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아무 토요일

🎶 by A

휴일이든 평일이든 병찬은 종수를 알고 지낸 이래 마음 놓고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밤잠도 설쳐서 멍한 얼굴로 종수는 물컵을 들고 부엌에 서 있다. 가만히 있으려니 불안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잘 모르는 눈치다. 종수는 병찬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거실을 서성이다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쏙 들어간다. 뭘 하러 가는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비시즌이지만 지난 시즌에 부진했던 경기를 돌려보고 있는 것이다. 종수가 ‘복습'이라고 제목을 붙였고 병찬이 ‘자학'이라고 은밀히 부르는 재생 목록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어도 잡생각이 사라질 텐데. 종수는 은근히 엉덩이가 무거워서 약속이 없으면 밖엘 안 나간다.

병찬은 그런 종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안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어깨에 턱을 얹으면서 “영화 한 편 때려?” 물어본다. 여기서 병찬의 역할은 얼추 끝이 난다. 둘의 일정은 늘 이런 식이다. 병찬이 ‘이거 하자’고 대뜸 제안하고, 종수가 그 ‘이거'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채워 넣는다. 종수는 고분고분 노트북 인터넷 탭을 끄고 (형아 1승) 최근 개봉 중인 영화를 검색한다. 예매율 1위는 인사이드 아웃 2. 종수가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병찬이 엄청 놀릴 거 같아서다. 불안이가 인간이 되면 너일 거라고. 박병찬 너 때문이잖아? 니가 헐랭하니까 네 몫까지 내가 걱정하는 거 아냐. 뭐 병찬과 사귀기 전에도 태평한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거짓말이지만... 하지 않은 대화 시뮬레이션을 종료하며 종수는 고개를 젓는다.

“보고 싶은 거 없어.”

“그래? 그래도 나가자. 심심하다.”

그래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더운 거리로 삼선 슬리퍼를 내디딘다. 둘이 한 집으로 합쳐 살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아직은 주변 풍경이 조금 낯설다. 느지막이 문을 여는 카페와 꽃집과 세탁소, 영업을 준비하는 브런치집들을 지나 동네를 몇 바퀴 돈다. 걷다 보니 목이 말랐다. 어느 카페를 갈까, 몇 번 가본 집이냐 새로운 페이보릿 플레이스의 개척이냐 토론하다가 더 좋은 생각이 난다. 이사를 오자마자 둘이 가장 먼저 한 일: 헬스장을 끊었다. 운동 선수라도 헬스장은 집앞으로 다니는 게 최고다. 거기서 정수기 물을 각자 세 컵씩 마신다. 헬스장을 요긴하게 활용하니 등록비 뽕을 뽑은 듯한 보람을 느낀다.

온 김에 트레드밀을 나란히 차지하고 러닝도 좀 한다. 병찬은 러닝할 때 꼭 노래를 듣는다. 짐 없이 털레털레 나다니는 편인데 이어폰만은 꼭 챙긴다. 노이즈 캔슬링도 없는 1세대 갤럭시 버즈를 꿋꿋하게 쓴다. 병찬이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 종수는 아주 조금 외로워지지만 삐진 티는 안 낼 것이다. 그래도 역시 달리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호르몬이 나와서 좋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서 더 좋다. 연봉을 넉넉히 받는 프로 선수들이라도 전기세는 어쩐지 아까운 것이다. 오늘은 휴식일이기 때문에 둘의 운동은 거창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가볍다. 어제까지 고된 트레이닝을 마쳤고 근육과 인대가 회복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병찬은 스쿼트를 조금만 치는 시늉을 하고 종수는 런지를 한다. 복근도 가볍게 자극하고 싶어서 종수는 매트를 깐다. 윗몸일으키기라고 말도 안 했는데 바로 알아본 병찬이 종수의 발을 깔고 앉아 무릎을 잡아 준다. 그건 좋은데, 종수가 올라올 때마다 “우쭈쭈 잘 온다. 아이고 장해라.” 추임새를 넣는다. “형아한테 뽀뽀하러 오는구나”하면서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기도 한다. 병찬 때문에 힘이 빠져서 일어날 수가 없다. 웃긴데 웃어 주기 싫어서 종수는 삐진 척한다.

“하지 마. 힘 빠져...”

“그래그래. 힘 좀 빼고 살아.”

