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뱅쫑 단편들
3편
Drink From Me (2024.2.22)
어떤 사건이든 오직 겪어본 사람들만이 환상을 갖지 않을 수 있다. 뭐든지 마찬가지다. 정상에 오르는 일도, 추락하는 일도. 부상도. 휴식도. 입원도. 배신도. 연애도. 신비의 꺼풀을 벗기는 방법은 체험밖에 없다.
코트에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선수의 머리꼭지를 관중은 애달프게 기억하곤 한다. 그에게 찾아왔을 쓰라린 슬픔이니 분노니 하며 애처로워한다. 그리고 끝내 그를 일으켜세울 희망과 투지 운운하며 감상적인 상상을 디저트처럼 덧붙이고, 감동하고, 만족한다. 그들은 죄다 틀렸다. 다치고서야 병찬은 알았다.
부상에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다.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자각이 머릿속에서 매분 매초 심장 박동처럼 펄떡이다가 잠깐 잊을라치면, 예리하고 짧은 통증과 둔탁하고 긴 통증을 섞어서 발신하는 몸뚱아리만 하나 놓여 있다. 마치 전파로 교신하려는 외계인 같다. 때로는 모스 신호처럼도 느껴진다. 물론 그렇지야 않다. 무규칙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영화 속, 이국에서 처음 마주치는 미래의 연인끼리 주고받는 외국어는 통하지 않아서 더 꿈결 같다. 그러나 병찬의 꿈을 침범한 부상에는 그런 낭만이 없다.
-
최종수의 농구에는 낭만이 없다. 모름지기 낭만을 아는 선수가 있다면 누구보다 박병찬 본인이다. 병찬이 달리면 등 뒤를 따라 강한 산들바람이 분다. 산들바람이란 가을 하늘, 잔물결, 첫사랑과 함께 묶어 놓으면 잘 어우러져 흐뭇해진다. 또 다른 선수를 대자면 별명이 대놓고 낭만슈터인 대학 후배도 있다. 3점 슛을 아무 두려움 없이 던지는 후배다. 예측불능, 불확실, 불완전을 감수하고 감당하는 사람에게만 운치가 있다.
최종수라는 정밀한 농구기계는 바로 그래서 흥취를 자아내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이미 완벽에 가까웠던 종수의 기술은 프로에 와서는 파훼가 불가능하다 여겨졌다. 불확실한 구석이 없으니 낭만이 숨어들 구석도 없었다. 최종수는 오히려 보고 있으면 약간 질리는 과였다. 산들바람이 동반하는 이슬비 속 풀꽃 향기,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전축이 재즈를 재생할 때 뜻밖에 내리는 가랑비. 그런 종류의 비바람만이 여흥을 선사한다. 태풍이 낭만적이라곤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선을 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자연재해만큼 사람을 속수무책 사로잡는 것도 없다. 기상사태에 휩쓸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종수가 지나가고 난 자리는 예외 없이 곤궁해진다. 농구로나 정신으로나 특출난 박병찬마저도 거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최종수와 있으면 때때로 잔해가 되는 기분을 느낀다.
걔가 하는 농구엔 농구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최종수는 세리머니도 없다. 어려서는 썩소라도 지었지 성인이 되더니 아무리 화려한 슛을 넣어도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팬층도 꽤 두터워졌는데, 경기장을 나설 때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환호하는 팬들한테 그 흔한 애교가 한 번 없다 (병찬이 옆구리를 찔러서 마지못해 관객석에 손을 흔들어 준 적은 있다). 그런 냉혈한이 눈만 돌리면 닿는 거리에 있으니 병찬은 종종 이유 없이 소름이 돋는다. 얘가 내 남자친구라니. 이게 말이 되나. 생각만으로 가끔 살갗이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진다.
최종수는 주변의 모든 것마저도 미니멀했다. 인간관계도 크게 발전이 없었다. 부모님, 박병찬, 가끔 장도고 농구부원 한둘을 만나는 정도다. 식단은 닭고야에 프로틴으로 재미없이 구성된 운동선수 사료. 구장 근처에 구한 고층 오피스텔에는 먼지만 날아다니고, 최소한의 가재마저 손 닿지 않아 쓸쓸해했다. 아마 채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몰라서. 본인도 삭막한 집이 썩 즐겁지는 않은지, 자기 굴은 텅 비워 놓았다. 그리고 병찬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코트 위에 사는 종수에 비하면 병찬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자연히 병찬의 집이 더 아늑하다. 집에서 대단히 하는 것도 없는데도. 사람이 깃들면 공간에는 반드시 온기가 밴다. 귀신 같다. 어쩌면 부상 때문에 더 아늑해졌는지도 모른다. 소파에는 무릎 아래 받칠 쿠션이 상시 대기 중이고, 탁자 위에는 라탄 바구니를 사다가 진통제가 보이지 않게 넣어 두었다. 목발을 세워 기댄 옷장 문짝에는 조형고 단체사진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병찬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웃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날도 무릎은 아팠는데.
병찬은 대학 3학년 때 드래프트에 도전해 프로 입단까지는 성공했다. 종수와 같은 팀이었다. 첫 시즌부터 여러 경기에 출장했고, 잘 해냈다. 공을 잡을 때마다 현란한 플레이를 선보여 스포츠 뉴스에 곧잘 오르내렸다. 드물게 종수가 부진하던 날 대타로 나가 팀을 위기에서 구한 경기도 있었다. 그러나 맹활약 후 부상이라는 지긋지긋한 패턴이 병찬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리멸렬한 반복이었다. 농구는 또 유예를 당했다. 지금은 로스터에 이름만 놔두고 벤치에 붙박이 신세였는데, 남은 시즌 동안 투입될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여러 달은 코트에 들어서기 힘들 것이다.
