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타 쫑규쫑

운성적전기隕星的傳奇 1

2024.3.1

🎶 by A

이을 예정은 없지만 백업은 해둠…

규는 말하자면 종이책 파였다. 독서란 적당히 거친 종이에 눌러 쓰인 글자를 음미하며, 오른손으로는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며 살며시 건드리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이미 읽은 페이지를 추억하며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게 맛이다. 촉감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는 온도를 갖고 살아난다. 번거롭게 편집하고 인쇄하는 전통이 아직도 그럭저럭 인기 있는 이유다. 잔꾀 없이 우직하게 종이를 겹쳐 쌓고 엮는 이들의 믿음직함을 규는 좋아한다.

규의 다소 고지식한 취향은 독서의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까지 아우르며 규를 정의하는 특색으로 번져갔다. 반듯하고 바른 문파만이 규를 탄복시켰다. 그중에서도 강호무림을 주도해 온 아홉 개의 유파가 규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무림의 역사가 뿌리깊은 정통 구파의 훌륭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협에 입문한 초반에 규는 소림사의 맨손무술에 감명받아 삭발을 단행했다. 머리를 깎고 보니 너무 편해서 유지하게 되었지만, 수많은 작품을 독파하며 취향은 조금 변했다. 요즘은 하나만 고르라면 무당파에 제일 끌렸다. 화산파의 매력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전부 가끔 꼰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고지식한 정파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규는 바로 그 점을 좋아하는 거였다. 내공을 사상누각으로 쌓는 바람에 곧잘 주화입마에 걸려 실패하는 사파들과 달리 한없이 믿음직한 정파가 최고였다. 절대 위태로워질 일 없는 정파가.

규는 중학교 시절의 질풍노도를 무협소설과 함께 이겨냈다. 그 영향으로 성격이 제법 차분하고 강인하게 굳어졌다. 어찌 보면 학창시절의 여러 경험들보다도, 무협지가 규를 더 크게 바꾸어 놓았다. 어쩌면 농구만큼이나, 어쩌면 심지어 농구 이상으로. 한 사람의 성장은 놀랍고 불가해한 과정이다. 기상학에서는 나비 효과가 실재한다 아니다 하는 갑론을박이 수십 년째 내려오고 있지만, 한 사람이 개화하는 과정 중에야말로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며 중장년 남성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해졌고, 무협 장르도 때아닌 대유행을 맞았다. 정식 출판된 도서부터 아마추어가 홈페이지에 올리는 연재물까지 활발하게 쏟아져 나왔다. 규는 <무림낙성검>이라는 제목의 종이책을 즐겨 읽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나 문체는 양산형이긴 했지만 (규는 무협을 어찌나 많이 읽었는지, 중학생 때 이미 양산형 작품을 판별할 수 있었다) 주인공 설정이 마음에 쏙 들어서 홀딱 반하고 말았다. <무림낙성검>은 명문가의 아들이 적을 무찌르며 성장하는 서사를 중심으로 무림의 세계를 그려낸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대대로 물려받은 재능만이 아니라 훈련량도 엄청났다. 아버지의 실력을 능가하고 무림의 모두가 거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허리와 어깨를 단련하려고 매일 새벽부터 장작을 팼다. 해질녘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좌선하며 안력을 발달시켰고, 어둠이 내리면 돌탑을 높이 쌓으며 심안을 길렀다. 아무리 무거운 검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 숲속 가장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다 짊어지고 바위산을 올랐고, 완전히 몸에 익을 때까지 똑같은 검법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바로 그런 훈련을 하는 아이가 가까이에 있었다. 규와 같은 농구부원이었다. 처음에는 최종수라는 본인의 이름이 아니라 최세종 아들이라고 유명했다. 그러나 곧 농구 실력 자체로 모르는 애가 없게 되었다. 농구부원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까지도, 전교생이 종수를 알았다. 종수가 구사하는 농구는 이미 중학교 수준에서는 탁월했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승리를 거머쥘 채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비좁고 불리한 구석으로 몰려도 슛을 꽂아넣을 각도를 찾아내는 것 같았고, 어떤 적을 만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코치가 시켜서 종수는 농구부원 전체 앞에서 시범을 보이거나, 돌아가며 한 번씩 일대일을 해 주곤 했다. 주로 종수 다음으로 농구를 잘하는 규가 마지막 상대를 맡았다. 연습을 마치고 녹초가 된 규는 코트 한쪽에 앉아 땀을 식혔다. 게토레이를 마시며 쉬고 있으면, 부원들이 전부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남아서 더 연습하는 종수를 관찰하는 각별한 즐거움이 훈련의 보상으로 따라왔다. 요즘 종수는 왼쪽 돌파를 집중적으로 연마하고 있었다. 연습하는 종수는 늘상 과묵했고, 대개 혼자였다. 종수와 호적수를 이루어 줄 상대가 장도중 농구부에는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종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세상에 말 없는 공과 자신만 남은 것처럼 연습을 했다. 규가 쳐다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 학년에 올라오면서 규와 종수는 같은 반이 되었고 라커도 바로 옆 칸을 썼지만, 그 정도로는 종수와 특별히 친해지기엔 불충분했다. 종수는 남들과 쉽게 허물없이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마 규에 대해서도 개중에 실력이 조금 나은 부원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규는 문득 종수의 체형을 눈여겨보았다. 허리가 가늘고 다리가 긴 프로포션이었다. 아직 중학생이라 근육이 제대로 붙기 전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면이 더 커 보였다. 외탁을 했을 것이다. 가끔 농구부에 간식을 사다 주거나 종수를 픽업하러 오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본 일이 있었다. 종수는 그분을 빼닮았다. 탱글하게 윤기 흐르는 곱슬의 칠흑 같음과, 뾰족한 코끝과, 곧은 어깨가.

