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7

센티넬X센티넬 빵준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는 의식만 돌아온 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로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약품 냄새, 바이털 기계음, 고요한 듯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 익숙한 온도와 공기의 흐름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느낄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준수는 시각 외의 감각 정보들로 자신이 누워있는 곳을 파악했다. 센터의 병동 건물에 위치한 입원실이겠지. 야밤의 전투 중에 호수 깊이 빠졌던 것 같은데, 어째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목숨줄 하나는 더럽게 길었다.

성준수는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힘겹게나마 눈을 뜰 수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낯익은 병실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전투는 어떻게 끝났을지가 걱정되는 것을 보면 성준수는 훌륭한 정부 센티넬이었다. 성준수는 천천히 경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순간이동 능력자야 종종 보고받았으니 놀라운 것도 아니었으나, 몸을 마비시키는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의문이 들긴 했으나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으니까. 종합해 보면 반란군은 정부군의 주요 병력 중 하나인 성준수를 호수에 수장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시체를 찾을 수 없도록. 가이딩조차 받아볼 수 없도록.

목숨이 대놓고 노려진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센터에서 구른 햇수만큼 반란군에도 성준수의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처음에는 이런 경우를 마주하면 등골이 서늘했으나, 이제는 그저 전쟁의 상황을 실감했다. 늘 운 좋게 살아 돌아왔더라도 이곳은 동네 애들 싸움이 아닌 목숨이 오가는 혼란의 중심이라는 것을.

가만히 몸을 일으켜 앉아 얼마를 있었을까. 의료진이 들어와 성준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익사할 뻔했다는 말이 현실감 없이 머리를 맴돌았다. 빙상 계열 센티넬이라 저체온증은 없어 다행이라는 말이 얹어졌다. 그 말을 들으니 병실에 누워있는 것이 괜히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익사할 뻔했다곤 하지만 숨만 붙어있으면 무사한 것 아닌가. 그 생각은 속으로만 삼켰다. 가이딩실로 보내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한 배려일 것이었다.

하루 정도는 더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준수가 거절할 줄 알았던 건지 늘어진 링거 줄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놀란 표정을 했다.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임무에 뛰어들며 쉬는 것을 죄악처럼 여기듯 살아가던 성준수가 순순히 그러하겠다 말하는 게 의외였기 때문이다. 성준수 성격에 목숨만 붙어있으면 그만 아니냐며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아낼 줄 알았다. 그러고는 신경 안정제나 씹어대며 또 무리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별말 없이 수긍했다. 신체 데이터 수집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순순히 알겠다 대답했다.

그 이후로 들어온 연구원이 이런저런 스크린 화면을 띄운 뒤 성준수의 신경망을 들여다볼 때도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으나,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으로 센터에 왔을 때 잔뜩 낯가리며 주변 분위기나 읽던 때가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병실에 얌전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사라졌다.

이주원을 대신한 연구원에게 물었다. 잠깐 병동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산책 좀 가도 되겠냐고. 이주원이라면 병실을 떠나려는 성준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극구 반대했겠지만, 새로 온 연구원은 그 정도의 베테랑 눈치는 없는 것 같았다. 검사가 대략 끝나자, 연구원은 알겠노라며 병실 문을 열어주었다.

연구원이 사라지자 성준수는 대충 링거 줄을 뽑아낸 뒤 바늘 자국들을 다른 손으로 꾸욱 눌렀다. 숙소로 바로 갈까 싶다가도 잡생각이 너무 많아 산책이나 하지 싶어 밖으로 향했다. 성준수의 외출을 허가한다고 말해둔 것인지 의료진을 마주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센터 본관 뒤에 이어진 병동 건물을 한 바퀴 가볍게 뛰었다. 차라리 달리니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편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이딩실에 처박지는 않은 보답으로 병실에 얌전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본관으로 들어가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 성준수를 맞이했다. 수송기로 각 섹터로 센티넬을 이송하고 난 뒤의 센터는 대개 평화로웠다. 훈련에 참여하고,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하고, 지하에 층층이 쌓여 내려가는 숙소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가끔 병동으로 넘어가 가이딩을 받고.

그 익숙한 일상들에 남아있던 한 센티넬이 성준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이휘성이었다. 전영중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이후 성준수 주변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저절로 많아졌다. 지켜야 할 성지수와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이주원밖에 없던 성준수의 세상이 차차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너 죽을 뻔했다며."

"어."

"영중이가 걱정 많이 했어."

"그러냐?"

"응."

"전영중은?"

"어제 임무 나갔어."

"너는 비번?"

그때 마침 호출음이 들렸다. 원래 그랬는데 이젠 아니네. 이휘성은 그렇게 말하며 멀어져갔다. 갑작스러운 호출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휘성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부의 호출에 언제든 응답해야 하는 센티넬들. 죽음은 쉽고 삶은 어려운 곳.

