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편식하면 지옥에서 비벼먹는다

???AU

PITA BREAD by 22
232
7
0

23.02.23 포타온 <4랑말고 3점슛 1개 더> 참가

강남 어느 학구열 높은 학군에는 고공으로 치솟는 땅값에 연간 몇 번이나 매각하라는 수많은 로비에도 불구하고 100년여 남짓한 세월 동안 꿋꿋이 자리를 지킨 사단법인 원중의 사립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기내초, 기내중, 원중여고와 남고로 이어지는 일명 원중학원. 100% 기숙사제로 정치인, 연예인을 비롯해 국외 유명 인사마저 제 자식을 보내지 못해 안달인 엘리트 인맥 형성의 장이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돈과 명성을 동원해도 귀 학생은 설립 이념에 맞지 않다며 유명인의 자식을 입구컷 시켜버리는 도도함이 뭇사람들을 더 열광케 했다.

왜 굳이 강남에서 기숙 생활을? 원중초, 원중중, 원중고로 이름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기내초, 기내중을? 남고와 여고라는 시대착오적 개쌉구린 분류를 지금까지?

등의 사소한 의문이 있지만 일단 넘기도록 하자(그리고 원중중은 어감이 별로잖냐.)

전영중은 그렇게 대단한 기내초에 입학해 기내중을 거쳐 이제 막 원중고 학생이 된 원중학원 생활 10년 차에 접어드는 수많은 올드비 중 하나였다. 공용거실과 이어진 개인실 네 개, 화장실 두 개의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깨끗한 기숙사에서 적당히 학교에 가기 싫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 아, 학교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무도 다치지 않고 시설만 홀라당 타버리는 불이 났으면 좋겠다. 가망 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질질 끌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이를 닦노라면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옆방 동급생이 손을 내민다.

"칫솔."

"나한테 맡겨놨어?"

"주기 싫으면 처 나오든가."

"준수야, 화장실을 쓰고 싶으면 일찍 일어나서 먼저 들어올 생각을 하는 게 보통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파란 칫솔에 치약을 짜 건넨다. 새끼, 줄 거면서 꼭 한마디씩 하지. 투덜거리며 다가오던 손이 칫솔을 지나쳐 재빠르게 손목을 붙잡았다.

"야잇, 하지 마!"

예고 없이 잡아당기는 힘에 전영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화장실 문턱을 디디며 저항했다.

성준수. 기내초 4학년 때 흔치 않은 전학으로 원중학원에 합류한 7년차의 상대적 뉴비. 에너지가 넘치고 힘 조절 못해 기숙사 비품을 부숴대던 리틀우끼끼디스트로이어 시절부터 꾸준히 기숙사 옆방을 썼던 세미불알친구가 난데없이 아침마다 힘자랑하는 게 오늘로 삼 일 차다. 덥석, 턱을 붙잡고 밀어내자 성준수가 손목을 쥐어뜯다 안 되겠는지 전영중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밀어내는 자와 당기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아, 제발! 너 또 이상한 짓 하려고!"

"이상한 짓이 아니라! 아 씹, 가만히 좀!"

당기고 밀고, 기어코 어깨며 팔에 주먹질하더니 발을 당겨 뒤꿈치로 오금을 찬다. "악!" 예상치 못한 기술에 전영중이 넘어지는 그대로 성준수가 당겨 안더니 목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다 이마를 문질렀다.

"진짜 뭐 하는데!"

머리채를 잡아당겨도, 뚜둑거리며 기어코 몇 가닥이 뜯겨 나와도 어깨와 허리를 단단히 감고 몇 번이나. 계속.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름기 없이 뽀송한 맨살의 촉감이 따끈하면서도 솜털이 오소소 섰다. 대체 왜 이래? 이게 친구 사이에 할 스킨십은 아니잖아!

"됐다. 화장실 얼른 쓰고 나와."

"뭐가 됐는데!?"

"큰일 볼 거면 나 화장실 쓰고 나서 다시 들어가."

"야, 성준수!"

욕실 바닥에 망연하게 주저앉은 전영중의 손에서 칫솔을 뺏더니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 돌아선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고 칫솔질하며 껄렁하게 걸어간 성준수가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전영중은 조금 전까지 성준수가 이마를 문지르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대체 뭐야?

비단 성준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이나 이어진 룸메이트의 뜻 모를 애정행각에 전영중은 넋이 나간 채로 원중고 복도를 걸었다. 거기 1학년? 상념에 빠져 자신을 부르는 것도 모르고 지나가자 선배가 쫓아와 어깨를 짚었다. 너, 잠깐만. 전영중이 퍼뜩 놀라 주변을 돌아보다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왜요?"

