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별의 수명

가비지타임 최종수X박병찬 | 종뱅전력 : 시차/타이밍

※ 프로생활 했던 종뱅. 그러나 지구종말 1개월 전에 함께 살게 됨 (영화 '돈룩업', 애니메이션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에서 영향받은 내용)

※ 지구종말 소재 주의 + 캐릭터 두 명이 최후를 맞이합니다

※ 연성 내에 나오는 노래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수와 노래

※ 종뱅전력 47회 주제 : 시차 / 타이밍

※ 공백포함 약 15,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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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으로 오랜만에 연락 온 준향대학교 농구부 후배에게서 난교파티를 초대받았을 때, 박병찬은 그제야 처음으로 지구가 종말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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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 입단했어도 박병찬은 경기 한 번 제대로 뛰지 못했다. 여전히 센스도 좋고, 폼도 좋고, 무릎 아픈 것도 잘은 모르겠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른들끼리의 사정도 좀 있었던 것 같고, 새로 입단한 선수가 주목을 받아야 하는 나름의 이유도 있던 모양이었다. 박병찬은 농구를 좋아했고 여전히 잘하고 싶었다. 박병찬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보다 ‘잘’하는 선수는 프로의 세계에서 아예 없진 않아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박병찬은 오래 벤치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경기 뛰는 선수들에게 물병을 건네거나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거나, 자리에 서서 응원했다. 팀의 일원이라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으나 워낙에 박병찬이 중고등학교 시절 이름을 날린 선수였기에 주변에서 걱정을 받았다. 너 경기 못 나가는 건 내가 다 아깝다. 네가 하는 만큼 다 잘 풀릴 테니까 감독님 너무 미워하진 말고. 선배들도 그런 말을 했다. 박병찬은 괜찮았다. 씁쓸하고 매몰찬 세계라는 건 중학생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병찬에게는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체념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멀뚱한 얼굴로 웃을 수 있었고 실제로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싱글싱글 미소 지으며 훈련하고 있으니 누군가 어디서 몰래 말한 것이 결국 박병찬의 귀에 들어오기도 했다. ‘박병찬이 구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 말을 전해주는 팀원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박병찬은 웃었던 것 같다. 그런 말을 굳이 박병찬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눈여겨 보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박병찬에게 엿먹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박병찬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초라하고 복잡하고…… 다 각자 사정이 있었다.

감사. 무슨 감사를 어디에 해야 하는가. 떠오르는 이름도 없을 뿐더러 박병찬의 열망을 얕잡아 본 말이었다.

그럼에도 벤치를 지키던 박병찬은 아무 것도 아쉽지 않았다. 과거, 지독했던 시간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 받고 싶었다. 프로 선수가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고, 그런 마음까지 욕심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박병찬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다. 팀의 주전으로 뽑히지 못한 그 순간부터 조금 덜 애쓰게 된 것뿐이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개개인의 성숙이나 철들고 말고와 상관 없이, 스포츠라는 게 싸늘할 만큼 현실적이다.

*

벤치에 앉아만 있던 나날 중에, 6개월 뒤 지구가 멸망한다는 속보를 접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실 믿을 수가 없었다. 박병찬이 농구공을 쥐고 멍하니 있는 동안 대한민국은 패닉에 빠졌다.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는 구단이 형태를 이어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팀이 와해되었다. 그 속에서 박병찬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박병찬은 그래도 오늘 운동하러 체육관에 왔으니까, 라며 슛 연습을 했다. 당연하게도 박병찬 혼자였다. 그날따라 슛감이 좋았다. 오늘 같은 날 연습경기라도 나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하하하. 빈 체육관에서 제 웃음 소리만 울렸다.

그날 오후 늦게 체육관을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박병찬은 하늘에 떠 있는 동그란 달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연보라빛 하늘에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보고 처음에는 이르게 뜬 낮달인가 보다, 했다. 박병찬은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그 달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뒤늦게 알아챘다. 달이 아니었다. 박병찬도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사람들과 똑같이 카메라로 그것을 촬영했다. 찰칵.

저거구나.

사람들은 오락가락했다. 어느 날은 이거 다 언론에서 시민 겁주려고 기사낸 거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지구가 종말되길 기다려온 사람처럼 방탕하게 지냈다. 미국에서는 지구를 탈출할 로켓도 쏘아 올렸다고 한다.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엄연히 진행되는 종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주변에서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기사도 잘 찾아보지 않던 박병찬은 완전한 백수가 되었다.

