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상] 파파야 블루
파파야는 파랬고 내 마음은
「타이 타임」, 서교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태국 음식점 이름이었다.
‘이름 재밌게 지었네.’
올해 서교대 농구부원이 된 정희찬은 생각했다. 맛없는 학식을 피해 대학가를 헤매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에게 타임이라는 단어는 아이들이 놀다가 으레 외치는 그것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가게 안은 점심시간이라고 제법 복작복작했다. 정희찬은 창밖이 보이는 위치의 긴 테이블에 앉았고 메뉴판에서 족발 덮밥 2그릇과 닭날개 튀김, 리치 주스를 골랐다.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은 정희찬의 복장으로부터 그가 서교대 체대생임을 유추해냈는지 동석할 사람의 유무를 묻지 않고 포스트잇에 메뉴를 적었다.
몇 분 뒤 직원이 가져다 준 밑반찬은 채소 무침 비슷해 보였다. 젓가락으로 집어서 보니 얇게 썬 어떤 재료와 라임, 땅콩이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모양새였다. 맛은 적당히 매콤했고 식감은 아삭아삭해 부드럽고 살짝 느끼할지도 모르는 덮밥과 잘 어울릴 듯했다.
“이 얇은 거 뭐예요?”
“파파야요.”
얇은 재료의 정체는 파파야.
“파파야라고요…”
정희찬은 잠시 언어를 잊었다. 아니, 그의 입 전체가 마비된 듯 고춧가루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희차이, 내 혀 개않나?’
그의 의식은 파파야에 얽힌 어느 날로 가라앉았다.
그날에 대해 말하려면 태초중학교 시절을 꺼내야 했다.
태초중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던 작은 구멍가게에는 슬러시 기계가 있었다. 가격은 500원, 사이즈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종이컵 조금 초과, 맛은 2가지. 기본은 콜라 맛과 사이다 맛이었는데, 가끔 오렌지 맛, 파인애플 맛, 포도 맛 등 다른 음료수로 낸 것 같은 맛들이 끼었다.
어느 날, 사이다 맛보다 인기가 많았던 콜라 맛 대신 파파야 맛이 들어왔다.
“파파야 맛이요.”
“저는 사이다 맛.”
정희찬은 새로운 맛이 궁금해 파파야 맛을 골랐고, 기상호는 무난한 사이다 맛을 골랐다.
“희차이, 그거 아노.”
“뭐를?”
파파야 맛 슬러시는 맑은 하늘보다 조금 더 깊어 보이는 푸른빛이었고, 맛은 달달했다. 과일 맛이라고 주장하는 슬러시 대부분이 그랬듯 다른 과일 맛과 무슨 차이인지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익숙한 과일은 아니니까 흔하지 않은 맛이 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 무색했다.
“파파야는 파란색이 아이고 주황색이라 하대.”
“진짜가?”
“후르츠 칵테일에 주황색 그게 파파야라고.”
그때 기상호는 파파야에 대한 토막 지식을 늘어놓았다. 정희찬은 좀 충격에 빠졌다. 내는 그거 망고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화채를 만들 때 넣던 후르츠 칵테일, 노란색은 딱 봐도 파인애플인데 주황색은 황도나 오렌지라기엔 맛이 다르니 열대과일 중 주스로 종종 보이던 망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럼 이건 와 파란색인데?”
“그건 모르겠는데…. 아, 오렌지 맛이랑 헷갈리지 말라고?”
“오.”
기상호는 사이다의 색대로 정직하게 하얀 슬러시를 쪽 빨며 그럴싸한 추론을 내놓았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평소의 소소한 화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그 파파야, 파파야 맛이 문제였다.
그날 있었던 일은 파랗지도 않은 주제에 푸른빛을 띠던 파파야 맛의 과실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 일은 지상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맞은 첫 방학 중 일어났다.
방학에도 그가 속한 농구부의 연습은 계속됐다. 그러나 협회장기의 설움을 다 털어낸 쌍용기의 성적 덕인지 조금 느슨해진 감이 있었다. 내년이 오면 목매야 하는 2학년이 없었기 때문에 ― 3학년 2명과 1학년 2명과 학적상 1학년 2명 ―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타임이라는 단어가 특별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수가 여섯 명뿐이기에 절대 선언할 수 없는 가비지 타임. 항복할 수 없었던 운명.
“조심해서 놀다 와라.”
“넵!”
아무튼 감독의 허락 아래 평소보다 이르게 연습을 마친 부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린 축제로 놀러나갔다. 정희찬도 집에 가기 전 기상호와 함께 축제의 먹거리 부스를 돌아다녔다.
“어라, 희차이, 저거.”
“슬러시 아이가.”
