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만 잘 먹더라
이혼 사유 1위, 성격이 안 맞아서. 그 한마디에 기저에 깔린 좆같음을 읽어낸 이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고 자란 게 다른 완전한 타인끼리 어떻게 쿵 하면 탁 하고 성격이 맞을까. 맞추면서 사는 거지.
성격이 안 맞다는 건 그거다. 저 새끼의 좆같음이 차곡히 적립돼 돌아보니 도저히 참고 살아주지 못 하겠다는 거지.
그리고 연인의 결별 사유 1위, 성격이 안 맞아서. 결혼보다 구속력이 약하고 공문서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 작별은 결혼보다 쉽고 빠르게 결정된다. 너랑은 깊게 갈 필요도 없이 엔조이도 못 해 먹겠다.
전영중은 초등학교 3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중 거리를 둔 2년의 숙려 기간동안 많이 고민했다. 입시만으로도 바빠야 하는 뇌의 절반이 성준수에게 할애되어있었으니. 그리하여 나온 결론. 나 성준수 좋아하네.
오랜 고민 끝에 정리한 감정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물론 그러기까지 다섯 번의 성준수만 모르는 데이트와 그보다 많은 망설임이 있었으나 어쨌든 질렀다. 나 너 좋아해. 거절도 수락도 필요 없는, 이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불편해지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근데 그걸 받아주더라.
그렇게 전영중은 성준수와 2년을 사귀었다. 아니, 버텼다. 아아니, 참아줬다. 다 제가 성준수를 좋아해서 감내한 업보였다. 고백에 대한 책임감이었고.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헤어지자. 그래. 깔끔한 결별 선언과 이어진 동의로 관계의 종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곧장 전영중의 자취방에서 성준수의 짐이 사라졌다. 성준수는 어디서 갖고 온 박스 하나에 제 옷가지며 물건들을 구겨 넣고 달랑 떠났다.
홀로 남은 집에서 전영중은 사놓고 3개월을 구경만 했던 파스타 봉지를 텄다. 성준수는 젓가락 따위 쓸 줄 모르는 왕자님처럼 생긴 주제에 밥은 백미로만 지으면 씹는 맛이 없다며 현미를 절반 넘게 넣어야 했고, 국이 없으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독감에 끙끙 앓아 식욕이 없다가도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면 부르지 않아도 식탁에 앉아 두부, 김치, 돼지고기를 숟갈에 얹어 퉁퉁 부은 목구멍에 어떻게든 밀어 넣었다. 샌드위치는 밥이 아니라며 끼니로 치지 않았고 양식은 데이트 할 때, 그것도 아주 가끔이었다. 한 주에 파스타 두 번 먹자고 했다가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표정을 보면 식욕이 있다가도 뚝 떨어졌다.
준수야, 내가 배려해 줘서 몰랐겠지만 난 양식 좋아해. 샌드위치만 일주일 내내 먹고 살 수도 있어. 샌드위치야말로 완전식품 아냐? 탄단지 다 들어가 있고 식이섬유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는데. 물이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 파스타면 한 봉지를 다 쏟아 넣고 프라이팬 두 개를 올려 베이컨과 닭가슴살, 새우를 따로 볶았다. 로제 소스와 토마토소스를 꺼내두고, 야채와 청양고추, 땡초도 송송 썰어 준비했다. 원래 짜증 날 땐 매운 걸로 달래는 법이니까.
야, 그런 것만 처먹으면 혈당 올라. 탄수화물만 처먹어? 단백질 안 챙기냐? 파스타를 먹자면 늘 따라붙던 잔소리가 떠올라 프라이팬을 뒤적이는 손이 거칠어졌다. 현미에 보리 섞어 퍼먹는 준수가 뭘 알아? 이거 듀럼밀이라 혈당 걱정 안 해도 되거든? 단백질은 내가 추가하면 되지. 준수는 파스타 만들 때 시판 소스만 냅다 들이붓고 땡이지? 하긴, 준수 국밥충이라 파스타 만들어 먹지도 않겠구나?
고기 고명을 실하게 넣어 8인분 같은 5인분 파스타를 호로록 먹고 제로콜라 1.5리터 절반을 해치웠다. 전영중은 느긋하게 누워 티비 채널을 돌렸다. 간만에 농구가 아닌 아무 예능 프로를 틀어놓고 하하 웃으며 남은 콜라를 마셨다.
