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타 쫑뱅쫑

그러한 우주의 사정으로

🎶 by A

1 (2024.6.15)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준향대 캠퍼스 한복판에 자리잡은 아름동산을 오른 게 병찬의 첫 번째 패착이다. 아름동산으로 말하자면 모든 학교 구성원의 애증을 한몸에 받고 있다. 교정을 가로질러 걷는 데 이십 분을 추가하는 원흉이자 캠퍼스 개발 계획의 가장 큰 장애물이므로 준향대 커뮤니티에는 ‘학교는 아름동산 안 밀고 어디다 헛돈 쓰냐’, ‘아름동산이 아니라 악마의 동산’이라는 성토가 주기적으로 올라오나, 대학의 낭만에 심취하기에 그만한 장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전임 이사장이 버드나무를 좋아하여 동산 한가득 심은 덕택으로 한번 깊이 발을 들이면 머리 위로, 옆으로 뻗치고 늘어지는 가지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러니 특히 시험기간 전후로 머리를 식히러 찾는 학생이 많고, 밀애를 즐기기에 제격이기도 하고, 따라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아무튼 준향대 입학생이라면 아름동산 최애 버드나무 하나 정도는 마음에 심어 두고 있는 법이다.

무성하고 유독 옹이진 나무 아래 걸터앉아 병찬은 음료를 쪽쪽 마셨다. 일행은 없었다. 유급을 두 번 하고 옆자리가 며칠 간격으로 바뀌는 병원 생활까지 하고 나면 혼자 다니는 일에 저항감이나 남부끄럽다는 자의식이 없어진다. 겸사겸사 점심도 해결하는 중이다. 대개 농구부원들, 그중에서도 준수나 초원과 시간을 맞춰 학식을 먹는데 오늘은 시간표가 맞지 않는 요일이고, 혼밥하러 식당에 갈 만큼 허기가 지지는 않았다. 손에 들린 것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여야 나무그늘 아래 청량하면서도 피로에 젖어 있는 젊은이의 정취가 완성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달달 고소한 미숫가루 라떼다. 물방울이 맺히는 컵을 들고 나뭇가지 사이로 야트막하게 펼쳐지는 학교 전경과 백팩을 메고 바삐 걸어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병찬은 생각했다. 덥다. 날씨 미쳤나. 6월이 왜 이래. 당분간은 다시 못 올라오겠다. 이번 학기는 오늘이 마지막 아름동산이군.

두 번째 패착. 어제가 마지막이었어야 했다. 병찬은 하필 오늘, 하필 아름동산의, 하필 그 나무를 찾아왔다가 주변을 둘러본 것을 곧 후회하게 된다. 발치에 자라난 어떤 것을 발견했고, 울창한 이파리들이 바람을 막아 주는데도 그것이 혼자서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 버려서다. ‘그것’은 부숭부숭한 검은 성게 같기도 했고 머리카락 뭉치 같기도 했다. 머리를 뒤채는 폼이 꼭 흙에서 탈출하려고 낑낑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호의를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병찬의 그런 면을 가리켜 후배들이 ‘유죄’라 일컫곤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반쯤은 호기심으로, 병찬은 깊은 생각 없이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리를 잡고서 ‘그것’을 영차, 하고 뽑아냈다. 그리고 곧장 비율이 맞지 않게 거대한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그 안에 우주보다 더 큰 것이 들어 있는 듯한 까마득한 어둠이 병찬을 응시하는 순간에 아차 하는 직감이 찾아온다. 아, 망했다. 뭔지는 몰라도 방금 대차게 말아먹었다. 괜히 꺼내 줬어. 그냥 놔두고 도망칠걸. 그러나 이미 늦었다.

후회란 왜 하는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짧동한 손을 뻗어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흙가루가 떨어져나가고 나서도 요정처럼 반짝이 가루를 온몸에서 흘렸다. 신비로운 광채를 만족할 만큼, 그리고 병찬의 넋이 끝까지 나갈 만큼 뿜어내고 난 다음에야 그것은 자기소개를 해 왔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였다. 이거 내가 아는 사람인데. 아는? 알던? 알았던?

“호칭이 필요하겠군. 일단은 ’쫑커벨’ 정도면 인간에게는 그런대로 적절해.”

“쫑커벨?”

“뭐가 문제지?”

“그거 혹시 쫑과 팅커벨의 합성어야? 쫑이 뭔데?”

“당연히 최종수잖아.”

“최종수?”

