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형현] 내 안의 파랑

P모 사이트에 올렸던 글의 재업입니다. 반가워요 펜슬


17세의 조형석x이현성, 형현 연성입니다. 거의 조형석의 독백에 가깝습니다. 
작중 원중고와 지상고의 설정은 자작...에 가까울 겁니다, 아마도요.




서울 소재의 남자 고등학교, 원중 고등학교는 농구에 있어서는 명문이 틀림 없다. 서울 한 복판에 위치한 위치부터 시작해서 쟁쟁한 선배진에 학교 자체의 커리큘럼도 뛰어나다. 농구부 부원만 사용이 가능한 단독 체육관도 있었고, 얼마전에 신축하여 괜찮은 컨디션의 숙소도. 코치진 역시 대한민국 고등학교 농구의 그 어떤 학교도 비빌 바가 못 되는 말 그대로 명문 그 자체인 고등학교. 초등학교 때 혹은 그 이전부터 농구를 단계별로 배워던 엘리트 선수라고 해도, 원중고에 입학하는 일은 대회 입상 성적이 있어야만 가능한 그런 곳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농구부 중 이런 곳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 원중고에 중학 농구에서 이름께나 날린 조형석이 들어오는 일은, 정해진 수순과도 같았다. 조형석은 중학교 1학년이 채 마치기도 전, 원중고 농구부에서 요구하는 입상 성적을 채운지 오래였다. 어마무시한 중학생의 등장에 전국의 고등학교 농구부들은 군침을 흘렸으나, 중학교를 졸업한 조형석은 자연스럽게 원중고 농구부의 유니폼을 입었다. 조형석이 원중고를 고른 것에 별 다른 선택 기준은 없었다. 주전자리는 어차피 자신 있었고 이름이 제법 알려진 학교니까 장래 농구 인생에 도움이 됐으면 될 학교였을 뿐이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중고 고3 선배들이 졸업을 하고 주전 자리에 공백이 있었을 때 1학년이었던 조형석이 금방 주전의 자리를 꿰 찬 것은 물론이었다. 탄탄대로나 다름 없는 조형석의 농구 인생이, 이제 이 농구 명문 원중고에서 바야흐로 화려하게 꽃 피우려 하고 있었다.  

...그랬었다. 

그 조형석은 지금 고민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이라 그런가 더 센티멘탈해진 것도 같다. 지금 그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하고 있는 스포츠인 농구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일로.  

여기부터 유료 분량입니다.

100P

※ 크리에이터의 동의 없는 콘텐츠 불법 복제, 배포, 판매 등의 위법 행위는 법적 조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조형석이 심란한 마음을 담가 굴린 농구공은 농구 코트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서, 벽에 부딪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생각은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농구공과는 참 다르구나.  

*

지난 번 조형석이, 정확하게는 조형석이 소속된 원중고 농구부가 참가했던 전국 대회의 대진표는 참 기묘했다. 

보통 전국구 강팀으로 분류되는 원중고는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수준의 강팀과 붙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그 편이 대회 운영진 입장에서도 좋아서 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좀 냉정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 원중고등학교가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엘리트 농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들의 수준이란 결국 고만고만 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뭐, 어차피 그 엘리트 농구부인 원중고 안에 소속된 조형석이야 별 생각이 없었다. 조형석이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농구를 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그런 조형석이 금방 알아 볼 정도로 대진 운이 매우 좋았다. 원중고의 첫 상대는, 부산의 지상 고등학교였다. 지상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제 2 도시인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고등학교이다. 일반 학생들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지역내에서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인듯 싶었다. 다만 지상고가 보유한 엘리트 농구부의 수준으로는, 전국 2위를 하지는 못했다. 지상고 농구부의 실력은 그저 그래도 그나마 남부지방쪽에 몇 없는 농구부 보유 학교라는 게 의의는 있어보인다. 그 동네도 프로 구단이 있었고, 지역 텃밭이라고 여겨지는 학교 정도는 있어야할 것이 아닌가. 수준은 ... 물론 지상고도 예전에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는 것 같은데, 그 시절을 조형석은 잘 알지 못했다. 중학교 때 농구를 함께 하던 농구부원 몇 명도 서울이 아닌 다른 지방의 고등학교에 갔었지만, 조형석의 기억에 따르면 굳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까지 간 녀석은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운동하느라 바빠 연락을 할 틈도 없었다. 당연히 연락을 해보아야, 중학교 동창 역시 부산의 지상고에 대해서 알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원중고 조형석에게 지상고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학교였다.  

'...그랬는데. 딱 3일 전까지는.'

조형석은 머리를 감쌌다. 대진표가 그 따위로 뜨지 않고, 그냥 말로 해도 알만한 학교가 걸렸더라면 이딴 고민일랑 집어치우고 깔끔한 기분으로 운동이나 하러갔을 것 같다.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민을 한다고?' 

