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컾] 지상고 농구부 14와 10 사건
231009 '가비지 타임 후 가을 독서 시간!' 참가작
합작 링크: https://popo8579.wixsite.com/hangul-gt
주최님의 BGM: https://youtu.be/L0ezTmMgoe0?si=loKhQNyVJSL4Dr8c
쌍용기가 끝나고 찾아온 한여름 주말.
태양이 이글거려도, 감독 이현성과 코치 서인진이 각자의 사정으로 자리를 비웠어도, 지상고 농구부의 연습은 계속되었다. 예전보다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체육관의 선선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공을 던지고, 튀기고, 몸을 움직이고 쉬는 시간도 가졌다.
“이만 정리하자.”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 통학하는 정희찬도 오늘 저녁은 숙소에서 함께 먹기로 했다. 주장 성준수의 선언에 다들 신속하게 공을 치우고 짐을 챙겼다.
“어?”
그런데, 체육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야, 문 안 열리는데?”
“뭐?”
“네?”
성준수가 몇 번 더 문의 손잡이를 쥐고 돌리려 했지만 손잡이는 문과의 이음매 부분에서 조금 덜걱거릴 뿐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잠갔나?”
“열쇠 준수햄한테 있지 않아요?”
“어떻게 된 거지?”
체육관 문은 밖에서만 잠글 수 있고 그 열쇠는 성준수에게 있었다.
“재유, 감독님이나 코치님께 전화해 봐.”
“알았다.”
잠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잠겼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밖에서 누가 잠갔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상고 농구부가 가진 선택지는 감독 아니면 코치에게 연락해 학교에 전달하는 것. 진재유는 폰을 꺼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안 켜지네…?”
“뭐?”
하지만 폰 액정은 진재유의 얼굴만 비추고 바뀌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봐도 계속 까맣기만 했다. 1학년들은 잽싸게 각자의 폰을 꺼냈다.
“햄들, 저희 것도 안 켜져요.”
“배터리 남아 있었나?”
“네.”
기상호, 정희찬, 김다은, 공태성의 폰도 켜지지 않았다. 기상호와 김다은은 쉬는 시간에 애니메이션을 봤으니 배터리가 좀 더 줄어들기는 했겠지만 다른 둘은 설명할 수 없었다. 가만히 둬도 배터리가 쭉 닳을 만큼 넷의 폰이 낡지도 않았다.
“X발, 내 것도 안 켜지잖아?”
성준수의 폰까지 안 켜지니 부원들 모두가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야, 체육교사실 가자. 거기 전화기 있어.”
“주말인데 잠겨 있지 않을까요?”
“확인은 해 봐야지.”
다들 불안함과 함께 체육관 안에 있는 체육교사실로 향했지만, 주말이라고 그 문은 잠겨 있었다. 부원들 모두가 한 번씩 힘을 써서 열어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육관 문처럼 철문도 아닌 나무문이고 부원들 중 제일 무거운 김다은이 몸을 부딪혔는데도 그랬다.
“젠장.”
“어떻게 된 걸까요?”
술렁이는 지상고 농구부 위로 떨어진 것은 종이 한 장.
「
나는 14와 10의 사자.
체육관에서 나가고 싶다면 문제를 풀어라.
19 1 12 10 13 19 19 13
1 19 19 9 14 21 1 1
4 8 8 0 21 0 0 0
」
“레알임…?”
김다은의 중얼거림은 지금의 지상고 농구부 전원의 기분을 대변하기에 참으로 적절했다.
종이를 이리저리 확인한 후, 지상고 농구부는 다시 한 번 체육관 문과 체육교사실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두 문은 약간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폰이 배터리 때문에 꺼진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도 충전기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결국 종이가 시키는 대로 해 보자는 결론에 다다랐고, 종이를 중심으로 여섯 명이서 둘러앉았다.
“14와 10의 사자…”
“상호, 추리 만화에 이런 상황 안 나오나?”
“나오는데…, 당황스럽다.”
평소 하찮게 미디어믹스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기상호였지만 그 미디어믹스에 나올 만한 상황이 현실로 닥치니 입이 잘 안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기상호와 잘 어울리던 김다은도 마찬가지인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파워 업 이벤트같이 재미있는 일도 아니고 범죄였다. 게다가 피해자의 입장.
“만화였다면, 14와 10이 중요한 단서일 거임.”
“그쵸. 당장 단서는 그것뿐인 것 같고.”
