 만져주면 좋아하잖아."

"나 피곤하다고...... 아!"

뭉근하게 주변을 쓸던 손이 거절 의사를 내비치자 다시 약점을 누른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웅크렸다가, 곧장 몸을 돌려 옷깃을 잡아 온다. 오, 역시 반응 좋다니까. 전영중이 제게 달려드는 연인에게 달갑게 손을 뻗었다.

"이 새끼가, 이게 누르면 섹스 나오는 버튼인 줄 아나...!"

그러나 입술보다 먼저 마중 나온 건 단단하게 말아쥔 주먹이었다.

"영중아, 너 어디 가서 싸웠어?"

올 것이 왔구나. 전영중은 괜히 제 왼쪽 눈가를 문질렀다. 앗, 쓰흡, 아파. 딱 한 대, 급소를 정확하게 노린 주먹이 하루 이틀로는 사라지지 않을 멍을 선명하게 남겼다.

"아냐. 그냥... 어쩌다."

"너 어제......."

주변을 둘러보던 이휘성이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었다.

"반려 왔다고 하지 않았어?"

"하...... 너는 인어랑 사귀지 마라."

"그게 무슨 결혼 10년 차 유부남 같은 소리야."

같이 산 기간만 따지면 한 달도 안 되는 신혼부부 아니던가. 단톡방에 요란법석을 떨어가며 인어를 찾아대는 통에 전영중이 누구와 각인했는지 모르는 동족이 없었다.

반년 만에 애인 만난다고 틈만 나면 자랑해 놓고는 이게 무슨 발언이람? 공항에서 바로 모셔 와 회포를 풀어도 모자랐을 테니, 인어를 집에 두고 나가 술 마시다 싸웠을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전영중이 어디서 맞고 다닐 덩치던가. 아니라면, 반려한테 맞았다는 건데.

그 인어가 많이 폭력적인가?

물론 개체차가 있으니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어들 성질머리는 유구하지 않던가. 뱃사람과 시비 붙었다 배를 전복시킨다던가, 해역을 어지럽히는 놈들을 노래로 꾀어내 좌초시키는 건 예삿일이었다. 설화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전영중이 각인한 인어는 제 반려를 노상카페에서 무릎 꿇린 전적도 있었다. 역시 성격 나쁜 거 같은데?

그러니까 잘 알아보고 각인했어야지. 각인이라는 인생 중대사를 5살에 결정한 친구에게 측은함이 들었다.

멍 자국 탓에 늑대인간들 사이에서 성준수의 평가는 실시간으로 깎여나가고 있었다. 전영중이 입을 꾹 다문 탓도 있었다. 동의해서가 아니라, 저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섹스어필을 하긴 했다. 그치만 반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정말 목욕부터 한다는 게 말이 돼? 심지어 같이 목욕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에이, 농담이겠지—했는데 정말 혼자 들어더라. 제 짝이 야속해 잔뜩 심통 난 채로 소파에 앉아 있다, 다른 욕실에서 씻고 나오긴 했다. 욕실 문은 그때까지도 닫혀있었다. 무슨 목욕을 그렇게 오래 하나, 슬쩍 열고 들어갔더니 아예 잠들었더라.

성인이 된 인어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모텔에서야 스치듯 본 정도였으니까. 물 아래 가라앉아 감은 눈이나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평온해 보였다.

기억나지 않던 어린 인어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 한쪽이 몽글몽글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한참 욕조에 기대 제 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좁은 욕조 밖으로 밀려난 꼬리를 문지르자 지느러미가 파르르 떨렸다. 물기가 마른 비늘에 조용히 욕조의 물을 끼얹어주자 결마다 보석처럼 빛났다. 안 예쁜 구석이 없네. 팔불출같은 생각을 하다 불을 끄고 나왔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이거야. 자고 일어났더니 새파랗게 멍이 든 눈가에 연고를 바르고 있는데 눈 마주치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침인사도 아니고,

'여기 있는 동안엔 욕조에서 잔다.'

였다.

그 좁은 욕조에서? 굳이? 나랑 내외해? 우리 결혼만 안 했다 뿐이지, 약혼한 사이 그런 거 아닌가? 나는 각인했고, 준수는 역린 위치 알려줬잖아?

폭탄 발언을 해놓고 성준수는 태연하게 식탁에 앉아 뭐 먹을 거 없냐며 찾기까지 했다. 잘 자서 반질거리는 얼굴이 얄미웠다. 말만 하면 잠자리며 식사며 다 나오는 게, 여기가 뭐 특급호텔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투덜거리면서도 지난밤 같이 먹으려고 준비해 뒀던 음식을 차려주긴 했다.

인어들은 원래 그렇게 무심한가. 인어도 나름 가족 개념이 있다고 배웠는데. 짝을 인어로 정한 만큼 전영중도 나름 인어에 관해 공부했다. 가족보다는 무리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어쨌든 공동체라는 게 존재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헤엄치는 인어들 사이에 끼인 털짐승 하나라니.

