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失

[빵준] 喪失 (結)

상실:desiderium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본가도, 숙소도, 성준수와 함께 살던 집도 아닌. 새하얀 천장. 삐─삐─삐─. 일정한 속도로 울리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뻐근했다. 위를 향해 고정된 시야를 겨우 돌렸다. 주렁주렁 늘어진 링거 줄, 정적을 채우고 있는 바이털 사인 장치, 불편한 병실 침대. 

전영중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맞다, 사고 났었지. 그럼, 준수, 준수는? 대책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생생히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몸을 눕혔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성준수는 무사히 구조되었는지,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다.

팔을 겨우 뻗어 머리맡의 호출 벨을 눌렀다. 얼마 가지 않아 의료진이 전영중 홀로 있는 병실로 들어왔다. 그 뒤에는 엄마도 함께였다. 영중아! 아이고, 우리 아들. 그녀는 침대에 기댄 채로 겨우 일어나 앉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스물다섯이나 되었는데도 그녀에게 전영중은 여전히 어린 아이일 뿐이다. 천만다행이라며 연신 뺨을 쓸어내리기에 전영중은 차마 성준수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뤄놓고 그녀를 달랬다. 저 괜찮아요. 좀 뻐근한 거 빼고는 정말 괜찮아요.

눈 뜬 지 얼마나 됐다고 연달아 검사가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충돌로 인한 근육 경직 등의 전형적인 교통사고 후유증을 제외하면 몸에 큰 이상은 없었다. 이상할 만큼 다행이었다. 그 정도의 사고였다면 어디 하나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 시즌은 뛸 수 있으려나. 큰 사고가 났는데도 당장에 그런 걱정이 앞섰다.

다시 병실에 누워 지겹도록 창밖을 바라봤다. 날이 맑았다. 구름이 옅게 무늬를 수놓은, 높고 푸른 하늘. 사고가 났을 때는 언제라도 다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흐렸는데. 전영중은 그렇게 조금씩 시간의 흐름을 자각했다. 그것을 깨닫자, 등 뒤가 서늘하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침대와 맞닿은 면적만큼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전영중은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오늘, 오늘 며칠이에요?

사고 후로 일주일이 가깝게 지나 있었다. 그녀는 전영중이 의식을 꽤나 오래 잃어서 부단히도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진부한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그녀는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도 영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마음 한 켠을 좀먹으며 불안감은 점점 덩치를 불렸다. 전영중에겐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목소리 대신 손이 의지에 반하여 덜덜 떨렸다. 전영중은 그 손을 얇은 이불 아래로 숨겼다.

준수는요? 준수는 어떻게 됐어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단 한 마디도. 전영중은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시계의 규칙적인 초침 소리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전영중은 그 고요함이 버거웠다. 정적이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리는 법이 없던데. 전영중은 이번만은 자신의 직감이 틀렸기를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이 아니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영중아."

"네."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

"구급차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렇게 갔다고 하더라."

"뭐라고요?"

"응?"

"뭐라고 하셨어요?"

"…영중아."

"아니, 이해가 안 가서, 하하."

"준수, 죽었다더라."

"……."

전영중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다. 차라리 이것이 꿈이기를 빌었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 자신이 꾸는 길고도 끔찍한 꿈. 너무나 생생해서 현실 같은 꿈. 외면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그랬다. 부정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기를 한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갈 리가 없는 녀석이라는 걸 알아서, 믿고 싶지가 않았다. 당장에라도 침대를 박차고 나가 옆 병실 문을 열면, 그곳에 누운 성준수가 전영중처럼 이번 시즌을 걱정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서야, 꼬박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넘어와서야, 같은 팀에서 시합을 뛸 수 있었는데.

전영중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감정이 자꾸만 폐부를 무겁게 짓눌러서 숨이 막혔다. 전영중은 절망의 무게를 여실히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허탈하게 물었다.

"장례식은 언제래요?"

"……."

"인사는…, 그래도 인사는 해야죠."

"…영중아."

"네."

"발인까지 다 했어. 엊그제."

"그러면…, 나는 걔 가는 길 배웅도 못 해주는 거네."

"…그러게."

"내가 걔랑 제일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잘 가라는 말을 못 해주네."

"……."

장례식이 간절한 건 처음이었다. 전영중은 장례식장 특유의 분위기를 유독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건 꽤나 잔인한 처사였다. 시야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졌다. 눈가가 뜨끈했다. 아마도 울었던 것 같다.

"엄마."

"응."

"왜 벌써 끝났대요?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아니면, 나 가면 충격받을까 봐, 준수네 아주머니가 일부러 안 알려주신 거면, 그런 거면…."

그녀는 간절함과 미련이 가득 찬 얼굴을 한 아들을 끌어안았다. 한참 큰 덩치인데도 이 순간만큼은 안타깝도록 작게 느껴져서. 무언가를 향한 감정들. 그리움, 간절함, 괴로움, 미련, 후회.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 검은 절망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성준수가 죽었을 리 없다는 것인지, 마지막 인사조차 전하지 못하는 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전영중은 그저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영영 성준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눈을 뜨면 어지러웠다. 경계가 흐릿한 시야에 눈을 감으니 조금 살 것 같으면서도 된통 괴로웠다. 감은 눈이 뜨겁고도 축축했다. 그냥, 자꾸만 눈물이 났다. 서러움을 멎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준수야, 나 널 진짜 사랑했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가슴이 아플 리가 없잖아. 찢어지게 괴로울 리가 없잖아. 모든 순간순간이 후회로 번져갈 리가 없잖아. 전영중은 다시 간절하게 빌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길고 긴 악몽이게 해주세요.

