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타 etc.

이경

🎶 by A

[야]

번호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사람한테서 톡이 왔다. 한 번도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야]가 대화창에 처음 뜬 말풍선이었다.

[건물 입구가 없어]

상식적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작가가 경황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안 되나. 본인한테 물어보지 말고 주변에 좀... 아. 얘 주변에 사람 없지. 기정의 전시회를 같이 올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고.

문 하나 못 찾다니 상상 이상으로 요령이 없었다. 기정은 동그랗게 모여 한담을 나누는 손님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열었다. 곧장 습기가 접착제를 바른 막처럼 얼굴에 들러붙었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휘휘 둘러보니, 문제의 불청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시커먼 우산 아래 비치는 잿빛 양복까지 저승사자가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말쑥한 양복 차림이 꽤 몸에 익어 보였고, 영상으로 봤던 드래프트가 떠올랐다. 아마 NBA에 입단한 뒤로 첫 귀국일 것이다. 그것도 몹시 조용한. 입국이 알려졌으면 뉴스부터 고등학교 인연들이 남아 있는 단톡방까지 시끌벅적해졌을 텐데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기정은 기억을 더듬어 입구가 건물의 동서남북 어느 쪽이라고 알려 주었다. 들어와서 삼 층으로 올라오면 더 헷갈리니까 먼저 왼쪽으로 꺾고,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보이고, 내려서는 창문이 크게 난 쪽으로 직진해서... 최종수는 마지막 부분은 읽지도 않았다.

눈앞에 선 최종수는 기상 악화를 그대로 머금은 곱슬머리가 볼 만했다. 기정이 느끼기에 이 만남은 해후보다는 조우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친근하게 악수를 청해야 적절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최종수는 기정의 손을 성의 없이 흔들고 놓아 버렸다. 떨어진 기정의 손이 몸 옆에서 공중그네처럼 진자운동을 했다.

“네가 내 그림 보러 와 줄 줄은 몰랐네.”

“착각하지 마. 예의상 온 거니까.”

“그런 예의도 알았어?”

기정은 헛웃음을 흘렸다. 최종수의 주의는 이미 기정을 떠나 있었다. 눈알이 굴러가 시선이 갤러리 안쪽으로 꺾여 들어갔다. 예전에도 비효율적인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인상이 있었다. 농구에 있어서도 최종수는 딱히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선수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예만이 중요할 뿐 그 기예를 펼치는 몸의 자리에 어떤 개인을 가져다 놓아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눈앞에 서 있으나 사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랜만이라느니 잘 지냈느니 하는 잡담은 생략하고, 그림을 보러 왔으면 신속하게 그림이나 보고. 그러고 싶은 거겠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러나 최종수는 기정의 짐작을 한 마디로 깨 버렸다.

“보러 온 거 아냐. 사러 온 거지.”

“의외네. 최종수 네가 그림을 사?”

“엄마가 집이 심심하다고 인테리어용으로 한 점 사 오라시길래.”

마치 두부 한 모 심부름을 왔다는 태도였다. 어처구니가 없었고... 물론 유쾌하지는 않았다. 기정의 그림에 어떤 취급을 하는 건지를 따져 물을 틈도 주지 않고서 최종수는 지갑을 꺼냈다. 말투가 숫제 고기 한 근 끊어 달라는 투였다.

“바로 줘.”

“뭘. 그림을?”

“...”

그럼 뭐겠냐는 식의 눈길이 쏟아졌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기분이 나쁠 여지조차 없었다.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싶어서.

“지금 전시 중이잖아. 어떻게 떼어서 줘?”

최종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정은 고개를 저었다. 떼어서 주면 뭐, 그냥 덜렁덜렁 들고 가게? 그림 다 상하라고. 최종수의 얼굴에는 ‘내가 알 바인가’ 하는 속뜻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래, 이런 애였지. 스멀스멀 기억이 피어올랐다. 최종수는 하고픈 말이 표정에 투명하게 드러나곤 했다. 거의 미취학 아동처럼. 그토록 미숙하고 투박한 사회성과 성인 국가대표 틈에서도 손색 없을 농구 실력이 한 사람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이 패러독스 같았다. 그 당시에는 김기정이 알던 모든 사람을 통틀어 최종수가 가장 불균형하게 성장한 인간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최종수가 하고픈 말이 뭐였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최종수라는 존재는 기정의 마음속에 불분명한 형체로 남아서 기정에게 영향을 끼친 이들이 다 그렇듯이 추상적인 뮤즈의 대열에 자리를 잡았는데, 정작 그를 구성하는 디테일은 핵심적인 것부터 시간 속에 바래고 잊혀졌다.

