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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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喪失상실 : desiderium (外)

나는 보기보다는 정이 깊었다. 표현하질 않아 무뚝뚝한 것과 정이 없는 건 달랐다. 그리고 정이 많은 것과 정이 깊은 것도 달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한 번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었다. 좋아하는 건 많이 없었지만,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끝까지 소중했다. 그것 하나밖에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필연적으로 지치는 시간이 찾아오기 마련인데도, 나는 그런 걸 몰랐다. 그 시간에도 소중한 걸 소중하게 대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몰두하기만 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고 강인하다고도 했고, 끈기 있다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독하다고도 했고. 그들이 뭐라 이야기하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기 바빴으니까. 나는 한 번 마음을 준 것에서는 헤어 나오질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 함께하게 된 농구가 그랬고, 다음으로는 그 애가 그랬다.

 

 

 

너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날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시비 거는 6학년들을 때려눕힌 것으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다짜고짜 짱이 누구냐며 묻던 어른들에 괜히 쫄아서 하루를 보냈었던가. 어디 가서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려주라며 엄마도 뭐라고 안 한 일이었는데. 자기들이 뭔데 부르지, 싶은 불만도 함께였던 것 같다. 알고 보니 형사도 경찰도 아니었고 농구부 권유하던 코치였다. 그때 너도 처음 만났었나. 어리다. 게임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에 대뜸 대답하는 걸 보고 느낀 첫인상은 그랬다. 나도 어렸을 적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에는 나도 승부를 뒤집는 슈터가 되고 싶어서 체육관으로 향했지만. 그때부터 내 인생은 농구공과 함께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너도 항상 함께였다. 그게 참 자연스러웠다.

남들 죄다 태권도 학원 다닐 때 농구 다니는 건 고작 넷이라. 당연하게도 낯이 익었다. 살갑게 다가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네가 먼저 와서 인사를 했다. 너 2반 성준수지? 말하는 목소리가 앳되었다. 키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크면서도 목소리만은 그랬다. 그래서인지 너에게서 시선을 쉽사리 떼질 못했다.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너를 제대로 보았다. 농구공 같다.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 눈도, 머리통도 동글동글. 앳된 목소리까지 동글동글.

그렇게 연습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너와 나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사실 말없이 집으로 향하는 나를 네가 멋대로 뒤따라온 것이었다. 욱하는 성격 탓에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곤 했던 어린 날의 나는, 말주변이 없는 만큼 친구 사귀기에는 더욱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네가 내 뒤를 계속 따라오며 말을 걸지 말지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먼저 뒤돌아서 이름을 부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야, 정영준."

"정영준 말고 전영중인데."

"아, 미안."

"됐어. 다들 헷갈리더라."

"이름 잘못 불러서 미안."

"괜찮아."

 

어색함이 대화의 흐름을 멋대로 잘라냈다. 그때의 너는 무슨 생각이었을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너는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었는데. 그때 무표정으로 걸어가는 나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네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을지 이제야 가늠해 본다. 너라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며 머뭇거렸을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면 기껏 말 걸었더니 무시당하는 상황이라든가.

 

"왜 자꾸 따라와."

"그, 별건 아니고."

"어."

"친해지고 싶어서. 이제 자주 볼 텐데 친해지면 좋잖아."

"……."

 

나는 대답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친하지 않은 이에게 말을 거는 게 제법 힘겨운지 두 볼을 넘어 귀까지 새빨개진 네 얼굴을 보느라 그랬다. 내가 대답이 없자 너는 괜히 내 눈치를 봤다. 덩치만 컸지, 자신감이 부족한 것이 묘하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했다. 그럼 그냥 부르면 되지. 너 내 이름 알잖아. 그 말에 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아까도 인사했는데 그냥 갔잖아."

"쉬는 시간 끝나서 그랬어."

"…아. 그랬구나. 내가 별로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 오해할 만했네. 너는 집 어딘데? 방향 다른데 나 따라오는 걸까 봐."

"…같은 방향이야."

"너도 XX 아파트 살아?"

"응."

"뭐야, 엄청 가깝게 살았네."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초등학교. 그곳에 다니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 뻔하고 흔한 공통점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너는 웃었다. 너 아침에 학교 같이 가는 애 있어? 없으면 나랑 같이 가자. 영민이랑 훈이는 다른데 산대. 아, 걔네가 누구냐면 같이 농구하는 두 명 더 있잖아. 나중에 인사시켜 줄게. 너는 말주변이 없다고 하더니만 금세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원래 같으면 귀찮다거나 시끄럽다고 생각했을 텐데 너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학창 시절, 교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체육관 안에서 친한 사람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상한 일이었다.