그러다 태초중 졸업 뒤로 본 적 없는 슬러시 기계를 발견했다. 딸기맛과 파인애플 맛과 파파야 맛이라고 적힌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순서대로 빨강, 노랑, 파랑인 것이 요즘 유행한다는 무지개 슬러시용 색인 듯했다. 가격은 1000원으로 크기는 중학생 때 사 먹었던 것의 2배 정도.
“파파야 맛 주이소.”
“전 딸기.”
그곳에서 파파야 맛을 고른 것은 기상호였다. 기상호는 지상고 하면 파란색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정희찬은 상큼하게 무시했다. 지상고 유니폼 파란색하고 파파야 파란색하고 같나. 빨대는 똑같이 녹색으로 받았다.
“달다―”
“시럽 맛이제 뭐.”
“그건 그러네.”
딸기 맛 슬러시는 음료수 맛인지 시럽 맛인지, 아니면 진짜 딸기 맛인지는 불확실했으나 달기는 엄청 달았다. 기상호는 지상고 생각으로 파파야 맛을 골랐으면서 맛에 냉정했다. 이내 두 사람은 마주보고 킥킥 웃었다.
“가만― 블루 하와이도 파파야인가?”
“블루 하와이?”
“일본 애니 빙수에 뿌리는 파란 시럽.”
“아, 그거.”
그때 기상호가 파파야로 꺼낸 화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빙수―카키고오리. 빨간 시럽은 딸기고 노란 시럽은 레몬이랬는데 파란 시럽은 블루 하와이라고만 해서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로 당시 정희찬은 간 얼음에 시럽만 뿌린 것이 뭔 빙수냐고 깠었다.
뒷날 둘은 그 블루 하와이가 파파야와 무관한 칵테일에서 유래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
“희차이.”
“응?”
“내 혀 개않나?”
정희찬은, 그때 자신이 무더위에 좀 돌아버린 게 아닌지 생각했다.
일기예보는 전날보다 덜 덥겠다고 했다.
적외선을 뿜어내는 사람들도 평일이라서 그런지 많이 없었다.
기상호가 내민 혀는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싸구려 단맛의 파랑 따위는 다 삼켜버릴 듯한 색이었으며, 정희찬은―
“… 아 씨.”
정희찬은 파파야 무침을 아작아작 씹어 삼켰다. 메인 메뉴인 덮밥이 나오기도 전에 그릇이 비었다.
맵고, 액젓 같은 짭짤한 맛마저 나는 파파야 무침은 하나도 달지 않았다.
정희찬은 기상호의 혀를 빨아들이고 싶다는―솔직하되 정제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태였으면, 분명 키스해 버렸을 것이다. 얼굴이 달아올랐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축제가 끝나고 숙소와 집으로 갈라지고 나서 정희찬은 기상호와 함께 한 시간을 되돌아봤고, 숨어 있었던 애정을 발견해내고 말았다.
사실 숨어 있었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왜냐하면 그 애정은 우정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기상호에게 전달되었으니까. 우정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다, 애니 덕후 기상호와 붙어다녔더니 애니 속 세계에 들어와 버린 거냐고 정희찬은 침대 위에서 몸부림쳤다.
그래서 정희찬과 기상호의 관계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냐면, 아니었다.
당연했다. 손뼉도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그 일로 변한 건 정희찬뿐이었다. 그 변화도 정희찬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정희찬 생각에 기상호는 단지 자기 혀가 색소 진한 시럽에 물들어 파랗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랬던 거였다. 정희찬 본인도 몰랐던 감정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정희찬은 지금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기상호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나서 친구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기상호가 거절하는 것, 친구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도, 자신이 그럴 자신이 없는 건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잘만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퍼 줬는데도 그랬다.
망할 파파야, 파파야 맛.
왜 주황색이면서 파란색을 띠어서, 파란색의 지상고를 좋아한 기상호의 눈에 들어오고 파란색의 블루 하와이인지 뭔지를 떠올리게 해서, 우정을 벗겨냈는지.
핑계라는 걸 알았다.
파파야 맛 슬러시가 없었어도, 언젠가 돌이켜본다면 깨닫게 될 감정이었다. 일찍 깨달은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어서 문제였다.
그리하여 정희찬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날이 떠오를 때면 방금처럼 순순히 가라앉았다.
지금도 그는 기상호의 좋은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였다.
대학교 축제는 그 대학교 학생들만 즐기는 행사가 아니었다. 어떤 대학교는 다른 대학교 학생들의 출입을 막는다고 하는데, 서교대는 아니었다.
“희차이~!”
“상호!”
주익대학교 1학년 기상호는 당당하게 서교대학교 내부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에서 내렸다. 수비 스페셜리스트 기상호는 수강 신청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공강을 따냈고, 이번 주 공강을 농구부 연습 시간 전에 서교대 축제에서 보내기로 했다. 주익대 축제가 서교대 축제보다 늦어서 생긴 일이었다.