“그게 나니까.”

“최종수가 너라고? 장도고 나온 걔?”

“말하자면.”

“최종수가 한 뼘짜리 괴물이 되었다고?”

“무례한 인간 같으니, 그러나 특별히 관대함을 베풀어 주지. 박병찬 네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니.”

“뭐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내 진정한 정체는 최종수의 영혼의 엑기스쯤 된다고 해 둘까.”

“저기, 대답 좀.”

“하고 있잖아. 끝까지 들어. 휴우우. 인간들이란 이렇게 인내심이 없다니까. ...자, 최종수가 죽었을 때 말이지.”

“최종수가 죽었다고?”

“미국 가던 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해서 대학 무대를 밟아 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이 우주에서도 미국 영토의 거의 삼 퍼센트가 사막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너희는 상당히 운이 좋은 축에 속하지. 그 우주에서는 이미 이십 퍼센트가 넘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최종수는 멀쩡히 미국 진출해서 잘 뛰고 있어. 올해 마치 매드니스에도 출전했고 NBA를 가느니 마느니 하는 게 신문에도 나온다고. 며칠 전에도 사진 봤어.”

“그건 이 우주의 최종수고. 매 순간이 다중 우주의 분기점이야.”

“무슨... 에에올 같은 설정을 믿고 있나 본데. 저기. 쫑커벨이랬나? 정신 좀 차리는 게 좋겠다. 아니지.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거겠지. 박병찬, 정신 차리자! 더위 먹은 거야. 그래, 틀림없어. 내려가면 보건소에 가야겠어.”

스스로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병찬을 향해 쫑커벨은 못마땅하게 눈을 흘겼다.

“’에에올’... 참 지겨운 제목이야. 인간치고는 꽤 힘냈지만 실제 섭리의 조악한 모사품에 불과한 그 영상물을 요즘 이 우주의 인간들은 상당히 애호하더군. 다른 우주의 기척만 엿보여도 ‘이건 에에올이다!’를 연호하질 않나. 우주가 분기한 게 하루 이틀인가? 진실은 그따위 필름 쪼가리보다 훨씬 오래됐어.”

“진실...? 진실은 또 뭔데?”

“감당할 수 없을 텐데. 뭐, 아주 조금만 보여 주도록 할까...”

쫑커벨의 매서운 눈초리가 온화해지더니 눈이 보름달처럼 둥글어졌다. 동공을 감싸고 빙글빙글 소용돌이 문양이 떠오르며 병찬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회전에 들어간다. 아찔한 어지럼증과 더불어 병찬의 몸이 함께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태풍에 휘말리듯이 병찬은 거센 바람을 타고 휩쓸려 날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가 귓가를 괴롭히는 가운데 무한한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채찍처럼 매서운 돌풍이 뺨과 팔다리에 철썩철썩 휘감겼다. 으아악! 내려 줘! 정신이 드니 병찬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넘어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이 버들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이 거짓말 같았다. 쫑커벨의 눈 속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이 잠잠해져 갔다. 

“알겠지? 그런 연유로 해서,”

“그게 무슨 연유인데.”

“네가 못 알아들은 것까지 내 책임은 아니고.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그 최종수의 원혼과 여러 우주를 매개하는 자야. 연결은 원래 혼령이 도맡아 하는 일이지. 그 종수의 우주와 이 종수의 우주는 열두 살 생일에 분기되었어. 생일에 서로 다른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야. 이 우주의 종수는 장도고에 가게 해 달라고 빌었고, 그 우주의 종수는 더욱 원대한 꿈을 꿨어. 세상에서 농구를 제일 잘하게 해 달라고 빌었지.”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본 게 다인 애의 열두 살 때 소원이라니. 별 TMI를 다 알게 됐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쪽 최종수는 틀려먹었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일단 그 우주의 나보다 잘했을 리가?”

“그건 논란의 여지가 있어. 그 종수는 이쪽 최종수보다도 농구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어쨌든 박병찬 네가 그 종수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지. 이 사태는 너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에?”

“그 종수는 비교 잣대의 하나였던 널 더 일찍 만났어.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이미. 그 우주의 너는 장도고를 갔거든. 그래서 네게 책임이 생겼어.”

“와... 이젠 이게 내 책임이다? 만난 적도 없는 다른 우주의 최종수가 성불 못한 게?”

“그렇지. 그 종수가 널 좋아했는데 고백을 못 했으니까.”

“최종수가?”

“그래.”