아쉬울 것 없는 깔끔한 작별이었다.
아니었다.
"거짓말이죠...?"
진료실 침대에 누운 전영중이 고개를 들어 의사를 쳐다봤다.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은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한숨을 쉰 의사가 다시 손가락을 배 한구석을 퉁 두드린다. 억! 전영중이 나약하게 몸을 구겼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그치만 저 운동하는데요?"
운동하는 사람은 병도 안 걸리는 줄 아나. 이래서 운동인들이란. 의사는 대꾸 대신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환자분, 내려오시고 여기 앉으세요. 외식하거나 날음식 드신 건 없고요? 무감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치며 묻는다. 착실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나온 선고.
"스트레스성 장염이네요. 최근에 스트레스받을 일 있었나요?"
네. 남친이랑 헤어졌거든요. 당연히 제일 먼저 성준수가 떠올랐고, 곧이곧대로 대답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잠시 눈을 굴리던 전영중이 눈매를 동그랗게 접었다.
"전혀요."
하여간 솔직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환자였다. 의사는 이번에도 대꾸 없이 항생제나 추가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괜찮지 않은 일 투성이었다. 스트레스성 장염이 그랬고, 준향대와의 경기가 그랬다. 제에기랄! 헤어진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가 준향대와 경기일 건 또 뭐람.
그동안 장염은 좋아지고 나빠지고를 반복하며 통 낫질 않았다. 이유는 별거 아니고 좀 괜찮다 싶어 우동 한 번 먹어보고, 우동 괜찮네? 싶어 돈가스 추가했다 화장실. 약 먹고 다시 괜찮다 싶어 냉모밀 먹고, 배가 아프지 않길래 매운멸치김밥 먹었다 또 화장실. 그렇지만 흰죽도, 포카리도 두 끼 만에 질렸는데 어떡하라고. 아무리 사람이 아프다 해도 그런 걸로 끼니를 때우라니, 학대 아닌가?
그렇게 3일 치 약을 받고, 추가로 받아온 3일 치 약마저 오늘로 바닥났다. 오늘 병원 가면 의사 선생님한테 혼나겠지....... 병원 바꿀까.......
이런 전영중의 고뇌는 전혀 모르는 듯 감독이 너른 등짝을 팡팡 치며 물었다.
"영중아, 오늘 뛸 수 있지?"
장염인의 특징. 뭘 못 먹고, 먹는 족족 배출하는 것 외에는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의약 회사에서 개발했다는 개맛없는 포카리스웨트는 성분이 너무나 훌륭해 삼시세끼 그것만 마셔도 체중이 유지됐다. 그냥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고, 나만 배고프고, 나만 고통받는 외로움의 연속이다.
"......당연히 되죠."
그러나 체육인이 여기서 못 한다고 뺄 수는 없었다. 운동의 기본은 근성과 성실. 안 한다고 하면 '뭐? 탈 좀 났다고 운동을 쉬어? 왜, 아예 푹 쉬지? 유니폼 반납할래?' 라며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다. 언제 적 쌍팔년도 발언이냐 싶지만 체육계는 아직도 똥군기와 불빠따가 유효한 세계니까.
저지를 입고 몸을 풀어도 체온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은 체육관이 춥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떨고, 멀리 있던 성준수와 눈이 마주쳤다. 뭐. 왜? 약점을 들킨 기분에 전영중은 구남친이 뻔뻔스레 했던 말을 떠올리며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공을 던졌다. 퉁! 당연하게도 들어가지 않았고.
"야, 전영중."
노골적으로 이쪽을 쳐다보던 성준수를 못 본 척하며 굴러다니는 공을 주워 급하게 던졌다. 이번에도 짧아 림을 맞고 코트 중앙으로 공이 튕겼다. 하필이면 성준수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젠장젠장. 공을 받아 이젠 거의 뛰다시피 하는 성준수를 피해 도망가려 했다. 발끝이 방향을 틀기 무섭게 달려온 성준수에게 붙잡혔지만. 아니, 뭐 저렇게 빨라? 성준수 맞아?
품에 공을 안겨준 손이 곧장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파드득 놀라며 뿌리치려 해도 평소 같지 않은 악력으로 붙잡았다.