내 뒤를 졸졸 쫓아오며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는 너에게 대답했다. 나 원래는 등교 혼자 했어. 내일 아침에 봐. 몇 시까지 나가면 돼? 그럼 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대답했다. 좋고 싫음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게 웃기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우리 집 공동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네가 있었다.

 

 

 

함께하면서 너에 대해 알게 된 점은 마음이 여렸다. 그런 너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았다. 낯가리는 것 같더니만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함께 다니게 된 넷의 구심점이 된 건 너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독 더 친했다.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잔뜩 부어진 너의 노력이 있을 것이다.

연습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마다 입술 꾹 다물고 눈물 참는 모습을 본 것이 여러 번. 네가 눈물도 많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모르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경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감독님은 타임아웃 이후 가장 키가 컸던 너에게 마지막 슛을 던지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게 내심 부러웠다. 왜냐면 이런 순간에 공을 던져 점수를 내고, 팀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내가 농구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대뜸 무섭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순간 너를 걱정하기보다는 손을 들었다. 그렇게 공을 던졌다. 역전승을 거두고 나서야 생각해 보니 너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었다. 농구가 친구인 너보다 우선시되어도 괜찮을지를 잠시 고민하다 관두었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걸 해야지. 그게 맞는 거지.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쉽사리 가시지 않아 경기 후에도 벌건 눈을 문지르고 있는 너에게 다가가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야, 그래도 네가 수비 잘 해줘서 점수 차도 많이 안 벌어진 거야. 그런데도 너는 마냥 서러워했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그 말에야 너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 내 곁에서 걸었다.

 

너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거야? 정했어?

원중 가겠지. 뻔하지 않냐.

그렇지….

너도 그럴 거잖아. 같이 가겠지.

 

이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기억.

인생이라는 건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그 주인조차 앞날을 알 수 없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니까, 나의 전학 또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너는 남기로 했다. 같이 갈 생각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첫째는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 전학 결정 이후에 잔뜩 서운한 표정을 했다. 모르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얼굴. 나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네 마음을 배려해 주기엔 현실이 절박했다.

그렇게 나는 떠났다. 너를 남겨두고. 매일같이 얼굴 보고, 괜히 말꼬리 잡고 늘어지며 장난치고, 뭐라도 먹을라치면 한입 먼저 베어 물던 사람이 사라지니까 조금 허전하긴 했다. 원래 빈자리는 과장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마저도 바쁘게 살다 보니 서서히 잊혀 갔다. 남들 말마따나 독하게 살았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이 깊었으니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열중해야 했으니까. 우선순위가 확실했을 뿐이다.

이렇다 할 실적 없이 줄어들기만 하는 시간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흔한 얘기였다. 정말 흔해 빠진 서사. 대한민국에 운동하는 놈들은 널렸고, 기회의 문은 좁았다. 그 당연한 현실이 나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다. 그래도 지레 포기하고 나자빠지는 흔하면서도 한심하기까지 한 놈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유독 예민한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네가 온갖 지랄맞은 말을 할 때면 일단 짜증부터 났다. 예전처럼 그 말 뒤에 숨은 네 속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속 긁어대는 네 말에 눈 뒤집혀서 주먹이 먼저 나갈 뻔한 적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너를 미워하진 않았다. 지상고 후배들이 저러다가 준수 햄이 전영중 선수 죽여놓는 거 아니냐고 벌벌 떨 때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말했다.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빡치는 건 순간의 감정이지만, 싫어한다는 것은 지속되는 것이라 그랬다. 말하지 않았나.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끝까지 그러했다고. 쌍용기에서 원중과의 경기가 끝난 뒤 멀어지는 동그란 뒤통수에 대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준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네가 자리를 뜨고 난 뒤 웬일이냐며 소곤거리는 지상고 애들을 향해 픽 웃었다. 니들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아, 진짜 존나 무겁네. 야, 전영중. 좀 알아서 걸어 봐.

준수야아아.

하 씨발, 왜.

무슨 생각 해?

너 존나 무겁다는 생각.

또?

이렇게 또 술 처먹으면 존나 패줘야겠다는 생각.

또?

…옛날 생각.

너도 옛날 생각 해?

그럼 안 하냐?

우습게도 쌍용기 이후 입시에도 숨통이 트이니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너였다. 물론 여전히 가장 중요한 건 입시, 그러니까 농구였지만. 너 또한 이 부분은 나와 같을 테니 크게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쯤이었나. 너에게 연락을 한번 해 봐야 하나,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 것이.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본가에 다녀올 일이 생겨 서울로 향하던 참에 지상고 애들이 서울 여행 가고 싶다며 달라붙었다. 그 시간에 연습이나 하라고 소리치려다가 말았다. 쌍용기 이후 그 애들이 가끔 기특해서 그랬다. 마음대로 하라며 KTX 타고 도착한 서울. 그러다 마주친 원중놈들이랑 너.