정권이 무너지고 물가가 박살나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울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 초 단위로 무법도시가 된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예의범절이 바닥을 드러내고 대중의 태도가 시시각각 바뀌어 갔다. 지구 종말까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려던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전쟁이 나도 회사에는 출근한다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갈 곳을 잃었다. 최악의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무리 멘탈 털려도 그렇지.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 게 아니지 않나? 박병찬은 사람들을 좋아해왔고, 좋아한 만큼 곁에 두는 편이었지만 종말에 가까워졌을 때에는 슬슬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과 있으면 그들의 정서에 휘말린다. 지구의 종말이 박병찬을 외롭게 했다. 박병찬은 모두와 함께, 종말까지, 농구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울을 포함한 타인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줄곧 장점 중 하나라고 여겨졌던 부분이 이제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이 된다. 타인과 만나기 꺼려진 박병찬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 딱히 없었다. 매일 카톡을 주고 받았으므로 부모님이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백수 아들이 집에 있으면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불편하겠어. 이모랑 할머니도 엄마한테 오는 거 아니야? 명절 때에 모이던 사람들이니까 삼촌들이 올 지도 모르고. 와, 챙길 사람이 몇이야. 나는 일단 혼자서 버텨 봐야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박병찬은 아무도 오지 않는 집에서 갤럭시 패드로 드라마를 보거나 여전히 카카오톡이 보내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몰고 다니던 아버지의 차를 누군가에게 빼앗겨 버리고, 텅 빈 마트 앞에서 누가 버리고 간 자동차를 얻었다. 잘 다녀보면 기름이 남아있는 깨끗한 주유소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오예.

지구를 개박살 낼 커다란 별은 캄캄한 밤이든 환한 낮이든 아주 잘 보였다. 박병찬은 인류학자와 천문학자 붙인 별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웠다. 지구는 여전히 매일매일 태양을 돌고, 지구인이 임의로 이름 붙인 거대한 별은 매일매일 지구를 향해 온다. 이제 몇 개월 남았더라.

경기 중 벤치에 오래 앉아 있어도, 단 한 번도 코트 위에서 몸을 뜨겁게 덥히지 않아도, 누구도 관중석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지 않아도 박병찬이 괜찮았던 이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저도 그다지 아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꽤 나중에 이해했다.

병원 생활을 길게 했던 사람이 갖는 종착에 대한 희망과 안도감. 그것은 박병찬의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종양처럼 자라나는 감각이었다.

박병찬은 오래 아팠으니까. 박병찬의 이름 모를 <어떤 것>은 그 시절에 훼손 되었다.

2

박병찬에게 카카오톡을 보낸 후배는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이 바로 본론이었다. 병찬이 형. 오랜만이에요. 다름이 아니고 저 이번에 여자애들이랑 남자애들 몇 명 모아서 같이…… 담백한 권유에 당황한 박병찬은 웃지도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난교 말고 다른 게 있던가? 끙,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비볐다. 아니, 사람 같이 죽이자고 하는 것 보단 이게 나은데. 한숨을 쉬던 박병찬의 저 멀리 기억 끄트머리에 누군가 턱 걸린다.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어렵지 않게 끄집어 올렸다.

최종수.

난교파티 라는 단어에 난데 없이 최종수가 난입했다. 박병찬은 최종수라는 이름을 마주한 뒤에는 낮게 웃었다. 어휴. 최종수랑 난교한 적도 없는데, 무슨. 박병찬은 아직 서비스가 유지되는 카카오톡으로 후배에게 거절의 답변을 남겼다. 허허, 이 친구 그렇게 안 봤는데 화끈한 판타지가 있었네…….

이제 종말 디데이까지 한 달 쯤 남았다.

*

최종수는 박병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곳에 오래 머무른 사람 특유의 뻔뻔함으로 박병찬의 눈과 코와 입과 귀를 간지럽혔다. 눈으로 비비다 못해 세수를 몇 번씩이나 했다. 박병찬은 손톱으로 조용히 눈썹을 긁었다. 젖은 얼굴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박병찬은 물방울이 튄 거울마저 슥슥 닦아냈다.