마침내 가상의 적을 물리친 종수가 뛰어올랐다. 체공 시간이 길어 꼭 새처럼 하늘이 제집인 생물 같았다. 종수는 공중자세를 유지한 채로 슛을 또 하나 던졌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명중이었다.

─── ⋆⋅✰⋅⋆ ───

규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인망이 있다는 소릴 듣곤 했다. 운동부와는 좀체 상관이 없는 반장이며 부반장 같은 걸 초등학생 때부터 곧잘 해왔다. 누구와 크게 충돌한 적도 없고, 쩨쩨하게 규를 시기하는 애가 있어도 번거롭게 원한씩이나 품지 않는 성격이 시원시원하다고들 해서일 것이다.

교무실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쉬는 시간이었다. 교실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울려퍼졌다. 여자애들 몇몇의 비명이 따라 터져나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규는 얼른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고는 예기치 못한 광경에 맞닥뜨렸다. 종수가 교실 한복판에서 멱살을 잡혀 있었다. 한참 작은 애 손아귀에 붙들려 있어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종수는 별 위협은 못 느끼는 듯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종수가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어도, 이전에 반 학생들과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특별히 우호적인 사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안 친해서였다. 굳이 안 건드리는 남남이라서.

규는 딱히 반장이라는 책임감을 갖고 끼어든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자리에 그 상황을 중재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꼈을 따름이었다. 종수와 아주 조금이라도 친분이라고 할 만한 걸 구축한 사람은 농구부인 규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규는 잽싸게 둘 사이로 몸을 끼워넣었다. 종수의 옷깃을 움켜쥔 남자애가 벌게져서 씩씩거렸다. 김형구라는 이름이었다. 비켜, 이규! 아, 비키라고 좀! 이 새끼가 먼저 나한테 개겼다니까. 규는 종수를 향해 눈을 굴렸고, 새침한 대답이 돌아왔다.

“묻는 말에 대답해 준 게 단데 왜 난리인지 모르겠네.”

아마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규는 시원하게 꼬집어 말할 만큼 종수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어도, 종수가 거짓말을 아주 싫어한다는 직감만큼은 갖고 있었다. 김형구의 한쪽 팔을 틀어막으면서 규는 구경하러 빙 둘러싼 학생들에게 물어 진상을 파악했다. 쉬는 시간 직전 교시는 사회 시간이었다. 학생부 주임을 맡아 악랄한 별명을 쓸어모으는 사회 교사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엎드린 종수를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 운동부, 특히 가장 실적이 좋은 농구부에게 교과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게 장도중학교의 불문율이었다. 대신 종수의 등에 대고 뒷자리에 있던 김형구가 속닥거렸다. 넌 좋겠다. 퍼질러 자도 미친개가 짖지도 못하고. 공만 죽어라 던지면 인생 술술 풀리고. 뭐 해 먹고 살지 고민도 안 해도 되고. 마침 그날은 조례 중에 장래희망 조사가 있었다. 진로를 못 정한 아이들, 그러니까 반에서 규와 종수를 포함한 극소수를 빼고 거의 모두가 고민하면서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을 가지고 난 차였다.

김형구가 그렇게 단정지었을 때. 넌 인생살이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겠다고, 아무 장애물도 없지 않으냐고. 요컨대 울퉁불퉁한 지상의 인간이 아니라 매끄러운 천상의 천사처럼 사는 게 아니냐고 매도했을 때. 아마 거창한 악의는 없었을 거고 그냥 생각난 대로 말했을 게 뻔했다.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좋아하는 걸 일찍 찾아서 부럽다는 호감의 표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아마 종수를 부러워하는 것만큼은 진심이었을 터였다. 중학교 교실엔 무례할 정도로 솔직한 애들이 많았다.

규는 계속 주먹을 휘두르려는 김형구의 반대쪽 팔도 붙잡으며 종수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종수가 김형구의 말에 뭐라고 대꾸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종수는 설명하기 귀찮은지 딴청만 피웠다. 종수의 시선은 규와 김형구의 머리 위를 지나서 열린 창밖으로 나갔다. 운동장의 농구골대 꼭대기가 내려다보일 터였다. 묵묵부답인 종수 대신 주변에 앉아 있던 애들의 증언을 조합한 결과는 이랬다. 종수는 이런 논조로 말했다.