이거 좀... 애완동물 포지션 아냐? 인어공주로 따지면 세바스찬 같은? 세바스찬은 수생생물이라는 데서 나보다 사정이 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푸는데 곁눈질로 스친 시야에서 못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보였다.

준수? 관중석 사이에서 제 짝을 찾은 전영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무러진다. 큰 기대 없이 경기 보러 와달라고 했는데 진짜 올 줄은. 아, 정말 예의상 해본 말이었는데. 이것 참, 준수도 내색만 안 했다 뿐이지 내 경기 보고 싶었나? 열심히 해야지 별 수 없네. 원래 열심히 했지만. 그럼 내 평소 모습 보여주는 거네. 새삼 반하면 어떡하지?

제 짝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던 이휘성이 눈썹 끝을 구겼다. 남의 연애 얘기에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라더니. 얼굴이 맞아 터져도 좋다고 헤실거리는 꼴이 볼만했다. 이휘성은 뭐라 하는 대신 엉덩이나 툭 치고 갔다. 영중아, 그러다 꼬리 튀어나오겠다.

그날 경기에서 전영중은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빠르게 패스를 잘라내고, 속공으로 2점 더하고, 백코트 하며 성준수 한 번 흘끔. 무심하게 코트를 바라보던 눈이 마주치면 입꼬리를 올려 웃어준다. 그게 좋아서 전영중은 백코트 할 때면 자꾸 제 반려를 흘끔댔다. 시큰둥하다가도 점수를 낼 때마다 미미하게 웃는 모습이 좋아 계속 욕심을 냈다. 중국에서는 서시를 위해 거짓 봉화를 피우고 포사를 위해 비단을 찢었다는데, 전영중은 성준수를 위해 공을 쑤셔넣었다. 개이득이네.

3쿼터를 4초 남긴 시점, 전영중의 3점 슛이 기어코 25점 차를 만들어냈다. 전영중이 숨을 고르며 벤치 바로 뒤에 앉은 성준수를 바라보았다.

열광하는 관중들 속에서 정확히 그 자리만 비어있었다.

"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잘 도착했나 싶어 전화했다. 피곤하진 않고?

"시차 때문에 아까까진 졸렸는데 이제 괜찮아. 걔 경기하는데 와있어."

-금마도 운동한다 그랬지. 보니까 좀 알겠나?

"뭐 그냥. 정신없어. 뛰어다니다 공 던지고 하는 게 단데, 하나도 모르니까 사람들이 왜 소리 지르는지도 모르겠다."

-경기 영상 열심히 보더만.

"몇 번 본다고 다 아나. 그냥 소리 지르면 뭐 엄청난 걸 했구나 하는 거지."

그리고 전영중의 표정을 보면 대강 감이 왔다. 저거 파울 아닌가? 싶은데 파울 선언은 없고, 전영중이 저를 유독 뿌듯하게 보며 하프라인을 넘어갈 때면 어려운 걸 해냈구나 싶어 웃기만 했다. 진재유와 이야기하는 사이 또 환호가 들렸다. 저 환호의 주인공이 전영중이기를 바랐다.

제 반려로 정한 녀석이 업으로 삼은 운동이니 스페인에서 자리 잡는 틈틈이 찾아보기는 했다. 영상도 보고, 규칙도 보고. 고작 24초밖에 안 되는 시간을 뭐 그리 잘게 쪼개놨는지, 몇 걸음 걸은 거 가지고 그리 쪼잔하게 구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이라이트 영상을 봐도 저게 대단한 건가? 싶었다.

공을 연달아 쳐낸 게 대단한 거라던데. 글쎄. 저 역시 운동하는 사람이니 공이 그렇게 막힐 걸 생각하면 짜증 날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대입을 해보다가도,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13득점을 하고 역전해 버리는 걸 보면 잘 알지는 못해도 대단하다 싶었다. 그가 본 농구 경기는 보통 2, 3점을 두고 지지부진하게 벌어졌다 좁혀지기를 반복했으니까. 먼 거리에서, 공이 조금도 엇나가지 않고 정확히 골대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커다란 농구선수의 모습에 전영중을 입혀본다. 확실히 멋있을 지도.

-근데 정말 괜찮겠나.

"뭐가."

-뭍에 사는 것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겠냐고.

"안 될 게 뭐 있어."

-......자기가 기준이 되는 것들은 그러지 않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잠깐의 망설임 후에 내뱉어진 충고가 무거웠다. 일찍 반려를 정한 친우에게 차마 내뱉지 못했던 걱정이다. 한국을 떠난다길래 그 늑대와는 관계를 정리했나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하루가 멀다고 연락하길래 설마 해서 물어봤더니 짝으로 정했다는 말에 진재유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땅에 사는 게 당연한 것들에게 우리는 아종이고 변종이다.

