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NBOY
연하연상
사람들은 보통 동경과 사랑을 쉽게 혼동한다고 말한다. 그게 어린아이일수록 더더욱.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 절반을 학교에서 보내는 애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한정돼 있다. 누구의 첫사랑은 교생 선생님이었고, 누구의 첫사랑은 과외쌤이었다. 넌 아직 어려. 선생님이랑은 사귀면 안 돼. 드라마에서 들어본 듯한 말로 거절당하고 소매를 눈물로 적시는 건 남고딩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직장에서 졸지에 봉변당한 선생님은 어린 놈의 정수리에 촙을 날리는 대신 사회성을 발휘해 상냥하게 달랜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그래서 전영중이 교생이나 선생님을 사랑했느냐? 물론 아니다. 체육특기생인 전영중은 교실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체육관과 운동장에서 동성의 코치에게 굴려지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면 코치들 중 하나를 좋아했느냐? 전영중은 게이 혹은 바이일 수 있으나 코치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그럼 이 섬세한 남고딩의 첫사랑은 누구였느냐.
체육관 정리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버스를 탄다.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제일 먼저 내려 지하철로 달려간다. 스크린 도어가 닫힌다는 안내와 함께 가까스로 열차에 올라타면 그제야 안심하고 핸드폰을 꺼낸다. 광활한 자판 위에서 잠시 멈춰있던 손가락이 검색어를 입력한다. 성준수.
나의 사랑. 나의 빛. 나의 머시기 어쩌구. 나의 안식. 나의 영혼. 나.
오늘도 경기 전에 성준수 하이라이트를 훑어보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린다. 남고딩의 십팔 년(만 나이 적용) 인생에 콱 박힌 사람은 다름 아닌 스피드스터스의 성준수였다.
성준수가 티맥타임을 보고 농구를 결심했던 나이에 전영중은 지상고의 신화를 보며 농구를 결심했다. 그래서 준수 형은 대학 갔나요? 갔다. 프로 갔나요? 갔다. 1라운드에 지명받으며 박수도 짝짝 받았다. 밑바닥 팀의 승리 신화는 성준수의 이름 아래 현재진행형이었다.
군대까지 화끈하게 현역으로 들어가는 성준수를 보고 베갯잇에 눈물자국 찍으며 전영중은 결심한다. 나도 준수 형처럼 멋있는 선수가 돼야지. 그래서 드래프트 때 일 순위로 지명받고, 소감으로 성준수 선수 팬이라고 말해야지. 롤모델이었다고 하는 게 나으려나?
이거 그냥 평범한 팬 아니에요? 실존하기는 하나 소통이 어렵다는 부분에서 전영중의 사랑은 덕질에 가까웠다. 차이점이라면 같은 업계라 만날 확률이 그나마 높다는 거? 그리고 아이돌에 비해 나타나는 장소가 확실하다는 거? 경기장만 가도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코트를 달리며 볼을 던지는 성준수를 볼 때마다 전영중의 미래 계획은 무럭무럭 자란다. 언젠가 성준수와 만나 악수하고, 번호 트고, 그러다 밥 한 번 먹고, 술도 마시고, 호형호제하다, 어쩌면 키스...... 까지도......? 사심 100%의 상상 끝에 전영중은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있잖아. 이대로 계속 농구하면 동종업계 사람이 되는 건데?
제법 긴 세월에 걸친 전영중x성준수 나페스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이건 준수 형 잘못도 있다고 본다. 우리 형은 농친놈이라 애인 한 번 안 만들었으니까. 이거 나한테 여지 준 거 아닌가? 빨리 프로 돼서 고백하라고 꼬리 흔들었는데? 형 이상형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랬는데? 딱 나잖아?—말도 안 되는 합리화까지 마친 상태였다.
"준수 형! 오늘도 멋있었어요!"
문제는 저 같은 놈들이 한 무더기라는 거지. 제가 외치자 선수들 퇴근길을 지켜보던 이들이 제각기 말을 던진다. 형! 오빠! 사랑해요! 절 가져요! 미친, 준수 형이 무슨 죄를 지어서 널 가져야 하는데? 전영중의 눈이 뾰족해져서 굵직하게 외치던 남자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사납게 정수리를 훑으며 범인을 색출하는데 누군가 머리를 토닥인다.
"영중이, 또 왔네?"