구월 한 달을 꼬박 병원에서 보냈다. 어지럼증과 근육통은 꽤나 오랫동안 전영중을 괴롭혔다. 그러나 전영중을 진실로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면 참 애매한 나날들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여 거니는 곳.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이야기도 이젠 옛말이라. 늦여름의 태양과 초겨울의 바람이 변덕스럽게 뒤엉켰다. 어떤이는 반소매. 또 어떤 이는 긴소매. 어떤이는 전영중과 같은 환자복. 그렇게 모두가 제각각인 옷차림이 지나치게 일상적이었다. 그런 당연한 일상에도 전영중은 때때로 숨이 턱 막혔다. 그럴 때면 자꾸 눈앞이 핑 돌아 몸을 기대 누워야 했다. 매년 돌아올 계절과, 그에 맞는 계절 옷들이 옷장 속을 나왔다 들어가기를 수없이 반복할 시간 속에, 성준수가 더는 없다는 것을 체감해서 그랬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지독한 나쁜 꿈이었다거나, 전영중을 놀래키기 위한 못된 장난이었다거나. 뭐 그러한 이야기로 흘러갔더라면 참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정말로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자리를 찾아간 진실 속에 못된 꿈이나 질 나쁜 장난 따위는 허탈한 웃음 한 번에 털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전영중이 살아가는 곳은 지극한 현실 속이라서. 그래서. 그 어떠한 것도 변한 것 없이 성준수가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가끔 전영중은 성준수가 살아 돌아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그러나 성준수는 구원자가 아니다. 그는 구원자의 생일조차 닮지 못한 한낱 인간이었으니까. 매일이 위태로웠다. 간절하게 매달릴 것조차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현실적인 전영중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붙잡을 것 하나 없게 된 세상에서 그저 표류하는 기분을 느꼈다.

눈을 감으면 가끔씩 차 안에서 일던 화마가 생각났다. 더위를 많이 타던 성준수. 그런 주제에 땀은 없어 시뻘겋게 익은 채로 더위를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던 성준수.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름의 더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뜨거움 속에 누군가를 원망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전영중이 아는 성준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를 원망할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나를 탓해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갈 곳 없는 전영중의 원망만 남았다. 성준수를 잃은 슬픔은 대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전영중은 성준수를 잃었다. 이번 시즌 참여 또한 불투명하니 어쩌면 농구까지도. 하지만 전영중은 성준수에게서 삶 그 자체를 빼앗아버렸다. 결국 전영중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전영중은 이미 성준수에게 죄인이나 다름없다. 성준수가 전영중을 탓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전영중은 자신을 위해 더운 날에도 불평 하나 없이 여행을 가자고 말하던 성준수를 생각했다. 추위를 많이 타던 저와는 다르게 더위를 타던 성준수. 추운 날에는 전영중의 목도리 한 번 꽉 조여주고 마저 걸음을 옮기던, 그 모습에 장난기가 돌아 목뒤에 손을 집어넣어도 욕 한 번 외치고는 손을 넣고 걷든 말든 무덤덤하던, 그런 성준수. 그래서 전영중은 성준수가 있는 곳에는 계절이 없기를 바랐다. 그곳에는 여름이 없기를. 우리가 함께했던 그 수많은 여름을 잊어도 되니까. 그곳에서만큼은 덥지 않기를.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뜻하지 않게 눈물이 터지곤 했다. 성준수를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떠난 곳에는 하릴없는 외로움과 기약 없는 그리움만 남았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 가져온 짐이라고는 별거 없었다. 제가 갖고 있던 건 고작 부모님이 가져다주신 옷가지와 세면도구, 액정 나간 핸드폰,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덕에 끝만 조금 찌그러진 일회용 카메라가 다였다.

둘이 함께 나섰던 곳을 홀로 들어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허전한 일이었다. 고요한 집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텅 빈 정적이 하나의 공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영중은 깨달았다. 마치 마수의 입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결국 현관에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집 안에는 성준수가 너무나 많았다. 병원에서는 마주할 수 없었던, 성준수의 흔적들이.

전영중은 성준수의 방문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섰다. 고작 문하나를 넘어가면. 영영 그 안에 갇혀 살 것만 같았다.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살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전영중은 관념적인 선 하나를 두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자꾸만 아득해졌다. 결국에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잃은 방은 여전했다. 성준수답게 최소한의 물건들만 잘 정돈된 곳. 여전히 생활감이 아직 남아 있는 곳. 여전히 네가 다가와 뭐 하냐고 시큰둥하게 물을 것만 같은데. 그러나 전영중의 어깨를 감싸는 건 적막뿐이다. 온통 서러웠다.

완전히 혼자가 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너를 두고, 어떻게 내가 너를 두고. 기억을 아무릴 더듬어봐도 그 끝은 지독하게 새빨간 불길 뿐이라. 자꾸만 그 안에서 타들어갔을 네가 생각나서. 너의 표정은 어땠을지 상상하게 되어서. 그 상상은 가장 끔찍하고 최악인 형태로 끝이 나버려서.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우리가 우리였던 모든 시절의 기억을 전부 먹어 치워 버려서.

고작 몇 평의 방 안에서 전영중은 완전히 고립된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일상들은 날아가고 성준수의 흔적만이 곁에 남았다. 결국 전영중은 그 안에서 무너지며 울었다. 자꾸 울어 눈물길을 따라 튼 피부가 쓸려 따가웠다.

전영중인 시간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꼈다. 주변의 많은 것들은 변해가기 시작하는데, 전영중 혼자만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저 관성적으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고, 틈틈이 멀쩡한 낯을 연기하며 구단에 얼굴을 비추고, 벤치에서 시합을 바라보고.

정체된 시간 속에서 자꾸만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닌 잊히지 않는 기억이라 그랬다. 유독 강렬한 기억들은 그랬다. 첫 만남부터 전학 가던 뒷모습, 쌍용기의 마지막 슛, 영화를 보던 어두운 방 안에 비친 옆모습, 술에 취한 전영중을 데리러 오던 애정, 이제 같은 팀에서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웃던 모습까지. 전영중은 반복되는 잔잔한 일상 속에서도 지나간 기억을 자꾸 회상했다. 성준수의 마지막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듬성듬성 빈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마치 상해버린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것 같았다. 필름이 닳은 부분들마다 추억이 제대로 회상되질 않았다. 그럴 때면 그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완전한 과거의 빈칸을 채우는 건 그리움이다.

이별은 참 대단할 것도 없었다. 세상이 뒤집히거나 무너져 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현실은 작은 개인의 사정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성준수가 제아무리 전영중에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존재였을지라도, 세상의 관점에서 보기엔 한 마리의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도 않았다. 씁쓸한 얘기지만 현실이라는 게 원래 그랬다. 현실은 전영중에게 그 누구보다 특별한 성준수를 망설임 없이 집어삼켜 버렸다. 성준수가 사라져도 세상은 별다를 것 없이 돌아갔다. 

모든 것은 평소 같이 흘러갔다. 전영중의 세계를 제외하고. 전영중과 성준수가 함께 만들던 우리라는 작은 우주를 제외하고.

