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종뱅] 驟雨 上

地獄

俗世 by 麻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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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풍 창작조선, 인외물

  • 12,710 자

驟雨 上


소나기가 내렸다.

병찬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서늘한 사당의 안은 요란한 바깥과 달리 조용할 뿐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도포 자락이 스치는 게 느껴졌다. 우수수 들려오는 소음과 달리 사당의 규모는 넓기만 하다. 내리는 빗방울을 시선의 끄트머리로 좇으면서 병찬이 마루의 끝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정갈한 걸음으로 굳게 닫힌 장지문 앞에 섰다. 나뭇살의 안쪽은 어스름한 불빛이 겨우 비친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안에 있는 이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이었다. 넓게 느껴지는 사당이지만, 유독 이 방은 더욱 넓고 광활하게 느껴졌다.

그건 그 안에 존재 때문일 터였다. 조용히, 벌어진 문의 안으로 들어선 병찬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옻칠 된 나무의 감촉이 소나기의 습함으로 인해 조금 진득하게 느껴졌다.

고개와 몸을 납작 수그린다. 긴 도포의 끝자락이 바닥에 닿았다. 병찬이 습기를 머금어 조금 더 짙은 색이 된 마룻바닥이 아닌, 새파란 자신의 옷자락에 시선을 두었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딱해 보이기 짝이 없다.

궁에 사는 이들은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말이 핏줄의 소임을 다할 기회이지, 실제로는 뒷산에 좌정한 무언가의 제물로서 이곳에 온 것이라는 걸 말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는 왕의 서자. ‘군’의 칭호도 받지 못한 사생아.

병찬은 자신이 그의 눈에 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의 핏줄 같은 대우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었다. 다른 형제들은 다 받는 ‘군’이라는 호칭도, 책봉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목숨이나 연명하면 그만이었던 딴에 갑작스럽게 내려진 어명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었다. 생각이 길게 이어진다.

실상 당혹스러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고립된 사당, 주어진 목적 이외에 사람들은 방문하지 않는다. 매일 정해진 시간 진행되는 의식. ‘의식’이라는 장황한 어휘와 달리 병찬이 별달리 하는 일이 없다.

납작 엎드린 채, 방의 주인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고개를 수그린 병찬은 딱히 자신이 불쌍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저에 관한 연민으로 잠겨있을 나이는 지났다. 그러니 병찬은 왕자의 대우를 받지 못해 한 맺혀 살았던 시간은 잊고 어명을 받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걱정할 이도 없었다.

그것이 군의 칭호를 받지도 못한 서자의 역할이었다. 무릇, 그저 그렇게 무참히 져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면 그 최후가 무엇일지 모를 것의 ‘제물’이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하에 벌어진 판단이었다.

그리고.

유유히 타오르던 등불이 술렁인다. 그것에 병찬은 고개를 더 아래로 조아린 채 생각을 멈췄다. 무언가가 불빛의 아래에서 느껴졌다. 꺼림칙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광활하던 방 안은 이제 자신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까만 무언가가 너울대는 빛을 따라 움직인다.

매번 같은 시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할 때. 이제는 익숙해진 사당. 병찬은 울렁거리는 것을 시야의 끄트머리에 담아내며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것들을 되새긴다.

저게 ‘신’이라고?

어둠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어느 순간 하나의 형체로 변한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던 어둠은 새카만 머리카락으로 바뀌었다. 그 가운데 창백한 얼굴이 놓인다. 짐승의 것처럼 샛노란 시선이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뜨인 눈은 깜박이지 않는다. 어두운 밤의 부엉이, 혹은 그 외의 무언가처럼.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집요한 시선이 병찬을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이하다는 것을 느낌에도 병찬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왜 안 드는 거지?”