“전시회 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왔어?”

“아빠한테 너희 아버지가 얘기하셨다던데. 엄마가 한 번 가 주래서 왔어. 농구 때려친 놈들이 뭐 하는지 별로 궁금하지는 않고.”

솔직히 너 계속 농구하는 생각 하지. 미련 못 버렸지. 농구를 떠나서 어떻게 감히 아무렇지도 않겠어. 최종수의 이마에는 먹물로 그려 넣은 듯이 또박또박 써 있었다. 기정은 한숨을 내쉬고 옆으로 비켜섰다. 최종수를 노란 인공 빛이 일렁이는 통로로 들여보냈다.

“너희 어머니 취향이 어떤 쪽이셔? 추천 필요하면 말해.”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오랬어.”

기정의 작품이든 어떤 화가의 작품이든 최종수가 미술적 취향이랄 것을 지닌 세계는 기정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다지 없었던 대화 소재가 완벽하게 고갈되는 순간이었다. 최종수가 발을 내딛는 통로는 따뜻한 빛에 은은히 감싸여 있었다. 천장의 조명이 긴 공간 가득히 무중력의 인상을 불러일으켰지만 창으로 드리우는 긴 먹구름 그림자까지 몰아낼 만큼 밝지는 않았다.

“전시 끝나고 잘 싸서 보낼 테니까 골라 놓고 가.”

“계산은?”

“나한테 하는 거 아냐. 저기 서 계신 분하고 얘기해.”

최종수는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그림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매섭게 뜯어보는 눈초리로. 미대 교수나 미술 애호가들의 까다로움과는 결이 달랐다. 그림을 고르는 머릿속에는 마치 이적료를 주고 자신의 구단에 입단시킬 선수를 선정하는 식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최종수는 기정의 지난날에서 비롯한 미련이 묻은 그림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최종수가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다면 걸지 않고 이젤에 천을 덮어 보관했을 그림이었다. 잿빛 하늘에 걸친 오렌지빛 태양이 오른쪽 아래로 낙하하고 있는, 순전한 감상에 젖어 그린 그림. 한여름에 러닝을 하고 난 진훈정산 친구들과 운동장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던 순간을 수 년이 지나 반추한 것이다. 유독 화창한 날이었다. 눈이 멀도록 강렬한 태양이 정면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잠깐 부릅떴던 눈을 시력이 상할 것만 같아 감으면서 기정은 생각했었다. 끝까지 태양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만 계속 농구를 해야 하는 것 같다고. 장도고에 완패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눈꺼풀 안쪽에 이카루스가 되어 떨어지는 최종수의 이미지가 번득였다. 기정은 그걸 그려낼 수 있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거라는 어지럼증을 느꼈었다. 먹구름이 갤러리를 점점 어둑어둑하게 만들어 갔다. 최종수는 추락하기는커녕 등을 반듯하게 곧추세우고 굳건히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운동장의 철봉이나 거꾸로 박은 대못처럼 보였다. 기정은 입술을 축였다.

“어때?”

“농구공이잖아.”

