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준] 喪失 (轉)
상실:desiderium
"다녀오자, 바다."
"준수야, 갑자기?"
가보고 싶다며. 뭐가 문제야, 가자. 성준수는 의외로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확정된 것을 전달하는 것 같은 어조에 당황한 건 전영중 하나였다. 오히려 문제 될 게 있냐는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영중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마따나 걸림돌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트레이드 얘기가 나오던 시점부터 집을 마련해 두었고, 서울팀이었던 전영중은 숙소를 나와 둘이 함께 살 집을 가꾸기 시작했다. 유월, 트레이드 계약이 종료된 후에 성준수도 숙소가 아닌 전영중이 기다리는 둘의 집에 입주했다. 웬 트레이드냐는 전영중의 물음에 성준수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네가 같은 팀에서 뛰고 싶다며. 이제 됐냐? 그 대답에 전영중은 성준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되고 말고의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차고 넘쳐서. 야, 더워, 좀 떨어져. 그런 핀잔은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칠월부터 팔월까지의 비시즌 전지훈련도 끝나고 짧게 주어진 휴가. 그렇다고 해봤자 며칠이 고작이었다. 시즌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휴가라고 해도 감 잃지 않겠다고 운동이나 계속할 줄 알았던 성준수가 먼저 제안한 여행은 정말이지 예상외의 일이었다.
"준수야, 진짜 다녀와도 괜찮겠어?"
"갈 거야, 말 거야."
"가자."
단호한 태도에 전영중 머릿속의 많은 고민들은 대답의 잔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에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숙소를 잡고, 근처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고. 작은 핸드폰 화면에 고개를 처박고 왜 이리 괜찮은 게 없냐며 혼자 성질내는 성준수를 지그시 바라보며 필요한 때만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눈에 성준수를 담았다. 이러한 성준수의 모습은 이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아 그 어떠한 표현보다도 전영중에게 확신을 주곤 했다. 서로에게 최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옛날에도 지금도 변하지 않는 다짐이었다. 그렇기에 전영중은 성준수에게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존재 또한 그에게 최선이길 바랐다. 사랑한다는 말이나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못한 하고 싶은 말들이 증발해 버려도 괜찮았다. 말보다 행동이 더 선명하니까.
다만 날씨가 따라주지 않았다. 출발하는 날부터 잔뜩 흐렸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당장 내일은 온통 비 예보였다. 성준수의 표정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좆됐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티 나도록 짜증을 가득 담아내는 것 같더니 금방 감정을 담아 누르고 전영중에게 의사를 물었다. 비 온다는데 어떡할래. 그 말에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뚝뚝 묻어나와 오히려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농구 이외의 일상에서는 지나치게 단순한 게 참 제가 아는 성준수답다고 생각했다.
가자, 비 오는 게 뭐 어때서. 전영중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왜냐면 전영중은 성준수의 최선을 알기 때문이다. 사귄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애정 표현을 어색해하는 성준수. 자꾸만 보이는 형태로 사랑을 증명하려는 성준수. 거절한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구질구질 붙잡으며 상심하지는 않을 성준수. 하지만 다음번에는 이러한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 더 세심하게 신경 쓰려 애쓸 성준수. 그걸 알기 전영중은 그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단순히 좋아한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선들이 융화하던 순간이라는 것을, 둘은 알까.
짐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고작 1박 2일 다녀오는 것인데 가방이 무거울 필요는 없었다. 성준수는 또 예의 까만 티를 챙겼다. 그 모습에 괜히 전영중은 그것 좀 그만 입으면 안 되겠냐고 놀렸다가 욕이나 얻어먹었다. 그러면서도 빙글빙글 웃는 얼굴은 변하질 않았다. 준수 덕분에 나는 오래 살겠어. 웃는 낯에는 침도 못 뱉는다는데 성준수는 위인이라 그런 속담에는 해당 사항 없었다. 그래, 나 죽고 나서도 너는 꼭 오래오래 처살아라. 와, 그거 덕담이지? 고마워. 씨바거…, 뭔 말을 못해. 성준수의 억양에는 여전히 부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상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지나 들어간 부산팀. 바다가 지겨울 법도 한데 성준수는 내내 서울에만 남은 전영중을 위해 그 지겨울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 같더니만 동쪽으로 갈수록 다시 그쳐 들었다. 비구름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빠르게 동쪽을 향했다. 창밖을 스쳐 가는 풍경의 속도가 운전자의 성격을 대변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한 태도. 처음 면허를 따러 갔을 때 그 성질머리에 운전대를 잡아도 괜찮은 거냐며 놀리던 때가 선명했다.
나 휴지 좀 꺼내 줘. 출발하기 전 테이크아웃한 커피가 흘러넘쳤는지 성준수가 글로브박스를 가리켰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전영중은 그 안에서 휴지 몇 장 뽑아 건네줬다. 그러고는 괜히 그 안에는 뭐가 있나 뒤적거렸다. 성준수답게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키링 하나. 시간의 흔적 탓에 조금 꼬질꼬질해 보이는 너구리 키링. 그걸 발견하고 전영중은 웃었다. 준수야, 이거 아직도 갖고 있어? 여기 넣어놨구만.
