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글

[뱅상] imagine LOVE AFFAIR

뱅상 웨딩 교류전 제출작

*약 7.7만자

*뱅상 웨딩 교류회 제출작

*그먼씹 주의

1. 나는 항상 다른 이야기와 다른 출발선에 눈을 떠보길 원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잘 없다.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도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영역이라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을 견뎌야 한다. 나의 10대는 남들보다 선택의 기로가 많았다. 누군가가 말하길, 10대의 선택은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한 번, 입시를 준비할 때 한 번, 대학을 선택할 때 한 번. 세 번 정도면 충분하다던데. 나는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잔 생각도 많았다.

다행이라고 할 만한 건 나는 불안에 강하다는 점이다. 불안을 놓고, 자신감을 가진 내 선택에는 머뭇거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머리로 계산하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해야죠.


당연하다 못해 진리다. 이 모습이 아닌 내 모습은 존재할 수 없어. 그것이 확신인지, 광신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다른 길로 떠나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권유한다면 나는 그것을 패배하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운동선수가 승부욕이 강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는 선택에 가정을 두고 만약이란 이름 뒤를 상상했다. 전략, 훈련법, 볼 드리블, 돌파 방향까지!

시야가 넓어야 하는 만큼 나는 항상 다른 얘기와 다른 출발선에 눈을 열어보길 원했다. 농구에 국한되어 있을지라도 나는 가끔 인간관계를 그 가정 속에 집어 넣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만약.

만약, 상호의… 만약 상호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병찬은 인간관계에서 후회하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 같은 부연중 감독의 말을 들은 것이고, 하나는 상호의 고백을 받은 것이다. 상호가 싫으냐. 라고 묻는다면 병찬은 척수반사로 ‘아니!’ 라고 할 테지만 병찬의 후회는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병찬은 상호를 사랑한다. 상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병찬의 일생에서 사랑하는 반쪽을 묻는다면 상호 단 한 사람뿐이라고 대답할 테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고통받는 게 괴로워서 그랬다. 병찬은 아예 상호가 상처받지 않을 선택지를 생각했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상호와 결혼식을 올렸을 때인가, 두 사람이 서로의 가족에게 처음으로 사귄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부턴가, 병찬이 은퇴와 동시에 상호에게 프러포즈를 했을 때였나, 병찬이 때 이른 은퇴를 결정했을 때일까, 아니면. 아주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호가 고백했을 때. 받아주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덜 영글은 말 한마디가 병찬의 인생을 바꿀 줄은 몰랐다.

2. 거대한 거짓말

띵, 띵. 운전자의 안전벨트 신호가 일정하게 울린다. 간밤에 내린 폭설 탓에 유리창 앞은 온통 새하얬다. 붉은 벽돌을 담쟁이덩굴로 가득 푸르게 채웠던 예체능 관은 그 잎새가 다 떨어져서 볼품없었다.

예체능 관의 낡은 건물이 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병찬은 작년까지만 해도 다른 학생들과 같이 저 건물을 들락날락하며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공동구매한 과잠은 지금도 날이 추워질 때마다 쏠쏠하게 꺼내입고 있다. 병찬은 종종 구단에서 전술 훈련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아직 대학생인가 프로 선수인가 혼동할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염원하던 프로 선수가 되니까 아직도 얼떨떨해서 그랬다. 또래 친구와 비교하면 병찬은 25살이다. 창창한 운동선수라면 이미 구단에 들어가서 경기를 뛰겠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대학에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수업을 들을 나이다. 병찬이 겪은 이질감을 따지자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적응기다.

병찬은 차 안의 히터와 열선을 단단히 틀었다. 2월 방학 기간이지만 병찬은 졸업 관련으로 처리할 일정이 많았다. 얼리로 구단에 들어가고 가을 겨울 동안 선수로 뛰느라 휴학계를 제출했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병찬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즌 막바지인 2월이 아니라 차라리 3월쯤이었다면 더 편했겠지만 일정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3학년 1학기 이후로 멈췄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려면 올봄부터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

‘3학년 2학기에 수강해야 할 최소학점이 몇이었더라.’

병찬은 서류철을 모아 뒷좌석에 던졌다. 너덜너덜한 종이 더미가 뒷좌석에 쌓인 잡동사니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뒷좌석의 종이 더미는 아슬아슬하게 외투 뭉치 위로 올라갔지만 점점 무게에 쓸려 아래로 떨어졌다. 병찬은 다시 주워서 올릴까 하다가 무시했다. 어차피 내리면서 또 주워야 하는데 굳이 의자를 뒤로 젖혀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꺼내고 올려주기가 귀찮았다.

머리 아픈 학교 일에서 떨어지기 위해 병찬은 라디오를 켰다. 내비게이션 용도로 쓰던 스크린은 병찬의 손가락 아래서 라디오 카테고리로 화면을 바꾸었다. 하늘색에 투박하고 촌스러운 라디오 화면에는 현재 채널을 보여주었다. 21.6MHz. 언제 맞춰놓았는지 모를 주파수에서 지루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 특유의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백색소음처럼 SUV 안을 메꾸었다.

병찬의 취향은 다큐보다는 컬투쇼다. 눈썹을 찌푸린 병찬은 주파수를 바꿀까 고민했다. 그러나 동행인이 도착하고 운전을 시작할 때는 라디오를 끌 생각이라 놓아두었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여성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해서 생각보다 싫지도 않았다.

 

‘음악은 뇌의 인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프랑스의 연구팀은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들이 즐겨듣던 음악을 들려준 뒤 뇌의 활동성을 지켜보았는데요. 실험 결과 모든 환자가 음악을 들은 뒤 자신의 이름에 반응하는 등 뇌의 인지능력에 큰 개선을 보였습니다.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깨워 외부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창문’ 역할을 합니다.’

 

시동을 켜 놓고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유리창에 물이 성겼다. 바깥의 추운 기온과 안쪽의 히터 열로 생긴 물방물은 유리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자동차 창문을 가린 물은 천천히 길을 만들면서 떨어지다가 창가 아래의 팔을 향해 추락했다. ‘앗차거.’ 병찬은 옆유리 창에 흐른 물이 코트에 닿자 몸서리를 쳤다. 두터운 울코트는 물방물을 흡수하지 않고 동그란 알을 만들었다. 병찬은 찬 기운이 닿지도 않았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원래 보는 게 닿는 것보다 더 실감 나는 법이다.

병찬이 기다리던 사람은 아무래도 금방 올 거 같지 않았다. 휴대폰은 깜깜무소식이다. 카톡창에 언제 오느냐 채근할 수 있지만 병찬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기다리는 과정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을 기다리는 건 즐겼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병찬이 기다리는 상대는 병찬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병찬이 환기 버튼을 누르고 조수석을 더듬었다. 최대치로 가열한 열선은 잠깐 짚은 손 위에도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었다. 베이지색 가죽의 촉감은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났든 부드러웠다. 병찬이 무사히 준향대에 입학했다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차는 운전 거리가 만 킬로미터를 넘어가는데도 멀쩡히 잘 돌아갔다. 운전하면서 연석도 밟고 기스도 몇 번 내었지만 여전히 튼튼해서 병찬은 자신의 차를 ‘뿡빵이’라고 불렀다. 나름 정이 들어서인가 병찬은 카풀 상대가 늦을 때마다 ‘뿡빵아 상호는 언제쯤 올까?’하고 혼잣말로 말을 걸기도 했다. 병찬은 방문자를 기다리는 게 괜스레 기대가 되어 백미러를 조절하고 도마뱀 모양 방향제 위치를 이리저리 바꿨다.

병찬이 나름 심혈을 기울여 꾸민 차 안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병찬은 정리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 나름의 센스를 발휘했다. 백미러에는 상호와 찍었던 인생네컷 키링, 대시보드에는 갈색 강아지 피규어, 콘솔박스에는 카풀 할 때마다 먹일 주전부리, 글러브 박스에는 자동차용 충전 케이블. 병찬은 티를 내지 않는다. 병찬은 자기 자신을 포커페이스라고 자부하고 다녔지만 그의 차를 보면 딱히 신빙성 있는 주장은 아니다. 누구나 저 차 안을 본다면 쟤 누구 좋아하는군, 하고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그런 박병찬의 요주의 인물이자 올해로 2학년이 된 기상호는 병찬과 달리 과 사무실을 방문할 일이 잘 없었지만 기숙사와 장학금 문제로 무언가 상의할 것이 많았다. 최근 들어 갑자기 대학을 들를 일이 늘어났다며 상호는 종종 병찬에게 차를 얻어탔다. 병찬은 휴학계 때문에 대학에 들를 일도, 구단의 위치 때문에 대학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병찬은 상호가 준향대 지나가면 태워줄 수 있느냐고 부탁할 때마다 ‘어어 형 일이 있어서 지나가잖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형아가 빠르고 안전하게 태워주마!’를 외치면서 흔쾌히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상호가 고마워하면 병찬은 일부러 상호보고 드라이브 가자며 꼬셨다.

차도 있고, 사람도 있고, 시간도 있다면 꽤 재미있지 않겠냐며 대학생이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수단이란 수단은 모두 끌어올렸다. 자동차 영화관은 양반이고 속초 가서 회 먹고 해남 땅끝마을 가서 볼 것도 없는 바다 멍도 갔다. 정작 두 사람은 부산, 인천 출신이라 바다는 질리도록 봤을 텐데 그놈의 사랑, 아니 우정이 뭐라고. 주위에서 학을 뗄 정도로 징글맞게 붙어 다녔다.

병찬은 오늘도 카풀을 해달라는 후배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후배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고 우연하게도 병찬이 귀가하는 길에는 그 약속 장소를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 장소를 지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래도 병찬은 좀 더 수고를 들일 생각이다. 눈이 얼어서 인도는 꽝꽝 걸어가기 위험했고 몸이 소중한 운동선수는 빙판길에서 미끄러져도 다치면 안 되었다.

‘그렇지, 겨우 20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지만 사고는 미연에 방지해야지.’

병찬은 제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숨겼다. 상호가 동아리 친구들이랑 만나러 간다는데 선배로서 커피 정도는 사줘도 괜찮지 않을까. 병찬은 상호가 들어온다면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상호라면 병찬을 번거롭게 한다고 말렸을 테지만 병찬은 준향대! 체교과 선배고 상호와 상호 친구들은 같은 준향대! 후배이지 않은가. 과는 전혀 다르고 얼굴도 본 적 없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예체능 관에서 덩치 큰 멀대가 튀어나왔다. ‘감기 걸리게 웬 숏패딩이지?’ 병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은 숏패딩을 달랑 걸친 상호의 옷차림은 누가 보아도 나 꾸미고 나가요. 하는 모양새였다. 병찬은 상호의 차림새가 보기 좋아 씩 웃다가도 입꼬리를 잡아 내렸다.

그 약속이란 게 여자애 만나러 가는 약속인 걸까. 평소의 상호는 꾸미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다. 상호는 한겨울에는 롱패딩을 고집하고 수업 때는 스파오에서 뭉텅이로 세일하는 후드티와 맨투맨을 무더기로 사서 돌려입는다. 상호는 꾸밈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병찬은 상호가 만날 사람에게 질투를 느꼈다. 정작 그 상대가 정확히 상호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면서 병찬은 온갖 핑계를 대어가며 상호의 약속을 깨게 만들고 싶었다.

상호는 양팔로 제 몸통을 끌어안고는 덜덜 떨면서 병찬의 차 앞으로 갔다. 상호의 청바지 밑단과 캔버스화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눈이 엄청나게 쌓였다고 들었는데 기숙사에서 예체능 관으로 가는 길이 험했나 보다. 가까이 다가온 상호의 얼굴에는 찬 기운 탓에 잔뜩 빨개져 있었다. 병찬은 환기를 끄고 히터 풍량을 올렸다. 훈기가 병찬의 얼굴을 때렸다. 상호는 읏추, 읏추. 하고 연신 추위를 중얼거리며 차를 탔다. 겨울 찬 공기가 차 안을 채웠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차가 한 차례 덜컹거렸다.

“상호~ 왔어?“

병찬은 라디오를 끈 뒤 핸들에 엎드린 채로 상호를 반겼다. 상호는 코를 훌쩍였다. 제 손을 싹싹 비비고 히터에 손가락 끝을 데우다가 병찬의 배시시 웃는 얼굴을 마주한 상호는 눈을 큼직하게 끔뻑였다. 난데없는 병찬의 얼굴공격에 놀란 상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자주 보는 친한 형인데도 상호는 종종 이상한 방식으로 병찬과 내외했다. 적응하기 어려운 것인지 아직도 데면데면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인지. 상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 추위와 작은 감기 기운으로 목이 잠겼다가 돌아왔다.

 

“밖에 엄청 춥더라고요. 과 사무실 가는데 복도가 아니라 냉동고인 줄 알았어요.”

“그럼 여기서 몸 좀 녹이다가 출발하자.”

“햄도 바쁘실 텐데. 가다 보면 금방 녹아요!”

병찬은 상호에게 더 있어 보자고 게으름을 부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안전벨트가 풀려있다는 알림음이 초시계처럼 울렸다. 상호는 병찬의 차 안이 불편한 건지 안절부절못했다. SUV 내부는 훈기로 가득한데 상호는 아직도 겨울 추위에 가시지 않는 사람처럼 떨었다. 패딩이 바스락거렸다. 상호의 머리카락 끝에는 살살 얼었던 물기가 온기에 녹아 축 가라앉았다. 병찬은 은근한 실망을 숨기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상호 반응이 저런데 억지로 붙잡고 싶지 않았다. 친한 형이 되는 건 쉬운데 더 친해지고 싶은 형이 되는 건 어렵구나. 병찬은 성격 좋은 형을 자처했다.

상호에게 목적지를 물은 병찬은 터치스크린에 장소를 찍었다. ‘목적지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기계 목소리가 경로를 말했다. 상호가 찍은 좌표는 인스타에서 유명한 하와이안 양식집이다. 종종 데이트 코스로도 홍보되었던 곳이라 병찬은 미묘한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동기들이랑 저런 곳을 간다고?’ 병찬은 제 안전벨트를 매었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궁금증을 툭 내뱉었다.

“형아 대학 다닐 때는 김밥천국에 당구장 가는 게 끝이었는데. 요즘은 남자끼리 다이닝도 가?”

말하고 보니 상호의 약속을 비꼬아 말한 것 같아 병찬은 제 혀를 깨물었다. 상호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병찬은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손바닥이 습기로 축축했다. 상호는 병찬의 말에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의외긴 하죠? 근데 여길 꼭 가야 한다고 하데요.”

상호는 특별할 거 없다는 투였다. 그 말에서 병찬은 뜨끈한 긴장을 느꼈다. 초조했다. 약속의 내용을 물어보면 될 걸 말 한마디에 제 속이 그대로 탄로 날까 봐 더 파고들지 못했다.

병찬은 눈길이 미끄럽다는 이유로 최대한 느리게 운전했다. 계기판의 속도는 5와 6을 왔다 갔다 했다. 달팽이만큼 느린 속도로 차가 뒤로 후진했다. 병찬은 전부터 귀를 괴롭히는 알림음에 계기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람이 앉아있는 붉은 등이 빛났다. 상호가 벨트를 매지 않았구나. 병찬은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중립으로 돌렸다. 비상등 버튼을 눌렀다. 띵띵 거리는 울림에서 딸각거리는 소리가 추가되었다.

 

“상호야.”

“네, 넵?”

잠깐만. 병찬은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였다. 상호는 갑작스레 가까워지는 병찬의 얼굴에 얼떨떨한 얼굴로 목을 뒤로 빼내었다. 병찬의 코트 깃이 상호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했다. 병찬이 입은 감색 코트 깃 사이로 남자 스킨향이 났다. 상호가 코를 킁킁거렸다. 알싸한 향이 병찬을 남자 어른으로 만들었다.

상호에게 병찬은 친한 형이지만 가끔 이렇게 그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상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상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꾹 닫고 비명을 삼켰다. 상호의 반응을 보지 못한 병찬은 조수석 벨트를 꺼내 상호의 좌석에 직접 채웠다. 상호는 그사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찬기로 빨갛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있었다. 병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 글러브 박스에 팔을 걸쳤다. 병찬으로선 상호가 자신의 행동에서 별생각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안전벨트 하고 다녀.”

“까먹, 고 있었어요.”

병찬은 하하 웃었다.

“너 잘 깜빡하더라. 형 카풀 해줄 때마다 하는 말이 안전벨트 매라는 소리야.”

상호는 쑥스러움에 제 뒤통수를 시트 헤드에 툭 기대었다. 상호는 자기가 그렇게 잘 덜렁거리는 사람인 줄 몰랐는지 부끄러워했다. 병찬이 상호를 동생 취급하자 상호는 다시 몸을 세웠다. ‘햄, 제가 그렇게 안전에 관심 없고 그런 사람 아닌데요.’ 상호는 자신이 애처럼 보인다 싶으면 늘 다다다다 해명하려 들었다. 그 행동이 상호를 더 애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호 입장에야, 주위로부터 막내나 어린놈 취급받는 건 익숙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어린 인간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상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가 뭐 때문에 햄 앞에서 안 했는데요.”

“응?”

“벨트…. 말이에요.”

병찬은 상호의 대화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상호는 정면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도 숙여보고, 양손으로 마른세수도 했다. 병찬은 상호의 달아오른 뒷목을 보고서야 이게 추위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상호는 눈썹을 찡그렸다.

“햄이 직접 매주는 게 좋아서 그런다 아니에요.”

“상호는 보살핌받는 게 좋은 거구나.”

“그게 아이라요!....그니까….”

 

햄이 좋아요.

 

병찬은 어쩐지 딸각거리는 소리가 초침 같기도 하고 일정한 신호의 수신음 같다고 느꼈다. 심장 소리인가, 심장 소리라 하기엔 그 소리는 너무 느렸다. 아니 소리가 느린 게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 빨랐다. 상호의 고백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남자가 여자한테 초콜릿 주면서 고백하는 날. 병찬은 남자고, 상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상호가 병찬에게서 차를 얻어타는 중이지 않는가.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실격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신세를 지면서 하는 말이 고맙다. 나중에 보답하겠다. 그런 게 아니라 좋다. 라는 애매모호한 말 한마디라니.

상호는 제법 옷차림에 신경 썼지만 붉게 익은 얼굴에 입술이 찢어져 있었다. 립밤 바르라고 했었는데 말 안 듣네. 패딩 안에 입은 건 셔츠에 스웨터. 갈 때 머플러 빌려줘야겠다. 물 빠진 청바지와 캔버스화. 다리 위에 올린 손은 주먹을 쥐었다. 언 손이 아려 보인다. 상호의 부푼 망막이 병찬의 속마음을 반사하는 것 같다. 병찬은 얼타는 소리를 내었다.

아,

 

이렇게 보니 상호가 참 어리구나.

 

상호를 처음 보았을 때가 고등학생 때고, 상호는 빠른 이랬으니 겨우 16살. 합숙 한 번이 뭐라고 사람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지는 것인지. 병찬은 목욕탕 동갑내기 효과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같은 공간에서 같이 연습을 하다 보니 동질감도 생기고 편해지고 한 거겠지. 체육관에서 나누었던 말은 솔직히 살가운 내용도 아니었고 각자가 할 수 있었던 덕담에 불과할 텐데. 상호는 그게 기꺼웠는지 곧잘 병찬을 따라다녔다. 병찬은 그게 또 없던 동생이 생긴 것 같고 기분 좋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후배들과 간간히 연락을 했었지만 안부 묻는 게 전부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다사다난한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굳이 연락하면 서로 심란해질 테니 사렸었고. 지금의 조형고 같은 학년 동생들과 사이가 어색하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상호는 근본적으로 조형고 동생들과 달랐다. 형아, 형아. 그러니까 햄, 햄. 하고 동경과 호감만 꽉꽉 채운 동생은 처음이었다.

쌍용기 때도 어차피 대통령기 때던 유스캠프던 다시 마주칠 테니까. 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병찬은 상호가 귀엽다고 번호를 따갔다. 상호는 엉뚱하게도 병찬이 좋으면 연락처를 교환하면 될 텐데 병찬의 연락처를 얻어갈 생각도 안 했다. 이런 부분은 섬세하지 못한 것인지 상호는 병찬이 연락처를 묻고 나서야 그래도 되는 거였냐며 바보같이 잠금도 풀지 않은 휴대폰을 통째로 넘겨주었었다. ‘하여간 귀여웠어.’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서 병찬은 일부러 상호에게 선톡해야하나 고민도 했었다. 연락처 교환부터 얼렁뚱땅 이루어진 감이 있었다. 상호는 눈치가 없었다. 분명 자기 연락처 목록만 쳐다보면서 그게 만족스럽다고 헤헤 웃기만 할 테지. 병찬은 카톡을 날렸다. ‘상호 부산엔 잘 내려갔어?’, ‘병찬햄 인천에는 잘 올라갔어요?’ 타이밍이 겹쳤다.