“내가 부러우면 너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 앉아서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농구하는 만큼 너도 뭐라도 해 봐. 이제라도 운동을 해 보려면 늦게 시작했으니까 나보다 더 많이 연습하든지. 공부를 할 거면 한 과목 붙잡고 내 연습량만큼 시간을 채워 보든지. 좋아하는지 아닌지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게?”

그렇게 말한 종수도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쯤에서 김형구는 빈정이 상해서 종수의 등에 대고 꿍얼거렸다고 한다. 이 새끼가 존나 이래라저래라 하네. 그까짓 공놀이 잘한다고 지가 뭐 된 줄 아나. 수업 종료 벨이 울렸다. 종수는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똑똑하게,

“왜? 뭘 해도 좆밥일 것 같아서 쫄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교사가 나가자마자 멱살을 잡혔다.

김형구가 농구부였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것이다. 아무래도 전국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이자 전설적인 선수의 아들한테 함부로 객기를 부렸다가 경력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아먹고 싶은 농구부원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일반 학생은 그렇게 최종수에 대해 약삭빠른 셈을 하며 속박될 필요가 없었다. 종수는 상대할 흥미조차 못 느끼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고, 김형구는 그것만으로 점점 더 열을 받아서 발길질을 해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규도 조금씩 속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일이 그렇게 흘러가지만 않았더라도 규가 둘 다 작작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든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에 찬물을 끼얹어 정지시켜 버리기 위해. 그러나 규가 고함을 지르려고 심호흡을 들이쉬는 순간에 김형구가 규를 떼어놓으려고 거칠게 밀쳐냈다.

그것이 발단이 되었다. 한순간에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바뀌었다. 규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평소 같으면 금방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겠지만 김형구를 끌어당기느라 한껏 상체가 뒤로 젖혀져 있었던 게 패착이었다. 넘어지면서 책상을 짚으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모자랐다.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책상의 철제 다리에 쾅 부딪혔다. 왼손 약지였다. 눈앞이 새하얗게 날아가는 통증이 일었다. 규는 손가락을 감싸쥐고 몸을 웅크렸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야⋯⋯. 야, 내가 그러려던 거 아니야! 아이씨, 하는 김형구의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겁이 묻어났다. 규가 팔을 놓쳤는데도 김형구는 종수를 때리려던 걸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얼어붙은 종수를 향해 삿대질하고 윽박지르는 게 다였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겨우 고개를 든 규는 종수와 눈이 마주쳤다. 감정 없던 얼굴에 낭패가 가득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우뚝 멈춰선 종수는 폭언을 한 귀로 멍하니 흘리다가⋯⋯, 갑작스럽게 몸을 숙였다. 김형구의 말허리가 뚝 끊겼다. 종수는 규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규를 잡아끌고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일이 규에게는 너무 빠르게 벌어졌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종수를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다가 규는 깨달았다. 종수가 뛰듯이 가는 쪽은 보건실 방향이었다.

규가 처치를 받는 내내 종수는 옆을 지켰다. 약지에서 웅웅 진동하던 통증은 냉찜질을 받으니 서서히 줄어들었다. 손가락 마디가 퉁퉁 부어오르다가, 이보다 더 부풀면 풍선처럼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멈췄다. 보건교사는 골절은 없는 듯하지만 인대가 늘어났을지 모르니 바로 조퇴하고 정형외과에 가라는 당부를 남기고서 자리를 비웠다. 둘의 담임에게 규가 마지막 교시는 빠진다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종수는 거기서 “저도요" 했다. 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동부는 무단 조퇴도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게 관례긴 했지만, 종수가 그런 특별 대우를 남용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종수야, 왜? 너는 교실 올라가도 되는데.”

“⋯⋯싫어. ⋯⋯좀 이따 너 병원 가고 나면 연습하러 갈 거야.”

종수는 고개를 약간 비껴서 규의 눈을 피했다. 교실에 올라가서 김형구랑 다시 마주치기 싫은 건지, 자기 때문에 규가 이렇게 됐다는 죄책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규는 묻지 않았다. 물론 진짜 연습하러 가려는 걸 수도 있었다. 종수라면 너끈히 가능했다.

규는 보건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종수는 계속해서 멀거니 서 있었다. 흘금흘금 규를 내려다보며. 그 눈길을 마주 받다가, 규는 처음으로 인식했다. 종수의 속눈썹은 아래가 더 길다는 걸. 깊고 까만 눈매를 따라 그려진 쌍꺼풀, 짙고 가지런한 눈썹. 언짢음이 무게를 더해 꼬리가 내려간 입술과 갸름한 턱. 속눈썹에 닿을 듯이 내려온 앞머리가 얼굴 전체에 옅은 음영을 드리웠다. 