소중하게 갖고 있으라고 질질 짜면서 신신당부할 땐 언제고. 야, 그거 줄 땐 안 울었어. 성준수는 여전히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로 옅게 웃었다. 전영중도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얌전히 글로브박스를 닫았다.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있게 해준 것.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도 이해해 달라던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이 압축된 욕심. 치기 어린 나날들의 결정체.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자리를 바꿨다. 제 차가 아닌데도 운전이 익숙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어색하지 않을까. 전영중은 운전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쭉 뻗은 도로를 벗어난 뒤에는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바다 바로 앞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엔 날이 이미 잔뜩 흐렸다. 비는 안 오네, 날씨 좋다. 전영중은 그렇게 되지도 않는 거짓을 말하며 웃었다. 부러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관계에 절실하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얼굴. 오면서 들린 휴게소에서 산 조잡한 일회용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건 또 언제 샀대. 성준수의 말에도 아랑곳않고 전영중은 사진을 찍었다. 날이 잔뜩 흐려 결과물은 장담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확실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너와 내가 이곳에 왔었다는 증명을. 성준수는 내켜 하진 않았으나 묵묵히 필름 안에 담겨주었다. 어색한 표정과 뻣뻣한 포즈를 지적하며 전영중은 웃었다. 야, 내놔. 넌 얼마나 잘하나 보자. 그런데 전영중도 별반 다르지 않아 한껏 비웃음을 샀다. 몇만 원 주고 산 카메라로 둘 다 웃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얼마나 근사한가.
흐린 바닷가에서 발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 모래사장이 점 단위로 짙어지기 시작했다. 무사히 피했다고 생각한 비구름은 여전히 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투둑, 툭. 한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장대비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가 젖어 사진을 뽑지 못할까 봐 품 안에 소중히 가뒀다. 그것만이 지나간 기억을 선명한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치였으니까.
잠깐. 일시 정지.
그 이전의 일이 궁금해.
뒤로 감기.
▶재생
"야, 전영중."
연습게임이 끝난 뒤 성준수가 전영중을 불렀다. 지난밤 몰래 영화를 본 일로 아침부터 대차게 혼난 탓인지 성준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아 보였다. 하하, 나 또 괴롭히려는 거야? 그렇게 말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다른 이들은 둘의 일이라 생각했는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그 사이에 관련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어날지 말지를 고민하며 의자를 짚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서 있던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재차 말했다. 얘기 좀 하자고. 싫으면 여기서 하든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전영중은 몸을 일으켜 성준수를 따라 나갔다.
"내가 생각도 많이 해보고 주변에도 좀 물어봤거든?"
"뭘?"
"네가 나 볼 때마다 개지랄하는 이유."
"준수야, 개지랄이라니."
야, 그럼 너는 사람 볼 때마다 간첩 신고니 재첩국이니 대체 왜 힘드니 등등 입 터는 게 개지랄이 아니냐. 당장에라도 주먹 날리고 싶은 걸 이성으로 누르고 있는 게 분명해서 전영중은 그냥 조용히 하는 쪽을 택했다. 그거 다 신경 쓰고 있었구나. 듣고 바로 잊을 줄 알았는데.
"나 전학 간 것 때문에 그래?"
말이 없는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재차 물었다. 너 내가 전학 가기 전날에도 체육관 찾아와서 시비 털었잖아. 아,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성준수의 말을 들으며 전영중은 생각에 잠겼다. 성준수만 보면 자꾸 꼬아서 말하게 되고, 말이 생각보다 먼저 나가고, 결국에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를 반복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성준수의 말이 맞았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단순히 전학이 이유는 아니었다. 머뭇거리는 자신과 달리 과감하게 선택을 하는 성준수가 멋있었다. 성준수는 어릴 때부터 그런 놈이었으니까. 퇴부 권유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겁 없는 결심을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넘쳐야 할까. 전영중이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모습. 원중에 남아 주전이 되면서도 그때의 기억은 처음 꾼 악몽처럼 항상 전영중을 따라다녔다. 객관적으로 두고 보아도 자신의 능력이 남들보다 못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뒤돌아선 성준수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전영중이 가지지 못한 자기 확신을 갖고 있는, 성준수.
동경은 열등감 위에 피어난다. 그래서 전영중은 항상 성준수를 생각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멋있는 사람. 그랬던 이가 듣도보도 못한 학교로 가버렸다. 출전 정지라는 페널티까지 짊어지면서. 그래도 시합 때 보면 다르겠지. 내가 알던, 언제나 겁 없이, 그리고 가장 즐겁게 경기하던 그 성준수겠지. 그런데 마주한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남아있자고 붙잡았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같이 농구하자. 어릴 때 했던 그 시답잖은 약속만을 계속 되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성준수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보고 싶다는 말 대신 벽을 바라보며 이름을 부른 날들이 많았다는 것을, 성준수는 영영 모를 테니까.
갈 곳 잃은 동경은 자꾸만 엇나갔다. 괜히 시비를 걸고 싶었다. 네가 잘못됐다고, 그 선택이 틀렸다고, 나처럼 남았어야 했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전영중의 동경 전부가 부정되어야 했으니까. 어쩌면 저 자신까지도. 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욕부터 짓씹는 성준수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목적 없이 감정이 앞선 행위의 결과는 상인지 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모호했다.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을 후회했다. 그런데 모든 행동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지나쳤다. 원래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지점으로부터 멀리멀리. 우연으로 성사된 합숙에서도 전영중은 괜히 성준수의 눈치를 봤다. 스스로 떠나간 곳에 다시 발을 들이는 건 무슨 마음일까. 평소보다 더 예민할 줄 알았는데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지내는 성준수의 모습에 혹시나 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몰라 생겨난 열등감이라는 얼룩진 감정들에 좀먹힌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전영중이 지나치게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단했다. 그건 자신의 욕심이라고.
그런데 성준수가 묻고 있었다. 자신이 전학간 것이 속상했냐고. 그래서 자꾸 속을 긁어댔느냐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전학은 하나의 계기이자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그 이후는 성준수가 모를 전영중의 썩어가던 감정들이었고. 그래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치졸한 이유였고, 아니라고 대답하기에는 그 뒤의 이 복잡한 마음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침묵을 택했다.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몰라서 대답을 피했다.