“연예인들도 온다던데, 아까워서 우야노?”
“내 연예인엔 관심 없다.”
“맞나.”
주익대 농구부 연습 시간에 맞춰 돌아가려면 저녁의 연예인 공연은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3D보다 2D에 관심 많은 기상호에게는 별 의미 없었다.
“밥 무웄나?”
“안 무웄제. 여 학식 괘안나?”
“니 축제인데 학식 무러 왔나?”
“역시 그건 아이제?”
대다수의 오전 강의가 마무리된 시간, 정희찬과 기상호는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자고로 대학교 축제의 묘미는 푸드 트럭과 학생들이 조리한 음식. 그들의 위장은 학식과 축제 음식들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궁금한 둘이었다.
“어라, 저거.”
“윽.”
그러나 기상호가 가리킨 곳은 정희찬의 궁금증을 식혔다. 푸드 트럭 옆에 세워진 간판에는 파파야 주스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아주 선명한 주황빛이었다.
정희찬은 한 번 가고 다시 찾지 않았던 「타이 타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파파야 무침은 너무 강력했다. 파란색도 주황색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빨갛고 하얀 것에 가까웠던 파파야 무침 ― 쏨땀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정희찬은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 이 아직도 생생했다.
“희차이?”
“어?”
“내 저거 먹고 싶은데 줄 서재이.”
“아, 맞나.”
기상호가 가리킨 것은 파파야 주스가 아닌 파파야 주스 밑에 있는 볶음 요리였다. 팟 카파오, 8000원. 정희찬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상호와 함께 줄을 섰다.
“팟 카파오… 하고.”
“내도 같은 거.”
“아, 팟 카파오 2개 주세요.”
줄은 금방 빠졌다. 기상호는 계좌이체, 정희찬은 현금으로 계산했다. 둘 다 주스는 주문하지 않았다.
“이거 맛있다.”
“음.”
팟 카파오는 다진 돼지고기와 바질의 조화로 근사한 맛을 냈다. 다만 사람들이 많아 서서 들고 다니기에는 힘들었던 관계로 기상호와 정희찬은 비교적 조용한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들의 위장은 2인분을 너끈히 넘어도 그들의 손은 2개당 1인분밖에 하지 못했다.
“희차이.”
“응?”
“니 파파야 싫나?”
“… 그건 와 묻는데?”
아, 또 파파야다. 정희찬은 파란색 파파야가 다시 미워지려고 했다. 아니, 이번에는 주황색 파파야를 미워해야 하나. 기상호는 정희찬도 잘 알고 그를 그 주익대 농구부로 보내준 관찰력으로 정희찬이 푸드 트럭의 파파야 주스를 보고 얼굴이 굳어졌던 걸 똑똑히 본 모양이었다.
“희차이.”
“와.”
이내 기상호는 색소 옅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고백 안 할 기가?”
정희찬의 의식을 깨부쉈다.
“뭐, 뭐?”
“내 아직 성인은 아이지만…”
“아니, 아니, 잠깐만!”
예상 밖의 발언에 정희찬의 입이 떡 벌어졌고, 의자에 둔 팟 카파오 그릇이 살짝 흔들렸다.
“파, 파파야하고 고백이 먼 상관인데?!”
“니 기억 안 나나. 지상고 1학년 때.”
“지상고 1학년?”
기상호는 태연하게 자기 그릇을 멀찍이 치웠다. 지상고 1학년이라고 하면, 고백이라고 하면 정희찬은 딱 1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아, 설마.
“첨엔 긴가 민가 했는데, 니 눈깔 보고 확신했제.”
기상호는 알고 있었다.
“내 첫 키스 파파야 맛이 될 줄 알았다이가.”
그의 시야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던 정희찬이 어떤 시야를 가졌는지. 파파야가 주황색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웃어주던 그 얼굴이, 더운 여름날 밤 어째서 붉어졌는지.
“니가 말 안 하려는 것 같길래 암 말 안 했는데…, 내는 말해야겠다.”
“상호야.”
“희차이, 니만 괜찮으면, 우리 사귈까.”
니는, 그걸 뭔 푸드 트럭 음식 먹고 말하는데. 정희찬의 목구멍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와, 와 우노?!”
“상호야…, 니는 진짜……”
그 떨림을 멈출 수 없어, 정희찬은 기상호를 꽉 끌어안았다.
봄이 왔었다는 걸 여름에 알았다. 그래서 묻어두고 가을과 겨울을 지냈더니 봄이 선명하게 찾아왔다.
학교 밖 축제의 파란 파파야 슬러시는 정희찬의 마음을 감췄지만, 서교대학교 축제의 주황색 파파야 주스는 기상호의 마음을 끌어냈다.
“스페셜리스트다……”
파파야.
파파야는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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