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규쫑] 이런 게 좋아? - 1
- 결혼 1주년 기념 색시신랑 규쫑
* 전작인 『이런 게 꼴려? - 누드에이프런 편』, 『그래도 나랑만 해』 이후로 이어지는 시점입니다.
* 스테판은 『그래도 나랑만 해』에 잠시 등장한 인물로, 종수의 미국 선수 생활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으며, 마찬가지로 남편이 있는 전 구단 동료입니다. 종수의 결혼 준비에도 도움을 크게 줬습니다.
* 이규에게 누나가 있다는 사실은 동인 설정입니다.
* [대괄호] 안의 대사는 모두 영어입니다.
“종수.”
이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종수가 고개를 들었다. 귀찮다며 뒤로 넘겨둔 앞머리 덕에 훤히 드러난 이마 위로, 이규가 쪽! 입을 맞췄다. 종수가 눈을 감자 콧대 위로도 말캉한 입술이 떨어졌다. 이대로 조금 졸면 딱 좋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종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기 충분했다.
“우리 좀 있으면 결혼기념일이잖아.”
……그랬다. 조금 있으면 결혼 1주년이었다! 종수는 잠시 묻어두었던 고민거리가 이규의 입에서 나오자 눈을 번쩍 뜨고, 뱅글뱅글 도는 시야로 꼴깍 침을 삼켰다. 아직도 선물을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규가 썩 사치를 하지 않는 남편이라 더 어려웠다. 이규가 그런 종수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콩 갖다 대고는 속살댔다.
“우리 여행 가자.”
“여행?”
괜찮을 것 같았다. 이규는 태양이든 물이든, 뭐든 반짝거리는 게 참 어울렸으니, 휴양지 같은 데 가서 이규를 바닷물이나 수영장에 풍덩 빠뜨려놓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신혼여행 비스름한 건 글램핑처럼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바다면 되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면 어디를 가지……. 괌? 푸켓? 아니면 몰디브? 하와이? 빠르게 생각하는 종수의 얼굴 위로 이규가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종수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골 사진이 떠 있었다.
“응. 봐봐. 종수. 요즘은 촌캉스가 유행이래.”
“그게 뭔데.”
“호캉스처럼 시골에 가서 하룻밤 자고, 가마솥에 밥도 지어 먹고 하는 거?”
“흠…….”
종수가 고민하는 듯 보이자, 이규가 얼른 덧붙였다.
“우리 자기는 얌전히 내가 해주는 백숙이랑 파전만 먹으면 되는데.”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린 거지만,
“캠핑이랑 글램핑은 자주 갔으니까, 이번엔 이런 데 가보자. 응?”
옆에 계곡도 있대. 하고 조잘조잘 떠들며 졸라대는 남편의 애교를 무시할 성정도 못 됐다. 결국 종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규의 까슬한 머리통에 턱 손을 얹고는 박박 쓰다듬기도 했다.
“가고 싶어?”
“응.”
“왜.”
종수는 ‘응.’ 같은 깜찍한 답을 듣자마자 마음이 기울었지만, 괜히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라면 분명 달콤한 답을 들려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규가 고개를 더 숙여 입을 맞추고는 코 앞에서 속삭였다.
“조용한 데서 둘만 있자. 어때.”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이었다. 종수가 냉큼 답했다.
“좋아.”
흐흐. 웃은 이규가 곧바로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입술을 포개왔다. 몸을 틀어 종수를 껴안기도 했다. 입안에는 조금 전까지 먹던 상큼하고 달달한 골드키위의 맛이 가득했다. 느껴지는 숨결이 달짝지근했다. 분위기가 더 말랑말랑해졌다. 또 심장이 주체가 안 될 만큼 쿵쿵 울렸다.
종수가 이규의 목덜미를 확 낚아채 당겼다. 몸을 뒤로 확 눕히기도 했다. 이규가 웃으면서, 종수가 제 몸 아래에 깔리지 않게 힘을 주고 소파 위로 서서히 엎드렸다. 비죽 웃은 종수가 이규를 확 끌어당겼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이규의 몸이 순식간에 종수의 위로 쓰러졌다. 종수가 그 무게를 모두 받아내고는 킬킬댔다. 이규도 결국 힘을 풀고 종수의 위로 엎드렸다.
“이규.”
“응~”
종수의 쇄골쯤에 귀를 댄 이규가 나른하게 답했다. 종수가 이규의 머리통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규처럼 달큰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는데, 그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그 말에 이규가 고개를 틀어 종수를 올려다봤다. 팔랑대는 속눈썹이 예뻐서, 이규가 반들반들한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갖고 싶은 건 없고…….”
“그럼?”
이규가 또 눈꼬리를 살포시 휘었다. 어느새 이규의 목덜미로 내려가 있던 종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 봐도 참을 수 없는 표정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들썩이게 된 종수의 아래를 고스란히 느낀 이규가 클클대며 답했다.
“소원은 있어.”
“뭔데.”
그냥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소원이랬다. 그렇다면 종수는 그게 뭐든 꼭 들어주고 싶었다. 이규는 저한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테니 더 그랬다.
“비~밀.”
하지만 이규에게서 돌아오는 건 장난스러운 대꾸였다. 종수가 허? 하는 헛웃음과 함께 눈썹을 까딱였다. 하지만 이규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답을 건넬 뿐이었다.
“여보도 좋아할걸?”
“뭐냐고.”
“흐흥.”
매서운 추궁과 우악스러운 손길에도 이규는 그저 웃기만 했다.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에서 즐거움이 잔뜩 느껴졌다. 종수의 마음이 금세 조급해졌다. 이규만 알고 있는 걸 같이 알고 싶었다. 제가 이규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됐다. 종수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이규를 재촉했다.
“말 안 해?”
“응. 비밀이랬잖아.”
눈꼬리를 양껏 접어 웃어 보인 이규가 종수의 입술 위로 다시 제 입술을 들이밀었다. 입을 열어주지 않았더니 입술 사이를 간지럽게 핥아댔다. 눈은 감지도 않은 채, 눈웃음은 샐샐 치면서. 하. 종수가 짧은 한숨과 함께 결국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이규의 두툼한 혀가 익숙하게 혀를 얽고, 치열을 훑어왔다.
종수는 오늘도 이규가 약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고스란히 넘어가 주는 수밖에 없었다.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잔뜩 신나 보이는 그가 귀엽게 보이기만하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
이규가 잠시 정원에서 물을 주는 동안, 종수는 거실에 앉아 너른 통창으로 그 모습을 보며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다행히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도 곧장 통화 연결음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종수?]
[어.]
-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대? 잘 지내고는 있지?]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스테판이었다. 종수는 별다른 말 없이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너네 결혼기념일에 뭐 했어.]
- [우리?]
[어. 몇 번 보냈을 거 아냐.]
- [그러고 보니 너네도 곧이구나?]
[그러니까 뭐 했냐고.]