규는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라는 기시감을 느꼈다. 물론 반에서도, 농구부에서도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그게 아니었다. 현실의 이면에서 똑같은 얼굴을 만난 것만 같았다. 깨자마자 흐릿해진 어젯밤의 꿈이라든지, 무의식에만 기거하는 환상이라든지, 윤회가 정말 있다면 어느 전생에서라든지. 그러나 아스라한 꿈결을 명확하게 짚을 수는 없었다.

종수가 김형구한테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완벽하게 꿰뚫어볼 수는 없었다. 김형구에게 그냥 웃어 주거나 농담으로 넘겼더라면 종수는 같은 반 학생을 적으로 돌리는 대신 친구로, 어쩌면 만에 하나는 팬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에 배어 있는 적개심만 기민하게 읽지 말고 상대의 미숙함을 선해하려고 노력했다면. 규에게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을 일이었다. 주변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규의 입술에서 조심스러운 질문이 빠져나갔다.

“종수야,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 너도 뭐가 됐든 열심히 해 보라고?”

“⋯⋯어.”

“그렇게 말하면 싸우게 되잖아.”

종수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누르듯 뱉었다. 바지 주머니께에 떨어진 양손이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그런 애한테 알랑거리기 싫은 게?”

거짓말은커녕 마음에 없는 입에 발린 말조차 도저히 못 하는 종수의 청결함은 거의 괴벽에 가까웠다. 분명 그것 때문에 앞으로 숱한 적을 양산할 것이다. 오늘은 조퇴로 일단락된다 해도 김형구 같은 애들은 앞으로도 발에 챌 만큼 많을 것이다. 비슷한 일화가 반복되다 보면 종수를 정말 진심으로 증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거나 부당한 비난에 맞서게 되겠구나. 규는 희미한 계시를 받은 듯이 그렇게 예감했다. 종수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기시감과 마찬가지로 근거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자기만은 종수의 편으로 끌려가는 것도 느꼈다. 나머지 모두가 종수를 미워한다고 해도. 물살의 반대 방향으로, 태풍의 결을 거슬러서.

“아냐, 네 잘못 아니야.”

규는 기꺼이 그대로 끌려가기로 작정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보기엔 종수 네가 이긴 것 같아.”

종수는 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속 말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규의 어깨에 은은한 무게로 얹혔다. 종수는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서 가늠하고 있었다. 규가 자기 편을 들어 줄지. 규는 안전한 사람인지. 규는 찬찬히 말을 골랐다.

“종수 너는 제일가는 노력파니까 틀림없이 강호를 제패하고 초절정고수의 칭호를 획득할 테니까. 네게 샘을 내거나 음해하려 드는 세력은 절대로 원하는 걸 못 얻게 되어 있어. 네가 계속 너 자신으로 남아 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잡졸이 아무리 네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종수는 팔짱을 낀 채로 신중하게 규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학교 교표를 왼쪽 포켓에 금술로 수놓은 하복 셔츠 자락이 따라 나부꼈다. 이유 없이 토라진 듯한 몸짓이었지만, 사실은 표정을 숨기려는 것에 가까웠다. 만족감이 종수의 입가 끝을 살짝 끌어올리는 게 똑똑히 보였으므로. 규는 그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소리가 날 정도로. 상체가 흔들려서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종수는 눈동자만 굴려서 규의 웃음을 탐색하더니, 이런 평을 내놨다.

“너 웃을 때 사회 교과서처럼 생겼어.”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

“표지 그림 몰라?”

“아, 수막새?”

“그게 뭔데.”

“표지 그림. 웃고 있는 기와 이름.”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아.”

“표지에 그림 옆에 봐봐. 같이 적혀 있잖아. 종수는 교과서를 진짜 안 읽는구나.”

“흥.”

그날을 기점으로 종수는 마음을 열었다. 빗장을 질렀던 대문이 활짝 젖혀졌다. 규는 하루하루 종수와 부쩍 가까워졌다. 서로에게 쏟아지듯이. 열다섯 살 친구 사이에는 벽이 하나 녹아내리는 것만으로 함락이었다. 나는 네 세계를 마음껏 드나들고, 너도 내게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고. 어른들은 겹겹이 꺼풀을 벗기고, 거리를 계산하며 물러나고, 하나의 벽을 무너뜨리자마자 또다른 벽을 세웠다. 그러나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더라도 대체로 중학생 때까지는 내가 고른 애와 가까워지는 데 속도 조절 따위는 없었다. 규와 종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수는 두 명 몫만큼 아이 같았고, 규는 어른스러운 축에 들었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청소년이었다. 나중에 어떤 벽이 솟아올라 둘 사이를 가로막든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었다. 바보 같은 어른들의 일. 지금은 아무 저항도 없이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나이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애가 내 정신적인 샴쌍둥이라고 느끼는 나이.

다른 말로는 단짝이었다.

종수는 단짝에게만 여러 특권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일대일이었다. 어느 날 코치가 떠나고 나서 종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규에게 바짝 다가왔다.