"대답을 해야 내가 알 거 아냐. 듣고 있냐, 전영중?"
"어."
"그게 속상했냐고."
"…약간은."
결국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전영중은 시선을 피했다. 그 뒤에 다가올 결말이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아서.
"미안하다, 속상했다면."
"어?"
"그래도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거 이해하면 앞으로 지랄 좀 그만해 줘라."
그래도 오래 보고 지냈는데, 이런 사이로 끝나면 너도 불편하잖아. 전영중은 지금 제가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준수야, 나 사실 서운했어. 성준수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다 드디어 마음의 응어리로 품고 살던 문장을 내뱉었다. 실체 없는 문장을 볼 수 있다면 분명 그 문장은 닳고 닳아 색이 잔뜩 바래있을 것이었다. 같이 가자고는 한 번이라도 물어볼 수 있잖아. 혼자서 그냥 홀라당 결정하지 말고 나랑 얘기 한 번은 해줬을 수 있잖아. 친구니까 그 정도는 되잖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뱉었는지도 모를 말들. 그 끝에 성준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 괜히 이야기했나. 왜냐하면 눈빛에서부터 생각이 선명하게 읽혔기 때문이다. 이걸 가지고 나한테 개지랄을 해? 그 모습에 전영중은 황급히 사과를 했다. 너도 예민한 시기였을 텐데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고, 시합 중 도발이었어도 선을 넘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성준수는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그 말이 끝이었다. 별거 없었다. 알면서도 그러냐고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성준수는 자꾸 전영중을 봐준다. 전영중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아마 그동안 내뱉은 말들이 전영중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욕을 바가지로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성준수도 자각하지 못했을 그런 특별대우.
족히 일 년은 넘게 뒤틀려 있던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의 금은 생각보다 싱거운 화해로 끝났다. 둘 다 아직 미숙한 고등학생일 뿐이니까. 화해로 가기까지 조금 헤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성준수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순하리만큼 깔끔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 전영중은 왜 성준수와 고등학교에 오기까지 어떻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본인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이야기 끝났으면 들어가자는 성준수의 뒷모습을 보다 핸드폰으로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곧이어 성준수의 주머니에서 가벼운 알림음이 들렸다. 성준수가 다시 전영중을 돌아본다. 번호 그대로인가 해서. 그동안 연락 안 했잖아. 그런 전영중의 말에 성준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잘 지내라고 보냈더니 답장 안 하길래 나도 안 했지. 그건 생각 안하냐?
얼렁뚱땅 성사된 합숙 이후에 전영중은 심호흡 한 번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별거 아닌 이야기인데도 왜 긴장이 되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23:15 【부산 도착했어?】
【어】 23:18
【다음 경기 때 보자】 23:24
대답 사이의 간극에 전영중은 웃었다. 단답 후에 어떻게든 연락을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서. 아무래도 전영중이 했던 말들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농구 말고는 뭐든 무심한 성준수. 그런데도 작은 것 하나도 피드백하려는 성준수. 누가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전영중은 알았다. 그 속에 있는 다정함을.
대통령기 때 만난 성준수는 전영중을 보고 짜증을 내는 건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잔뜩 날 서 있지는 않았다. 짜증이라기보다는 뻔뻔한 낯짝으로 치대는 것에 대한 귀찮음 표시였다. 지난 문자 이후로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기까지 했다. 마주쳤다 하면 한쪽은 시비 걸고 한쪽은 두드려 패주고 싶은 걸 겨우 참는 사이였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 뒤로도 성준수가 서울에 올 적이면 종종 마주치곤 했다. 왜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지. 성준수의 표정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영중은 웃으며 말했다. 준수야, 여기는 내 집 근처이기도 한데 당연한 거 아닐까? 성준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전영중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나 지수 선물 사야 해. 같이 골라주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쇼핑을 함께하고, 밥을 같이 먹고.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생각나는 때였다.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 헤어지며 성준수는 그런 말까지 했다. 그게 계기였다. 그 이후로 연락의 빈도는 점점 잦아졌다.
다시, 일시 정지.
너무 앞인데.
조금만 빨리 감기.
▶재생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안 그래도 추위 많이 타는 전영중에게는 가혹한 계절이었다. 그런데도 롱패딩 말고 코트 꺼내 입었다. 데이트도 아닌데 옷차림에 신경 쓰는 꼴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약속 상대는 성준수. 전영중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성준수는 단 한 번도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오늘은 전영중이 유독 일찍 나왔을 뿐이었다. 종종 만나 함께 노는 것이 이젠 익숙한 일이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은 많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그런지 거리가 전부 들떠있었다. 온몸으로 크리스마스를 체감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 들뜬 상태에서도 전영중은 그리스도의 생일이고 뭐고 성준수의 생일부터 먼저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굳이 집에 있겠다는 성준수를 불러냈다. 수시 합격 발표도 났고, 무사히 대학 진학도 확정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 말에 성준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전영중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데오 거리는 온통 사람으로 붐볐다. 약속 시간이 되기 조금 전, 성준수에게 전화가 왔다. 못 온다는 전화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최대한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그 너머로 왜 이렇게 늦게 받냐며 가볍게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어디 있어. 사람 너무 많아서 안 보여.
그제야 전영중은 화색이 돌며 자신이 있는 위치를 말했다. 까치발 들며 손 흔드는 건 덤이었다. 멀리서 성준수가 걸어오더니 말했다. 손 안 흔들어도 충분히 보여.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큰 키였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평소처럼 대충 입고 나올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성준수도 나름 꾸민 상태였다.
"웬일이야? 오늘도 검정 티일 줄 알았는데."