종수가 재활을 도와주었다. 매일 밤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면 위에서 꾹꾹 눌렀다. 고양이처럼 군다 싶다가도 솥뚜껑만한 손바닥 두 짝에 날개뼈가 사정없이 짓눌리면 귀엽다는 생각이 싹 날아갔다. 병찬이 악! 소리를 지르면 종수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은 병원에도 같이 가 주었다. 아버지께 물려받았다는 중형차 핸들을 직접 잡고. 대중교통이랄 게 없다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더니 운전실력이 많이 늘어 왔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 놓고도 푹 수그리고서 병찬의 진료가 끝나길 말없이 기다렸다. 대합실에 앉아서는 핸드폰을 빤히 보고, 돌아와서 같이 누우면 불을 끄기 전에 병찬의 무릎을 빤히 본다.
연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최종수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한결같게도. 대부분의 밤에 그렇듯 병찬이 먼저 잠들었다고 생각되면, 이불을 바스락거리며 손을 뻗는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더듬거린다. 그 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의사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둠속에서 병찬은 저 머리통에는 대체 뭐가 들었을까 곱씹다가 이내 포기한다. 자기 책임도 좀 있다는 뜬금없는 죄책감에 곁을 맴도는 걸까. 그런 건 말도 안 되는데. 종수의 페이스를 따라가려다 생긴 부상이 아니었다. 종수가 망가뜨린 것도 아니거니와, 종수 때문에 취약한 다리를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종수가 최세종 아들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병찬의 다리도 거진 유전의 결과다.
그러니 병찬의 몸은 종수가 주무르고 도려내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라면 조금은 그렇다. 마음 어딘가는 확실히 이 녀석 때문에 약해지고 물렁해졌다. 그러지 않고는 다른 인간도 아니고 최종수랑 연애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이 좋아 연애지 낯 간지럽게 서로 예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원이 같은 후배들과의 관계가 차라리 더 살갑다면 살가웠다. 최종수는 도무지 곰살맞은 짓은 할 줄을 몰랐고, 밖에선 방글방글 웃고 다니는 병찬도 애인 앞에서는 덩달아 무뚝뚝해졌다. 그 나름 편안하고 건조한 관계에는 여러 불문율이 따랐다. 마음껏 몸 비비는 것은 비시즌에나 가능했다. 특히 경기 전날은 절대로 뒹굴지 않는다. NBA에서도 컨디션 관리를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농구에 대해서라면 최종수의 결벽증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대신 시즌 중에는 다른 집착이 움튼다.
-
이월의 어느 날에도 병찬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치웠다. 종수가 싸 들고 온 냉동 닭가슴살에 중국음식 배달을 섞어 어중간하게 건강에 나쁘게 먹었다. 설거지 당번은 가위바위보에 진 종수였다. 병찬은 소파에 앉아 초저녁 졸음을 견뎠다. 이제 누구 건지도 모를 엉덩이 두 짝 형상으로 솜이 푹 패여 있었다. 물소리가 뚝 그치고 깜빡 깨어나면 종수는 어느덧 옆에 앉아 있었다. 식기세척기를 하나 사든지 해야지⋯⋯, 궁시렁거리며.
“니네 집 살림처럼 말하네.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엄살은⋯⋯.”
무성의하게 중얼거리는 종수의 시선은 아니나 다를까 무릎에 꽂혀 있었다. 아디다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무릎의 수술 흉터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흰 천에 파란 세 줄이 허벅지 위로 그린 상승곡선이 마치 활주로 유도선처럼 보였다. 종수는 봉긋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해가 갈까 봐 세게 치진 못하고 살짝만, 일정한 박자로 조심스럽게. 물 온도를 가늠하려 욕조에 발끝을 넣어 보듯이.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지팡이로 확인하듯이. 창밖에는 진눈깨비와 섞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릴까, 어딘가의 돌다리 길이 끊어질 만큼?
종수가 무릎을 보는 눈길은 연구대상을 발견한 과학자 같기도 하고, 거장의 조각품을 탐미하는 미술학도 같기도 했다. 종수의 입술은 도톰하고 촉촉해 거실 형광등이 입술에서 반짝였다. 종수가 무릎을 바라보듯이 병찬은 종수를 바라본다. 하지만 종수는 무릎의 주인은 안중에 없는 듯이, 연체동물처럼 소파를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것이 시즌 중후반의 리추얼이었다. 이 관습이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연원이 있었는지는 둘 다 잊었다. 경기 전날이면 종수는 병찬의 무릎을 놓아주지 않았다. 뺨을 살포시 얹더니, 고개를 저어 무릎에 문질렀다. 저녁이라 수염이 까스스하게 올라왔다. 아우, 따가워. 저리 좀 가라, 이제. 병찬이 투덜거리며 무릎을 뺄라치면 종수는 집요하게 양손으로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동그란 무릎이 탐스럽게 물오른 과실이나 되는 양 흡사 갈증을 낸다. 질투가 다 날 노릇이었다. 내가 아니라 내 무릎과 사랑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종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입술을, 벌려서 혀를 댔다. 최초에는 망설였는데 이제 거침이 없었다. 가끔 보면 입술보다 무릎과 키스하는 걸 더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병찬이 느끼는 촉감은 오톨도톨한 요철로 가득했다. 종수의 혀에 난 미뢰인지 병찬의 무릎에 난 돌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거실에는 늦겨울의 한기가 돌아 어깨를 오싹하게 만드는데 무릎만 점점 뜨겁고 질척거렸다.
이질감을 참다못한 병찬이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종수가 설거지할 동안 세수하고 스킨만 바른 얼굴이었다. 팬이 준 토끼 헤어밴드가 이마에서 달랑거렸다. 종수는 병찬의 맨둥맨둥 순한 얼굴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병찬이 설거지하는 날에는 가끔 뒤에서 와서 쓰다듬기도 할 정도로. 그러나 지금만큼은 말간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밀쳐내 버렸다. 어딜 끼어드냐는 듯이. 짜증이 고봉밥 눌러담듯 꽉꽉 들어찬 몸짓이었다. 울컥 서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병찬이 훨씬 어른이었는데. 애새끼랑 사귀더니 유치함이 옮고 말았나. 병찬은 그만 그대로 속삭여 주고 말았다.