"너 몸이 왜 이렇게 차? 아파?"
"아......."
"영중이 장염이래. 몰랐어?"
―니, 라고 부정할 새도 없이 지국민이 대신 대답했다. 제발, 국민아. 왜 이럴 때만 오지랖이야. 내가 알아서 대답하면 안 될까.
그랬더니 성준수는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아픈 놈이 무슨 경기야? 가서 코치님한테 못 뛰겠다고 해."
제법 걱정하는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하여간 아플 때는 모든 게 거슬리기 마련이다. 저를 걱정하며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짜증을 돋웠다. 알아서 하게 두지. 아픈 사람을 왜 괴롭혀? 뛸 만하니까 뛴다고 한 거 아냐. 잡은 손을 털어내는 서슬에 품에 있던 농구공이 떨어졌다.
"내가 경기를 뛰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야, 그래도......."
"우리 이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이러는 거 부담스럽다, 준수야."
가시 돋친 말에 너는 뭐라 답할까. 헤어졌다고 친구도 아닌 거냐, 그렇게 남의 기분 헤아리지 않는 말을 할까. 나만 좀생이 같고, 깔끔하게 털어내지 못하는 미련퉁이로 만들 듯이.
그러나 성준수는 한참 말이 없었다. 떨어져 제 발치로 굴러온 공을 물끄러미 보다 발로 툭 차면서 그래, 하고 답하는 게 다였다. 조금 전의 걱정과 온기가 깔끔하게 사라진 반응에 전영중은 제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먼저 밀어낸 건 자신인데도.
코트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 뒤늦게 한숨을 뱉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한 박자 늦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네 헤어졌어?"
"국민이 몰랐냐?"
"네, 몰랐는데요?"
진짜 몰랐는지 지국민이 놀라 대답했다. 쟤는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쟤 요새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잖아. 넌 동기가 왜 저러는지도 모르냐? 선배들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지국민이 들러붙었다. 왜 헤어졌는데? 너희 잘 붙어 다녔잖아. 아, 혹시 장염도 헤어진 스트레스로 걸린 거야?
잘 붙어 다니기는 무슨. 매일 삐거덕대다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는데. 친절한 대답 대신 손만 저었다.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전부 기운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경기는 고작 한 쿼터 뛰었다. 영중아, 역시 안 되겠지? 감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영중을 벤치에 앉혔고, 당사자도 더 뛰겠다 고집부리지 않았다. 성준수가 저를 상대로 포스트업을 하는데 밀렸으면 할 말 없지 뭐.
저지를 목 끝까지 채우고 수건을 머리부터 덮었다. 그래도 뛰었다고 땀은 났는데 에어컨 바람에 체온이 빠르게 식었다. 문짝 같은 남자애들 열 명이 뛰어도 환자가 미지근하다 느낄 정도로 체육관을 데우기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컨디션이 정상일 땐 덥다고만 느꼈는데.
이렇게 경기 빼주실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쉬겠다고 할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의무실 갈까? 불성실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이쪽을 자꾸 흘끔거리는 성준수가 거북한 걸 어떡하라고. 그것도 꼭 걱정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헤어진 사이에 그런 건 불편하잖아. 대체 왜 그러고 쳐다보는데. 결국 경기 중반부터 전영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영중이 많이 힘드냐? 들어가 쉴래? 액체밖에 흐르지 않은 위장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젓고 버텼다. 성준수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다는 오기고 억지였다. 그렇게 아득바득 버텼지만.......
역시 못 가겠다.
터덜거리며 걸음을 떼던 전영중은 결국 대운동장 스탠드에 주저앉아 처량한 모양새로 더플백을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성준수가 붙잡을까 싶어 제일 먼저 체육관을 뛰쳐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진다 싶더니 이제 몇 걸음 떼는 것도 힘들다. 평소에는 뛰어 올라가도 숨이 차지 않던 언덕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조금만 쉬었다, 준향대 버스가 나타나면 사라질 생각이었다.
하여간 다 성준수 탓이다. 괜히 얼쩡거려서 사람을 더 거슬리게 만들어? 연애할 때나 잘하지. 난간에 기댄 머리가 지끈거렸다. 걔는 연애를 시작하고도 도통 변할 줄을 몰랐다. 일어났냐고 안부도 묻지 않았고, 밥 잘 먹으라는 새삼스러운 연락도 없었다. 점심 뭐 먹어? 물으면 학식 달랑 두 글자만 보내오기 일쑤였는데.