무슨 일이냐는 너에게 농구부 전원이 줄줄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속 긁는 소리를 해댈 것 같은 얼굴이라 그랬다. 상황을 듣더니 너는 웃음을 참았다. 면상 갈기고 싶으니까 기분 나쁘게 처웃지 마라. 짜증 나긴 했지만, 화가 날 정도는 아니라 가볍게 말을 던졌다. 너도 그걸 알았는지, 혹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건지 여전히 웃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더라. 15번 달고 뛰던 놈과 정희찬의 합작으로 원중 숙소로 향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분위기 많이 바뀌었네, 원중 군기도 다 옛말인가 봐? 그치, 많이 바꿨어. 나 전학 가기 전까진 똥군기 남아있었잖아. 감독님 바뀌고 우리가 3학년 되면서 좀 바꿨어. 고생했네. 선배들 눈치 살피면서 악의에 민감해지는 건 너도 진절머리 났잖아. 너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본다. 마치 그 모든 일이 이미 떠난 나를 위한 것이었던 양.

밤에는 몰래 모여 영화를 봤다. 그런 시답잖은 일탈 같지도 않은 일탈에는 관심 없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마음이 동해서. 이상하게 너도 낄 거냐는 네 말투에 비아냥거림이 없어서. 누구보다 부탁하는 말투라서. 답이 없자 뒤돌아서는 동그란 머리통에 자꾸 시선이 가서. 시작부터 이상하고 기이하기만 한 이 하루의 끝에, 한 번 더 이상한 행동을 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닌데 자꾸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이유를 찾았다. 작은 노트북을 접이식 책상 위에 올려두고 모여 있는 곳에 가자, 다들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너는 없었다. 그냥 처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네가 들어왔다. 너는 너무나 당연히도 내 옆자리를 꿰찼다. 언젠가의 어린 날들처럼.

그딴 걸 왜 처봐, 그럴 거면 농구나 봐. 야한 영화 보자는 누군가의 한심한 말에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이럴 바에야 빨리 잠들어서 체력 관리나 할 걸 괜히 왔다는 생각을 또다시 했다. 결국 고른 건 엑소시즘이었다. 악마가 나오는 공포 영화.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 무표정으로 그 작은 화면을 응시했다. 몇몇은 악마 소환과 관련된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했고, 너는 영화를 보는 건지 마는 건지. 나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왜 날 봐. 그 말에 네가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그러더니 무섭지는 않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나도 그냥 아무 대답이나 했다.

 

"저 말 진짜였으면 좋겠다."

 

무언가의 대가를 가지고 악마를 소환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 그러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지를 생각해 봤다. 농구니 꿈이니 하는 추상적인 것들 말고. 정말로 불에 태울 수 있는 무언가. 아직까지는 없는데.

 

"왜?"

"소원 빌게."

"농구 잘하게 해달라고 하게? 아니면 대학가게 해달라고 하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부상 안 입고 오래 농구하게 해달라고 할 거야."

 

너는 여전히 내 옆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 있는 것처럼, 매일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시비만 걸어대면서도, 여전히 내가 소중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 시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어려운 너의 시선. 그 순간 확신했다. 너는 나에게 심통이 나 있구나. 그걸 또 말하지 못하고 주위만 빙빙. 속내를 감추려고 괜히 과장되게 하는 말. 그걸 깨달으니 그동안의 네 행동들이 웃겼다. 우스운 건 아니었다. 그냥 여전히 어린애 같아서. 그래서 나는 부러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했다. 네가 나를 마음껏 훔쳐볼 수 있도록.

 

 

 

나 전학 간 것 때문에 그래? 결국 네가 감추려 했던 속내를 부러 들춰낸 날.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며 지랄에 지랄을 할 줄 알았는데. 너는 당황한 낯을 하더니 순순히 인정했다. 단순히 친했던 놈이 전학 간 것에서 느끼는 서운함 외에도 느끼는 많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그걸 하나하나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기에 굳이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싱거운 화해. 그리고 그날 밤 도착한 문자 하나. 부산 도착했어? 그제야 오랫동안 멈춰있던 대화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연락은 자연스러웠다. 뭐 하냐고 묻다가, 자냐고 묻다가, 안 잔다고 대답하면 왜 안 자냐고 묻는 탓에 욕만 늘어갔다. 아마 핸드폰 액정이 아니라 키보드였다면 분명 ㅅㅂ 형태로 칠이 벗겨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빈정거리는 듯 장난치는 네가 진심으로 싫지는 않아서. 그 행동들에 눈 뒤집으며 뒷목 잡은 적이야 있을지언정 존재 자체를 미워하진 못해서. 종종 연락하고, 서울 오면 가끔 만나고. 눈치채지 못한 사이 너는 또다시 나의 일상이 되어있었다. 신기하고도 이상한 놈이었다.