“그렇게 좋아? 너도 하나 갖고 싶어?”
말하는 순간에 아차 싶었다. 연인의 밀어처럼 나긋나긋한 말투로 하기엔 내용이 너무 트래쉬 토크였다. 농구 선수에게 아픈 무릎을 갖고 싶냐니. 애당초 부상이 대화 주제로 오르는 일은 아주 적었다. 병찬과 종수만이 아니라 프로 선수라면 누구든 진지하게 부상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렸다. 어촌에서 생선을 뒤집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종수가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스친 무릎이 간지러웠다. 이내 종수의 입꼬리 한쪽에만 삐딱한 웃음기가 걸렸다.
“아니. 이미 있는 걸 토템 삼으려고. 주찬양도 없고.”
“말을 좀 알아듣게 할래? 세상에는 장도고 안 나온 사람도 있단다.”
“다친 놈이 두 명인 것보단 이거 하나인 게 낫다고. 그러니까 난 됐어.”
병찬은 앙갚음하듯 받아치려다가 찰나에 시들해지고 말았다.
“에휴,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먼저 시비조로 말을 뗀 게 자기 쪽인지라 더 다그치기도 그랬다. 그냥 형아답게 팔짱을 딱 끼고, 종수가 무릎과 실컷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토템이라. 액막이라고 불러도 비슷한 의미다. 우르르 몰려들어 고립시키는 수비진, 부상의 위험, 갑작스럽게 덮치는 슬럼프. 코트 안에서는 수많은 재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밖에도 불행은 득시글거렸다. 찬사부터 저주까지 아우르는 주변의 기대, 악마의 끈질긴 귓속말에 잠들지 못하는 밤. 종수는 그 전부를 병찬의 무릎에 응축하여 제물로 바쳤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렇게 무릎을 어루만지며 봉헌 의식을 마친 밤이면 종수는 평화롭게 잘 잔다. 악몽을 무릎에 몰아넣고 혀로 봉랍을 찍은 것처럼. 어쩌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병찬의 무릎에 하염없이 천착하게 되었는지, 어쩌다 그걸 가지고 제의를 지내게 되어 버렸는지.
영영 모를 일이다. 열중한 최종수는 멋없었다. 그 눈코입에 그 머리칼에 그 몸 갖고 그렇게 멋 없기도 어려웠다. 하기야 애새끼가 어떻게 멋을 알겠냐만. 다만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태풍은 멋져서 태풍이 아니다. 자연재해란 게 그런 것이다.
언제쯤 이 환상이 깨질까. 종수는 병찬의 무릎 안에 날개를 접은 무언가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듯이 황홀해한다. 두려워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무언가가. 그런 걸 보면 아직도 애였다. 꿈결에 젖어서 사는 게. 애새끼라고 부르면 최종수는 진절머리를 내지만, 어쩌랴. 애새끼는 본인이 애새끼가 아님을 증명할 수 없는 처량한 운명이다. 어쩐지 병찬은 종수의 꿈을 깨고 싶지 않아서 매번 무릎을 내어 준다. 애새끼한테 동화되어 버렸는지, 병찬도 원래 그런 애였는지.
가끔은 자신도 종수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이 든다. 우연히 욱신거림이 줄어드는 타이밍이 종수의 입이 무릎을 적셔 놓는 것과 맞는 바람에, 치유되는 착각이 들 때면. 그간 받은 수술의 횟수는 어느새 한 손을 넘어갔다. 가벼운 처치일 때는 국소마취했지만, 일자로 누워 있느라 환부는 못 봤다. 천장만 올려다보다가 간호사가 얼굴에 천을 덮으면, 병찬은 그제야 아쉬워했다. 조금은 보고 싶었는데. 자신의 몸이고 자신의 부상인데도, 병찬은 무릎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듬성듬성한 통증으로만 설핏 짐작할 뿐이다.
종수의 타액은 아주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만 같다. 철심에 엉겨붙은 피딱지를 녹여낼 것만 같다. 종수의 일부가 병찬에게 넘어온다. 병찬은 기꺼이 상상에 자신을 내맡긴다. 현실에서 종수의 목울대가 넘어간다. 병찬이 종수에게 흘러간다. 종수의 푸른 피가 붉게 물든다. 그런 종수가 짐승 같다. 사람이 될 길 요원한. 병찬도 그 비슷하다. 짐승도 신앙을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종수가 병찬의 무릎에 대고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은 왠지 기도 같다.
병찬은 열렬한 종수의 머리꼭지를 쓰다듬었다. 젖은 무릎은 이내 속절없이 아려 오고 밤은 깊어만 갔다. 이 밤에도 어느 창 너머에선 노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시를 쓰고 있었다. 별들의 언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책상에 불을 밝히고 수식을 적었다. 신이 어떤 형상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양손을 모아 은혜를 구하고 속죄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날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농구를 할 것이다. 빗물이 쓸려내려간 아스팔트 길거리에서건, 매끄러운 나뭇바닥이 빗길만큼이나 반짝거리는 코트에서건.
오예 파울 (2024.4.6)
종수는 지난 경기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두고 복습하곤 한다. 삼십 점 넘게 득점하지 못한 경기나 특히 날카로운 댓글이 달린 경기 위주로. 자기 전에 반복해서 보며 개선할 점을 찾았다. 진 경기는 그리 많지 않아서 아슬아슬하게 이긴 경기도 함께 모아 놓았다.
쌍용기 대회에서 조형고와 치른 경기는 예외적으로 리스트에 속해 있었다. 이변 없이 장도고가 큰 차이로 이겼는데도 종수의 머릿속에는 진 경기와 비슷한 감정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아마도 상대편 에이스가 지나치게 침착해서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부러 깔아뭉개는 말에 자극받아 길길이 뛰다가 경기를 망쳤더라면 종수의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병찬에게선 종수가 쉽사리 가늠하기 힘든 평정심이 스며나왔다. 그저 그런 선수들하고는 달랐다. 기뻐하되 흥분하지 않는 모습이 신비로운 것이, 약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화면 속의 박병찬이 종수의 눈동자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화면 속의 종수를 가뿐하게 돌파하고. 여간 빠르지가 않았다.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기를 앞둔 초여름에 잎사귀를 흔드는 돌풍. 그런 무릎을 갖고서 어떻게 이토록 산뜻할 수 있나.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의연할까. 천장이 닫힌 코트에서도 반 뼘 길이의 머리카락은 나풀나풀 흩날렸다.