기정이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최종수의 입가 끝에 걸린 오만한 비웃음이 이제 별다른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게 놀라웠다. 썩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시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괴력인지가 느껴졌다. 그들의 길이 짧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교차점으로부터 얼마나 발산했는지. 최종수는 만족한 듯이 갤러리 끝까지 걸어가다가 뜻밖의 지점에서 다시 멈추었다. 그곳에는 습작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눈부신 샘을 닮은 푸르른 수채화들이었다. 크기도 규격도 제각각이라, 엽서만한 것부터 최종수에게 설명한다면 백보드의 가로폭 정도에 이르는 것까지 다양했다. 하나같이 기정이 모르는 곳의 풍경이었다. 한국도 미국도, 스케치를 하러 떠났던 숱한 여행지들도 아니었다. 연못이라고도 하늘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지상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추상이었다. 기정의 가장 자랑스러운 그림은 아니었다.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그 그림들을 기정 스스로도 잘 몰랐다. 연작의 제목이 <무제>인 것은 다들 으레 그 호칭을 채택해서도 아니었고 <무제>가 작품과 어울려서도, 그게 멋져 보여서도 아니었다. 감히 이름을 붙이기가 부끄러워서였다. 전부 한밤중에 혼자 숨어서 그렸고 그리면서도 어딘가 유치하게 느껴져 쑥스러워했다. 건너건너 알게된 평론가 하나가 해설을 적어 주었지만 민망해서 읽어 보지 못했다. 멋지게 살라던 감독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지는 못한 편이었다. 왜 이런 풍경이 나타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영감을 줄 만한 원천은 제 삶에 없었거든요.

최종수는 네모난 판넬이 되어 붙어 있는 해설을 꼼꼼히 읽었다. 허리를 뻣뻣하게 숙이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연작에 포함된 다섯 점 중에 하나를 골랐다. 가장 작은 그림은 캔버스에 요철이 있어 반짝였고 녹색이 감돌았다. 얼얼한 펀치를 얻어맞고 고약하게 든 피멍처럼 보이기도 했다.

갤러리스트와 함께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가 나온 최종수는 기정에게 까닥 고갯짓을 건넸다. 최종수다운 작별 인사였다. 실내에서 조금씩 말라 가는 양복은 뜻밖에도 그리 어둡지 않은 청회색이었다. 붐비는 우산꽂이에서 최종수가 체격에 턱없이 못 미치는 단우산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기정은 비닐 우산 하나를 건넸다. 건물 앞까지는 배웅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은 제대로 찾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나간 김에 기정은 건물 처마 밑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짧은 사이에 부슬비는 장대비로 바뀌어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

“장도고.”

“감독님 뵈러?”

“선배와의 만남인지 뭔 행사 한다고 불러서. 농구부 동창회도 그 근처고.”

몇 년만에 처음 가는 동창회인지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 그림을 떼어 줬더라면 질질 끌고서 서울 바닥을 죄다 돌아다녔을 판이었다. 기정은 최종수가 비스듬히 세워 놓은 자신의 그림이 넘어져 술집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상상해 본다. 최종수의 구두는 그림을 밟을까?

“김기정.”

“왜.”

“농구 한 게임 하고 싶으면 연락해도 돼. 적당히 봐 줄 테니까.”

기정은 최종수의 눈에 산새가 날아들듯이 연갈색으로 깃드는 불확실을 본다.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눈빛과 자신이 기회를 주는 거라고 믿는 눈빛이 반씩 섞여 있었다. 한 손에 불안을 또 한 손에 자비를 쥐고서 어느 손의 주먹도 풀지 않는다. 정말로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기정은 미소지었다.

“너도 그림 그려 보고 싶으면 연락해.”

최종수는 눈을 흘겼다. 하지만 더이상 운동선수가 아닌 기정의 폐활량에 대한 트집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최종수는 기정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권리가 없었다. 기정의 어떤 것도 좌우할 권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살펴 가라.”

최종수는 담뱃불이 채 꺼지기도 전에 떠났다.

열흘쯤 지나서 최종수한테서 연락이 오기는 왔는데, 화제는 농구 게임도 아니고 그림 강습도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이른 새벽, 한국에서는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설명도 없이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놓인 사다리꼴을 네 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사진은 무척 어두침침했다. 확대하고 밝기를 최대로 올려서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무엇을 찍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태양의 경계선이 캔버스를 가로질러 휘어지는 것을 옆에서 찍어 놓으니 거의 직선 같았다. 굳이 그림을 침대 밑에 처박아 두고 보여주는 행위가, 뭐랄까. 너무나 최종수답게 심술맞은 처사여서 기정은 속상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가지실 것처럼 말하더니 부피도 큰 그림을 미국까지 옮긴 노력이 도리어 가상하다고 할까. 퉁명스럽게 굴어 놓고 위치야 어쨌든 자기 방에 둔 걸 보면 기정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정이 묻고 싶은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두 번째 그림은 어디다 뒀어?]

최종수는 메시지를 읽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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