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뱅쫑 조각글들
5편
종뱅절 축하 (2024.6.5)
외동이라면 으레 거쳐 가는 생각을 병찬도 어려서 거쳤다.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쌍둥이라면 특히 좋을 것 같았다. 반쪽이라는 이유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사람. 아무 설명 없어도 통할 만큼 닮은 사람.
그런데 병찬이 무조건 형이어야 했다. 그 점은 타협 불가였다. 동생이 될 바에는 외동인 게 나았다. 조금이라도 윗사람은 병찬의 평생에 이규후 선생님으로 족하기 때문이었다. 병찬의 말이라면 껌뻑 죽고 고분고분하지만, 너무 순하기만 해서 재미 없는 건 또 아닌 동생. 얘만 있으면 평생 지루할 일은 없겠다 싶은. 같이 농구도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 그런 동생 어디 없나?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생일 소원으로 빌기도 했는데 한 해 한 해 실현 가능성이 낮아져 가는 것을 깨닫고 관뒀다. 병찬은 제법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어쨌든 외동도 좋을 때가 꽤 많아서 병찬은 형제에 대한 생각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 생각이 되돌아온 건 최종수랑 일대일을 하던 나날이었다. 재활 경과가 좋아 병찬은 감독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코트에 맘껏 드나들 수 있었다. 그건 종수도 제일 좋아하는 데이트였다.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싫은 건 딱 싫어하는 놈이 주말마다 1호선에 몸을 싣고 용산에서 동인천까지 머나먼 거리를 잘도 놀러 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마중을 나간 역에서 조형고까지 걷는 길에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이 있어 불량 간식 꾸러미를 떨이할 때가 많았다. 가뜩이나 없는 식욕이 더 사라지는 여름이면 병찬은 자극적인 맛에 자꾸 손이 갔다. 최종수는 매번 날카롭게 타박했다. 운동하는 새끼가 먹는 것부터 글러처먹었다나.
그래 놓고는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코트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맥주사탕을 맥주인 것처럼 빨아제끼는 최종수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어려서 유기농 과일에 최고급 한우 같은 것만 먹고 자라서 혈중에 방부제와 인공향료가 결핍된 걸까? 병찬은 선풍기를 틀어 주고 나란히 앉았다. 꼬부랑한 머리카락이 흩날려 간지러운지 종수는 목덜미를 쓱쓱 문질렀다. 드러난 뒷목이 젖어 반짝였다. 아, 얘는 어쩌면 빛나는 모양까지도 이렇게 재밌지. 어쩌면 얘랑 사는 게 평생을 외동인 것보다 덜 심심할 것 같아. 하지만 이미 다른 부모한테서 나와 버린 걸 어쩔 수는 없다. 그러니 가족의 연으로 묶일 방도가... 혈연만 있는 건 아니지.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나름대로 체계적인 아이디어였다. 병찬은 원래 이런 식으로 논리정연하면서도 엉뚱하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 건 최종수 전매특허인데 원온원을 하도 했더니 별 게 다 옮는다.
"종수야."
"어."
"형이랑 이런 거 할래?"
음주 다음은 흡연 흉내를 내려는 양 아폴로를 오물거리는 종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병찬의 입안에 남은 사탕이 딱 좋게 한 번 깨물면 사라질 양이었다. 투명하고 영롱한 플라스틱 보석 반지가 병찬의 입에서 빠져나온다. 엄지에 끼워 주었더니 종수는 질겁을 하면서, 오이 보고 튀어오르는 고양이처럼 코트 반대편까지 튀어나갔다.
"아 미쳤냐? 진짜 개 더럽다 박병찬."