종수는 드러난 목이 희게 빛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에 뭐가 들어 있으면 이렇게 초연해 보일까. 이 안에 뭐가 있길래⋯⋯. 일시정지해도 땀방울 위에 머무는 백열등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살살 만져 보았다. 평평한 화면은 매끄럽기만 해 박병찬의 피부는 좀 더 부드러울 것으로 상상했다. 박병찬의 뒷모습을 이곳저곳 오르내리며 확대했다. 무릎 뒤편, 옴폭 파인 아킬레스건, 각진 팔꿈치.
오 초 더 재생시키면 그새 덩크를 해낸 박병찬은 팀원들에게 뛰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종수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 엎드려서 두 검지로 찬찬히 끌어당겼다. 박병찬 속에 뭐가 들었는지 자세히 보고 싶어서. 흐릿한 보조개와 깨끗한 곡선으로 휘어진 입술이 차례차례 커졌다. 그 이상은 알기 어려웠다. 입 안은 캄캄한 동굴만 같았고 화질은 혀의 윤곽을 보여줄 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그게 좀 짜증이 난다고 한들 다른 장면으로 옮겨가며 계속 확대해 보는 건 아마 훌륭한 생각은 아닐 거였다. 폰을 끄고 잘 시간이 훌쩍 넘었거니와, 큰 실수의 밑거름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캉한 목 살결과 살캉한 혀의 질감을 궁금해하는 걸 멈추지 않으면. 손아귀에 넣고 주물러 보고 싶은 걸 까딱하다가 정말 실행에 옮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종수는 현실과 망상을 헷갈리는 머저리는 아니다. 계속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종수만의 비밀이니까.
출국이 머지않았다. 짐은 거의 다 챙겨 두었다. 종수가 누워 있는 본가의 널찍한 침대 발치에 28인치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다. 종수는 조형고 경기를 오프라인으로 저장하는 버튼을 눌렀다. 비행기 안에서도 잠이 오지 않으면 들여다볼 수 있게.
병찬은 유튜브를 그리 즐겨 보지는 않았다. 밥친구로 예능 두어 개를 보지만 티비로 본방을 보는 걸 선호했다. 구독한 채널은 대왕센터 농구tv, 초원이가 병찬과 닮았다고 해서 (어째서지?) 반박하려고 보다가 정들고 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펭귄 특집, 프로농구 하이라이트, 강아지가 귀여운 채널 몇 개가 전부였다.
고교 농구를 새삼 돌이켜 볼 이유는 없었다. 행복한 순간보다는 아픈 순간이 훨씬 많기도 했거니와 지나간 것을 반추하기보다는 대학 리그에서 펼쳐질 미래를 향해 있고 싶었다.
따라서 예전 경기의 플레이리스트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나중에 볼 동영상'에만 영상 하나가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초원이와 함께 관전한 지난해 쌍용기 결승이었다. 참가한 경기도 아닌데 이후로도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돌려 보았다. 대학 무대에서 만날 진재유와 임승대, 이규 등을 분석하려고만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 동기가 되는 성준수의 슛폼을 눈에 익히려고도 아니고.
그저 보면 볼수록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누구보다 오만한 유아독존 독불장군 같은 놈이, 하필 그런 표정을 짓길래. 병찬이 관여할 일은 분명히 아닌데 자꾸 시선이 갔다.
왜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을까.
장도고, 심지어 장도중의 다른 경기도 찾아봤다고는 누구에게든 죽었다 깨어나도 고백할 수 없었다. 모든 경기에서 그애는 언뜻언뜻 그런 표정을 했다. 아니, 조금만 깊게 관찰하면 늘 그런 표정이라는 게 알아졌다. 그 위에 아주 얇은 무표정의 막을 덧씌우고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는 게. 그게 꼭, 병문안 온 친구들한테 병찬이 꺼내 보이던 쾌활한 웃음과 비슷한 방어막처럼 생겨서는. 괜히 그때가 떠올라서 마음이 쿡쿡 쑤셨다. 참 쓸데없고 근거도 없는 동기화였다.
병찬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었다. 보이지 않는 솜털 구름처럼 뿜어올려진 숨이 뭉게뭉게 흩어져 공기 속으로 희석되었다. 회복은 아주 잘 되어 가고 있었지만 부상의 경험은 보이지 않는 거머리처럼 무릎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경험만은 크기는 점점 작아질지언정 굳건히 그 자리에 붙박여 있을 것이다. 한번 다쳐 본 사람은 무수히 많은 문제를 겪는다. 이런 것 또한 사소한 불편이었다. 외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다친 무릎과 비슷한 현상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기실 누구든 조금씩은 다쳐 있다. 최종수에게는 최종수의 몫이 있을 뿐이다. 그걸 연민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계제도 아니었다. 아직도 재활 중인 병찬의 코가 일단 석 자였다. 그냥 이제는 저런 표정을 보기만 해도 이해가 되어 버리는 게 싫어서.
애새끼 머리나 한 번 쓰다듬어 주면 좋겠는데. 힘든 일 있으면 형아한테 털어놓으라고 선심 써 주고. 물론 말뿐인 인사치레다, 뭣 땜에 죽상인지 사실 별로 안 궁금하니까. 최종수는 머리가 무척 곱슬곱슬했다. 손바닥으로 폭 누르면 솜사탕처럼 보잉 보잉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게다가 땀에 젖으면 더 곱슬거렸다. 병찬은 동영상을 3분과 42분 지점에서 비교해 보며 키득거렸다. 티모시 샬라메와 최종수 중에 누가 더 곱슬일까. 새로 개봉한 <듄> 광고를 하도 여기저기서 보았더니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둘 중에 누가 더 외로울까. 실력이고 배경이고 다 가진 놈이 뭘 그렇게 자꾸 모래사막에 혼자 조난된 꼬마처럼 보여서는. 아니, 또 이러네. 언제 이런 생각으로 빠졌지? 이건 병찬의 눈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 장도고 영상을 정말로 그만 좀 봐야 된다.