날이 좋아서 빨래를 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박병찬은 며칠 지난 빨래를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으려다가, 물을 아끼기 위해 빨래비누를 집어들었다. 차근차근 젖은 수건에 비누를 문질렀다. 손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만 상상 속의 최종수가 나온다. 그리고 머릿속 최종수는 박병찬의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잡고, 둥근 박병찬의 뒤통수에 무겁지 않은 그의 이마를 기대며, 한숨처럼 긴 날숨을 내쉴 것이다. 그 숨이 박병찬의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흐뜨린다.

박병찬은 수전을 잠근 채 비누를 쥔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난교파티라는 단어에서 최종수가 떠오른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최종수가 한국에 들어온 건 꽤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뷰 찾아봤을 때는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한국에 잠깐 들어온 그 사이에 공항이 마비가 되어버렸다. 운도 지지리 없는 새끼. 박병찬은 카카오톡에서 최종수를 찾았다. 우리가 어쩌다가 연락처를 주고 받게 되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보면 특별한 계기도 없지 않았나. 가장 마지막에 만났던 건 언제였지. 애초에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았다. 농구판이 좁으니 사이가 나쁠 수도 없었다. 실제로 만나면 인사 정도 나누고 서로 기사 봤다, 저번에 경기 봤다, 넌 여전히 잘 하더라, 그 정도 이야기했으려나.

소파에 드러누운 박병찬은 고민을 끝냈다. 흔쾌히 최종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종수가 답변을 하지 않더라도 박병찬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최종수를 만난다는 건 박병찬에게 조금 특별한 이벤트였다.

요즘 어디서 지내? 같이 농구 한 판 할래?

난교…… 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쓸 수록 최종수와 난교가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할 수도 없었지만 살짝 머리가 아팠다. 박병찬이 운동만 뻔질나게 했고, 사람을 너무 안 만났고, 은근히 충동적이고, 인생이 팍팍했던 탓이려나.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또 배가 고팠다. 박병찬은 워낙 많이 먹는 편인데 최근 들어서 먹는 양을 줄였다.

생각보다 최종수에게서 답변이 빨리 왔다.

3

최종수가 지내고 있는 곳은 박병찬이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어머님이 갖고 있던 오피스텔에서 두 달 정도 지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일이 꼬인 듯했다.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고 박병찬은 일단 차를 몰고 최종수에게 슝 달려갔다. 선물로 줄 무선 멀티충전기와 빵빵하게 공기를 채운 개인 농구공도 잊지 않고 뒷좌석에 던져두었다. 인공위성이 박살나기 전이라 아직 핸드폰 내비게이션도 멀쩡했다. 박병찬은 콧노래를 불렀다. 열어둔 창에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하늘도 맑았다. 물론 별이라고 불러야 할지 운석이라고 불러야 할 지 알 수 없는 저것도 언제나처럼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생각한다. 트렁크에는 생수병이 있으니까 그거 마시면 되고. 음, 같이 뭘 먹어야 할까. 예전에 그 동네에 놀러갔을 때 분명 맛있는 돈까스 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망했으려나. 망했겠지. 이제 남아있는 식당이 거의 없으니까.

지구의 종말이 가까운데, 차창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는 여름 냄새가 났다.

*

조심스럽게 문을 연 최종수는 눈에 띄게 말라 보였다. 박병찬은 씽긋 웃으며 한쪽 손에 든 농구공과 다른 한쪽 손에 든 멀티충전기와 2리터 생수병 하나를 보여줬다.

“형아가 서울의 낙오자에게 구원을 내려주마.”

“하,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박병찬 맞네…….”

최종수는 피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현관에 공간을 내어주었다. 박병찬은 최종수가 지내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최종수가 지내는 공간은 별 것 없었다. 정말 잠깐 있다가 갈 사람처럼 간소한 생활물품을 빠르게 훑어본 박병찬은 물병과 충전기를 최종수에게 건넸다. 최종수는 부엌의 식탁에 비스듬히 앉아서 건네 받은 물의 유통기한부터 확인했다.

“야 인마. 유통기한 넉넉한 걸로 들고 왔어. 그리고 충전기는 충전만 하면 아무 데서나 쓸 수 있는 거. 핸드폰 배터리 영퍼에서 백퍼까지 두 번은 채울 거야.”

박병찬의 설명에 최종수는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잘 지낸 거 맞아? 얼굴 되게 안 좋아 보이는데.”

“…… 이런 상황에서 잘 지내냐고 묻는 그 정신머리가 더 신기하네. 진심 싸이코패스 아닌가.”

“엥? 그래도 아직 디데이까지 한 달 정도 남았잖아.”