“일대일 또 해. 앞으로 매일 훈련 마지막은 너랑 일대일 할 거야.”

제안이 아니라 숫제 통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뛰어난 종수가 매일 특훈을 함께해 주겠다는데 규가 응하지 않을 이유도, 도리도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규보다 몇 수 위의 실력을 지닌 종수가 재미없어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친한 건 친한 거고 농구는 농구니까. 동갑인데다 심지어 규가 생일이 빠른데도, 농구에 있어서는 사형과 사제에 가까웠다. 자연스레 규는 자신이 무공을 일방적으로 전수받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갈수록 그 반대가 되었다. 막상 일대일에 주력하면서 완전히 밀착해서 종수의 농구를 속속들이 파헤칠 기회를 받아 보니, 종수는 규의 생각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낱 중학생이니 당연했다. 일대일은 점차 규가 종수의 약점을 같이 찾아 주는 훈련으로 변모해 갔다. 그걸로 규는 교실에서, 우정에서, 삶에서만이 아니라 농구에 있어서도 종수에게 쓸모 있어졌다. 규에게 수를 읽히거나 블락을 당하거나 리바운드를 먼저 잡지 못할 때마다 종수는 파르르 떨며 못 견뎌 했다. 종수는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미워했다. 아무도 완벽할 수는 없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사실을. 그런 애였다.

─── ⋆⋅✰⋅⋆ ───

장도는 중학교 때부터 훈련 강도가 높기로 전국에서 한 손에 꼽혔다. 연습이 없는 오후는 일 년에 몇 번 안 될 정도였다. 경기가 줄줄이 잡혀 있는 방학을 앞두고 체력관리 차원에서 아주 드물게 쉬는 날이 주어졌지만, 규와 종수는 둘만의 일대일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행했다. 그러고서야 하교길에 올랐다.

종수는 규를 어찌나 믿는지, 눈을 감고 걷기도 했다. 실내도 아니고 바깥에서 헛디디거나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가끔 보면 은근히 치기도 있고 장난기도 넘쳤다. 화단과 인도를 가르는 경계석 위로 조던 30 두 짝이 성큼성큼 올라갔다. 장미목 이파리가 종수의 발목을 스칠 때마다 규는 손을 잡아 줘야 하나 싶어졌다. 덤불 속에 가시가 있을지도 모르니 내려오라고 해야 하나. 종수는 찔려서 아파하는 기색은 없이 그저 싱거운 곡예에 심취해 있었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길래 규는 종수를 그대로 놔두었다.

“종수야 나 심심해. 뭐라고 말 좀 해 봐.”

“난 아닌데. 니가 알아서 얘기하든지.”

점박이 화강암으로 만든 경계석은 인도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규는 셰헤라자데가 되어 요즘 읽는 책 얘기를 시작했다. 무협 이야기라면 끝도 없이 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재밌게 보는 소설이 있다? 우리 일학년 때부터 나왔거든. 제목은 무림낙성검이야. 주인공은 절정호신공을 익혀 나가고 있지. 말을 잘 타는 심복을 하나 두었고. 심복은 주인공이 어딜 가나 동행했어. 하지만 주인공이 강호를 헤매다 버려진 무학관을 찾아 폐관수련을 할 때만큼은 범접할 수 없었대. 단식에 들어간 주인공을 염려해서 전각의 벽에 갈라진 틈을 찾아서 벽곡단과 물을 넣었지만 그것조차 먹지 않았다네. 폐관수련이 이백삼십사일째 되는 날 흐르던 적요함에 그만 걱정을 못 이겨 문을 열어 보니. 글쎄 주인공은 상형문자로 적힌 비급이 가득 꽂힌 서가를 찾아내어⋯⋯. 종수야, 듣고 있어?

종수는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고갯짓하며 폴짝 뛰어내렸다. 도리질을 한 건지 끄덕거린 건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둘은 곧 종수네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다. 종수는 익숙하게 아파트 현관 로비 비밀번호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종수네 집은 거실이 무척 넓었고 푸르른 통창으로 남산을 넘어 서울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내다보였다. 잎사귀가 넓고 싱그러운 화분이 많아 거실은 울창한 삼림 같았다. 종수 어머니가 가꾸신다는 숲이었다. 규는 나중에 종수도 식물 키우는 취미가 생길까 막연하게 궁금했다. 농구 말고 무슨 취미가 생기려나.

둘은 티비를 틀고, 널찍한 스웨이드 소파를 놔두고 바닥에 앉았다. 엎드렸다가 뒹굴거리기도 했다. 영어 수행평가를 하러 온 거였지만 농구할 때와는 달리 미루고 미적거리며. 어려운 수행평가는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받은 한 페이지짜리 유인물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과제였다. 규는 받아서 가방에 넣었고 종수는 깔고 엎드려 잠을 잤다. 코트에서 맑게 깨어 있고 수업시간에 자는 게 엘리트 운동선수의 도덕이었고, 종수는 날이 갈수록 도덕적이었다. 그래도 영어는 종수가 유일하게 복습하는 과목이었다. 종수는 더플백 앞주머니에 대강 쑤셔넣어 귀퉁이가 구겨진 프린트를 꺼내 놓더니, 방에 들어가 사전을 가져왔다. 둘은 프린트 위로 머리를 맞댔다. 종수는 사전을 몇 번 들추지 않고도 전부 해석해 냈다. 첫 번째 단락은 <어린 왕자> 발췌문이었다.