순식간에 비에 젖은 수풀의 냄새가 번진다. 어느 정도 떨어졌던 몸이 훅, 하고 병찬을 향해 밀려들었다. 먼 어둠에 서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병찬의 얼굴 앞에 놓인다.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병찬의 어깨와 무릎에 닿았다. 결 좋은 머리칼의 끄트머리가 구불거린다. 병찬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거야 고개를 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수그릴 대로 수그린 병찬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새하얀 남성의 몸과 긴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제 말을 따라 머리카락이 쏟아진다. 눈앞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묘하다. 병찬은 처음 느꼈던 ‘기이함’과 달리 남자에게 별다른 두려움은 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곳에 기거하게 된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제가 이 방에 걸음을 할 때가 되면 신호처럼 내리는 소나기가 기이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왜. 있잖는가. 맑은 날의 소나기는 누군가의 눈물이노라고. 밤이건만,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서 빗물이 쏟아지니, 이 또한 누군가의 눈물일지로다. 병찬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병찬은 노골적일 정도로 쏟아지는 소나기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서늘하고 창백한 손이 병찬의 고개를 붙들었다.

“왜?”

“명령해야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되묻는 목소리에 짜증이 스민다.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붙잡힌 뺨이 눌렸다. 병찬은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재빨리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깔았다. 억지로 고개가 들린 상태임에도 병찬은 감히 종수를 응시하지 않았다. 시선이 엇나간다. 바깥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의 소리가 어수선하다.

남자는 기어코 자신을 보지 않는 병찬이 짜증 난 것만 같았다. 고개를 붙든 손아귀에 강제로 힘이 들어갔다. 병찬은 이 변덕스러운 ‘신’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곤란했다. 눈앞의 남자는 이상하다. 고개의 앞에 수려한 얼굴이 드리워진다.

길게 자란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에서도 샛노란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저 형형한 눈이 기어코 눈앞의 남자를 더욱 인간과 다르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변덕스러운 저 무엇일 것과 눈을 마주치기 싫다. 병찬이 더 고집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날 봐.”

그런 병찬의 기색을 알아챈 것처럼 남자가 거칠게 으릉거렸다. 난폭한 목소리, 그 안에 스민 노기. 그제야 병찬이 명령을 따르며 아래로 내리깔았던 눈을 올려 남자를 응시한다. 그, 짐승과 같은 눈이 마주쳤다.

시선에 담긴 것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들끓는다. 병찬은 정말로 눈앞의 남자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제물을 직접 선택한 주체는 남자다. 병찬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을 선택하던 그때, 겨우 생을 연명하는 병찬은 남자와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노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남자의 샛노란 눈은 자신을 향해 들끓는다. 병찬은 어떠한 것도 알지 못했다. 굳게 닫힌 장지문 사이의 틈으로 요란한 소나기의 소리가 거칠어진다. 어두운 밤. 폭풍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병찬이 입술을 꾹 다문 채, 표정을 지운 얼굴로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야.”

속삭이는 듯이 목소리가 잠겼다. 그러니 병찬은 갑작스럽게 오늘, 남자가 보이는 기이한 행동의 연유를 알지 못한다. 남자의 말 안에 애한이 스민다. 거대한 좌절감에 무너진 파편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무너져 버릴 듯한 벼랑처럼 위태롭다. 병찬은 그것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남자고, 자신은 자신이다. 그는 사당의 주인이며, 자신은 고작 제물일지 무엇일지 모르는 나부랭이다. 그러니 그는 이내 눈앞의 남자가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듯이 눈매를 구기는 게 시야에 들어와도 얼굴에 무감함 외에 다른 표정을 띄우지 않는다.

“박병찬.”

남자는 정말로 이상했다.

병찬은 문의 너머, 쏟아지는 소나기의 소리에나 집중했다. 평소에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사라지는 것만 반복했던 남자는 오늘, 무언가 이상한 마음을 먹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불리는 소리에 답하지 않는다. 시선이 느껴진다.

영문이 모를 정도로 절절하게 끓고 있는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병찬에게 그대로 투과된다. 영문을 모르니 불쾌하기만 했다. 자신은 그에 관해 알지 못하니, 저 치가 시선에 띄우는 절절함은 분명히 타인을 향한 감정일 테다.

누군가를 자신에게 투영하는 행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몇 년간,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기만 했던 영문 모를 것의 행동이라면 더욱.

생각의 흐름은 어지럽다. 병찬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쉬이 반응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화를 내거나, 울어버릴 것처럼 병찬을 바라보던 남자가 꾹 다물린 입술의 위로 제 입술을 포갠다.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으나, 간절하다.