시월. 바람은 어느새 제법 쌀쌀해졌다. 각양각색이었던 사람들의 옷이 조금씩 길이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슬픔에 젖어있던 나날들에도 전영중은 일상을 살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도 세상은 돌아갔으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제법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괜히 시답잖은 위로를 건넸다. 시간이 약이라느니,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느니.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전영중은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진심 하나 없이 대충 웃어넘기는 답변. 알맹이 하나 없는 껍데기. 그 말들을 자꾸만 꼬아서 들었다. 슬퍼할 필요가 없다니. 슬픔을 이럴 때가 아니면 대체 언제 써. 헤어짐의 속도마저 종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인데. 자꾸만 사람들은 전영중이 성준수를 이미 떠나보냈음을 상정하고 있었다. 제일 친했던 친구가 꿋꿋이 사는 거 보면 그래도 좋아하겠네.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완전 개소리.

생각해 보니 전영중과 성준수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저렇게 가벼운 위로를 건넬 수 있겠지. 당사자의 마음은 하나도 헤아리지 못한, 위선뿐인 위로. 성준수가 떠났다. 전영중이 그토록 좋아했던. 꿈을 향해 나아가던 뒷모습이 늘 빛나던, 할 말 있지 않냐며 올곧게 묻던, 머뭇거리지 말라며 등을 밀어주던, 성준수가. 소중한 애인이. 전영중만을 남겨두고 홀로.

전영중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역시 이곳은 혼자 살기엔 너무나 넓었다. 비어버린 공간은 지독한 불면이 대신 채웠다. 그렇게 넓은 집에 누워있을 때면 현실이 항상 목덜미를 서늘하게 쥐어왔다. 언제라도 목을 비틀어 숨을 끊어버릴 것처럼.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채울 수 있다는 게 우스웠다. 의미 있는 것들만으로 채우기도 급급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나 한국은 슬픔에 빠져 게으르게 살기에는 너무나 바쁜 곳이었다. 전영중은 살기 위해 움직였다. 전영중은 살고 싶었다. 겁이 많아서 그랬다. 사고 이전의 삶을 반복했다. 병원은 꾸준히 다녔다. 오랜 시간 뛰지는 못했지만, 경기에 나가는 시간이 다시 조금씩 생겼다. 그렇게 코트 위에 올라갔다 온 날은 유독 허무했다. 함께 뛸 수 있었던 누군가가 이제는 정말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었다.

딱 괴로워 죽기 직전까지의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공허. 전영중은 그럴 때면 성준수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준수야, 우리 이렇게 헤어져야만 했을까. 목이 자꾸 메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많이 운 탓이었다. 그렇게 눈물 없이 흐느끼고 나면 조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살 것 같기도 했고, 가끔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참 복잡한 나날들이었다.

어느새 십이월이었다. 겨울을 닮아 새하얀 성준수. 아니, 겨울이 성준수를 닮았나. 처음 고백을 했던 날과 그 이후에 함께 맞이했던 수많은 생일들이 생각났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꼭 성준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별개의 것으로 챙겼다. 처음에 성준수는 붙어있는 기념일을 왜 나누냐고 귀찮아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 어릴 때 어린이날 다음날이 생일이라 생일이랑 어린이날이랑 퉁치는 게 서러웠단 말이야. 전영중의 그 말에 성준수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래서 전영중은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했다. 성준수도 처음에야 한숨 푹 쉬다가도 함께 거들었다. 원래 '굳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번거로운 일들을 벌이는 것이 연애니까.

올해는 그런 번거로움을 함께 감수할 상대가 없었다. 정말 별것 아닌 풍경과 바람, 차가운 공기, 시원한 겨울 냄새. 그런 것들이 자꾸만 속절없이 그리웠다.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리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때아니게 초인종이 울렸다. 이곳에는 올 사람이 없는데도. 인터폰 화면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익숙하도록 성준수와 닮은 얼굴이 서 있었으니까. 성준수의 어머니. 전영중은 제 꼴이 누군가를 맞이해도 괜찮은 모양새인지 잠깐 점검한 뒤에 문을 열었다. 안녕하셨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성준수의 눈이 그대로 박힌 얼굴에는 여전히 슬픔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결국 적당한 인사말을 찾지 못하고 꾸벅 묵례만 하고 말았다.

"…잘 지냈니."

"…네."

"인사가 얄궂었네. 표정이 말이 아니구나."

"아주머니가 더요. 마음고생 많으시죠."

"…너보다 어른이 되어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질 않네.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니."

"죄송해요."

"그게 네 잘못이니? 아무도 네 탓 하지 않으니 사과는 안 해도 된단다. 그건 잘못했을 때나 하는 거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잖니."

"…네."

"오늘 우리 준수 생일이라 보러 가면서 생각나서 들렀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이거, 네가 갖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녀가 건넨 건 상자 하나였다. 전영중은 얼떨결에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한 손으로도 가뿐히 들 수 있는 무게. 짐 정리하다 보니 발견했는데, 네가 갖고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 애가 제법…,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더구나. 그녀의 말에 전영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잘 보관하겠다고,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런 말을 건넸다.

"잘 지내고, 부모님께도 안부 전해드려."

"네."

"경기도 요즘 조금씩 다시 뛰는 것 같던데. 열심히 하렴. 우리 준수도 그걸 바랄 테니."

"…네."

"고등학생 때 부산 전학 가면서도 네 걱정 하던 애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아래에서 다른 가족들이 기다린다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전영중은 여전히 품에 작은 상자를 끌어안은 채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바깥바람을 얼마나 받았다고 그새 손끝이 붉었다. 전영중은 추위는 안 타면서 손만큼은 저보다 차갑던 성준수를 떠올린다. 발갛게 언 제 얼굴보다 붉던 그의 하얀 손 따위를. 바람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겨울이란 원래 그런 계절이다. 무엇이든 쉽게 차가워지는 계절. 빈 자리가 시린 계절.

전영중은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두었다. 상자 모서리의 빛이 바래있는 것을 보니 제법 오래된 것이 분명했다. 뚜껑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제가 차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성준수가 소중하게 보관했다던 것. 필시 오랜 세월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한 것.

시계의 초침 소리가 뚜렷했다. 제법 오랜 시간을 상자 하나와 대치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전영중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잔뜩 들어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함께 찍은 사진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인화해 주신 사진들을 앨범에 정리하긴 귀찮아 상자에 넣어두었다가, 다른 사진들도 그곳에 담아두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인화 사진부터 폴라로이드, 좀 크고 찍은 네 컷 사진들까지.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의 사진이 고작 한 손으로 잡힐 정도에 불과하다는 건, 조금 우울한 이야기였다. 전영중은 그 작은 상자를 끌어안고 무너지듯 통곡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저 마른 얼굴로 울부짖기만 했다. 우리의 추억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고작 상자 하나에 담아질 정도. 그걸로 끝이었다. 그게 자꾸만 전영중을 서럽게 했다.