떠나는 날 아침, 왕자는 별을 깨끗이 정돈했다. 그는 활화산을 정성 들여 청소했다. 어린 왕자에겐 활화산이 둘 있었는데 아침밥을 데우는 데 꼭 알맞았다. 사화산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늘 말하길, “누가 알아!” 그래서 그는 사화산도 똑같이 청소했다. 청소만 잘 해 주면 화산들은 서서히 규칙적으로 불타올라 폭발하는 일이 없다. 화산폭발은 굴뚝의 불길과 같다. 물론 지구 위에 사는 우리들은 너무 작아 화산을 청소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화산폭발 때문에 자주 곤란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종수가 주방 쪽 베란다로 나갔다. 손님이 왔다고 제법 분주한 게 재밌었다. 박스 뜯는 소리가 들리더니, 규의 눈앞에 귤이 내밀어졌다.

“아빠한테 선물로 들어온 거야. 예전에 같이 뛰던 동료가 제주도 출신이래.”

언뜻 봐도 최상품 과일이었다. 아주 둥글고, 농구공만 하지야 않지만 적어도 테니스공보단 훨씬 크고, 녹색이 선명한 꼭지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무엇보다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금박 띠를 둘렀다. 규는 그만 거울을 보는 기분에 사로잡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귤 나처럼 생겼지? 헤어밴드 두른 게.”

“뭔 개소리야. 넌 이렇게 우툴두툴하지 않아.”

“어?”

“너는 매끈매끈하게 잘생겼다고.”

종수가 너무 대놓고 그렇게 말해서 규는 얼른 대꾸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정신이 어리벙벙했다. 경계석 위를 걷던 건 종수인데 규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 같았다. 종수는 규의 머리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머리카락이 고슴도치처럼 보송보송하게 올라오기 전이었다. 종수는 만져 보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을 뻗는 대신 종수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네 머리는 파르스름해. 왜 머리카락은 까만데 깎으면 파랗지?”

“하하, 글쎄. 재밌는 질문이네.”

“너 러시안 블루 알아?”

“아니, 그게 뭔데?”

“우리 엄마가 예전에 키우던 고양이야. 아빠랑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여섯 살 때까지 같이 살았어.”

종수의 목소리는 아무 긴장 없이 편안했다. 이 목소리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다른 애들한테 종수가 하는 말이란, 물으니까 겨우 하는 대답이거나, 김형구한테 그랬던 것처럼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는 주장이었다. 종수가 아무 판단도 들어 있지 않고 아무 목적도 없는 말을 가끔이나마 종알종알 풀어놓는 또래는 규밖에 없을 것이다.

티비에서는 줄곧 영어 채널이 흘러나왔다. 종수는 집에서도 국제방송을 보는구나, 규는 넘겨짚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종수가 교과목 중에 영어만 그나마 신경 쓰는 이유와 같았다. 가정집에 걸리기엔 몹시 거대한 벽걸이 화면 속에서는 전자기기 회사의 창업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검정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고 회색 운동화를 신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가였다. 마치 운동부가 유니폼을 입듯이.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는 자신이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인답게 제스처가 풍부해, 한 손이 허공을 바삐 날아다녔다.

고객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만약 소비자들에게 뭘 갖고 싶은지 물어봤더라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을 겁니다. “더 빠른 말이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요. 그러니 아직 페이지에 적히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입니다.

지난해 그 회사는 새로운 핸드폰을 내놓아 미국 전역이 들썩거렸다. 아직 한국에는 수입이 되지 않았다. 그 핸드폰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데, 머나먼 미래의 일처럼 들렸으며 왜 그래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농구부 공지사항은 다 육성으로 충분히 전달되었다. 규와 종수는 아주 가끔, 둘이서 문자를 했다.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규의 문자함에는 종수가 새벽녘에 보낸 문자가 날아와 첫눈처럼 소복소복 쌓였다. [야] [자?] [오늘 슈퍼문이래] 종수의 문자함에도, 규가 다음날 아침에 보낸 답장들. [그래? 자느라 못 봤네. 아깝다] [그런데 종수 너 늦게까지 못 잔 거야?] 다른 문자들이 지워질지언정 이 문자들을 지우는 건 미루고 미뤄졌다. 문자함은 각자 하나씩 자기만의 방을 가졌는데도 분명히 둘이 함께 사는 요새였고, 특별한 봉화를 올리는 성이었다. 앞으로도 똑같은 방식으로 연락하게 되려나. 언제까지나 연락을 주고받겠지, 우리는? 종수와 사는 나라가 갈리더라도.