병찬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호 소심한 줄 알았는데 낯가림은 없구나.’ 병찬은 장난으로 ‘찌찌뽕!’ 하고 보냈다. 상호도 이런 장난을 아는지 ‘뽕찌찌!’ 하고 답톡을 했다. 두 사람은 5살 나이 차이에 장벽을 느끼지 않고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톡으로 이어가기 시작한 관계는 먼 거리 탓에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병찬은 상호가 준향대를 물어볼 때마다 교정 사진을 보내주었다. 얼른 준향대에 붙어보라는 식으로, 가끔 준수와 찍은 사진도 보내줬다. 상호는 굳이 준수의 안부를 묻지 않았지만 병찬은 상호와 몇 마디 대화를 더 해보고 싶어 준수의 소식을 일부러 알렸다. 물론 준수도 병찬이 이런 식으로 소식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준수도 연락을 잘 하지 않는 무덤덤한 인물이었고 상호는 병찬을 통해서 감독님에게 준수의 소식을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아주 가끔 상호가 서울로 올라올 때면 병찬은 과잠을 챙겼다. 병찬의 합격 운 받아가라고 상호에게 과잠을 입힌 뒤 대학교 구경도 시켜줬다. 서울 대중교통 팁도 알려주었다. ‘서울 택시는 짐이 많거나 거리가 멀 때만 타는 거야.’, ‘엥, 그럼 늦으면 어떡해요?’, ‘지하철이 제일 빨라.’ 인천 사람이 부산 사람한테 알려주는 서울 대중교통 팁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정보다. 그러나 병찬이 알려주는 정보의 저의는 그것이었다. 너도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정작 상호는 애니메이트를 가보길 원했다. 병찬은 상호의 오타쿠력에 지루해할 법도 한데 애니메이트에서 상호가 보는 만화책을 옆에서 구경해보기도 하고 상호가 알려주는 캐릭터 피규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 ‘흑발이 스탬프라고?’, ‘아뇨 노랑머리가 밧슈 더 스템피드요.’, ‘그럼 저 피규어가 나오는 애니도 봐?’, ‘아뇨 쟤는 미쿠에요. 아이돌이자 뮤즈죠.’, ‘? 그래.’

상호가 설명하는 캐릭터는 전부 다 알아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상호가 유리 전시장 앞에서 기뻐하고 눈을 반짝이는 건 병찬에게 몇 가지 즐거움 중 하나였다. 대학생 시절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아 병찬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 상호에게 퍼다 줄 수 없었으니까.

서울 사람들과 매연에 이리저리 치인 상호가 힘들어하면 병찬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자고 내려가라며 상호를 붙잡았다. 상호는 바로 내려가는 게 편하지 않나 싶었지만 어차피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올라온 게 피곤했다. 병찬의 자취방은 가깝고 상호의 본가는 멀었다. 채근에 못 이겨 병찬의 자취방에 들어가면 병찬이 배달음식을 상호의 입에 넣어주고 상호는 그게 고마워서 더치하겠다고 했다. 병찬은 17살, 18살짜리가 무슨 더치냐고 정 고마우면 준향대 입학한 다음에 형 점심 셔틀 해달라고 했다. 상호는 그럴 때마다 ‘제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있을까요.’ 하고 의기소침했다. 병찬은 나를 막은 너만 한 디펜더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장담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대화는 대게 상호의 진로 고민으로 이어졌다. 병찬도 한 번밖에 도전해보지 않은 진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로 고민이라는 게 다 무어냐, 진로 걱정은 잘 될지 모르겠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정이다. 병찬은 그런 불안을 해소해주는 데 꽤 능력이 좋았다. 상호가 빠져든 건 아마 병찬의 그런 확신에 가득 찬 모습 때문이었을 테다.

병찬의 선택은 확신으로 가득했으니까. 누군가가 길잡이를 세워주지 않아도 자신만의 이정표가 확실한 사람. 그게 박병찬이다.

상호는 언젠가 그런 병찬의 모습을 본받고 싶었고, 병찬이 상호에게 말을 걸어주고 서울로 올라갈 때마다 대학 구경시켜주고 부산에 직접 내려와서 경기를 보러 와주고. 병찬은 누가 보아도 친한 동생을 아끼는 사려 깊은 형이다. 상호는 그런 사려 깊음에 사랑에 빠졌다.

병찬은 제 행동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상호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구나. 이건 처음부터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병찬은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관계의 분기점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상호는 어리지만 한 편으로는 어리지 않겠구나. 병찬의 눈에 보이는 상호는 16살의 앳됨이 남아있는데. 용기를 내서 자신한테 고백하는 건 치기나 앳됨이 아니었다. 관계를 바꿔나가고 싶다는 선택이다.

 

받아주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항상 다른 이야기와 다른 출발선에 눈을 열어보았다면 달라졌을까.

병찬은 날 것 그대로의 마음에 어설픈 답을 했다.

 

“미안, 상호야.”

 

상호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병찬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했다. 핸들을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비상등의 깜빡거리는 신호임이 일정하게 신경질을 부렸다. 병찬은 상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상호야. 형은 남자잖아. 그러니까, 받아주지 못할 것 같아.”

“아….”

“그래도 괜찮아! 상호 키도 크고 잘생겼으니까, 다른 사람이랑 다른 좋은 인연도 많으니까. 둘러보면 상호도 금방 형보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상호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올라갔다. 눈썹이 팔자로 올라갔다. 상호는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병찬은 자신이 하는 말이 괴상하게 느껴지지 않길 바랐다. 병찬의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고 말이 되지 않는 종류였으니까. 상호는 코를 훌쩍였다. 크흠. 병찬은 상호의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이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상처받았겠지. 어쩌면 최악의 형일지도 모르겠다. 상호도 저와 만나면서 한 방향인 감정이 아니라고 확신했을 텐데 용기를 내어도 돌아오는 말이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이유의 거절이라니.

‘적어도 남자라서 싫다는 말은 꺼내지 말았어야지 이 한심한 자식아.’

병찬은 차라리 구단 적응이 정신없어서 연애할 짬이 나지 않는다고 할 걸 그랬다며 짧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가 될 테니까. 이런 식으로 거절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또 반복할 테다. 병찬은 상호에 대해 잘 알았다. 아니, 자신의 마음도 잘 알았다. 이런 관계와 감정은 시한폭탄에 가까워서 아주 작은 계기만 있다면 튀어 나가버리니까. 방금도 상호가 차 안에서 덜 영근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 병찬은 억지로 자기합리화를 했다.

“형이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아니에요!”

상호의 입에서 삑사리가 튀어나왔다. 병찬의 거절이 작지 않은 충격을 준 탓이다. 상호는 애써 쿨한 척 병찬의 거절에 이런저런 사족을 붙였다.

“이거는 제가 성급했다. 그쵸? 저는 햄이 남자도 가능할 줄 알았어요. 근데 제가 먼저 커밍아웃부터 할 걸 그랬어요. 그럼 햄이 저한테 좀 적응하고, 저는 햄이랑 같이 노는 게 썸 타는 게 아니라 진짜로 놀고 친한 동생 챙겨주는 착한 병찬햄인 걸로 오해 안 했을 텐데. 희차이가 맨날 저보고 눈치 뒤졌냐고 꼽줬었거든요? 그 말 잘 들을 걸 그랬어요. 병찬 햄은 저랑 친, 크흥.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텐데 제가 다 망쳐버렸네요. 아, 쪽팔려. 이 기상호 낭랑 20세. 흑역사 하나 적립했네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상호의 말은 이리저리 떨렸고 두서없었다. 상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햄. 제가 죄송해서. 걸어서 갈게요. 괜히 심란하게 만들어가.”

“아냐. 타고 가. 이대로 가면 어색해지겠다. 밖에 춥고, 가다가 넘어질 거 같다.”

병찬은 상호의 안전벨트를 잡았다. 병찬은 뒤늦게 잡고 나서야 상호의 이리저리 떨리는 동공을 마주했다.

병찬은 이기적이다. 상호가 상처를 받았고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는데도 억지로 붙잡았다. 이는 단순한 걱정만이 아닐 테다. 병찬은 제 혀를 깨물었다. 상호는 안전벨트를 풀려다가 잡힌 병찬의 손에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네.’ 조그맣게 대답한 상호는 천천히 병찬의 손을 빠져나왔다. 병찬은 비상등을 끄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가 침묵으로 조용하자 그 속을 자동차 엔진음이 채웠다. 10분의 짧은 정적이 지나자 내비게이션이 무기질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상호는 잠긴 목소리로 병찬에게 고개를 주억였다.

“태워줘서 감사해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그래, …너 괜찮지?”

“저 회복 잘해요. 이 기상호, 담에 볼 때는 어색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아임까.”

상호의 일그러진 눈가는 펼쳐질 줄 몰랐다. 병찬은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권리가 있냐고 상호를 위로하나. 상호의 눈에 저가 보이지 않게 된다면 아마 펑펑 울어버리겠지. 상호만 병찬을 관찰한 건 아니다. 병찬 또한 상호를 오래 관찰해왔다. 손끝이라도 건들면 상호는 울면서 다시 생각해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병찬은 다시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병찬이 차마 웃어넘기지 못하자 상호는 삐걱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니까요. 나중에 저 쌩까시면 안돼요.”

“상호야.”

“네?”

“다음에 또 보자.”

 

“.....네, 또 봐요.”

상호는 입꼬리를 부들거렸다. 간신히 병찬에게 인사를 한 상호는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군중 사이로 갈색 머리통이 점점 멀어졌다. 병찬은 온몸에 힘을 풀고 상호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끝났네.

병찬은 자신의 분기점에 대해 짧은 결론을 남겼다. 끝났어. 관계의 가능성인가 어떤 미래인가. 병찬은 미묘한 확신을 속에 삼키고 열선과 히터를 껐다. 맨 오른쪽으로 돌아간 불이 사라졌다. 병찬은 마른세수했다. 심장이 불안으로 쿵쾅거렸다.

 

 

농구공이 백보드에 맞고 튕겨 나간다. 골대에는 스치지도 못했다. 병찬은 바스켓에서 농구공을 하나 더 꺼내 다시 슛을 한다. 텅! 농구공은 골대에 맞고 떨어지면서 병찬의 왼쪽 정강이를 쳤다. 둔한 통증이 일었지만 병찬은 맞은 부분을 손으로 대충 쓸었다. 바스켓에서 농구공을 꺼내려 했지만 던지는 데에 다 쓴 건지 비어있다. 병찬은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였다. 근처에서 드리블 연습을 하던 구단 형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 병찬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구단에서 병찬은 빠릿빠릿하고 텐션 놓은 선수였는데 지금은 다 시들어가고 있다. 더군다나 같은 대학 후배다.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병찬이 흐느적거리며 공을 주워 담자 결국 구단 형은 병찬을 도왔다.

“어, 고마워요.”

병찬은 맹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구단 형은 형태가 무너지다 못해 슬라임처럼 변해가고 있는 병찬에게 마지못해 말을 걸었다.

“야, 병찬아. 너 무슨 일 있냐?”

“아뇨? 크흠. 아뇨.”

병찬이 삑사리를 내었다. 다시 목을 가다듬고 대답하니 구단 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수상하단 눈초리로 병찬을 쏘아보았다. 구단 형의 날카로운 눈빛에 병찬은 도리어 속이 찔린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결국 대학 선배에게 패배한 병찬은 상호의 고백을 거절한 걸 실토했다. 상대가 상호라는 건 알리지 않았다. 농구판은 안 그래도 좁은데 상호가 괜한 소리 들을까 봐 여서였다. 구단 형은 병찬의 말을 하나하나 정돈했다.

 

“몇 년 지기 친한 동생이 고백했는데 거절했고. 거절하고 나서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연은 끊지 말아 달라고 붙잡았다고?”

“그…. 붙잡은 건 동생이고요.”

“야. 거절했는데 굳이 굳이 태워준 게 붙잡은 거지. 나이 먹고 이것도 못 알아먹으면 헛먹은 거다.”

“민호 형 저 2000원 비싸졌어요. 그래서 걔한테 미안하고 심란해서 그래요.”

 

민호는 한쪽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 병찬은 거절한 사람보단 거절당한 사람 같았다. 민호는 병찬의 반응을 지적했다.

“그 여자애랑 이어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냐?”

“...5살 연하라서요?”

병찬은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냈다. 병찬의 나이 25살. 상대가 갓 성인이니까 거절할만했다. 민호는 병찬의 이유에 수긍했다. 나이 차이가 심하면 그렇지.

“거절할 만하네. 근데 20살이잖아. 그럼 보통 좋아하던가 부담스러워하는 게 정상 아니냐? 너처럼 맛이 가는 게 아니라. 너도 속으로는…”

“그런 식으로 본 적 없어요.”

“새끼 말 잘라먹는 본 새 봐라. 오야. 니 똥 굵다.”

“아무튼… 문제없겠죠?”

“양심 없는 새끼.”

“네?”

“뭐.”

‘예?’, ‘왜.’, ‘예?’, ‘왜.’ 병찬이 되묻자 민호가 똑같이 되물었다. 민호는 병찬의 말에서 지독한 어장의 냄새를 맡았다. 병찬의 진심이든 삽질이든 민호는 쓸데없는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병찬에게서 떨어졌다. 병찬은 자신의 행동이 많이 이상하단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상담하지 않고 다시 농구공을 들었다.

 

병찬은 자취방 침대에 누워서 상호의 카톡 프로필을 바라봤다. 준향대 캠퍼스 고양이 사진을 메인으로 세운 상호의 프로필 아래 일대일 대화가 병찬의 망막에 반사되었다. 상호의 고백을 거절한 지 2주째. 병찬은 상호가 먼저 톡하기를 기다려야 하나, 자신이 먼저 말을 터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이 아니면 톡할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플레이오프와 개강을 앞둔 탓이다. 병찬은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체교과 후배한테 먼저 상호 상태를 물어봤어야 하나. 하지만 내가 물어보면 상호 귀에도 분명 들어갈 텐데. 병찬은 손톱으로 프로필 사진을 두드렸다. 말은 그랬어도 하는 수밖에 없다. 병찬은 결심했다.

 

1 오전 0:12 자?

 

구질구질하다. 삭제하고 다시 보낼까. 병찬은 자신의 메시지를 꾹 눌렀다. 메시지 삭제 창 앞에서 지울지 말지 고민하는 새에 1이 사라졌다. 상호가 병찬의 메시지를 읽었다. 상호의 답은 5분 동안 오지 않았다. 병찬은 지울 타이밍도 놓치고 상호의 메시지를 기다린다고 애먼 상단 바를 내렸다가 올리기를 반복했다. 자정 12시가 야속했다. 늦은 시간에 보내지 말고 차라리 정신 멀쩡한 오전에 보낼걸. 병찬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기상호 아뇨. 이제 자려고요. 오전 0:13

 

상호의 답은 꽤 빠르게 왔다. 병찬은 은근한 안도감을 느꼈다. 상호가 자신을 피할 생각 없구나. 병찬은 늘 하던 데로 받아쳤다. 상호는 이전에 고백을 거절 받았던 때와 달리 저번과 비슷하게 친한 형처럼 대했다. 병찬은 불 꺼진 방에서 모로 누워 양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카카오톡의 파란 불빛이 병찬의 얼굴을 비추었다.

 

오전 0:14 진짜 자려고 하는 거 맞지? 상호 이 시간엔 라프텔 자주 들어가 있잖아

아기상호 요샌 안 그래요 오전 0:14

아기상호 개강하면 훈련 빡시게 할 거라고 오전 0:15

아기상호 주장형이 으름장을 막 놔서ㅠㅠ 오전 0:15

오전 0:15 ㅋㅋㅋㅋ주장이가 원래 열정적이야

오전 0:16 잠 못 자는 건 아니지?

오전 0:16 저번에 2학기 개강할 때

오전 0:16 수면 패턴 못 돌려서 고생했었잖아

아기상호 그 정도는 아닐 거에요 오전 0:17

오전 0:17 아이고 상호야

 

병찬은 늘 하던 대로 숙면에 도움이 되는 주소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야 아차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상호가 힘들어할 텐데. 병찬은 무신경한 행동에 다급히 포장했다.

 

오전 0:20 형이 자주 듣던 영상인데 괜찮더라고

아기상호 감사요 오전 0:20

아기상호 형도 빨리 자요 오전 0:21

오전 0:21 그래야지

아기상호 잘 자요 오전 0:21

1 오전 0:28 잘 자

 

병찬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협탁 위에 덮어 올렸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병찬은 엎질러진 물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상호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댔으니 이대로면 될 텐데, 요즘 병찬은 상호의 앞에서만 서면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이 없어졌다. 상호가 의식되어서가 아니라 상호에게 했던 거절 한 마디 자체가 병찬의 거대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병찬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말은 이미 뱉었고 선택을 수습할 순간은 지나간 지 오래다.

 

3. 끝

삑-! 삑-! 선수 교체를 알리는 버저가 일정하게 울렸다.

 

“병찬이, 준비됐지?”

“네.”

병찬은 웜업 져지를 벗었다. 우리 팀은 42점. 상대 팀은 51점. 홈 경기장은 역전을 위해 선수의 이름을 연호했다. 코트로 투입되면서 응원곡이 울렸다. 여자 아이돌 노래 사이로 병찬의 이름이 나온다. 리드미컬한 박자를 따라서 사람들이 열광한다. 병찬은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을 디뎠다. 코트 바닥이 익숙하면서 새로웠다. 출전은 몇 살이 되었든 긴장되는 법이다. 병찬은 감독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병찬은 심판에게서 농구공을 받았다. 2쿼터 후반, 반전을 이루지 못해서 관중은 조금 쳐져 있다. 트럼펫 소리 사이로 구단 이름을 외쳐댔지만 힘이 없었다. 상대 팀에게서 3점을 연속으로 처맞았던 데다가 턴오버를 두 번 연속으로 일으켰으니까. 그래도 야유는 없는 게 다행이다. 병찬은 이때 누군가가 기습적으로 득점을 날리고 게임의 반전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의 말대로 슈팅가드가 점수를 낼 수 있도록 해야겠지. 병찬은 상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몸이 바람처럼 사람을 스쳤다. 순발력으로 끌어낸 스피드가 어그로를 끈다. 전해 1라운드 1픽 루키의 득점인 줄로 속은 상대 팀이 투맨으로 디펜스하면 병찬은 바운드 패스로 코너의 슈팅가드에게 공을 넘긴다. 슈팅 가드가 그것을 받아 그대로 3점 슛을 날린다. 노마크로 쏘아진 공은 호선을 그려 링으로 떨어진다. 그물이 파도처럼 찰랑거린다. 응원석 사람들이 유니폼을 들어 올린다. 개중에는 병찬의 준향대 시절 유니폼도 있었다.

 

“햄 스타팅 된 거 축하드려요!”

맥주잔이 부딪치면서 청량한 소리를 낸다. 대학가 호프집은 사람들로 적당히 붐볐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최신곡 메들리가 시끄러웠지만 대화에 방해가 갈 정도는 아니다. 달달한 탄산이 뒤로 넘어간다. 병찬은 시즌 중이라 알코올을 자제하던 차였다. 상호는 대학 농구전이 끝난 뒤라 맥주를 마셨다. 도수 낮은 술을 한 번에 마신 상호는 크하-! 하고 감탄을 뱉었다. 병찬은 막 식단의 부담을 내려둔 상호를 위해 이런저런 안주를 시켰고 상호는 병찬의 배려에 좋아라하면서 이것저것 집어먹었다. 대학로 근처 술집은 돈 없는 대학생을 위해 다양한 안주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다던가 양이 특히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위를 채울 정도는 되었다. 이번 술자리는 병찬이 쏘겠다고 했지만 상호는 요지부동이었다.

“햄 축하하러 온 자리인데 당연히 제가 쏴야죠! 설마 햄이 다 내려고요? 저를 놔두고요?”

상호는 단호하게 병찬의 손을 잡았다. 병찬은 상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지갑을 꺼내려다가 되려 상호의 눈총만 받았다. 병찬은 상호의 고집에 져줄 수밖에 없었다. 상호는 아주 단호했고 병찬으로선 상호의 고집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햄 선물이에요.”

“어, 뭐야. 너무 힘쓰는 거 아니야?”

“에이, 저 알바해서 괜찮아요.”

상호는 쇼핑백을 건넸다. 종이 가방에 찍힌 로고가 낯이 익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다. 병찬은 놀란 얼굴로 가방 안을 확인했다. 가방 안에 들어간 박스를 보니 분명 신발이다. 대학생 신분으로 준비하기 부담스러울 물건이다. 병찬은 상호의 선물과 상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상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병찬의 반응을 즐겼다. 병찬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아, 상호, 상호야, 이건.”

병찬이 입을 더듬다가 감동한 얼굴로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다. 아까워서 못 신겠다. 상호는 병찬의 반응이 만족스러워 이런저런 말을 이었다.

“햄 평소에 아디다스 잘 신는 건 아는데 나이키에서 런닝화를 팔더래요. 햄이 딱 좋아하는 색깔이길래 샀어요. 신발 사이즈는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고.”

병찬은 상호에게 미안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축하받을만한 형은 아닌데. 고마워서 어떡하지.”

상호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햄은 그럴만한 사람이죠.’

“햄 저번에 제 고백 거절하셨을 때요. 더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했잖아요. 햄 말이 맞았어요.”

“어, 상호. 여자친구 생겼어?”

“아뇨. 그냥 지금이 아니면 말 못 할 것 같아서요.”