최종수는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생수병을 들고 일어나, 코드를 뽑아놓은 빈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수돗물을 끓여 마시고 지냈는 듯 식탁에는 전기포트가 놓여 있었다. 박병찬도 목이 마를 때마다 생수를 들이킬 수는 없어서 수돗물을 마셨다. 최종수의 집에는 생각보다 먹을 게 없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컵라면이라도 더 갖고 올 걸 그랬다.

“배고프냐?”

“아니.”

“너 아침에 뭐 먹었어?”

“…… 밥.”

“아 다행쓰. 쌀이 좀 있나보네. 반찬은 어떤 거?”

“스팸. 네가 내 엄마냐? 그만 물어.”

“알겠어. 그럼 일단 형아랑 같이 농구하고 올까?”

최종수와 박병찬은 농구화를 신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박병찬의 등 뒤에서 최종수가 중얼거렸다. 나…… 집 밖으로 한 달만에 나와. 그 말을 들은 박병찬이 뒤를 돌아 위에서 내려오는 최종수를 쳐다보았다. 평소 보다 날카로운 최종수의 얼굴에는 소심한 물음표가 뜨고 박병찬의 얼굴에는 작은 환희가 떠오른다.

“내향인이라 그런가. 집돌이 능력이 남다르네.”

정말 순수하게, 감탄이었다.

*

최종수가 사는 곳 근처에는 그물이 낡은 골대 하나 놓인 농구 코트가 있었다. 주변에 이상한 낙서도 없고 여태 다른 사람에 의해 잘 관리되어온 듯 깨끗했다. 박병찬은 그걸 부러워 했다. 혼자 슬렁슬렁 다니던 체육관에는 노숙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근처 공원은 장기매매 알선의 장이 되어 치안이 나빠졌다. 키가 멀대 같이 큰 성인 남성을 눈여겨 보며 해꼬지 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박병찬도 몸을 사렸다. 존나 오래 살고 싶나 봐? 최종수가 비꼬며 물었을 때 박병찬이 너무 크게 웃어서 공기가 쨍하게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4

박병찬은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최종수의 집에서 가공식품을 축내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최종수.”

“음?”

“너…… 난교해 본 적 있어?”

“박병찬 또 미친 소리 하네, 진짜.”

아니이, 궁금해서 그래애. 있잖아, 형아가 말이야. 너한테 오기 전에 후배한테서 진짜 재미있는 카톡을 받았거든? 보여줄까? 최종수는 그 잘생긴 얼굴의 모든 근육을 쓰며 질색했다. 야, 최종수 너는 성인이 돼서 이런 이야기가 아직도 부끄러워? 박병찬은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구르며 데굴데굴 웃었다. 박병찬이 미친 듯이 웃어대자 최종수의 얼굴은 새빨개졌다가 점점 새파래졌다.

*

한 차례의 일대일 농구가 끝난 후, 먼저 벤치에 앉은 박병찬이 최종수에게 말했다. 살짝 호흡이 가쁜지 내뱉는 숨이 깊었다.

“지금 분위기에 딱 맞는 노래가 생각났는데. 종수 너도 들을래?”

분위기? 최종수는 박병찬의 말에 의문을 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최종수는 웃기지도 않게 은근히 분위기 타는 박병찬을 매번 신기해 했다. 일상을 착실히 살아가는 박병찬만은 지구의 종말을 비껴갈 것 같았다.

잠깐이지만 격하게 움직였더니 목부터 가슴까지 일정하게 발딱거리고 두피가 뜨거웠다. 박병찬은 대답하지 않은 최종수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노래는 졸음이 밀려오도록 잔잔하게 속삭이는 노래였다. 허밍도 길고 혼잣말도 했다. 영어로 속삭이는 듯하더니, 한국어도 좀 들리고, 그 다음엔 불어를 섞어서 노래를 부른다. 무슨 이런 노래가 다 있어? 이거 한국인이 부르는 거 맞아?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던 최종수는 박병찬의 난해한 취향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종수는 의아한 눈으로 제법 가까이에 앉은 박병찬의 옆얼굴을 보았다. 한 줄기 투명한 땀이 귀 옆으로 흘렀다. 시선을 느낀 박병찬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최종수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열린다. 우리 종수한테 나만 알고 싶은 노래 들려주는데. 듣기에 어때? 묻는 말이 노래와 섞여서 최종수의 귀에는 부옇게 흐렸다. 몇 분 뛰지도 않았는데 몸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조금 쌀쌀한 밤바람이 불어왔고 초 여름이라 공기가 달큰했다. 열이 오른 머리가 식는다.