- [여행 갔지.]
그건 종수도 계획하고 있는 일이었다. 이거 말고 다른 게 필요했다.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꽃을 샀다, 빽을 사줬다, 옷을 사줬다, 차를 사줬다, 같은 말밖에 없어서 곤란했다. 사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해서 이규가 진짜 기뻐할지는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이규는 자기가 살 건 알아서 다 잘 샀고, 생각이 나 사다주는 걸 기뻐해주기도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한테 멋대로 입히고 싶은 걸 입혀놓는 걸 더 만족스러워 했다.
이규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규가 저를 제외하고 좋아하는 걸, 특별한 날 이규가 받고 좋아할만한 물건이 무엇인지를 유추해내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니 참고할 데라고는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그거 말고는.]
수화기 너머의 스테판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 너머로 로시의 목소리도, 컹컹 짖는 맥스의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종수가 핸드폰을 때 괜히 화면을 한번 노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딴 거 더 안 했냐고.]
스테판이 웃음을 겨우 멈추고,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종수에게 말했다.
- [야. 니 남편은 너가 ‘선물은 나야.’ 이 한마디만 해도 돼.]
[…….]
- [진짜임.]
차마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규는 제 것이고, 저도 이규의 것이었다. 줬던 걸 다시 줄 수는 없었다. 이왕이면 더 좋고 새로운 걸 주고 싶었다. 하아. 종수는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반응에 스테판이 더 크게 낄낄대기 시작했다. 종수가 불만을 표하는 것도 당연했다.
[도움 존나 안 돼.]
- [열받네?]
[또 뭐 안 했냐고.]
- [너 이거 몰래 전화하는 거지?]
[……끊는다.]
- [매정한 새,]
이어지는 스테판의 말을 뚝 끊은 종수가, 겸사겸사 용건을 전달했다.
[한국 올 일정이나 정해.]
- [어, 안 그래도,]
[이규 온다.]
- [어~]
이규가 거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종수는 재빨리 전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대충 내려뒀다. 제 옆자리를 톡톡 치기도 했다. 이규가 성큼성큼 걸어 종수 옆에 착 붙어 앉았다. 종수의 볼 위로 이규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이규에게서 묻어나는 축축하고 싱그러운 풀 냄새가 좋아서, 종수는 이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이규가 자연스레 종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남은 손으로는 종수의 손을 만지작대기도 했다.
“누구야?”
“엄마.”
종수는 대충 시치미를 뗐다.
“주말에 오라셔?”
“어. 근데 안 된다고 했어.”
“왜. 가도 되는데.”
“지지난 주에도 갔잖아.”
“또 가면 되지.”
안 될 말이었다. 자신은 이규와 1년도 되지 않은 신혼이었다! 이게 진짜 엄마의 전화였더라도, 한 달에 두 번이나 시댁에 방문할 수는 없었다. 자고로 시댁 방문이 덜할수록 사랑받는 남편이 되는 법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종수가 고개를 들어 이규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이규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는 건 덤이었다.
“너랑 있을래.”
눈을 동그랗게 뜬 이규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흐흐.”
“너도 집에만 있어.”
“산책도 안 돼?”
“안 돼.”
“마당까지는 봐줘?”
계속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대꾸에 종수가 이규를 슬며시 노려보다가, 이게 장난이라는 걸 겨우 인식하고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래.”
“으하하.”
“왜 웃어.”
“너 귀여워서.”
“가만 안 둔다.”
“응~”
태연하게 돌아오는 답에 종수가 한쪽 입매를 끌어올려 비죽 웃더니 그대로 이규를 밀어 넘어뜨렸다. 으아악! 소리가 들렸지만, 그 뒤를 이어서는 다시 경쾌한 이규의 웃음소리가 소파 위에 울려 퍼졌다. 종수는 바깥에서 물기를 머금고 있는 이파리만큼이나 청량한 이규에게, 그냥 또 입술이나 부볐다. 날이 갈수록 건방지게 구는 이규가 귀엽게만 보이니 정말 큰 일이었다.
* * *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먼저 내린 종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규의 말대로 정말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고즈넉한 곳이었다. 심지어 주변에 다른 집도 보이지 않았다. 종수가 만족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글램핑이나 캠핑은 아무래도 주변에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확실히 더 고립된 느낌이 있었다. 일박은 아쉬우니 이 박을 끊길 잘했다고 종수는 내심 생각했다.
“와. 여기 진짜 우리밖에 없네.”
어느새 종수의 옆에 나란히 선 이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종수가 이번에는 좀 더 큰 폭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응.”
이규의 물음에도 선선한 대답이 따랐다. 이규가 종수의 허리에 팔을 감더니 입술을 겹쳐왔다. 마침 분 바람에 더운 공기가 잠시 사그라들었다. 쏴아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종수가 손을 뻗어 이규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이규가 시원한 소리와 함께 제게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아서, 종수는 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사람 없으니까 좋다.”
“응.”
“막 뽀뽀도 하구.”
쪽. 부러 큰 소리를 낸 입맞춤에 종수가 또 냉큼 답했다.
“응.”
“짐은 나중에 옮기고, 안에 먼저 들어가 보자.”
종수가 이규가 손을 잡아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규는 능숙하게 나무 대문에 붙어있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마 오기 전에 확인하고 외워둔 것 같았다. 삐리릭.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덜컹 열린 문 안으로, 둘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들어선 곳에는 작은 정원과 함께 탁 트인 대청마루, 유려하게 뻗은 기와지붕, 창호지를 덧댄 문 같은 게 보였다. 이규는 와아. 하는 탄성을 내뱉더니 성큼성큼 대청마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서는 대충 허리를 숙여 왼쪽에 있는 방과, 오른 쪽에 있는 주방으로 통하는 통로, 화장실, 구들방 등을 확인하더니 종수와 나란히 대청에 걸터앉았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으로 돌입하기 전, 더운 기를 살짝 머금은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종수가 고개를 돌려 이규를 봤다. 소담한 정원을 보던 이규가 그 기척을 돌리고는 눈을 맞춰왔다. 눈꼬리가 또 예쁘게 휘었다.
“좋다, 그치.”
그 눈을 빤히 보던 종수가 답했다.
“어.”
이규가 좋다고 한 건 이 집이나 분위기 같았지만, 종수는 그저 이규와 있는 게 좋았다. 결혼한 지 1년이라는 사실이 벅찼다. 이대로 100번도 넘게 이 기념일을 챙기고 싶었다. 종수가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이규에게 건넸다.
“좋아.”
“나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오는 답이 좋아서, 종수가 이규를 확 잡아당겼다. 입술이 맞닿으며 앞니가 부딪쳤다. 아릿한 고통 속에서 이규가 웃었다.