대꾸할 힘도 빠져서 종수는 땀에 젖은 채로 매트에 누워 있다. 병찬의 비겁한 K.O승으로 그렇게 운동이 끝난다. 샤워를 하고 헬스장 방문을 마무리한다. 병찬의 개인 사물함에 비누가 똑 떨어져서 종수가 씻다 말고 유리벽 사이로 손을 넣어서 쓰던 비누를 건네 준다. 어머니가 광고하시는 천연 라벤더 비누를 얻어 왔는데 아주 향긋하니 유럽에 온 것 같다. 병찬에게 없는 것은 비누만이 아닌데, 최근 체중이 좀 줄어서 트레이너가 운동 끝나면 보충제를 꼭 바로바로 먹으랬다. 물론 안 챙겨 왔다. 하는 수 없이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른다. 이미 종수의 블랙커피를 사러 몇 번 들른 곳이다. 병찬은 가던 집에만 자꾸 가는 습성이 있다. 미숫가루 라떼가 프로틴은 아니지만, 고소하고 맛있으며 증량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종수는 의외로 쿠폰을 성실히 찍는다. 병찬은 종수의 그런 면이 귀엽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종수의 머리를 괜히 헝클어 본다. 아직 물기에 젖었다.

“어제 늦게 잤지.”

“아닌데.”

“옆에서 계속 폰 봤잖아.”

“신경 쓰이잖아.”

병찬은 종수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안다. 지난 시즌에 귀국한 종수는 분명히 잘 해냈지만 미국에서 활약하다가 리턴하는 선수에 대한 농구계와 팬들의 기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수준이었고, 상찬만큼이나 모진 평가도 많이 쏟아졌다.

“너 착해서 그래.”

빨대를 문 종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뜻이다.

“온갖 악플러들한테 마음의 공간을 내 줘서. 걔네를 하나하나 다 챙겨 주고 있잖아. 걍 형아한테 선택과 집중을 해. 걔네에 대해선, 뭐 그냥 이렇게 생각해 봐. 지가 나보다 잘할까? 내가 최종순데.”

“...괜찮은 거 같아.”

“내가 최종순데가?”

“아니, 공간을 내주지 말라는 거. 좀 일찍 말해 주지, 옛날에. 중학생 때쯤 알았으면 더 잘 자서 키 컸을 텐데.”

“193에서 더 크게? 욕심도 많다. 그땐 우리 만나기도 전이구만.”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이것도 중학생 때네. 동인천크로스오버라는 새끼가 있었는데...”

병찬은 풉 미숫가루를 뿜어낸다. 종수가 터덜터덜 냅킨을 가져와 앞섶을 싹싹 닦아 준다. 빨래를 하고 종수 것을 아무렇게나 건져 입은 블랙 티셔츠지만 얼른 닦아내서 심하게 얼룩이 지지는 않았다. 종수가 투덜거린다. 박병찬 은근 손 많이 가.

“동인천 걔가 영상마다 따라다니면서 내 돌파 욕했어. 지가 나보다 돌파 잘할까?”

“잘할 수도...있지?”

“되겠냐? 안 봐도 방구석 개쩌리루저새낀데. 나한테 돌파로 비벼지는 거 끽해야 너 하나 정도지.”

하하하. 말이 심하구나. 그런데 너 방금 아주 자상하게 개쩌리루저새끼의 치다꺼리를 했단다... 병찬이 정체를 고백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카페 주인장이 당근케이크를 서비스로 주며 수줍게 말한다. 두 분 자주 오시는 것 같아서요. 저희 케익도 직접 만들거든요? 맛있어요. 다음주부터 계절 한정 복숭아 케이크 나오니까 한번 드셔 보세요.

“다음엔 다른 데 갈래...”

나오면서 종수가 조용히 귓속말한다. 내향형 고양이에겐 단골을 아는 체하는 주인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탑재되어 있다. 도장 나머지는 전부 나 혼자 와서 미숫가루 라떼로 찍겠네, 병찬은 생각한다. 물론 스탬프 카드를 까먹고 안 챙겨 다녀서 도장이 한 개만 찍힌 카드가 스무 장 생길 것이다. 병찬은 이제 입이 달아서 밥맛이 떨어졌다. 음료와 케익으로 점심을 때운 셈하고 싶다. 하지만 종수는 병찬의 팔을 붙잡고 마트 문을 밀친다. 볶음밥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미국에서 자취할 때 자주 해 먹었어.”

통조림 완두콩을 집으며 종수가 덧붙인다. 카트 손잡이에 반쯤 엎드려 밀며 따라다니는 병찬은 종수의 유학 시절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는 게 자못 아쉬워진다.

“미국에서 농구하니까 좋았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만 깨달았지 뭐. 한국에선 봐줄 만한 줄 알았는데 세계 무대에선 허접이었고.”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게 목표야? 그럼 지구인보다 농구를 잘하는 화성인이 있을 수도 있잖아. 우리 다 걔네한테 개털려.”

종수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게 보인다. 역시 형아밖에 없지? 짜아식. 병찬은 생각나는 말을 우다다 전부 한다.