“날 좋아했다고?”

“그래.”

“그래서 여한이 남았다고?”

“그래.”

“있잖아.”

“무엇이 있는데?”

“난 진짜로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쫑커벨은 딱 잘라 말했다.

“전생이란 건 없어. 희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군. 다음 학기에는 천문학이나 물리학 수업을 하나라도 수강하도록 해. 이 우주에서 인간의 과학은 한참 미진하지만 그래도 미신을 타파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야.”

“...뭐가 내 책임인지 좀 알아듣게라도 말해 줄래? 날 좋아한 건 최종수라며.”

“그렇지. 그런데 종수는 멀리서 그쪽의 너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이쪽의 너라도 그애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병찬은 한 손을 들어 쫑커벨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면 갈수록 너무도 불합리하고 불공평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들어 봐, 쫑커벨.”

“흠.”

“이쪽의 최종수는 누가 봐도 다 가진 애야. 재능도 출중하고, 집안도 대단하고, 운동하는 내내 큰 부상 한 번을 안 당했고, 그때그때 좋은 기회가 주어졌어. 내 말이 틀려?”

“아니.”

“그쪽의 최종수는 심지어 농구를 더 잘하게 되었다며. 그러면 그 최종수는 이쪽보다도 복을 더 받았으면 더 받았지, 덜 받지는 않았겠지. 안 그래?”

“맞아. 그 종수는 상당한 특이점에 속하지.”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난 걔처럼 탄탄대로만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 인생만으로 충분히 고달파 왔어. 그런데 왜 내가 고생을 또 뒤집어써야 해? 이쪽 최종수한테 시키면 안 돼? 이쪽 최종수랑 저쪽 최종수랑 쎄쎄쎄 하면 왜 안 되냐고. 왜 최종수는 안 그래도 물고 태어난 금수저가 점점 반질반질 닦여 가는 놈이 다른 우주의 자아까지 소원을 이루고 이해자도 얻어야 되는데?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거 그 뭐냐, 그, 그거 있지. 기울어진 운동장인가? 완전 그거야.”

드물게 열변을 토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쫑커벨은 끼어들지 않고 경청했다. 심지어 이따금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가며. 상당히 감명을 받았는지 눈가에 눈물처럼 투명한 빛이 고이기까지 했다. 병찬이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그 눈은 다시 본색을 드러낸다.

“예리하군.”

빙글...

“잘 간파했어.”

빙글빙글......

“옳은 말을 하는군, 필멸자여...”

빙글빙글빙글............

“그래도 이번엔 살려 두도록 할까.”

쫑커벨의 낭랑한 선포와 함께 목젖에 칼끝이 들어오는 섬뜩함이 찾아들었다. 병찬은 움찔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에엥...?”

 “이 우주는 겁 없이 입이 바른 자를 오래 살려 두지 않아. 그것도 네가 말한 기울어짐의 일부지. 뉴스를 챙겨 본다면 짐작했겠지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종수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야.”

“뭐? 최종수는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말해.”

“나한테 말하면 전달돼.”

“미국에 있는 최종수한테?”

“아니. 비행기 사고로 죽은 종수한테.”

“너 근데 좀 웃기다.”

“내가?”

“살려 준다는 건 뭐야. 너같이 쪼끄만 게 어떻게 날 죽인다고. 맹랑한 녀석이네 이거.”

그러자 쫑커벨은 병찬을 빤히 쳐다보며 쉬익 쉬익 소리를 냈다. 입이 아니라 온몸에서 나는 듯하던 소리가 꽁무니로 집중되었는데, 그곳에서 작고 뾰족한 침이 자라나고 있었다. 윤기가 도는 새까만 액체가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흰 연기를 뿜으며 방울져 떨어진 액체가 닿자마자 잔디가 갈색으로 말라 죽었다.

“장수말벌을 아기꿀벌로 보이게 할 정도의 맹독이지. 늘 준비되어 있어.”

“그딴 거... 준비 안 해도 괜찮다고, 이...”

“뭐라고? 잘 안 들렸어. 쫑나벨 새끼가 뭔데?”

“아니 아니, 쫑커벨이라고 했어. 어서 집어넣어.”

“그래. 이제야 좀 얌전해지는군, 박병찬. 마음에 든다.”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해?”

“그애가 바라던 걸 들어주면 돼. 내가 사라질 때까지.”

“너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농구 선수로 만들라는 거야?”