먼 옛날 2016년 노벨 생리 의학상은 오토파지 현상을 밝혀낸 일본의 과학자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 공업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백성희 교수는 영양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세포는 자신의 소기관을 잡아먹으며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며 이러한 오토파지 기능은 암 발생 및 치매,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 질환뿐 아니라 다양한 감염 상황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현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부라는 거대한 세포 아래 하나의 소기관으로 존재하는 센티넬들. 그 소기관들을 하나씩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정부. 이곳에서, 자신은 과연 안전한가? 성준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없었다.

병동에서 사라진 성준수 탓에 센터는 한 번 더 뒤집어졌다. 연구원은 이렇게 반항적으로 굴 거면 센터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싶은 티가 역력했다. 선배일 이주원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준수는 어차피 하루가 거의 다 지났는데 숙소에서 얌전히 있겠다며 설득에 나섰다. 설득이라기보다는 고집에 가까웠다. 결국 성준수가 이겼다. 심기 거슬렀다간 이능력 조절에 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 뒤처리를 하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숙소로 고분고분 보내주는 것이 훨씬 나았다.

숙소에 혼자 있으려니 이상하게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시간이 정체되며 흘러갔다. 예전에는 누군가 함께 있는 숙소가 불편했는데, 이제는 혼자 있을 때의 고요가 낯설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 함께한 지도 이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 이 년이 지난 사 년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는 게 참 신기했다.

전영중이 돌아온 것은 성준수가 임무를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전영중은 숙소로 들어오면서부터 요란하게 성준수를 찾았다. 방금 훈련을 마치고 쉬고 있던 성준수는 깜짝 놀라 욕을 내뱉었다. 아 씨발, 놀라서 뒤질 뻔했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심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제야 지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숙소에서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준수야, 너 진짜 죽을 뻔했으면서 그런 농담이 나와?"

"살아있으면 됐지."

"그게 다가 아니잖아."

"……."

"…왜."

"너는 왜 자꾸…,"

"……."

"목숨이 안 아까운 사람처럼 굴어. 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살아."

전영중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그런 전영중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문명은 믿음이고 원시는 불신이다. 지금은 문명사회인가라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문명이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지 오래였다. 불신만이 남은 원시 사회가 현재였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 그런 세상에서 전영중은 자꾸만 성준수의 걱정을 했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 세상에서, 자꾸만 타인의 목숨을 걱정했다. 성준수는 그 행동이 의아했다. 전영중이 어째서 저러는지.

너 혹시 나 좋아하냐?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다시 삼켜냈다. 애정을 준다는 건 책임까지 같이 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무거운 진심을 어설프게 꺼내놓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성준수는 전영중 본인이 말하기 전까진 확신할 생각이 없었다.

"왜 그렇게 날 자꾸 걱정해. 전영중, 네 목숨부터 아껴."

"준수야, 왜겠어."

"……."

"왜 내가 널 걱정을 하겠어."

전영중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알아달라는 태도. 성준수는 헛웃음을 쳤다. 아직 제 감정에는 채 이름붙이지 못한 채로.

이주원은 오늘도 몸이 최소 두 개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또다시 죽을 뻔한 성준수 때문에. 드디어 연구가 진척되고 실험 데이터가 모이나 싶었을 때 다시 센터로 송환됐다. 상부에서는 또다시 성준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를 데리고 있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는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이 친구가 워낙 혈기 왕성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공적도 크지 않습니까. 그런 허술한 말로 이주원은 매번 성준수를 변호했다. 가이딩을 받지 않고도 버티는 센티넬이라는 점에서 실험 데이터로서의 가치가 크다는 점도 덧붙였다. 사람의 가치는 그렇게 쓸모로 결정되었다. 이주원 가끔 그런 것만으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에 자주 서글퍼졌다. 예전부터 연구자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종종 자신이 사람의 쓸모를 계산하는 사무직에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에는 영 재능이 없었는데도.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하지만 센터 내에서는 절대 금연이다. 감각이 예민한 센티넬들의 피로를 가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답답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나무가 창살처럼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늘 이런 풍경을 마주하며 살았을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들은 창밖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방공호 같은 지하에 켜켜이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을. 밖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육의 현장뿐이었다.

"선생님."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폭주 이후 임무 빈도가 확 줄었다고 들었는데, 그 덕인지 안색이 전에 없이 좋았다. 성준수 본인은 그런 시간을 용납할 수 없는지 개인 훈련 강도를 높이는 것 같았다. 사실 재 폭주 위험성보다는 정부에 반기를 드는 행동을 예의주시하기 위함이 컸기에 그 정도는 윗선에서도 자유롭게 놔두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성준수가 숙소 문을 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이주원 속만 꼬였다. 지금 누구 때문에 연구도 제쳐두고 달려왔는데. 대답이 곱지 않게 튕겨 나갔다. 그 말에 성준수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성격 하는 것 같다가도 저보다 어른에겐 팍 죽어버리는 게 가끔 보면 안타깝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계급 사회에서 살아간 탓인 것 같아서.