"지수가 이거 입고 나가라더라. 이브라 사람들 다 멋 내고 있을 텐데 혼자 찐따처럼 입지 말라나."
푸핫. 전영중의 웃음에 성준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옷걸이가 훌륭하니까 괜찮아. 전영중은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데 진짜로 좀 차려입은 성준수는 제법, 아니 많이 근사해서. 저기 버스 정류장에 붙은 아이돌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수야, 너 안 춥냐. 그렇게 묻자 대답했다. 지도 코트 입었으면서 걱정은. 니가 추위 더 많이 타잖아. 누가 누굴 걱정해.
백화점 앞에 설치된 트리 앞에서 전영중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셀카 찍자. 그 말에 성준수는 뭘 그런 걸 찍냐는 표정을 했다. 다 추억이야. 빨리 와 봐. 전영중은 대뜸 성준수를 끌어당겼다. 또 막상 카메라를 켜니 어색하게 웃어주는 성준수. 전영중은 괜히 들뜬 마음을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가려보려 애쓴다. 야, 뭐 먹을래. 오늘 내가 쏜다.
예전만큼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크지 않다고는 해도 기념일은 기념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당일도 아닌데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빈자리 없이 꽉꽉 찬 레스토랑과 카페들. 그 옆을 지나쳐 가며 대한민국엔 노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덩치 큰 운동부 남고딩 둘은 최대한 어깨를 접어 이리저리 부딪치는 사람들을 겨우 피했다.
야, 우리 오늘 밥 먹을 수 있는 건 맞냐. 그 말에 전영중 마음만 조급해졌다.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이는 것 같았다. 좀 있어 보이게 멋있는 하루를 보내고, 이브인 만큼 분위기도 좀 내보고, 생일 축하도 해주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이런 날은 집에서 가족과, 혹은 숙소에서 부원들과 지내느라 이 정도의 인파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결국 겨우 들어간 곳은 프렌차이즈 레스토랑이었다. 비싼 거 사주고 싶었는데. 됐어, 걍 먹으면 되지. 전영중 속을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위로해 주려는 건지 성준수는 덤덤했다. 곧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담긴 접시가 줄지어 놓였다.
아, 좀 더 좋은 곳 가고 싶어서 용돈도 가득 들고나왔는데. 그 생각에 파스타 면만 휘적였다. 오히려 샹들리에 번쩍번쩍한 곳에는 커플밖에 없어서 먹다가 얹혀. 그러니까 표정 좀 펴라. 그 말에 전영중은 고개를 들어 마주 앉은 성준수를 보았다. 뭘 그렇게 봐. 다 티 나. 걍 처먹기나 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다 포크에 대충 걸쳐진 파스타를 마저 먹었다. 평소 같으면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도 낼 줄 모르냐고 말꼬리를 잡았을 텐데. 전영중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런 말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합격 축하한다는 등의 몇 번이고 했던 대화가 계속 돌고 돌았다. 하나의 생각에 매몰되니 그 외의 것에 집중하는 것이 영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원점으로 돌아오길 반복하는 대화를 겨우 주워 담으며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마쳤다. 가게를 빠져나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길에 빼곡히 들어찬 인파에 불가피하게 어깨가 부딪치며 손끝이 스쳤다. 추위 하나 안타면서도 차갑게 언 성준수의 손. 붉게 언 그 손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 흘러갔다.
남고딩 둘이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둘이 손잡고 인스타 감성 카페에 들어가서 허리 푹 숙여 손바닥보다도 작은 타르트를 잘라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평소랑 별다른 거 없는 하루처럼 흘러갔다. 코인노래방의 좁은 방에 몸 구겨 넣고 들어가서 노래 부르고, 고음 안 올라가는 성준수에게 역시 신은 공평하다면서 웃고, 등 한 번 얻어맞고.
날이 좀 더 따뜻해서 길에서 농구라도 좀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까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데서 농구하다 다치면 어쩔 거냐고 핀잔할 성준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전영중도 그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쪽이었다. 다만 좀 아쉬웠을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게 없었나 싶어서.
"너 농구화는 새로 안 필요하냐?"
"나중에 보러 가려고. 바꾸긴 해야 해."
"그럼 지금 가자."
생일 선물이라도 사줘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간 신발 매장. 성준수는 새것을 사면서도 이전과 같은 디자인을 고집했다. 앞으로의 팀 컬러 생각하면 그건 아니지 않아? 몰라, 이게 좋아. 그 대답이 전영중은 내심 마음에 들었다. 그 신발의 색은 원중의 색이었으니까. 지상에 완전히 녹아든 성준수가 여전히 그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자신이 특별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결제는 전영중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준수가 다시 제 신발을 고쳐 신고 있을 때 홀랑 계산해 버리고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그걸 왜 네가 사냐는 말에 전영중은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내뱉은 건 진부한 다섯 글자였지만. 생일 축하해.
겨울의 해는 짧아서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하게 눈도 내렸다. 화이트크리스마스니 뭐니 들뜨던 뉴스 기사들이 생각났다. 조금씩, 아주 옅게 쌓이기 시작한 눈 위로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헤어지기 전, 근처 빵집에 들러 케이크를 샀다. 그래봤자 죄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뿐이었지만. 기념일과 겹친 생일은 이래서 불편하다. 12월 25일보다 하루 빠르게 태어난 성준수. 크리스마스는 구원자의 생일이라 하는데, 성준수는 그마저도 불완전하다. 케이크를 손에 들려주는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일단 거절했다. 아까 선물도 받았잖아. 뭘 자꾸 챙겨줘.