그래 놓고는 병찬의 타액이 묻은 조악한 반지를 버리기는커녕, 오래된 보물상자에서 꺼낸 가보인 양 소중히 만지작거렸다. 몸을 반쯤만 돌리고 몰래 그러는 걸 병찬은 똑똑히 보았다. 웃음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그 후배 (2024.6.25)
*장도if
체육관 주변에는 농구부원들이 따주는 캔을 얻어먹고 목숨을 부지하는 까만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가장 자주 챙겨 주는 건 바로 나다. 나만 보면 배를 까뒤집고 눕는 꼴이 어떤 애새끼를 생각나게 해서. 쪼그려 앉아 분홍색 배를 긁어 주면 고양이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녹아내린다. 오늘은 캔도 없이 빈손인데도 나만 보면 졸졸 따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 고양이가 귀엽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더운 날씨에 이러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이리 와라, 최종수.”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유일하게 고양이 밥을 안 챙겨주는 놈이 뒤에서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
최종수는 다가오지 않고 멀찌감치 선 그대로다. 고양이가 내 손 아래서 펄쩍 뛰어오른다. 최종수와 눈이 마주친 모양이다. 똑같은 것들끼리 앙숙인 게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고양이가 전광석화처럼 자리를 빠져나가고서도 최종수는 머뭇거리느라 안 오고, 결국 내가 간다. 고양이보다도 못한 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가까이 다가서면 최종수가 얼마나 빨리 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저번보다 눈높이가 올라와 이제 코끝이 내 입술과 맞먹고 있다.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내 키를 넘어도 나댈 꿈도 못 꾸게 확실히 잘근잘근 다져 놔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아직도 눈도 감히 못 맞추고 입술을 달싹거리고만 있으니 앞으로도 어려울 리는 없다. 나는 싸늘하게 묻는다.
“왜. 할 말 있어?”
“...선배,”
웬일로 “아니오”가 아니다. 오늘은 좀 제대로 결심을 했나본데. 커다란 눈이 드디어 나를 본다. 용감해졌나? 하지만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기 때문에 무효. 지쳐서 떨리는 것도 없지 않을 테다. 오늘 정규훈련 이후에 이어진 연습게임은 내 팀과 최종수의 팀으로 나뉘어졌고, 나는 당연히 ‘지는 쪽이 운동장 오십 바퀴‘를 제안한 다음 최종수를 뼈도 못 추리게 발라 주었고... 그 여파로 아직까지 무릎이 조금 욱신거리지만 보람이 있었다. 훈련하고 나서 오십 바퀴를 뛸 수 있는 체력은 솔직히 나한테도 없으니 진짜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다. 열두 바퀴쯤에서 야 얘들아 그러다 몸살 난다 내일도 연습해야지, 하고 전부 빼 주었다. 물론 제일 하고 싶은 건 그다음에 이루어졌다. 최종수가 묵묵히 끝까지 달리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 거. 나는 사십 바퀴쯤에서 자리를 떠났다. 그애가 나머지 열 바퀴를 채웠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최종수는 감히 나를 거역하지 못한다. 그러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마음대로 됐다.
“저 좀 그만 미워하시면 안 돼요?”
나는 웃는다. 같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그렇게 해야 애새끼 속을 또다시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게 손바닥 안 들여다보듯 훤히 보여서. 참 나, 종수야. 내가 언제 널 미워했다고. 그렇지? 그만 미워하라니. 좀 싱거웠다.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재미 없으려고 한다.
“아이고. 다들 너 예뻐서 깜빡 죽는데 나까지 그래야 돼? 그래야 속이 풀려? 최종수.”
그래도 내 최종수가 보통내기는 아니지. 나는 믿음이 있었다. 최종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대꾸를 함으로써 내 믿음에 가슴이 떨릴 만큼의 확증을 심어 주었다.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아... 이건 참기 힘들다. 뱃속 깊은 곳이 불붙으며 꼬였다. 나는 못 참고 최종수의 뺨을 사르르 매만졌다. 고양이 털이 최종수의 얼굴에 묻는다. 최종수는 움찔거렸지만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인다. 이 애새끼를... 어떻게 하면 제일 좋을까? 일단은 아무도 없는 곳.
“따라와.”