그때부터였나. 차츰 너와 나 사이에 웬만한 비밀이 없어진 것이. 사실 쌍용기 이후의 작은 부상이 마음에 걸렸던 터라 원중 15번이 했던 악마인지 미친인지에 대해서 조금 찾아보긴 했었다. 피로 마법진을 그리세요. 가운데에 무언가를 두고 태우세요. 거기까지는 흐린 눈으로 읽다가 말도 안 되는 발음의 주문까지 읽어 봤을 때는 진한 현타가 몰려와서 그만뒀다. 그래 시바거, 부상도 내 힘으로 이겨내 주마. 이 사실을 네가 안다면 죽을 때까지 그 약 오르는 표정으로 깐죽댈 것이 훤히 보여서 죽어도 비밀에 부쳤다. 이건 아마 네가 영영 모를 나의 비밀이다.

…….

야, 좀 깨서 걸으라고.

와아아, 준수다아아.

아 미친, 시바거…. 버리고 갈까 보다. 이런 거 뭐가 예쁘다고.

그러게. 뭐가 예쁘다고.

그날은 아마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였나. 서울이라는 이야기에 너는 나를 불러냈다. 명분은 나의 생일이었다. 평소 입던 것처럼 대충 검정 티에 롱패딩이나 걸치고 가려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동해 지수를 불렀다. 괜찮은 것 좀 골라 줘. 결국 검정 티며 패딩은 구경도 못 하고 코트나 걸쳤다. 머리 세팅 도와주던 지수의 데이트 가냐는 말에 눈 좀 흘겼다가 잔뜩 쫄아 울먹이길래 달래주느라 조금 늦었다. 10분 전에는 도착하려 했었는데. 이브의 길거리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참 어려운 일이었다.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남들보다 훨씬 높이 솟아있는 동그란 머리통이 선명하게 보였다. 잔뜩 멋 낸 것이 티가 나는 옷. 왜냐고 물으려다 질문을 삼켰다. 한 번쯤은 내가 캐묻기 전에 네가 얘기했으면 해서. 그냥 네가 먼저 움직이는 것을,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그렇게라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농구에서든, 일상에서든.

인파에 휩쓸려 거리를 떠돌았다. 야, 우리 오늘 밥 먹을 수 있는 건 맞냐. 툭 던진 말에 괜찮은 척하는 낯짝으로 삐질거리는 것이 다 티가 났다. 이날 사람 많은 걸 누가 모른다고. 다 각오하고 나온 것인데도 너는 슬슬 내 눈치를 봤다.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들어가서도 그랬다. 더 비싼 곳에서 사 주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동그란 얼굴이 푹 숙여지는 게 제법. 좀 불쌍하면서도 뭐랄까. 불과 몇 달 전 시합 때까지만 해도 저 새끼가 다시는 못 웃게 면상을 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좀 깜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도 그 생각에 놀라 괜히 말을 거칠게 했다. 뭘 그렇게 봐. 다 티 나. 걍 처먹기나 해. 오히려 당황스러움에 귀라도 빨개졌을까 봐 걱정하는 건 나였음에도. 그제야 네가 왜 오늘따라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는지. 왜 자꾸 꼬여가는 하루에 울 것 같은 낯빛을 하는지. 왜 자꾸만 말을 하려다 저 너머로 삼켜내는지. 왜 몇 번이고 했던 합격과 생일을 축하하는 말만 돌고 도는지. 그 모든 것이 이해가 가서. 나는 관심 없는 것들에는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그건 관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생일 선물이라며 농구화 사 줄 때도, 색소 그득그득 들어있을 것 같은 조잡한 트리 올라간 케이크를 생일 케이크라 사줄 때도 너는 머뭇거리다가 시답잖은 말들만 뱉었다. 생일 축하해.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말이 아니었을 텐데. 알면서도 언제까지 그러는지 보자 싶어서 짐짓 모르는 체했다. 네 걸음이 느려지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도, 그 속도에 맞춰 걸었다. 그냥 조용히.

생일 주인공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돌아가는 길에 마침 나의 집이 먼저 있었을 뿐인데 너는 바래다준 것처럼 생색을 냈다. 그마저도 네가 제일 잘하는 본심 숨기기의 일환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결국 내가 들어갈 때까지 너는 말할 듯 말 듯. 진짜 답답해 뒤지겠네. 이 새끼한테 뭘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그 생각을 하며 들어가려는 찰나,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는 눈이 제법 굵직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너는 나를 기껏 불러놓고도 딴소리였다. 할 말이 그것뿐이냐는 질문에도 시선을 피하며 과장되게 으쓱이는 어깨. 이걸 봐줘, 말아. 모른척하고 들어갈까, 싶다가도. 돌아갈 그 동그란 뒤통수를 생각하니 조금 애잔해서. 그렇지만 내가 먼저 말하기엔 괘씸해서.