병찬의 시선이 순식간에 흔들린다. 몸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든, 그는 남자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무게에 의해 단정하게 앉아있던 몸이 기우뚱, 뒤로 기울어진다. 새카맣고 구불진 머리카락이 병찬을 향해 우르르 쏟아진다. 바깥에서 폭풍을 머금은 천둥의 소리가 들렸다.

“그딴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잠긴 목소리는 처절하다. 병찬은 문득 외면하던 것을 깨달았다. 어두운 밤, 구름 하나 없이 쏟아지는 바깥의 소나기는 남자였다. 남자 그 자체와 다름이 없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 저와 그 둘만이 갇힌 것만 같았다. 머릿속을 두드리던 불쾌감이 흐려진다.

남자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남자가 처절해 보였던 탓인지. 병찬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평소라면 하지도 않았을 행동이다. 겹쳐졌던 입술의 감촉은 뒤늦게 사람의 것처럼 그가 호흡한 사실을 되새긴다.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울 것 같은 얼굴. 뺨에 닿는 손바닥에 남자가 고개를 묻는다.

평소처럼 날카로운 언행도, 틱틱대는 행동도 없었다. 자신 따위가 뭐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곤란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병찬은 다시금 제게 입을 맞춰오는 남자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 들키면 큰일이다. 차라리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낮이었다면 궁인들이 출입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입술에서 떨어진 남자의 고개가 허겁지겁 병찬의 목덜미를 향한다. 살갗에 코끝을 깊숙이 파묻더니 그대로 그의 향을 들이마셨다. 간절한 것을 드디어 찾기라도 한 것만 같은 움직임이다. 애정에 굶주리고, 감정에 굶주린 자의 행태다. 단단한 팔이 병찬을 끌어안았다.

“제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랍니까?”

변덕을 부리는 남자에게 물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닿는 살갗은 맨몸이었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병찬이 할 수 있는 것은 몇 없었다. 물음을 입술의 바깥으로 내뱉은 후, 병찬은 남자에게서 돌아올 답들을 상상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힘에 의해 팔다리가 날아가거나, 강제로 범해지거나, 남자가 자신을 향해 띄우는 감정에 따라 영원히 이곳에 묶이는 등.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병찬은 앞선 것들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그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병찬이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은 탓에 저를 뒤덮던 새카만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전부 쏟아져, 시야에 들어오는 건 방의 서까래뿐이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나, 미워하지 마.”

지독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나 버리지 마, 박병찬.”

괴이하고 괴이한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감정이다. 지독히도 인간적인 결의 감정이면서도, 그 무게감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몇십, 혹은 몇백 동안 묵기라도 한 것처럼 묵직한 것이 병찬의 가슴께를 짓누른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갑갑하다. 이 남자는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안 그럽니다.”

병찬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위치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을 이어가는 게 바로 박병찬의 삶이다. 그러니. 여기서 죽거나, 혹은. 당신을 미워할 이유도 없는데 어찌 미워하며, 당신이 자신의 소유도 아닐 진데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면 나 사랑해 줘.”

온통 어쩔 줄 모르는 애 같은 조름. 병찬이 팔을 뻗었다. 등의 뒤로 차가운 살갗이 닿는다. 남자의 외형은 완연한 인간이건만, 체온은 그러지 못하다. 이는 거대한 괴리였다. 품에 얼굴을 묻은 남자가 눈을 감자 목덜미에 긴 속눈썹이 스치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병찬은 그 요구에 대한 답만큼은 할 수 없었다.

 

 

* * *

 

 

남자가 출몰할 때는 소나기가 내린다.

몇 달째 이곳에서 살며 익힌 법칙이었다. 병찬이 멀뚱멀뚱 툇마루에 앉은 채 우거진 숲을 바라봤다. 궁 뒤편, 높은 산에 마련된 사당은 하루 두 번을 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 무료함을 따라 병찬이 몸을 뒤로 눕혔다.

털썩, 가벼운 소리와 함께 긴 도포 자락이 툇마루에 흐트러진다. 눈에 들어오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날, 영문 모를 그날 이후 병찬의 머릿속은 남자의 투정 어린 목소리로 어지러웠다.