체육관 쪽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교실 쪽으로 대신 올라갔다. 내 뒤에서 계단 난간을 잡고 겨우겨우 비틀거리며 쫓아오는 최종수를 위하여 딱히 걸음을 늦추거나 잡아 주지는 않았다. 최종수의 가쁜 숨이 내 뒷목에 와 닿는 것 같다. 덩달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아, 애새끼한테 흥분하기 아직 좀 이른데... 화장실 문을 열고,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는 동안 숨을 고르고 첫 칸의 문을 열었다. 둘이 꽉 끼어 들어가는 직육면체의 문을 잠갔다. “뒤돌아 서,” 그렇게 주문하고 뒤에서 팔 벌려 안아 주었다. 나시 하나 벗기려니 아쉬워 입맛이 다셔진다. 교복이 아닌 게 못내 안타깝다.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푸는 맛이 있을 텐데. 다음엔 어떻게 하복 셔츠를 입고 오게 못 하나... 이미 땀범벅인 최종수는 내 품에서 비 오듯이 흥건해진다. 살이 미끄러운 동시에 끈적하다. 옆모습에는 젖살이 다 안 내린 볼이 튀어나와 있다. 절벽에 매달려 한 손으로 버티는 조난자처럼 긴 속눈썹에 눈물이 끝내 대롱거렸다. 솔직히 예뻤다. 너무너무. 하마터면 그렇게 속삭일 뻔한 걸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종수야. 형한테 너무 예쁨 받고 싶어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갖고 싶다고 다 가져?”
물론 최종수를 가지는 걸로도 모자라 주물럭거리고 부러뜨렸다가 도로 붙였다가 난도질했다가 멀쩡하게 기워 놓았다가 내 맘대로 가지고 놀 거지만.
“넌 못 그러지.”
내가 그럴 거니까. 종수의 다리와 동공이 후들거리다가 결국 맥없이 풀린다. 그애는 불가항력으로 신음하다가 내 품에서 넘어졌다. 아주 예쁘고 뜨겁게.
병 (2024.7.13)
*위에 있는 '그 후배'의 다음날. 만화 <치키타 구구>에서 따온 이야기가 짧게 스쳐 지나갑니다.
*뱅쫑뱅 + 약 쫑←규
"널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규의 낯이 어두웠다. 속을 잘 숨기는 규답지 않게도 종수가 본 중에 가장 낱낱이 생각이 드러나 있었다. 주장 선배를 향한 혐오, 종수에 대한 보호 본능과 동지애. 한 배에 동승한 선원이 서로에게 느낄 법한 유대감이었다. 좀더 명확하게 하자면 평선원끼리가 아니라, 부선장이 선장에게 가질 만한 존경이 담긴. 기민한 규가 종수가 자신과 같은 배에 타 있지 않음을 모를 리는 없다. 뛰어내렸는지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종수는 선배가 호젓하게 노를 젓는 1인승 카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에 가깝다. 그 형한테 잘못 걸린 게 네가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야, 이규. 종수는 생각한다. 그랬으면 규를 질투했을 테고,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선배가 그런 거 아냐. 그냥 내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란다고 오십 바퀴를 고지식하게 채운 건 종수니까. 그밖에도 종수가 숱한 빌미를 주었다.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도발을 포함해서. 그러면 선배가 자신을 어찌할지 뻔히 알면서도 바로 그걸 바라서... 그런 것까지 규한테 털어놓지는 않았다. 규는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한 번 찾아오지도 않지?"
그러지 않으면 종수에 대한 원망도 입술 밖으로 터져나올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선배를 감싸는 말에 규가 화를 꾹꾹 억누르는 게 보였다. 가느다랗고 정갈한 눈썹과 입술이 평소의 부드러운 휘어짐을 잃어버리고 딱딱한 직선으로 굳었다. 거의 사 년을 알고 지낸 덕으로 종수는 규의 아주 깊은 곳까지 읽을 수 있었다. 선배에 대면 규는 투명하고 잔잔한 호수에 가까웠다. 종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지탱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이규에 비하면 선배는 폭풍이 끊임없이 도사리는 외해 같았다. 누구와 비견하더라도 그랬다. 종수는 터진 입술을 속삭여 규를 달랬다.