최종수의 불행은! 박병찬이 알 바가 아니라니까? 절대로 아니거든.
영상을 자꾸 보다가 다음에 만나면 실수할까 봐 문득 걱정이 끼쳐 왔다. 넌 정말 불쌍한 어린애라고 본인한테 대놓고 말해 버릴까 봐. 그러면 걔는 무슨 악담을 할까. 쿠크다스X을 이기기 쉽지 않은데 걔라면 더한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놈 예뻐하는 건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병찬은 눈으로 최종수를 좇으며 장도고가 서서히 패배하는 결승전을 한 번 더 감상했다. 최종수의 머리가 병찬이 자주 보는 푸들과 비슷해져 가는 게 웃겨서. 그뿐이었다.
최종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듯이 최종수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듯한데, 주인공의 인맥이 얼마나 빈약하든 간에 송별회는 수월하고 나름대로 성대하게 열렸다. 성인이 되어 한껏 들뜬 애들이 고량주를 원 없이 마실 핑계를 골라잡은 걸 수도 있었다. 장도고를 주축으로 알음알음 하나둘씩 초대했다는데 가 보니 고교 마지막 동계 유스캠프 때 친해졌던 인원이 거의 그대로 모여 있었다. 꽤 이름 있는 중국집이라 많이 나왔을 텐데도 1차는 참석자들끼리 십시일반 모으겠다는 걸 한사코 뿌리치고 최종수가 긁었다. 쟤한테 저런 사회성이 있구나, 병찬에겐 조금 뜻밖이었다. 언뜻 보인 무광택의 검정색 카드는 아마 본인이 아니라 최세종 거였겠지만.
거나하게 취한 애들까지 끌고 멀리 갈 수 없어서 2차는 보이는 대로 근처 상가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장내가 시끌시끌한 데다 긴 테이블 반대쪽 끝에 앉는 바람에 최종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리가 파할 때쯤 인원이 줄어들면 붙어 앉게 되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러면 최종수가 했던 싸가지를 상실한 말을 꺼내서 다그치며 좀 놀려 주고, 사과도 받아내 볼까. 병찬은 조재석과 지국민의 머리통 건너로 이따금 반대편을 곁눈질했다. 좋은 날에도 예외 없이 시커멓고 밋밋한 옷을 입은 최종수는 턱을 괸 자세가 점점 허물어져 가더니, 조재석이 병찬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제일 멋진 탱크에 투표하라고 조르는 통에 정신이 팔렸다가 고개를 드니 없어졌다. 현란한 디스코 불빛이 반사되는 복도를 따라 긴 그림자가 기어가고 있었다. 생맥주를 얼마나 마신 건지 비틀거리는 최종수는 유리문을 넘어지듯이 몸으로 밀고 나갔다. 놔두면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고꾸라질 것 같은데 공동묘지 게임 라운드가 새로 시작되는 바람에 누구 하나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건 병찬이 즐기는 종류의 형아 노릇은 아니라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도 미국 땅 밟아 보기도 전에 길바닥에 엎어져 기절하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지, 결심하기까지 다소간 걸리는 바람에 최종수는 이미 화장실을 나와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로 상가 외벽 타일에 기대 선 모습이 마치 벽에 뚫린 거대한 동굴 같았다. 가로등 불빛을 탱글탱글 튕겨내는 곱슬기는 중간 어디쯤. 발밑에 고인 웅덩이에 벚꽃잎과 꽁초가 수북했다. 술집 손님들이 피우고 간 담배 냄새가 감돌고 열린 화장실 문에서 희미한 지린내가 풍겨나왔다. “야, 들어가자.” 하면 최종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래? 택시 태워 줄게.” 해도 도리도리. 화장실에서 환풍구 소리가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처럼 저음으로 깔려나왔다. 병찬이 최종수를 불쌍해하며 집에 누워 있노라면 머리 위로 연달아 지나가는 머나먼 소음.
나란히 기대니 등이 시원했다. 병찬도 알게 모르게 꽤 취했던 모양이었다. 하늘하늘 벚꽃잎을 떨어뜨리는 선선한 바람이 좋았다.
“앞으로 인천 자주 오겠네, 최종수.”
“내가 너한테 왜 가.”
“웃기다, 너. 누가 나한테 오래? 공항 지나가겠다고.”
“⋯⋯.”
“인천 오며가며 심심하면 연락하든지.”
“집으로 바로 가지 너를 왜 불러. 연락처도 없어.”
“⋯⋯줘?”
슬쩍 새어나온 한 마디를 갖고 최종수는 사람 무안하게 소스라쳤다. 하여튼 기분 잡치게 하는 데는 도가 튼 자식이다.
“번호를 주겠다고 나한테? 왜?”
“됐다, 됐어.”
“달라고 안 했어.”
“알겠다고요.”
“어차피 너 송별회 단톡에 있는데.”
“나가 드릴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러든지. 어차피 할 말 없었어.”
“응 그래. 적당히 깼으면 들어가라. 애들이 찾겠다.”
“앞으로는 볼 일도 없어. 미국 가면.”
“그래 잘났다. 네 말이 다아아 맞아. 됐지?”
최종수의 몸이 별안간 휘청 하고 병찬에게로 기울어졌다. 얼결에 솜씨 좋은 캐치로 어깨를 받아 들었다. 말은 멀쩡히 하는 것 같더니 역시 정신을 통 못 차리네. 병찬은 균형을 잡으려고 한 손으로 강아지 어르듯 턱을 받쳤다. 양 팔 안이 무척 무거웠다. “똑바로 좀 서자 종수야. 형 힘들다.” 넌지시 타일러도 최종수는 고분고분 따를 기미가 없었다.