“그건 열두 살 때의 소원이고. 소원이 평생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 너도 열두 살 때랑 지금이랑 원하는 게 똑같지는 않을 거 아냐. 종수도 이후로 소원이 여러 번 바뀌어. 말했지, 걔는 너를 좋아했다고. 장도고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이 시작하는 가을학기까지 뜨는 반년간을 주익대가 아니라 준향대에서 보낼 정도로. 준향대 앞에서 농구부 단체가 아니라 너랑 단둘이 즉석사진을 찍고 싶어 했는데 입을 떼지 못했어. 그것부터 들어 주는 게 어때?”

“안 들어 주면 어떻게 되는데?”

“그 종수의 원념이 이 우주를 분화시키는 경우의 수를 묻는 건가? 그거라면 꽤 많지. 가장 온건한 것부터 말하자면 그쪽 종수가 이쪽 종수를 죽여. 아직 너랑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다는 걸 꽤나 질투하고 있거든. 이쪽 종수의 뱀파이어화도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지. 센티넬과 가이드가 뭔지는 들어 봤겠지? 화성에 사는 괴수를 소환할 수도 있고.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 우주가 네가 오메가로 발현하는 시간선으로 가는 거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실망스럽군. 방금은 제법 명철한 말을 하더니. 간단히 말하자면,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면 협조하라는 뜻이야.”

“독침에 쏘이지 않으려면?”

“그래, 독침에 쏘이지 않으려면.”

그밖에도 쫑커벨은 병찬이 앞으로 새기고 살아야 할 주의사항을 수없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때때로 없어져도 너무 놀라지 마, 박병찬.”

“걱정 마. 얼마든지 없어져도 돼. 아주 오랫동안 안 나타나도 괜찮아. 가급적이면 영원히...”

“너야말로 내가 못 돌아올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런 걱정 할 리가...”

“뭐라고? 너 그런 식으로 말끝을 흐리는 거 나쁜 버릇이야. 고쳐. 종수도 그런 거 싫어해.”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그래. 이 우주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종수의 대행으로 처리할 일도 꽤 많고 가 봐야 할 곳도 많아. 죽음 이후의 삶이란 이토록 번거롭지.”

“너도 참 힘들게 산다 야. 나무 밑에 처박히기나 하고.”

“달리 어디로 가겠어? 거긴 자연스러운 연결점이야. 모든 불운은 나무 밑으로 모이기 때문이야. 뿌리가 정기를 빨아먹어서 생성하는 음압 때문에.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동일한 자연의 이치지.”

“그래. 그것참... 그렇구나. 응.”

“그래도 내가 네게 못 돌아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우주들 사이에서 길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네 무릎이 포털이거든. 이 우주로 건너뛸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우주들은 불행으로 박음질 슬픔으로 시침질되어 전체를 이루지.”

무릎이 완벽하게 나으면 쫑커벨도 못 온다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말을 꺼냈다간 어쩐지 독침을 다시 구경하게 될 것 같아서 병찬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고, 쫑커벨은 병찬의 온순함이 흡족한 눈치였다.

공강을 활용하여 첫 소원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쫑커벨은 “이 형태의 나는 네게만 보이고 들리기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해도 괜찮아” 하고 알려 주었지만 병찬은 쫑커벨이 혹시라도 남의 눈에 띌세라 후드에 최대한 깊숙이 집어넣었다. 준향대 캠퍼스 부지는 그리 넓지 않아 아름동산을 내려가면 금방 후문을 지나 가게가 즐비한 거리에 닿았다. 여럿 늘어선 사진 부스들 중에 대충 ‘포토잊음’이라는 가게를 골라잡아 들어갔다. 병찬은 한쪽 손에 쫑커벨을 올려놓고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최종수에게 사랑을 다량으로 전해 줄수록 이 사건이 빨리 끝날 것 같아 다른 팔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쫑커벨의 말대로 카메라 렌즈는 쫑커벨을 담지 못했다. 두 장 인화된 사진에는 병찬 혼자 뻣뻣하게 웃으며 허공을 향해 하트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쫑커벨의 주장에 따르면 저쪽 종수도 함께 찍혀 있기는 한데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심령사진이 되었다고 했다. 그 설명만으로도 병찬은 조금 울고 싶어졌는데, 다음으로 던져진 무신경한 말에는 정말로 오싹해져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종수는 네가 이걸 한 장은 폰에 붙이고 한 장은 속옷 안에 넣고 자 주길 바랐어.”