경기에서 이기고 평소보다 들뜬 톤으로 성준수가 말을 걸었다. 꺄아아아악! 전영중은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눈꼬리를 말았다. 형, 제 이름 기억해요? 맞다, 저번에도 내 이름 불러줬지. 농구한다는 것도 기억해 줬다. 손이 커서 대학 가서도 더 클 거 같다는 말도 해주고. 형은 관찰력도 좋나 봐요. 형, 진짜 멋있어요. 오늘 로고샷 끝내줬어요. 저 이 경기 직관 못 했으면 울었을 거예요. 저 형 홀로그램 뽑으려고 올해도 트레이딩 카드 다섯 박스 샀어요. 형 트레이딩 카드 작년이 레전드였는데 제 운도 레전드로 없어서 번개장터 뒤져서 겨우 구했어요. 형은 왜 농구도 잘하는데 잘생기기까지 해서 프리미엄이 붙어요? 그치만 형이 인기 많다는 거니까 핫바 참아가며 샀어요. 저 애들이 예절포카 내밀 때 형 트레이딩 카드 내밀어요. 형 카드 넣으려고 쿠로미 카드케이스도 샀어요.
"형 진짜 좋아해요."
그 많은 말 중 하필이면 튀어 나간 게 그거였다. 내가 지금 뭐랬지? 전영중은 너무 놀라 숨도 멈췄다. 실수라고 할까?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이지 않아? 아니, 팬이 좋아할 수 있지. 근데 보통 '진짜'도 붙이던가? 징그럽다고 하면 어떡하지?
얼어붙은 사이, 커다란 손이 머리를 꾹 눌렀다. 정신없이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더니 웃는 소리가 들렸다. 활짝 웃는 성준수가 지척에 있었다. 성준수 선수가... 날 쓰다듬고 웃었어?
"아무리 그래도 인마, 운동한다는 놈이 경기 다 따라다니면 어떡하냐? 열심히 해서 못해도 내 후배는 돼야 할 거 아냐."
형, 저 이미 울 학교 주전이에요. 형이 1학년까지 다녔던 그 원중고요.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자랑스레 말하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포상에 입이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대신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이미 성준수는 다른 팬들에게 사인해 주러 떠났는데도.
그날 전영중은 다짐한다. 무조건 준향대 가야지. 준수 형이 자기 후배가 되어 달라고까지 했는데 당연히 가야지. 성준수가 들었다면 '그 의미가 아니었는데?' 하고 부정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속마음이었기에 막을 방도 없이 그의 폭주는 계속된다. 그때까지만 우리 작별이에요, 형. 대신 형 경기는 중계로 챙겨볼게요.
그날부터 전영중은 경기장도 끊고 성준수가 몸 풀 시간에 저도 허벅지 터지도록 사이드스텝 밟고 슛을 던졌다. 고교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수비 능력이 탑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이를 악물었다. 그쯤 되니 대학 스카우터 눈에 드는 것도 당연했다.
영중아, 네 실력이면 주익대는....... 저 준향대 가고 싶어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성준수 선수가 준향대 전설이지. 근데....... 준향대 갈래요. 주익대에서 연락 왔는데? 준향대요. 마음은 알지만....... 준향대. 진심이니? 준향대. 하....... 준향대.
그렇게 전영중은 제 우상을 쫓아 준향대에 진학했다.
준향대에 가면 성준수 선수가 있나요?
당연히 아니다. 성준수 본체는 수원에 있고, 대신 성준수 선수 과거 사진이 있었다. 이제 색이 날아가기 시작해 어딘가 파르스름해진 사진 속에. 7, 8, 9, 10년 전 농구팀 단체샷에 조그맣에.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지만 전영중은 그마저도 좋았다. 지금은 미디어를 많이 타서 그런가, 부드럽게 잘 웃는데 이때는 고등학생 시절처럼 어색하게 웃었구나.
"와. 좋아하는 선수라도 있나? 한참 보네."
"성준수 선수요."
"아, 준수? 크, 가가 잘나긴 했지."
"성준수 선수 잘 아세요?"
"당연히 잘 알지. 내가 감독이었는데."
그렇구나. 어쩐지 잘 아는 듯 얘기하시더라. ......어? 전영중이 감독을 돌아보았다. 제가 알기로는 준향대에 재작년에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감독이었다는 거지? 성준수는 저와 학번이 10개나 차이 나는데.