"너 상호 아니었으면 여기 없었어."

"걔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요?"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르고. 네 목숨이 항상 운만 좋아서 사는 줄 알지. 그거 다 주변에서 너 걱정하고 케어하는 거야."

"……."

"상호가 선발로 나간 섹터더라. 뭔가 쎄해서 능력을 썼더니 호수 한가운데서 네가 감지된다고 난리를 쳤다더라."

"걔가요? 웬일이래…."

"상호가 이상하게 감은 좋아. 너 발견해서 건져낸 거지. 그거 아니었으면 너 죽었어."

"……."

"준수야, 너 솔직히 말해 봐.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

성준수는 말이 없었다. 전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그렇다고 하여 정말로 죽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르겠어요."

"……."

"정말 살고 싶거든요. 그런데 가끔은 좀…,"

"응."

"지쳐요. 그래도 할 만해요. 네, 그냥 해야죠. 이게 제 일인데. 불평할 처지도 아니고."

이번에는 이주원이 말이 없었다. 죽고 싶다가도 억척스럽게 살고 싶어지는 건 모든 센티넬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은 채로 살아간다. 죽기 직전까지 다치면 살려내고, 다시 죽어가고, 그걸 다시 살려내고. 자고 나면 늘 오늘이 온다. 내일은 오지 않는다. 미래는 언제나 죽어서 도착한다. 그들은 늘 반복되는 오늘 속에서 서서히 메말라간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어찌 보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도 성준수 정도니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센터 내에서는 내색하진 않지만 죽고 싶다 호소하는 센티넬이 허다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주원은 침묵한다. 그들의 정신을 벼랑으로 내몰리게 만든 것도 결국 이주원 본인이었으므로.

상태 체크 꼼꼼하게 하고. 결국은 늘 하던 말로 어설프게 대화를 매듭지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성준수를 내버려두고 걸음을 옮겼다. 센티넬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때면 심장이 아팠다. 꽉 죄였다가 간헐적으로 풀리길 반복하는 감각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알량한 죄책감은 끊임없는 고통이 되었다. 이주원은 이번에도 연구 외의 일에는 영 재능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야, 고맙다."

퉁명스러운 성준수의 말을 들은 기상호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는 건지 짜증을 내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성준수의 얼굴이라 그랬다. 뭘 말하는 거예요, 햄?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 나왔다.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이름을 불러 세워놓더니 대뜸 고맙다는 인사 한 건 본인이면서도 성준수는 짜증을 팍 냈다. 전에 나 구한 거 너라며. 그제야 기상호는 기억난다는 얼굴을 했다.

햄, 진짜 큰일날 뻔했어요. 기상호는 성준수가 지겹게도 들은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성준수는 자연스레 지긋지긋하다는 티를 냈다.

"그런데 그 이상한 호칭은 뭐냐?"

"뭐가요?"

"햄이니 뭐니."

"저 지내던 곳은 다 이렇게 불렀는데요."

"어디서 살았길래."

"그냥 뭐…, 있어요. 멀리서 와서 그래요."

"아래 지방인가. 억양이."

"아, 네."

 

대화가 어색하게 뚝뚝 끊겼다. 첫 임무 때 성준수에게 호되게 혼난 기억 때문인지 기상호는 성준수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 성준수가 한 가지 질문을 더 얹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았냐? 나 없어진 거 그 상황에서 아무도 몰랐을 텐데. 그 질문에 기상호의 표정이 변했다. 얘가 이런 분위기였나. 성준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냥 쎄했어요. 저 감은 좋아서요. 그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믿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기상호가 먼저 물었다.

"그때 죽고 싶다고 생각했죠, 햄?"

"……."

"…햄?"

"…아니."

"이 반복되는 상황에 지쳐있긴 하잖아요."

"그걸 나한테 왜 묻는데."

"이상한 걸 느끼는 게 저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근데 왜 하필 나야."

"제 감이요."

"……."

"아니에요?"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함부로 하지 마라."

"안 해요. 준수 햄이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정신 나간 새끼."

성준수는 부러 거칠게 기상호를 밀치고 지나쳐 훈련실로 향했다. 들어온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았을 텐데,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거나. 성준수는 누군가가 방금의 대화를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죽고 싶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주원이 물었을 때는 망설였으나, 조금 전 성준수는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은 악착같이 살아남고 싶다는 사실을.

"준수야, 너 요새 말투가 좀 이상하다?"

"왜 또 시비야, 시발."

"아니, 약간 이상한 남부 억양이 섞였다니까?"

"기분 탓이겠지."

"아닌데. 진짜야."

"그게 뭐가 중요한데."

"너 걔한테 옮은 것 같다. 그 기상호인지 개상호인지."