“진짜 안 어울리는 노래 듣네.”

“형님 선곡 죽이지.”

“그다지.”

“너도 가끔 이런 노래 듣고 싶은 날 있지 않아?”

“없는데. 누군지도 몰라.”

“뭐? 너 이 밴드 몰라? 진짜 예전에 대학가요제에서 데뷔…… 아니 됐고. 국내에서 꽤 유명했잖아. 노래 한 번도 안 들어봤어? 완전 명곡인데.”

최종수는 처음 듣는 노래였다. 이어폰에서 흐르는 노래를 귀로 듣고도 최종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곡은 얼어죽을 명곡이다.

“구라까네. 이게 유명했다고?”

“그렇다니까. 나름 대중픽이었는데. 진짜 모르냐?”

“몰라. 관심 없어.”

대화가 빙글빙글 돌았다. 최종수와 박병찬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잘 모르는 노래였고, 이 노래가 정말로 좋은지 아닌지 최종수는 알 수가 없었다. 지독히도 단조로운 목소리가 별로 최종수의 취향은 아니었다.

언젠가 우주 관련 영상을 볼 때에 한 음으로 길게 이어지는 음악도 뭣도 아닌 소리를 들으면 잠을 청하던 날이 최종수에게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편안해지는 소리였고, 알고리즘에 따라 최종수의 유튜브 홈에 관련 영상으로 올라왔다. 깊게 잠들 수 있어서 관련 음악을 몇 번 더 활용해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불면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최종수를 기다렸다. 존재감을 키워 최종수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침대 위에 누워 이어폰을 꽂아 들었던 그 음악은 몸의 기운을 맑게 해주는 수면 주파수, 따위로 묘사 되었다. 지루하기만 할 뿐 잠들지 못했다. 소라고둥 속에 몸을 숨긴 듯 웅웅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최종수는 왜 같은 영상을 틀어도 더는 잘 수 없는지 고민했다. 또 최종수만 잠을 놓치게 되었던 깊고 짙은 새벽은 그날따라 유달리 길었다.

박병찬이 들려주는 노래는 최종수가 밤에 듣는 음악…… 그런 것과 비슷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웅웅거리고, 가라앉고, 지루했다. 느리게 다가오는 이 세상의 끝처럼.

“야, 종수야. 방금 이 부분 진짜 좋지?”

물어보는 박병찬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흐릿한 가수의 목소리가 잡아 먹혔다. 박병찬이 호들갑 떨던 그 구간을 하나도 못 들었지만 최종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종수의 호응에 박병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거 봐, 내가 말했지. 명곡이라니까.

*

며칠 사이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다. 그 핑계로 박병찬은 최종수와 조금 더 같이 있었다.

최종수의 부모님은 장기 유럽 여행 중에 디데이가 선언 되었다고 한다. 최종수가 본가 아파트로 가지 않고 잠깐 원룸촌에서 자취를 시도하게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두 분의 마지막 연락을 받은 건 두 달 전이라고 했다. 최종수가 생각하기에는 핸드폰이 망가졌거나 위협 당해서 빼앗긴 것 같고, 두 분이 상해를 입거나 죽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을 덧붙였다. 듣고 있던 박병찬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걱정이 많겠다, 네가.”

“…… 응.”

최종수는 밥알을 계속 씹었다. 박병찬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드는 동안 쉴 새 없이 밥을 입에 넣었으면서, 이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안에 든 것을 금방 삼키지도 못했다. 박병찬은 이르게 식사를 끝냈지만 식탁에서 자리를 지켰다. 끓이고 식힌 물을 머그잔에 부었다. 최종수는 너무 뜨거운 물을 마시지 못해서 한 김 식혀야 했다.

“두 분 다 무사하실 거야. 그런데 이런 말 밖에 못해줘서 어떡하냐, 형이.”

최종수는 한참 동안 으깬 흰 밥알을 마침내 꼴깍 삼켰다.

“딱히……. 이젠 괜찮으니까. 상관 없어.”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최종수는 슬퍼 보였다. 그게 박병찬 자신이 슬픈 건지, 최종수가 슬픈 건지, 최종수는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병찬은 전혀 모르겠다.