이건 졸업식 때 찍은 사진. 이건 방학 때 찍은 사진. 이건 종강 날에 찍으러 갔던 네 컷. 그러다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주 앳된 초등학생 시절의 모습. 사진 속 성준수 얼굴에는 케이크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게 불만인지 뚱한 표정이었고, 전영중은 한껏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릴 적 자신의 글씨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계속 같이

농구하자, 준수야!

준수라는 이름 아래 ㅇㅇ이라고 적힌 성의 없는 초성 두 개는 분명 성준수의 것이었다. 무서웠다. 자꾸만 필사적으로 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사람은 필사적으로 된다. 그것이 간절할수록, 희망이 남아있을수록, 더욱더. 전영중은 간절했지만, 희망 한 줌 없었다. 성준수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이것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리워졌다. 떠난 제 애인이. 석 달 전 저를 살리고 영영 사라져 버린 제 애인이.

기억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제가 원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억에는 오랜 세월과 입맛대로 편집한 추억이 덕지덕지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 것들의 무게를 지워내는 건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무게에 깔린 전영중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는데. 쌓아온 것들이 자꾸만 무너지길 원했다.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고,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다고, 전시하길 바랐다. 전영중은 황급히 사진을 상자 속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전영중은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 상자는 버리기엔 너무나 무겁고, 보관하기엔 지나치게 버거운 것이라.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두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는 것 또한 잃어버리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에. 전영중은 또다시 선택을 미뤘다.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살아간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렇게 갈 곳 없는 애정도, 추억도, 지나가 버리겠지. 잊히지 않는 기억들도 언젠간 색이 바래겠지. 영영 잊을 수 없는 것들도 희미해지는 순간들이 오겠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새해가 되었다. 영영 만날 수 없게 된 곳에 남게 된 스물다섯의 성준수. 홀로 스물여섯이 된 전영중은 어색함을 느꼈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따끔씩 밀려 들어오는 생각은, 자꾸만 전영중의 숨을 막았다. 그는 호흡마다 뱉어지는 그리움을 겨우 주워 담았다. 감당할 수 있는 슬픔과 괴로움의 무게를 초과해 버린 사람에게 남은 것은 초연함 뿐이었다.

전영중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성준수의 방문을 열었다.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것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어딘가 쓸쓸했다. 공간도 사람과 같이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시간이 그대로 멈춘 방. 그 안에서 전영중은 아찔함을 느꼈다. 전영중은 여전히 괜찮지 않다. 단 하나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걸음을 뗐다. 근처에서 구해 온 커다란 박스에 방 안에 있는 짐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옷부터 시작해서 농구용품, 잡동사니까지. 차마 버릴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랬다.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차곡차곡 정리해 담느라 한참을 넘게 그 방 안에 있었다. 이불은 그대로 뒀다. 가끔씩 세탁하여 그곳에 두기로 했다. 의연하게 살아가다가도 버틸 수 없는 때가 오면, 남몰래 무너질 곳이 필요했으니까.

깔끔히 정리된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박스가 너무 이질적이라. 전영중은 박스의 입을 단단히 밀봉하여 드레스룸 한편에 넣어두었다. 이것을 사용할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구석에서 평생을 썩어가겠지.

그렇게 성준수의 짐을 완전히 정리하고 난 뒤부터 전영중은 보고 싶다는 말을 참았다. 그 말은 일종의 구조 신호와도 같았으니까. 외딴섬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외치는 신호.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영중은 진실로 조난당한 것이 되니까. 남들과 같은 도시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스스로가 정말로 괜찮은 상태라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뒤로 전영중은 자주 웃었고 가끔 그리움을 곱씹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단 한 톨의 진심도 섞이지 않은 말을 뱉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전영중이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괜찮은 척 살아가다 보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전영중과 성준수의 관계를 몰랐다. 조금 더 각별한 친구 사이. 본인보다 친구를 더 위해준 성준수. 남들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애도하다 일상을 되찾은 전영중. 그냥 딱 그 정도. 다른 것들은 다 괜찮은데 그 사실 하나가 전영중을 씁쓸하게 했다. 우리가 우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이 이야기하고 다닐 걸 그랬다. 너의 시간이 영영 멈춰버리기 전에. 후회는 늦기 때문에 후회다.

종종 꿈을 꾸었다. 성준수는 야속하게도 꿈에서조차 얼굴을 비춰주지 않았다. 꿈에서 전영중은 늘 혼자였다. 성준수가 떠나버린 체육관에 홀로 남는 꿈. 원중:지상. 아직까지 불이 들어와 있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코트 위에 홀로 서 있는 꿈. 크리스마스이브,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홀로 헤매는 꿈. 방금 잠이 든 이 집 현관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서 깨고 나면 온몸이 축축했다. 너는 늘 나를 두고 먼저 떠나버리는구나.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닫아둔 것은 그의 물건을 담은 박스뿐만이 아니었다. 억지로 눌러 담아 입구를 막아버린 감정들은 때때로 들썩이며 난동을 피웠다. 전영중은 애써 무시했다. 그것들을 영영 열지 않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홀로 외롭게 감당하겠다 마음먹었기 때문에. 가끔은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은 외롭기도 했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것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 아무도 제 노력을 모를 것이라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침몰시킨 감정들은 틈 사이로 새어 나와 방을 가득 채우곤 했다. 전영중은 언젠가 제가 익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준수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리움에서 파생된 죄책감과 공허, 그리고 욕심이 가득하게 들어앉았다. 아침이 되면 전영중은 목덜미에 들러붙은 심화된 감정들을 뜯어낸 뒤 밖으로 나서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살았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다고 했던가. 아무도 전영중이 속으로 곪아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새해가 지나고, 시즌의 막바지까지도 별문제가 없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전영중은. 사고 이후 몸 상태도 빠르게 호전되어 스타팅으로 뛰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게 참 우스웠다. 남들이 아는 전영중과 남들이 모르는 전영중의 괴리가 심해진다는 것이. 남들 다 하는 만큼만을 되뇌며 살았더니 제법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 정신은 누구보다 피폐하면서. 그런데도 전영중은 그걸 잘도 숨겼다. 잠에서 깰 때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비명을 지른다는 것도, 같은 유니폼을 입은 31번을 남몰래 상상해 본다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을.