상호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딱히 썸 타는 사람도 없지만요. 햄은 계속 신경 쓰고 있을 거 같아서요.’ 상호는 병찬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눈빛이 선명했다. 병찬은 상호의 말에 뭐라 답할지 몰라 애먼 사이다를 마셨다. 상호는 병찬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지상고 같이 다녔던 햄들이 맨날 저한테 하는 말이 있잖아요. 넌 눈치 없으니까 절대로 연애하지 마라. 같은 거. 저도 동의해요. 지금은 혼자가 더 재밌거든요. 이 상태로 누구 만났다간 상처만 줬을걸요.”
병찬은 상호의 말에 나랑 같이 있으면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재밌지 않았냐고 부추기고 싶었다. 그냥 우리 둘 다 연애 같은 건 하지 말고 천년만년 함께하자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병찬은 상호의 고백을 거절했고 더 상호를 붙잡으면 안 되었다. 병찬은 속이 씁쓸했다.

 

자신과 이어지지 않고 상호가 행복해지는 것, 그게 병찬의 목적이다. 오로지 병찬이 홀로 감내해야 한다. 병찬은 무릎 위에 올린 손아귀 힘을 주었다.

 

내일도 수업이 있을 상호와 훈련이 있을 병찬은 빠르게 자리를 파했다. 가을 날씨가 쾌적해서 그런가 길거리에는 인파로 가득하다. 병찬은 상호를 사람들 틈에서 잃어버릴까 봐 그의 옆에 붙어서 걸었다. 상호는 알딸딸한 기분으로 길거리를 걸었다. 주변 상가는 사람들을 꼬아내기 위해 유행곡으로 호객했다. 가로등과 간판 불빛이 신기루처럼 시야를 물들였다. 병찬도, 상호도 시끌시끌한 소음을 무심하게 지나갔다. 병찬은 철 지난 아이돌 노래 사이에서 어떤 익숙한 멜로디를 잡아챘다. 기타 음이 잔잔한데도 병찬에게는 그 노래가 선명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병찬은 아주 오래되었을 사랑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햄, 뭐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다가 상호가 병찬을 불렀다. 병찬은 퍼뜩 고개를 돌려 상호를 뒤따라갔다. 그러면서도 그 노래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익숙한 노래인데, 이상했다. 옛날 노래인 것 같은데.

“상호야. 저 노래 알아?”

“무슨 노래요?”

병찬이 허밍으로 음을 따라 불렀다. 짧은 마디가 허하게 끝나자 상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다. 상호는 가게에 가서 물어보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병찬은 도리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노래가 묘해서 물어본 거였어.’ 상호는 병찬의 반응에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리고 뭔가 떠올랐는지 다른 주제를 꺼냈다. ‘햄 그거 아녜요? 어렸을 때 들어봐서 익숙하다던가.’

“저번에 뉴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한테 그 사람이 즐겨듣던 노래를 들려주니까 금방 의식을 차리고 깨어났다고요.”

“그래? 신기한 기사네.”

 

“음악이 사람들의 심상을 자극하는데 그게 무의식에서도 영향을 준대요.”

 

병찬은 상호의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몇 개월 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호야. 너 전에 이런 이야기 하지 않았어?’ 병찬이 묻자 상호는 금시초문이라며 의아해했다. 밤거리 가게 불빛으로 훤한 상호의 얼굴엔 거짓이 없었다. 병찬은 왜 이런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는 어느 순간 기억과 음악에서 음악으로 넘어갔다.

“나중에 저 치매 걸리면 애니 오프닝만 줄창 부를지도 몰라요.”

“50년 뒤에는 명곡 취급해줄 거야.”

“빈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아쉬웠다. 병찬은 술 잘 마셨다며 인사하는 상호를 보냈다. 상호를 태운 버스는 엔진 소리를 내며 대학로를 빠져나왔다. 버스 후미등이 잔상을 남겼다. 병찬은 제집으로 갈 버스를 기다렸다. 병찬을 사랑하지 않는 상호가 낯설었다. 병찬을 보는 상호는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병찬의 행동 하나하나에 호들갑 떨었던 풋풋한 남자애였는데. 지금의 상호는 털털하고 친한 동생이다. 그 괴리감 때문인가, 병찬의 눈에는 상호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병찬은 밤이 늦으니 괜히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거라며 섭섭한 마음을 죽였다.

예전에 끝났는데, 찌질하게 뭐 하는 짓이냐 박병찬. 구질구질해지지 말자.

 

4. 실패의 자기합리화

틱, 틱, 침실 시계 초침이 일정하게 울렸다. 시간은 병찬이 느끼던 것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계절은 쏜살같았고 데뷔도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즌이 끝나면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가 끝나면 뒤풀이, 뒤풀이가 끝나면 휴식기, 휴식기가 끝나면 전지훈련. 그리고 그 틈새에는 대학 생활까지. 병찬은 오랜만에 자신의 몸이 두 개로 나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래도 올해 가을에 졸업하기로 해서 다행이지. 병찬은 나른하게 휴일을 즐겼다. 이렇게 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2년 동안 구단에 적응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취도 시작했다. 웬만하면 서울 쪽으로 계약하고 싶었는데 서울 집값은 1라1픽의 운동선수 연봉으로는 턱도 없었다. 서울 대신 경기권으로 자취방을 정했다. 병찬은 집들이로 파티를 그렇게 자주 했으면서 상호는 초대하지 않았다. 2년이나 지났던 대로 쿨한 척하면서 상호를 자신의 공간에 데려올 자신이 없었다. 모이면 소주 뚜껑부터 따는 남자들이라 더 그랬다. 말이 많아지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크게 상심하고 쫑알거리는 병찬의 술버릇이 상호 앞에서 조용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병찬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모처럼의 쉬는 날,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같이 놀고 싶었지만 병찬의 친구들은 직장인이다. 평일 한낮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직장인 아닌 운동선수 친구들을 부르기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어차피 운동하면서 또 질리도록 볼 텐데 이렇게 좋은 날 또 얼굴을 봐야 할까? 차라리 혼자 놀고 말지. 병찬은 침대에서 일어나 제 방을 둘러보았다. 한낮이라 활짝 열어둔 창문에서 햇살이 방을 비추었다. 나가서 뭐라도 하자. 병찬은 상쾌한 기분이 필요했다.

병찬의 휴대폰에서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도서관 로비에 들어와 놓고 진동 모드를 깜빡한 병찬은 사서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휴대폰을 들었다. 스팸문자겠거니 해서 메시지에 들어갔다. 메시지의 주인은 상호였다. ‘전화 돼요?’ 상호가 문자를 보낸 건 오랜만이었다. 병찬은 묘한 얼굴로 빌려온 책은 옆구리에 끼고 전화하기를 머뭇거렸다.

연락이야 늘 하고 있지만 안부 묻기에 가까운 것이었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도 1년 가까이 되었다. 상호가 어색하지는 않다. 오히려 자주 보고 싶다. 근데 상호는 과제 때문에 바쁘고 학교생활도 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면 오히려 상호가 심란해질까봐지. 걸음이 느려졌다. 생각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을 땅에 붙인 병찬은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좀 더 생각해보는 게 좋다. 그건 병찬의 오랜 삶의 지혜다.

미뤄둔 문자는 병찬이 홀로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 모르는 번호로 찾아왔다. 010으로 시작된 전화번호다.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인가 싶어 끊었으나 다시 전화가 걸렸고 스팸 어플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아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받았다. 요즘에는 사고가 나면 구급대원이 전화를 걸 수도 있으니까. 혹시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고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찬은 벨 소리가 끊기기 전에 화면을 밀었다.

“여보세요.”

고저 없는 말 뒤에는 ‘서초 경찰서입니다.’ 나 ‘여론조사 안내 ARS’ 같은 스팸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병찬이 상상하는 가족이 다쳐서 보호자로 부르는 상황도 아니었다. 전화를 건 상대는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고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누군가 ‘전화하지 말라니까~’ 하는 말리는 말도 희미하게 들렸다. 휴대폰 스피커에서 나는 술 냄새에 병찬은 고개를 기울였다. ‘잘못 걸었나?’

 

[병찬 햄.]

“어? 어, 그래. 상호. 왜 그래?”

전화 너머의 주인은 상호였다. 병찬은 처음으로 마주한 상황에 당황했다. 상호 전화는 어디에다 두고 다른 사람 폰으로 전화를 한 건지, 술은 또 왜 그렇게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상호는 익숙하다. 그러나 술에 취한 상호가 맛 간 목소리로 병찬을 부르는 건 처음이다. 병찬은 목도한 취객 기상호에게 충격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월세 사기라도 당한 건가? 상호는 침묵으로 사운드를 채웠다. 병찬은 계속 상호의 이름을 부르며 상황을 이해해보고자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호는 병찬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병찬이 할 수 있는 건 상호의 일행에게 전화를 바꿔달라 종용하는 것뿐이었다.

“저, 저기. 상호 친구? 상호 친구분? 거기 있어요?”

[기상호 전화 내놔. ‘끊지 마라아-’ 아니 끊는 거 아니라고 미친놈아! 예에. 저 상호 대학 ‘내 햄한테 할 말 있다꼬’ 친군데요- 아 씨바 좀!]

전화 너머로 친구가 간신히 상호에게서 전화를 뺏었다. 친구는 병찬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친구가 전화하고 있는데도 술에 취한 상호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넘겨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뺏으려고 했는지 친구는 폰을 얼굴에 댄 채로 상호에게 성을 내었다. 어지간히 들러붙은 모양이다. 친구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상호와 엎치락뒤치락했다. 병찬은 묻지 않아도 두 사람이 씨름 중이겠구나 정확히 예측했다.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거슬릴 정도로 커지자 병찬은 잠시 전화를 멀리 떨어뜨렸다. 한동안의 싸움이 끝났는지 스피커 너머로 ‘여보세요, 여봇, 여보세요?’하고 상호 친구가 병찬을 불렀다.

“네, 듣고 있어요.”

[아, 기상호 쟤가 요새 힘든 일이 많아서요. 사고 칠까 봐 쟤 폰은 꺼놨거든요. 그…. 상호 바쁜 거 아시죠? 그거 때문에요. ‘내 알아서 하께’ 근데 제 폰으로 형님분한테 전화를 걸 줄은 몰랐네요. 상호는 제가 알아서 기숙사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죄삼다-]

상호의 친구는 병찬을 상호의 친형으로 오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병찬은 일부러 이를 정정하지 않았다. 동생이 가족도 아닌 친한 형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병찬은 그런 오해를 이용했다.

“잠깐, 잠깐만요. 제가 상호 데려갈게요. 기숙사에 데려다 놓았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고.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고 보내면 되니까요.”

상호의 친구는 귀찮은 상황을 빠르게 해결해줄 구원의 손이 오자 냉큼 붙잡았다. 187cm의 취객은 다 큰 성인 남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병찬은 친구에게서 위치가 적힌 문자를 받고 겉옷을 챙겼다.

 

 

“감사합니다. 술값까지 대신 내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 술 상호가 다 마셨는데 형 된 도리로 내줘야지.”

병찬은 넉살 좋게 웃었다. 상호의 친구는 병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계단 턱에 앉은 상호의 어깨를 툭툭 힘주어 두들겼다.

“느는 느을브즈…”

술 취한 상호에게 어지간히 시달렸는지 친구는 이를 악물었다. 병찬이 택시는 필요 없느냐 물었지만 친구는 별로 마시지도 않았다며 거절했다. 친구는 병찬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상호 친구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였다. 병찬은 그간의 고생이 눈에 선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화할 때도 엄청 난리였던데 나중에 상호가 그 친구에게 잘 사과하기를 바란다.

병찬은 벗은 카디건을 한쪽 팔에 걸고 건물 계단에 널브러진 상호를 봤다. 상호는 벌건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대고 딸꾹거렸다.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상호를 피해 구석에 붙어 올라갔다. 병찬은 뻘쭘한 마음에 ‘죄송합니다.’를 연신 말하며 상호의 겨드랑이 밑을 잡고 일으켰다. 상호는 병찬이 이끄는 대로 일어섰다. 둘 사이가 가까워지자 알코올 냄새가 훅 다가왔다. 병찬이 코를 찡긋거렸다. ‘얼마나 마신 거야.’ 이 정도면 소주 한 됫박은 부었을 게 분명하다. 병찬은 상호가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상호는 제 몸을 완전히 병찬에게 맡겼다. 기다란 다리가 열쇠고리처럼 비틀거리고 달랑였다. 훌륭하게 만취한 대학생은 병찬의 부축을 받아 자동차 조수석에 들어갔다. 취객은 해변으로 올라간 해파리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조수석에 늘어졌다. 병찬은 작은 데자뷔를 느꼈다. 어휴. 무거운 성인 남성을 가타부타 차에 태운 병찬은 짧은 한숨을 쉬곤 상호에게 안전밸트를 채웠다. 상호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병찬의 귀에 닿았다. 상호는 아주 꼴아박았는지 잘도 잤다.

비상등이 꺼지고 흰색 SUV가 조용히 도로변을 벗어났다. 병찬은 상호가 자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엑셀을 밟았다. 내비게이터나 라디오는 굳지 켜지 않았다. 준향대 도로는 병찬에게 너무 익숙했다. 상호가 안내음성에 깨지 않고 곤히 재워두고자 했다. 서울 중심부의 대학로와 병찬이 사는 경기도 외곽의 신도시까지 차로 운전하려면 한참 걸린다. 상호가 중간에 깬다면 마시라고 음료 컵에 여명 캔을 두었는데 상호는 내내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찬은 상호가 자는 새에 추위라도 탈까 봐 제 카디건을 상호에게 덮었다. 엉따도 켰다. 따끈하게 달궈진 시트가 기분 좋은지 상호는 입을 짭짭거리며 달게 잤다. 빨간불에 차가 멈출 때마다 상호가 덮은 겉옷이 흘러내릴까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상호는 그동안 작게 코를 골았고 침도 흘렸다. 병찬은 이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풀어진 걸 보는 게 오랜만이라 오히려 반가웠다. 차가 고속도로를 타고 빠르게 달릴 때쯤에 상호는 유리창에 아예 머리를 박았다. ‘되게 잘 자네.’ 병찬은 최대한 조심스레 운전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하자 병찬은 상호를 흔들었다.

“기상호, 일어나 봐.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상호는 끙끙거리며 잠투정을 했다. 어지간히 깊게 잠들었는지 병찬이 아무리 흔들어도 깨지 않았다. 병찬은 차 시트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고개만 돌려 상호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운전했더니 진이 빠져서였다. 조금만 쉬었다가 옮기든지 해야지. 병찬은 술에 취해 홍조가 앉은 상호의 얼굴을 관찰했다.

상호와 둘만 남은 것도, 상호가 조용한 것도 낯설었다. 그만큼 못 보았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상호가 고등학생일 때는 자주 봤었는데. 병찬은 상호의 눈물점을 쿡 찔렀다. 볼이 눌리는 와중에도 상호는 반응 없이 쿨쿨 잘 잤다. 병찬은 상호가 잠들면 한 번씩 눈물점을 찔렀다.

눈물점이 있으면 눈물이 많다는 속설이 있는데. 상호는 그 속설에 설득력을 더하려는지 병찬이 눈물점을 찌르면 상호는 눈꼬리에 찔끔하고 눈물방울을 달았다. 상호의 특징 아닌 특징은 꼭 배를 누르면 ‘알라뷰!’라고 말하는 곰 인형 같아서 귀여웠다. 거절한 뒤로 상호의 눈물점을 찔러보지 않았는데 병찬은 작게 낄낄거리면서 상호의 눈물점을 더듬고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손가락에 닿는 취객의 체온은 적당히 따끈했다. 상호의 몸에서는 소주 냄새가 났지만 그 톡 쏘는 알콜 냄새가 현실감을 주어서 상관없었다.

병찬은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몸을 일으키고 차에서 나왔다. 시동이 꺼진 차 안은 주차장의 냉기가 천천히 침범하기 시작한 탓이다. 초여름인데도 밤은 쌀쌀했다. 병찬은 상호의 목에 카디건을 감아주고 상호를 업었다. 읏샤, 하고 작게 기합 소리를 내며 일어나니 제법 안정적으로 상호를 들 수 있었다. ‘상호 웨이트 빡세게 하나 보네, 무거워졌다.’ 병찬은 무릎으로 차 문을 밀어 닫았다. ‘근데 쟤는 어디서 재우지?’ 병찬은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병찬의 작고 소중한 투룸에는 마땅한 손님방이 없었다. 병찬은 큰마음 먹고 산 퀸사이즈 침대가 두 장정을 잘 버텨주길 바랐다.

상호를 업고 집에 들어온 병찬은 상호의 발을 현관에 두고 잠시 내려놓았다. 병찬이 업고 나는 내내 상호는 병찬의 어깨에 제 턱을 올리고 잤다. 상호의 숨소리가 아직도 병찬의 귓가를 간질이는 착각이 들었다. 병찬은 괜히 귀를 만지작대었다. 병찬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상호의 다리 사이에서 신발을 벗겼다. 상호는 그동안 커억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병찬은 187센치미터의 남자를 어떻게 옮길까 고민했다. 침대방 문은 열려있고 공교롭게도 침대 정리도 안 해서 이불 접을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드라마처럼 공주님 안기를 하고 옮기고 싶은데 술 취한 사람한테 그러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병찬은 인상을 찡그렸다. 상호의 위로 드러누운 병찬은 팔을 제 목에 걸치고 배에 힘을 주었다. 등 뒤로 상호가 딸려 나오자 병찬은 그대로 상호의 허벅지를 잡았다.

“자, 병찬아, 여태 스쿼트사이드스쿼트런지사이드레그리프트 잘만 했잖아. 하나에 흡, 둘에 흐읍이야.”

병찬은 혼잣말로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앞구르기를 하듯 몸을 숙이고 엉덩이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상호의 팔이 병찬의 목 아래에서 달랑거렸다. 한 번에 상호 업기에 성공한 병찬은 터덜터덜 침대방으로 가 상호를 눕혔다. 취객을 보살피는데 진력을 다 쓴 병찬은 씻는 건 고사하고 상호의 옆에 드러누웠다. 병찬은 정 자세로 누워 고개를 돌린 상호를 응시하다가 남는 베개를 가져와 옆으로 눕고 자도록 등에 끼웠다. 상호가 술 마시고 토하는 버릇은 없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상호와 마주 보고 누운 병찬은 소름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불을 덮었다. ‘우리 상호 자다가 형아한테 토하는 거 아니지?’ 병찬은 입 밖으로 내뱉으면 진짜로 이루어질까 봐 말하지 않았다. 이불 아래 상호의 허리를 토닥였다. 병찬은 상호의 체온을 자장가 삼아 그대로 잠들었다.

병찬은 습관처럼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병찬의 옆에 누워있는 상호는 여전히 꿈나라를 허우적댔다. 병찬은 잠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큼큼거리는 기침과 함께 잠기운이 달아났다.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이었다. 상호는 눈두덩이를 찌푸렸다. 꼴을 보니 상호는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일어날 것 같다. 병찬은 상호의 머리통을 긁듯이 쓰다듬었다. 상호의 떡진 머리가 까치집이 되었다. 병찬은 기름져진 제 손을 위로 올린 채 화장실로 갔다. 소리 없이 씻고 나온 병찬은 상호가 놀라지 않게 협탁에 메모를 남겨두었다. 어제는 휴일이고 오늘은 훈련 날이다. 병찬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면 바로 나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병찬햄!!”

훈련과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니 상호가 현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찬이 나가고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푹 잤나 보다. 병찬은 완전히 쫄아있는 상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상호야~ 무릎 상할라.”

병찬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호는 병찬의 눈치를 보았다. 술에 취해서는 어제저녁에 전화해서 꼬장도 부리고 집에 쳐들어와서 (정확히 말하자면 병찬이 데려와서 재운 것이다) 하루종일 남의 집 침대를 점령하고 있었다니. 상호는 병찬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병찬은 딱히 상호라면 그래도 된다고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여놓았기에 상관없었다. 병찬은 상호의 볼을 꼬집으며 짓궂게 말했다.

“미안하면 오늘 저녁은 상호가 사줘.”

“네넵. 당연히 제가 사야죠.”

배달이 올 동안 병찬은 상호에게 숙취해소제를 쥐여주고 못 들은 상호의 사정을 물었다.

“상호야, 그래서 술은 왜 마신 거야?”

“요새 고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아서요.”

“상호 3학년이지?”

“네, 그래서요.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저를 괴롭힌다 아님까.”

3학년이면 병찬도 얼리 드래프트를 가느냐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병찬의 얼리 도전은 무사히 성공했지만 다른 동기나 후배들은 또 달랐다. 고배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고 운 좋게 눈에 띄어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가끔 그 고배가 너무 고통스럽고 지독하리만치 객관적이라 아예 다른 길을 결심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병찬은 상호의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코치님이랑 감독님이 얼리 드래프트 도전해보는 게 좋다고 하시던데 저는 불확실하다고 느껴져서요.”

병찬은 상호가 무조건 성공하리라 여기지 않았다. 코너 3점 슛을 장착한 3&D 포워드. 매력적인 자원이다. 3점 슛은 중요하니까. 다만 지금의 프로 농구 풀에서 상호만 한 슈터 자원이 충분하단 게 그 이유였다. 상호의 무기가 슛뿐인 건 아니지만 드래프트가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구단도 전체 라운드 중에서 1명만 지명할 수도 있고. 아무튼 복잡했다.

“형이 올해 대학농구는 소식을 잘 못 들어서 그런데 너랑 준향대 성적이 어떻게 돼?”

“저는 스타팅으로 거진 경기 시간 30분 가까이 뛰었고 학교는 3등으로 플옵 확정이에요.”

“좋네. 형도 상호가 얼리 도전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드래프트 컴바인 말고도 대학농구 실적도 볼 텐데 형이 보기엔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고 봐.”