그러게. 전영중은 목 아래로 그 말을 삼켰다. 왜 자꾸 주고 싶은지. 사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적절한 기회를 엿볼 심산이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말을 꺼내려고 하면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어서. 확신할 수 없는 결과가 두려워서. 그 초라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본심의 절반만을 내보인다. 가장 그럴싸한 거짓을 만드는 방법. 그동안 못 챙겨준 생일 한 번에 몰아주는 거야. 내년엔 나도 받을 거다. 먹튀 안돼, 준수야.
말할까 말까 고민을 수천 번. 조금씩 전영중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걸음은 생각의 속도와 열을 맞췄다. 성준수는 잠자코 전영중의 속도에 발을 나란히 했다. 빨리 좀 가자는 타박 하나 없었다. 전영중의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게 성준수의 집이라. 데려다주는 모양새가 됐다. 생일 주인공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부러 요란하게 생색을 내며 공동현관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바라보다가,
"준수야."
"왜."
막상 불러놓고서는 머뭇거렸다. 사람의 천성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다. 코끝에 닿는 눈송이가 차가울 만큼 겨울의 온도가 생경한데, 오히려 머리는 뜨겁게 핑핑 돌았다.
"…아니, 뭐 잘 들어가라고. 오늘 춥게 입고 나왔는데 감기 걸려서 고생하지 말고."
"……."
"왜 그렇게 쳐다봐?"
"…야, 너 진짜 할 말이 그것뿐이냐?"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진심과 솔직함 따위와는 거리가 먼.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당장에라도 넘칠 것만 같은 감정의 수문을 닫아두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행동. 시선을 피하며 내뱉는 말. 준수야,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내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야, 전영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 준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머뭇거리지 말고."
"……."
"니 꼴이 애잔해서 기회 주는 거야. 지금 말하든가, 아니면 평생 말하지 말고 살든가."
"……."
"나 간다. 평생 그렇게 살아라."
전영중을 바라보고 있던 성준수는 바로 뒤를 돌았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내뱉은 말들을 곱씹었다. 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뻔히 알고 있는 듯한 문장들이 낯설었다. 성준수는 훤히 보이는 기회를 줬다. 이것마저 망설여선 안 된다. 가장 확실하고도 가장 최후의 기회라는 것을, 전영중은 그 순간 알았다. 그래서 크게 불렀다. 성준수라는 이름 석 자를.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돌았다.
"야, 성준수!"
"어."
…나 너 좋아해. 그게 전영중의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멋없을 고백. 그 순간 성준수는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거 봐, 말할 줄 알면서. 전영중은 이 모습을 언젠가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우리 다른 대학 아니었냐. 이삿짐을 옮기며 성준수가 말했다. 그 질문에 전영중은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성준수가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기지 않은 탓에 박스 개수는 많지 않았다. 덕분에 자취방에 박스 줄줄이 넣는 과정은 생각 외로 금방 끝났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도움을 받아 이사를 하며 한숨이나 푹푹 쉬었다.
개강하기 한 달 전. 추위도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 시기. 둘은 자취방을 구했다. 같이 사는 건 아니고, 같은 건물 오피스텔. 두 대학 사이에 위치한 곳. 성준수는 11층. 전영중은 그보다 2층 아래. 전영중이 자취방 깔끔한 곳으로 구한 뒤에 성준수도 자취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오랜 친구인데 가까운 곳에 구하면 더 좋겠다며 덜컥. 전영중의 집 위층에 성준수 자취방을 구해버린 것이었다. 사귀는 건 둘째 치고 빙글거리는 얼굴로 가끔 속 긁는 건 여전했다. 아마도 자신의 반응을 즐기는 것이겠지. 무시하면 흥미를 잃고 그만둘 텐데, 찔리면 찌르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마는 성정이라. 동거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가까운 집이었으니, 이제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시달리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준수야, 너 좁은 숙소에서 부대끼는 건 신물 나서 자취하고 싶다며. 아니 그런데 왜 하필 네 윗집이냐고. 여사님이 가까이 살면 좋은 거 아니냐며 여기에 집을 마련해주셨으니까? 그 말에 성준수는 이마를 짚으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남자친구랑 같은 건물에 살면 좋잖아. 웃는 낯으로 이야기는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한 소리 하려다 말았다. 지겹게도 본다면서 구시렁거려도 이사까지 손수 도와주러 온 사이니까. 전영중도 그것을 알기에 별말 하지 않았다. 표현이 서투른 건 전영중도 마찬가지라. 아직 100일도 넘지 않은 연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삐걱거렸다. 워낙에 자주 부딪치던 사이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마저도 좋았다.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으니까. 각자 다른 길을 걷던 작은 세계가 서로 손발을 맞춰 나가는 과정.
그러나 걱정이 질색했던 것과는 달리 3월은 너무 바빴다. 신입생 행사가 휘몰아쳤고, 개강하자마자 2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대학 농구 리그가 시작됐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랴, 훈련하랴, 시합 뛰랴. 쟤가 집에 들어왔는지,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강의 중간 비는 시간이나 시합이 모두 끝나고 돌아가는 길, 혹은 자기 전. 그렇게 일상 속의 시간들을 작게 쪼개고 쪼개어 연락을 이어 나갔다. 무의미하게 버려질 수도 있었던 시간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덧붙였다. 강의실에서, 도로 위에서, 침대 위에서, 혹은 그 어느 곳에서라도.
꼬박꼬박 오는 연락으로만 아직 살아있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하길 한 달. 그사이에 짬을 내어 보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전영중은 굳이 성준수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사이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전영중은 지금의 거리에 충분히 만족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사귀는 게 어디냐. 그런 생각에 자꾸만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했다.