원중고 입학 이후 조형석이 주전이 되었었던 대회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 학교. 실제 경기 시간으로는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벤치에서 교체되어 나왔던 그 학교의 슈팅 가드. 지상고 22번. 선수 명단에서 보았었던 그 이름, 이현성. 이름도 이현성이 뭐냐? 지상고의 이현성. 이 남자 놈들밖에 없는 원중고등학교와는 다르게 지상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라 들었는데 이름이 남녀공통으로 쓸 수 있을만큼 예쁜 것 같았다. 조형석은 자기 머리를 스스로 헝클어뜨렸다. 조형석은 그만 빙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편도 3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의, 그저 그런 농구부에 소속된 자신과 같은 남자 고등학생에게 느끼는 게 정상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조형석은 스스로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느꼈다. 

3일 전 그 경기의 4쿼터, 시합 종료까지 2분 정도가 남은 가비지타임에 일어난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상고의 경기 수준은 그냥 그랬다. 그 쪽의 가드는 작전을 잘못 지시했고, 턴오버가 만연하여 해도 안될 실수를 여러차례 하였으며 리바운드는 압도적으로 원중고가 우세했다. 가장 어이 없었던 것은 자유투였다. 그래도, 슈터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투 정도는 좀 넣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지상고는 적팀이었지만, 지상고 슈터가 어렵게 얻어낸 자유투를 연달아 실패하자 다른 원중고 선수들의 생각도 조형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선수들이 가까스로 활약하여 50점 가까이 낸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선수들의 체력은 소진 되었고, 패색이 짙었다. 어차피 경기는 리그로 진행될테니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 이기면 된다는 지상고 쪽의 마음의 소리가 조형석에게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니 가비지타임이지. 이 경기 내어주고 다른 경기에서 승 따내자는 작전. 이걸 작전이라고 해야할까. 

가비지타임에 그 슈터와 교체 된 것이 지상고 22번이었다. 

농구 선수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간에 교체가 된다는 건, 농구선수로서의 활약을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벌써 4쿼터가 아닌가. 곧 경기는 원중고의 승리로 끝이 난다. 대거 교체되는 지상고 선수들의 대부분은 파릇한 얼굴로 보여졌다. 조형석이 중학 농구 리그에서 오며가며 본 선수들도 좀 있었지만, 서울과 부산이라는 거리상의 문제로 그가 직접적으로 아는 얼굴은 없었다. 

'1학년이겠지? 나랑 같은.' 

기존의 멤버들과 교체되었다는 의미는, 선수 개인에게는 데뷔전이나 다름 없는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승부나 득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단 사실 역시 잘 알 것이다. 그렇게 남는 시간에 데뷔전을 치르고, 많은 사람 앞에서 농구를 하고 다른 선수를 상대하여 추후를 기약해야할 시간. 

"야, 야, 거, 쫌, 비키라!"
'...쟨 뭐지.' 

그 곳에서, 지상고 22번은 농구를 하고 있었다. 진짜 농구를. 마치 40여점의 점수차이 따위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아직 지상 고등학교가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는 것처럼. 코트위를 누비고, 적극적으로 수신호를 보내가며 패스를 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망설임이... 없었다. 슈터라는 포지션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에뻤던... 슈팅폼이었다. 지상고 22번은 최선을 다해 슈팅을 했다. 소리를 지르고 적극적으로 공에 달라들었다. 코트에서 뛴 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 때 교체되었던 다른 1학년들과는 다르게 데뷔전이 아니라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 것이 기묘했다. 지금이 가비지타임이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할 텐데, 어째서인 걸까. 잠시 뒤 조형석은 제 눈이 공이 아니라 지상고 22번을 쫓는 것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계가 잠시, 지상고 22번의 주변으로 정지했다가 다시 빙글 도는 기분이다. 늦게 나왔지만 반칙을 할 때마다 아쉬워했고 바닥에 구르는 제 팀의 동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자유투도... 잘 했으려나. 슈팅폼이 예뻤으니까 꽤 잘했겠지만, 파울을 내어주지 않았기때문에 그 건 상상으로만 남기고 다음에 감상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지상고와의 경기는 후반부에 교체된 지상고 22번이 2점 슛 2개, 삼점 슛 1개 정도를 쏜 이후 4쿼터가 막을 내렸다. 그래보아야 4점에 3점을 더했으니 7점인가. 40여점의 점수차이를 극복해낼만한 점수는 되지 못했다. 안다. 이런데서 허접하게 질 원중고 농구부가 아니었다. 대회에 있어서 첫 번 째 경기가 아닌가. 그럼 당연히 1승정도는 손쉽게 하고 가야하는 게 맞다.  