머리 위에 켜진 가로등이 껴안다시피 한 둘 사이를 비집었다. 핏기가 가신 낯을 밝히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게도 종수는 예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까이서, 까딱하면 접촉사고 날 거리에서 보니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툭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아 심히 부담스러웠다. 종수는 도톰한 입술을 연신 달싹거렸다.
“왜 그래. 추워?”
“아니.”
“너 괜찮은 거지?”
“다시는 안 볼 거니까, 하나만 해도 돼?”
말이 길어질수록 형편없이 혀가 꼬이고 목이 메이는 꼴이라니. 최종수의 술주정을 직관하는 날이 다 온 게 우스웠어야 하는데. 찍어라도 놨다가 두고두고 회자시킬 놀림감 삼아 줬어야 하는데 병찬은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웃어 버려서 이 애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어린애의 소원을 꺾어 버리는 게 잘 안 되었다. 원래가 어린애와 어른이 맞닥뜨리면 참된 어른 쪽일수록 져 주는 것이 순리인 편이다. 이규후 감독님이 모르는 척 병찬이를 몇 분 더 뛰게 해 주는 것도 그런 이치다.
그런데 그거 아닐걸. 감독님한테도 내가 코트에 남아 있는 편이 나았을걸. 그래야 이겨.
“그래.”
병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최종수가 그랬을 때 그렇게 많이 놀랍진 않았다고는 아무한테도 말 못할 비밀이다. 딱 하나, 병찬과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얘 하나라면 모를까.
키스는 이럴 거면 허락은 왜 구했는지 아리송할 정도로 무대포였다. 그야말로 돌격 앞으로였다. 호텔 주방장이 조리했다나, 고급스러워 짜장면 같지 않았던 짜장면과 입천장을 태우는 듯했던 고량주 뒷맛이 금세 녹아 사라졌다. 아주 거칠게, 남김없이 입안을 핥아대는 종수의 공로였다. 이건 보나마나 첫키스였다. 하기야 최종수가 농구 말고 뭘 해봤겠어. 아니고서는 이렇게 요령도 없이 병찬의 앞니 뒤를 빨아다 삼킬 것처럼 탐닉할 수가 없다. 적당히를 모르는 새끼⋯⋯.
종수가 숨을 너무 훔쳐 가서 머리가 혼탁하게 몽롱해졌다. 귓가에 거센 바람 같은 소리가 우릉우릉, 찌릉찌릉 몰아치는데 마치 베란다에 앉아 태풍을 바라보는 것처럼 편안했다. 호흡이 점차 블루스 춤을 닮은 하나의 박자로 맞춰진 덕분이었다. 종수의 입안은 깨끗했고 깊은 곳일수록 달았다. 향긋한 과일 같기보다는 초콜릿을 먹고 남은 기운처럼 끈끈한 달큰함. 입술과 목 안 전체로 느끼려고 다가서는 순간 철의 비린 맛이 섬광처럼 혀끝을 치고 지나갔다. 누구의 실핏줄이 견디다 못해 항복했는지는 얼른 알지 못했다. 다만 먼저 어깨를 가볍게 밀쳐낸 건 종수였다. 허. 참 내. 기가 막히네. 요 놈 봐라. 지가 먼저 시작해 놓고?
입술이 떨어지자 타액이 미국 풍경 엽서에서 본 금문교처럼 길게 늘어지다가 살랑살랑 내려오는 벚꽃잎에 맞아 끊어졌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되네. 최종수랑⋯⋯. 나랑⋯⋯. 이게 되네. 그러니까.
병찬은 방금 벌어진 일이 머릿속에서 문장의 구조를 갖추기 전에 급정거시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엎어진 물도 빨리 주워 담으면 담아지지 않을까? 부연중에는 기차는 빨라 빠르면 박병찬이란 노래도 있었다고. 빨리 뭔가 해야 돼. 할 수 있다. 생각하자 박병찬. 생각하자. 응? 두 번째로 중요한 거를. 그거를 해라⋯⋯.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라고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감독님. 그랬으면 제가 이래 봬도 첫 번째는 지키려 노력하는 편이니까 이렇게 손부터 뻗고 보는 일도 없었겠죠. 사실은 다치지 않는 것도 못 지키긴 했었지만요 그래도⋯⋯. 이 순간이 최종수의 머리를 쓰다듬고픈 소원을 성취할 순간은 좀 아니지 않나요? 이 되바라진 녀석이 하고 싶은 걸 기어코 했으니 병찬도 하고 싶은 걸 한다는 면에서만은 공평했다.
장난스럽게 엉클고 헤집어 놨어야 하는데, 손짓이 지나치게 애틋하고 섬세하게 나간 점은 영 좋지 않았다. 이래서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입술박치기를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꼴이잖아. 당장 멈춰. 멈춰라. 멈추라고. 세 번 말했다, 박병찬. 사람 손 잘 타는 고양이처럼 가만히 어루만짐을 받던 종수는 아주 작게 물었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였다.
“좋았어?”
“아니?”
“⋯⋯싫어?”
“음?”
“싫어서 깨물었어?”
“⋯⋯니가 깨물었, 잖아?”
“뭔 헛소리야. 하, 알겠다. 웃기는 새끼네 이거.”
종수의 커다란 눈동자 속 울음기가 걷힌 자리에 악마적으로 새까만 만족이 싹 스며들었다. 큰 손이 병찬의 어여쁜 목덜미를 휘감았다. 불길함에 솜털이 쭈뼛 곤두서면서 병찬은 대단히 명징하게 깨달았다.
“뒤지게 좋아 가지고 지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구나.”