 

"야, 전영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 준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머뭇거리지 말고."

"……."

"니 꼴이 애잔해서 기회 주는 거야. 지금 말하든가, 아니면 평생 말하지 말고 살든가."

"……."

"나 간다. 평생 그렇게 살아라."

 

저 답답한 새끼. 진짜 저런 거 뭐가 예쁘다고 잠시나마 받아 줄 생각을 했지. 그 생각을 하며 뒤도는데, 다시 네가 나를 부른다. 이 정도로까지 붙잡혀 주는 걸 보면, 나도 이미 저 등신 같은 놈을 상당히 그거하고 있긴 한가 보다. 익숙함이나 당연함 같은 것들이 한 대상을 향해 있다면. 그건 또 다른 형태의 애정이라 불릴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너 좋아해. 그게 너의 고백이었다. 가장 멋없었지만 가장 용기 냈을 고백. 유유상종이라고, 그 등신 새끼의 평생 친구였던 나도 결국 그 고백을 받아 줬다. 거 봐, 말할 줄 알면서. 그제야 좀 후련하기도 했던 것 같다.

도시는 이미 어둠에 잠겨 제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대학가 근처의 술집들은 번쩍번쩍 요란하게 간판을 밝히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주익대 근처까지 급하게 가느라 택시비로 만 원이나 날렸다. 거기서 거기인 술집들 사이에서 연락받은 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온통 새 학기 분위기로 북적거렸다. 길거리 곳곳에는 제 주량 모르고 널브러진 새내기와 걱정스레 그 곁을 지키는 선배, 환장의 페어가 즐비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진동했다.

준수야, 내다. 지금 영중이 금마 취해갖고 몸도 못 가누는 것 같던데…. 집도 모른다 안카나. 전에 니랑 근처 산다 해갖고. 어어, 아이다. 선배들이 신입생 왔다고 드럼통으로 술을 들이부어서. 나야 뭐…, 생각보다 쫌 괘안네. 그랴, 주소 찍어 주께.

너와 같은 대학 합격한 재유에게 연락을 받고 가는 길이었다. 어느 대학이든 체교과가 술 궤짝으로 들이붓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그중에서 주익대는 더 했다. 뭉치자, 마시자, 죽자. 그게 그 학교 슬로건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대면식인지 뭔지 하는 날이라며 아까 낮에 숙취해소제 챙겨 들고 자취방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 이러라고 본가도 서울이면서 굳이 자취방 구해주신 건 아닐 텐데. 투덜투덜거리면서도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이런 일은 챙겨야 하는 사이였으니까. 입으로는 불만 줄줄 읊어도 몸으로는 가장 먼저 챙기러 가는 게 우리 사이였으니까.

야, 전영중. 어이, 일어나 봐.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가관이었다. 대낮부터 달린 건지, 아니면 빠르게 죽자 사자 마신 건지 절반 이상이 널브러진 참혹한 모습이었다. 저 구석에서 재유만 선배들 술 받아 가며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라도 할 참이었는데. 재유는 나에게 붙잡히기 전에 빨리 나가라는 듯한 눈짓을 했다. 나는 소파 체어 끝에 졸고 있는 너를 불렀다. 힘을 주어 끌어당겨 보는데도 너는 미동이 없었다. 아, 승질 뻗쳐. 얼마나 들이부은 거야. 아직 일어나지 않는 너를 필사적으로 깨우고 있을 때 네 선배라는 놈들이 말을 붙여 왔다. 누구야? 친구? 지금 데리러 온 거 보니 애인인가? 그러고는 지들끼리 킬킬 웃었다. 우리 사이가 그렇게 농담처럼 불리는 게 달갑지가 않았다. 어차피 내 대학도 아니고, 체교과에 농구하는 놈들만 있는 것도 아닐 거라 욕 좀 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친해서 엄마 부탁 받고 온 거 같은데, 맞지? 미안. 빨리 가자."