"사람 성이 개일리가 있겠냐, 병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농담을 못 해요, 아주."

언제나처럼 맥락도 없는 대화가 공방전처럼 이어졌다. 끝없는 반격 끝에 내민 전영중의 결론은 하나였다. 기상호 걔, 좀 이상해. 아마도 원래 내뱉고 싶은 본심이었을 것이다. 성준수의 억양이 이상하니 마니하는 것은 물꼬를 트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성준수도 기상호가 평범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전영중이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괜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싶었다. 전영중이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것과 별개로, 매번 시비 거는 상대에게 져줄 정도로 성격이 곱진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이유를 캐물어도 전영중의 대답은 하나였다. 아무튼 이상해. 성준수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야 의미심장한 대화부터 순식간에 싸하게 변하던 표정까지 낱낱이 보았으니 그렇게 느낀다 쳐도 전영중은 대체 무엇을 보고서.

"전영중, 내가 보기에 이 센터에 정상은 없어. 여긴 그냥 정신병동이잖아, 거대한."

"준수야,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뭔데."

"하, 됐다. 그런 게 있어."

그러더니 전영중은 쌩하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요새 아무리 생각해도 전영중의 꼬라지가 이상했다. 지난번부터 오늘까지 계속. 뭐야, 꼭 질투하는 애새끼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성준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전영중, 저 미친 새끼….

한동안 성준수에게는 아무런 임무가 떨어지질 않았다. 센터 내에서 쳇바퀴 굴러가듯 고여있는 삶이 반복되었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다는데, 센터 안에만 있으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가 없었다. 상부에게 현장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이상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함만 커졌다. 성준수는 불안 따위에는 시달릴 일 없는 위인이었으나, 결국은 사람인지라 시간이 갈수록 걱정스럽기는 했다. 말하자면 상부의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모호함에서 오는 신경증적 불안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갑작스러운 호출 알람이 떴다. 임무 나갔다가 겨우 돌아온 전영중과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단순한 호출음이 아닌, 스크린 화면이 뜨며 참모회의실로 올 것을 알렸다. 정말로 뜬금없는 타이밍과 장소였다. 빈둥거리지 말고 언제쯤 임무 나갈 거냐며 성준수를 놀려대던 전영중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준수는 더 황당한 표정이었다. 전영중보다 센터에서 오 년은 더 굴렀는데, 참모회의실로 직접 불려 간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전영중을 뒤로한 채 지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임무에 나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위에 약간의 불안과 의심이 더해졌다. 분명 예삿일은 아닐 것이었다. 괜한 긴장으로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센터장의 양옆으로 간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센터장은 성준수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자마자 센터장은 덜컥 본론부터 내뱉었다.

"성준수 중위, 섹터 1의 13구역으로 가줘야겠네." 

성준수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섹터 1의 13구역. 수도를 제외한 섹터 중 가장 안전한 곳. 그중에서도 가장 변방 산골짜기인 13구역. 그곳은 전쟁과는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시골 마을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였다. 실상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종교 단체였다. 선리선(仙利神)을 모시는 선화교(仙化敎). 번듯한 이름이었으나 까놓고 말하자면 사이비였다.

사이비 종교 단체는 웬만한 기업보다 마케팅을 잘했다. 그쪽 판도 사람 데리고 하는 장사라, 사이비라는 이름보다는 번듯하고 그럴싸한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믿음은 물자가 되고 노동이 된다. 믿음 하나로 돈보다 값진 것들을 품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치밀했다. 그 규모와 행동 면에서 조직범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선화교는 2178년 첫 교주 공병조가 일장 연설을 벌이면서 성립되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공병조는 자신을 세속적인 상식에 구애되지 않고, 고통이나 질병도 없으며 죽지 않는 선리(仙利)의 사자라 칭했다. 신도들은 대부분 공병조의 일가친척들이었다. 평소 다른 건 별 볼 일 없어도 말솜씨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았던 교주의 교리 주입에 모두가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교주는 운도 좋았다. 발원지는 섹터 4였으나 창교 이후 약 30여년 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근거지를 섹터 1으로 옮겨왔다. 평화로운 외곽에 마을을 형성해 연설회를 열자, 신도들이 떼거지로 유입됐다. 교도들은 곧 세상에 큰 위험이 닥칠 것이며, 선仙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에 벌벌 떨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쯤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 신도들은 큰 위험이 다가오리라는 교주님의 말이 맞았다며 믿음을 굳건히 했다. 선화교는 점점 더 덩치를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센티넬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식에 구애되지 않는 신비한 능력을 쓰는 자. 가이딩을 통해 죽지 않는 자. 그들이 말하는 선리신에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는 존재였다. 교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교리를 은근슬쩍 손보았다. 어느새 선화교는 센티넬을 신으로 모시는 자들이 되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자신 또한 선리의 능력 일부를 부여받을 수 있다 말에 그들은 맹목적으로 실체 없는 선리신을 모셨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김하준이 부주교를 맡으며 그 교리는 더욱 확산되었다. ESPT를 신뢰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도 선화 마을로 이주해 와 신도를 자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화교는 제법 큰 마을을 구축해 냈다. 믿음은 역병처럼 퍼졌다. 일개 인간인 공병조도 사랑했던 이들이 센티넬이라고 신으로 모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참모들은 성준수에게 그런 사이비 종교의 중심으로 걸어들어가라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왜 하필 선화교인지, 왜 이제야 건드리려는지, 그리고 왜 하필 저인지. 불만스럽게 입을 떼려는데 제법 두께가 있는 서류가 내밀어졌다. 몇 장 넘겨보니 사건 개요라 크게 적힌 소제목이 보였다. 성준수가 고개를 드니 마저 읽어보라는 눈짓을 했다. 제법 오래 전부터 촘촘한 타임라인으로 이루어진 사건 개요였다. 성준수는 개중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골라 읽었다.