"이따 올 거야."
규는 침대맡에 선 그대로 굳어졌다. 이것 또한 종수가 잘 아는 규의 특징이었다. 화가 나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서성대는 임승대와 달리 규는 움직임 없는 석상처럼 변했다. 양 주먹을 옆으로 가만히 떨어뜨린 채. 규의 침묵을 차분한 빗소리가 메웠다. 창밖의 화단에 금세 생겨난 물웅덩이가 잔잔히 찰박이는 소리가 종수의 혼곤한 정신에 스며들었다.
"종수야."
"..."
"난 또 주장 선배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건데 네가 더 힘들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그 새끼가 너한테 이러는 게 괜찮아서가 아니고."
종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규가 보건실 문을 조용히 닫으며 나가고 나서야 몸을 오롯이 느껴 보았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몸 안이 물컹물컹한 젤리로 변해서 그 안에 떠다니는 것들의 순서가 뒤죽박죽 바뀌고 만 것 같았다. 선배가 칼날이 되어 뒤섞고 헤집어 놓고 간 것처럼. 무릎이 심장에 와 있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시큰거렸다. 제일 뻐근해야 할 건 골반 쪽인데 무릎이 유독 아픈 건 엉거주춤한 스쿼트 자세로 오래 짜부라지듯 끼어 있어서였다. 발끝부터 저릿저릿한 느낌이 트리에 감기는 불빛의 전선처럼 휘감으며 기어올랐다. 다시는 뛰지 못할 것 같아 종수는 순간 두려워졌다가, 이내 선배가 그 정도까지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적은 없다는 걸 기억해 냈다. 종수를 절벽 끝에 세워 두는 일이 선배의 즐거움이지만, 밀어서 끝장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또한 믿는다. 선배에 대한 신뢰란 이렇듯 죄다 이상한 종류다. 매번 종수의 말을 왜곡할 거라는 믿음도... 그만 미워하시면 안 되나요. 그 말은 땀방울 떨어지듯 뱉어졌고, 도저히 가눌 수 없는 숨에 얹혀서 토해져 나왔다. 그 궁핍한 소원까지도 선배는 예뻐해 달라는 어리광으로 비틀어서 규정해 버렸다. 어쩌면 그다지도 손쉽게 종수의 진심을 내팽개칠 수 있을까? 종수는 선배를 똑같이 대해 주는 상상을 조금 하다가 그만두었다. 열이 오른 머리로 한 곳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졌다. 미워할 힘은 더군다나 없었다. 종수는 언제나처럼 선배의 날카로운 면들을 쓰다듬어 주는 데 머무른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
선배는 나쁜 병에 걸린 것뿐이야. 말하자면 사람 먹는 곰팡이가 옮은 것뿐이다. 종수의 달뜬 머릿속에서 유해한 먼지처럼 곱고 검은 곰팡이가 선배의 발꿈치에 달라붙어 어두운 그림자를 이룬다. 탁한 그림자는 곧 선배의 무릎을 타고 자력으로 일어선다. 허리로, 뱃속으로, 갈비뼈 속까지 기어올라가 번지며 체내 구석구석으로 흡수된다. 팔도 어깨도 목도 날갯죽지도 뻐근해 왔다. 벽과 변기를 짚은 손이 땀에 절어 미끄러지고, 선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치길 반복한 탓이다. 하릴없이 종수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 있다.
똑같이 해 주고 싶어하고 싶은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싶지 않다. 선배와의 사이에서 정말로 원하는 건 평화가 아니다. 선배는 바람이라서 종수를 마음껏 뒤흔들어 놓아도 된다.
난 그냥 선배를 바라볼 수만 있으면 되고.
선배를 소유하고 싶지는 않아.