“그럼 14와 10 하면 떠오르는 걸 말해 봐요.”
그럼에도 김다은과 기상호는 만화에서 가져온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정희찬은 밝은 목소리로 토론을 제안했다. 분위기를 밝게 해 보려는 셋의 노력에 다른 셋도 표정을 풀었다.
“KBL 최초의 영구결번이 14번이었다.”
“10번은… 슈터 번호로 통한다던데.”
진재유와 성준수가 떠올린 것은 농구.
“축구에서 10번은 펠레 넘버임.”
“펠레? 축구 선수?”
“ㅇㅇ 펠레 같은 에이스가 달음. 14번은… 요한 크루이프? 티에리 앙리?”
김다은이 떠올린 것은 축구.
“번호라면… 10번은 네온, 14번은 규소.”
공태성이 떠올린 것은 원자.
“부산 버스에도 10번하고 14번이 있죠? 강서14하고 사하14.”
정희찬이 떠올린 것은 버스.
“으음……”
하지만 등번호도 원자 번호도 버스 번호도 문제의 숫자들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였다. 숫자들은 총 18개. 14와 10이 다 있는 것도 아니고 10만 있었다. 그 10도 고작 1개뿐.
“상호 니는 뭐 생각나는 거 없나?”
“만화… 보통… 바꿀……”
“뭐?”
가만히 있던 기상호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셈을 하듯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기상호의 옆에 앉았던 정희찬과 김다은은 슬쩍 그와의 거리를 벌렸고 둘의 옆에 있던 공태성과 성준수는 순순히 공간을 내 주었다. 진재유도 기상호의 표정을 슥 보고 입을 가만히 뒀다.
“한글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한글?”
“한글 자음이 14개, 모음이 10개니까요.”
“!”
이윽고 기상호가 꺼낸 아이디어에, 다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한글 순서로 풀면 되는 거가?”
“아마도. 근데 문제가 있다.”
“문제? 아…”
정희찬이 질문하자 기상호는 반만 긍정하고 종이의 한 숫자를 톡톡 건드렸다.
19.
10은 물론 14보다도 컸다.
“하 씨X, 사자인지 뭔지 도대체 뭐하는 새…”
성준수는 머리를 쓸며 자신들을 가둔 존재에 대한 짜증을 표했다. 기상호의 의견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 쌍자음!”
“뭐?”
“된소리요. 쌍기역, 쌍디귿, 쌍비읍, 쌍시옷, 쌍지읒.”
그에 보답하듯 기상호는 빠르게 활로를 더 찾아냈다. 다만 발음이 뭉개져 욕설로 들릴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19까지는 채울 수 있는데…”
“21이 문제네.”
“으음…”
기본 자음과 쌍자음으로 19개가 채워졌지만, 19보다 큰 21이 다시 풀이를 가로막았다.
“자음 말고 모음은 어떠노? 겹모음 합치면 21개인데.”
“그걸 외우고 다님?”
“계산 못 하나?”
“님 방금 좀 재수 없었는데 봐 주겠음.”
공태성이 모음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기상호의 표정은 시원치 않았다. 공태성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김다은의 재수 운운에 그를 툭 치기만 하고 기상호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3학년들은 떠오르는 것이 없어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초성은 아니겠네요.”
그러자 정희찬은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걱정해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초성?”
그때 기상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희차이 니 말 잘했다.”
“엥?”
“준수햄, 일지 한 장만 써도 될까요?”
“그래.”
정희찬이 물음표를 띄우는 가운데 성준수는 순순히 농구부 활동 일지 중 쓰지 않은 종이를 뜯어 펜과 함께 건네주었다. 종이만으로 뭔가를 할 것 같지는 않아 펜도 준 것이었는데 과연 기상호는 펜이 잘 나오는지부터 확인했다.
“뭔데?”
“뭐 알아냈음?”
“후후,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습니다.”
어디서인가 들어본 대사 ― □전일 ― 가 기상호의 들뜬 기분을 알렸다.
“태성햄, 교과서에 초성, 중성, 종성 나오죠?”
“글제…. 아, 혹시?”
“예.”
공태성은 기상호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은 걸 알아챘는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 상관이고?”
“그니까…, 종성이 받침 아입니까.”
자연히 풀이와 설명 분담이 이루어졌다.
받침은 한글의 기본 자음 14개 다 쓸 수 있고, 쌍자음 중에서는 쌍기역과 쌍시옷만 쓸 수 있다.