병찬은 여전히.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술렁스럽기만 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에 의해 나뭇잎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난다. 소나기가 몰려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멍청이같이.”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여전히 소나기는 내리지 않았다. 병찬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위를 향한 시야에 새카만 도포를 두른 남자가 비친다.

“무슨 일이에요? 원래는 이 시간에 잘 안 나타나면서.”

어제부터 온통 이상한 것들 투성이다. 그 ‘이상함’에는 날씨도 포함이었다. 병찬은 버르장머리 없게도 툇마루에 눕혔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남자가 직접 제지하면 되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여긴 내 집이야. 언제 나타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날카로운 반응은 전날 밤과 다르다. 병찬이 묘한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계속해서 시선이 이어지자 불쾌하기라도 한 건지 남자가 고개를 팩 돌렸다.

“됐고. 너 시간 있으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사당의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방해받은 남자의 얼굴 순식간에 구겨졌다. 병찬이 뉘었던 몸을 일으키고는, 사당의 문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궁에서 온 건가?

“계십니까.”

몸을 일으킨다. 어떤 호칭도 붙이지 않는 걸 보면 궁에서 온 게 맞을 터였다. 바닥을 딛고 선 탓에 남자와 자신의 눈높이가 더욱 뚜렷하게 부각 되었다. 병찬이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나갔다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당장이라도 입술을 비틀어 열어 나가지 말라, 명령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면 온갖 말이 궁에서 쏟아질 게 분명했다.

시기하고 헐뜯고 조롱한다. 궁의 생활이 익숙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치 않는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잊혀지기를 원했다. 본디 요란하게 기억되는 이들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병찬은 제게 자유가 없다는 것도 존재의 명확함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병찬의 의지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마루의 위에 꼿꼿하게 선 남자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문다. 순식간에 사당 주위로 조금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다녀오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투정을 억지로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신의 아래 부드러운 수풀이 밟힌다. 아마 정기적으로 사당을 청소하는 궁인들 아니면, 자신의 식사를 책임지는 궁인들일 것이었다.

“불렀습니까?”

궁의 사람들은 병찬을 동정했다. ‘왕자군’의 호칭도 받지 못한 가련한 서자. 궁의 이들은 그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눈앞의 불쌍한 서자는 존재 자체를 허락받지 못하였다. 궁인의 눈에 동정이 침잠한다. 시중을 들 궁인 하나 없이 이름 모를 사당으로 유배라니.

동정. 동정. 동정. 지긋지긋하다.

병찬이 입술을 씨익 끌어당겨 웃었다.

“오늘치 식사이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지긋지긋한 것들 사이에서 웃는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웃음에도 궁인의 동정은 떠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자신을 저렇게 본다고 하더라도, 저를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상황이다. 병찬은 아무렇지 않게 소쿠리를 받아 들었다. 음식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식욕은 돋지 않았다. 오히려 술렁하던 속이 더욱 요란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올라오는데 수고했습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눈가를 접는다. 역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거는 것만큼 귀찮은 것은 없다. 머뭇거리던 궁인이 병찬의 웃음을 보고서야 걸음을 돌렸다. 궁인이 멀찍이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병찬이 품에 안긴 것을 바라본다. 변변찮다. 병찬의 등 뒤로 바람이 불었다.

“뭡니까?”

도포 자락이 날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큰 손이 병찬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가린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보아하니, 그 빌어먹을 놈의 집주인이다. 자신도 다른 사내들보다 작은 편이 아니건만, 저보다 조금 크게 느껴지는 몸이 등 뒤에 닿았다.

“…….”

“손 안 내리실 겁니까?”

“…….”

뭐가 또 불만인 건데? 병찬의 재촉에도 남자는 손을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올린 병찬이 서늘한 손의 아래에서 눈을 끔벅거렸다. 뭐야? 갑작스러운 변덕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문득, 어제의 남자와 고집스러운 손이 겹쳐 보인다. 이제야 병찬은 남자의 한 가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남자는 확실히 어린 애 같은 면이 있었다.

그것도 길을 잃어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와 같은 면이.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가린 손이 떨어졌다. 병찬이 슬쩍, 고개를 틀어 남자를 응시한다. 남자는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것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뭘 봐.”