"괜찮아. 그래도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네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한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괜히 인어며 하피가 소수 종족으로 내몰린 게 아니다. 물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들의 생활방식은 뭍의 것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합의 없이 나눠놓은 국가라는 개념에 반발하다 죽은 동족이 몇. 그들에게 속아 불법적인 물건을 운반하다 잡혀간 것이 또 몇.

순진하고 이용해먹기 쉬운 종족. 그로 인해 방어적으로 변했더니 이후에는 배타적이고 성격 나쁜 종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해하지 못할 거다.

"걔는 안 그럴 거야."

자신을 보는 늑대의 시선에 애정이 가득한 걸 모를 수 없었다. 이종족간의 결합은 대개 좋지 않게 끝난다지만 성준수는 확신했다. 첫 만남도 기억 못 하는 주제에, 저를 보내기 싫다고 그 커다란 덩치를 구기고 훌쩍이는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두고 간단 말인가. 비록 입질은 좀 있지만. 많이 엉겨 붙긴 하지만. 제법 성가시지만.

......생각해 보니 짜증 나게 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전영중을 버릴 이유까지는 아니지.

진재유도 길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른 아도 아니고 넌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완전한 신뢰라기에는 애매한 말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 애들 훈련 잘 시키고. 잔소리와 의견 교환이 섞인 대화가 한참을 오갔다.

-귀국 일정은 잡았나?

"봐서. 얘 챔피언 결정전이라니까 얘기해......."

"성준수!"

하나둘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인파 사이로 전영중이 뛰어왔다. 밤이면 쌀쌀한 날씨인데 유니폼 그대로 저지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경기가 벌써 끝났나? 핸드폰을 보자 통화 시간이 1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재유, 나중에 전화할게." 전화를 끊자 전영중이 멈칫하더니 눈살을 구기며 다가왔다.

"뭐야. 경기 졌어?"

"이겼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왜 자리에 없었어?"

"어차피 이길 거 같아서?"

"누구랑 전화했어?"

"진재유. 나랑 같이 스페인 간......."

아, 설마. 이거 질투? 대답하던 와중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착각할 수 있지. 그래서 경기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왔나? 늑대는 반려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던 말이 떠올랐다.

"같이 스페인 간 무리야. 같은 수구팀이라 애들 몸 둔해지지 않게 훈련하라고 통화했어."

새끼, 귀엽게. 축축해진 머리를 넘겨주며 말하자 덥석 저를 안는다. 찬 바람을 맞아 땀이 식으며 살갗이 차가워졌는데 막 경기를 마친 체취에서는 열기가 느껴졌다.

"너 감기 들겠다."

"말도 없이 가지 마."

"한 쿼터 남기고 22점차면 이겼다고 봐도 되는 거 아냐?"

"25점 차였어. 마지막에 내가 3점 더 넣었다고. 이것 봐. 점수차도 제대로 모르잖아."

그거 하나 안 봤다고 엄청 뭐라 그러네. 전영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길게도 종알거렸다. 준수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이게 야구인 줄 알아? 고작 십 분을 못 기다려서 먼저 일어나? 나 오늘 플레이 진짜 잘했는데. 너도 운동선수라면서 그러고 싶어?

야구는 점수차 많이 나면 일찍 일어나도 되나? 딴생각을 잠깐 했더니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준수 집중 안 하지? 라며 2절을 시작하려 하기에 성준수가 종알거리는 입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다음에는 경기 끝까지 다 볼 테니까 들어가. 감기 들겠다."

아니다. 이대로 퇴근해도 되려나. 맞닿은 몸에 열기가 확 번지는 걸 보면 저지는 안 챙겨와도 될 거 같은데.

"......인어는 비겁해."

"뭐래."

발개진 얼굴을 제게 묻는 녀석의 머리를 토닥였다. 결 좋은 털이 길게 늘어진 귀는 없지만 촉감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승리의 여운에 젖어 퇴근하던 관중들에게도 제법 괜찮은 눈 호강이었다. 찰칵찰칵. 스타 선수의 진한 스킨십에 팬들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경기장 출입구에서 유니폼을 입고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모른 척할래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빵준
6
  • ..+ 22

댓글 6


  • 용기있는 해달

    전 편도 너무너무 좋았는데 그다음편이라니... 진짜 행복해요. 둘이 은은하게 성격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른 게 보여서 재밌게 읽었어요 세계관이 정말 흥미로워요ㅠㅠ 둘이 저러다가 싸울까봐 걱정인데 또 알콩달콩한 거 보니 마음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 책읽는 꿀벌

  • 놀라는 백조

  • 멋부리는 하마

  • 잠자는 토끼

  • 호기심많은 유니콘

    비밀댓글이에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