종수는 그동안 셀 수 없이 입을 맞췄는데도, 꼭 너무 좋으면 입술이나 앞니를 쾅쾅 박아댔다. 이규는 그게 참 귀엽다고 느꼈다. 첫 키스를 했던 때의 종수가 생각나서였을 수도 있고, ‘좋아서 화 나.’의 얼굴로 저를 깨물어대는 종수가 생각나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또 마음이 흘러넘쳐서였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오늘도 종수는 사랑스러웠다. 웃음이 더 짙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몸까지 떨어지는 이규를 느낀 종수가, 이번에는 맞닿은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규는 그 아릿함에도 종수를 더 끌어안기만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더 입을 맞춘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가 차에 실었던 짐을 가지고 왔다. 먼저 간 이규가 트렁크를 열었고, 뒤이어 나온 종수의 손에 아이스박스를 들려줬다. 무거운데 괜찮아? 하고 이규가 물었지만, 종수는 코웃음을 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 뒤에 주방 기구나 조미료 등을 넣은 가방과 옷가지가 담긴 캐리어는 이규가 챙겼다. 차 안에 남은 작은 캐리어가 하나 있었지만, 이규는 종수 모르게 그 캐리어를 잘 둔 뒤, 그를 따라 들어왔다.
캐리어는 왼쪽에 있는 방에 넣고, 주방 기구는 가져와 조리대에 정리했다. 이틀간 먹기 위해 장을 봐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정리한 뒤에는 간단하게 점심을 챙겼다.
점심은 비빔밥이었다. 오늘은 그리 더운 편은 아니었고, 이규가 아이스박스 안에 가져온 덕인지 다행히 나물도 상하지 않았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한옥 내부에 딸린 가스레인지에서 계란도 반숙으로 부쳐 넣었다. 먹고 나서는 대청마루에 다시 앉아 얼음을 동동 띄운 매실 차를 마셨다. 종수네 부모님과 함께 만든 매실청은 상큼하고 달콤했다. 종수는 솔솔 부는 바람을 느끼다, 이규가 잔을 치우러 주방에 간 사이 스르르 마루 위에 누웠다. 몸에 닿은 나뭇결이 시원했다.
대청마루에 드러누운 종수를 보고, 이규가 얇은 이불을 가져와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제 쪽으로 꿈틀대는 종수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그 위로 하늘하늘한 이불을 덮어주며 물었다.
“졸려?”
종수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낮게 웃은 이규가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종수의 눈이 이제는 느리게 감겼다.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규가 웃음을 참으며 종수의 위로 이불을 꼼꼼하게 고쳐 덮었다. 말없이 뽀얗게만 느껴지는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 위로 차근차근 어제의 종수가 떠올랐다.
서프라이즈를 해주겠다고 케이크를 사 와 날이 바뀌자마자 초를 불자던 종수. 역시 식물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너가 생각났다며 화분을 사 온 종수. 이미 줬지만, 자신을 한 번 더 주겠다던 종수. 모든 순간이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이 정도 사귀면 권태기라는 게 올 법도 한데 어떻게 사랑이라는 게 매일 같이 커질 수만 있는지,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게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마음이 넘쳐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건 종수도 마찬가지인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상대가 비슷한 걸 느끼는 게 보이는 건 더욱더 행복했다. 케이크를 먹다 분위기를 타버리는 것도 당연했다.
종수랑 하는 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섞는 게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제가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사실은, 떠올릴 때마다 아래가 저릿했다.
종수에게도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종수는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 거라고들 하던데, 자신은 무슨 복인지 그 상대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심지어 그 첫사랑은 만난 그 순간부터 언제나 천하제일이었고……. 언제나 예쁘고 멋진 데다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심지어 잠자리에 적극적이기까지 했다. 이 이상으로 좋을 수는 없었다. 종수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종수에게 매번 휩쓸려 그를 엉망으로 몰아붙이고 마는, 어쩔 수 없이 짐승 같은 사내놈이었다. 그러니 어제도 종수를 그렇게 무리하게 만든 거였다. 이규는 애써 한숨을 삼켜냈다. 돌아간대도 똑같이 그럴 거라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아서였다. 이규가 그새 흘러내린 종수의 앞머리를 다시 가만가만 쓸어 넘겼다.
종수는 괜찮다고 했지만, 식탁에서 하던 연이은 관계가─다행히 식탁에 유리는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유리와 함께 분위기도 같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최근, 결혼기념일 선물 고민이라는 눈에 보이는 이유로 잠을 못 잤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종수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어제 식탁에서 연이은 정사를 이은 데는 오늘 낮잠을 재워야한다는 응큼한 속내도 있었다. 하지만 종수의 체력에 고작 하루로 이렇게 곯아떨어지지는 않을 테니, 여기에는 분명 선물 고민과, 어떻게든 준비해 끝마친 안도감이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면 또다시 가슴 속이 몽글몽글해졌다. 십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밤낮없이 고민하는 애인이라니……. 종수는 그런 성실한 점도 정말이지 귀여웠다…….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결국 쟁취해 내는 모습. 그게 농구라 좋았고, 다음이 자신이라 마음이 벅차올랐다. 다시금 종수의 이모저모를 곱씹던 이규가, 슬그머니 일어나 제 팔 대신 베개를 받쳐주고는 조심스레 밖을 향했다.
그런 남편을 위해 제법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이벤트를 준비할 타이밍이, 지금 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좀 전에 일부러 두고 온 가방이었다. 종수는 모르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이자 저의 소원이 바로 이곳에 모두 담겨있었다. 이규는 트렁크를 문을 올려둔 채로 캐리어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다시 조심스레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서는 옷장을 열어 이불을 모조리 꺼낸 뒤, 캐리어를 넣고, 다시 이불로 잘 덮어뒀다. 종수가 이런 곳까지 둘러보지 않는 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였다. 이규는 몰래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묘한 불안감에, 몇 번이고 그 모습을 살핀 후에야 베개를 하나 더 가지고 나와 종수를 보고 다시 누웠다.
절로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도심을 벗어난 곳은 에어컨이 없어도 그리 덥지 않았다. 바람은 선선했고, 이따금 들리는 풀이나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나 새들의 지저귐이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그 속에 사랑하는 이를 데려다 놓으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규가 팔짱을 낀 채로 자는 종수의 팔을 풀고, 그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종수가 잠결에도 제 품을 파고드는 묵직한 덩치를 끌어안았다. 이규도 큭큭대며 한쪽 팔을 뻗어 종수를 꽉 껴안았다. 눈꺼풀이 기분 좋은 무게로 감겼다. 종수의 품에서는 당연하게도 그의 냄새가 잔뜩 났다. 제가 종수에게 어울리는 것들로 산 향이었다.
역시 종수가 너무 좋았다. 아주 잠시만 종수랑 같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참외를 깎아주고, 김치전도 해 먹은 다음에, 느즈막히 백숙을 끓여야지. 그리고 종수에게 마트에 좀 다녀와달라고 해서 본 이벤트를 즐겨야지. 이규는 이후의 계획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서서히 잠결로 빠져들었다.