상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5일 전이 마지막 경기였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 전지훈련을 끝내고 난 가을에는 플레이오프가 기다리고 있겠지.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배달이 금방 도착되었다는 알림에 병찬은 나가서 배달음식을 가지고 왔다. 상호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었다. 병찬은 상호의 볼에 차가운 음료수를 대었다. 상호가 화들짝 놀랐다.

“일단 먹고 다시 생각해보자.”

상호는 해장국 프랜차이즈 마크가 찍힌 봉투를 보고서야 허기가 도는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고 난 뒤 상호는 정리만 하고 귀가하려 했지만 병찬이 붙잡았다. 저녁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다고. 어차피 내일도 구단에 출근해야 할 텐데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상호는 그래도 혼자 쉴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변명했지만 병찬은 요지부동이었다. 상호는 제 앞을 가로막은 병찬의 고집에 한숨을 쉬었다. 상호의 항복선언이다. 병찬은 상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거실 소파로 데려갔다. 상호가 병찬의 행동에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러면 제가 죄송하다고요.”

“난 상호가 있어서 집이 따뜻하고 좋던데? 그리고 지금 가면 기숙사 통금시간에 딱 걸려. 내일 아침에 내가 태워다줄게.”

두 사람은 소파 위에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병찬은 얼리 드래프트를 준비하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었고 상호는 간간히 휴대폰으로 이를 메모했다. 말하다 보니 병찬은 상호가 수업을 가지 않았단 게 떠올라 학교 성적은 괜찮냐고 물었다. 다행히 전날은 상호의 공강 일이었다. ‘그래서 술을 그렇게 부은 거구만?‘ 병찬은 다른 때에 잘 세우지 않던 계획적인 충동에 상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상호는 몸을 이상하게 비틀었다. 손가락이 닿은 옆구리가 간지러웠나 보다. 상호는 울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상호가 머뭇거리자 병찬이 재촉했다.

“얼리 드래프트 말고도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할게. 무슨 일이길래 그래?”

“햄은 원래 입 무겁잖아요. 아니, 그냥…. 들으면 질려 할까 봐요.”

“형아는 너 이야기 하는 거 안 질리는데.”

“아씨…상냥하게 굴지 말아 달래니까. 햄 이럴 때보면 왜 여친 안 만드는지 궁금해요.”

상호는 고개를 숙이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상호는 저번에 친구들에게 몇 번 넋두리했다가 질린다, 너만 힘드냐 등등 욕을 처먹은 게 있어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상호가 술을 마신 것도 애초에 진로와 대학 이야기를 어디 털어놓지를 못해서였다. 술이라도 마시면 좀 속 아픈 게 나아질까 봐.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상호는 따끔거리는 옆통수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지는 이것이다. 상호는 3학년에, 대학농구 스타팅 선수고, 얼리 드래프트를 고민해봐야 해서 신경 쓸 곳이 많았다. 대학과제만으로도 벅찬데 타팀 선수 분석까지 하려니 상호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상호의 분석력을 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능력이다. 상호는 블랙기업에 들어간 직장인처럼 눈 뜨자마자 일에 뛰어들고 눈 감을 때까지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상호는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숨 가쁘게 달렸다. 그러다가 의문이 상호의 뇌리를 치고 들어갔다. ‘이게 맞아?‘

 

“갑자기 순간 힘이 탁 풀려버렸어요.”

“그럴 때 있지. 너무 바쁘고 힘들면 다 그만두고 싶어지고.”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제가 안 한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병찬은 상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병찬이 보기에도 상호는 번아웃 초기였다. 상호가 몸의 힘을 쭉 빼 소파 위에 널렸다. 병찬은 상호의 손을 잡아줄까 하다가 잡지 못하고 오른쪽 무릎을 감쌌다. ‘그럴 땐 다 끝나고 나서 뭘 하면서 쉴지 리스트를 짜 봐.’ 병찬이 해줄 수 있는 건 속 빈 강정 같은 위로였다. 상호는 그걸로도 충분한지 마른세수하며 기운을 차렸다.

“제 이야기 지루했을 텐데 햄 되게 착하시네요. 저한테 너무 잘 해주시는 거 아닌가.”

상호는 머쓱해 했다. 상호의 친구들도 처음에는 진로 고민을 곧잘 들어줬었지만 그게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니 다들 신물 난 얼굴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상호는 오랜만에 주의 깊게 들어주는 병찬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상호는 병찬에게도 비슷한 고민이 생긴다면 자신이 두 발 벗고 돕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병찬은 하하 웃으면서 으레 지나가듯이 하는 소리로 고맙게 받겠다고 대답했다.

병찬은 상호의 곁에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감상에 빠졌다. 이대로도 괜찮을까.

 

 

병찬은 상호가 드래프트 준비로 바쁠 동안 취미라도 더 만들어볼까 싶어 이런저런 도전을 했다. 전지훈련 탓인가 몸 움직이는 데엔 영 흥미가 가질 않아 공연을 감상하거나 게임기를 사서 플레이했다. 병찬은 상호에게서 의식적으로 멀어지려 했지만 그럴수록 상호와 가까워졌다.

오늘도 그랬다. 병찬은 클래식 공연장에 들어오고 나서야 기시감을 느꼈다. 상호와 비슷한 공연을 본 기억이 나서였다. 그때는 상호가 좋아하는 게임 OST 오케스트라였는데. 병찬도 상호와 같이 그 게임을 한 적이 있었지만 게임팩을 살 정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도 공연을 보는 내내 눈을 반짝이고 ‘저 노래가 햄이랑 제가 깼던 보스 메인테마곡이에요.’ 이라며 속살거리는 게 귀여웠다.

늦은 저녁에, 콘서트홀은 주백색 조명이 따뜻하게 비추었다. 인테리어는 나무로 이루어져 따뜻한 분위기였다. 콘서트홀을 채운 사람들은 제법 맵시 있는 옷차림을 했다. 병찬은 이곳이 어떠한 드라마의 배경 같다고 느꼈다. 자신이 그 장소의 주인공이 아닌 브라운관 너머로 시청하는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린듯한 배경과 인공적인 공간이 의무감이라고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병찬은 내색하지 않고 좌석에 앉아 음악을 즐겼다. 자신을 에워싼 모든 게 싫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 한 편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고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피아노 콘서트는 제법 즐거웠다. 클래식 문외한인 병찬도 알 만큼 유명한 피아노곡이 많았고 중간중간에는 영화 OST 커버도 있었다. 슬그머니 딴생각이 들려는 찰나 귓가에 꽂히는 음악 소리에 병찬은 몸에서 힘을 빠뜨렸다. 느린 템포에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곡조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분명 이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곡의 제목도 가수도 백지다. 안구 뒤가 뜨거워졌다.

콘서트가 끝난 뒤 병찬은 무슨 정신으로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등 뒤에 울리고 나서야 병찬은 자신이 귀가했단 걸 깨달았다. 병찬은 버릇처럼 상호의 인스타로 들어갔다. 드래프트 준비로 바쁜지 마지막 업데이트가 2달 전이었다. 병찬은 휴대폰을 끄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너 여행 잘 다니더라?”

“제 인스타 봤어요?”

“아니. 카톡 프로필 보니까 요란하더만.”

병찬은 아예 새로운 환경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까 싶어 최근 해외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시즌을 앞둬서 아주 길게는 아니고 나흘 정도. 먼 곳을 가기엔 여의치 않아 베트남에 간 게 전부였다. 그곳에서 본 경험들을 인스타에 올리기도 뭣해 병찬은 관광지에 들를 때마다 찍어둔 사진을 매일매일 카톡 프로필을 갈아 끼우다시피 했다. 그걸 민호 형이 실시간으로 보았나 보다. 병찬은 어쩐지 자신의 행동이 초딩 같아져 뒷머리를 긁었다. 민호는 코치가 부르자 코트 바깥으로 나갔다. 병찬은 민호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농구공을 튕겼다.

상호는 잘 훈련하고 있으려나, 오늘은 드래프트 컴바인 당일이다. 자신의 노력을 시험받는 날일 테니 무척이나 긴장될 터였다. 병찬은 상호에게 드래프트 컴바인에 대한 응원만 남겼다. 만나지는 못했다. 상호가 시간이 나면 병찬은 전지훈련을 가야 했고 병찬이 시간이 나면 상호는 학교 시험 기간으로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타이밍만 계속해서 어긋나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10분짜리 짧은 통화만 나누며 안위만 확인했다.

컴바인이 끝나면 일주일 뒤에 드래프트 지명이 시작된다. 병찬으로선 상호의 드래프트 지명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가족과 저녁 약속이 잡힌 차였다. 병찬이 일부러 잡은 것도 있었다. 이제 상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물 밑 강박감이 작용한 탓이었다. 상호를 좋아하지만 놓아줘야 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잖아. 병찬은 충동이 자신을 덮칠 때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되새겼다.

뒤늦게 유튜브 영상으로 드래프트 컴바인을 구경했다. 화면 속 상호는 많이 달라진 듯하면서 대학 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상호는 딱딱하게 굳었으면서도 인터뷰는 야무지게 잘 챙겼다. 병찬은 상호의 인터뷰 장면 중 제일 귀여워 보이는 장면을 캡처했다. 언젠가 상호에게 카톡으로 보내주면서 놀릴 생각이었다. 상호의 드래프트 컴바인 결과도 괜찮았다. 대부분의 기록이 평균보다 높거나 평균치에 들었다. ‘이 정도면 드래프트도 무사히 들어갈 것 같은데?’ 병찬은 축하할 작정으로 미리 선물을 골랐다.

가을바람이 쌀쌀하다. 오랜만의 가족 식사라 병찬은 코트를 입고 구단에 출근하자 구단 형들과 동생들이 어디 누구 만나느냐 호들갑을 떨었다. 병찬은 약속이 있어 꺼냈다고 했다. 병찬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제가 그렇게 안 꾸미고 다녔나, 짧게 물음표를 띄웠다.

훈련과 전술연습이 끝나고, 병찬은 손에 차 열쇠를 쥐었다. 머리도 잘 만져두었고 옷도 흠 잡힌 곳이 없었다. 구단 탈의실을 나오자 팀원들 주위가 어수선했다. 뭔가 작지 않은 일이 있었을 정도의 어수선함이었다. 병찬은 눈썹을 찡그렸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대화를 나누고 있던 구단 동생을 붙잡았다.

“뭐야, 뉴스에 뭐라도 났어?”

“어, 형. 그게 아니라. 드래프트 지명 결과 봤어요?”

“아니?”

구단 동생은 병찬에게 결과표를 보여주었다. 병찬은 결과를 보고 눈을 비볐다. 납득하기 힘든 결과였다. 대부분의 구단이 1라운드만 지명하고 나머지 라운드는 지명을 포기했다. 작년만 해도 구단 당 세 명은 지목했었는데 올해는 반 토막 수준이다. 지명한 선수들도 포워드는 한 명이 전부였다. 병찬은 그 포워드가 상호였길 바랬지만 아니었다. 타 대학 선수였다. 병찬은 손으로 하관을 감쌌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와, 상호 걔는 어떡해요?’, ‘그러니까. 밥이라도 사줘야겠네.’ 구단 동생은 병찬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형, 상호한테 못 들었어요?’, ‘뭐를?’

“기상호 쟤 얼리 준비 때문에 1학기 기말 죽 쒔잖아요. 그거 때문에 2학기 기숙사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되게 고민이던데요.”

“전혀 못 들었어.”

“완전 죽상이던데… 뭐야, 이 형 어디 갔어?”

병찬은 동생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체육관 바깥으로 나갔다. 드래프트도 떨어지고, 2학기 기숙사 신청도 불투명하다면 지금이 가장 심란할 때다. 병찬은 상호가 걱정되었다. 상호는 어른이니 금방 추스르겠지만 병찬은 상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병찬은 냅다 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대기음은 한참 울었다. 병찬이 두 번을 다시 걸고 나서야 전화가 겨우 연결되었다.

“상호야. 너 어디야?”

“저요? 킁. 준향대 근천데요.”

전화 너머로 상호가 코를 훌쩍였다. 감정을 억누른 게 틀림없다. 병찬은 안타까운 마음에 당장 데리러 가겠다며 준향대 앞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상호는 병찬의 말에 당황했지만 병찬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위로받겠냐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한바탕 전화를 끊고 나니 병찬은 아차 하고 약속이 있던 걸 떠올렸다. 약속을 코앞에 두고 깨게 되었다. 병찬은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상호를 외면할 수 없다. 병찬은 전화로 부모님께 약속을 깨게 되어 죄송하다 사과했다.

[괜찮아, 아직 신발도 안 신었어. 엄마랑 오랜만에 데이트한다고 치지. 그런데 누구 때문이야?]

“죄송해요. 친한 동생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

상대의 침묵은 길었다. 병찬은 자신을 불효자라 칭하며 자학했다. 부모님에게 변명하기엔 타당한 이유가 아니다. 병찬은 말하고서도 부모님께 호통을 들을까 조마조마했다. ‘너는 다 큰 어른이 되어가지고…’ 란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병찬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그의 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침묵 뒤에 아버지가 긴 숨을 내뱉었다.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당연하다. 아마 아들의 어이없는 탈주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그 와중에도 병찬의 차는 착실하게 상호가 있을 준향대 쪽으로 향했다. 차가 정지신호에 걸리고 나서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들, 나중에 그 친구 데려와서 같이 밥 먹자.]

“네, 네?”

[우리 아들이 위로 해주겠다고 먼저 달려가는 거 보니까 아주 친한 동생인 거 같은데 아빠랑 엄마는 당연히 어떤 동생인지 궁금해지잖니. 아빠 말 알겠지? 나중에 꼭 데려와.]

“어어, 네. 죄송해요. 예약까지 다 해놓았는데.”

[됐어, 됐어. 정 미안하면 결혼기념일날 큰 거 5장으로 보내.]

병찬은 식은땀을 죽죽 흘리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병찬의 부재를 속 넓게 넘어가 주기로 할 요량이다. 그 속에 있는 의미가 뭔지 병찬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위기를 넘긴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전화가 끊기자 병찬은 운전하느라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병찬은 이미 눈치채어놓고 외면했다. 상호는 정말 친한 동생이고 악재가 겹쳐서 그런 것뿐이라고. 병찬은 신호가 바뀌자마자 엑셀을 밟았다.

 

퇴근 시간대가 겹친 도로는 미친 듯이 막혔다. 병찬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앞차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였고 신호등은 초록 불보다 빨간불이 더 많이 걸렸다. 병찬은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상호가 뭘 하고 있을까 걱정했다. 펑펑 울면서 돌아갔을까, 아니면 혼자서 깡소주를 까고 있을까. 헤까닥 돌아서 딴 사람 만나고 흑화하는 건 아닐까. 상호가 들었다면 학을 떼며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할 상상의 나래에 빠진 병찬은 상호를 찾는다면 바로 집으로 데려갈 결심부터 했다. 병찬은 가끔 상호를 어리다 못해 한참 보살펴야 할 아이로 볼 때가 많았다. 드디어 상호가 있다던 준향대 후문에 도착했다.

병찬은 블루투스 기능으로 상호에게 전화하면서 느릿느릿하게 준향대 후문을 주행했다. 병찬은 조수석 창문을 열어두고 눈가를 찌푸렸다. 차 스피커로 착신음이 나왔다. 상호는 꽤 오랫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병찬의 차가 너무 느리게 이동하자 뒤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병찬은 백미러로 화가 많이 나 있는 운전자를 발견하곤 방향 지시등을 켜고 도롯가에 차를 세웠다. 병찬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지나가는 운전자에게 미안하단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운전자는 병찬의 사과를 무시하고 쌩 지나쳤다.

[햄, 도착…. 도착했어요?]

“응, 상호야. 후문이야.”

길어지는 착신음에 병찬은 끊고 다시 전화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상호가 병찬의 전화를 받았다. 상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병찬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호가 아주 힘든 것 같다.

“어디야?”

[저 세븐일레븐 앞이요. 햄 차 보여요. 그쪽으로 갈게요.]

“천천히 와.”

전화가 끊겼다. 병찬은 자동차 잠금을 풀고 한숨을 푹 쉬었다. 비상등이 켜져 띵띵 거리는 알림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병찬은 매연이 들어오지 못하게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석 문이 열렸다. 상호였다. 정장을 입은 상호는 눈두덩이가 부어있었다. 울었다는 티가 확 났다. 병찬은 말없이 시트에 앉아서 멍 때리는 상호의 어깨를 잡았다. 상호의 타이가 풀어져 있었다. 상호는 바들거리면서 병찬을 바라보았다. 병찬의 연민이 담긴 눈빛에 상호의 막힌 둑이 터졌다. 상호가 헐떡이듯 울었다.

“해, 해앰.”

“상호 괜찮아. 괜찮아.”

“저 우뜩해요. 프로 떨어지고 허어엉- ”

상호가 병찬에게 안겼다. 차 안인데도 어떻게든 병찬을 껴안은 상호는 여태까지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었음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쏟아내었다. 병찬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이때만큼은 상호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다. 상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병찬은 차를 출발하지 않았다. 비상등은 오래도록 깜빡였다.

병찬은 운전하는 내내 한 손으로는 핸들을 쥐고 한 손으로는 상호의 손을 잡았다. 불편할 만도 한데 병찬은 상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상호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훌쩍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고심해서 한 선택과 그 선택을 이루기 위해서 해왔던 고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병찬은 그런 상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병찬도 원하는 농구를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상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순간이 마음 아팠으니까. 병찬은 상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병찬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는데 병찬이 운전하는 곳을 묻지 않았다. 어디든 병찬이 괜찮은 곳으로 데려가 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병찬이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병찬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상호 내리자.”

“햄 기냥..암데나 데려가도 되는디.”

“형이 상호 하루종일 끼고 싶어서 그래.”

상호는 잠깐 고민하다가 병찬의 의견에 수긍했다. 어차피 지금 기분으로 술 마시러 나가봤자 밥상에 머리 박고 오열할 테다.

병찬은 냉장고 문을 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먹을 만한 음식을 사 두지 않아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병찬은 자신의 폰에서 배달 어플을 꺼내 상호에게 건네주었다.

“너 먹고 싶은 거 골라. 형이 쏘는 거니까 빼지 말고. 아니다, 그냥 형이 주문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말해.”

병찬은 또 상호가 눈치를 볼까 봐 상호에게서 휴대폰을 뺏었다. 상호는 단박에 피자랑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병찬은 순식간에 주문했다. 상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마른세수했다. 병찬은 부엌에서 물을 떠 와 상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상호는 물컵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몇 모금 마시지도 않고 커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대로 바닥을 팔 기세의 상호를 빠르게 달래기 위해 병찬은 상호를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상호가 ‘저 쫌만 더 있다가 씻으면 안 돼요?’라고 머뭇거렸지만 상호를 달래본 경험이 아주 많은 병찬으로선 강하게 안 된다고 말했다. 조금 있다 샤워기 소리가 들리자 병찬은 바로 옷방에 가서 잠옷을 꺼내왔다.

“상호~ 화장실 문에 옷 걸어놨으니까 그거 입어.”

“네.”

상호가 대답했다. 물을 끼얹고 나니 정신을 차린듯해 보였다. 병찬은 남몰래 한숨을 쉬고 저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차피 구단에서 씻고 나온 터라 샤워는 필요하지 않았다. 상호가 씻고 나오자 병찬은 제가 앉은 소파 옆을 두드렸다. 상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병찬의 옆에 앉았다. 병찬은 뚱해 보이는 상호를 충동적으로 껴안았다. 상호는 병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병찬이 갑자기 껴안았는데도 상호는 당황하거나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병찬은 스킨쉽이 잦은 편이었고 위로의 의미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상호는 병찬을 마주 껴안았다. 병찬이 상호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칠게 쓰다듬었다.

“저 이제 어떡하죠.”

“....”

“프로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했는데, 떨어져 버려서. 진짜…. 부모님께 죄송해요.”

“상호야, 내년도 있잖아. 내년에 또 해보면 되지.”

“그치만 내년에도 안되면….”

“상호 형 봐.”

병찬이 상호의 어깨를 퍽퍽 쳤다. 상호는 고개만 들어 병찬을 봤다. 병찬은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일정한 리듬이 상호를 토닥였다.

“형 2년이나 유급하고 같은 데 맨날 부상 당했는데 1라 1픽으로 들어갔잖아. 우리 상호는 지금 몇 살이지?”

“21살이요.”

“그치, 상호 21살이지. 빠른 이라 1년 일찍 들어갔는데 지금 신청한 것도 얼리니까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르네. 이 정도면 얼리 소리 들어도 이상할 거 없어.”

“...”

“형 21살 때 상호도 기억하지? 형 그때 아직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농구 다시 시작해보려고 출전시간 채우고…. 아득바득 재활하고…. 대학 못 들어갈까 봐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수술하고 치료한다고 몇천만 원이 깨졌는데 아들이란 사람이 부모님 고생만 시키고. 내가 못난 사람이라 이렇게 대못만 박고 다니는구나 스스로 자책도 많이 했었어.”

“햄 아이에요. 햄은 그때도 멋졌는디.”

“근데 형이 보기엔 상호가 형보다 더 멋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고작 한 번이야. 다시 도전해! 반드시 프로로 들어가! 프로로 와서 형이랑 공놀이 10판이고 100판이고 1000판이고 하자.”