100일 챙긴다고 사 온 게 파리바게뜨 케이크였다. 준수야, 나 SPC는 크림 맛없어서 안 먹는다니까? 그랬더니 1주년엔 뚜레쥬르를 사 왔다. 생일이라고 김영모 베이커리 당근케이크를 사 온 게 그나마 챙긴 거였다. 나는 씨발, 걔 생일이라고 패스트리 부티크에서 금가루 뿌려진 장미 모양의 25만 원짜리 케이크를 사 왔는데.
성준수는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브라 예쁘고 비싼 케이크가 더 많이 나온다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아니, 일단 누가 더 돈을 많이 썼냐 재보자는 게 아니다. 이건 성의 문제라고. 김영모 베이커리가 걔의 최선이라 생각하면 어딘가 아득해지고야 만다. 비단 케이크만이 아니라 뭐 하고 있냐, 보고 싶다, 그런 말을 주고받다 감성에 취해 새벽 4시에 남의 집 앞에 찾아가는 그런 충동적이고 자아를 잃을 듯한 연애를 해보고 싶었다고.
걔가 내 생각 났다며 사 오는 건 대개 만두랑 치킨이었다. 내가 먹을 것만 주면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알고? 물론 잘 먹긴 했는데, 그러면 친구일 적과 다를 게 뭐야?
네가 생각났다며 꽃 한 송이 사 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미지근한 것이 얼굴에 닿았다. 눈을 뜨자 포카리가 뺨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뭐야? 쳐내자 성준수가 다시금 미지근한 포카리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굴지. 받지 않자 억지로 품에 밀어 넣고 전영중의 옆에 앉았다. 준향대학교라 적힌 버스가 배기음을 내며 조용한 교정을 떠나고 있었다.
"버스 가잖아."
"알아."
완전히 끝난 사이를 증명하듯 매정한 어조였다. 그러나 제게 주어진 애매한 다정함을 알고 있다. 하프타임에 급하게 뛰어가던 성준수. 돌아올 때 쥐어져 있던 포카리 하나. 틈만 나면 음료를 쥐고 있던 게 열을 식히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안다. 아마도... 아니, 분명 내가 장염이라니까 날 주려고. 그것도 찬 건 부담될까 봐 일부러 식혀서. 그리하여 버스도 떠나보내고 아픈 제 옆을 지키는 게.......
꼭 아직도 저를 사랑하는 것만 같아서.
"......왜 이제 와서 다정하게 굴어?"
"야, 너는......."
그러면 성준수는 얼굴을 구겼다가 긴 한숨만 뱉고 말았다. 초여름의 노을이 살갗을 붉게 태우도록 놔두다 해가 넘어가서야 입을 열었다. 성준수로서는 대단히 참을성 있는 기다림이었다.
"아니, 이해가 안 가네. 넌 왜 네가 차놓고 차인 것처럼 청승이냐?"
그러면 전영중은 웅크린 몸을 더 그러모았다.
그러게. 나도 너 차고 잘 살고 싶었는데. 매일 좋아하는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려 했단 말이야. 근데 자꾸 네가 눈앞에 보이니까.......
보이지 않으니까 더 보고 싶어서.
"그리고 뭐, 다정? 내가 언제는 안 다정했던 것처럼 군다?"
"솔직히 내가 하는 거에 비하면 그랬지."
"뭐? 니가 뭐 얼마나 더 챙겼다고. 기념일마다 케이크도 내가 사, 커플템도 맞추자고 먼저 말해, 니 양말 뒤집어 벗은 것도 다시 뒤집어, 팬티도 개 줘. 또 뭐. 니 경기 지면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같이 달래줬는데 어디가 안 다정했는데?"
"씨발 그놈의 케이크... 행동 그런 거 말고 좀... 아니, 너 뭐 마초이즘 스페셜티 교육이라도 받고 왔어? 행동 말고 말로 하면 죽어? 보고 싶다, 사랑한다, 나랑 사귀면서 그런 말 한 번도 안 했잖아!"
"안 했어?"
"안 했어!"
"사랑한다."