* * *
“아, 종수.”
“응.”
낮잠을 잔 후 일어나 계획대로 참외와 김치전을 먹고, 백숙 손질에 준비까지 한 뒤, 이규가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것까지 종수는 얌전히 옆에 앉아 구경 하기만 했다. 그사이에 설거지를 돕긴 했지만, 이규는 워낙 준비를 하면서도 정리를 하는 타입이라 남은 양이 얼마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궁이가 보이는 실내에 앉아, 그래도 불 앞에 조금 있었다고 더운 몸을 선풍기 바람에 식히는 중이었다. 종수가 저를 불러 놓고 답이 없는 이규를 툭 쳤다. 이규가 큭큭대며 쪽! 뽀뽀를 하고 떨어지더니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 파를 안 샀어.”
“파?”
“대파……. 집에 항상 있는 거라서 까먹었나 봐.”
종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없이 해.”
“안 돼.”
이규가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파가 있어야 맛있어.”
“그럼 사러 가든가.”
그 말에는 또 금세 눈썹을 늘어뜨렸다.
“나 이거 보고 있어야하는데…….”
예의 그 비 맞은 개새끼 같은 얼굴에 종수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걸 보고 샐샐 웃은 이규가 다시 종수를 불렀다.
“혹시, 종수.”
“왜.”
“대파 한 단만 사다 줄 수 있어? 우리 아까 장 봤던 마트에서.”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부탁에 종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으응~”
종수의 선선한 대답에 이규가 금방 엉겨 붙어 왔다.
“같이 못 있어서 어떡해.”
심부름을 보내놓고 칭얼거리는 것도 본인이라니. 애교를 부리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종수가 그런 이규의 볼을 괜히 양손으로 꼬집어 늘렸다. 이규가 으우으……!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몸을 더 기대왔다. 종수가 양 볼을 꾹꾹 누르다가 결국 이규를 밀쳐냈다.
“됐어.”
더 있다가는 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몸을 벌떡 일으키기도 했다.
“조심히 다녀와.”
“어. 딴 건.”
“대파만 있으면 돼. 필요하면 너 먹고 싶은 과자?”
“더 있으면 연락해.”
“응~”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종수가 손을 내밀었다. 차 키를 내놓으라는 손짓이었는데, 이규는 그 손을 그냥 덥석 잡기만 했다.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린 종수가 하여간, 귀여운 새끼. 하고 중얼거리고는 이규의 손을 꾹 쥐었다 놓은 뒤, 다시 손을 내밀었다.
“차 키 달라고.”
“아.”
“바보.”
“나는 손 잡자는 줄 알았지~”
머쓱하게 웃은 이규가 주머니를 뒤져 차 키를 건넸다.
“여기.”
애새끼처럼 손잡자는 얘기를 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종수는 결국 달라던 차 키는 받지도 않은 채, 앉아있는 이규의 턱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허리를 숙여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입술을 빨고, 웃느라 떨리는 혀를 얽었다 떨어진 종수가 그제야 다시 몸을 돌렸다.
“갔다 올게.”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종수의 뒤를 이규가 금세 몸을 일으켜 따라 갔다. 종수도 그 기척을 느끼고는 다시 말을 붙였다.
“왜.”
“배웅해 주려고.”
“그러든가.”
종수가 이규를 흘긋 보고는 마루를 나와 신발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대문을 열기 직전, 이규에게 다시 손을 잡혔다.
“종수.”
“또 왜.”
퉁명스러운 어투와는 달리 제법 너그러운 목소리에 이규가 손을 꼼지락대며 헤실헤실 웃었다.
“뽀뽀.”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이거였다. 이규는 자기가 파를 사 오라고 해놓고서는 요구도 많았다. 종수가 결국 피식 웃었다.
“아까 해준 건 뭐야.”
“그건 키스.”
“하.”
이게 진짜 왜 이러지? 종수는 괜히 이규의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오늘따라 아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기념일이라 그런가? 이규도 그래서 마음이 들뜬 건가? 생각하면 못 해줄 것도 아니었지만, 가라고 해놓고 갈 마음이 들지 않게 구는 건 좀 괘씸하긴 했다. 이규는 힘이 들어간 종수의 눈매를 보고도, 이제는 몸까지 붙여 오며 종수를 졸라댔다.
“빨리이~ 뽀뽀하고 가자. 응?”
“너 백숙 봐야 한다며.”
왜 안 들어가고 이러고 있냐는 타박이었다. 이규는 그 말에도 냉큼 답했다.
“잠시는 괜찮아.”
“허.”
“빨리하고 나도 보내주면 되지?”
이규가 이제는 맞잡은 손까지 애처럼 흔들기 시작했다. 종수는 그 꼴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결국 남은 손을 뻗어 이규의 목덜미를 감아 당겼다. 순식간이 거리가 가까워지자 종수는 이규의 입술을 깨물고, 벌려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온 입안을 헤집듯 굴었다. 이규가 몸을 움찔대도 봐주는 것 따위는 없었다. 당장에라도 자빠뜨리고 싶은걸, 김치전이니 백숙이니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 맞춰줬더니 사람을 박박 긁는 게 아주 발칙했다.
종수는 그렇게 대문을 뒤에 두고 한참이나 이규의 입안을 헤집다가,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이규를 놓아줬다. 마지막에는 이규의 아랫입술을 쫍 빨아서 그 탱글함을 한 번 더 즐겼다. 그가 말한 대로 입술까지 꾸우욱 눌렀다 뗐다. 그 위에 대고 이규가 다시 입술을 쪽쪽 맞춰왔다. 종수는 또다시 드릉드릉 울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내리누르고는 말했다.
“진짜 간다.”
“응. 다녀 와.”
드디어 대문 밖으로 나온 종수는 차 문을 열었다. 이규는 그 옆까지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결국 종수한테 한 번 더 타박을 들었다.
“어디까지 올 건데.”
“여기까지.”
“들어가.”
“너 출발하는 거 보고~”
“참 나…….”
종수는 결국 그런 이규를 뒤로 하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차 내비게이션을 뒤져 직전에 갔던 마트를 선택했다. 경로 안내를 시작한다는 목소리가 차 내부를 울렸다. 이규는 썬탠이 짙은 창문으로 대충 종수가 정리를 할 시간을 가늠하다가, 창문을 내려달라는 듯 가볍게 노크했다. 그러고는 종수가 창문을 내려주자마자 또다시 쪽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또 종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간지러운 말을 해댔다.
“다녀 와요, 여보~”
반쯤은 장난인 게 느껴졌지만, 눈앞의 남편을 당장 자빠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종수의 입에서는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작작 해.”
“흐흥.”
이규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몸을 물렸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기도 했다. 이제 진짜 끝인가 보다 생각한 종수가 이규를 한번 노려보고, 안전벨트를 맨 채 차를 움직였다. 백미러로 이규의 모습을 드문드문 확인한 종수가, 결국 피식 웃고는 길을 따라 달렸다.