이현성은 왜 그런 표정인지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여기 말고. 고등학교."
"......지상 고등학교요?"
"엉."
맙소사. 전영중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줬다. 여기서 주저앉아 하체 부실이냐는 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감독님, 진짜 존경합니다. 우리 준수 형 대학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농구 시작하기도 전의 일에 감사를 외치며 두 손 모아 잡고 주책 떨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다. 감격에 찬 눈에 이현성이 하이 참, 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내 전설이 또 어린애 하나를 이 길로 인도했구만. 약간의 오해를 더 해서.
전영중에게도 썩 나쁜 오해는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현성이 그날 성준수에게 전화했으니. 어, 준수. 잘 지내고? 요새 쉬지? 방송하느라 바쁘나? 아, 아무것도 없어? 그럼 오랜만에 준향대나 놀러 와라. 니 후배들 함 보고 가. 내랑 술도 한잔하고.
그래서, 준향대에 가면 성준수 선수가 있나요?
"성준수입니다. 후배님들 보니 반갑네."
성준수는 없지만 성준수를 불러올 학연은 있었다. 준향대 오길 진짜 잘했다!
흔치 않은 정장 차림 성준수를 보며 전영중이 감격에 차 박수쳤다. 와, 미친. 준수 형은 양복을 입어도 동안이네. 가기 전에 반드시 사진 박는다. 체육관에 모인 준향대 농구팀을 둘러보던 시선이 전영중을 보자 딱 멎는다.
"영중이?"
"니 영중이 아나?"
"쟤 우리 팀 팬이라 가끔 경기 보러 왔어요. 진짜 준향대 왔네."
아닌데요! 저 스피드스터스 팬이 아니라 형 팬인데요! 성준수 악개 자아가 전영중의 몸을 지배해 입을 열었다. 저 스피드스터스......!
"—에서 준수 혀... 선수님 제일 좋아해요."
스피드스터스 팬이 공분할 말을 내뱉기 전에 가까스로 정신 차린 전영중이 뒷말을 수습했다. 오올, 영중이이. 갑작스러운 고백에 다들 놀리듯 제 이름을 부른다. 얼굴이 화끈해지는데 성준수도 제법 기분 좋게 웃는 게 보였다.
"알아. 그런 것 같더라."
미친. 누가 덕후는 계를 못 탄다 그랬냐. 준수 형이 내 사랑을 이미 알고 있다는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황에 혼절할 것 같았지만 정신력으로 참았다. 이 귀중한 시간을 기절 따위 하고 있느라 단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꿈 같은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농구화는 챙겨온 성준수가 신발을 갈아신고 양복을 입은 채 함께 시합도 했다. 양복 입은 성준수랑 농구? 진짠가? 성준수를 위해 스크린도 걸어줬다. 꿈인가? 전영중은 머리가 붕 뜬 느낌으로 덩크를 꽂았다. 쾅! 착지하고도 멍한 느낌에 가만히 있는데 성준수가 달려와 머리를 가볍게 치고 간다.
"잘 뛰네, 영중이."
준수 형이 와줬어. 3점 라인 밖에 있었는데 굳이 골 밑까지. 땀에 젖은 머리도 만져줬어. 이거 형이 신날 때나 하는 건데. 오늘 경기에서는 내가 처음 아닌가? 나 방금 좀 멋있지 않았나? 준수 형이 반했음 어떡하지? 하프라인을 넘어가는 사이에 전영중이 결심한다.
안 되겠다. 형이랑 결혼해야지.
전영중이 어디까지 망상했는지 굳이 기록하지 않지만, 하체 웨이트 강화를 다짐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결혼식에서 종종 배우자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 이런 걸 시킨다니까.......
성준수는 그 후로도 종종 준향대에 놀러 왔다. 니는 백수 새끼 마냥 허구한 날 오냐. 싫은 기색 없이 이현성이 괜한 핀잔을 주면 성준수는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쳤다. 비시즌이면 반백수죠. 친구 없나? 없는 거 형도 알면서. 첫 날과 달리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인데 그마저도 잘 어울렸다. 형은 안 어울리는 게 뭐지?