선배가 나한테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였으면 좋겠다.
선배의 소유가 되고 싶어.
졸업하고 안 찾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그저 하염없이 선배의 손길만을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몸 깊이 불로 지져 놓은 자국을 되새기며. 언젠가 선배의 심장을 손바닥에 올려놓는 날이 오더라도 쥐어 터뜨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안다. 종수는 거기에 다정하게 입 맞출 것이다. 선배의 심장을 떠올려 보았자 종수의 심장만이 자꾸만 조여든다. 입술 안쪽이 조종당하는 것처럼 움직여 유래를 알 수 없는 삼계명을 읊는다.
당신을 향한 나의 연심을 약점으로 잡아 주세요.
내 약점을 밧줄로 꼬아서 목에 걸어 주세요.
당신으로부터 나를 구제하지 마세요.
소나기는 시시각각 거세어졌다. 웅덩이의 진동 따위는 음소거로 만드는 먹먹한 폭우를 뚫고 두어 번 천둥이 쳤다. 선배는 어떤 날씨를 좋아하지? 선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농구를 좋아하고. 뒷머리가 흩날리도록 빠르게 돌파하는 걸 좋아하고. 음식 취향은 옅고 자판기에선 포카리만 뽑아 마시고 최신 가요는 대부분 따라 부를 줄 알고. 종수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고. 어쩌면 종수를 조금은 좋아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아주 싫어하지는 않고... 그래도 선배의 호오를 조금은 안다는 자부심이 종수를 행복하게, 조금이나마 안심하게 했다. 그리하여 종수는 비로소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병자에게 절실한 잠이었다. 선배가 손가락과 혀를 넣었던 목 안이 끔찍하게 아파서 숨쉴 때마다 기도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머리도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울렸다. 몸에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못내 기다리던 사람이 와서 귀신처럼 해쓱해진 이마에 입술을 올려놓아도 종수는 잠에서 깨지 못했다. 입맞춤은 고이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고리를 통과하는 농구공처럼 흔적 없이. 무용하고 애정 어린 사과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종수는 그냥 수런거리는 빗소리 속에 조금 부드러운 꿈을 꾸는가 보다 할 뿐이다. 연질의 솜사탕 구름 같은 꿈. 해갈은 오지 않지만 선배 쪽도 갈증을 다 달랠 길이 요원하다는 것을 희미한 만족으로 삼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낙착이 나지 않아도 좋겠다고, 그렇게 바랄 뿐이다. 내일도 모레도 선배가 썰물 없는 밀물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본성 그대로 바람처럼 불어서 밀어닥쳐 줬으면. 손끝을 뻗으면 솜사탕을 뜯어내듯 바람의 결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영영 잡고 싶지 않았다.
Freshwater Blues (2024.6.28)
*병찬이가 인어입니다.
병찬은 다른 사람도 아닌 종수한테서 자신이 받는 위안의 크기가 이따금 믿기지 않는다. 인간도 아닌 자신이 인간들 중에서도 일견 가장 인공적인 인간과 깊이 내통한다는 것이. 종수는 생긴 것부터 자라 온 환경까지 잘 깎아 놓은 조각상 같았고 말투는 무심하고 냉철했다. 공감이 결핍에서 나온다면, 공놀이하러 모이는 스물 몇 살의 남자애들 가운데 공감하는 능력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단연 종수일 것이다.