또, 서로 다른 자음으로 이루어진 겹받침이 있다.
“겹받침이 11개입니다.”
기역시옷, 니은지읒, 니은히읗, 리을기역, 리을미음, 리을비읍, 리을시옷, 리을티읕, 리을피읖, 리을히읗, 비읍시옷.
“그럼 19개에서 더 늘어나겠네?”
“예. 27개입니다.”
14+2+11=27.
“줄도 세 줄인 게, 윗줄은 초성, 가운뎃줄은 중성, 아랫줄은 종성 같아요.”
“맞나.”
“상호, 모음 썼나?”
“쓰려고요.”
기상호의 펜은 자음을 다 쓰고 모음을 쓰기 시작했다.
아, 애, 야, 얘, 어, 에, 여, 예, 오, 와, 왜, 외, 요, 우, 워, 웨, 위, 유, 으, 의, 이.
“됐다!”
초성에 들어갈 기본 자음과 쌍자음 19개, 종성에 들어갈 자음 27개.
중성에 들어갈 모음 21개.
“이제 이 순서로 풀면 된다는 거냐?”
“틀림없습니다.”
“해 보죠.”
기상호와 공태성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기상호는 문제의 종이를 일지 종이 옆에 두고 대조를 시작했다.
“기역 다음에 쌍기역 오고, 니은, 디귿, 쌍디귿…”
초성에 올 수 있는 자음 중 19번째는 히읗, 1번째는 기역, 12번째는 이응, 10번째는 시옷, 13번째는 지읒.
「ㅎ ㄱ ㅇ ㅅ ㅈ ㅎ ㅎ ㅈ」
중성에 올 수 있는 모음 중 1번째는 아, 19번째는 으, 9번째는 오, 14번째는 우, 21번째는 이.
「ㅎ ㄱ ㅇ ㅅ ㅈ ㅎ ㅎ ㅈ
ㅏ ㅡ ㅡ ㅗ ㅜ ㅣ ㅏ ㅏ」
“숫자 0은 없는 거라 치고…”
종성에 올 수 있는 자음 중 4번째는 니은, 8번째는 리을, 21번째는 이응.
「ㅎ ㄱ ㅇ ㅅ ㅈ ㅎ ㅎ ㅈ
ㅏ ㅡ ㅡ ㅗ ㅜ ㅣ ㅏ ㅏ
ㄴ ㄹ ㄹ 0 ㅇ 0 0 0」
“0 지울게요.”
보기 편하게 슬래시를 넣고 0을 까맣게 칠해 지운 결과.
「ㅎ / ㄱ / ㅇ / ㅅ / ㅈ / ㅎ / ㅎ / ㅈ
ㅏ / ㅡ / ㅡ / ㅗ / ㅜ / ㅣ / ㅏ / ㅏ
ㄴ / ㄹ / ㄹ / ■ / ㅇ / ■ / ■ / ■」
“한… 글… 을… 소… 중… 히… 하… 자!”
덜그럭.
체육관 문 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성준수가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열리고 공기가 바뀌었다.
여섯 명이 나란히 숙소로 가는 길, 성준수의 폰이 울리며 전원이 켜졌음을 알렸다. 손도 안 댔는데 켜진 것이 이상했지만 이미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을 겪은 여섯 명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감독님 전화다.”
발신인은 이현성 감독.
[연습 끝났나?]
“네,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고생했다.]
이현성의 말을 들은 성준수는 부원들을 슥 쳐다보았다. 화난 것은 아니고 웃기긴 한데 웃기는 싫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부원들은 오늘 겪은 상황을 토대로 이현성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상호와 김다은은 그새 오타쿠 놀이 중이었다. 대략 고생했다고 토닥이는 내용이었다.
[숙소에서 보재이.]
“네.”
통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지상고 농구부가 겪은 일은 이현성에게도 서인진에게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체육관에서 나오고 나서 기상호가 문제의 종이를 가져와야겠다고 들어갔는데 종이가 없어졌다고 했다. 성준수는 농구부 일지 장수가 뜯기 전과 똑같다는 걸 알아챘다.
끝까지 이상했지만 다친 사람도 없고, 체육관 문도 멀쩡하니 다들 덮어두기로 했다.
14와 10의 사자는 누구였을까.
어째서 자신들을 가뒀을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없지만 지상고 농구부는 각자 한글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장용 결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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