무슨 의도로 자신의 얼굴을 텁, 가렸는지 알지는 못하겠으나, 저 부루퉁한 얼굴이 우스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남자의 멀건 시선이 병찬에게로 닿는다. 이상하기는 해도 나쁜 놈은 아닐지도? 기이한 감상이 맴돈다.

“뭡니까. 그게.”

아마 이곳에 와서는 처음 짓는 웃음일 터였다. 얼굴을 가리던 남자의 손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놀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놀라기는 자신이 더 놀라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부터 변덕이란 변덕은 다 부리고 있으면서. 웃음기를 머금어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병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

“왜요?”

문득, 병찬의 시선에 불그스름하게 물든 종수의 귓등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금 큰 손이 자신의 얼굴을 빈틈없이 가린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자신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살아왔을 거면서?

“……귀엽네.”

남자에게는 아쉽게도 병찬은 눈앞의 존재를 기꺼이 귀여워할 법한 깡을 가지고 있었다. 물끄러미 창백한 손바닥이나 바라본다. 예상치도 못한 부분이었다. 전날의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했던 얼굴, 행동. 그리고 지금 부끄러워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까지.

찬찬히 살펴보니, 역시 남자는 어린애다. 몸은 다 커 어른을 흉내 내면서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해 자연스럽게 다듬어지지 못한 행동, 시선과 감정.

감정. 병찬은 형형하게 빛나던 눈동자 안, 쏟아지던 감정 중 하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또 인간적인 의문의 아래 그 시선을 억지로 묻어두었다. 그만한 거리감은 불투명한 박병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병찬이 얼굴을 가린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려줘요. 못 움직이겠잖아요.”

손목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끌려내려갔다. 떨어진 손끝이 움츠러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환하게 드러난 시야에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생각과 생각으로 온통 얽혀있는 얼굴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이면서, 이질적일 만큼 인간적이다.

“그나저나 머리 바닥에 안 쓸려요? 더러워질 텐데.”

병찬은 문득. 그 괴리감이 싫지 않았다.

위치가 애매하여 불투명한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홀로 서 있던 병찬에게 있어 묘한 소속감을 불러일으켰다. 남자 또한 딱딱하고 사무적이던 병찬의 말투가 가벼워졌음을 느낄 것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병찬의 말대로 길고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질질 쓸린다. 수풀에 내려앉은 새카만 어둠이 일질적이었다.

“끝을 들어드려요? 아니면 아예 조금 다듬어 드릴까?”

“닥쳐. 알아서 할 거니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게 우스워 병찬이 결국 다시금 웃음을 흘려 버렸다. 저만치 앞서서 움직이던 남자가 그새를 못 참고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이런 적, 새삼 처음이니까요.”

또다. 남자의 시선이 집요하게 병찬을 향했다. 병찬은 이제 그 시선이 딱히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눈가가 남자를 향한다. 그 시선의 앞에서 남자는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에 더 힘을 주더니 앞으로 휙휙 걸어가 버릴 뿐이었다.

 

 

* * *

 

 

그렇다고 박병찬에게 자유를 갈망한 적이 아예 없던 것이냐? 그건 아니었다. 병찬은 바깥의 삶을 갈망했다. 모호하게 묶여있는 것이 아닌, 말을 타고 바깥을 돌아다니기를 원했다. 그러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하기를 원했었다.

“그런데 안 갑갑해요?”

그 바람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황하고, 무색하다. 병찬에게는 허락되지 못한 것들이 허락된 것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생에 커다란 죄라도 지었나 보지. 막연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뭐가.”

“여기에만 있는 거.”

기이한 시간이 이어지면서부터 소나기는 내리지 않았다. 잔잔하고 청량한 바람이 훅 끼쳤다. 병찬이 저 멀리,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남자는 고집스럽게 팔짱을 낀 채 나무 기둥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앉으래도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툇마루에 가라앉은 게 보였다. 병찬이 문득 손을 뻗어 그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유는 몰라도 한참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던 거 아닌가?”

“……알아서 뭐 하게.”

“난 갑갑해서요.”

병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심을 흘렸다. 남자의 샛노란 시선이 물끄러미 병찬을 향한다. 눈동자에 형형하게 드러나는 의문과 많은 생각들 사이에서도, 병찬은 딱히 변명처럼 자신이 흘린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박병찬은 태연하게 웃는다.