“사실 내가 그 화성인이지롱.”

“개소리 스탑.”

“봐봐, 종수야. 난 너희 부모님 영상으로 많이 뵈었어. 확실히 지구인이시던데.”

“말이라고 하냐.”

“근데 너는 우리 부모님 알아? 본 적 없잖아. 사실 화성인임. 아, 아빠가 화성인이고 엄마는 금성에서...”

“설정 급조한다고 고생이 많다.”

“안 믿네? 딱 두고 봐라, 최종수. 곧 알게 될 거다.”

“하... 그렇다고 칠게. 화성 언어 니가 나한테 과외해. 오늘부터 시작.”

“오... 귀찮다.”

“그럼 뭐, 상견례 때 너희 부모님이랑 대화도 하지 말고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

“에...?”

상견례? 종수의 입에서 튀어나올 거라 기대하지 않은 단어다. 그들은 아직 결혼까지는 막연한 열애 중...이라고 병찬은 알고 있었다. 쫑 이 자식 멀리 갔는데? 기특한 고양이로세. 병찬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카트에 속력을 붙여 쫓아가고 종수는 걸음을 후다닥 재촉한다. 화성인 같은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틱틱거리며.

귀가하자마자 주방에 들어간 종수는 거치적거린다고 병찬이 가까이 와서 참견을 못하게 한다. 어차피 요리는 젬병이라 거들 생각도 없었다. 병찬은 식탁에서 턱을 괴고 종수가 요리하는 걸 구경한다. 종수는 칼질은 삐뚤빼뚤해도 볶는 솜씨만은 제법 능숙하다. 코팅팬으로 현란한 웍질을 한다. 그렇게 해야 불맛이 난단다. 백 선생님께 전수받은 비법이란다. 수많은 자취생을 문하에 둔 백 선생님은 종수의 자취요리 구루시기도 하다. 햄과 계란 스크램블이 많이 들어간 볶음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병찬은 후라이팬 하나를 숟가락 두 개로 긁어 먹어도 되는데 종수는 예쁜 그릇에 옮겨 담는다. 버터의 풍미가 입안에 휘감긴다. 간은 병찬의 입에는 싱거웠는데, 병찬은 종수한테 소금을 더 치지 그랬냐고 하는 대신 케챱을 가져와 자기 것에만 잔뜩 뿌려서 딱 좋게 만든다.

“종수 너 불질에 소질 있다. 농구 관두면 중식집 차려라.”

“볶음밥만 하는 중식집이 어딨냐.”

“없나?”

“어.”

“내가 수타면 뽑아 줄게.”

“탕수육은?”

“식자재 마트에서 사다가 에프에 튀겨 주자.”

“손님들은 바보가 아니야. 한 달만에 망할걸.”

“그런가?”

“어.”

“저런.”

설거지는 병찬이 한다. 후라이팬 하나 그릇 두 개 수저 두 벌 정도는 금방 닦을 수 있다.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지만 않았더라면. 손끝이 축축해져 가며 설거지를 마치고 종수야 심부름 좀 하자, 하려고 거실로 나가니 종수는 소파에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졸고 있다. 입을 반쯤 헤벌리고 자는 모습이 언제 봐도 웃기고 아기 같다. 병찬은 종수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무릎으로 눕힌다. 그러면서도 고민한다. 얘 지금 자면 밤에 더 못 자는데... 하지만 너무 곤히 잠들었는걸. 딱 삼십 분만 있다 깨우자. 코 골았다고 뻥 쳐서 놀려야지. 화면에는 거대한 별이 둥글게 빛난다. 옆에 자그마한 탁구공처럼 태양이 붙어 있다. 차분한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토록 거대한 태양이지만 태양계 밖으로 눈을 돌린다면...

들어 본 멘트다. 이거 전에도 보던 거 같은데. 애착 영상인가 보다. 애착 레시피도 있고, 애착 형아도 있고. 사랑이 많구나 우리 종수. 종수가 깊게 기대 온다. 잠꼬대를 하며 코끝으로 병찬의 아랫배를 파고든다. 어쩔까 하다가 껴안고 에라 누워 버린다. 소파를 큰 걸로 사길 잘했다.

티비 화면이 별에서 줌 아웃된다. 별이 속한 은하계 전체가 나타나고 또 멀어진다. 나선은하의 팔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게 선풍기 같아서 병찬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온몸이 노곤하게 풀린다. 소파 쿠션 속으로 두 장정의 몸이 푹 가라앉는다. 병찬은 가물가물 생각하다가 잠든다. 저녁은 또 뭘 먹이나. 어렵네. 흐음. 종수한테 맛있는 거 또 해 달라고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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