지금 뭐랄까 완전히 잘못 걸렸구나 누가 누구한테 걸린 건지는 몰라도⋯⋯. 그리고 벌써 두 번째 키스가 지평선을 덮치는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선배 (2024.6.8)
*장도if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지막 교시는 고전 읽기였다. 교사에게 지목당한 뒷자리 학생이 또박또박 시를 읽었다. 교사는 이마를 대고 엎드린 종수를 지목하기는커녕 깨우지도 않았다. 재작년 여름쯤부터 종수는 교실의 거의 모든 일에서 열외였다. 아무도 종수를 건드리거나 그들 틈에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농구부 안에서도 어쩌면 비슷했는데, 농구와 직접 관계된 것이 아니면 모두 조심스러운 거리감을 두거나 종수를 내버려두었다. 종수에게는 적당하게 느껴지는 처우였다. 농구만으로도 종수의 인생은 과포화 상태로 꽉 차 있어 타인과 부대끼는 것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힘에 부칠 것이다.
지루한 시 해설이 한 귀로 흘러나갔다. 종이 울리고 종례가 끝나고도 종수는 잠시 엎드려 있었다. 먼지 더께처럼 내려앉은 졸음의 자락이 무거웠다. 누군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종수는 눈을 뜨지 않고도 옆반에서 들른 규라는 것을 알았다. 먼저 체육관 가 있는다? 하고 규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두르지 않고 상체를 일으켜 보니 교실에는 또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책상에 반쯤 걸터앉은 건 종수와 마찬가지로 어떤 과목의 교사에게도 지목되지 않는 학생이었다. 농구부에서는 여러 모로 전설적인 존재였고, 선배인 동시에 동급생이었다. 같은 반이 된 건 처음이었는데 저쪽이 일 년 꿇으면서 벌어진 우연이다. 썩 달갑지는 않았다. 종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는 종을 싸잡아 싫어하는 편이었다. 코트 위에서 보면 족한 사이를 왜 코트 밖에서까지 봐야 하는지 몰랐다. 세상은 대체로 종수가 모르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병찬은 한쪽 볼을 부풀리고서 종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보통 그렇게 보는 건 할 말이 있어서인데 종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통 흥미가 없다. 병찬이 가볍게 손을 까닥였다. 부드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종수, 잠깐 따라와 봐."
한 살이라도 많으면 하늘 같은 선배가 되는 것이 전국 운동부의 공통적인 문화였다. 종수는 그런 서열질을 내심 우스워했고 최연장자인 병찬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 기색은 아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사소한 일에 불복해서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종수는 순순히 병찬을 따라 두어 걸음 뒤에서 걸었다. 병찬이 가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소변기들을 차례차례 지나친다. 도대체 얼마나 긴히 전할 말이 있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무덥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척척 들러붙었다. 세면대 앞에서 입을 열 줄 알았던 병찬은 대신 첫 칸의 문을 열었다. 종수의 등을 밀어 칸 안으로 들여보냈다. 상황이 슬슬 납득이 안 돼 가고 있었다. 병찬의 손바닥이 닿은 어깻죽지 위로 솜털이 쭈뼛 일어났다. 무슨 전개가 기다리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종수가 긴장으로 굳을수록 병찬의 태도는 친근해져 갔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겁을 먹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심지어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기까지 한다. 마치 그들 사이에 이미 숱하게 해 본 일이라는 듯한 여상한 편안함으로.
병찬은 종수가 가방을 벗게 했다. 직접 받아 변기 뚜껑 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한 마디 구령을 올려붙인다. 아주 평이한 어조의 주문이었다.
"바지 벗어 봐."
짧고 간단한 명령에 종수는 귀를 의심했다.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잠깐 실제로 휘청거리기도 했다. 머릿속이 암전된 다음 생각 수천 개가 동시에 폭발했다. 첫 번째는, 아빠가 이런 말은 한 적 없다는 것이다. 엘리트로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군기와 가혹행위를 묵묵히 버텨야 한다는 말씀은 가끔 들었다. 종수도 너끈히 짐작한 바였다. 체육계의 온갖 폐쇄적인 악습은 그 최세종 선수조차 져야 했던 짐이다. 능청스럽고 느물거리는 성격이라면 받아내기가 조금이나마 수월하지만 종수는 그렇게 타고나지 못했고 단기간에 개조될 기미도 없으니, 온전히 감당할 각오는 했다. 농구를 위해서라면 부차적인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버지인지라 웬만한 사람들은 종수에게는 함부로 심하게는 못할 거였다. 그 특권이 영원히 지속되지야 않겠지만. 특히 최세종이 확실히 이전 세대의 인물로만 기억되고 종수가 프로에 갈 때쯤이면. 그러나 그 모든 사정을 감안해도 이것은 너무 빨리 들이닥쳤다. 시점의 문제만이 아니다. 종수가 귀동냥한 불합리 중에 이러한 종류는 없었다. 다음은 어지럽다는 느낌이었다. 분명 병찬이 앞에 서 있는데 눈에서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입에 신침이 고이고 호흡이 가빠졌다. 붙잡지 않으면 정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뜬금 없는 단상이 스쳤다. 무슨 속옷을 입었더라? 종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 버클을 끄르고 속옷 허리춤을 쥔다.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다. 종수의 옷장은 교복과 유니폼을 제하면 양말 한 짝까지 전부 어머니의 손길로 이루어져 있다. 정성껏 골라 오시는 속옷은 단정한 색상에 매끈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소재로 되어 있는데 이 순간 종수는 그 중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까맣고 노란 민소매와 반바지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유니폼이었으면 좋았겠다. 어떤 것으로도 병찬이 종수를 식별할 수 없게. 종수의 얼굴도 이름도 마음도 없어지게. 병찬이 찍어 데려온 것이 종수라기보다 불특정한 후배 하나고 지금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도 그 아무개가 되도록. 갑자기 차가운 촉감이 손등을 뒤덮었다. 조금이나마 정신이 깨어났다. 다시 시야가 또렷해질 만큼은. 병찬이 종수의 손을 감싸쥐고서 아연해하고 있었다.
"아니, 바지 벗으라고."
"예."
"예?"