상호는 병찬의 위로에 눈을 조금씩 반짝였다. 이따금 병찬은 상호를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감동을 주었다. 상호는 홀린 듯 병찬의 응원에 힘을 얻었다.

 

 

5. 재도약

띠로롱, 띠로롱.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상호의 폰이었다. 상호는 젖은 머리 위에 수건만 대충 씌운 채 전화를 받았다.

“어, 어무이. 어. 내 인제 잘라꼬. 뭘 서울까지 올라와. 됐다. 인터넷에도 나온다 아이가.”

작년 일이 신경 쓰이는지 상호의 부모는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한 번 더 말했지만 상호는 단호하게 괜찮다고 거절했다. 휴대폰 소리가 컸던 터라 상호가 거실에서 부모님과 실랑이하는 소리가 침실에서 이불을 깔고 있는 병찬에게까지 들렸다.

“KTX 타고 서울까지 올라오고 그럴라면 새벽부터 인나야하잖아. 가도 정신없을끼고. 난제 전화하께. 어, 아부지도. 끊을게.”

상호의 설득이 먹혔는지 전화는 곧 끊어졌다. 상호는 전화를 끄고 나서야 침실에 들어와 병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병찬은 고개를 도리 저으며 괜찮다고 상호를 안심시켰다. 부모라면 응당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작년 첫 드래프트를 실패했었으니까. 상호는 드래프트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본가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상호가 가진 죄책감은 심했었다. 훈련도 쉬고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알바만 내리 할 정도로 상심했던 상호는 그래도 주변의 위로를 받고 다시 도전해보자며 마음을 먹었다. 상호가 회복할 때까지 많은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병찬이었다. ‘날 이 정도로 막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병찬은 다른 마음은 제쳐두고서라도 상호가 프로에서 병찬의 앞에서 주길 바랐다.

올해에는 드래프트 발표 전날 상호가 병찬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과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체육관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는 순전히 병찬의 의견이었다. 작년의 드래프트 실패를 상기시키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병찬은 이번에 체육관에서 드래프트 지명을 구경하기로 했다. 미리 감독님께 허락을 받은 차였다. 상호는 그 정도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며 놀랐지만 병찬은 구태여 작년 드래프트를 언급하지 않고 상호에게 기운 나눠주고 싶어서 그렇다 말했다. 상호는 고마운 나머지 병찬에게 보답하겠단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녔었다.

 

“햄 없었으면 한동안 막막해서 술독에 빠져 살았을 거에요.”

“뭘, 상호 친구들도 많고 준수도 있는데.”

병찬은 상호의 들뜸에 침착하게 답했다. 실제로도 상호가 드래프트에 떨어진 뒤 지상고 동창에게 둘러싸여 힘도 받고 타박도 받았었다. 오히려 지금이 빨랐던 거라고, 너는 빠른년생이기까지 하니 두세 번은 더 놓쳐도 너한테 해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상호는 금방 일어섰다. ‘그래,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부활뿐이야.’ 란 이상한 깨달음도 함께 얻었는지 올 한 해는 평소보다 더 치열하게 지냈다.

결국이라고 해야 할지. 상호는 작년 가을에 2학기 기숙사 신청에서 떨어졌다. 성적을 어지간히 말아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F는 면했다. 출석은 잘 받아둔 덕이었다. 성적표는 본인이 봐도 충격적이었는지 상호는 D 받은 건 처음이었다며 중얼거렸었다. 물론 성적을 여러 번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날린 적이 있는 병찬은 D가 최하점이라고? 라며 의아해했다.

기숙사 신청에서 떨어진 상호를 병찬이 픽업해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병찬이 지내는 집과 상호의 대학교는 대중교통으로 편도 2시간 30분이 걸렸다. 병찬이 상호를 매일매일 카풀해줄 수도 없었다. 상호는 자기 일이니 제가 알아서 해보겠다며 한동안 피시방을 들락날락했다. 상호는 솜씨 좋게도 셰어하우스를 구해 3학년 2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기숙사에 들어갔다. 병찬은 상호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가 딴생각을 그만두었다.

“올해 드래프트 컴바인은 어땠어?”

“작년이랑 비슷했죠. 새로운 얼굴도 있고 보던 사람도 있고. 한 번 해보니까 긴장도 덜 되던데요.”

병찬의 침대 옆에 펼쳐놓은 이부자리 위로 상호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병찬도 상호의 옆에 앉아 어깨 위에 팔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붙었던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대학 때는 같은 팀이라도 학년 차이가 커서 그런지 웬만큼 같이 붙어볼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상호는 아직도 실실거렸다.

“넌 어느 팀으로 가고 싶어?”

“팀요? 저는 햄 있는 금성 라이거즈도 좋고 창현햄 들어갔다던 충주 다이노스도 끌려요.”

“상호 라이거즈로 와, 형아가 잘해줄게.”

병찬은 벽 한쪽에 걸려있는 라이거즈 유니폼을 가리켰다.

“상호는 주황색도 잘 어울리잖아. 형 유니폼 입어볼래?”

상호는 병찬의 유니폼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도리 저었다.

“늦었잖아요. 나중에요.”

병찬은 상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상호는 고개를 숙이며 낄낄 웃었다. 프로로 간 상호의 디펜스는 어떨까, 병찬은 김칫국부터 마셨다. 그만큼 상호는 열심히 준비했고 작년보다 더 높은 실적은 세웠다. 이번에도 지명을 하지 않는다면 10개 구단 전부 눈이 삐었을 테다.

 

 

드래프트 발표날은 오후 3시지만 먼저 가서 대기를 해야 하기에 상호도, 병찬도 평소처럼 일어나서 아점을 먹고 준비하기로 했다. 상호는 자신의 형에게서 정장을 빌려온 터라 꼼꼼하게 셔츠와 재킷을 살폈다. 상호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에게 어지간히 쿠사리를 들은 모양이다.

“얼룩 하나라도 생기면 형이 저를 죽이려고 할걸요. 되게 비싸게 주고 샀다고 저한테 자랑했었거든요.”

병찬은 상호의 얘기를 듣고 기를 받아갈 겸 자신에게 빌려 가면 되지 않겠냐고 묻자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형한테 신세 진 것이 한둘이 아닌데 옷까지 빌려 가면 자신은 무지렁이라며 거절했다. 병찬은 아쉬웠다. 상호의 형은 상호보다 키가 작았다. 그리고 운동하던 사람도 아닌 터라 사이즈마저 작았다. 드레스 셔츠와 바지는 어찌저찌 상호의 것으로 입었지만 재킷은 아니었다. 상호의 등이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재킷 등 재봉선이 시한폭탄처럼 터질락 말락 했다. 병찬은 결국 긴가민가하며 상호에게 물었다.

“형님분 블레이저 언제 사셨대?”

“첫 취뽀하고 샀댔으니까 한…. 3년 됐을걸요?”

“형 꺼 입고 가. 터지겠다. 재킷이 죽여달라고 빌고 있어…”

“네? 괜찮은데,”

상호가 거울 앞에서 등을 보려고 몸을 돌린 순간 부우욱! 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상호는 숨을 들이켰다. 100% 이건 찢어졌다. 상호는 놀라 꾸물거리며 재킷을 벗었다. 상호 형의 정장 재킷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사망했다. 시원하게 구멍 난 등짝을 살펴본 상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당장 세탁소에 맡겨도 살아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병찬은 옷장에서 제 검은색 정장 재킷을 꺼냈다. 상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병찬에게 재킷을 받아 입었다. 사이즈는 잘 맞았다. 키도 비슷하고 둘 다 체격도 비슷했다. 병찬은 상호의 옷 태를 점검하면서도 고등학생 때와 다른 감상을 남겼다. 이 정도 핏이면 상호는 조형고 교복도 잘 맞을 것 같다. 병찬은 상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상호는 겸연쩍은 얼굴로 목에 타이를 둘렀다.

병찬은 상호의 옆에서 그를 놀렸다. ‘형이 없었으면….’부터 ‘형이 있으니까 다행이지?’로 끝나는 형아가 있어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대니 상호는 기가 빠진 얼굴로 나중에 기프티콘을 드리겠다 대답하고서야 끝났다. 병찬은 상호가 타이를 잘 매었는지 셔츠 깃과 넥타이 매듭을 매만졌다. 마주 보며 선 두 사람의 눈이 딱 부딪쳤다. 병찬은 괜히 분위기가 바뀔까 봐 상호의 옆으로 발을 옮겼다. 전신 거울에 두 사람이 꽉 찼다. 병찬은 상호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기프티콘 말고. 나중에 같이 놀자. 바빠서 여태 자주 못 만났잖아.”

“그르까요? 저 이번 방학 때는 본가 안 내려가고 서울 있을 건데.”

상호도 끌리는지 눈을 반짝였다. 병찬은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췄다. ‘아이고, 애써 세팅한 머리 망가뜨리면 안 되지.’ 병찬은 차 키를 챙겼다.

“상호 뭐 두고 나온 거 없지?”

“네, 햄은요?”

“나도 없어.”

두 사람이 오피스텔을 나오자 문이 닫혔다. 문이 잠기는 신호음을 뒤로 한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드래프트 발표가 있을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상호는 더 이상 차를 타면 안전벨트를 잊지 않았다. 병찬은 상호가 맨 벨트를 곁눈질했다. 상호는 발표가 긴장되는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병찬은 상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운전할 때마다 곧잘 듣던 사연 프로그램이 나왔다. 두 패널이 웃긴 사연을 연기했다. 긴장했더라도 귀를 막지 않았는지 상호는 사연을 듣다가도 피식피식 웃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체육관 앞 주차장에서 주차를 끝내고 나오자 드래프트 발표를 기다리는 참가자와 발표를 관람하는 방문객들, 협회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안에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치여 정신없을 테다. 병찬은 상호를 불렀다. ‘상호야.’

“긴장되지.”

“네, 엄청요. 두 번째인데도요.”

“크크, 그래도 상호 리그 성적도 좋잖아. 형이 보기엔 넌 될 거야.”

상호는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병찬은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저 먼저 갈게요.”

상호는 병찬의 응원을 받으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병찬은 상호의 등 뒤를 보면서도 언제쯤 상호와 매치업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다. 신인으로 들어간 만큼 실제로 투입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간은 쏜살같은 법이다. 병찬은 체육관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먼저 들렀다. 사실 상호보다 병찬이 더 긴장되었다. 중요한 발표는 당사자보다 더 떨릴 때가 있었다. 병찬이 딱 그 꼴이었다. 꼴에 형이라고 상호의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병찬은 긴장한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이란 증상은 다 갖고 있었다. 전날 밤에는 뜬눈으로 지새우기, ‘햄 잠은 언제 잘 거예요?’, ‘어어, 자야지. 오늘 늦잠을 자서 그런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형이 식단 중이잖아. 이번에 감량하려고.’ 운전 중에는 다리 떨기, 이건 상호가 앞을 보느라 병찬이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경보로 달려온 병찬은 편의점에 들러 긴장을 풀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뜨끈하게 데워진 두유를 샀다. 그 자리에서 단번에 마신 건 덤이다. 병찬은 심호흡 한 번 하고 입술에 묻은 두유를 닦고 나서야 상호 앞에서 보인 모습 그래도 체육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체육관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관중석에는 선수의 지인이나 농구팬이, 코트에는 협회 스태프가 카메라를 세팅하고 이리저리 안내했다. 병찬은 자신의 드래프트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힘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다. 병찬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갈색 머리통을 발견했다. 상호다. 병찬은 상호의 머리통을 보고 씩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멀리서 보는 건데도 귀엽다.

 

상호의 머리통을 보니 상호와 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회상되었다. 병찬은 3학년에 얼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신입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들어오면 들어온 거지. 나랑 같이 뛸 가능성도 없을 테고. 병찬은 신입생 환영회도 얼굴만 잠깐 비추고 나갔다. 상호는 그사이에 병찬을 알아보았고, 아니 애초에 상호가 미리 아는 상태로 참가한 셈이지만. 병찬과 대화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았지만 아무래도 훈련 중에는 따로 말을 걸 여유가 없었다. 1학년과 3학년은 훈련 프로그램이 달랐다. 병찬이 체육관에서 드리블을 연습하고 있으면 상호는 체단실에서 트래드밀을 뛰어야 했다. 공간부터 분리된 채였다. 그 상황에서 상호가 할 수 있던 건 그거였다. 실수인 척 3학년 수업에 따라 들어가기.

병찬은 아직도 웃겼다. 강의실은 넓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혼자 앉기를 선호했다. 병찬도 넓은 자리를 좋아해 2인용 책상을 혼자 쓰고 있었다. 강의가 시작하기 딱 1분 전에 누군가 들어오더니 병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옆을 보니 상호였고 병찬이 놀라서 말했다.

“어? 상호.”

“병.찬.햄. 안.녕.하.세.요.”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일부러 들어와 놓고 우연인 체하는 게 웃겼다. 병찬은 모르는 척 상호에게 물었다.

“큽, 여기 3학년 강의인데”

“아.하. 그.렇.구.나. 나.가.야.겠.네.요.”

“강의 시작한다~ 안 온 학생 없지요? 김가영, ”

상호가 덜그럭거리며 나가기도 전에 교수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놓친 상호는 백팩을 끌어안고 굳었다. 병찬은 상호에게 이렇게 된 거 한 시간만 듣다 가라며 전공서를 둘 사이에 두었다. 상호는 그제야 가방을 바닥에 두었다. 교수는 출석을 다 부르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병찬은 볼펜으로 전공서 여백에다가 낙서했다.

 

‘형아보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 들어왔어?’

 

상호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병찬이 은근히 쳐다보다 입술을 꾹 닫고 자신의 수작을 인정했다. 병찬은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따로 연락하지.’

상호가 병찬에게서 볼펜을 가져다 그 밑에다 적었다.

‘연락하려니까 조금 그래서요.’

‘뭐가?’

‘입시 때문에 못 한 지 됐고. 어색하잖아요.’

‘만나고 싶어서 강의실까지 따라온 건 안 어색하고?’

상호가 소리 없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병찬은 필담이 없어도 상호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았다. ‘그러게요.’

상호의 고3 입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도 1, 2학년 때는 여유가 있어서 연락도 자주 하고 서울로 올라오면 재워주기도 했었는데 말이지. 병찬은 근 1년 만에 친밀도가 리셋된 상호에게 괘씸함을 느껴야 하는지 신경 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고민은 빠르게 결론이 났다. 못 만나서 어색하다면 더 이상 안 어색하게 만들면 되지!

‘그러면.’

병찬은 메모를 하다가 점을 찍었다. 어떻게 해야 얘를 좀 더 오래 붙잡을 수 있을까. 상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숨소리도 조용히 했다.

‘수업 끝나고 형이랑 학내 카페 가자. 커피 사줄게.’

병찬의 눈치를 보던 상호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잘 연락하다가 갑자기 휙 멀어지고 다시 훅 가까워지고. 롤러코스터처럼.

그럼에도 병찬은 상호와 아주 끊겨버릴 인연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단 직감이다.

 

“2라운드 2순위 선수 지명이 있겠습니다. 광주 스파키티 감독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희 광주 스파키티는 준향대학교 포워드, 기상호 선수를 지명하겠습니다.”

병찬이 회상에 빠져있을 동안 상호가 지명되었다. 병찬은 놀랐다. 단상 위로 올라가는 상호의 옆모습을 보고 나서야 정말로 상호가 프로가 된 걸 실감했다. 병찬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상호가 청록색 유니폼을 입는 걸 찍었다. 깨진 화질 넘어서도 상호가 울먹거리는 게 선명하다. 진행자가 상호의 이력을 나열했다. 벅찼다.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병찬은 제가 다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상호는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부모님과 지상고 감독님, 팀원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감사하다는 소감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저를 계속 지지해준 병찬 형께도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게 동생의 참맛인가. 병찬은 코를 훌쩍였다. 팀은 다르지만 같은 프로가 되었으니까. 상호의 얼굴이 환했다. 병찬은 상호가 단상에 내려가고 나서도 여운에 잠겨 종료 녹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아기상호 햄두 왔으면 좋았을텐디ㅜㅠ 오후 7:16

오후 7:16 아이고~ 형이 일이 있어서 상호 축하를 못하네.

오후 7:16 둘이서 보면 되지.

아기상호 그렇지만요. 오후 7:17

아기상호 애들도 형 얼굴 보고싶다고 난리에요. 오후 7:17

 

상호는 드래프트 성공 기념으로 저와 같이 드래프트에 붙은 동기들, 축하하러 온 선후배들과 술자리에 와 있었다. 병찬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었지만 곧 있으면 열릴 새 시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본기 연습이 더 필요했다. 한창 훈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갓길, 병찬은 시동만 켜 놓은 차 안에서 휴대폰만 붙잡고 상호와 톡을 이어갔다. 카톡을 한참 동안 하다가 뒤늦게 퇴근하는 코치에게 걸렸다. 코치는 병찬에게 요즘 연애하냐는 짓궂은 소리를 했다. 병찬은 친한 동생이라고 해명할 수 없어 하하, 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코치는 늑장 부리지 말고 빨리 집에 가라며 대로변으로 사라졌다. 병찬은 휴대폰을 홀더에 놓고 기어를 돌렸다. 올해 새 시즌 시작하고, 내년에는 또 재계약이 있다. 병찬은 국가대표를 노리고 있었다.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6. 여파

금성. hey! 금성. hey! 라이거즈! 응원가가 경기장을 채웠다. 새로운 시즌이다. 시즌의 개막은 병찬이 몸담은 구단인 금성 라이거즈의 홈구장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충주 다이노스. 병찬은 미묘한 이상을 느꼈다. 아주 작은 균열 같은. 일상적인 일상인데, 그 단어의 나열마저 이상하고 당사자만이 이상을 감지하는. 병찬은 농구공을 제자리에서 튕기고 쏘아 올렸다. 손맛이 이상하다. 무릎은 괜찮은데?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데 몸과 감각이 조금씩 다른 기분. 병찬은 이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 되었다. 경기 중 쏘았던 노마크 3점 슛이 빗나가고 나서야 병찬은 깨달았다.

 

이거, 슬럼프다.

첫날 경기를 죽 쑤게 되었다. 병찬은 스타팅으로 들어간 지 10분 만에 교체당했다. 몸 상태를 주로 봐주던 코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무슨 이상 있어?”

“아뇨. 근데, 이상해요.”

병찬은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라이거즈 선수들 사이에는 괴담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구단에 입단한 지 4년이 되면 무조건 슬럼프에 걸린다. 병찬도 처음 들었을 때는 ‘에이, 그런 괴담도 있어요?’ 하고 웃어넘겼지만 실제로 겪어버리니 차마 웃을 수 없게 되었다.

경기는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스포츠 기자는 패배의 원인을 팀의 리바운드 능력 저조와 에이스 포가 박병찬의 컨디션 난조라고 단정 지었다. 병찬은 차라리 컨디션 난조라 여기고 싶었다. 컨디션 난조였으면 물리치료든 휴식이든 뭐라도 해서 몸 상태를 돌릴 수 있으니까. 슬럼프는 그게 안 된다. 병찬으로선 처음 겪는 슬럼프였다. 고등학생 때는 무릎 때문에 자주 쉬었으니 슬럼프를 겪을 겨를이 없었고 대학 시절에는 상승세만 미친 듯이 탔으니까. 그래, 병찬은 프로가 되고 나서야 슬럼프를 처음 겪었다. 같은 구단의 팀원들이 이를 듣는다면 매우 빡쳐할 것이다. 일반적인 인물이라면 앳저녁에 슬럼프를 겪어보았을 테니까.

병찬은 코치와 감독의 조언에 따라 연습을 반복했다. 슬럼프가 최대한 빨리 사라질 수 있도록. 그러나 병찬의 바람과는 달리 슬럼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경기를 거칠수록 성적은 점점 바닥을 뛰기 시작했고 구단 감독의 한숨도 늘어났다. 그만큼 병찬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병찬의 재계약이 내년이다. 빠르게 탈출하지 못한다면 계약에 치명적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른 구단에 이적할 때도 악영향이 걸릴지도 모른다. 눈앞이 안개로 가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병찬은 골대 앞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체육관 문이 열렸다. 늦은 시간에 방문한 사람이 누군지 병찬은 고개를 돌렸다. 사복을 입은 민호 형이었다. 구단 형은 체육관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병찬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질색했다. 체육관 한쪽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또 코트로 이어지는 복도는 어두웠다. 빛 하나에만 의지한 채 시커먼 슈팅 져지를 입고 연습하는 180 후반의 남자는 어느 누가 보아도 공포스런 광경이다.

“아오 씨, 귀신인 줄 알았네!”

“형 돌아왔네요?”

“돌아왔네요는 무슨, 에어팟 찾으러 왔다. 다시 집 갈꺼야.”

민호 형은 라커룸으로 쏠랑 갈라졌다. 병찬은 다시 슈팅에 집중했다. 골대에 볼은 징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림에 맞고, 백보드에 맞고, 아예 벗어나고. 병찬은 막막한 기분이 들어 허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다시 발소리가 들린다. 구단 형은 밤인데도 부쩍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경량 패딩을 단단히 여몄다. 어깨가 솟아오른 형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 병찬을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데자뷔가 느껴졌다. 결국 동생을 무시하고 갈 수 없었던 그로서 고민을 물어보았다.

“야, …슬럼프 때문에 그러냐.”

“네, 뭐. 하필이면 시즌 중에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너무 쳐지지 마라. 금방 떨쳐낼 수 있겠지.”