놀러 온다는 핑계로 치킨도 쏘고. 제게는 많이 먹으라며 닭다리도 쥐여줬다. 영중이 더 커야지. 그렇게 말하면 전영중은 제 입가에 튀김 옷이 묻은 것도 모르고 치킨이나 뜯었다. 형이 더 크라고 하면 2미터까지 커야지 어쩌겠어요.......
방학이라고 빡세게 굴려져 다들 곡소리 내는 와중에 전영중만 내일 눈을 뜨면 무슨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근거리며 잠들었다.
성준수가 준향대에 놀러 와서 좋은 점? 성준수가 준향대에 들락거린다는 소식에 한가한 다른 선수들도 온다는 거? 사심 채우기? 아니다. 훈련 후의 술자리였다.
모두가 기피하는 감독, 코치 테이블에 전영중은 누군가 탈주한 자리를 냉큼 차지하고 앉았다. 술 먹고 얼굴 발개진 성준수 바로 앞에서 직관한다. 어쩌면 준수 형이 취해서 누구한테 기대면 그게 내가 되는 영광 누릴 수도 있고(아직까지는 미수다).
"영중이 오늘 좀 빼입었다?"
소맥 일곱 잔에 혀가 사르르 풀린 성준수가 칭찬을 건넸다. 저 트레이닝복 안 입은 지 한 달 넘었는데 이제 눈치챈 거에요?
"고마워요, 형."
우리 형은 눈썰미도 좋지. 애들이나 감독님, 코치님 다 모르던데. 전영중이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날 밤 빳빳하게 스팀다림 해놨던 제 스트라이프 셔츠가 자랑스러워지던 순간이다. 오늘따라 유독 빨리 취한 성준수가 흔들리는 손으로 잔을 든다. 제일 아래에서 잔을 부딪친 전영중이 보기에 다들 손이 지진 난 거 보면 오늘따라 술을 빠르게 달린 듯 했다.
"마, 니는 족보 꼬이게 형이 뭐고?"
"예?"
"니가 준수한테 형이라 카고, 준수가 내한테 형이라 카면 니도 내를 형이라 부르게?"
"아뇨......."
"이 형은 술 잘 마시다 왜 애를 구박한대. 왜요, 도로 감독님이라고 불러줘요?"
얼큰하게 취한 이현성의 핀잔에 전영중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성준수가 어깨를 감싸 당겼다. 왜 애한테 뭐라고 그래. 소맥 반을 쭉 비우며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겨 쓰다듬는다. 준수 형이 나한테 기대는 건 상상해 본 적 있어도...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점마 저거, 지 팬이라고 싸고도는 거 봐라. 너 이제 오지 마라."
"언제는 할 일 없으면 오라고 해놓고."
"니 그래 할일이 없나. 남친도 있는 놈이."
"플레이오프 중에 헤어졌잖아요."
"아, 맞나."
쭙. 남은 소맥 반 잔이 비워진다. 탁 소리 내려놓기 무섭게 전영중이 소주와 맥주를 들고 잔을 채웠다. 어색한 침묵 속에 채워진 잔 세 개가 다시 부딪혔다.
"......형 게이에요?"
막 넘어가기 시작한 소맥 두 잔이 장렬하게 분사됐다. 흩뿌려진 알코올이 삼겹살 불판 위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끓었다. 초점을 잃어가던 시선이 다시 또렷해진다. 이현성과 성준수가 손에 묻은 술을 급하게 닦았다.
"아니, 그, 아니, 준수야, 이거 그거, 아웃팅......."
"......몰랐어?"
"......네."
"내 미안하다......."
"아뇨, 형 잘못이 아니라...... 나도 얘가 알고 있을 줄......."
"애인 있었구나......."
"준수 그래도 깨끗하다."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예요?"
"저는 형이 농구만 하는 줄 알았어요......."
어쩐지 여자랑 잡힌 사진이 없더라. 내가 또 너무 구시대적으로 생각했네. 여자 중에서만 형이랑 썸 타는 사람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찾으니 애인이 있던 걸 몰랐지. 설마 준수 형이랑 모 백화점에 나타났다는 그 배구선수가? 편견이 지켜준 커플이었구나. 그래. 형도 멀쩡한 사람인데 당연히 연애해봐야지. 형 플레이오프 때 성적 안 좋던 게 설마 애인이랑 헤어져서? 전영중이 후들거리는 손으로 소맥을 넘겼다.