 

너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사이를 가로막고는 나를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풀썩. 다시 내 어깨 위로 쓰러지고. 아까 그게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는 듯이. 그래도 비틀비틀 걸을 정도는 되어서 나보다 십오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너를 겨우 부축했다.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네 무게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워서 속으로만 시발 삼천 번 외쳤다. 취객 짊어지는 건 평소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축보다는 질질 끌고 가는 것에 가까운 걸음을 제법 옮겼을 때가 되어서야 너는 고개를 들었다. 너 괜찮냐. 그 질문에 너는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까 선배들 때문에 기분 나빴지. 발음이 꼬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그런 말이었다. 별 잡것들이 지랄이야, 진짜. 너는 내 목소리에서 깊은 빡침을 감지하여 제 딴에 풀어보려 한 건지, 혹은 내가 술 취한 너 때문에 분노를 겨우 누르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무턱대고 행동한 건지, 더 앵겨 들었다. 질색하며 떼어내려 하자 또 축 처진 표정을 했다. 내가 가장 안쓰러워하는 표정. 너보고 멋있다고 하기 바쁜 남들은 절대 모를, 나만 아는 표정. 내가 적당히 조절해서 너 데리러 오는 일 없게 해야 했는데. 결국 또 이야기의 끝은 자책이다. 너는 여전히 마음이 여렸다. 아무리 그렇지 않은 척 포장했어도 다 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네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각박해서 욕심은 많았다. 그게 나는 한없이 안쓰러워 너를 미워할 수가 없다. 항상 수많은 번거로움 끝에도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란다.

너는 그 대화를 끝으로 또 고개를 푹 떨궜다. 주량도 제대로 모르는 새내기에게 이렇게 술 처먹인 선배라는 놈들 면상 갈아엎는 생각을 했다. 그 새끼들 뒤처리는 지들 몫 아니라고 시바거…. 겨우 택시 뒷좌석에 널 욱여넣었다. 삼월이라도 아직 깊은 밤은 추웠다. 그런 날에도 땀으로 샤워한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너는 택시 안에서 잠자듯 얌전했다. 택시 내려서 집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너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냥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몸살감기 기운도 눈치 못 채고 체육관에서 오랫동안 슛이나 던지다가 열이 올라 어질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집까지 왔던 네가. 그때의 나도 그때의 너에겐 무거웠을까. 모르겠다. 너는 잠이 좀 깼는지 뭐라 자꾸 웅얼거렸다. 준수야, 좋아해. 그 말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지탄과, 나에 대한 부러움과, 그 외의 수천 가지 감정들을 다 내뱉고 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너와 같은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졸업식 끝나자마자 날 찾는 전화를 했을 때도, 수강 신청 망하고 내 집까지 와서 드러누울 때도, 오늘처럼 네가 나를 앞에 두고도 찾을 때도. 그런데 나 또한 그게 낯간지러워서 괜히 피했다. 아직 우리가 어리다는 증거겠지. 나는 진심을 숨기려 자꾸 반대로 말을 내뱉는 너를 오늘은 조금 이해한다. 괜히 정강이를 차며 말했다. 아, 진짜 존나 무겁네. 야, 전영중. 좀 알아서 걸어 봐. 너는 내 이름을 길게 늘여 부르며 무슨 생각을 하냐 묻는다. 옛날 생각.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그 이후로 네 얼굴을 다시 본 건 그로부터 한 달이 되기 조금 전이었다. 너는 술이 떡이 되어 나에게 질질 끌려왔던 게 부끄러웠던 건지 뭔지 얼굴을 비추려 하질 않았다. 신입생 행사가 워낙 많은 데다가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너를 굳이 불러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시간을 내지 못하면 멋쩍어하다가, 또 바쁜데 괜히 불러내냐고 했다가, 종래에는 이 관계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을 탓할 너를 알아서 그랬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며 안락과 평온을 누리는 일이 너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대화를 나누던 말풍선 안에서 벗어나 얼굴을 보게 된 건 우습게도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한 것도, 데이트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 대학리그 경기에서였다. 너와 만나게 된 것도, 너와 틀어질 뻔한 것도, 지금 마주하게 된 것도. 그 모든 것에 농구가 있다는 게 좀 뭐랄까. 새삼스러웠다. 괜히 주익대 벤치 쪽을 슬쩍 보다가 두리번거리던 너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눈인사를 가볍게 하자 옆에서 귀신같이 눈치챈 병찬 형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친해? 네. 들리는 말은 사이 안 좋다 하던데 그냥 소문인가. 저희 사귀는데요. 그 말에 물통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빠진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그의 얼굴. 언제 적 으르렁대던 걸로 말하나 싶어서 해명한다고 했던 말인데. 순간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미 말한 거 어쩌겠나. 3월 내리 지켜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인싸 텐션의 가벼움에 가려진 진중함이 있었으니 괜찮을 것이었다.