종수를 배웅한 이규는 차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아양을 떨 만큼 떨어 종수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녹여놨으니, 이제 종수가 돌아오기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기만 하면 됐다.
아궁이에 넣었던 숯은 밖으로 빼서 불씨가 옮겨붙지 않게 잘 담아두고, 솥에는 백숙 국물이 너무 졸아들지 않게 물도 좀 더 부은 뒤, 종수가 낮잠을 자는 사이 차에서 몰래 옮겨둔 캐리어를 꺼냈다. 이규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결혼 직후 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곱게 개인 채로 놓여져있었다.
이규는 형광등 아래에서도 차르르 빛나는 옷감을 손으로 한번 쓸어보고는, 푸른 빛이 도는 관복을 들어 주름을 살짝 털고 옷걸이에 걸었다. 벽에 걸린 옷을 본 이규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종수가 이걸 입을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예쁘고 멋질 게 분명했다. 오늘은 아마 안 될 게 분명했지만, 최대한 온전하게 보존해 가서─사실 이규도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씩씩대며 돌아올 종수를 알아 회의적이긴 했다─ 나중에는 사진도 찍었으면 좋겠다고, 이규는 내심 바랬다.
들뜬 마음에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린 이규가 이번는 제가 입어야 하는 옷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종수야 서너 겹만 입어도 된다지만, 저는 이것저것 걸칠 게 많았다.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부지런히 손과 몸을 놀려야 했다.
* * *
그 사이 종수는 구불구불한 길을 제법 달려 읍내에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대로 들렀던 마트에 주차를 하고 내렸다. 마트에 들어서서는 입구에 있는 바구니를 가져와 들었다. 그래도 한번 왔던 곳이라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종수는 망설임 없이 채소 코너로 가 대파를 한 단 담고, 그대로 발을 옮겨 이규가 살지 말지 고민했던 과자 코너를 들렸다. 오랜만의 휴가라 술도 샀고, 휴식기라 식단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으니 안주로 곁들일 과자가 있으면 더 좋겠다 싶어서였다.
감자칩을 두어 봉지 더 담은 종수가 이내 계산대로 향하다, 다시 서서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름이 다가와 그런지 아이스크림 세일을 한다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이것도 사갈까, 하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엉겨 붙던 이규가 생각이 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규가 먹는 아이스크림 정도는 당연히 알았지만, 그래도 이걸 빌미로 목소리나 좀 들을까 해서였다.
늘 그렇듯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이규는 전화를 받았다.
‘응. 종수~’
간질간질한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 이규가 옆에 있지도 않은데, 괜히 제 심장까지 간지러워지는 것만 같아서─물론 그걸 바라고 전화를 한 것이긴 했지만─ 종수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음, 아니.’
“……?”
하지만 돌아온 건 아주 드문 부정의 답이었다. 종수가 잠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바라봤다.
“안 먹는다고?”
‘응~ 밥 먹고는 식혜 먹자. 대파만 사서 와~’
“……어.”
전화를 끊은 종수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규는 더위를 많이 탔다. 그런 고로 차가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단숨에 거절한다, 고……. 아니 잠시만.
…….
“하…….”
생각해 보면 이규가 식재료 같은 걸 까먹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장을 같이 본 기억이나, 냉장고를 나란히 정리했던 기억을 되짚어보면 진짜 없긴 했으니, 이건 의도하고 안 산 게 분명했다. 아이스크림을 거절한 것도, 분명 이걸 냉장고에 넣어둘 시간이 없을 정도로 깜찍한 짓을 저 몰래 꾸미고 있어서인 게 확실했다!!! 이규의 계획을 드디어 깨달은 종수가 마른세수를 벅벅 했다. 한 손에는 여전히 대파 한 단과 과자 봉지가 든 마트 바구니를 든 채였다.
“존나 앙큼한 새끼…….”
중얼거린 종수가 씩씩대며 핸드폰을 들어 카톡을 보냈다.
「딱 기다려.」
이규에게선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네 서방님♥」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종수가 답 없이 화면을 끄고, 하늘을 본 채 후우……. 깊은숨을 내쉬었다. 또 어떤 상상도 못 할 일을 꾸미고 있을지, 빨리 가서 그 꼴을 제 눈으로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끼익! 대충 주차를 마친 종수가 장 본 게 든 비닐봉지를 들고 성큼성큼 집으로 향했다. 대문은 미는 대로 열렸다. 이규가 비밀번호 같은 건 안 치고 들어와도 되게 미리 열어둔 게 분명했다. 종수는 그 문을 괜히 쾅 닫았다. 그러고는 문이 잠기는 도어락 소리를 등뒤로 한 채 곧바로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 대충 봉지를 던져두고 왼쪽에 침실로 쓰자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
무슨 짓을 꾸미길래 이러냐는 추궁은, 방안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이규를 보니 시작도 할 수 없었다.
“서방님.”
“미친…….”
할 수 있는 건 문손잡이가 부서질 것처럼 꽉 쥐는 것과,
“조심히 잘 다녀오셨어요?”
“너, 이게 무슨…….”
채 끝을 맺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뿐이었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종수의 모습에 이규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또 눈웃음을 지었다. 이마 위로 늘어진 족두리의 술이 차르르 움직였다.
“색시를 원하시는 듯하여…….”
종수는 그제야 이 사단의 원인을 알아챘다. 그건 그냥 이규와 시시덕대며 주고받는 말장난일 뿐이었다. 물론 이규는 최고의 사윗감이기도, 색싯감이기도 했고, 그런 그를 제가 품절시켰으며, 굳이 따지자면 색시와 서방 중에 색시가 맞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대체 누가 그 말장난 하나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종수는 이규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규는 역시 예상치 못한 데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종수가 이글대는 속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뾰족한 말을 내뱉었다.
“말 제대로 안 해?”
이규가 볼을 긁적였다. 새초롬하게 뜨였던 눈이 금세 시무룩하게 변했다.
“별로야?”
“…….”
별로냐, 물으면……. 종수가 이규를 빤히 보자, 이규가 몸을 일으켰다. 보란 듯이 종수의 앞에서 한바퀴를 돌기도 했다. 폭이 넓은 치마가 뱅그르르 퍼졌다 다시 소복이 내려앉았다. 그 움직임이 빌어먹게도 예뻤다.
“그래도 싸구려 앞치마보다는 괜찮지?”
“…….”