종수는 병찬을 무척 귀하게 다루었다. 병찬은 방심하면 비늘 조각을 흘리곤 했고 둘의 집에 돌아오면 노상 방심한 상태에 있었는데, 종수는 칠칠맞다고 타박하면서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중하게 주워 모았다. 침실 탁자에 비늘을 모은 컵을 올려놓고 어린 왕자가 장미를 보호하듯이 유리 덮개를 닫아 놓았다. 잠이 오지 않으면 종수는 달빛에 반짝거리는 비늘을 관찰하곤 했고, 병찬은 누워서 종수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저녁마다 종수는 욕조 가득 미온의 물을 받았다. 전신욕은 병찬이 일상을 헤엄쳐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과였다. 인어의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얼마 되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의 폼이 유지되는 것은 기껏해야 6분을 겨우 넘겼다. 그 뒤에는 숨겨 두었던 비늘이 돋아나고 숨이 가빠 오기 시작한다. 매일 밤 물을 들이마시고 뱉어내야 시들지 않을 수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물에 한참 들어가 잠긴 다음에야 병찬은 안도를 느꼈다. 둘의 집에서도 욕실이야말로 병찬의 집이었다. 물과 공기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습도도 좋았고 흰 타일에 굴러떨어지는 물방울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인어에게 편안한 환경과 인간이 쾌적해하는 환경은 서로 대치한다. 종수는 아래 속옷만 걸친 차림으로 변기에 앉아 땀을 죽죽 흘렸다. 이따금 물이 너무 식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러 손가락을 넣으며. 종수를 내보내 주어야 하겠지만 병찬은 그러기가 싫었다. 물속에서만큼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병찬은 종수의 젖은 목을 끌어당겼다. 커다란 두 손이 화답해 오며 물에 반쯤 잠긴 병찬의 목을 휘감는다.
종수는 벌어진 아가미를 물을 퍼 올리듯이 양손으로 잡고 키스해 주었다. 긴 속눈썹이 벌어진 틈 속에서 파르르 떨었다. 거울에는 파르스름한 혈관을 덮는 종수의 입술이 비쳤다. 앞니가 맥동하는 핏줄과 맞닿는다. 이윽고 종수의 볼과 턱뼈가 아가미의 면적을 전부 뒤덮어 채운다. 숨이 막혔지만 병찬은 잠깐의 곤란을 참았다. 종수의 목이 바로 눈앞에 있어 혀를 대어 보았다. 소금맛이 나더니 물이 찰박였다. 종수가 물속에서 병찬의 아랫배를 무릎으로 약하게 밀쳐냈다. 저항이 맥없는 걸 볼 때 아주 싫지는 않은 듯하고. 종수는 아가미에 입술을 붙인 그대로 몽롱히 웅얼거렸다. 너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병찬은 웃음이 새는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종수는 재밌어서 웃는 것까지 애 취급해서 우스워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화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문장은 모든 단어가 이치에 맞지 않아서 익살스러웠다. 형아를 거리낌없이 너라 부르는 것부터가 그랬다. 이상하다는 말을 특별하다는 말과 혼동하여 사차원인 척을 해 대는 십대의 비대한 자의식이야 오래 전에 졸업했는데도, 병찬은 종수에게 남달라졌다는 우쭐함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니? 병찬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 욕실 벽의 대리석이나 거울까지도 알 것이다.
욕실을 가득 채운 물안개가 종수를 뿌옇게 만들었다. 종수가 고개를 들고 숨을 바투 몰아쉬었다. 둘만 있으면 자꾸만 서로 호흡이 가쁜 짓을 하게 된다. 병찬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이 팔꿈치를 핥을 수 없듯이 인어는 자신의 아가미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 무슨 냄새 나?
아마 바다 냄새라고 하겠지. 병찬은 감동해 줄 용의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민물에서 온 인어를 태고의 신비이자 만물의 연원에 비유해 주는 데 대해. 네가 이 세상의 기원이라는 찬사보다 더 영광스러운 평이 있을까?
하지만 종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곱씹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까지도 완고했다. 네 냄새. 다르게는 설명 못 하겠어. 너 비슷한 건 너밖에 몰라서.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 (2024.6.28)
삐까뻔쩍 찬란한 식당에 들어가 보니 종수는 이미 와 있었다. 웬일로 폰이 아니라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그 말인즉 병찬이 호텔의 실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직원의 길 안내를 받으며 루프탑 레스토랑까지 잘 가꿔진 정원의 나선형 조약돌 길을 걸어올라오는 모습을 낱낱이 주시했다는 뜻이다. 종수는 대단히 심기가 불편해 있었다. 아마도 병찬이 2분 늦었기 때문이리라. 고슴도치를 깔고 앉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종수는 뾰족뾰족 전기를 튀겼다. 턱시도를 빼입은 것마저 고양이 같았다. 맨 윗 단추가 풀린 셔츠 목깃에 나비 넥타이를 달아주면 딱 어울릴 듯했다.