얼굴을 마주한 건 주익대와 준향대 경기에서였다. 둘 다 스타팅은 아니었다. 고작 1학년이었으니까. 둘은 상대편 코트에서 서로를 찾다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인사를 했다. 니 준수랑 만나기만했다카면 싸우지 않았었나. 그 모습을 본 진재유가 뒤에서 말을 흘렸다. 작년에 보기만 해도 언성 높이던 모습만 봤으니 그렇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전영중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우리 사이 엄청 좋은데. 맞나. 어, 맞아.
중간중간 주전 체력 관리를 위해 교체되어 코트로 들어가면서도 전영중은 성준수를 살폈다. 오늘은 안 나오려나. 경기의 흐름은 완전히 주익대 쪽이었다. 국대 선발된 선수들도 여럿 섞여 있는 리그 1위이니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타임아웃 이후 성준수가 코트로 들어오며 먼저 들어와 있던 박병찬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 보였다. 박병찬을 활용한 안쪽 공략과 동시에 성준수의 3점 슛으로 코트 범위를 넓히려는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성준수를 마크하고 있으려니 전영중은 다시금 고등학교 때의 시합이 생각났다. 동경과 질투는 사실 한 끗 차이라, 그때는 성준수를 향한 남모를 열등감과 질투가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떠한가. 어쨌거나 그때보다 훨씬 더 건강한 감정들이라는 것 하나는 자부할 수 있었다. 결국 전영중을 어린아이처럼 만드는 것도, 어른스럽게 만드는 것도, 전부 성준수다.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임했다. 너를 만나고 내가 더 발전할 수 있었노라고, 둘에게 가장 소중한 농구라는 형태로 전하는 말.
중간에 교체되었던 성준수는 후반부에 다시 코트로 돌아갔다. 벤치로 빠진 전영중은 성준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오늘따라 슛감이 좋은지 넣는 족족 들어갔다. 물론 남은 시간 내에 점수 차를 좁히기에는 빠듯했지만. 팀을 구하는 슈터가 되고 싶어. 멋있잖아.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마지막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슛을 던질 수 있냐고. 어린 성준수는 그런 게 왜 궁금하냐는 듯이 말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남을 구하는 히어로는 멋있잖아. 제법 단호한 대답에 전영중은 더는 묻지 않는다. 준수 진짜 멋있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생각을 반복할 뿐. 물론 지금의 성준수는 그때와는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때의 대답은 전영중에게 꽤나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삐────.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음이 들렸다. 88:69. 곧이어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88:72. 지고 있는 와중에도 아득바득 버저비터까지 우겨넣은 성준수. 전영중은 그러한 태도가 성준수를 관통하는 가장 정확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영중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성준수를 만든다. 어쩌면 전영중 자신은 아직까지 자신 없어 하는 일.
시합이 끝났어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기는 이겼으니 크게 혼나진 않겠지만 턴오버가 잦았던 이들은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옆쪽을 슬쩍 보니 준향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똑바르게 뒷짐 지고 고개 숙인 채 감독의 말을 듣고만 있는 성준수. 전영중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준수가 고개 숙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항상 꼿꼿하고 위를 봤으면 좋겠어. 결국에는 집중 똑바로 안 하냐는 쿠사리를 먹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전영중은 생각했다. 이 와중에도 네가 생각나는 걸 보니,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널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준수야, 너는 어때? 나는 너의 최선이 궁금해.
연애의 과정이 순탄했다면 거짓말이다. 말 그대로 둘은 더럽게도 안 맞았다. 둘의 사이를 아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둘이 언제쯤 헤어질지를 점쳤다. 그래봤자 그 사람들의 수도 한 손으로도 충분히 셀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서도 둘의 의견이 갈렸다. 어차피 다 알게 될 테니 알 사람은 알게 두자는 전영중. 주변이 시끄러워지면 귀찮으니 굳이 말하지 말자는 성준수.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들어맞는 의견이 없었다. 그 대립은 싸울 때면 특히 더 두드러졌다. 성준수는 가감 없이 말을 하길 원했고, 전영중은 적당히 참고 넘어가길 원했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아니, 다 말하면 서로 상처받잖아. 그런데도 둘 다 쉽게 헤어지자는 말은 안 했다. 답답함에 못 이겨 씩씩거리고, 괜히 비아냥거리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낮게 이름을 부르는 상황에서도. 이럴 거면 그냥 헤어져, 라는 그 말 만큼은 절대로. 어쩌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둘 다 이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런데 이번 냉전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전영중이 일방적으로 성준수를 피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야 성준수도 전영중에게 꾸준히 얘기 좀 하자고 연락하고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들겨 댔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자 그마저도 조용해졌다. 지나치게 얌전해진 일상을 보며 전영중은 또 속이 꼬였다. 사실 이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 불행으로 걸어 들어가길 자초한 일이었다.
학교가 다르다 보니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어떻게 지내는지 알기 어려운 건 여전했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이야기해주는 부분만을, 성준수는 전영중이 이야기해 주는 부분만을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주어지는 외부의 정보들. 그것을 통해 서로에게만 의존하는 관계가 얼마나 좁고 허술한지 알게 된다. 그러니까, 전영중이 들은 소식은 진부하지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성준수의 과팅 참여 소식. 정말 뻔하디뻔한 원인이었다. 너무나 클리셰적이라 우스울 정도의 일. 그런데 당사자가 되니 얘기가 달랐다. 쿨한 애인이 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당장에라도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얼굴을 마주하면 또 미운 말들만 늘어놓을 것 같아서. 생각을 지나쳐 뱉어낸 말들은 후회라는 창살이 되어 스스로를 가둘 것이 뻔해서. 너를 자꾸 이해하고 싶었다. 준수도 학교생활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몇 번이고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자신에게 세뇌와도 같은 위로를 건넸다.