그거랑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규는 평소에도 자신은 엄두도 못 낼 색상이나 패턴의 옷을 잘 걸치고 다니더니, 원색이 가득한 한복도 잘 어울렸다. 유치원 때 장기 자랑에서나 보던 족두리도, 꼬마 애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화려해 보이는데도 제 것인 양 소화했다. 심지어 머리카락도 거의 없는 주제에 머리 뒤로 보이는 비녀랑 화려한 비단 천 같은 건 어떻게 고정했는지 감도 안 왔다. 무엇보다 볼에 그려진 연지곤지라고 하던가, 빨간 동그라미가 콱 깨물어주고 싶게 생겨서, 종수는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격이 너무 과해 뇌가 작동을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 종수의 눈치를 보던 이규가 발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씨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래에 힘이 몰리는 게 느껴진 종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이규는 종수의 손을 잡고, 그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어 뒀는지 내부의 공기가 한껏 차가워져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
이규가 고개를 살짝 숙여 종수를 살펴보며 물었다. 눈썹은 여전히 시무룩하게 내려간 채였다.
“그건 아니지?”
그걸 보니 뭐라도 답은 해줘야겠다 싶어서, 종수가 겨우겨우 대답 한마디를 짜냈다.
“……어.”
“다행이다. 나 이거 사이즈 없어서 맞춤으로 했어.”
이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종수에게 안겨 왔다. 종수가 반사적으로 제 위로 엉겨 붙는 커다란 덩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없으면 말 것이지 굳이 맞춤까지 해서? 물론 그만큼 이규가 자신을 좋아하고, 그러니 그 정도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머리로는 알았지만, 역시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이규에게 굳이 여자 옷을 입는 취미가 없다는 것도 알아 더 그랬다.
“……왜.”
그 의문을 내뱉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좀 떼다가, 종수가 떨어지지 말라는 듯 허리를 감싸자 다시 얌전히 안겨왔다. 그러고는 종수의 허리를 살살 매만지며 답했다.
“그……. 나는 너가 맨날 색시 타령하길래.”
“그게 왜.”
“이런 거에 좀 로망이 있나 해서……?”
이런 건 대체 뭐고 로망이라는 건 또 대체 뭔지……. 이해가 안 되는 말에 종수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자, 이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이건 야한 거 아니라서 나 혼자 봤는데.”
애초에 선수 생활도 하고 집안일도 하는 그 바쁜 와중에 혼자 몰래몰래 이런 걸 다 준비했는 게 말이 안 됐다. 이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규는 진짜 몸이 최소한 세 개라도 되는 사람처럼 굴었다.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구…….”
거기까지 말하고도 종수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이규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고는 괜히 몸을 더 붙여왔다. 바스락대는 옷감 소리가 더 크게 났다. 종수가 그 소리에 다시 몸을 굳혔다. 방금 봤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이규의 로망이라는 말과, 생각보다 너무 본격적인 차림새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직전에 본 차림새는 확실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이규는 예쁘다. 그런데 이규가 예쁘다고 여자 옷이 잘 어울리는 건 아니었고—벌칙 같은 걸로 입은 걸 봤는데, 작은 옷에 큰몸을 구겨넣듯 입은 거라 웃기기만 했다—, 그가 말했듯 이벤트 앞치마 같은 건 어느 정도 꼴리긴 했으나, 그건 사실 알몸이나 다름없었던 덕이 더 크기도 했다.
그래도 옷을 걸치는 것 중에 뭐가 제일 취향이냐 묻는다면……. 자신은 셔츠가 좋았다. 이규는 목이 길어 빳빳한 셔츠 깃이 참 잘 어울렸다. 가슴 때문에 팽팽해진 셔츠를 보는 것도 보기에 흡족했다. 그걸 제 앞에서 벗게 한다거나, 제 손으로 벗기는 것도 마음에 차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규가 입었던 누드 에이프런 같은 데 꼴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진짜 이규의 말대로 제 로망일 수도 있는 건지. 아니면 이규의 말대로 좀 비싸게 주고 맞춘 옷이라 그냥 옷 자체가 예뻐서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냥 이규의 이런 정성이 좋아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건지. 종수는 제 마음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뭐라 반응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분명한 건, 마트에서까지는 오자마자 이규를 진짜 자빠뜨려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는데, 막상 이런 옷을 입은 이규를 보자니 또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졌다는 거였다. 반짝반짝하던 눈이 점점 시무룩해지는 걸 봐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규가 원하는 게 뭔지를 또 알 수는 없어서, 종수는 습관적으로 이규의 목뒤를 주무르려다 손을 멈춰야만 했다. 손바닥 아래로 옷깃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이제 좀 생각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종수를 눈치채자마자, 볼에 살며시 입술을 붙였다 떼고는 물었다.
“나 혼 나?”
“아니.”
“봐줘?”
“어.”
이규는 종수의 이글이글한 기세가 모두 사라졌음을 느꼈다. 종수도 그제야 다시 예쁘게 휘는 이규의 눈꼬리를 보고, 그의 입술에 쫍. 입을 맞췄다. 이규의 눈이 더 큰 곡선을 그렸다. 종수가 괜히 이규를 더 끌어안았다. 이 예쁜 걸 눈앞에 두고 보고만 있으려니 애가 닳아서였다. 하지만 자신은 직전에 이규의 바람에 맞춰주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규가 곧장 말을 이었다.
“음, 그리고 종수…….”
“뭐.”
종수가 이제는 손을 올려, 이규의 어깨 위로 늘어진 비단 천 같은 걸 만지작대며 대꾸했다. 이규가 그런 종수의 손길을 흘긋 보고는 답했다.
“이게 내 소원인데.”
“뭐?”
이걸 입은 걸 봐주는 게 소원이라는 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손장난을 멈추고 다시 눈을 맞춰오는 종수에게 이규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서방님 옷도 있는데.”
“뭐라고?”
종수는 이규의 시선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가, 그제야 벽에 걸려있던 신랑 혼례복을 알아차렸다. 제법 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는데 눈앞의 이규에게 정신이 팔려 보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저걸 입고 뭐, 소꿉장난이라도 하자고? 유치원 때 하던 장기 자랑처럼? 하지만 그런 건 아닐 것 같았기에 종수가 다시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도 종수가 보내는 무언의 재촉을 느꼈는지, 다시 종수의 입에 쪽쪽 입을 맞추고는 비밀 얘기라도 하듯 속살댔다.
“입고 하자.”
“…….”
이거구나. 이규가 바라던 게. 종수는 드디어 이 이벤트의 메인 디쉬를 알아차렸다.
“응~?”
색시 옷까지 입고, 연지곤지까지 찍은 얼굴로 졸라대니 시야가 절로 뱅글뱅글 돌았다. 종수는 또다시, 이제는 셀수 없을 정도로 또 인정해야 했다. 이규의 말이 맞았다. 이번에도 이규는 저보다 제 맘을 더 잘 알았다. 그 말까지 들으니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진짜 말 그대로 아래에 불끈불끈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조잘대는 입술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그를 밀어 넘어뜨리고 싶어졌다. 고운 색시 옷을 입고 제 아래에서 헐떡이는 이규를 보고 싶었다. 그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기지 못할 쾌감을 잔뜩 쏟아부어서, 한계까지 그를 몰아붙이고 싶었다. 종수는 이번에도 역시나, 너무 좋아서 마음이 삐죽거렸다.