문제는 조형석 본인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조형석은... 지상고 22번을 보았다. 파란 유니폼을 끌어올려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지상고 농구부원과 말을 하고 있었다. 사투리 억양이 강하여 잘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다음 경기를 기약하는 격려섞인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격려를 퉁명스럽게 할 수 있는건가? 아무튼. 경기 종료 후에, 조형석은 원중고의 스코어를 보는 대신에 지상고 22번의 얼굴을 몰래 살폈다. 선명해보이는 인상에 숱이 많아보이는 눈썹. 조형석도 마찬가지이기는 했으나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것 같은 근육. ...아까 땀 닦는다고 유니폼 올릴 때 살짝 봤다. 웨이트가 좀 더 필요해보이는데, 앞으로가 기대...아니지, 지금 내가 뭘 기대하는 거냐? 조형석은 지상고 22번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산 사투리 그 자체인 어투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상상했다. 그 시끄러운 코트 위에서, 그 밖에 다른 이야기들은 건성으로 거의 소음에 가깝게 들려왔다. 

...조금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걸 인지한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포카리스웨트나 마셔야지. 조형석은 제 안을 채워나가는 큰 갈증을 지상고의 파란색과 비슷한 것으로 채워보리라 마음먹는다. 그게 꼭... 마음 먹은 것 처럼 쉬운 일은 아니어서 캔을 연거푸 4캔 정도 비우자, 주전이던 포워드 선배가 '오늘 대승했다고 내일 없는 것처럼 마시지마라, 형석아.'하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아, 내 안에 파랑이 더 채워지면 좋을텐데. 

*

조형석은 농구대 바로 아래에 앉아 림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어떤 남자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너무 일찍 일어났다. 그래도,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있어서 좋았다. 누군가한테 들키면 슈팅 연습한다 둘러댈 핑계거리도 생각해두었다. 그 아래에서 조형석은 아마 자신보다 더 많이, 림 근처에서 연습을 했을 지상고 22번, 슈터 이현성을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시간에도 연습을 하고 있을지도. 농구,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다. 입시의 일환으로 농구를 하는 놈들과 농구가 정말 좋아서 하는 놈들은 태도부터가 차이가 난다. 지상고 22번은 절대로 후자였다. 그 점이 좋았다. 그 생각이 좋아서 그만 취할 것 같았다. 지나치게 이른 새벽의 감정이라도 별로 거리낄 것은 없었다. 히죽거리고 웃어도 볼 이가 없으니까. 미성년자였던 조형석은 술에 취한다는 게 뭔지 모른다. 다만 생각에 취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현성을 생각하면 조형석은 말 그대로 이해했다. 지상고 22번, 이현성과의... 그 모든 만남이 즐거웠다. 너무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현성의 매력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조형석이 즐겁냐하면, 즐겁지는 못했다. 지금껏 한 번도 깨달아 본 적이 없었다. 남자 좋아하는 남자라는 존재를 알고는 있었고, 그다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게 자기가 되게 생겼다. 이, 이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떡하냐고. 농담 아니다. 여기는 원중고다. 히히덕거리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남자가 고백공격을 받는 일 따위야 흔해빠져서 잡담꺼리도 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지상고는, 남녀공학이었다. 상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조형석, 본인의 머리 위에 있는 셈이다.  

'...농구...' 

그러면 말이지, 이렇게 하자.
지상고 22번, 네가 나에게 주목할 만큼 미친 놈처럼 농구 해줄테니까. 
그 때가 되면 성별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 없을만큼 나한테 빠지도록, 그렇게. 
너 농구 정말  좋아하잖아. 그러니 농구를 잘하는 나도 좋아해줘. 나도 그 날이후로 너를 아마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다시 한 번, 확인 해볼 수 있게. 

...

"조형석이...히죽거리고 있어..."
"요즘 애들 무섭다, 무서워... 이 시간에 슈팅 연습..." 

체육관 문을 열려던 원중고 2학년 농구부원들은 당황했다. 인기척을 느낀 것도 잠시고 곧 공 튀기는 소리가 났다. 촤악, 하고 그물을 스치고 들어가는 농구공의 궤적 역방향을 눈으로 좇으니 거기에는 1학년인 조형석이 있었다. 그는 반 팔에 반바지를 입고 농구화를 신은 채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이 아침 6시다. 이 새끼는 몇 시부터 와 있던 거고, 농구공을 도대체 몇 개를 몇 번이나 던진 걸까? 아니, 연습도 연습 나름이지. 1학년인데 무서워 죽겠다. 첫 주전으로 나갔던 대회에서 잘 해서 그런 걸까, 아무튼 실실 웃어가며 농구공을 던지고 있었다. 

"형석이는 제 정신이 아니다..."
"어, 동의한다...미친 놈..." 

농구에. 
2학년들은 서로 불안스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갤 끄덕였다.

원중고 2학년 선수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농구를 사랑하는 남자와 첫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목표는, 농구로 먼저 사랑받기 위한 것을.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