*

최종수랑 같이 살 생각은 없다면서, 박병찬은 최종수의 집에서 며칠 씩 같이 지냈다. 마음 내킬 때까지 최종수의 옆구리에서 비비적거리다가 슬쩍 제 집에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스럽게도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언제 집에 갈 것이고, 언제 또 놀러 올 수 있는지 말해줬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연인이라도 되는 듯 다정했다. 박병찬이 떠나고 혼자 남은 최종수는 농구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 무엇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자취 집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

박병찬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최종수는 혼자 이불 속에서 ‘충돌 가능성 200%! 점점 지구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행성’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5

박병찬이 노래를 듣던 그 락밴드의 보컬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최종수는 검색할 생각도 없었는데 박병찬이 관련 가수를 검색해서 읊어댔다. 최종수에게 밴드 보컬의 이른 죽음은 놀랍지는 않았다. 태어난 순서에 관계없이 어차피 모두 죽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왜 이러고 살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대신 최종수는 옆에서 조잘대는 박병찬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 보았다. 너는 농구 외에도 관심 있는 분야가 다 있네.

“많이 좋아했던 가수야?”

“이야아, 어떻게 최종수가 이 가수를 모르지? 너랑 내가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대던 박병찬은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 훌쩍 집에 다녀온 박병찬은 일주일 만에 얼굴을 비췄다. 보관하고 있던 라면과 통조림을 트렁크 한 가득, 양손 무겁게 돌아왔다. 서울 외곽에 있는 남들 안 다닐 만한 소형 마트를 다 돌고 왔다고, 거기도 이제 탈탈 털려서 들고 나올 만한 게 없었다고 말하며 박병찬은 히죽 웃었다. 최종수는 박병찬이 구해온 식료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최종수는 박병찬과 함께 듣던 락 밴드가 누군지 모른다. 이르게 죽은 보컬의 이름도, 조잡하게 언어가 뒤섞인 가사의 의미도, 힘 없이 이어지던 노래의 제목도. 이 세상에 덩그러니 목소리가 박제 된 가수를 좋아하는 건 박병찬 하나로 충분했다. 데이터 아깝게 검색해서 찾을 생각도 없었으니 최종수는 앞으로도 계속 그들을 모를 것이다.

*

여름밤이 깊었다. 박병찬은 거실에서, 최종수는 자신의 침실에서 잤다. 박병찬이 두 번 정도 같이 자자고 말했지만 최종수가 싫은 얼굴로 꿍하게 대답을 안 했다. 박병찬은 쿨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치. 잘 때라도 편하게 자야지. 우린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까 내향인에게도 쉴 틈이 필요하잖아? 내향인·외향인 용어 등, 유행하는 것에는 하나도 관심 없던 최종수는 박병찬이 완전 사기꾼 같은 얼굴로 그럴 싸한 말을 한들 전혀 못 알아 듣는다.

*

그날은 거실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날이 더워졌고 빌트인 에어컨은 거실에 한 대 밖에 없었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뒤통수를 보며 이제 커다란 별과 부딪쳐 처절하게 박살날 지구를 그려냈다. 위태롭고 아름답고 박명하는 모든 것들에 최종수를 겹쳐 보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우주 영상을 찾아보는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별의 소멸과 가깝게 느껴진다. 들이켜고 싶을 만큼 낭만적이다.

최종수가 별처럼 오래 살면 좋겠다…….

고교 때 잠깐, 미국에서 잠깐 반짝하고 사라지는 스타가 아니라 저 늙은이 아직도 코트에 남아 있냐고 욕 먹는 날까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박병찬은 피식 웃는다. 자기합리화 대박이네, 진짜.

모두에게 인정 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박병찬은 대한민국의 모두가 최종수에게 박수를 쳐주길 바랐다. 최종수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박병찬은 최종수가 끊임 없이 사랑받길 원했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힘을 잃은 현재에도 그 바람은 그대로였다. 최종수는 미움도 받지 말고 엿도 먹지 말고, 그저 예쁨 받고 사랑 받으면 좋겠다고.

농구코트 위 최종수의 등장에 사람들이 안도하고 환호하길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어떤 꿈은 자신과 타인이 구분되지 않아 지저분하게 뒤엉켰다. 박병찬의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그저, 그렇게.

*

또 사흘 만에 박병찬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빈 손이었다. 산나물이라도 캐올까 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얼굴에는 약간의 머쓱함과 미안함이 스쳤다. 더는 최종수에게 삶을 유지하는 수단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박병찬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인간은 물만 먹고 살아도 30일은 넘게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박병찬 너는 자꾸 밖을 나돌아다니는 거야.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있는 걸로 아껴 먹고 적게 쓰면서 그냥 이렇게 살아.