그렇지만 걔 성격에 싫으면 시원하게 욕 퍼부어 주면서 안 갔을 텐데. 잘생겨서 인기도 많을 텐데. 캠퍼스에서 번호도 많이 따이겠지. 과팅이며 미팅 나가자는 얘기도 끊이질 않겠지. 스스로를 수몰된 감정 속에 밀어 넣는 것은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졌다. 곱씹을수록 짙어지는 비릿한 감정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삐걱이기만 하는 관계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확신이 없으니 자꾸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애정 표현이 드물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붙잡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가끔은 불안하다고. 나는 생각보다 질투가 많다고.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렇게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이렇게 살게 된다고.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이유는 단순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참았다. 전영중은 제 마음의 크기가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얼룩진 마음들을 다 보여주면, 겨우 손에 잡은 것을 놓치게 될까 봐. 자신을 질려할까 봐. 부정적인 모습은 자꾸만 숨기고 싶었다. 그걸 성준수가 모를 리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눌러 담기만 한 감정은 깊은 곳에서 푹푹 썩어갔다. 성준수의 흔적이 즐비한 집 안은 작은 지옥과도 같았다. 먼저 말을 꺼낼까 하다가도, 생각만 하면 울컥 넘쳐 오르곤 해서. 전영중은 이 불안정한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길 빌고 또 빌었다. 잡생각을 없애려고 부러 체육관에 붙어살았다.
하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밤늦게 집에 들어갔을 때, 불이 켜져 있는 실내에 의아함을 느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성준수가 앉아있었다. 전영중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왜 여기 있어? 그 질문에 성준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주일 넘게 잠수 탔으면서 그딴 질문이 나오냐? 왜,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준수야, 이거 주거 침입이야. 그 말에 성준수는 픽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나갈까? 그 질문에 전영중은 대답을 못했다.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주일도 넘게 눌러 담으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감정을 어떻게 혼자 감당하겠어. 대답이 없자 성준수가 되물었다.
"정말로 나가?"
"……."
"거 봐. 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너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
"너 왜 자꾸 피하기만 해? 뭐가 그렇게 쉬워?"
"나도 생각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냐."
"예전부터 뭘 자꾸 혼자 생각만 하냐고. 야, 연애 혼자 해? 너만 노력한다고 생각하지 마."
"너 아무것도 모르잖아.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야, 말을 해야 알지. 내가 늘 말하잖아. 연애는 같이하는 건데 그걸 왜 아직도 몰라."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전영중은 말을 못했다. 평소에 신랄하게 입 터는 건 전영중이고 빡돌아서 욕만 짓씹는 건 성준수였는데. 이럴 때만큼은 논리적인 성준수에게 전영중이 아무 말 못 했다. 그런 전영중을 성준수는 집요하게 들여다봤다. 너 그것 때문이지, 과팅.
어, 맞아.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미리 말을 안 해. 야, 말하기도 전에 잠수 탔잖아. 거기서부터 또 싸움이 번졌다. 언제나와 같은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유독 그 싸움의 꼬리잡기가 길었다. 성준수는 자꾸 도망 다니는 전영중을 붙잡고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집요함에 이리저리 피하던 전영중은 결국.
자꾸 불안하게 만들잖아, 니가. 그 말을 기어이 하는 게 조금은 억울하고 부끄러워서. 씨발, 쪽팔리게 진짜. 입안에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성준수는 우는 전영중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뭘 불안하게 하는데.
"……."
"전영중."
"……."
"영중아."
이름을 부르기에 결국 눈을 마주쳤다.
"나도 지금 답답한 거 겨우 참고 있거든. 말해줘야 안다고. 나 농구 말고는 관심도 없어서 이런 거 서툴잖아."
당장에라도 짜증 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성준수의 모습. 최선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 모습에 전영중은 들키고 싶지 않던 속내를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그의 옆에서라면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무너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평생 이 사람의 하중을 견디며 살아보고 싶다고.
표현 많이 해줘. 그 말에 성준수의 표정이 무슨 말이냐는 듯 찡그려졌다. 전영중이 재차 말했다. 그럼 나도 짜증 나는 거 있음 바로 말할게.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말 정도는 말해 줘. 우리 그런 사이는 되잖아. 전영중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도 안 붙이면서 그런 부탁을 했다.
다 울었냐.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야 성준수가 물었다. 전영중 눈 주위가 시뻘갰다. 킁. 코 한 번 더 훌쩍이고 물었다. 너 내일 바빠? 오후에 연습. 그럼 오전에 나랑 놀아. 그 말에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애같이 굴어도 괜찮고, 더 예민하게 굴어도 괜찮은 사이. 자고 가. 그래서 마지막까지 애처럼 떼 한 번 더 써봤다. 씨발, 언제는 나가라는 것처럼 봐 놓고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익숙하게 전영중 옷장에 들어가 있는 제 옷을 찾아낸다. 사람들은 전영중이 성준수의 성질머리를 받아준다고 생각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또 다르다. 전영중의 억지를 성준수가 받아준다. 전영중은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결국 다음날 처참한 몰골로 일어났다. 까치집에 퉁퉁 부은 얼굴들. 분주하게 둘 다 사람 꼴을 하고 집을 나섰다. 성준수의 집에 들르지 않아도 그게 가능했다. 그만큼 집의 경계가 사라져 있었다. 서로의 물건이 가득 들어찬 두 개의 집.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뿌듯했다.