플레이오프도 끝나고 처음으로 찾아온 생일. 오랜만에 보내는 성준수가 없는 생일. 그런 건 아무렇지 않다고, 겪어 본 적 있으니 익숙하다고. 열두 시가 되자마자 제법 많은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후배들은 영상 통화까지 걸어 노래를 불러줬다. 그럴 기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고맙다며 웃었다. 괜찮은 전영중은 그래야만 했으니까. 여전히 삶을 살아가는 전영중에게는 성준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어져 있었다. 애써 멀쩡한 척하는 건 그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일까. 하지만 그 많은 축하를 받으면서도 아쉬웠다. 배부른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걸 지적해 줄 사람은 전영중이 축하를 바라는 사람과 같은 이였으니까. 그 단 한 명의 축하 인사가 더는 없다는 사실이 참 공허했다. 올해뿐만이 아닌,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영중은 밀려드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뒤로 하고 침대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 안에는 지독한 불면이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끔찍한 적막 속에서 눈을 감으면, 성준수 생각이 참 많이도 났다. 반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랬다. 전영중은 언제나 과거 속을 헤집으며 살고 있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어서.

꿈을 꾸었다.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 성준수를 찾아 헤매는 꿈이 아닌. 둘이 함께하는 꿈. 배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기내초등학교 앞이었다가, 주익대 체육관이었다가, 혹은 고백을 했던 성준수의 집 앞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꿈이라는 걸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성준수의 얼굴이 너무 뚜렷해서 그랬다. 속 편하게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꼬이다 이내 멈춰선 현재. 성준수의 방 안에 다시 홀로 서 있는 전영중. 닫아 둔 방문이 열렸다. 그 기척에 돌아보니 기대선 성준수가 보였다.

야, 너 아직도 그렇게 사냐? 미련 가득하게? 이미 뒤진 사람 붙잡고? 전영중,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살아.

꿈속의 성준수는 결국 전영중이 투영해 낸 것이라. 전영중의 감춰둔 속을 후벼파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할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준수는 단 한 순간도 전영중을 한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전영중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평가였으니까. 슬픔에서 도망치기 위해 세운 견고한 울타리 아래 묻힌, 아무도 몰랐을 마음. 전영중 자신조차도. 한심하다니. 말이 심하잖아, 준수야.

야, 니 인생 살라고 그런 거 아니야. 하, 씨발. 이따위로 매일 눈물 샤워하면서 살아가면 내가 뭐, 고마워할 줄 알았냐.

그 말을 들은 전영중은 또다시 불행에 휩쓸린다. 불행을 감추는 데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했다. 성준수는 전영중이 깊숙하게 숨긴 마음까지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픽, 하고 웃었다. 그 모습에 울컥. 목울대에 큰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결국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진심인지 혹은 진심을 숨기기 위한 거짓인지 본인도 구별할 수 없는, 그래서 절실한 문장들.

준수야, 누가 나 대신 죽어달래? 내각 너한테 대신 뒤져달라고 빌었냐고. 누가 무모하게 그따위로 운전하라 했어. 세상에서 누가 그 상황에서 핸들을 그렇게 꺾냐고. 대체 누가 나를 대신 살리라고 했냐고. 살았어야 하는 건 너인데. 왜 나를 살게 했냐고. 왜 나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는 곳에 처박았냐고. 준수야,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 너는 모르겠지.

눈을 뜨자 베개가 축축했다. 꿈을 꾸며 운 것이 분명했다. 지나간 꿈, 며칠만 지나면 잊힐 꿈. 그런데도 깨자마자 왈칵. 감정이 북받쳤다. 그동안 잊고 살던 괴로움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전영중을 덮쳤다. 애써 막고 있던 감정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겨우 쌓아두었던 댐이 부질없이 허물어졌다. 사람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나. 그 물이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무섭게. 차갑게. 빠른 속도로. 물에 잠겨 숨이 꺽꺽 막혔다. 숨을 쉬고 싶어서 자꾸만 울음을 토해냈다.

준수야. 오랜만에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불러봤다. 말이라는 건 생각보다 큰 힘을 갖고 있어, 이름을 내뱉자마자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준수야, 보고 싶어. 왜 나를 살렸어. 왜 네가 죽어야만 했어. 나는, 나는 너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 올해부터 같은 팀으로 뛰기로 했잖아. 너 농구 오랫동안 하고 싶어했잖아. 다치지 않고, 오래오래. 나보다 더 오래. 손에 묻은 얼굴에서 비통한 목소리가 줄줄 새어 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모든 게 다. 그 와중에도 성준수가 보고 싶은 건 전영중의 채 버리지 못한 이기심이다.

결국 전영중은 성준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잃지 못할 것이다. 전영중 인생에 특별한 존재로 들어앉았던 탓에 줄곧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의 생의 끝을 목도했으니, 영영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성준수의 삶은 끝났지만, 전영중은 살아서 끊임없이, 숨 가쁘게 그 존재의 빈자리를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에 들어맞는 조각은 단 하나밖에 없어서, 결국 내내 같은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는 것은 전영중의 환상이자 착각일 뿐이다. 결국 깨닫는다. 자신은 조난당해 표류하는 중이며, 구하러 올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전영중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여도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 삶을 그 누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남모르게 숨겨놨던 우울과 묻어두었던 기억이 합쳐져 전영중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뒤로는 가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럼 꿈을 꿨다. 사고가 나던 날의 꿈을 꿨다. 언제나 전영중은 성준수를 구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하나도 잊을 수가 없다. 단 하나도.

시즌 중 한창 바쁠 때는 몰랐는데. 그동안은 잊을 수 없게 된 성준수를 잊어야 했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여유가 주어지자, 급속도로 삶이 무너졌다. 꿈은 하나의 기폭제였을 뿐이다. 전영중은 그대로 집 안에 틀어박혔다. 원래라면 둘이 함께였어야 할, 완벽했을 그 공간에.

잊어야겠다는 다짐도 그에 대한 생각이라는 걸 전영중은 뒤늦게 깨닫는다. 연락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전영중은 그 어떤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부상 없이 시즌 잘 마무리 했잖아. 당장 해야 할 일은 다 끝냈잖아. 제발, 제발 내버려 두라. 나를 좀. 침대 구석으로 핸드폰을 던지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어릴 때 자주 하던 것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여전히 잠이 오질 않았다.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성준수는 이제 없는데. 살아남은 전영중이 어떻게 죽어버린 성준수를 만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죽은 애인과 헤어지는 법을 몰라 헤매고 있는데. 아직도 목구멍 가득하게 성준수가 차올라서 토해내듯 이름을 내뱉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는데. 죽은 애인을 만나는 방법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있을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냥 믿고 싶었다. 단순히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깔깔거리기 위한 누군가의 장난일지라도. 그 많은 거짓말들 중 섞여 있을 하나의 진실을 건져내고 싶어서.