최종수는 가만히 서 있어도 입술 안쪽이 바싹바싹 말랐다. 올해 여름은 정말 지독했다. 그 날씨에 박병찬과 농구 한 번 잘못했다가 최종수는 탈수 증세를 보였다. 식은 물만 겨우 삼켰다. 박병찬이 밤새 최종수를 보살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더운 밤이었다. 무풍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병찬은 얇은 이불 위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땀 흘리는 만큼 물을 삼켰다. 남은 물을 마시던 컵에 부어두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전기포트에 수전을 당겼다. 수돗물이 졸졸 흘러 나온다. 박병찬은 가만히 서서 전기포트 맥시멈 눈금까지 물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수전을 내려 닫고 식탁으로 한 걸음에 온다. 지친 손끝으로 달칵, 전기포트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전기포트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종수야.”

“왜.”

“이거…… 전기포트 고장났어.”

“그냥 수돗물 마셔.”

“야 존나 더운데 그냥 에어컨 틀면 안 돼?”

“…… 이 집 이틀 전부터 전기 끊겼어.”

전기포트가 고장난 게 아니었다.

“뭐? 그럼 너 핸드폰 충전은 어디서 해?”

“근처 식당에 수도랑 가스랑 전기가 나와. 어제 찾아뒀어.”

“야, 그런 건 만나자 마자 말을 했어야지. 거기 안전해?”

“응. 그런 것 같던데. 유리 깨진 곳도 없고…….”

“그럼 왜 거기 안 가고 우리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

박병찬의 말에 최종수는 이불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최종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박병찬은 에라, 모르겠다- 입으로 말을 내뱉고는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최종수는 조각처럼 앉아있고 박병찬은 부엌에서 거실로 돌아왔다. 최종수는 가까이 다가온 박병찬을 올려다보았다. 박병찬도 최종수의 난감한 듯 설명하기 어려운 얼굴을 들여다본다. 최종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박병찬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최종수의 입술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거긴.

“거긴 우리 집이 아니잖아.”

집.

최종수의 집.

우리의 집.

*

더워서 잠들지 못하는 최종수의 머리맡에서 박병찬은 부엌 수납장에서 얇은 접시를 들고와 부채처럼 부쳐준다. 팔랑팔랑 움직이는 접시를 따라 미적지근한 바람이 최종수의 이마를 스친다. 박병찬은 또 헛소리를 한다. 우리 한국 농구계의 미래 최종수야 너는 국내 농구계의 넘버원짱이 될 거야, 라는 말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법 구체적이고 꽤 솔깃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종수는 박병찬이 대신 그려주는 자신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따라갔다. 존재하지 못할 미래였지만 최종수는 무너지지도, 헤매지 않고 무사히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

그 가수는 어쩌다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죽었을까.

사고를 당했거나, 병에 걸렸거나, 자살을 했으려나. 최종수는 얼굴도 모르는 가수를 떠올릴 때 박병찬의 얼굴을 겹친다. 음울한 생각이 눅눅하게 늘어졌다. 흥얼흥얼 사라질 것처럼 노래를 부르는 박병찬. 최종수가 나타나기 이전에 모두가 눈여겨 바라보던 농구계의 별, 박병찬. 땀범벅으로 농구 하다가 툭 쓰러져서 코트 위에서 사라져 버리는 박병찬. 일찍 죽어버린 박병찬…….

박병찬이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일주일 지나면 어차피 모두 다 죽는다. 최종수는 덜컥 겁이 났다. 고작 몇 주의 시간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그새 정 들었나. 왜 겁이 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싱크대 앞에 선 박병찬의 등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제와 거품 없이 물로 그릇을 헹궈내던 박병찬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최종수를 불렀다. 야, 종수야.

“왜.”

“넌 키가 40cm 이상 줄어들면 먹는 것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 난 아닐 것 같거든.”

“넌 진짜 헛소리도 작작…… 근데 몸집 작으면 먹는 양도 어느 정도는 적지 않아?”

“야 너는 먹방 유튜버도 모르냐? 위장 크기라는 게 있잖아.”

박병찬은 싱크대 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최종수의 의견에 반박하고 있었다. 네가 신체 사이즈가 줄어들면 위장도 줄어든다고? 그럼 내장 사이즈도 전부 다 줄어드나? 간이나 폐 같은 것도? 그런데 인간 내장은 신체에 비해 그다지 크게…….