“뭘 그렇게 차려입고 왔어. 자켓 안 더워?”
“넌 뭘 그렇게 후줄근하게 하고 왔냐? 내가 경고했지. 여기 드레스코드 있다고.”
연푸른색 린넨셔츠를 입은 병찬도 어디 가서 후줄근하다 소리 들을 외양은 아닌데. 그리고 내가 박병찬인데 뭘 입은들 안 들여보내 주겠냐고. 입구에서 힐끔힐끔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직원들이 종수의 눈에만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가는 길에는 아무래도 미니 사인회가 있을 예정이다.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메뉴를 보고 비싼 걸로 고르려고 했더니만 메뉴판도 안 줬다. 웨이터 왈, 이미 최 선수님께서 박 선수님 몫까지 일주일 전에 특별한 오더를 넣으셨단다. 딱 봐서는 재료가 뭔지 감도 안 오고 유럽 명화처럼 생긴 요리가 커다란 접시에 조막만하게 담겨 코스로 차례차례 나왔다. 하나같이 미각이 섬세하지 않은 병찬의 혀에도 착착 달라붙는 맛이었다. 병찬은 자신이 이런 상을 받을 정도로 예쁜 짓을 했던가 돌이켜 본다. 으음... 없는데. 진짜 없네. 종수가 너만 보면 머리가 아프니까 혼자 있게 나가라고 했을 때 진짜 나가 준 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예쁜 짓보단 미운 짓에 가까웠던 듯도 하다. 그렇다면 종수는 심판 직전에 최후의 만찬 뭐 그런 걸 선사하는 중인가? 아니면 두통약을 사 갖고 들어왔으니 예쁜 짓이 맞는 건가? 하지만 약을 받아먹으며 고마워하기는커녕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봤으면서...
종수는 평소답지 않게 밥을 깨작였다. 그러고는 디저트와 함께 나와 뚜껑 따는 쇼까지 마친 샴페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갑자기 이건 어쩌면 병찬에 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들었다. 얘 무슨 일 있나? 나 지금 긴장해야 되나? 설마 아프거나 다친 건 아니겠지. 그것만 아니면 되는데. 그것만 아니면 됩니다. 천지신명이시여. 하늘이시여 이 가여운 아이의 전신을 특히 무릎을 지켜 주소서. 그럼 제가 다시 절이든 성당이든 맨날 막 나가겠습니다.
“종수야.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각을 잡냐.”
종수는 심호흡을 하더니 잠깐 몸을 돌렸다. 병찬은 진짜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표정 관리까지 필요한 얘기가 당최 무엇이란 말인가? 종수는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척 자세를 고쳐 앉았다. 쓰고 있지도 않은 안경이 반짝 빛났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시 근심 없이 속 편해져도 된다. 병찬이 너무 마음 쓸 문제는 아닌 것이다. 병찬의 머릿속에서 각종 종교 시설이 도로 멀어져 간다. 종수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이열, 최종수 똥폼 잡네... 귀엽게스리.
“잘 들어, 박병찬. 내가 줄 수 있는 건 NBA 파이널 반지 두 개, KBL 트로피 세 개, 최세종 기념구장 제1코트 자유 예약권, 원하는 나이키 제품은 모두 제공, 이 정도야. 더 있는데 네가 제일 솔깃할 것부터 추려 봤어.”
“내가 들어본 최고의 사랑 고백인데...?”
“이게? 왜?”
“농구만큼 좋은 게 어딨어?”
“농구는 농구고 사랑 고백은 사랑 고백이지.”