「그런데 어디서 들은 건데 진짜 악마 소환할 수 있다던데.」

「재석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진짠데. 가장 소중한 물건을 태우면서 뭘 하면 된다던데. 소원 들어준대요.」

전영중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다시 너를 보게 해달라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속설이라 생각했었다. 전영중은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남들 다 기숙사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며 벌벌 떨 때에도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무덤덤하게 굴었고, 다들 징크스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때에도 코웃음 치며 평소 실력대로만 하게 해달라고 빌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전영중은 미신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절박했다. 혹시나 하는 그 가능성이 사람을 자꾸만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밤낮없이 구글링을 했다. 악마라는 단어에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모든 단어는 거의 다 검색해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곤한 줄도 몰랐다.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 같은 기분까지 느꼈다. 찾고, 찾고, 또 찾고. 기괴한 배경을 한 해외 사이트까지 남김없이 긁어모았다. 영어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들었다. 해괴한 아랍어나 영어가 아닌 것 같은 문자들은 우측 상단에 뜨는 번역하기 버튼을 눌렀다. 문맥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겨우 해석해 내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창을 닫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을 인터넷을 뒤지며 살았다. 매달릴 것이 생기니 일상을 유지하는 건 오히려 쉬웠다. 괜찮은 척하며 살 때보다 더 괜찮아 보이게 지냈다. 그렇게 긁어모은 정보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새의 깃털이 필요합니다, 부적을 태우세요, 십자가를 준비하세요, 묵주를 두드려야 합니다. 너무나 중구난방이라 이것이 믿을만한 정보인지 머뭇거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은 건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성준수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못다 한 말을 전해야겠다는 의무감. 그 미약한 소망이 전영중을 움직이게 했다.

난잡한 이야기들 속에서 거르고 걸러낸 공통적인 정보. 해가 뜨지 않을 때 의식을 치를 것. 피로 되도록 크게 마법진을 그릴 것. 제물 대신 머리카락과 손톱을 함께 바칠 것. 그 가운데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불에 태울 것.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가장 바라는 소원을 생각하며 소환 주문을 외울 것. 장소의 제약은 없으나 바라는 염원과 관련된 곳일수록 효과가 높음. 소원에 따라 다른 종(種)의 악마가 소환됨. 악마가 머무를 수 있는 최대 기간은 이백일.

마법진을 크게 그리려면 얼마만큼의 피가 필요할지 가늠해 보았다. 그 자리에서 칼로 그어 피를 내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전영중은 주사기로 채혈하여 피를 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럴 때에만 준비성이 철저했다. 그다음은 장소였다. 성준수를 보고 싶다는 제 바람과 관련된 곳. 집 근처에서 물건을 태우기엔 주변의 이목을 끌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웃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진 않았다. 그다음으로 손쉽게 떠오른 곳은 속초의 바다였다. 성준수와의 마지막 추억이 있는 곳. 해가 뜨지 않은 바다에는 사람도 없을 테니 적격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것. 그러면서도 불에 태울 수 있는 것. 큰 고민도 없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어딘가에 깊숙이 처박아놨을 상자 하나. 들여다보지도, 버리지도 못할 것이라면. 그것을 태워 성준수를 볼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널 만날 수 있다면. 못다 한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전영중은 그렇게 유월 중순, 다시 속초로 향했다. 비시즌 훈련과 병원 방문으로 바빠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미리 잡아둔 숙소에서 또각또각 손톱을 깎고 있자니 옅은 현타가 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해봐야지. 그런 마음으로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을 으슥한 새벽에 바다로 나갔다. 밤이라 그런지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저 어딘가에 성준수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의식을 치르기 전 다시 한번 상자를 열어봤다. 그 안에는 여전히 우리의 모습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괜히 시야가 흐려졌다. 눈앞을 흐리는 감정 앞에 전영중은 속수무책으로 주저앉는다. 성준수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은 죽어도 안 내뱉던, 그러다가도 종래엔 사과하고 다시는 싸우지 말자고 굳게 약속하던 네가. 잔뜩 소중하고 사랑스럽던 네가.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부끄러운 마음에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 해줬는데 떠나버린 성준수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다시 보게 된다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줄 텐데. 후회할 짓들은 하지 않을 텐데.

전영중은 다시 상자를 닫았다. 흐릿한 시야를 문질러 닦았다. 텅 빈 모래사장이 이렇게나 넓었나. 파도치던 바다가 이렇게나 깊었나. 성준수가 떠나간 세상은 언제까지고 전영중에게 기이하고 이질적일 것이다.

피를 담아온 팩에 구멍을 내 엉성하게 마법진을 그렸다. 그림 더럽게 못 그리네. 당장에라도 성준수가 그렇게 말해줄 것만 같았다. 피가 떨어진 모래가 짙게 물들며 엉겨 붙었다. 전영중은 그 가운데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 위에 제 손톱과 조금 자른 머리카락까지 올렸다. 불이 안 붙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조금 가져온 휘발유를 그 위에 불었다. 바람이 불어 날아가기 전에 황급히 라이터를 켰다. 몇 번을 헛돌다 겨우 불이 붙었다. 불은 금세 상자를 삼켰다. 활활 불타기 시작한 기억의 순간들을 바라보며 전영중은 눈을 감았다. 바라는 것을 간절히 생각하며 주문을 외웠다.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발음을 힘겹게 외워 온 것이었다. 나의 보물과 영혼을 바치니 부디 위대하신 악마님이여, 이 곳에 나타나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모습을 드러내 주시어….

갑자기 거세진 불길이 느껴져 전영중은 슬며시 눈을 떴다. 핏자국을 따라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불이 붙을 수가 없었는데도. 불길이 잦아들며 상자가 있던 곳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일렁거렸다. 남은 것도 받아 갈게. 가까이 다가온 그것은 전영중의 턱을 붙들었다. 검은 입을 쩌억 벌리더니 이내 영혼을 베어 물었다. 그제서야 생각났다. 또 다른 대가. 남은 수명의 일부. 정신을 잃기 전, 감기던 시야에서 전영중은 성준수의 얼굴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지금. 모든 기억을 되찾은 전영중은 깨닫는다. 제 앞에 있는 성준수가, 진짜 성준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제 기억을 토대로 성준수처럼 행동하는 악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도 간절한 제가 불러낸.