언젠가는 작별한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매사에 납득이 빠르고 산뜻하던 규는 굳이 입 밖으로 내어 확인하고 싶어졌다.

“종수,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 갈 거지?”

“당연하지.”

여상한 대답이 규를 돌아보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한치도 규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종수에게 정점에 오르지 않는 결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종수라면 미국에서는 또 얼마나 잘 해낼까. 언제까지나 적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겠지. 규가 종수에게 쏟아붓는 신뢰는 바닥 없는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끝도 없이 쏟아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수가 넣는 슛의 개수만큼 무수한 횟수로.

둘은 생택쥐페리의 다른 소설에서 따온 문단 몇 개를 더 번역했다. 이번엔 사전이 더 자주 필요했다. 지루한 수행평가를 끝마치고 나서 종수는 계속 티비를 보았고, 옆에서 규는 무협지를 읽었다. 주인공의 비무대회 대활약상에 푹 빠져들어서. 한밤까지 이어진 대회에서 주인공은 마지막 적을 꺾고 우승했다. 주인공이 검을 높이 들어올린 순간, 규는 숨을 죽였다. 드디어 <무림낙성검>이란 제목의 내력이 밝혀지고 있었다. 

주인공의 등 뒤에서 새까만 밤하늘이 일순 반짝이더니,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군중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온 늙은 현자가 주인공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무림에 떠돌던 전설을 알려주었다. 천하제일의 검존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 별조차 감격하여 떨어진다고 했다. 검존의 무공이 눈부시도록 찬란하기 때문에 무림의 어떤 것도 그 빛을 당해낼 수 없다고. 그리하여 무림에서는 검존이 유일의 별이 된다. 별들의 죽음은 새로운 별의 탄생을 기리기 위함이다.

2008년이었다. 미국에서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한편 유수의 금융기관들이 파산에 근접하면서 그간 호황을 누려 온 경제가 주춤거렸다. 누군가는 숭례문에 불을 질렀고, 몇 달 후 광화문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이 물결을 이루었다. 멜라민 파동의 여파로 마트에서는 서울우유가 연일 동이 났다. 소유스를 타고 한국인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공학자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수영선수가 여덟 시 뉴스를 번갈아 장식했다. 가는 곳마다 텔미 아니면 쏘핫이 들려왔다. 쉬는 시간이면 여자애들은 화장실에 몰려가서 아이라이너를 눈두덩이까지 칠하던 해였다. 남자애들은 나루토를 따라한답시고 엉망으로 인을 맺으며 사스케에에! 하고 외치던 해였다. 그리고 이규가 깨우친 해였다.

2008년의 초여름, 거실에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였다. 티비에 눈길을 고정한 옆얼굴을 따라 햇빛이 첨예한 선을 그렸다. 종수의 이마에서 코끝과 턱을 지나는 테두리가 금환일식의 띠처럼 빛났다. 햇빛이 데워 놓은 옆모습을 바라보던 규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강렬한 빛의 선을 따라 깨달음이 흠뻑 쏟아져 들어왔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규는 수천 번의 생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영겁 속을 헤매고 달려온 것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 닿기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나면 바로 알아보게 된다. 아하.

너로구나. 내가 사랑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 ⋆⋅✰⋅⋆ ───

규처럼 취향이 확고한 독자도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출판계의 변화 역시 2008년이 시초였다. 웹소설 플랫폼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동네 영세한 서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서점 매대를 빼곡히 채웠던 책들은 하나둘씩 서가를 떠났다. 마치 종이는 공기 중에 녹아 버리고 글자만 남아 차가운 전자기기 화면 속으로 격리된 것처럼. 심지어는 종이책으로 발매되던 소설이 부랴부랴 전자책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었다. 매 권마다 판매량이 급감하는 바람에 실물책 제작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출판사의 속사정 탓이었다. 개중에는 <무림낙성검>이 포함됐다. 규에게는 애석한 일이었다. 계속 따라가려면 별수 없이 이북 플랫폼에 가입해야 했다.

웹소설의 세계는 확실히 대단했다. 슥슥 손가락만 움직이면 못 보던 작품이 체할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요지경이었으니. 취향에 고풍스러운 데가 있을지언정 엄연한 신세대답게 규는 새로운 시대의 독서법에 적응해 갔다. 그래도 내용에 있어서는 손톱만큼도 타협하지 않았다. 여전히 정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만 깐깐하게 골라 읽었다.

종수와의 일대일은 삼 학년이 되어서도 내내 계속되어 마치 둘만의 밀어처럼 발전했다. 규는 다른 부원들은 아무도 모르는 종수의 작은 특색을 수없이 알았고, 그건 종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규는 종수의 몸짓이 하도 눈에 익어서, 첫 발을 내디디는 모습만 보고도 동선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을 보고 태풍을 예보하듯이. 종수는 왼쪽 돌파가 완벽해졌다. 가능한 모든 각도로 달려오며 상대역을 맡아 준 규의 공로가 컸다. 