최종수는 하여튼 ‘그거랑 그거랑 같냐‘의 거장이다. 종수의 눈에 비치는 세상엔 뭐가 그렇게 다른 게 많은지 모르겠다. 좋은 게 다 좋은 거지, 하여간 까다로워. 이를테면, 종수의 주장에 따르면 로맨틱과 에로틱이 다르단다. 둘 다 아무튼 멋진 거 아냐? 또 뭐 있냐. 드라마틱? 판타스틱...? 얘네는 아닌가? 어쨌든.
“그런 게 어딨어? 너 방금 프로포즈한 줄 알았다 종수야. 형아도 우리 종수 사랑해.”
“아이 몰라 시발 됐어. 집에 가. 집에 가.”
종수는 무릎에 올려놓았던 냅킨을 내팽개치며 일어섰다. 종잡을 수 없는 타이밍에 짜증이었다. 애새끼 성미가 참 오늘따라 쉽지 않구나. 우리 종쪽이가 왜 이러는 것인지...? 병찬은 종수가 그냥 간만에 대차게 자랑이 하고 싶었나 보다 하고 대충 정리했다. 그래서 비싼 밥도 사는 건가 봐. 귀엽네 최종수. 나만큼 농구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성격 하고는. 깜찍한 놈... 이 형아 아니면 누가 너 같은 영혼을 거둬 주겠니? 그런 결론에 다다를 뿐이다. 종수가 계산을 치르고 둘은 땡볕이 내리쬐는 정원을 굽이굽이 돌아 병찬의 차로 내려갔다. 직사광선에 놓아둔 차 안이 몹시 뜨거웠다. 조수석에 앉은 종수의 입술은 아주 미미하게 삐죽거리고 있을 뿐인데 병찬의 눈에는 댓발 튀어나온 것으로 보였다. 검지로 톡톡 건드려 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아이고 우리 종수가 또 뭐 때문에 화가 났을까.”
“너.”
“말고.”
“너. 아 엥겨 붙지 마. 개빡치니까.”
“그렇군... 우리 종수가 방금 오늘을 제 2321회 키스 금지의 날로 제정했군... 또다시 형아 개손해 사건...”
“이상한 말 써도 안 어려 보여.”
종수는 부루퉁해 보였지만 병찬의 뺨을 밀쳐내는 종수의 손을 붙잡고 뽀뽀를 퍼붓는 것까지 뿌리치진 않았다. 그럼 됐다. 뭔진 몰라도 많이 토라진 건 아니었다. 종수가 고개를 돌리고 딸꾹질을 했다. 샴페인을 너무 빨리 마신 모양이었다. 여기서 웃으면 진짜 삐질까 봐 조금 걱정되는데 인간적으로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최종수 애기네 완전.”
“토 나오게 하지 마.”
“좋으면서 그런다. 마이 베이비 주제에.”
“흥.”
종수가 안전벨트를 맨 걸 확인하고 병찬은 차를 출발시켰다. 원더걸스의 ‘비 마이 베이비’를 콧노래로 부르면서. 이 시점에서 이벤트가 엔딩을 맞은 사정으로, 병찬이 알게 되는 것은 몇 달 후 유사한 특수이벤트가 재발생했을 때로 미뤄졌다. 종수도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내 너를 어엿비 여겨 친히 수확하겠노라’ 하는 의지를 단지 좀 더 비일상적인 사건을 구성하여 전달하려 했음을. 병찬이 매일같이 가볍게 떠올리는 그 말을 ‘베이비’는 결연한 결단으로 빚어 냈다는 것을. 그 결단은 이날 ‘애기’가 준비한 말의 뒤쪽 절반에 해당했으며, 그 말에 곁들일 사이드 디쉬로는 NBA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던 선수의 연봉이 고스란히 든 잔고를 일순 휘청이게 만든 보석이 작은 벨벳 상자에 담겨서 멋들어진 정장 재킷 안쪽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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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딱다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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