"너 준수가 아니구나."

그 말에 성준수가, 아니 악마가 픽 웃었다. 뭐야, 기억나버린 거야?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을 울리는 것처럼. 그런데 목소리조차 전영중이 알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야 그동안 느꼈던 이질적인 모습들이 이해가 갔다. 제가 모르던 성준수가 아닌, 성준수가 아닌 것 같은 성준수의 모습들. 왜냐하면 눈앞에 있는 성준수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으니까. 원래는 계속 잊고 있어야 했을 텐데, 이상하다. 아, 부딪쳤구나.

전영중은 모든 것이 떠오른 시점에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소환을 대가로 기억을 잃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았는데. 왜 성준수에 대한 기억만 잃었으며, 왜 지금에서야 다시 떠오른 것인지. 부딪쳤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원래 소환하면 기억을 잃어?"

보통은 아니지. 근데 너는 그게 대가였으니까.

"……?"

가장 소중한 것. 그게 물질만 해당하는 줄 알았어? 단순하긴.

"……."

그래도, 잘해 봐. 아직 기간은 남았으니까.

악마와 함께 살아가며 알게 된 것 다섯 가지.

첫째, 이 악마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인다. 다만, 성준수의 모습은 아닌 듯했다. 그 덕에 전영중이 그와 함께 외출을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혼자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죽은 이가 돌아와 지내고 있는 것처럼 비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존재가 인상 깊게 남지는 않는 듯 했다. 그저 전영중이 누군가와 있었더라, 정도의 희미한 기억 정도만 남을 뿐. 참 편리한 능력이었다.

둘째, 부딪쳤다는 것의 의미. 확실하지는 않은, 그저 전영중의 추측이었다. 이 세상에서 악마에게 소원을 비는 것은 전영중 혼자가 아닐 것이었다. 어디선가 이뤄지고 있을 다른 이의 소원이, 어떠한 이유로 충돌한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혹은 그저 오류이거나. 어찌 됐든 전영중으로서는 하나의 페널티가 사라졌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셋째, 기억을 잃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영중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어쩌지 못하고 보관하던 추억이 담긴 사진이라고 생각했는데. 물질적인 것만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 전영중이 대가로 태운 것은 단순한 사진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성준수와의 기억. 소환의 대가는 그 기억 전부였다. 그리하여, 전영중의 기억으로 나타난 성준수가 전영중을 알고 있어도, 전영중은 성준수를 기억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이라고만 여겼다. 내가, 어떻게, 성준수를.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이미 지나간 사랑은 자꾸만 목이 메게 했다.

넷째, 소환 기간은 한정적이다. 그 기간을 넘기면 또 따른 페널티가 있는 듯 했다. 원래라면 대가를 받은 그 즉시 소원을 이루어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전영중은 특이 케이스였다. 돈이 필요하다거나,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없애고 싶다는 등의 소원이 아니었으니까. 성준수에게 마지막으로 하지 못한 말을 전하고 싶다. 그건 결국 전영중의 행동으로 끝맺음 되는 소원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총 이백일. 이제 절반도 채 남아있지 않은 그 시간의 끝은 짓궂게도 십이월 이십사일이었다. 가끔 현실은 그 어떤 비극보다도 지독하게 잔인하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악마는 놀랍도록 전영중이 기억하는 성준수와 똑같았다. 전영중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성준수이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전영중이 자각하지 못하면 정말로 성준수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서. 저승사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던데. 그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악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기억을, 삶을 좀먹는다. 자꾸만 환상 속에서만 살고 싶어지게 만든다. 전영중은 자꾸만 그를 성준수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아플수록 단단해진다는 말은 순 거짓이다. 사람은 아플수록 겁이 많아졌다. 전영중을 단단하게 만들었던 것은 수많은 아픔을 딛고 일어나며 생긴 굳은살이지, 굳어지지 않고 덧나기만 할 아픔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라. 굳은살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는 아픔이라. 전영중은 지나간 사랑에 허탈해하며 내내 아파하기만 했다. 외딴섬처럼 사람들에게 섞이지 못한 채 위로와 절망 그 어딘가를 부유하기만 했다.

그래서 전영중은 진실을 절반만 믿는 것을 택했다. 눈앞의 성준수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붙잡고 싶어서. 기억 속의 성준수와 닮아 있어서.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편향적인 선택을 했다. 그렇게 끝나버린 사랑을 어떻게든 붙잡았다.

원치 않는 기억을 적당히 가리고 사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와 많은 것들을 했다. 성준수라고 믿으면서.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았다. 못 맞췄던 커플링 맞추기, 경기를 응원하러 와달라고 부탁하기, 어디론가 가볍게 놀러 가기. 그렇게라도 전영중은 미련을 덜어냈다. 남은 기간을 카운트다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했다.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하는 시간. 

그러다가도 가끔은 성준수의 생각이 났다. 성준수라 믿고 살아가는, 옆 방에 있을 그의 존재 말고, 떠나버린 성준수가. 마치 언젠가 홀로 남은 전영중에게 다가오던 정적처럼. 전영중은 기억 속의 성준수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럼 성준수는 괜찮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혹은 전영중 혼자만의 망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괜찮아. 많이 웃어.

내가 어떻게 그래.

왜 그런 생각을 해.

네가 아닌 걸 알면서도 너라고 믿고 살잖아.

그렇게라도 많이 웃어.

준수야, 내가 안 미워?

못 미워하는 거야, 멍청아.

왜?

안쓰러워서.

…….

소중한 만큼 안쓰러워서.

…….

그러니까 잘 살란 말이야, 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유독 추운 십이월. 전영중은 매일같이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잔뜩 차가운 공기를 몰고서. 벌벌 떨며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전영중의 옆에서 그는 추운 기색 하나 없었다. 밤이 차츰 짧아질수록 전영중에게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었다. 경기에서 진 날이면 전영중은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준수야, 나 위로해 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다. 전영중은 최대한 많은 버팀목을 만들고 싶었다. 진짜가 아닐지라도, 제 애인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이 정도는 용서해 줄 거지, 준수야. 그렇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마주할 때면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라고 믿고 싶었지만, 동시에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전영중은 종종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애써 외면하고 살다가도 스스로의 모순을 깨달을 적이면 그랬다. 이렇게나 간절하게 성준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이는 저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느낀다.