어라? 세 모금 만에 깔끔하게 잔을 비운 전영중이 퍼뜩 어떤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 이거 나한테도 기회 있는 거 아냐? 개이득인데?
전영중x성준수의 오랜 나페스에는 클리셰처럼 떠오르던 순간이 몇 있었다. 일대일 하는 성준수. 삼대삼이긴 했지만 어쨌든 같은 코트에 서긴 했으니 달성. 전영중을 응원해 주는 성준수. 잘 한다고 칭찬해 준 적 있으니 달성. 슛폼 봐주는 성준수. 내 슛 보고 '길다! 안 들어가!'라고 한 적 있으니 달성. 취해서 내게 기대는 성준수. 취해서 날 기대게 한 적은 있으니 달성. 그럼 남은 건... 키스랑 연애, 동거, 결혼 정도?
커밍아웃 후 슬쩍 눈치를 보던 성준수는 전영중의 태도가 변함없자 안심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친하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회를 놓칠 전영중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연락했다. 물론 부담되지 않게 전화 말고 톡으로.
[형 오늘 학교 오세요?] 그럼 한참 후에 답이 온다. [ㅇㅇ] 혹은 [ㄴㄴ]. 안 온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전영중은 웬 찌그러진 너구리가 엉엉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ㅋㅋ]가 길게 이어진 날에는 안 온다던 성준수가 놀러 오기도 했다.
[형 그럼 몇 시쯤 오세요?]
[왜]
[저 커피 사주세요]
[점심도 먹자. 애들 몰래 나와.]
그 날은 일찍부터 [ㅇㅇ]가 날아온 날이었다. 전영중은 오전 훈련이 끝나자마자 샤워실로 뛰어갔다. 살짝 왁스도 바르고 깔끔한 셔츠를 꺼내입었다. 바디샴푸와 비슷한 시원한 향의 샤워코롱도 뿌렸다. 나름 꾸안꾸 컨셉이었다.
전영중이 벼려온 날이었다. 이쯤 되면 많이 친해진 거 아닌가? 슬슬 다음 시즌 준비한다고 걸음이 뜸해지고 구단 얘기를 자주 하는 걸 보며 전영중은 마음이 급해졌다. 저 잘난 남자가 언제 또 품절돼버릴지 알고. 그렇지만 당연한 거 아냐? 저렇게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는 형이 애인 없는 게 더 이상하잖아.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연하의 저돌성이지.
"형, 저랑 사겨요."
전영중은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네이버에서 10살 연상이랑 사귀기 이런 것도 검색했다. 또래 안 만나고 열 살이나 어린애를 만나는 놈이 정상이냐? 세대차 나서 말도 안 통하겠다. 님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 당하는 거 아님? 정신 차리고 빨리 탈출하세요—아니, 내가 좋다는데 웬 참견? 참내! 기분만 상해서 창을 닫는다.
연상의 거절 멘트 레파토리도 찾아봤다. 너 동경이랑 착각한 거야. 아니에요, 형. 저 형이 농구 개못하고 야투율 10퍼 찍어도 사랑할 거예요.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냐. 형이 어떤 사람이어도 좋아요. 욕 많이 하는 것마저 좋은 걸요. 형이 코인충이어도 괜찮아요. 너 같은 어린애 버거워. 제 정력이 문제면 저 형을 위해 금섹도 할 수 있어요. 나 같은 아저씨 만나면 네 손해 아니냐? 그러니까 형은 개이득이죠. 나중에 헤어지면 어쩌려고. 안 헤어져요. 저 형이랑 평생 살 거예요. 나 환갑일 때 너 쉰인 건 알아? 저 형이 중풍치매노인 돼도 병수발 들 자신 있어요. 대책 없는 대답들뿐이지만 전영중은 나름 뿌듯하게 대비했더랬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은 법이다.
"내가 왜?"
생각보다 더 차가운 일갈에 입이 막혔다. 이건 예상에 없던 대답인데. 어...... 그러니까.......
"......어리잖아요."
"어린 게 뭐 어쩌라고."
어린 거, 어린 게 뭐가 좋더라. 전영중이 간밤에 준비한 답을 더듬었다.
"......개이득이죠?"
"뭔, 너 돈 많아?"
"용돈 받는데요......."
"나보다 농구 잘해?"
"저 고등학때 탑 티어......."
"광고 수입은?"