그리하여 병찬은 자기가 최종수라는 사람을 얼마나 몰랐는지를 비로소 실감한다...

“그런데 그건 그냥 충동이야. 충동까지 하나하나 다 들어 줄 필요는 없어. 그랬다간 모든 우주가 진작 멸망했을걸. 그래도 종수 거는 꽤 많이 들어 줘야 돼. 이쪽 종수도 그런 편이지만 그 종수야말로 지나치게 참았거든.”

“하하, 그래. 우리 종수가 또 어떤 충동을 느꼈을까..?”

“그 종수는 너랑 케이크 먹고 싶어 했어.”

“아무 케익이나 먹으면 되지?”

“아니, 성심당 딸기시루여야 돼. 종수가 인스타그램에서 딸기시루를 열세 번이나 검색했어. 걘 인바디 관리하느라 맛있는 걸 엄청 독하게 참았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먹는 건 전 우주에서 세 번째로 큰 행복이야. 행복은 의외로 정량 측정이 가능하거든. 단위는 칼로리야. 너 행복의 열량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당장 우주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어.”

“두 번째랑 첫 번째는 뭔데?”

“흐음...”

쫑커벨은 작은 귓바퀴에 작은 손을 파닥거리며 가져다 대고, 공중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치 저쪽에서 최종수가 속닥속닥 귓속말을 해 온다는 듯이.

“종수가 아직 말하지 말래.”

성심당이 대전에 있다는 정도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취미가 없는 병찬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진 부스 안에 엉거주춤히 선 채로 병찬은 대전까지 왕복하는 기차표를 한 장 예매했다. 쫑커벨이 요란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망자의 소원이고 뭐고 그냥 이 돌연변이 장수말벌 같은 존재가 케익이 땡기는 게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종수는 맛있는 걸 아주 좋아해. 그러니 너도 위장을 키워 놓고 식욕을 길러서 대비하는 게 좋을걸.”

“먹는 건 그래 봤자 세 번째라며. 첫 번째는 안 들어 줘도 되는 거야?”

“거기까지 한 번에 바로는 못 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 못 들어 봤어?”

“그 첫 번째 행복이라는 거, 최종수가 해본 적은 있어? 꼭 나랑이 아니어도.”

“아니.”

불쌍한 어린애 같으니. 병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러모로 가슴이 떨렸다.

“첫 번째는 그... 섹스가 맞는 거지?”

“아니. 그건 두 손에도 못 꼽혀. 물론 목록에 있기야 있지. 충동 중에도 있고 소원 중에도 있고. 소원에 총 몇 회 등장하냐면, 어디 세어 볼까...”

쫑커벨은 눈을 찌푸리며 어디서 소환되었는지 모를 긴 목록을 읽으려 했다. 병찬은 다급히 손을 휘적거렸다.

“알려 주지 마 그냥. 별로 안 알고 싶어.”

저 쪼끄만 쫑나벨이랑 그 짓을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했다. 새끼손톱만 한 콘돔 같은 게 세상에 있기는 한가...? 그것도 알고 싶지 않다. 최종수의 첫 번째 행복이 섹스가 아니라니 오늘 들은 모든 소식 가운데 유일하게 참 다행이었다. 귀에 손나팔을 만들고 있던 쫑커벨이 별안간 눈을 빛내며 작은 몸을 곧추세웠다.

“혹시 다치지 않는 게 첫 번째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틀렸다고 전하래. 그리고 조만간 직접 만날 의향도 있나 본데. 자주는 무리가 가서 힘들지만, 나를 통하면...”

“아니,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전하지는 말고!”

병찬은 황급히 덧붙였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최종수가 빨리 성불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궁금한 게 더 있어? 지금 종수한테 물어봐 줄게.”

“이거 언제까지 계속돼?”

쫑커벨은 귀를 기울이고 허공에서 대답을 끄집어냈다. 부숭부숭 새까만 까치집 아래 눈은 그대로 두고, 입꼬리만을 끌어올리며 미소가 씨익 번졌다. 소름끼치는 표정이었다. 쫑커벨이 저쪽 최종수의 패악질을 대리하느라 분주히 뛰어다녀야 한다는 측은지심이나 동병상련 같은 것이 병찬의 마음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불길한 웃음이 기이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금세 기억이 떠올랐다. 단 한 번 최종수가 병찬을 향해 웃어 주었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했던 말은 그거였지. 쿠크다스X아.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커피 맛을 알게 될 때까지.”





종수가 하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비정기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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