“에이. 형도 제가 왜 그러는지 아시면서.”

병찬은 여유로운 척 너스레를 떨었다. 괜히 걱정 끼치기도 싫었고 또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병찬은 공을 튕겼다. 텅 빈 체육관에서 텅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공허하고 친숙하다. 민호는 병찬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 갔다.

“무리하지 말고. 이틀 뒤에 또 경기니까 몸 관리나 잘해 이 자식아.”

병찬은 구단 형에게 조심히 들어가란 인사를 한 뒤 다시 슛 자세를 취했다. 병찬은 조금이라도 더 던져볼 생각이다.

 

 

RD! RD! 위 아 챔피언 화성 RD! 광주 스파키티의 첫 경기는 원정이다. 상호는 원정 경기장의 응원가에 기가 눌렸다. 프로로 경기에 임하는 건 처음이다. 감독은 상호를 후반에 투입 시켰다. 체력적으로 지쳐있을 상대 팀 선수를 효율적으로 압박시키기 위해서였다. 원정팀 응원석에는 스파키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유니폼을 흔들고 있었다. 상호는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상대 팀 에이스 앞에 섰다. 이왕의 첫 투입. 전력으로 막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상호의 눈이 빛났다.

병찬은 모니터 속 상호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하필 경기 날이 겹쳐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재방송은 남아있다. 병찬은 선수 분석이라고 핑계를 대었지만 솔직히 상호의 활동이 궁금했다. 곁에서 고생한 걸 다 보았으니 그런 걸까. 병찬은 경기 내내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패스를 받아 슛을 날리는 상호의 폼을 응시했다. 상호의 슛 대부분이 튕겨 나갔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패스는 정확하고 디펜스도 철벽이었으니까. 상호의 슛 분량은 크지 않았다. 워낙 팀원들 슛이 좋았기 때문이다. 3쿼터 막바지에 다다르자 스파키티가 역전을 점했다. 방송인데도 원정팀의 응원이 스피커를 뚫는 착각이 들었다.

“2쿼터는 64 대 65로 광주 스파키티가 화성 RD를 역전했습니다! 이야, 경기가 점점 치열해지는군요. 저희는 신인 기상호 선수의 인터뷰를 보여드리고 3쿼터가 시작되면 돌아오겠습니다. 텔레스포였습니다.”

병찬은 건너뛰려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병찬이 머뭇거리는 새에 화면은 빠르게 바뀌었다. 상호가 입은 청록색 슈팅 저지가 쨍했다. 상호와는 아주 안 어울렸다. 상호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인터뷰 탓에 방송용 카메라를 보고 긴장한 상호의 표정과 어우러져 어디 배탈 난 사람 같았다. 상호의 손은 마이크를 꽉 쥐고 있었다. 인터뷰어가 상호에게 마음가짐을 물었다.

“첫 경기인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감독님도, 구단 형들도 잘 대해주셔서 금방 적응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저를 응원해주신 분들께 좋은 경기로 보답하고 싶어요.”

상호는 긴장했으면서 해야 할 말은 조리 있게 잘 말했다. 병찬의 입단 시절이 추억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 한쪽이 뜨끈해졌다. 상호는 마지막으로 손가락 하트를 날리며 자신의 팀을 응원했다.

“광주 스파키티 아가냥이들도 즐겁게 관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파키티 파이팅!”

상호의 인터뷰가 끝나자 바로 시간을 넘겼다. 3쿼터에도 상호가 나와서 디펜스를 했다. 병찬은 상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상호의 손끝을 따라갈수록 병찬의 속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회색 철사가 수세미처럼 엉켜서 병찬의 속을 마구 긁어댔다. ‘상호 잘하네?’ 늘 놀라움을 담았던, 기특함과 뿌듯함이 먼저였던 이 말이 어느 순간 짜증으로 뒤바뀌었다. 경기 종료를 5초 남기고 만 시점, 병찬은 반사적으로 노트북 모니터를 덮었다. 병찬은 마른세수를 했다.

 

오후 9:02 상호 활동 잘 보고 있어. 경기 멋지더라.

아기상호 햄이야말로 빠른 거 여전한데요. 오후 9:40

오후 9:42 ㅎㅎㅎㅎ 그래도 많이 부족한데.

 

병찬은 목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 대신 카톡으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상호는 병찬을 걱정했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호는 카톡을 좀 더 하고 싶어 했지만 병찬은 이를 무시했다. 괜히 상호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시즌 중이라 상호도 병찬에게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병찬의 짧은 연락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혹은 이번 주에 금성 라이거즈와 경기가 있으니까 굳이 길게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병찬은 입 안쪽 살을 씹었다. 형으로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주기 싫으니까, 입은 꾹 다물고 경기에 임해야겠다.

 

아기상호 형이랑 경기 기대하고 있을게요. 오후 9:42 1

 

상호의 카톡은 일부러 읽지 않고 창을 닫았다. 병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기상호가 부럽다.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난다. 병찬은 자신이 옹졸해졌음을 깊이 자각했다. 동생이 잘 나간다고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분노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 어떡하지? 상호랑 통화도 못 하겠다.’ 상호라면 목소리만으로도 병찬이 어떤 심정인지 금방 눈치챌 테니까. 병찬은 상호에게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병찬은 전혀 모르는 종류의 의무감이다. 이를테면, 상호에게는 멋진 형이고 존경받을 선배여야 한다는. 좋은 선배는 후배에게 질투하면 안 돼. 병찬은 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슬럼프가 사람을 망치고 있어. 병찬은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호에게 멋진 형이 되기 위해 잠자리에 들기로 결정했다.

 

 

금성 라이거즈와 광주 스파키티의 경기는 스파키티의 홈구장에서 시작되었다. 병찬은 아주 꼼꼼하게 스트레칭했다. 건너편의 상호는 사이클을 타고 있었다. 경기 직전의 긴장감이 체육관을 감돌았다. 구단 팀원들이 병찬의 어깨를 두들겼다. 병찬은 격려를 받으며 농구공을 만지작댔다. 최소한 슛 감이라도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돌파는 그럭저럭 잘하고 있어서 스타팅에서 밀려 나온 적은 없었다. 감독은 병찬에게 슛을 머뭇거리지 말라 주문했다. 병찬은 잘 안 되더라도 자신감을 잃지 말자며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슛이 없다고 포인트 가드 박병찬이 쓸모없는 건 아니다. 돌파도, 패스도 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오자 체육관에 불이 모두 꺼지고 시끌시끌한 응원가가 울렸다. 사람들은 스타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제 시작이다. 병찬은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지고 머리를 차갑게 굴렸다.

라이거즈와 스파키티는 한쪽이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슛을 넣어도 돌파를 뚫리고 디펜스에 성공해도 림이 공을 뱉는다. 사람들의 탄식과 응원과 견제가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상호는 경기 내내 코트 인과 코트 아웃을 반복했다. 스파키티는 상호를 식스맨 포지션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병찬은 스타팅이지만 슬럼프와 체력 관리를 위해 간간히 교체를 반복했다. 두 사람의 매치업은 3쿼터가 넘어갈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4쿼터가 되었다. 경기가 끝나기까지 3분이 조금 안 남은 시점. 스파키티 86점, 라이거즈 88점. 병찬의 후반에 들어가고 나서 병찬의 돌파로 계속 점수를 내어주게 된 스파키티 감독은 기상호의 투입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상호가 코트로 들어가자 응원곡이 나왔다. 기타 리프 소리가 지잉 울렸다. 나무 바닥이 진동했다.

 

Here we are now, (기상호!) entertain us (기상호!) I feel stupid (기상호!) and contagious (기상호!)

 

코트로 나온 상호가 병찬의 앞에 섰다. 병찬은 양손으로 공을 잡고 상호를 경계했다. 상호도 몸을 숙이고 병찬을 디펜스하기 시작했다. 병찬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상호 많이 컸네?”

“햄만큼은 아니지만요.”

상호는 트래시 토킹을 자주 거는 편이었고 병찬은 트래시 토킹에 대한 먹금을 잘하는 편이었다. 병찬의 앞에 선 상호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트래시 토킹이 먹히지 않으리란 걸 뻔히 알고있었다. 그럴 바에야 디펜스에 치중하는 게 더 이득이다. 병찬이 빠르게 발을 굴리자 상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일대일은 치열했다. 그리고 상호는 놀랍도록 병찬의 득점을 잘 틀어막았다. 병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호가 들어가고 2분간 라이거즈는 스파키티에게 공격 몇 점을 허용해버렸다. 1점 차로 스파키티가 이겨가고 있는 상황이다.

라이거즈의 감독은 남은 경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타임아웃을 불렀다. 감독이 작전을 설명했다. 1 옵션은 센터인 민호 형의 3점 슛, 2 옵션은 포워드와 가드의 투맨 게임, 3 옵션은 가드의 3점 슛. 감독은 계속해서 자신감을 잃지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슛을 쏘기를 종용했다.

“쏴. 포기하지만 마! 일단 쏘고 생각해! 알았지. 앞에 컨테스트 있다고 못 쏘는 거 아니잖아!”

응원가와 치어리딩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감독의 지시는 정확하게 들렸다. 병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한다고 달리 해결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타임아웃이 끝나자 경기장 중앙에서 응원하던 치어리더와 마스코트가 코트 바깥으로 돌아갔다. 코트에는 상호도 있다. 상호는 스파키티 감독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병찬의 앞에 섰다. 공격권은 스파키티에게 있었다. 라이거즈의 컨테스트는 효과가 있었는지 샷 클락을 모두 소모하고도 슛을 빗나가게 했다.

남은 시간은 35초. 민호 형이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바로 병찬에게 볼을 던졌다. 공을 잡은 병찬은 지공으로 체력 안배를 해가며 코트를 넘어왔다. 어차피 슛이 빗나가자마자 스파키티가 코트를 먼저 넘어갔기 때문에 병찬의 돌파는 쓸 수 없었다.

사실상 마지막 공격이다. 스파키티 94점, 라이거즈 93점.

1 옵션은 스파키티 센터가 디나이를 걸었다.

2 옵션은 디펜스가 빡셌다. 자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병찬이 할 수 있는 옵션은 결국 하나였다.

 

3점 슛.

 

상호는 새깅하고 있다. 병찬의 돌파를 의식한 건지 슬럼프를 의식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병찬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원 드리블, 스텝 백, 점프! 공이 호선을 그렸다. 라이거즈 팬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병찬은 공이 손을 떠나고 나서 패배를 직감했다. ‘제기랄!’

공이 림을 돌다가 나왔다. 인 앤 아웃으로 슛이 불발되자 라이거즈 팬이 탄식했다. 미친 듯이 아까웠다. 튕겨 나온 공을 팀원들이 붙잡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다. 리바운드 경합이 치열하다. 공은 몇 번이고 허공으로 튀어 오르다가 라이거즈가 잡았다. 남은 시간은 8초.

스파키티의 패배다. 볼을 잡은 상호가 드리블하며 8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버저가 울리지 않아도 승패가 확실해지자 감독도, 선수들도 악수했다. 병찬에겐 가슴 아픈 패배다. 병찬은 억지로 웃으며 상호의 손을 잡았다.

“우승 축하한다. 여기서 슛이 빗나갈 줄이야.”

“제 컨테스트가 보통이 아니긴 하죠. 햄도 만만찮았어요.”

상호는 땀에 푹 절었으면서 후련하게 웃었다. 괜찮은 척하는 병찬을 보고 잠깐 고민한 상호는 병찬을 살짝 껴안았다. 유니폼 너머로 뜨끈한 상호의 체온이 닿았다. 병찬은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홈 경기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경기가 끝났으니 퇴장할 시간이다.

병찬은 쓰린 속을 애써 숨겼다. 상호는 라이거즈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나가는 병찬의 등을 응시했다. 감독은 병찬의 슛 실패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하고 가만 다독였다. 병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후로도 박병찬은 시즌 내내 슬럼프에서 벗어나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몇 번은 연패를 하고 몇 번은 다시 승리를 거머쥐고. 병찬은 스포츠지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과 그 옆에 붙은 슬럼프라는 단어를 무시했다. 사람들의 말에 둘러싸이면 될 일도 안 되게 된다. 병찬은 KBL 홈페이지 들어가기를 그만두고 필요할 때가 아니면 경기 영상 보기도 자제했다.

간간히 상호의 성적이 매우 좋다는 희소식이 들려오면 병찬은 가시처럼 돋은 질투를 하나하나 꺾었다. 종종 병찬은 질투와 슬럼프를 종이 쓰레기처럼 꽁꽁 묶어서 던져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기분이 나아졌다.

병찬의 슬럼프는 터널이다. 빛 한 점 없고 통과하는 내내 새하얀 점이 언젠가는 햇살처럼 자신을 비출 거라는 희망에 의지해야 한다. 병찬을 괴롭히고 있는 건 생애 처음으로 겪은 벽의 존재고 이를 느긋하게 넘어갈 수 없는 시간의 압박이다. 또 그 터널에는 병찬을 바람처럼 추월해버리는 것들이 있었다. 후배의 상승세, 타 구단 라이벌의 준수한 성적, 말로만 듣던 잘하는 선배의 상무 복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틀어놓은 액션 영화에서 폭탄이 쾅쾅 터져도 그에 비례해서 답답한 감각이 커졌다. 그래도 병찬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지지해주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힘을 받았다. 아슬아슬한 저울처럼. 병찬은 반드시 그 저울에 부정적인 모든 걸 빼버리겠다 다짐했다.

시즌이 끝났다. 병찬의 성적은 처참했다. 결국이라 말하기도 뭣하지만. 병찬은 마지막 기회로 다음 시즌을 꼽았다. 다음 시즌이 끝나면 재계약이든 이적이든 FA시장에 나와야 한다. 병찬은 좀 더 잘하고 싶었다. 시즌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금성 라이거즈의 4년 슬럼프 징크스를 조사했다. 병찬이 라이거즈에 오래 몸담았을 선배들을 찾아 물어봤다.

 

소속 8년 차 구단 형인 민호 형의 경우.

“난 중간에 상무 뛰다 왔다. 아니 무슨 징크스가 군대에서도 지X이냐. 입대 첫해에 4년 징크스 걸려서 뒤지는 줄 알았잖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병찬은 면제다.

 

소속 6년 차, 외국인 귀화 선수의 경우.

“well…. 중간에 이적했는데도 징크스가 남아있던데. 너네 말하던 데로 굿하고 무당 찾아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병찬은 무당이나 종교를 믿지 않았다. 패스.

 

한때 5년 넘게 소속 선수로 뛰었던 감독님의 경우.

“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거 20년 묵은 징크스야! 휴식기 동안 재충전하고 무릎 관리 잘하고. 하다 보면 금방 사라진다.”

 

병찬은 은은하게 흐린 눈으로 유산소를 했다. 팀원들과 감독님 말대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몸 관리하면서 지나가길 빌어야겠다. 무릎도 괜찮은지 검사해보고.

 

 

시즌이 끝나면 못 보았던 사람들끼리 모여서 약속을 가지거나 여행을 간다. 병찬은 일부러 상호와 약속을 피했다. 상호가 전화라도 하면 다른 일을 하느라 듣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카톡은 일부러 하루 이틀 늦게 읽고. 시간 있냐고 하면 선사과 후거절. 아마 상호로선 갑갑할 것이다. 병찬은 상호에게 미안했다. 자신의 복잡한 감정 때문에 괜히 걱정을 끼쳐버렸으니까. 병찬은 물리치료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일정하게 울리니 안정감이 들었다. 정기검사에서 무릎에 이상은 없었지만 괜히 시큰한 느낌이 들어 병찬은 간단하게 처치를 받고 가기로 했다. 커튼 너머 옆 침상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왔나 보다. 병찬은 주머니에서 에어팟을 꺼내 귀에 꽂았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치료 끝났습니다~”

물리치료사가 커튼을 걷고 들어와서 적외선 기기를 껐다. 병찬은 부스스한 얼굴로 츄리닝 바지를 내렸다. 건너편 사람도 치료가 끝났는지 치료사가 처치하고 있었다. 병찬이 가방을 챙기고 나오자 상대가 ‘어?’ 하고 소리를 냈다. 익숙한 저음에 병찬은 눈을 뜨고 상대를 보았다. 상호였다.

“상호?”

“병찬햄?”

뜻밖의 만남이다. 광주에 있을 사람이 서울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고향이 부산인 상호가. 병찬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서울엔 왜,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어디 다쳤어?”

상호가 머쓱한 얼굴로 병찬을 진정시켰다.

“아이 그게 아이라요. 예전에 다친 데가 시큰해서 잠깐 들렸어요.”

상호는 대학 시절 발목을 접질린 적이 있었다. 꽤 심한 염좌였는데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말썽을 부렸다. 조용한 물리 치료실이 소란스러워지자 복도를 지나가던 치료사가 두 사람을 째려봤다. 그제서야 장소를 상기한 두 사람이 고개를 꾸벅이며 치료실을 나왔다. 병찬은 마주쳤는데 바로 헤어질 수 없어 병원 카페로 향했다.

“근데 서울은 어쩐 일이야?”

“남은 학기 다니려고 왔죠. 스파키티 입단하자마자 휴학 걸고 바로 광주 갔잖아요.”

“아, 그렇지. 4학년 2학기는 할만해?”

“네, 막 학기라고 수업도 적고 설렁설렁 다녀도 돼서 편하네요.”

건물 위층에 있는 라운지 카페에는 사람이 적었다. 두 사람은 제법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4월 초의 봄이 새파란 하늘 채웠다. 지금 중간고사 기간 아니냐고 병찬이 묻자 상오는 일부러 과제 대체 강의로 수강했다며 시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으시대었다. 두 사람은 그간 못다 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정확히는 병찬이 피한 안부였다. 병찬은 상호에 대한 질투를 떨쳐내지 못했고 슬럼프도 아직 남아있었다. 상호도 이 마음을 알고 있는지 오랜만에 본 것과는 달리 조용했다. 병찬은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상호에게는 늘 미안한 짓만 한다.

둘 다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부러 농구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여행이나 가족 일 따위를 둘러대었다. 병찬은 상호의 배려가 뭇내 고마우면서도 부글거렸다. ‘네가 뭔데 이렇게 신경 쓰는 거야?’ 감정이 온도를 넘어갔다. 선을 넘은 감정은 통제를 벗어났다.

“서점에 특이한 책 팔던데 햄도 읽어봤어요? ‘나는 나와 대화한다.’”

“상호야, 괜찮아.”

 

병찬은 뱉고 나서야 아차 했다. 말투에 칼이 서렸다. 상호가 눈썹을 찡그렸다. 병찬은 마른 세수를 했다. 상호가 말한 책은 유명한 슬럼프 관련 에세이였다. 상호라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지나가는 식으로 책을 이야기했을 테다. 각지고 직설적인 말밖에 못 하는데 상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게 부드럽게 위로는 못 하니까 저런 식으로 깔짝거릴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기상호 관찰 6년 차 박병찬의 통찰은 정확했다. 상호의 기가 죽자 병찬은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아니, 형 말은, 천천히 해결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치만. 햄은 슬럼프 처음 겪는다 아이에요?”

“맞는데. 어차피 구단 징크스잖아. 4년 차만 넘기면 돼. 완전 괜찮아. 병원에서도 건강하다고 했고.”

병찬은 커피를 마시려다가 입을 떼었다. 말하고 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오래 앉아있기도 했고. 상호의 잔도 비어있었다. 병찬은 외투를 챙겼다.

“이만 일어날까?”

상호는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얌전히 병찬을 따라 나왔다. 복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사람이 많은지 숫자는 느릿느릿하게 올라갔다. 상호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병찬에게 물었다.

“햄요. 전 그래도 섭섭해요. 저 이제 고딩 얼라 아이거든요? 뭐 때문에 사람 연락도 씹고 그러는데요.”

“10년이 지나도 형아 눈에는 상호 고딩이고 애야~”

“햄은 제 얼굴이나 똑바로 보세요. 햄 눈빛이나 보고 생각해봐요. 그게 얼라보는 눈이에요?”

 

병찬은 상호의 앞에서 알몸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숨겼는데 어떻게 안 거지? 시즌이 끝난 뒤로 처음 만난 자리였는데. 30분짜리 짧은 대화에서 상호는 병찬의 눈 속 창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았나 보다. 병찬은 인상을 썼다. 상호는 특유의 냉하고 무심해 보이는 눈매로 병찬을 마주했다. 상호는 차분했지만 금방이라도 씩씩댈 것처럼 불을 품고 있었다. 병찬은 상호가 저를 태우기라도 할까 봐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와~ 기상호 많이 컸네. 내가 뭐, 뭐. 너를 뭐, 어떻게 봤길래 그래.”

“친한 후배 동생 보는 눈이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내 마음대로 대했으면 좋겠어? 상호야! 형 어른이야.”

“내도 어른인데요! 이제 종소세도 내고 차도 운전할 수 있어요. 이제 형 마음도 알아요.”

“근데 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이래?!”

 

누군가 가위로 썩둑 자른 침묵이 돌았다. 상호는 병찬의 말을 곱씹었고 병찬은 자신이 상호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저에 깔린 감정 중 어느 것인지 둘 다 칼을 대고 나눌 수 없었다. 감정이란 복잡하고 액체처럼 모호하다. 병찬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치부가 드러나서는 감정을 갈무리할 수가 없었다. 병찬은 자신의 하관을 가렸고 상호는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이 추측한 게 맞는지 되묻지 못했다.