어느 새 등 다가온 최종수가 박병찬의 동그란 뒤통수에 이마를 기댄다. 한숨처럼 긴 날숨을 내쉬었다. 최종수의 따뜻한 숨이 박병찬의 목덜미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 위로 흩어진다. 이것은 박병찬의 데자뷰다.

디데이까지, 앞으로 일주일.

*

오늘도 어제처럼 공도 좀 적당히 갖고 놀고 땀도 흘리고 밤바람도 맞고 샤워도 했다. 전기를 쓰러 근처 빈 식당에 잠깐 머물렀다. 핸드폰을 충전하며 박병찬은 노래를 틀었다. 식당에 울렁울렁 노랫소리가 퍼진다. 어차피 최종수는 핸드폰을 만질 일이 없는데 의외로 박병찬이 핸드폰을 손에 놓는 일이 없었다. 노래를 틀어놓은 박병찬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벽에 등을 대고 앉은 최종수는 박병찬의 뒤통수를 눈으로 쫓아가다가 지겨운 듯 눈꺼풀을 내렸다. 박병찬은 차 안에서 찾아낸 휴대용 미니 선풍기를 들고 왔다. 전원버튼을 눌렀는데 윙 돌아간다. 그것도 빠짐 없이 충전해서 돌아왔다.

늦은 밤. 최종수의 옆에 박병찬이 있었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귀 뒤로 손선풍기의 바람의 쐬어주었다. 다가온 별은 커다랗게 빛나서 주변이 저녁처럼 환했다.

최종수는 가능한 만큼 어깨를 구겨 박병찬에게 안겼다. 빛 차단이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 밤은 그나마 아무 생각 없이 잠 들 테다…….

“종수야. 우리가 지구에 운석 떨어져서 죽는 게 아니라 좀비 바이러스로 난리 났으면 어땠을 것 같냐?”

아씨. 일찍 자긴 글렀다.

그날 최종수는 새벽 늦게까지 좀비 세계관에서 박병찬과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전을 열 몇개나 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병찬은 바보처럼 박수만 짝짝 쳐댔다. 손선풍기를 손에 들고 최종수에게 바람을 쐬어준다. 와, 대박. 최종수 존나 똑똑해. 난 네 옆에만 붙어 있음 그래도 오래 살겠다. 그 말에 최종수는 묘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었는데 박병찬이 표정이 보일 만큼 밝았다. 거실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고 최종수는 박병찬의 품에서 눈을 깜박였다.

난 네 옆에만 붙어 있음 그래도 오래 살겠다, 라니.

*

우리는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텐데.

7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위치는 중동아시아였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건물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15초 만에 대한민국은 땅이 갈라져 바다에 삼켜질 것이고,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전 세계가 일군 문명이 사라질 테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박병찬과 최종수는 아닐 것이다.

땅이 뒤흔들린다. 최종수가 불안한 눈으로 박병찬의 손을 잡았다. 눈을 질끈 감고 어린애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이 무너진다. 머리 위로 20층짜리 오피스텔 건물 잔해가 쏟아졌다. 박병찬은 190cm가 넘는 성인 남성을 있는 힘껏, 빈틈 없이 끌어안았다. 최종수와 함께 허공이다. 두 사람은 부서진 콘크리트와 함께 아래로 떨어진다. 아.

박병찬은

팀의 주전으로 뽑히지 못한 게 아쉽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전으로 뽑힌 그 팀원에게 쌍욕이라도 시원하게 갈기지 못했던 게 짜증스러웠다.

감독에게 투정이라도 부려보거나 합의라도 하자고 할 걸 그랬다.

경기를 뛰게 해달라고 말했어야 했다.

팀의 에이스가 되고 싶었다.

조금도 체념하지 못했다.

전부 미련으로 남는다.

그리고 진심으로 최종수가 이 지구 밖의 은하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별처럼 오래오래 살기 바랐는데.

“종수야.”

드디어.

땅과 하늘이 뒤집어진 허공 속, 박병찬이 최종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에는 아주 멋진 타이밍이었다.

* 별의 수명은 70억~130억년가량 이라고 하네요(구글검색 상단 노출된 내용 참고)

* 박병찬은 너무 이기적이라... 저렇게 상대 대답 안 들으려고 제 말만 툭 던지고 싶어할 것이라는 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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