“변태.”
“으하하.”
쾌활하게 웃은 이규가 종수를 꽉 끌어안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수의 얼굴에 여기저기 잔뜩 입술을 부비기도 했다. 종수가 그 뽀뽀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뚱하게 답했다.
“이러려고 온 거야?”
“아무래도?”
“짜증 나.”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걸 계획한 건지 가늠도 안 갔다. 종수의 입술이 또 살짝 튀어나왔다. 저도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나름 준비한다고 한 것 같았는데, 여전히 이규의 준비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있어서였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어르듯 말했다.
“결혼하면 다 된다며.”
제가 한 말을 가져와 우겨대니 반박도 못하겠다 싶었다. 종수가 왠지 모를 분함에 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이규한테 뽀뽀나 당해야 했다. 이규는 종수의 말린 입술 사이를 혀로 핥아 입술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어내기까지 하더니, 다시 부둥켜안은 몸을 흔들어대며 졸라댔다.
“응~ 입어줄 거지?”
이렇게 굴기까지 한다면 정말이지 이길 재간이 없었다……. 종수가 이규를 내내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는, 이규를 퍽 밀쳤다. 이규가 큭큭대면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내놔.”
“흐흐.”
그렇게 말한 종수가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이규는 그 사이 빠르게 몸을 움직여,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옷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종수가 벗은 상의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하얀 저고리를 내밀었다. 종수는 이규가 들고 있는 저고리에 팔을 쑥 집어 넣어 옷을 걸쳤다. 그 후에는 곧바로 입고있던 바지를 벗었다. 마찬가지로 이규가 건넨 하얀 한복 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었다. 다 입고 일어났더니 이규가 이번엔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겉옷 같은 걸 쥐고 펼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종수가 앞섶을 풀어 헤친 채 이규 앞에서 돌아서, 펼쳐진 겉옷 사이로 팔을 끼워 넣었다. 다시 마주 본 종수에게 이규가 한 발짝 다가왔다.
“묶어줄게.”
이규가 종수의 옷매무시를 정리하더니 능숙하게 고름을 묶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묶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도, 이규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는데.”
“유튜브.”
“하…….”
유튜브를 보고 알 수 있으면 세상에 못 하는 사람이 없겠다. 종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규는 속저고리며 단령의 고름을 모두 깔끔하게 묶은 후, 넥타이를 묶어줄 때마다 으레 그리했듯 종수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덧붙일 뿐이었다.
“서방님 옷고름 묶어 드려야 하니까 연습했지요~”
지나치게 간드러진 말투였다. 종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말투 계속할 거야?”
“색시 같지 않아?”
“……됐어.”
이규가 이규답게 구는 게 좋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규는 종수의 떨떠름한 반응에 금세 서운한 티를 냈다.
“나는 너가 여보도 좋아하길래, 서방님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누가 봐도 일부러인 게 티가 났지만, 종수는 뻔히 알고도 또 괜히 이규의 말을 곱씹었다.
“…….”
좋았다. 빌어먹게도 좋았다. 이런 취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게 골이 났다. 그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규도 잘 아는, 너무 좋아서 열 받아 미쳐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 이규가 비로소 안심한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댔다. 절로 달콤한 목소리를 내게 됐다.
“서방님.”
“하, 젠장…….”
종수가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살갗이 뜨끈뜨끈했다. 이규가 종수의 손등 위로 꾹꾹 입술을 누르다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열 받아.”
종수가 손바닥 아래에서 웅얼대며 입을 열었다.
“좋으면서.”
그래서 열이 받는 거였다. 이규도 다 알면서 하는 말에, 종수가 다시 또 가슴팍을 씨근대기 시작했다. 이규는 종수의 손에 한번 깍지를 끼고, 그의 손등을 문지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그의 손을 놓았다.
잠시만. 그렇게 말한 이규가 사모를 가져오더니 종수의 머리칼을 사락사락 뒤로 넘겼다. 조금 붕 뜬 머리 위로 조심스레 사모를 씌웠다. 허리에는 각대도 둘렀다. 종수는 가만히 이규의 손길을 느꼈다. 이규는 그 뒤로 여기저기 손을 대며 옷매무새를 좀 더 다듬더니, 종수의 가슴 위를 살짝 도닥였다. 다 됐다는 신호였다. 그 후 한 발짝 떨어진 이규가 종수를 보며 말했다.
“음. 헌앙해.”
“…….”
종수는 떨어지려는 이규의 허리를 반사적으로 낚아채려다가, 이것이 저를 마음에 들게 꾸며놓은 이규가 꼭 가지곤 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는 애써 그 손길을 참았다.
“늠름해. 마음에 들어.”
다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난 이규가 종수를 다시 훑어보고,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광대가 봉긋 솟아오른 게 진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진짜 새신랑 같다. 너무 예쁘고 멋진데?”
이규가 너무 좋아하니 또 마음이 술렁였다. 그러니 더 이상했다. 그렇게 좋을 거면 이규도 이걸 입으면 될 게 아니었던가? 굳이 여자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종수는 아직도 이규가 결혼식 예복을 입고 나왔던 저를 봤을 때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제가 그 순간의 이규를 보고 느꼈던 감격 또한 언제고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굳이 색시옷 같은 건 입을 필요 없이, 신랑 옷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너는, 왜 이거 안 입고…….”
“나? 나야 뭐, 너 보고 싶을 것 같은 거 입는 게 더 좋지.”
제가 이걸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던가……? 종수는 그게 크나큰 오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했을 때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이번에도 딱히 그 오류를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규도 남잔데 색시 옷을 입은 애인을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종수가 큰 각오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규가 보고 싶다고 하면 입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너 같은 거 입어줘?”
“응? 입고 싶어?”
하지만 이규의 반응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았다. 괜히 긴장하고 말을 한 것만 같아, 종수가 작은 한숨과 함께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겠냐…….”
심드렁한 종수의 반응에 이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는 너가 뭘 입어도 좋겠지만.”
그런 것치고 이규는 엄마와 합심해 제 옷을 사는 데 아주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또 이전부터 너는 왜 티 하나만 걸쳐도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멋지냐,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자주 하기도 했다. 그러니 저 말이 거짓은 아닐 터였다.
……역시 이규는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종수의 마음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조금 더 누그러졌다.
이규는 그사이 또 해야 할 일이 있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수는 멀뚱히 서있다가 제 옷을 주워 대충 캐리어 위에 걸치듯 얹어놓고, 또 뭔가를 준비하는 듯한 이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바닥에는 깔린 도톰한 이불도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원하는 게 뻔해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이규한테 정신이 팔려 주변에 있는 건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게 어이가 없었다. 종수가 스스로를 향해 헛웃음을 날리고 있는 사이, 이규가 다시 종수를 불렀다.
“그것보다, 종수.”
“왜.”
“앉아 봐.”