“...먼저 내려갈게. 넌 엘베 타고 가.”

병찬은 바람처럼 빠르게 비상구로 향했다. 상호는 다급히 병찬을 불렀지만 병찬은 멀어지는 상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박병찬 네가 기어코 돌았구나.

 

 

병찬은 어디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키 187의 남성이 숨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병찬은 심란한 상태로 자취방에 가봤자 더 혼란스러울 뿐이라는 결론을 세웠다. 냅다 본가로 내려온 병찬은 부모님이 차려주신 저녁밥을 얻어먹고 거실에 널브러졌다. 병찬의 부모님은 병찬의 기행에 의문스러워했지만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아들은 영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다. 원래 아들이라는 존재가 다 특이하다. 병찬의 부모님은 익숙하게 병찬을 산세베리아 취급했다.

 

“.....아빠.”

“어? 어어, 왜.”

“말실수는 어떻게 수습해?”

“뭐? 너 싸웠어? 이겼어??”

병찬은 성을 내었다. ‘운동선수가 싸워서 뭐 해!’ 제 머리털을 한바탕 헝클인 병찬은 말을 골랐다.

“동생한테 뭐 좀 숨겼는데. 말 잘 못 해서 들켰어. 아씨, 걔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병찬의 아버지는 병찬의 대화를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그래도 아들이라고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그 친구한테 잘못한 거 있냐?”

“...어.”

“그럼 반대로 그 친구가 너한테 잘못한 건?”

“...없어.”

병찬의 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짓다가 병찬의 귓불을 매섭게 잡아당겼다. 병찬이 비명을 질렀다. ‘아빠 귀귀귀귀, 귀 찢어져억!’

“싹싹 빌어라. 나이는 계급이 아니다 병찬아. 뭔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과해.”

“아니 사과할 거야.”

병찬은 얼얼한 귀를 주물렀다. 병찬이 투덜거리자 아버지는 철들라며 핀잔을 주었다. 병찬은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했다. ‘이제 걔랑 전 같은 사이는 못 되겠지.’

“사람 관계가 쉽게 쉽게 되돌아가지 않지만. 병찬아.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봐라.”

아버지는 큼큼, 기침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병찬은 진이 빠져 소파에 드러누웠다. 박병찬도 궁금하다. 기상호와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 걸까.

 

 

7. 기억 중추

구단 버스의 클랙슨이 빵, 빵 울렸다. 약 스무 명을 태운 육중한 구단 버스는 좁은 도로를 뱀처럼 이리저리 관통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사고처럼 충돌한 병찬과 상호의 말싸움 이후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했듯이 개인적으로 연락하기를 그만두었다.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방치했다. 그동안 병찬은 보란 듯이 슬럼프 탈출에 성공했고, 상호는 차근차근 상승세를 탔다. 농구계는 좁디좁아서 연락하기를 관둔다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소식을 통해 손쉽게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해가 두 차례 지났다. 그동안 병찬은 계약서를 새로 쓰고 구단을 바꾸었다. 상호도 신인 드래프트 때 잡았던 계약 기간이 끝나 이적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구단에 소속하게 되었다. 계약을 끝내고 이적 선수 환영식에서 거짓말처럼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훈련하러 다녔다. 접점이 생기면 그래도 친근감이라도 든다고 병찬도, 상호도 뚝딱거리던 계약 초와는 달리 제법 패스도 잘 주고받고 자잘한 스몰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했든 싸웠던 순간을 말하지 않았다. 풀리지 않을 난제를 함부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병찬은 자신의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했고 상호는…. 병찬이 보기엔 정리한 것으로 보였다. 병찬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상호도 그리 잘 정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도 볼 몇 번 주고받으면 친구가 된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간단한 패스 훈련을 하면서 천천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재활과 같은 과정이었다. 상호는 그 주제를 꺼내지 않는 병찬에게 은근한 불만을 느꼈지만 병찬은 상호에게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형 힘들게 하지 말아줘.’

 

상호는 적어도 병찬이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묻어가기로 결심했다. 마음은 그 소유자의 몫이다. 상호의 몫은 병찬이 거절하면서 사라졌고 병찬의 몫은 병찬이 막았으니 상호의 것이 아니다. 그래도 상호는 때가 되면 병찬이 자신에게도 의지해주길 바랐다. 형·동생, 마음을 지닌 두 사람이 아니라 같은 팀으로서.

둘 사이가 풀렸든 얼었든 에이스 포인트 가드와 락 다운 디펜더의 조합은 지금의 트랜드와 잘 맞아서 두 사람은 같은 코트에 자주 섰다. 가끔 상호가 3점 슛에 성공하면 병찬이 축하로 상호의 엉덩이를 때리고 도망갈 때도 있었다. 병찬이 돌파 후 덩크를 성공하면 상호가 제일 크게 기뻐하고 난리를 쳤다. 아직 사석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전지훈련이든 농구 협회 컨텐츠 영상으로든 둘은 충분히 친했다.

이번 경기는 부산에 예정되어 있다. 아침부터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갔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라 구단 사람들은 제각각 잠을 자거나 패드로 영상을 보는 등 제 할 일을 했다. 온 순서대로 자리에 앉다 보니 병찬의 옆자리는 상호가 있게 되었다.

“햄 주무실 거에요?”

“아니. 너는?”

“저도 지금은 잠이 안와가. 깨어있을라고요.”

상호가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병찬이 이를 가만 보더니 상호에게 물었다.

“뭐 들어?”

“노래요. 와요. 햄도 들을래요?”

상호가 한쪽 이어폰을 빼어 병찬에게 건넸다. 병찬은 그 이어폰을 가져가 제 귀에 꽂았다. 상호는 애니메이션 노래 위주로 들었다. 일본어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기타 리프나 드럼 사운드가 은근히 친숙했다. 병찬은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둘 다 이동하는 내내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상호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병찬은 제 어깨를 상호에게 내주었다. 병찬은 차 유리창에 툭툭 부딪히는 상호 머리가 안쓰러워서라는 핑계를 속으로 대었다. 자는 상호의 얼굴을 곤해 보였고 고등학생 때와 별 차이나지 않아 보였다. 다만 닿아오는 무게라던가 상호의 어깨 폭을 떠올리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상호가 많이 자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병찬은 묘한 감상에 빠졌다. 둘 사이는 멀어지려야 영영 멀어지지 않았다. 마치 인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병찬은 아직 그 인력을 완전히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상호가 좋다. 그러나 상호와 무슨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병찬도 알고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자연스러운 논리가 아님을.

병찬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구단 버스는 착실하게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팀은 코트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원정팀인 수원팀도 느긋하게 몸을 풀고 골대에 슛을 날리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까진 두어 시간이 남았다. 경기장은 대부분 비어있었고 촬영팀과 스태프가 분주하게 기기를 옮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버스에 타기 전 크블 컨텐츠로 올해 결혼한 선수에게 축하하는 인터뷰가 있다고 했었다.

카메라와 인터뷰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병찬의 지인 중에서도 올 늦봄에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인터뷰이가 다가오자 병찬은 상호를 불렀다. 상호는 영문도 모른 채 병찬의 옆에 서서 얼결에 인터뷰를 같이했다. 병찬은 구단 인터뷰에 제법 능했지만 상호는 여전히 긴장되는지 뚝딱거렸다.

“네? 아, 민호 형이요! 형수님이랑 계신 거 봤는데 행복해 보이시더라고요.”

“부럽더라고요. 저희도 좋은 인연이 있어야 하는데.”

인터뷰이가 하하 웃었다. 병찬의 너스레가 흥미로운 눈치였다.

“오! 그럼 두 분은 아직도 솔로이신가요?”

병찬과 상호 둘 다 어색하게 변명했다.

“농구를 하다 보니 다른 사람 만날 여유가 없네요.”

상호는 제 어깨 위에 팔을 올린 병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병찬은 상호를 거절한 뒤로 누군가를 만날 의욕이 사라졌고 상호는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모태솔로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터뷰이는 의례적인 질문 한 가지를 더 한 뒤 다른 팀원에게도 질문하러 자리를 떠났다. 상호가 몸을 바르작거리자 병찬이 사과하며 어깨에 걸친 팔을 빼 주었다.

“불편했지? 네 준향대 동문 중에 결혼한 사람은 민호 형밖에 없어서 혼자 인터뷰시키면 힘들까 봐 그랬어.”

“아녜요. 저도 어색했어서.”

상호는 병찬을 보고 공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지 머뭇대었다. 병찬은 연습하러 가지 않는 상호를 보고 의문스러워했다. 상호의 알짱거림이 5분을 넘어가자 결국 병찬이 먼저 상호에게 말을 걸었다. 연유를 물으니 상호는 병찬에게 용건이 있었는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즈이 누나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햄도 오실래요?”

“나? 난 괜찮은데 이렇게 초대해도 돼?”

“누나랑 매형 둘 다 아싸라서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아야 해요. 누나도 형 본 적 있어서 상관없을걸요.”

“넌 가족 될 사람이랑 누나한테.”

자신의 가족을 깎아내린 상호를 어이없게 본 병찬은 결국 상호의 초대를 수락했다. 병찬도 부산을 오가면서 상호의 형, 누나를 몇 번 보았었다. 다만 정말 친한 동생의 가족으로 스쳐 지나간 게 다였던 터였다. 병찬은 속으로 축의금은 얼마나 내야 할지 고민했다. 상호는 카톡으로 청첩장을 보내놓았다며 홀랑 가버렸다. 병찬은 순식간에 사라진 상호의 등을 보며 상호가 왜 그런 권유를 했는지 눈치챘다. 상호의 초대는 적당히 친한 형 동생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병찬은 파란 넥타이 매듭을 단단히 조였다. 상호가 모바일 청첩장으로 알려준 시간에 맞추어 가려면 이제 출발해야 한다. 결혼식은 연초에 계획되었다. 상호 말로는 누나가 연구직인데 해외로 장기 출장을 떠나게 되어 여유가 나는 연초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차피 일정 때문에 참석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며 상호는 뷔페에 들렀다 가라고 권했지만 병찬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기분도 묘하고 염치가 없었다.

서울 호텔 연회장에 도착한 병찬은 입구에서 손님맞이를 하는 상호를 발견했다. 사람도 많고 방문객도 많아 병찬은 상호에게 축의금만 전달했다. 상호는 병찬을 발견했지만 밀려오는 사람들을 소화시키느라 대화도 못 하고 병찬을 보냈다. 병찬은 상호를 기다릴 겸 하객석에 자리를 채울 겸 신부 측 좌석에 앉았다. 병찬은 회장을 돌아다니는 상호의 뒤통수를 관찰했다. 상호의 검은 정장을 보니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병찬은 그것이 신인 드래프트 때보았던 데자뷔라 여겼다. 아무래도 중요한 날에 입은 옷이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라고 자기합리화를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뭐, 깨닫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병찬은 상호를 거절했고 상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게 전부다.

음악이 들렸다. 결혼식의 시작이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고 사회자가 둘 사이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혼주석에 앉은 상호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병찬은 행복해 보이는 신랑·신부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공연자가 신랑·신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기타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자주 쓰이는 뮤지컬 풍 듀엣곡이나 한국 가요가 아닌 어쿠스틱 팝송은 감미로웠다.

‘당신은 내 인생을 완성시켰어요.’ 익숙한 노랫말이 어떤 감각을 관통했다. 불현듯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니, 현실이. 병찬의 발목을 잡았다. 식이 끝난 뒤 병찬은 차로 돌아갔다. 입맛이 없어 식사는 건너뛰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주차장 안에서, 차 안에 들어와 앉고 나서야 병찬은 자신이 한참 길을 잘못 돌았음을 인정했다.

 

이게 아니야.

 

병찬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회의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병찬은 마른 세수를 했다. 이곳은 전부 병찬의 상상이자 가정 속이다. 진짜 병찬은 사고로 침대에 누워있다.

이 모든 과정과 세월은 애초부터 모두 가짜다.

 

 

8. Love me tender

조수석에 누군가 들어왔다. 병찬은 자신의 차에 들어온 침입자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조수석에 들어온 침입자도 놀라 똑같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상대는 상호였다. 병찬은 기겁했다. 결혼식에서 일 돕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상호는 병찬이 소리 지르니 저도 모르게 같이 질러버렸다.

“너 왜 내려왔어! 아니지, 형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누나 결혼식 끝나서요! 뒷정리는 부모님하고 매형 쪽이 하기로 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지, 햄, 햄. 들어봐요.”

병찬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호 쪽이 더 급해 보였다. 타이는 반쯤 풀려있고 정장 재킷은 여며있지도 않았다. 상호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햄요. 여기서 나가고 싶죠. 그러니까, 이 공간이 아니라 햄이 저랑 사귀지 않는 또 다른 미래에서 말이에요.”

“어, 어어어! 상호 어떻게 안 거야!”

“당연히 햄의 머릿속이니까 알죠. 햄 예전에 저랑 인셉션 봤죠?”

병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영화고 몇 번 봤었으니까. 꿈속으로 들어가서 비밀을 갈취하는 내용의 액션 영화인 걸로 기억했다. 상호는 인셉션을 예로 들었다. ‘이제 햄이 전부 다는 아니어도 중요한 사실은 깨달았으니까 이 공간이 유지되지 않을 거예요.’ 상호가 유리창 바깥을 가리켰다. 병찬은 상호의 손가락을 따라 바깥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자동차 바깥은 주차장이 아닌 흰 공간으로 바뀌어있었다. 기기가 돌아가는 생활 소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였다.

“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영화에서처럼 죽어야 해?”

“그러면 햄의 몸도 죽어버릴 거에요. 다른 방법을 쓰면 돼요.”

상호가 병찬의 손을 잡았다. 손의 떨림이 멎었다. 병찬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나 보다. 병찬은 상호의 눈을 보았다. 상호는 프로 농구 선수보단 덜 영근 대학생처럼 보였다.

 

“깨어나고 싶다면 깨어나야 할 이유를 계속해서 상기시켜요. 햄이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햄이 봐야 할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요. 비디오를 되감듯이 기억을 되짚으면 될 거에요.”

 

“하지만 상호야. 넌 여기 있잖아.”

“이 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햄의 기상호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서 찾아야 한다고요! 여기의 상호는 햄을 사랑하지 않는 상호에요. 햄을 사랑하는 상호에게로 가요!”

상호는 어거지로 병찬의 어깨를 밀었다. 병찬은 자동차 밖으로 밀려 나갔다. 병찬은 얼떨떨했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가 아니라고 가슴으로는 인지하고 있는데 머리로는 눈앞에 훤히 그려지니 가슴의 외침을 무시하게 된다. 기묘한 양가감정 속에서 병찬은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상호를 비롯한 자동차가 연기처럼 흐려지고 있다. 병찬은 다급하게 상호를 불렀다. 상호는 주문처럼 병찬이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과거를 기억해내요. 햄이 떠올리지 않으면 못 벗어나요!’ 그 말을 끝으로 병찬은 홀로 남겨졌다. 병찬은 거칠게 숨을 쉬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숨이 막혀오자 거칠게 타이를 풀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어디를 보아도 흰 공간뿐이다. 병찬은 결국 상호의 말대로 과거를 되짚어보기로 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결심한, 최근의 계기부터.

 

 

몇 번 통화를 걸던 상호는 상대가 기어코 전화를 받지 않자 한숨을 쉬고 휴대폰을 덮었다. 저녁 시간대라 거실 창문으로는 자동차의 후미등과 가로등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병찬은 상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상호의 휴대폰은 내내 붙잡고 있던 탓에 따끈했다. 상호의 눈썹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름인데도 상호의 몸이 차가웠다. 병찬은 상호를 위로했다.

“금방 전화하실 거야.”

“그럴까요. 식당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나왔는데.”

“부모님이시잖아.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이시겠지.”

상호는 제 어깨를 짚은 병찬의 손을 잡았다. 병찬의 위로가 먹혔는지 상호는 씩 웃었다. 지친 얼굴이지만 어느 정도 활기가 돌았다. 병찬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반짝였다. 상호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햄 우리 신혼여행 예약도 확인해야 하잖아요.”

“오늘 말고 내일 하자. 많이 정신없었잖아.”

병찬은 상호를 쉬게 해줄 생각인지 상호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뒤 끌고 갔다. 상호는 오늘 해야 나중에 버벅거리지 않는다며 병찬의 말에 반박했지만 상호의 양발은 병찬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프로가 되고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서류상으로도 가까운 사이인 걸 증명하고 싶었다. 병찬의 부모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별일 없이 넘어갔지만 상호의 부모가 문제였다. 오늘 저녁 식사를 통해서 상호는 자신의 부모에게 오랫동안 사귀던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할 거라 했을 때 상호의 부모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소중히 키운 막내아들이 20대 후반이 되어가도록 연인을 만들지 않는 걸 아쉬워했지만 그 연인이 남자인 건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상호의 엄마는 표정을 갈무리하기 어려웠고 둘 사이를 사랑이 아닌 우정이 아니냐며 오해하기에 이르렀을 때, 인내심이 닳은 상호는 전부터 말씀드렸지 않았느냐며 화를 냈다.

“아니 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좋다고요! 소개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제 애인은 병찬햄이고 어무이 아부지가 뭐라고 하시든 간에 전 병찬햄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렇게 고집부릴 거면 애초에 우리는 왜 부른 거니! 됐다. 됐어, 우린 먼저 나가마.”

그 뒤로 상호의 부모님은 상호의 연락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시위였다.

 

병찬에게 잡힌 채 침대 위로 드러누운 상호는 고개를 돌려 병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병찬은 상호가 저를 쳐다보자 뽀뽀해달라는 의미인 줄 알고 상호의 코끝에 입술을 대었다. 소리 없는 뽀뽀를 받은 상호는 병찬의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 다 가족이 반대한다고 계획을 물릴 인물이 아니다. 어차피 둘이서 간단하게 하는 프라이빗 결혼식이고 서류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증명되지 않더래도 사진이 남으니까.

상호는 정말로 상관없었다. 병찬은 제품으로 파고드는 상호의 등을 살살 쓸었다. 상호가 괜찮더래도 병찬은 속이 편치 않았다. 가족이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은 겪지 않길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 상처를 줘버려서 미안했다. ‘차라리 친한 형이었더라면…’, ‘차라리 둘 중 하나가 여자였으면…’, ‘차라리 이 세상이 더 다른 곳이었다면…’ 병찬이 쓸모없는 가정을 하는 건 당연했다.

 

시간이 돌아갔다. 병찬은 기억 속에서 가정의 이유를 찾았다.

한때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상호는 막 드래프트를 마친 신인이라 적응하기에 바빴고 병찬은 처음으로 겪은 슬럼프에 빠져나오려고 허덕이던 때였다. 둘 다 힘들었고 서로를 챙기기 어려웠다. 롱디 탓에 자주 만날 수 없는 아쉬움도 컸다. 데이트도 못 하고 얼굴도 못 보고 경기는 죽어도 안 풀리고. 그래도 둘 다 선수라고 코트에서 있던 일은 모두 코트에 두고 왔다. 만약 코트일까지 꺼내온다면 둘 다 1년도 채 못 갈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유로 서운한 게 쌓이고 싸였다. 그걸 터뜨린 건 의외로 병찬이었다. 병찬은 전화기 너머로 호통을 질렀다.

“니는 왜 그걸 나한테 숨겨!”

[금방 나으니까 굳이 말할 필요 있어요?! 제 몸이라고요.]

“병원 갔다 왔잖아. 그걸 너도 아니고 다른 사람 말 통해서 들어야 하는 사이야 우리?”

[햄요, 그런 식이면요. 햄 힘든 건 저한테 왜 말 안 하는데요. 남친 앞에서는 안 괜찮아도 되잖아요!]

“내가 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걸 말해.”

상호는 어이없다는 눈치로 한숨을 짧고 강하게 내쉬었다.

[하! 병찬햄 그렇게 안 봤는데 쫌생이 그 자체네요. 여태까지 저랑 사귀면서 어떻게 이미지 관리를 했대요?]

“뭐? 야, 기상호!”

병찬이 고함을 지르자 상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병찬은 끊긴 화면만 보다가 뒷목을 붙잡았다. 박병찬이 쫌생이면 기상호는 초딩이다. 병찬은 카톡으로 다다다다 메시지를 날렸다. ‘형한테 전화 그런 식으로 끊은 건 어디서 본 거야.’ 몇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카톡 창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찬은 열불이 나는 속을 재우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식자 병찬은 상호의 마음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서로 사귀는 사이이고 볼꼴, 못 볼 꼴 다 보았으니 좀 더 기대어도 되지만 역시 병찬은 5살 연상의 형아미를 상호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은 심통이 많이 났지만 하루나 이틀 뒤에는 꼭 상호에게 사과하리라 다짐했다. 사랑보다 자존심이 먼저일 수는 없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전화가 아닌 실제로 만나서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호가 아직 대학교 4학년 과정을 덜 마친 탓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상호는 시큰거리는 발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병찬은 무릎 부상이 다시 도지지 않게 대비하려고 정형외과 물리치료실을 방문한 참이었다. 우연처럼 두 사람은 같은 시간에 마주쳤다. 둘 다 멍청하게 어어 하는 소리를 내다가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화해의 손길은 병찬이 먼저 내밀었다.

“상호 치료 끝나고 갈 데 있어?”

“아뇨. 햄은요.”

“나도 없어. 그러니까, 오랜만에 같이 데이트하자.”