2234년 1월 15일, 섹터 1-13에서의 공사 착수 확인.

2234년 6월 7일, 대규모 시설 완공 확인. 용도 미확인.

2234년 6월 10일, 다수의 미성년자 실종 사건 발생.

2235년 4월 26일, '교주' 공병조와 '부교주' 김하준 신상 확보.

2236년 8월 9일, 불법 실험 강행 및 마약 투여와 관련한 증거 입수. 더욱 확실한 자료 확인 필요.

요컨대 선화교 잠입 작전의 목적은 분명했다. 몇 년 전부터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실행이 자행되어 오고 있으니, 그와 관련한 직접적인 현장 증거를 수집하고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것이 성준수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뒷장까지 빠르게 훑어보니 언제나처럼 따라붙는 센티넬 서약과 함께 몇 줄의 세부 조항이 붙어 있었다. 이능력 사용에는 제한이 없으나 상황에 따라 국가에 의한 어떠한 보호나 지원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들키면 혼자 죽으라는 소리였다.

"저 못합니다."

참모들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성준수는 고개를 깔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고 있었다. 장시간의 불편한 대치 끝에 센터장이 운을 뗐다. 성준수 중위, 요새 그렇다 할 실적도 없던데…,

"여동생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응하지 않으면 반란 분자로 여기겠다. 너와 네 가족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그 한 문장에는 보다 깊은 층위의 뜻이 담겨 있었다. 말투는 걱정스러웠으나 협박과 다름없었다. 성준수는 금방이라도 욕이 나올 것 같아 입술만 짓씹었다. 결국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더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성준수는 섹터 1의 13구역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움이 많은 자는 약한 자가 아닌 지킬 것이 있는 자였다.

하 씨발. 성준수는 조용히 욕을 읊조리며 호버에서 내렸다. 억센 인상의 사내 둘이 길을 막고 용건을 물었기 때문이다. 신현민입니다. 선리님을 따르고자 그분의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성준수는 센터에서 마련해 준 신분의 이름을 대며 말했다. 장정 둘은 무언가를 속닥이더니 한 명이 마을 위쪽으로 사라졌다. 성준수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계속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다. 남은 사내 한 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왜 사람 말을 씹고 지랄이냐며 욱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이를 꽉 깨문 탓에 핏대가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인이 성준수에게로 다가왔다. 아이고, 선사仙師님. 성준수를 지키고 섰던 사내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준수에게로 다가와 시선을 곧게 꽂았다. 혹여나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신현민 씨, 연락은 받았는데 어찌 이리 늦게 오셨나요."

"그…, 전쟁으로, 아니 세상이 흉흉해서…. 아무튼 그걸 피해 돌아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늦었다고 쫓겨나고 막 그런 건 아니죠?"

"선리신을 향한 믿음만 있다면 선화 마을은 언제나 열려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선사…님?"

사내가 부른 호칭을 떠올리며 인사를 했다. 역시 형제님이라 그런지 바로 알아본다며 노인은 작게 웃었다. 마을로 안내해 줄 것인지 따라오라는 말했다. 성준수는 그것에 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붙였다.

'감사하긴 개뿔. 좆이나 까라 해.'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고 있을 때 노인이 돌아보며 신현민의 이름을 불렀다. 성준수는 제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나 싶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준수는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어서 좌불안석이었다.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몰고 오신 호버는 선화 재단에 귀속되어 공용으로 사용될 겁니다."

"아? 아아, 네."