목적지는 준향대. 스케줄이 전영중보다 촉박한 성준수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결정이었다. 여름을 준비하는 교정은 꽃이 다 지고 쨍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개강 이후 너무나 바빴던 탓에 한 번도 와볼 생각을 못 했다. 나 캠퍼스 구경시켜 줘. 그럴 생각이었다고 대답하며 성준수는 전영중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밖에서 손잡는 건 처음 아닌가. 그 생각에 전영중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반발자국 앞서 있는 성준수를 보니, 글쎄. 놀리는 건 그만뒀다. 그쪽 얼굴은 터질 듯이 활활 불타고 있어서.
밥 먹고 나와서는 근처 플리마켓 가판대도 구경했다. 준수야, 이거 너 닮았다. 작은 인형 키링 하나를 집어 들어 성준수 얼굴 옆에 갔다댔다. 뭐야, 이 등신같이 생긴 고양이는. 와 진짜 똑같이 생겼어. 이건 너 닮았네. 성준수가 잡은 건 그 옆에 있던 펑퍼짐한 너구리 키링이었다.
"이게 뭐가 날 닮아."
"똑같구만. 돼지 너구리."
"말이 심하다, 준수야."
그 말에도 애정이 담겨 있어 싫지만은 않았다. 얼마예요? 전영중은 핸드폰을 꺼내 계좌 이체를 했다. 망설임 없이 금액 적고, 계좌 입력하고, 지문 찍고.
"야, 이거 사서 뭐 하게?"
"닮았잖아."
"그렇다고 사냐?"
"어. 화해 선물. 소중하게 간직해~"
"왜 고양이 말고 너구리 주는데."
"그거 나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간직해."
"어휴, 진짜 별…."
그러면서도 성준수는 그 키링을 가방 속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전영중은 그저 웃었다. 자기도 가방 지퍼 끝에 고양이 키링을 달았다. 원래 다를수록 잘 맞는 것들이 있다.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은 끌어당기는 것. 나는 빨간 N극, 준수는 파란 S극. 정반대에 있는 것 같아도 결국엔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고. 전영중은 남몰래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평범한 데이트도 많이 했다. SNS에 핫플이라 올라온 곳을 남자 둘이 가기엔 아직은 낯부끄러워서. 생활 반경 주변을 맴도는 일이 더 많았다. 언제는 기내초 근처 추억의 분식집이 있던 곳에도 가봤다. 갓 붙은 것 같은 임대 종이가 문 앞에서 팔락였다. 어렸을 때 여기 분식집 떡볶이랑 피카츄 맛있었는데. 전영중이 그렇게 말하면 그 말에 동의하듯 성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진 지 얼마 안 됐나 보다. 성준수가 또 동의한다. 그러게. 그런 일상의 반복들.
드르르르륵. 달칵.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재생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날은 흐렸다. 아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빠듯하게 일어난 탓에 레이트 체크아웃을 요청했다. 그렇게 둘은 2시간의 여유를 얻었다.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어제 장을 보며 사 온 쉐이크를 뜯어 먹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옷들과 짐들을 더플백에 쑤셔 넣었다.
두고 간 거 없지? 없어. 마지막으로 숙소를 둘러보고 체크아웃을 했다. 그사이 비는 멈춰 있었다. 어젯밤처럼 무서울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면 운전이 걱정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이번에도 성준수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올 때처럼 휴게소 들르면 바꾸자. 전영중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중간중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 패인 웅덩이 탓에 양옆으로 물보라가 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구름은 가득했지만, 날은 딱 좋았다. 조금 습하고, 비 온 뒤의 흙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지만, 전혀 덥지 않은 그런 날.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날. 정말로 무덥고 뜨거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전영중은 창문을 내려 바람을 맞이하기도 했다. 앞머리가 뒤로 확 젖혀지며 이리저리 춤을 췄다.
산속의 도로로 접어들자 온통 그늘이었다. 구불구불하고 미끄러운 길에 성준수가 핸들을 고쳐잡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빠아아아아앙. 시끄러운 경적 소리. 중앙선을 빠르게 넘어오는 덤프트럭. 이런 씨발! 냅다 욕부터 박는 목소리와, 급하게 핸들을 꺾는 성준수. 그 짧은 순간에도 전영중은 보고 말았다. 어떻게든 본능을 이겨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는 것을. 명백히 누군가를 구하고 싶어하는 행동.
충돌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꼈다. 비탈길로 차가 두어 번 구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꾹 감았다 떴을 때, 옆에서 신음하는 성준수가 제일 먼저 보였다. 뒤집힌 차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여러 번 찼다. 힘을 줄 때마다 정신이 자꾸 아득했다. 겨우 내리자마자 한 일은 119 신고였다. 차가 크게 흔들린 탓인지 어지러웠다.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발음이 샜다. 겨우 상황을 알리고 성준수를 꺼내려 차체를 돌아가려 했을 때,
큰 폭발음과 함께 차가 불타기 시작했다. 언젠가 보았던 성준수의 붉은 얼굴보다 더 짙은 색의 불길로. 폭발의 충격에 전영중은 비틀거리며 수풀 위로 쓰러졌다. 자꾸만 정신이 아득했다. 안에 있는 성준수를 구해야 하는데. 저렇게 두면 위험한데. 아직 준수도 의식을 잃은 건 아닌데. 저 안이 얼마나 뜨겁겠어. 안 그래도 더위 많이 타는 놈인데. 불길 안이 얼마나 싫겠어. 지금 나밖에 구할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마음과 달리 정신은 자꾸만 아득하게 현실을 벗어났다. 조금씩 페이드아웃되는 시야. 준수야. 그 이름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어 불렀는지, 혹은 완전한 착각이었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정지
여기까지.
전영중은 제 앞에서 저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성준수를 보며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다 되찾은 기억이라는 것을. 그와 동시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성준수는 죽었다.
그것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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