약 6개월 만에 하는 데이트는 끝내주게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실물로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지를 몰랐다며, 병찬은 상호의 손을 꽉 쥐었다. 상호는 병찬의 표현을 쑥스러워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우리 커플링 맞추러 가요.”

“지금? 좀 더 준비하고 가지 않고?”

“저랑 햄이랑 싸운 이유를 고민해봤는데요. 우리 둘 다 서로를 덜 믿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실물로 서로가 이어져 있다고 하면 좀 더 신뢰하게 되지 않을까요?”

상호의 손가락이 병찬의 네 번째 손가락을 살살 굴렸다. 병찬은 상호가 나름 세심하게 낸 해답에 감동을 받았다. 병찬은 손을 움직여 상호와 손깍지를 끼었다.

“그러자, 상호 생각해둔 색깔 있어?”

 

시간이 돌아갔다. 병찬은 위화감의 이유를 찾았다.

시간은 영사기 필름의 프레임처럼 빠르게 되돌아갔다. 어떤 장면은 보기가 힘들어 잘라버리고 싶었고 어떤 장면은 괜히 그 상황이 좋아 영원히 박제해버리고 싶었다. 협회에서 결혼한 선수 컨텐츠를 촬영했을 때는 상호와 결혼하면 어땠을까에 대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병찬이 슬럼프로 고생하고 있을 때는 솔직히 연애 사정에 가장 큰 위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주 싸웠었고 냉전도 오래갔었다. 상호의 두 번째 드래프트가 결실을 맺었을 때는 밤을 지새워가며 축하했다. 상호의 첫 드래프트가 실패했을 때는 가족 약속을 깨어가며 상호에게 달려갔다. 병찬의 일상 하나하나에 상호가 있었다.

영사기 필름을 마구잡이로 당겨내 한쪽을 빛 아래로 투과시켜보면 상호가 반드시 나왔다. 병찬에게 상호는 그 정도로 의미 있는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 병찬이 멍청한 상상을 하게 만든 것도 그 사랑이 원인이다.

상호의 말대로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고 나서야 강하게 의지를 다졌다. 나는 깨어나야 해. 진짜 상호를 보러 가야지. 병찬이 당신 영사기 필름이 어느 한 부분에서 콱 막혔다. 병찬은 그걸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게 어느 장면이고 어느 때인지 알았다. 상호가 고백했을 때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날이다.

 

띵, 띵. 운전자의 안전벨트 신호가 일정하게 울린다. 간밤에 내린 폭설 탓이 유리창 앞은 온통 새하얬다. 담쟁이덩굴로 붉은 벽돌을 가득 푸르게 채웠던 예체능 관은 그 잎새가 다 떨어져서 볼품없었다. 병찬은 차 안의 히터와 열선을 단단히 틀었다. 2월 방학 기간이지만 병찬은 졸업 관련으로 처리할 일정이 많았다. 차라리 3월쯤이었다면 더 편했겠지만 일정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3학년 1학기 이후로 멈췄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려면 올봄부터 다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병찬은 서류철을 모아 뒷좌석에 던졌다. 너덜너덜한 종잇더미가 뒷좌석에 쌓인 잡동사니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리 아픈 학교 일에서 떨어지기 위해 병찬은 라디오를 켰다. 21.6MHz. 언제 맞춰놓았는지 모를 주파수에서 낡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병찬의 취향은 음악보다는 컬투쇼다. 병찬은 주파수를 바꿀까 하다가 운전할 때는 라디오를 끌 생각이라 이대로 놓아두었다. 스피커로 나오는 기타 음이 조곤조곤해서 생각보다 싫지도 않았다.

‘Love me tender Love me true’

시동을 켜 놓고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유리창에 물이 성겼다. 앗차거. 병찬은 옆유리 창에 흐른 물이 코트에 닿자 몸서리를 쳤다. 기다리던 사람은 아무래도 금방 올 거 같지 않았다. 병찬은 환기 버튼을 누르고 조수석을 더듬었다. 최대치로 가열한 열선은 잠깐 짚은 손 위에도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었다. 무사히 준향대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차는 운전 거리가 만 킬로미터를 넘어가는데도 멀쩡히 잘 돌아갔다. 병찬은 방문자를 기다리는 게 괜스레 기대가 되어 백미러를 조절하고 도마뱀 모양 방향제 위치를 이리저리 바꿨다.

병찬은 가짜로 이루어진 과거가 아닌 순수 자신의 기억으로 재현된 과거에 오고서야 바뀐 게 무엇인지 알았다. 라디오에 다큐멘터리는 없었고 대신에 올드 팝송이 차 안을 채웠다. 음악은 계속 모든 순간을 병찬의 주변에 머무르며 그가 깨닫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병찬은 기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상호를 기다렸다.

 

상호는 금방 병찬의 차로 들어왔다. 찬 공기가 자동차 안을 쓸고 나왔다. 병찬은 환기를 끄고 히터 풍량을 올렸다. 상호가 제 팔을 쓱쓱 쓸었다. 바깥이 어지간히 추웠나 보다.

“상호~ 왔어?”

병찬이 반기자 상호는 코를 삼키며 대답했다.

“네, 어후씨. 과 사무실 가는 복도가 춥더라고요. 남극인 줄 알았어요.”

상호는 따뜻한 바람에 손가락을 싹싹 데웠다. 상호의 손가락 끝이 빨갰다.

“상호 몸도 녹일 겸 쉬었다 출발하자.”

“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도착하면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갈 텐데요.”

“형이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잠깐이라도 안될까?”

병찬은 자세를 바로 했다. 상호는 병찬의 눈을 보다가 빨개진 뒷목을 한 손으로 주물렀다. 어딜 봐야 할 지 모르는지 상호의 고개는 이리저리 돌아갔다. 자동차 안은 훈기로 뜨끈했고 병찬이 틀어놓은 라디오는 타이밍 좋게도 로맨틱한 팝송이다. 날짜는 2월 14일의 더할 나위 없는 연인의 날이다. 상호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여태 둘 다 별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나는 내내 기류가 있었다. 굳이 입 바깥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 실낱같은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아서였다.

우정인가, 동경인가, 사랑인가. 오독하기 쉬운 감정을 안고 서로 확신을 가지는 관계는 어렵다. 오독하지 않으려면 더욱이 확고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뭐, 뭔데요.’

 

“너를 좋아해.”

“왁.”

상호는 상상만 하던 그 말을 들은 사람처럼 기이한 감탄사를 뱉었다. 상호의 얼굴은 홍당무에 가까웠다. 병찬도 그랬다. 두 홍당무는 버벅거렸다. 병찬은 상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병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형이랑 있어 주면 안 돼?”

“그어… 잠만요. 햄, 친구한테 전화하고요.”

상호가 뜬금없는 말을 하자 병찬이 어색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야, 기상호. 형 마음 갖고 장난치는 거야?”

“아니 친구랑 이미 잡아놓은 약속인데 빠지는 거면 미리 말을 해둬야죠!”

병찬이 상호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고 당겼다. 상호는 한쪽 팔을 내준 채로 친구와 통화를 했다. 담백하게 사과하고 다음에 만나자는 상호의 말에 친구가 흔쾌히 알았다고 하자 상호는 전화를 끊고 병찬을 바라봤다. ‘이제 됐죠?’라는 눈빛에 병찬은 좁은 차 안에서 상호를 껴안았다. 멀대같은 남자 둘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둘 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둘 다 애처럼 낄낄거렸다. 병찬이 아직 대답해주지 않았다는 엄한 얼굴로 상호를 쏘아보자 상호는 낑낑거렸다. 상호는 직접 마음을 전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도 병찬이 집요하게 누르자 그제서야 제 속을 끄집어냈다.

 

“저도 햄이 좋아요.”

 

상기된 상호를 온전히 박제한 병찬은 눈물을 흘렸다. 과정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떻게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알게 되었다. 턱 밑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필름을 적시지 못하게 소매로 대충 닦은 병찬은 제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모든 게 기억났다. 단순하고 멍청한 박병찬.

 

신혼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처음부터 상호의 고백을 받지 않겠다는 무식한 상상을 시작했다니. 병찬은 여기저기 흩뿌려진 필름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어지럽게 떠오른 기억을 한 걸음씩 정리해나갔다. 하나하나 명료하게 정리하며 다다른 곳은 사고로 여기저기 부서진 자동차 앞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상호는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고 운전석에 앉은 자신은 목을 꺾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자신은 가슴을 핸들에 심하게 부딪쳤는지 가슴팍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차 스피커에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질이 많이 망가졌지만 익숙한 곡이다. 상호에게 고백했을 때 들었던 그 노래였다.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깨워 외부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창문’ 역할을 합니다.’ 예전에 들었을 다큐멘터리가 병찬의 뇌리를 스쳤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 노래는 병찬이 기억해내려 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현실의 상호가 병찬을 깨우기 위해 보내는 신호였다. 병찬은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공간은 어느새 빛이 되어, 병찬의 눈앞을 새하얗게 채웠다.

 

이제 현실로 깨어날 때가 되었다.

 

 

9. 나는 항상 다른 이야기와 다른 출발선에 눈을 열어보길 원했었다.

삐, 삐. 심전도 기계가 일정한 음을 냈다. 병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흐린 시야는 미색 천장과 하늘색 커튼의 형태를 비추었다. 고인 눈물이 눈가에 맺히다가 뒤이어 떨어졌다. 병찬은 자신의 왼손을 덮는 커다란 온기를 느꼈다. 뻣뻣한 목 때문에 온기의 주인을 볼 수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상호다. 병찬은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움직여 상호의 손을 쥐었다. 먹먹한 귓가로 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스러운 소음 사이로 노래가 들려왔다. ‘For, my darling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이 노래구나, 병찬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노래의 한 소절 한 소절이 자신을 살아나게 했다.

막 깨어나서 정신없는 가운데 의료진이 기관 삽관을 빼어냈다. 침대가 올라가며 시야도 높아졌다. 상호는 눈물범벅이다. 처음 고백을 받았을 때와 달리 상호는 사복을 입고 있었고 이마에는 큼직한 거즈를 붙였다. 병찬은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었었단 걸 깨달았다. 의사가 이런저런 검사를 끝내고 둘만 남게 되자 상호는 병찬을 꽉 끌어안았다.

“흐어어어어엉!”

“아이고~ 상호야. 크흠, 큼.”

병찬은 떨리는 팔로 상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상호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품 안에 들어오는 몸이 줄어든 것 같다. 병찬은 상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안겨있었다. 사실 떼어낼 힘도 없어서 그냥 상호의 온기에 기대어 생을 감상했다. 목도 많이 나간 것 같고. 한바탕 크게 울고 나서야 진정한 상호는 눈물방울을 매달고 부은 얼굴로 병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렸다.

신혼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추돌사고에 휘말렸다고. 금방 구조되었지만 형은 부상이 심해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다고. 병찬은 상호의 말에 심각하게 물었다.

“그럼 난…. 얼마 만에 깨어난 거야?”

“이주만이에요. 뇌출혈이 심하다고 의사쌤들이 캐서 무서웠으요.”

병찬은 남몰래 안심했다. 아주 오랫동안 잠든 거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2주면 다행이었다. 병찬은 상호의 손등을 쓸었다.

“넌 괜찮아? 내 옆에 타고 있었잖아.”

“전 별로 안 다쳤어요. 사고 났을 때 직접 충격은 안 왔고, 퇴원도 3일 만에 했고.”

“다행이다.”

상호는 제 몸이 얼마나 튼튼한지 잊으면 안 된다며 한쪽 어깨를 크게 돌리고 알통을 자랑했다. 반소매 아래의 알통은 그동안 웨이트를 못 해서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병찬은 병실 한 곁에 쌓인 바구니와 상자를 가리켰다.

“구단 사람들이랑 애들이 보낸 거야?”

“네. 아 참, 햄 그중에 우리 부모님이 보낸 것도 있어요.”

병찬은 순수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네. 울 부모님이 그러셨는디요. 제가 병찬햄한테 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 보고 인정하기로 했대요. 상견례를 하고 그러는 건 안즉 힘들다고 했지만…그래도! 가족이 되겠다고 한다면 도와주시겠대요.”

“잘됐다, 상호야!”

병찬은 양팔 가득 상호를 잡고 볼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상호가 킬킬 웃었다.

 

사랑 앞에서 만약이란 이야기는 필요 없다. 한때는 후회하고 한때는 한눈을 팔기도 했지만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인력처럼 제 자리로 돌아온다. 병찬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버리기로 약속했다. 난데없는 사고가 두 사람을 갈라도 타인이 두 사람을 부정해도 박병찬은 기상호를 사랑한다. 고통도, 후회도, 기쁨도, 함께인 한 모두가 완전하다.

 


참고 - 고현석, “음악, 뇌손상도 회복시킨다”, 「헬스코리아 뉴스」, 2012.08.31.

 


 

외전. 결혼해주시죠?

때 이른 은퇴를 보고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병찬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담담히 고해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2년은 더 코트에서 뛸 수 있었을 텐데. 병찬은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세례를 맞았다. 병찬은 ‘으허억’하고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은퇴식이라고 팀원들이 아예 양동이로 물을 받아서 뿌린 덕이었다. 그래도 은퇴를 치른다는 게 싫지 않았다. 방년 33세 박병찬, 플레이오프에서 마지막 경기를 끝내고 선수 딱지를 떼다. 가슴이 뻐렁차지 않는가. 거기다가 그 마지막 경기가 결승전 우승이니. 아마 병찬이 소속되어있는 금성 라이거즈에서 길이길이 화자 될 일이다.

팬들은 병찬의 은퇴에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박수 칠 때 떠나는 당신이 밉고도 자랑스럽다며 응원했다. 병찬은 그런 팬들의 응원이 기뻤다. 다른 것도 응원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 대한민국은 닫혀있는 사회다. 병찬은 한창 뛰고 있을 상호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비밀을 품에 안고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제 선수 생활이 짧았던 만큼 미안한 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감사한 것도 많고요.”

“이제 은퇴하시면 무얼 하실 계획인가요?”

“여러모로 알아보고 있는데 확답을 못 드리겠네요. 하지만 농구계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요. 이제 경기로는 볼 수 없겠지만 어디에선가는 제가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에 착실하게 임한 병찬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않았다. 손안에 들어온 트로피와 꽃다발을 강하게 쥐었다. 병찬은 코를 훌쩍였다. 인생의 대단원을 마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련하고, 두근거렸다.

 

 

“병찬햄!!”

“상호야!”

뒤풀이 때문에 자정이 다 되어 귀가한 병찬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안겨 오는 상호를 껴안았다. 상호의 팀은 아쉽게도 4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 말은 병찬의 마지막 은퇴경기를 집에서 다 보았다는 의미였다. 상호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상호도 벅차오르는 마음에 혼자 자작을 했다. 병찬은 상호를 강하게 껴안고 흔들흔들했다. 둘 다 알코올이 들어간 상태라 자신들 하는 짓이 유치하단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다.

상호는 술김에 신발도 벗지 않은 병찬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상호가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병찬햄.”

“상호 갑자기 왜 그래?”

“제가요. 햄 은퇴 준비할 때 생각한 게 있는데요.”

“어, 어엉?”

상호의 돌발행동에 술이 조금 깬 병찬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거실 쪽을 보았다. 거실에는 언젠가 시즌이 끝나면 먹어보자고 일본 여행에서 사놓고 방치했던 고량주가 널브러져있었다. 고량주 도수가 얼마나 되는지 간신히 기억해낸 병찬은 상호가 왜 이러는지 단박에 눈치챘다. 지금 상호는 만취 상태다. 병찬의 표정이 얼마나 이상하던 상호는 잠옷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들고 쫑알거렸다.

“햄도 인제 결혼하라는 잔소리, 노총각 소리 듣는 나이고”

“기상호.”

병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호가 말을 막 하면 병찬이 이를 지적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병찬은 상호의 입을 막지 않았다. 상호의 손에 들린 반지 케이스가 의미심장했다.

“그러니까예...인제 경기도 안 해서 햄 심심할 거 아임까.”

“그래서?”

“지랑...결혼해주시면! 햄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햄만의 영원한 광대가 되겠습니다.”

물건을 진상하는 간신배처럼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양손으로 올렸다. 병찬은 폭소했다. 나중에 상호 술이 깨면 볼만한 반응일 테지. 병찬은 왼손 약지를 잘 조준해서 반지를 끼웠다. 사이즈는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다이아가 반짝거렸다. 병찬은 상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상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꺼는 어디 있어? 형도 상호 손에 끼워주고 싶어.”

상호가 반지 케이스를 건넸다. 병찬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상호의 손을 잡고 직접 반지를 끼워주었다. 병찬은 상호의 엉망진창 프러포즈가 웃기고 좋아 상호의 입술에 진하게 도장을 찍었다. 상호의 입에서는 고량주 냄새와 매운 닭발 냄새가 났다. ‘어후,’하고 숨을 뱉은 병찬은 짐을 던져두고 매미처럼 매달린 상호를 들었다.

“내일 돼서 무효라고 말 바꾸면 안 된다? 상호 반지 끼웠으니까 이제 거절 못 해~”

“안 해요.”

“그 말 내일도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어질러진 거실은 내일의 자신에게 맡긴 병찬은 상호와 침대로 갔다. 술에 꼴은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병찬은 상호를 침대에 재워두고 자신도 내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퍼질러 잘 생각이다. 상호를 안은 채로 침대로 다이빙한 병찬은 바지 벨트만 대충 풀어던졌다. 옷 갈아입기도 귀찮아 정장 자켓을 허물처럼 침대 밑으로 밀어낸 뒤 상호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상호가 병찬의 셔츠깃에 코를 박고 킁킁대었다. 병찬의 몸에서는 갓 샤워를 마친 비누냄새가 났다. 상호가 비음 소리를 냈다.

“햄...”

“응,..”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상호가 병찬의 턱에 뽀뽀한 다음 잠에 빠졌다. 상호의 사랑고백에 충족감이 든 병찬은 속으로 영원히 상호를 사랑하겠다 다짐했다.

 

 

“으아아악!”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일어나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상호에게는 유감을 표해야겠지만 말이다.


후기

 

맙소사 제가 회지를 만들었다니.

떠오르는 게 이 말 뿐이군요 맙 소 사!

지성을 마비시키는 사랑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여러분이 이 글을 즐겁게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박병찬인지 박박찬인지 캐붕이 심해서요. 만약 여러분이 보시기에 박병찬 생각이 많다고 느끼셨다면 글쓴 사람 생각이 겁내 많아서 그렇다고 너그럽게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웨딩이라는 주제에 맞게 써보았는데 제대로 표현이 된 것 같지 않아 아쉽군요. 그치만 웨딩 에피소드를 넣었으니 주제에 맞지 않았을까 합리화를 해보겠습니다.

이매진 러브 어페어, 줄여서 이브어는 뮤지컬 이프/덴의 시놉을 보고 떠올린 회지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뮤지컬도 관람해보고 싶네요.

막상 영향을 받은 작품은 이프/덴 말고도 영화 이터널 선샤인, 에에올과 인셉션이 있군요. 어쩌다보니 취향전시책이 되어버린... 그치만 사랑 때문에 삽질하는 이야기 아름답지않나요

복선과 연출 상의 이유로 일부 인용문은 각주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병찬이 혼수상태에 빠져있는건 나름의 반전요소였으니까요. 근데 티가 엄청나게 나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아보실 분은 알아보셨을 것 같아요.

특히 프롤로그 격으로 썼던 병찬의 독백과 소제목은 뮤지컬 이프/덴의 Always starting over 한국어판 가사 ‘항상 다른 얘기 속에 다른 출발선에 눈을 열어 앞을 봐 한 발 내디뎌’ 를 따라 썼습니다. 나름 오마주였는데 알아봐주신다면 무척 기쁠겁니다.

원체 말이 많은 편이라 서술의 완력 조절이 많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문단이 너무 길면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어서 나름 편집해본다고 해봤는데 편하셨을지 걱정되네요. 또 여백과 줄바꿈에 따라서 말은 칭찬으로, 조롱으로 바뀌니 의도가 잘 전달되도록 꽤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첫 회지라 그런가 한 달을 넘도록 붙잡았어서 그런가 감회가 너무 새롭네요...

 

멀티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라 글을 쓸 때도 최대한 집중이 될만하거나 마이붐 플리만 골라서 들었습니다. 이 말을 왜 하냐면 플레이리스트를 보고 너무 실망하지 말아주었으면 해서 그렇습니다.

뮤지컬 IF/THEN 브로드웨이 버전 앨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브로드웨이 버전 앨범

앨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

 

대충 이 정도만 들으면서 썼던 것 같네요.


이 뒤로부터는 제 트친분의 축천이 있습니다. 여유없는 일정에도 흔쾌히 수락해주신 시스티나님 압도적으로 감사합니다..!

멋진 표지를 만들어준 냐님, 회지 내용을 같이 고민해주신 창고님, 은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Special Thanks...☆

회지로 뽑았으니 웹발행할 때 돈을 걸어야하나 고민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판매를 한 것도 아니고 남은 회지들도 지인분께 다 드렸으니까 무료 공개로 두렵니다 회지 표지도 예쁘게 뽑혔고..뱅상온이나 갑타온 때 판매 요청이 들어온다면 유료로 변환될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은 기간도 멀고 하니 그 때가서 생각해볼게요

이미지는 회지 뽑을 때 같이 드렸던 엽서~~~ 펄지가 예쁘긴 예쁘더라구요 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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