십이월. 그리고 이십사일. 아침에 그 날짜를 보고 있자니 괜히 코가 막혔다. 헛웃음이 샜다. 우습지만 인정해야 했다. 준수야, 나는 이제 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눈길, 손길, 혹은 존재 자체로도 갈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홈 경기라 다행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이기기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경기 후 미팅은 금방 끝났다. 그 뒤로 전영중은 케이크 하나 구하겠다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기념일과 더불어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싫었기에, 겨우겨우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아닌 것을 고르느라 애먹었다. 어딜가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글자가 붙어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문 제작 케이크라도 예약해 둘걸.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깨닫는다. 이제 다음은 없다는 것을. 성준수는 전영중을 구했으나 구원하진 못했다. 여전히 전영중은 성준수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성준수가 여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라도 그가 들어갔던 화장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준수의 희생은 불완전한 구원이었다. 반쪽짜리 구원자. 그게 참, 성준수답다고 생각했다. 성준수의 생일은 크리스마스가 되기엔 하루가 부족했으니까. 이건 성준수가 죽고 난 뒤의 생일을 전영중이 홀로 보내며 했던 생각이다.

그래도 이제는 정말로 견뎌내야겠지. 네가 떠난 이후 지난하게 이어져야만 했던 나의 생을 잊고. 그저 우리의 육 년을, 그리고 미련으로 이루어진 반 년을 떠올리면서. 너와 함께한 추억들과, 너라고 믿으면서 보냈던 기억들을 버팀목 삼으면서. 싸우고, 후회하고, 화해하고, 결국엔 좋아한다는 말로 마무리 짓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 해봤던. 우리의 시간을 아름답고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면서. 아프기만 한 순간들이 아니었음을 상기하면서.

겨우 케이크를 구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참 늦은 시각이었다. 그는 환한 집 안에서 전영중을 맞이했다. 늦었네. 그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제 생일인 줄도 모르고 늦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또 성준수다웠다. 전영중은 손에 든 상자를 내보였다. 케이크 사 왔어. 오늘 생일이잖아. 아직 십 분도 넘게 남았어.

부랴부랴 케이크 꺼내서 초까지 꽂아 주었다. 두 개 하고도 여섯 개. 불까지 켠 뒤에 말했다. 생일 축하해, 준수야. 촛불이 꺼지고 집 안은 다시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이 지극히 단순하고도 평범한 행위가, 참 많이도 그리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야, 한 번만 안아보자.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전영중을 끌어안았다. 여전하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자꾸만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린다. 벌써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려지는 건 눈앞인데, 어째서 말까지 머뭇거리게 되는지.

왜 그렇게 우물쭈물거리고 있어. 뭘 하고 싶은 거야. 그는 전영중을 보더니 그렇게 말한다. 성준수의 목소리가 아닌 음성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독촉하거나 혹은 비아냥거릴 줄 알았는데.

"말하고 싶은 게 남아 있어서. 지금 말 못 하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미안해. 사과는 꼭 해야 할 것 같더라."

"야, 전영중. 진짜 그게 하고 싶은 말 맞아? 아니잖아."

"진짜야, 준수야. 미안해."

"……."

"장례식 못 간 것도, 그래서 인사조차 못 하고 널 보낸 것도."

"야, 전영중."

"그날 너한테 운전대 맡긴 것도. 그거 아니었으면 사고는 안 났을 텐데."

"그만해라."

"아니 그냥 너랑 만난 것도 다. 나랑 안 만났으면, 그 이브 날에 고백 안 했으면, 너는 여전히 살아서 좋아하는 농구 했겠지. 미안해."

"야, 전영중. 그게 진짜 네가 하고 싶은 말이야?"

"……."

"그게 진짜 네 진심이냐고."

"……."

어느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겹쳤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머뭇거리지 말고. 마지막 기회니까."

"……."

그러니까 이제는,

"지금 말하든가, 아니면 평생 말 못 한 채로 살든가."

비로소 말할 시간이다.

"준수야."

"아직도 망설여? 진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 무엇보다 절실했던 진심을.

"준수야, 성준수."

"어."

"…사랑해."

그렇게 성준수를 보낸다. 상실의 시간이었다. 길었던 만큼 소중하고, 소중했던 만큼 괴로움이 되었던 존재를. 참으로 이중적이었던 사랑이었다. 보고 싶은 만큼 죽고 싶었고, 애틋한 만큼 살고 싶었다. 이제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얼굴을 스쳐 보내줄 시간이었다. 이제는 전영중의 반대편에 살게 된, 그 어떤 곳보다도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성준수. 그는 어딘가에서 분명 전영중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생전에는 단 한 번 말해보지 못했던 그 단어를. 그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듣지 못할 전영중을 향해 어딘가에서 그 길고 긴 거리를 넘어 대답을 보내주고 있을 것이다.

"거 봐, 말할 줄 알면서."

성준수는, 정확히 말하자면 성준수의 모습을 한 악마는 그 말을 남기며 홀연히 사라졌다. 성준수의 얼굴로, 후련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전영중이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그리워했던, 다시 보고 싶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그때의 미소를 보여주면서.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큰 그 말 하나에.

잘 가. 좋아했어. 사실은 많이 사랑했다. 그렇게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릴 성준수에게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언가가 팔랑팔랑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전영중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주워 든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악마를 소환하며 태웠던 폴라로이드 사진들 중 한 장. 불에 타다만 사진 한 장. 어린 성준수의 생일날, 케이크의 생크림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채로 웃으며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 계속 같이 농구하자 준수야, 라고 적었던 글자들 중 반절은 날아가서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남아버린 외로운 글자들.

계속

농구하자

자정이 지나고 어디선가 교회의 종이 울린다. 십이월 이십오일,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종. 구원자의 탄생을 알리는 종. 그 소리 속에서 전영중은 타다 만 사진 하나를 붙잡고 무너졌다. 구원자가 되지 못한 성준수가, 이제는 전영중의 삶에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전영중은 운다. 단 하나의 말만을 반복하면서.


안녕하세요, 유성입니다. 처음 인사드리게 되네요. 작품에 대해 남기고 싶은 말은 많지만, 혹여나 감상을 해칠까 염려되어 이곳에는 남기지 않겠습니다. 현재 소장본 작업 중에 있으니 여력이 된다면 그곳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다가올 겨울이 지나고 눅눅한 여름이 온다면 이 글 속 영중이와 준수가 어렴풋이 생각났으면 좋겠습니다. 슬프지만은 않은 이야기였기를 바랍니다.

세부 설정들 및 비하인드는 스핀스핀에 질문을 남겨주시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다음주에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빵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