성준수는 노인을 따라가며 최대한 마을의 외관을 외워두려 애썼다. 정말 외딴 산골짜기일 줄 알았는데 제법 번듯한 모양새였다. 이제 막 적을 옮긴 이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는지 마을 중심부가 아닌 외곽을 통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 멀리로는 물이 넘실대는 소류지가 보였다. 말 그대로 자급자족의 농촌 사회였다. 그 옆으로는 으리으리한 이층 저택이 보였다. 성준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긴 누가 살아요? 노인이 불경하다며 저택을 가리키는 성준수의 손등을 내리쳤다. 교주님 사는 곳이니 함부로 삿대질도 하지 말라나. 그럼 부주교님은 어디 사냐 물었더니 답이 없었다. 아직 믿음보단 의심이 많이 가는, 방금까지 외부인이었던 사람에게는 무엇 하나 쉽게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성준수가 안내받은 곳은 기도당이었다. 지낼 곳은 언제 알려주냐 물었더니 당분간 기도당에서 먹고 자며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난색을 표하자 몸 겨우 뉘일 작은 방이며 구색은 갖춘 샤워실은 있으니 걱정말라는 얼토당토않은 대답만 돌아왔다. 심지어 몇 시간 뒤 오후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인사도 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안내받았다. 그러니 목욕재계하고 기다리란다.

성준수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거창한 욕실 내어주는 것도 아니고 샤워부스 하나에 밀어 넣고 목욕재계라니. 심지어 갖고 있던 통신 기기는 모두 빼앗겼다. 통신 기기 뿐만 아니라 옷도. 속세의 것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준수가 보기엔 받은 옷도 빼앗긴 옷과 별 다를 것 없는 재질이었다. 하긴, 이런 게 다르다고 믿고 사니 사이비에 심취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성준수는 기도당 내부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렌즈 카메라는 빼앗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촬영된 영상은 실시간으로 센터에 전송되고 있을 것이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기도당을 일찍이 찾아온 2대 교주 백호찬과 인사를 나눴다. 백호찬은 1대 교주 공병조에게 안의 혀처럼 굴어 교주 자리를 물려받은 희대의 아첨꾼이었다. 물론 그만큼 언변도 뛰어난 자였다. 새로 온 형제님을 반긴다며 가볍게 끌어안는 백호찬에게서는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불법 실험에 마약까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성준수는 기도당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자신을 기도당으로 안내했던 노인이 앉아있었다. 백호찬은 연단에 서서 선리신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성준수는 시큰둥했다. 그들이 말하는 선리신은 센티넬인 자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들킬까 봐 최대한 감동받은 표정을 했다.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선리신이 누구인가. 선리신은 우리의 창조자이며 구원자입니다. 선리신은 섭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들은 탐욕과 야욕에 젖은 죄 많은 미물입니다. 화합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멸망은 우리들의 손으로 불러온 재앙입니다. 우리는 우리네의 손으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다만 너그러우신 선리신께서 자신의 권능을 땅 위에 내려주시니 자멸의 씨앗은 사그라들고 곧 이로움이 있으라. 선리신을 극진히 믿음하여 모실 때 우리들은 타인과 화합할 수 있고 자멸을 방비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선리신의 권능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으며, 그리될 때 속세의 불화를 벗어나 진정한 지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하신선리신이말씀하시길지천에가득한괴로움을외면하지못하여마지막믿음과이로움을널리알릴것이니소읍에신의사자들을여럿보내니의심없이받들라선리의통력으로도모와탐심을소강할것이니저항없이감응하라……선리의 뜻을 받들어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백호찬의 말을 따라 복창했다. 성준수는 자꾸만 구겨지려는 표정을 참으며 함께 복창했다.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다시 장내가 고요해졌다. 백호찬은 뜸을 들이다 성준수, 정확히는 신현민을 호명했다. 성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할 생각이었으나 이내 앞으로 불려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뉴페이스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성준수는 재빠르게 넓은 기도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노인부터 청년까지. 나이대는 정말이지 다양했다. …로운 형제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아주십시오. 우렁찬 박수 소리가 일제히 터졌다. 졸지에 성준수는 없는 말솜씨에 선화교 신자가 된 소감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 저 또한 저기의 품에 온 것을 굉장히…, 뭐랄까 좋게 생각하고….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좆됐음을 감지했다. 그래도 센터에서 육 년간 눈칫밥을 허투루 먹은 건 아니라 이런 위기 상황에는 강했다.

"그…, 선리신께 가까이 오게 된 것이 떨려 말이 안 나오네요.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다시 응원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가까이 있으려니 더욱 그렇다는 말을 더듬더듬 뱉자, 사람들은 그저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구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준수의 이미지를 듣는다면 센터 내 누구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이었다. 굳게 믿는 자들일수록 집단을 공고히 했다. 외부의 의심스러운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그 말인 즉슨, 그들의 집단 안에만 들어갈 수만 있다면 대개 많은 일들을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믿음에 눈이 흐려진 자들의 집단에 들어가는 방법은 쉬웠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된다. 그 정도쯤이야 성준수에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성준수는 기도당에 남았다. 정확히는 남겨졌다. 밖으로 나가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신실한 마음이 증명되어야 문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연단 뒤로 크게 뜬 스크린 화면에서는 끊임없이 공병조와 백호찬의 연설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최소 일주일은 있어야 한다니. 미치지 않는 게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시원하게 가운뎃손가락이라도 들어 보였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옆에 앉아 열심히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사내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이십 대 중후반에 들어선 듯한 까까머리를 한 젊은 남자였다.