1학년이라 스타팅 자리는 꿈도 못 꿨다. 그래도 중간중간 교체하며 닳도록 코트를 드나들었다. 오늘은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좋았다. 막 던져도 들어갈 것 같은 날. 3쿼터가 끝나갈 때쯤엔 슛 넣고 너를 향해 씨익 웃었다. 경기는 지고 있어도 3점 슛은 내가 너보다 낫네. 그런 의미. 서로 승부욕을 자극할 수 있는 사이. 우리가 그런 사이도 될 수 있다는 게 나는 좋았다. 정말로. 농구가 너와의 관계에서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건 내가 너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부분이자, 너 또한 그럴 것이라는 신뢰의 묘한 접점에 있었기에. 4쿼터 버저비터까지 넣었지만 이날 경기는 주익대의 완승이었다. 이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팀을,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자를 위해서는 언제고 아득바득 노력을 할 것이고, 후자는 글쎄. 만약 구하게 된다면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도 같다.

사랑은 어렵다. 이해한다는 것과는 달랐다.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전부 타인. 그런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나는 그걸 너와 만나면서 깨달았다. 이해하다.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 사랑하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다. 나는 그 두 가지의 감정 중 사랑을 더 상위의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더 강한 것, 더 상위의 것이 이긴다. 농구에서는 가끔 그렇지는 않지만 원래 세상 돌아가는 대부분의 이치라는 게 그렇다. 그래서 나는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순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가끔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이해해야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려나. 자꾸 이해가 되게 설명해 달라는 걸 보면.

우리는 참 많이도 싸웠다. 우리 사이를 아는 몇몇은 이번에 헤어진다 만다로 내기를 하더라. 남 연애로 시시덕거리면 좋냐고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 사리긴 했다. 우리 사이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여기서부터 우리 의견이 갈렸다. 그, 그걸 박병찬 선수한테 말을 그냥 했다고? 너 전에는 말하지 말자면서. 어쩌다가 나왔어, 미안. 그래도 병찬 형 입 무거워. 병찬 형? 그럼 같은 팀인데 박병찬 님, 병찬 선수님, 그렇게 부를까? 아마 그게 대학 와서 처음으로 크게 싸운 일이었다. 작게는 시험 기간에 전공 책 붙들고 생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는 것들을 머리에 욱여넣다가 서로 잠든 걸로도 싸웠다. 싸우고 나서는 또 화해까지 걸리는 시간 가지고도 싸웠다. 바로 이야기하자는 나와 생각 정리할 시간 좀 갖자는 너. 너는 그 동그란 머리통으로 생각할 게 어찌나 많은지. 생각이라는 게 원래 먹는 양이랑 비례하나?

그러다 한번은 제대로 일이 터졌다. 자꾸 불안하게 만들잖아, 니가. 그러면서 울던 네 모습이. 또 하나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서. 그래서 나는 나의 짜증을 뒤로 밀어놓고 물었다. 내가 뭘 불안하게 하는데. 전영중, 영중아. 말 해줘야 안다고. 나 농구 말고는 관심도 없어서 이런 거 서툴잖아.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한 것치고 네가 바라는 건 소박했다. 표현 많이 해 줘. 다 큰 낯을 하고도 우린 아직 어리다. 너는 너의 억지스러움을 내가 받아 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조금은 다르다. 나의 무심함을 네가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다. 나는 사랑만으로도 어려운데, 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건 네가 모르고 있을 너의 강점이다.

그날 이후로는 싸우는 일도 많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속도에 발맞춰 걸었다. 물론 말이나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지만. 이틀에 한 번 싸울 것을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에 한 번. 그렇게 기간을 늘려갔다. 가끔은 서로의 학교도 찾아갔다. 학교에서 너를 마주할 때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멀리서 함께 오고 있으면, 왜 남들이 다 멋있다고 사족을 못 쓰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보자마자 눈 동그랗게 뜨며 '요~준수' 외칠 때면 영락없는 나만 아는 찌질했던 그 시절의 전영중이었지만. 네가 골라 주고 내가 골라 준 등신 같은 키링은 언제나 서로의 더플백 지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질리도록 싸워도 헤어지진 않았다. 흔하고 진부한 '이럴 거면 그냥 헤어져'라는 말도 우리 둘 사이에는 오간 적이 없었다.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들은 저러다 곧 헤어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놀라울 것 없는 일이다. 너와 처음 알게 된 뒤로 7년을 조금 채우지 못하고, 정확히 말하면 6년하고도 조금. 그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의 초입까지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이였는데. 좋은 친구 사이, 아니 웬수처럼 보이는 친구 사이를 끝내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은 그것의 절반 정도밖에 미치지 못했다. 관계가 변했다고 하여 학습된 성정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으니까. 네가 종종 하던 표현을 빌리자면 큰 틀은 관성적으로 굴러갔다. 그 안에서는 자잘자잘한 변화가 이리저리 튀었다. 그 변화들이 바뀐 관계에 특별함이 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지만, 남자랑 입술을 부비는 건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너니까 괜찮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상상해 본다고 하면…. 역시 관두는 게 낫겠다. 너니까 괜찮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참 이상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도, 너라는 이유 하나로 에라 모르겠다 눈감아 버리게 되니까. 때때로 내 두 귀를 덮은 손이 벌벌 떨릴 때면 웃음이 샜다. 질척한 소리랑 다르게 아직도 애처럼 동동거리는 네가 조금은. 이런 표현조차 여전히 낯간지러운데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데 표현 많이 해 달라고 울던 너 또한 나와 다르지 않았는지 우리 사이에 ‘사랑해’라는 세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좋아해. 어. 그것도 아니면 이런 거. 좋아한다. 나도. 둘이 좋으면 된 거지 뭐 그렇게 거창한 단어까지 꺼내 올 필요가 있나 싶었다. 생각보다 투박한 표현과 행동들. 그게 나는 더 좋았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건 그런 것이었으니까. 불타는 사랑과 절절한 그리움. 뭐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좋다.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지.