어느날 함께 공을 카트에 담아 정리하고 나오는데, 볼이 발갛게 상기된 종수가 물었다.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였다. 그날 종수는 규에게 단 한 번도 볼을 내주지 않았다.

“너도 그런 거 있지?”

“어떤 거?”

“가짜 너. 그런데 걔가 진짜인 거.”

“그게 뭔데?”

“난 있어. 작년에 만들었어. 아니, 재작년인가. 걔는 지금 뭐 하냐면⋯⋯.”

종수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근데 이거 너한테 처음 알려 주는 거야.”

특별한 사람에게만 고백하는 비밀처럼 종수는 속닥속닥 말을 이어갔다. 규는 종수의 열성적인 설명이 끝날 때까지 점잖게 귀를 기울였다. 요컨대 종수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최종수가 하나 더 있는데, 실제 종수보다 훨씬 농구를 잘 한다는 이야기였다. 가슴 속에 묻어 놓은 특급 비밀치고는 카테고리가 좀 이상했다. 보통은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라든지 출생에 숨겨진 사연 같은 게 이런 상황에 더 어울릴 텐데. 규는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범상치는 않았지만, 종수가 범상하면 그게 더 석연찮은 노릇이기도 했다. 천재란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규는 사심 없이 감탄하기로 했다. 종수의 머릿속을 엿볼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고, 종수가 상상친구를 두고 노는 어린애 같아서 앙증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운동하고 난 열기가 식은 만큼 초겨울 추위에 코끝이 달아올라서 종수는 더 앳되게 보였다.

정문에서 쭉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규네 집 방향, 오른쪽으로 꺾으면 종수네 집 방향이었다. 둘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조금 가다 말고 규가 무심코 돌아보았더니, 마침 종수도 똑같이 돌아보았다. 규는 웃으면서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종수도 따라했다. 맨손이 시려 보였다.

“내일 봐, 이규.”

집에 돌아온 규는 컴퓨터를 켜고 <무림낙성검>을 마저 읽었다. 이제는 모든 장면마다 종수를 겹쳐볼 수 있었다. 소설은 정통파를 표방하는 무협지답게 인물의 외양 묘사는 적었고 액션 위주로 서술되어 있었다. 최소 사십 대 아저씨들을 주 독자층으로 하는지라 외모 묘사는 딱히 셀링포인트가 아니었다. 늠름하다거나 무인의 풍모가 두드러진다는 등의 추상적인 표현이 산발적으로 흩뿌려져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는 주인공이 종수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종수가 무협지 속으로 들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종수가 상상하는 또다른 종수가 있듯이, 규가 상상하는 종수도 있는 것이다. 무림의 종수는 검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긴 머리카락을 묶은 금빛 끈이 검의 궤적을 따라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일까. 천하제일인 종수는 별보다도 빛나서 그림자조차 지지 않으리라. 그런 천상의 존재와 규가 막역한 사이라니. 별의 하나뿐인 위성이라니. 별을 향해 추락하지도, 튕겨 나가지도 않고 둘레를 공전하며 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니. 종수를 독점했다는 우월감이 짜릿했다. 마치 태양을 함뿍 머금은 레몬을 베어문 것처럼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 맛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도 종수와 장장 삼 년이나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영영 그 삼 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좋아하는 소설의 완결을 빨리 보고 싶은 동시에 영원히 완결이 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과 비슷했다.

2009년의 겨울에 <무림낙성검> 1부가 끝났다. 기념으로 특전이 포함된 단행본 세트가 발매되었다. 규는 용돈을 탈탈 털어 전부 마련했다. 1부 마지막 화에서는 주인공의 우승을 축하하는 연회가 펼쳐졌다. 항상 절제하며 청신한 생활을 해온 주인공도 연회에 참석해 가장 상석에 앉았다. 왁자지껄 즐거운 담소와 노랫가락 속에 주인공이 축배를 들려는 순간, 어두컴컴한 색의 옷을 칭칭 감은 무리가 들이닥쳤다. 마교의 첫등장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 광경과 함께 1부는 막을 내렸다. 규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여기서부터 과연 어떤 전개가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었다. 한자 제목을 멋들어진 타이포그래피로 뽑은 특전 포스터를 침대 머리맡에 붙여 놓고, 규는 만족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꿈에는 종수가 나왔다. 무협지의 배경이었던 깎아지른 바위산 꼭대기에는 무학관이 자리했던 소설에서와 달리 넓은 광장 터가 있었다. 종수는 나무에 못 박혀서 광장 중앙에 걸려 있었다. 순례자처럼 천 개의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이 종수 앞으로 힘겹게 나아와 돌을 던졌다. 종수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입꼬리를 일그러뜨리고서 묵묵히 인내했다. 규가 그때껏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훨씬 나중에서야 규는 그게 종수의 잠들지 못하는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꿈으로부터 두 해가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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