"야!"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뱉는 '사랑한다'에 전영중은 아픈 것도 잊고 소리 질렀다. 단전에서부터 터져나온 노성이 빈 운동장에 반향됐다. 오, 에코. 잠시 물리음향현상을 감상하다 전영중을 보자 조금 전까지 늘어져 있던 녀석이 팔팔해져 있었다. 역시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덴 분노가 제일이다.
"왜 서운하다고 말 안 했어."
"구차하게 그런 걸 말하라고?"
"네가 말 안 하면 난 몰라."
"쪽팔리잖아."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게 왜 쪽팔리는데?"
정론에 할 말이 막힌 건 전영중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성준수는 약점을 보이면 오히려 붙잡고 놀리려 하지 않던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사이였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인지 캐묻고, 오작교인지 훼방인지 모를 짓이나 하던 짓궂은 선배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한 탓이다.
"내가 왜 차였는지 계속 고민했는데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전영중은 무던하게 생긴 주제에 속은 잔뜩 꼬여서 도통 속내를 드러내질 않으니까. 덩치와 다르게 감성적이라 웃긴 영화를 보다가도 감동적인 장면에 몰래 눈물을 훔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념일 챙기는 걸 좋아해서 제과점을 돌고, 경기에 진 날에는 평소보다 늦게 잠드는 걸 알기에 일부러 찾아가 안 좋은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보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할 줄은 몰랐지.
"나는...... 고작 그런 이유로 너랑 헤어지기 싫어."
바스러지듯 고백하는 말에 전영중은 불현듯 깨닫고 만다. 맞다. 성준수는.......
"......고백받았다고 불쌍해서 사귀어 줄 성격은 아니긴 해."
"갑자기 뭐야?"
"아니,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내 고백 받아준 줄?"
"씨발, 뭐? 야, 너 이제까지 날 그런 놈으로 봤냐?"
"하긴, 우리 준수가 그렇게까지 개새끼는 아니지?"
"죽고 싶다고?"
덥석 멱살을 틀어잡자 전영중이 두 팔을 들었다. 워, 준수야. 나 환자거든? 이 새끼가 이럴 때만 엄살이지. 봐주는 것 없이 흔들면 전영중은 정말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몸을 당겨 앞머리를 쓸어올리고는 식은땀이 흐른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우리 사귈까?"
하여간 멋대가리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게 성준수라 동시에 제일 멋있어 보이는 것도 중증이다. 전영중은 대답 대신 얼굴부터 들이밀었다. 씨발, 동그란 거. 얘는 대답을 머리로 대신하네. 그마저도 애교로 느껴져, 성준수는 바라는 대로 눈두덩이며 뺨에 쪽쪽거렸다. 조금씩 미끄러지던 입술이 상대의 것에 닿은 순간, 꾸르륵, 눈치 없게도 빈 배가 신호를 보냈다.
이 타이밍에? 진짜냐, 영중아? 어처구니없어 쳐다보자 전영중은 이미 난간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텅! 청량한 소리에 성준수가 그것도 애인이라고 자해한 부위를 감쌌다.
그래, 이게 마초이즘에 찌들은 성준수식 다정이었지. 완전히 박살 난 분위기에 전영중은 본능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나 배고파."
"포카리 먹어."
"덩어리 있는 거 먹고 싶은데."
"이 새끼는 장염이라면서 무슨...... 그럼 갈비만두 먹을래?"
"김치만두도......."
"김치는 매워서 안돼. 대신 찐빵 먹어."
"웅."
김치든 갈비든 찐빵이든, 내과의가 들으면 똑같이 뒷목 잡을 메뉴였지만 환자와 보호자끼리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졌다. 뭐, 스트레스 요인이 막 사라졌으니 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전영중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지근한 포카리를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아주 오랜만에 드는 허기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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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춤추는 순록
귀여워죽겠어요 정말로....ㅜㅜㅜ
용기있는 해달
영중이 행복한 동그라미 된 거 넘 귀엽고 사랑스러워요...웅. 이라 대답하는 진짜 레전드 애교쟁이 남친 답변이라 마음이 풍족해졌어요
잠자는 토끼
결국 성격 차이가 아니라 준수가 자기 안 사랑하는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했던 거네요ㅋㅋ영중이 바보! 22님의 빵준 로코가 너무 좋아요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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