경민아, 현민 형제님 잘 살펴드려라. 어어…, 네, 네에! 경민아 빨리 쫌 움직여라! 선사님이라 불리우는 노인이 소리를 빽 질렀다. 가까이 다가온 경민이라는 사내를 보자 왜 노인이 이자에게 자신을 맡기려 하는지 알아차렸다. 제경민은 키가 컸다. 조금 큰 정도가 아니었다. 성준수와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였으니. 허름한 회색 트레이닝복의 바지 밑단은 발목 위를 훌쩍 웃돌았다. 사명감에 번들거리는 눈빛이 불쾌했다. 형제님, 제가 ㅈ, 잘 모셔드릴게요. 이로, 이로움이 되겠습니다. 성준수를 붙잡는 팔의 힘이 억셌다. 그렇게 밖으로 섞여 나갈 틈도 없이 기도당 안에 붙잡혔다. 쉬울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예상보다 더욱 힘든 임무가 될 미래가 뻔히 보였다. 끽하면 국가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사실 주어지는 모든 임무가 그랬다. 그래서 잡는 것보단 놓는 것이 익숙했고 갈구하는 것보단 포기하는 것이 편했다. 센터 내의 모두가 점점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었다. 체념하고 주어진 임무대로 살아갔다. 점점 나의 주체가 내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성준수는 살아 돌아갈 생각이었다. 국가고 정부고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지킬 생각이었다. 성준수에게는 돌아갈 이유가 여럿 있었으므로. 일단 여전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성지수와, 그리고…, 그리고 또…, 전영중. 옆에서는 여전히 미묘하게 음이 나간 찬송가가 들렸다.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해가 일찍 진다. 성준수는 해가 떠 있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데 오늘 저녁잠을 조금 자면서 해가 일찍 진다는 걸 실감했다. 생각해 보니 해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곳에서 편히 누울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거의 십 년간 성준수는 지하에서 잠들거나, 혹은 언제 공습경보가 뜰지 모르는 곳에서 잠들어야 했으니까. 24시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저를 지켜보는 제경민이라는 사내만 아니면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은 편했다.

예배는 매일 있는 것은 아닌지 다음 날 기도당은 적막뿐이었다. 어제는 교주까지 찾아와 크게 예배를 드리던데 일정한 기간이 있냐고 묻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교, 교주님을 뵙는 게 쉬운 일인 줄 ㅇ, 아세요? 무례한 언사였는지 제경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성준수는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겼다. 제 성질머리를 다 참으려니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성준수는 겨우 터져 나오려는 욕을 눌러내고 사과했다. 그제야 크게 씩씩거리던 그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제경민은 나이에 맞지 않게 말투가 어눌하고 행동이 굼떴다. 마치 뇌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도 신앙심 하나는 끝내줬다. 믿음이 없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는 것을. 체격도 비슷하니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능력을 사용하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혹시 몰라 이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최대한 아껴두고 싶었다. 센티넬을 신으로 모시는 곳에서 가진 패를 다 드러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성준수는 입이 험할 뿐이지 이성을 잃고 아무렇게나 덤벼들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사흘이 넘게 지나도 기도당 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제경민은 식사 시간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음식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어딘가에 밖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는데도 공병조의 음성이 귀에 내려앉았다. 위대하신선리신이말씀하시길지천에가득한괴로움을외면하지못하여…. 눈을 감아도 환청처럼 들려올 정도였다. 사이비라 그런지 사상 교육 하나는 제대로였다. 이 방법은 센터에서도 배워가야 하는 거 아닌가? 성준수는 그런 맥 빠지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경민 형제님."

"ㄴ, 네, 네."

"근방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마을이요?"

"네. 새로 왔는데 다른 형제자매님들이랑 인사도 못 하고 기도당에만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해서요."

성준수는 밤새 정리한 문장을 외우듯이 내뱉었다. 제경민은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이쯤만 해도 거의 성공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성준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형제자매님들과 화합 또한 선리신님이 바라시는 것 아니겠어요?"

제경민은 머뭇거렸다. 아, 선사님이 안 된다고 했는데…. 원래 ㄷ, 다들 여기서 지내다가 가시는데…. 불안한지 손가락도 비비 꼬았다. 성준수는 머리가 아팠다. 더 이상 설득할 말은 생각도 안 해놨었다. 말주변이 좋지 않아 임기응변으로 뱉어낼 말을 생각할 수 있을 수준도 아니었다. 형제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여기에만 있으려니 몸에 곰팡이 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성준수는 제경민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제경민은 산만한 덩치로 성준수를 곁눈질하며 우물쭈물거렸다. 성준수는 제경민의 앞에 쭈그려 앉은 뒤 고개 숙인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했다. 이로움이 되셔야지요.