평소보다 바짝 깍듯해진 '예'였고 병찬은 거기에 또 혼란스러워했다. 종수에게 공손한 '예' 말고 도대체 무슨 선택지가 있다는 건지? 갑자기 시선이 맞닿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져 종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속옷은 왜..."
병찬이 얼빠진 듯이 내뱉는 의문이 불가해하게만 들렸다. 병찬이 원하는 게 뭔지, 자신을 왜 불러온 건지 점점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 얼마간의 팽팽한 침묵 끝에 병찬이 긴 한숨을 쉬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병찬은 한글을 갓 뗀 어린애에게 말하듯이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교복 바지만 벗어 보라고. 아래부터 안 걷어지니까."
교복 바지는 통이 좁잖아. 병찬의 차근차근한 설명을 종수는 간신히 절반쯤 알아들었다. 정말로 한국말을 처음 배우는 기분으로. 교복이 농구부 소년들의 다리를 배려하여 만들어지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기장 때문에 가장 큰 사이즈를 사도 아킬레스건 위에서 댕강 자른 우스운 꼴에 품도 여유가 없었다. 며칠 너 뛰는 모습을 보니까 아무래도 무릎 아파하는 것 같아서. 큰일 되기 전에 한번 점검하자고. 요즘 같은 경기 시즌에 네가 병원 가란다고 갈 애도 아니고, 교실에서 바지 벗으랄 수도 없고. 다른 애들 보는 라커에서 부상 의심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여기서밖에 물어볼 수가 없었는데...
"서 있으면 못 해."
병찬은 멋대로 종수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수를 변기에 앉혔다. 그리고 문과 무릎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화장실 칸은 밀실처럼 비좁아서 병찬의 머리가 거의 종수의 허벅지 사이에 들어와 끼일 정도였다. 숨이 막히다 못해 종수는 숨쉬기를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병찬이 무릎을 이곳저곳 노련하게 누르며 물었다.
"아파? 아프면 말해."
물리치료를 수없이 받은 경력이 엿보이는 솜씨였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슬개골, 무릎뼈를 감싸는 인대, 양 옆의 말캉한 연골, 손을 뒤로 돌려 오금의 가장 약한 지점. 피아니스트처럼 능란하고 힘이 센 손가락이었다. 실눈을 뜨니 살이 눌리는 곳마다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것처럼 깊게 움푹 패이는 것이 보였다. 무릎에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작은 무릎에 커다란 심장이 끼어 꽉 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여긴 어때? 이쪽은? 모든 물음에 종수는 딱딱한 "아닙니다"로 대답했다. 경직된 목소리가 다른 사람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마침내 병찬은 종수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톡톡 치더니 놓아 주었다. 자상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만하면 당장 무슨 치료를 해야 할 정도는 아냐. 염증이 심해지면 누르기만 해도 엄청 아프거든. 어쨌든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나한테든 감독님한테든 꼭 말해라. 알았지?"
한 말도 없는데 종수의 목에서는 쉬어서 잠겨들어가는 목소리만 겨우 흘러나왔다.
"예."
종수는 뒤늦게 수치심을 서서히 깨치는 기분으로 돌아서서 바지를 올리고 버클을 잠갔다. 아니, 수치심이라는 말은 알맞지 않았다. 점점 더 알맞지 않게 되어 갔다. 심장은 벌새의 날갯짓 같은 속도로 팔딱였지만 머리는 서서히 식고 있었다. 오해가 풀리고 나니 병찬이 내내 어딘가 서늘하면서도 다정하게 굴었다는 것이 자연스레 알아졌다. 그토록 진정 어린 걱정이 불순하다고 추궁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려 뒤로 돌았더니 병찬은 입꼬리가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번에 위화감이 끼쳐 왔다. 입술이 열리고 비수가 박힌 말이 툭 던져졌다.
"그리고 승대랑 잘 좀 지내라, 종수야."
승대한테 패스하는 게 나을 때도 나한테 하잖아. 네가 시야가 좁아서 그런가 했는데 아닌 것 같아. 규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난처해하더라. 너네 껄끄러운 거 아는데 농구에는 영향 주지 마.
"뭐, 그런다고 네가 에이스가 되진 않겠지만."
상큼하게 웃는 걸로도 모자라 찡긋 눈짓을 해 보인다. 곧장 반박의 말이 종수의 가슴께까지 쏜살같이 치민다. 제가 당신께 드리는 공을 임승대한테 주기만 했어도 바로 제가 에이스였는데요. 육 분밖에 없으신 출전 시간도 다 뺏고도 남았을걸요. 무릎 핑계라도 있어서 얼마나 편리하세요. 그렇죠?
그러나 종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병찬은 종수의 어깨를 무성의하게 툭 친 다음 미소를 그대로 띠고 나갔다. 묘하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흐려지는 옆얼굴에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좀처럼 산뜻한 쾌활함을 잃지 않는 표면에 처음 나타난 균열이었다. 누구한테서나 성격 좋다는 소리를 듣는 이 선배한테서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건 자신이 만들어 낸 균열이라는 걸 종수는 어렴풋하게 느꼈다. 판을 흔들어 놓고 지각변동을 일으킨 건 병찬보다 종수의 노고가 조금이라도 더 컸다. 기이한 만족과 쾌감이 들었다. 이 시간을 견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처럼. 어쩌면 임승대와 잘 지내라고 덧붙이던 말도 유치한 보복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신이 났다. 박병찬에게 애 같은 면이 있는 줄은 진작부터 알았으니까.
다음에도 그런 박병찬에게 볼을 주기로 다짐한다. 종수의 세계는 화장실 한 칸에서 일어난 일로 다시 좁혀진다. 방금 단둘만 아는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고 매미들이 탁한 유리창에 달라붙어 거세게 울고 있으며 무릎을 누르던 촉감이 아직 선연한 한 칸으로. 물밀듯 평정이 찾아온다. 종수는 천천히 일어선다. 꼼꼼히 기지개를 켜고 나와 조용한 복도를 걷는다. 그 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체육관 쪽으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