“딱히 그쪽 탓은 아니고. 내 팔자가 워낙 박복해서.”

“……최종수라고 불러.”

“음?”

병찬이 눈을 끔벅거렸다. 딱히 통성명을 위해 ‘그쪽’이라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보아라. 남자가 문득 꺼내 놓는 이런 부분이 남자를 인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실상은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과 가장 거대한 괴리감이 있을 존재가 바로 눈앞의 그일 것이었다.

“그래요. 종수 님.”

허나, 병찬은 종수의 권유를 거절할 생각이 없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닌가. 무어라 붙여야 할지 모르는 존칭은 ‘님’이 좋을 것 같았다. 검토라도 받는 것처럼 병찬이 ‘종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그는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종수라고 해.”

“종수?”

“……응.”

뚱하던 얼굴이 약하게 느슨해진다. 참으로 알기 쉬운 얼굴이다. 종수는 예의 그 무언가를 떠올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거니 서 있던 종수의 신형이 앞으로 수그려졌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병찬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그 사이에서 병찬은 물기 어린 냄새를 맡았다. 고개가 가까워진다. 거꾸로 뒤집힌 종수의 얼굴은 무섭지 않았다. 그저, 당장이라도 닿을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만 같았다. 노란색의 눈이 침잠한다. 과거를 더듬는다. 병찬은 문득, 입술을 열어 저를 보며 떠올리는 이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쓰다듬어.”

병찬이 손을 뻗어 자신의 바로 앞까지 내려온 종수의 뺨을 감싼다. 아득히 침잠한 눈이 느릿하게 감긴다. 사람의 손을 탄 짐승과도 같은 모습이다. 속에서 불쑥 고개를 든 물음과 달리 병찬은 굳이 그 물음을 입에 담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의 대역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다. 혹시 모른다. 저 치가 언젠가 결국 자신을 풀어줄지도 모르고. 상상 속의 병찬은 발길이 닿는 대로 땅을 누비고, 들판을 헤맨다. 아늑하디 아득하여 병찬의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미약한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기대라는 것은 아주 나약하다. 여태 무수히 짓밟히고 꺾여 남아있는 형태라고는 희미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병찬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손바닥에 닿는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뺨의 아래쪽이 스친다. 좁혀진 거리감, 그 사이에서 남자가 나지막하게 숨을 쉬고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손길에 무슨 위안을 받는 걸까. 병찬이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왜.”

“그냥 차갑구나 싶어서요.”

“말도 높이지 마.”

그가 그리는 누굴지 모를 인물은 저 남자에게 말이 짧았던 모양이었다. 불편하게 상체를 수그려 병찬의 손바닥에 뺨을 묻은 종수가 천천히 눈을 뜬다. 샛노란 눈동자는 흐릿하다. 당연한 것처럼 그 시선에 자신이 담긴다.

“박병찬.”

“싫은데요.”

이유 모를 반항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종수의 눈에 비하면 병찬의 눈은 새카맣기 그지없다. 최종수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 안에 스민 것은 반항과 같이 격렬한 거부가 아니었기에,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요구대로 해줄 것이라는 걸 남자 또한 실감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

하지만 남자는 병찬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차가운 숨의 끄트머리가 병찬에게 닿는다. 남자는 그렇게 병찬에게 상체를 수그린 채 고개를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닿아 뒤섞일 것만 같던 호흡의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 병찬이 흠칫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나지막한 소리가 종수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도망가지 마.”

그것이 명령이라면 그래야 한다. 입술이 맞닿았다. 병찬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하면 최종수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어린애일지, 혹은 위대한 존재일지, 아니면 단순한 악몽일지 모르는 남자의 모습이.

닿았던 입술은 조용히 떨어졌다. 병찬을 세계와 격리시키던 머리카락이 걷힌다. 병찬이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변덕쟁이는 또 자리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제정신이 아니야.”

침잠하여 짙어진 황옥색의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병찬이 손을 뻗어 홧홧한 귓가를 감싸 감췄다. 사당은 조용하다. 눈을 꾹 감은 그가 속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을 언제나 그랬듯이 누르고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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