"대학내일에서 연락은 왔어요......."
"야."
끓는 물에 담가진 플라스틱처럼 자아가 사정없이 쪼그라들던 전영중이 대답한다. 네에....... 비닐에 싸인 플라스틱 포크가 이마를 때렸다. 딱!
"빨랑 먹고 가서 공이나 던져."
부스럭거리며 포크를 까 티라미수를 푹 찌른다. 전영중은 찔러놓은 대로 티라미수를 떠 입에 넣었다. 울적하게 크림을 넘기는 와중에 코코아가루가 눈치도 없이 목에 걸린다. 컥, 케헥! 콜록, 콜록! 몸을 돌리고 기침하자 성준수가 등을 퍽퍽 친다. 으이그. 아프고도 서러운 추임새는 덤이었다.
"형, 켁, 그럼 저 형보다 농구 잘 하면 받아줄 거예요?"
사레들려서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게 묻는 연하가 어땠냐 하면.......
"헛생각 말고 운동이나 열심히 해."
당연히 기도 안 찼다. 라떼는 말이야, 연애는 무슨 공강 때마다 농구공 튀겼어. 알아? 존나 과제하고 존나 운동했다고. 연애한답시고 한눈판 새끼들 드래프트 때 다 우수수 떨어졌어. 야, 연애 생각도 하지 마라. 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프로가 만만해 보여? 입시는 별것도 아냐 임마. 성준수는 제 앞에 앉은 후배가 막 사랑 고백을 했든 말든 코코아가루 묻은 포크를 흔들며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형 꼰대예요?"
"어쩌라고. 나보다 농구도 못하는 게."
형 진짜 눈치도 없고 감정도 없고 그냥 농친놈 같아요. 성준수가 들으면 순순히 맞아, 하고 긍정할 생각을 하며 눈물에 젖은 티라미수를 넘겼다.
그래서 좋아요.
정상을 찍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사람은 흔하다. 그러나 제 우상은 여전히 농구에 미쳐있었고 농구만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성준수 선수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좋으면서도 서글펐다.
"이 새끼가 요즘 겉멋만 들어서....... 니 왁스 바를 시간에 운동이나 더 해."
"알았어요......."
"슛도 임마, 괜히 멋있게 넣으려 하지 말고 전처럼 담백하게 하라고."
"알았다고요."
내가 누구 때문에 안 하던 짓을 한 건데. 더 들었다간 비참해질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뜨고 싶어 열심히 케이크를 퍼먹었다. 그 와중에 성준수가 사준 걸 남길 수는 없어서. 우울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스카포네 크림을 싹 밀어내는 전영중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꽂혔다.
"프로 오면 고려해 볼 테니까."
접시 바닥을 삭 긁던 전영중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형이 뭐라고 한 거지? 저를 보는 시선에 흔들림이나 의문이 없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대신, 드래프트 떨어지면 얄짤 없을 줄 알아."
난 나보다 농구 못하는 새끼랑 안 사귈 거니까. 팔짱까지 끼고 내뱉는 말은 거만하기보다는 도도했다. 전영중이 기함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준수 형, 미친 건가?
너무 좋아.......
"형, 그때까지 다른 사람 사귀면 안 돼요."
"왜?"
"그...... 아무튼 안돼요......."
"싫은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여느 때보다 신나 보여서 전영중도 더 떼를 쓰지 못했다. 하여간 치사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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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용기있는 해달
짝사랑 때문에 대학 하향을 넣었다니 제 사랑이 거짓 같아요... 아니 영중아 지금 가장 큰 사랑의 증명을 언급하지 않다니 하긴 준수한테 말하면 준수 극대노할 것 같긴해요...ㅋㅋㅋㅠㅠ 연하 영중이 넘 귀여워요
잠자는 토끼
준수 이 유죄남ㅋㅋㅋㅋ영중이 그래도 꿈 이룰 것 같네요
놀라는 백조
아 너무 사랑스럽고 좋아요 정말...빨리 프로가서 연애하자...
유영하는 수달
영중아 빨리 프로 가잨!!!!!!!!!!!!!! 아 나페스하는 연하빵중이 너무너무 귀엽네요ㅠㅠ 다음편 기다립니다…❤️💙 입시생이 주익대 버리고 준향대 갔으면 준수형과의 교제정도는 쟁취해줘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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