"멀리는 안 돼요. 이 앞, 앞에만 보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제경민은 지내고 있는 작은 방 반대편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먼지 냄새가 났다. 분명 제경민이 잠들었을 때 밖으로 통하는 문을 찾아보겠다고 몇 번 드나든 곳이었으나 특이점을 찾지 못한 곳이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뜬금없는 위치에 놓인 그림 하나였다. 옆으로 밀어도 당겨보아도 꿈쩍하지 않던 그림. 성준수가 그 그림을 유심히 보자 제경민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리님이 우리를 구원하려 내려오신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ㅇ, 아름답죠? 그러더니 그림을 살짝 위로 들어 옆으로 밀었다. 마치 서랍을 고쳐 끼워 밀듯이. 바깥바람이 시원하게 밀려 들어왔다.

기도당은 산 중턱, 그러니까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것 같았다. 저 멀리 뒤편으로 며칠 전 보았던 소류지와 저택이 보였다. 그곳을 빤히 쳐다보다가 함부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곳이라며 핀잔을 들었다. 성준수는 제경민을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가는 것과 얌전히 안으로 들어간 뒤 홀로 나오는 방법을 저울질했다. 산등성이에 위치해 기도당 아래쪽이 훤히 보일 줄 알았는데 뒤편으로 나온 것이라 건물에 가려져 있었다. 성준수가 좀 더 유심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제경민이 거칠게 팔목을 잡아챘다. 그 힘이 제법 거셌다.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악력이 아니었다. 서늘한 표정과 똑바른 발음으로 말했다. 앞에만 보시기로 했잖아요.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첫 번째 방법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제경민의 어깨 너머로 무엇인가가 보였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쯤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의 둥그런 무엇인가가 있었다. 누군가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은색 돔을 보느라 성준수가 움직이지 않자 제경민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들어가셔야죠."

성준수는 치밀어 오르는 신경질을 겨우 참아내고 대답했다. 네, 형제님.

출입구를 알려준 것이 신경 쓰였는지 제경민은 이틀 내내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며 성준수를 감시했다. 무언가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지하 깊숙하게 처박혀있는 제 숙소가 그리웠다. 정확히는 숙소와 그 안에서 저를 맞아줄 전영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전영중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에는 제가 아닌 전영중이 대신 왔다면 잘 해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그가 아닌 자신이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걔는 이런 답답한 곳을 싫어하니까. 걔는 이 정도 밥으로는 배고프다 할 테니까. 걔는, 그 애는, 전영중은. 이상하게 전영중이 온 뒤로는 잠을 잘 잤다. 매번 얼었다가 녹아 흥건히 젖은 물건들을 치우기 바빴는데. 전영중이 오고 나서는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 왜 내가 널 걱정을 하겠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스크린 화면에서 나오고 있는 연설보다도 더 크게.

'나 죽어서 돌아가면 그 새끼 백 퍼 운다.'

그것만으로도 돌아가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생각해보니 여동생부터 전영중까지. 제 주변에는 왜 이리 눈물 많은 사람들이 많은지. 아마도 성준수가 흘리지 못할 눈물들까지 대신 흘려주는 존재일 것이다. 사랑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모든 사랑은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준수는 단 한 번의 진실된 사랑을 하고 싶었다. 끝나지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그와 함께. 언젠가 함께 보냈던 휴가 날처럼. 평범하게. 사람처럼.

그리하여 성준수는 움직였다. 갇힌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말이 좋아 일주일이지 제가 보기엔 그보다 더 긴 기간 동안 갇혀 있을 것 같았다. 이틀 밤을 샌 제경민이 곯아떨어진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완전한 밤이었고, 더없이 추웠다. 성준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다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지 사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하며 성준수는 걸음을 옮겼다. 성준수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개였다. 증거 수집과 피해자 구출. 마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래로 내려가봤자 실험이 강행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두 곳이었다. 소류지 옆의 저택과 산꼭대기 위의 돔. 성준수는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주보다 얼굴 보기 힘든 부교주가 의심스러웠다. 그가 있을 만한 곳은 저 위의 돔밖에 없었다.

"왜 나갔어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제경민이 성준수의 앞을 막아섰다. 성준수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좆 까."

성준수는 이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기도당 안에서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선사니이이이이임!!! 마을이 떠나가라 외치는 제경민의 모습에 놀라 주먹부터 나갔다. 왼쪽 볼을 얻어맞은 채로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산 위로 달려갔다. 씨발, 좆 같네. 이 사달을 냈으니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차라리 얌전히 기도당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실험실을 찾아내야 했다. 성준수의 뒤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앞을 막아서는 인영에 주춤한 사이, 머리에 큰 충격을 느꼈다. 서서히 감기는 시야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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