젤이랑 콘돔이라도 챙기려나, 싶었는데 이규가 말하는 건 또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종수가 뚱하게 답했다. 또 안달이 나는 건 저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뭐할 건데.”
“우리 합환주도 마셔야 돼.”
“뭐?”
“전통 혼례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물론 이게 혼례복이라는 것 정도는 종수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전통 혼례를 올릴 생각까지 하는 건 좀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닌가……? 하지만 그 행위를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또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이규를 제 것이라 점찍는 행위는 언제 해도 마음이 가득 빠듯하게 차오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또 결혼해?”
“진짜 격식대로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분쯤은 낼까 해서.”
이규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생각하지? 종수는 또 눈앞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역시 이규를 좋아한 건, 이규와 사귀기 시작한 건, 이규와 헤어지지 않은 건, 이규와 결혼까지 해버린 건, 최종수 인생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괜히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예쁜 걸 어서 홀라당 집어삼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규가 어딘가에서 소반을 가져와 이불 위에 놓고는 씩 웃어 보였다.
“내년에도 또 하고 해서, 아주 평생 해버릴까?”
“…….”
종수는 말없이 바닥에 앉았다. 괜히 이불을 쥐어뜯었다. 이규를 찢어발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매년이 좀 그러면, 10년 주기로는 또 하자 어때.”
이규는 또 어디에선가 술잔과 술병을 가지고 왔다. 오늘을 준비하며 이번엔 전통주를 좀 마셔보자고 하더니, 다 이걸 위해 가져온 거였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술병의 뚜껑을 여는 이규를 보고, 종수는 입술을 달싹이다 오늘도 결국 볼품없는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왜.”
이규가 저를 좋아해서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았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도 그 애정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심 채우려고.”
“뭔 사심.”
“너 예쁘고 멋있는 거 좀 보려고.”
이규가 마주 앉은 채로 상체를 기울여 거리를 좁히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들뜸이나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규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종수는 또 당장에라도 앞에 있는 걸 모조리 치우고 그를 자빠뜨리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는데.”
이규가 더 좋아했으면 했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도. 그걸 위해서면 이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원래는 표주박에 남이 따라 줘야 한다던데,”
드디어 함께 해줄 마음이 든 것 같은 종수를 보고, 이규가 제 잔과 종수의 잔에 청주를 따라냈다.
“우리는 약식으로 하자. 기분 내는 거니까.”
이규가 앞에 둔 술잔을 쥐었다. 종수도 이규를 따라 했다.
“술에 입만 대고 바꾸는 거야.”
그렇게 말한 이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술잔을 입에 대고 살짝 기울였다. 종수는 그걸 빤히 바라만 봤다. 사박거리는 옷 소리가 또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손끝만 보이는 긴 소매가, 그걸로 가려지는 얼굴이, 술에 입을 대느라 반쯤 내리깐 속눈썹이 어여뻤다. 술잔을 내린 이규가 종수를 재촉했다.
“종수, 너도 해야지.”
종수도 땀으로 축축해진 손으로 잔을 들었다. 이규가 했듯 고개를 돌리고 잔을 기울여 입술에 술을 댔다. 고개를 돌렸더니 눈꼬리를 잔뜩 휜 이규가 보였다.
“이제 바꾸자.”
종수는 이규의 말을 따랐다. 제 잔을 이규 앞에 두고, 이규가 제게 건네준 잔을 쥐었다. 물론 입에 댄 건 술이었지만, 이게 무슨 소꿉장난 같은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어릴 적에도 저는 이런 놀이에 맞춰주지 않았던 것만 같았는데, 서른이 넘어서 이런 걸 하자고 하는 이규가 귀여웠다. 잔을 쥔 종수의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마시면 끝이야.”
이규의 말에 종수가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켰다. 도수가 제법 높은 술인지 목구멍이 화끈했다. 이규는 호쾌하게 술을 들이켜는 종수를 보고 웃다가, 저도 술잔을 비워냈다. 쌀로 빚어낸 술이 주는 내음이 향긋했고, 도수가 좀 있어서 그런지 뒷맛도 깔끔했다. 추천받아 산 보람이 있을 정도로 꽤 괜찮은 술이었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이규가 잔을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종수.”
“응.”
이규가 술 때문인지 아닌지, 조금 더 붉어진 얼굴을 한 종수를 찬찬히 살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관복을 입고 사모까지 쓴 종수는 지나치게 헌앙했다. 지금 이 모습을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정말 무슨 복이 있어 이런 사내를 평생을 함께할 정인으로 맞이했나 싶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랑 결혼할래?”
이규가 그 말과 함께 웃어 보였다. 종수는 그런 이규를 보고 멍하니 생각했다. 예뻤다. 걔의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미소가, 분위기가, 이 순간이, 그냥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가 홀린 듯 답했다.
“……응.”
“너무 좋다.”
그 답을 들은 이규가 더 해사하게 웃었다.
“……나도.”
종수의 답에 이규가 몸을 기울이더니 종수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평생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꿀타래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종수는 혀가 아린 것만 같은 달달함에 괜히 갈증이 나 침을 한번 삼키고, 예의 그 말을 또 건넸다.
“너만 있으면 돼.”
“진짜~?”
“어.”
흐흐. 생글생글 웃은 이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 이거 빨리 치우고 올게. 라는 말과 함께였다. 그러고는 종수가 잡을 새도 없이 휙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
종수는 이규의 뒤꽁무니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마른세수를 벅벅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서, 종수는 닫힌 문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매섭게 노려봤다. 저를 살살 꼬드겨 놓고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이규가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종수의 눈에 핏발이 서기 전에 이규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법 빨리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종수에게 봐줄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종수는 이규가 자신을 두고 술상 따위를 치우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종수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바로 자리에 앉으려는 이규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으악! 소리와 함께 이규가 종수의 위로 넘어졌다. 종수의 등 뒤로도 푹신한 이불이 닿았고,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사모가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혼례를 올리자마자 소박을 맞혀?”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이규가 얼빠진 소리와 함께 눈을 끔뻑였다.
“으응?”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죽지도 않고(?)… 또 왔죠…? 이번에는 결혼1주년 기념으로 앙큼한 이벤트를 꾸민 이규로 시작하는 규쫑을 가져왔습니다ㅋㅋㅋ 무엇보다!! 끝내주게 아름다운 일러를 디푸님이 그려주셨기 때문에! 이 글은 꼭꼭 써야만 했답니다😭😭😭 진짜 너무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진짜……. 진짜 이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 . .. . .. … 저 진짜 너무 좋아서 별안간 기절했어요 받은 날에…ㅠ!!!
암튼 이번에도 웹연재하고! 개인 소장본으로만 책을 뽑을 것 같은데ㅋㅋㅋ 함께 달려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이번에도 길고 귀엽고 에로하게ㅎㅎ 힘내보겠습니다 ><~!! 이번편은 애매한(?) 전연령가지만 다음편부터는 본격 성인본이 될 것 같고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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