그럴 줄 알았으면 미친 척 그냥 한번 말해볼걸.

꼭, 전생 같은 아득한 기억이다.

"준수야, 너 키링 어쨌어."

 

너는 나를 보자마자 묻는다는 게 그거였다. 재작년 신인 드래프트 날 전날에 긴장된다며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던 네 얼굴이 생각나 웃음이 샜다. 준수 너는 걱정도 안 되나 봐? 긴장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이제 너의 말에 그렇게 답하는 게 익숙해졌다. 이상하게 네가 그렇게 꼬아 말하는 걸 들어도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느 정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게 익숙해졌다. 습관처럼 고착화된 것과는 다른 익숙함. 아무튼 둘 다 무사히 지명을 받고 너는 서울에, 나는 또다시 부산에 처박혔다. 진짜 부산이라면 조금 진절머리 나기까지 했다. 그러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고지는 수원으로 바뀌었고. 서울과 가까워진 덕에 얼마 전 마련한 자차로 부모님에게보다 먼저 얼굴 비추러 왔더니만.

 

"그거 이제 보내줄 때도 되지 않았냐. 벌써 산 지 4년은 지났다."

"그걸 막 버려 준수야?"

"안 버렸어."

"그럼?"

"고리 부분 오래돼서 부러졌는지 떨어졌길래 차에 놔뒀어."

"왜 차에 놔?"

"잃어버릴까 봐. 니가 소중하게 간직하라며."

 

너는 충분히 납득한 것 같았지만 서운한 표정을 숨기질 못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나. 그걸 가지고 예전처럼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스물넷의 우리는 자기만 알던 열아홉과, 어른인 척하던 스물과는 달랐으니까. 그토록 싸웠던 건 마모되며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키링 하나 떨어졌다고 몇 날을 속상해하고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반지 맞출래?"

 

그렇게 불쑥. 생각보다 말이 빨랐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관념 같은 것에 매달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붉은 실이니, 운명이니, 사랑의 증표니 하는 것들. 그런 것들에 큰 의미를 두지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데도 네가 그런 얼굴을 하면 나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네가 바랄 만한 것들을 생각하며 말로 뱉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말을 뱉고 나자 실현 방법을 생각했다. 어디서 맞춰야 하지. 디자인은 어떻게 하지. 그런데 어차피 연습 중이나 시합 때는 끼지도 못할 건데 의미가 있나. 그래도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또 하다가, 그 순간.

 

"괜찮아."

"왜?"

 

너의 거절에 나는 반사적으로 묻는다. 보통은 그 반대의 경우였으니까. 너는 내가 했던 생각을 정확하게 내뱉는다. 그거 맞춰도 어차피 연습 때도 경기 중에도 못 낄 텐데.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아.

나는 너의 말에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함께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다. 그 순간에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나는 너의 입장에서, 너는 나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별개였던, 심지어 대립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둘이. 결국 반대로 걸어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백보드에 맞고 다시 돌아오는 공이나, 혹은 공 자체의 모양 같은 것들. 반복되는 흔적이나 둥그런 원의 궤적들. 분명히 너와 나는 그 위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중에 좀 괜찮을 때 같이 맞춰."

"준수야."

"왜."

"그럼 우리 손가락에 반지 모양으로 타투할래?"

"너 돌았냐. 동네방네 알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거 못하게 했다고 지금 지랄하냐."

"그럼 반지는 되고?"

"어차피 끼지도 못하는 거 집에서만 끼면 누가 아냐."

"와…, 준수야…."

"뭐."

"진짜 낭만 없다."

 

너는 또 억지스러운 얘기다. 이맘때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어렸을 적이면 싸웠을 법한 것들도 시답잖은 말들로 마무리되는 것. 결국에는 픽 웃고 마는 것. 주변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익숙하게 이어지지만, 들여다보면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우리. 나는 그게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맞출걸.

예전에 네가 하던 것처럼 되지도 않는 억지 좀 부려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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