자신보다 작은 선배를 내려다보며 되묻자 살포시 웃더니 어설프게 매어진 붉은 리본을 쉽게 풀어냈다.

"리본이 비뚤어졌어."

원중고에는 리본을 잘 매지 못하는 후배들을 위해 선배가 손수 매듭을 묶어주는 아름다운 전통―

은 무슨. 다시 말하지만 원중고는 여고와 남고로 나뉘고, 시커먼 남고에는 그딴 아름다운 전통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제 셔츠 카라 뒤를 파고드는 뜨끈한 손길에 전영중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리본을 낚아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이런 이유 모를 스킨십이 늘었다. 성준수만이 아니라 선배를 비롯한 모르는 학생마저!

전영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교실 뒷문을 열자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가 멎고 일제히 자신을 돌아본다. 뭐지, 이 정적? 나 왕따당하나? 우리 학교 따돌림 빡세게 잡는데?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저에게 다가온다.

"왔어?"

"너 리본 두고 왔어? 내 거 빌려줄까?"

"영중아, 수학 숙제 다 했어?"

"오늘 체육 있는 거 알아? 체육복 챙겼어?"

다시 말하지만 원중고는 여고와 남고로 갈라지고.... 땀내 나는 덩치들의 다정한 환대는 17살 남고딩에게 다른 의미로 상처였다. 얘네 대체 왜 이래? 살려줘.... 너네 이런 애들 아니었잖아....... 이런 상황 이제 싫어.......

"이 시발, 다 안 꺼져?"

전학과 동시에 기내초 짱을 먹은 이래로 주먹으로 져본 적 없는 남성이 상황을 진정시켰다. 짧은 욕설로 순식간에 친구들을 원위치시킨 성준수가 전영중의 가방을 뺏어 들고 제 옆자리에 얹었다. 반에서 키가 제일 큰 남성 둘이니 어김없이 맨 뒷자리 짝이었다.

진짜 피곤하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피곤하게 만들었던 원흉이 옆자리에 앉거나 말거나 전영중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흉흉한 기세와 달리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자리를 정리하는 기척에 이젠 얼굴을 쓸다 한숨을 뱉었다. 성준수 때문은 아니라, 오늘도 역시나 거칠게 열리는 앞문 탓이었다.

쾅! 문을 부서져라 열고 들어온 지국민이 카리스마 있게 교탁을 세게 내리쳤다. 하아아아아. 누군가의 한숨이 깊어진 순간이었다.

"너구나, 8반 예쁜이가."

"아니, 나다 이 새끼야."

뒤따라 들어온 이현성이 곧장 엉덩이를 걷어찼다. 맥없이 밀리며 가련하게 주저앉은 지국민을 발끝으로 밀어내는 얼굴에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인마는 왜 아침마다 남의 반에서 지랄이고? 니 윤쌤한테 이르기 전에 후딱 사라져라."

넵. 8반 담임의 아량에 지국민은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를 박고 사라졌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공손하고 조용하게 문을 닫고서. 폭풍처럼 교실을 휩쓸고 간 소란에 전영중은 급기야 엎드려 얼굴을 파묻었다. 이 소란 끝에 제게 꽂히는 시선들이 짐작가서다.

동정, 의문, 동경, 질투(이건 뭐야?) 외에도 알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똑바로 저를 향한다. 그중 제일 거북한 건 바로 옆에 앉은 녀석의 분노였다. 대체 왜?

이젠 정말 모른척할 수 없다. 결연한 다짐과 함께 전영중은 몸을 세우고 제 옆에 앉은 녀석을 쳐다보았다. 대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똑바로 확인해야만 했다.

"내가 선조... 뭐?"

물론 확인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선의 이야기이길 바랐지.

전영중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급식실로 날아가려는 성준수를 붙잡아 옥상으로 끌고 왔다. 매점에서 봉지가 터지도록 사 온 햄버거와 삼각김밥을 가운데 놓고 요새 왜 그러냐 끈질기게 물은 끝에 나온 대답이 이거다.

"선조귀환."

"그게 뭔데?"

"넌 이제까지 원인이었으니까 몰랐겠지만, 세상에는 반류라는 동물의 혼을 가진 인종이 존재하고 너같이 원인 사이에서 태어나 뒤늦게 반류로 발현한 시람을 선조귀환이라 그래."

"혼은 또 뭔데?"

"혼은 혼현으로 알 수... 시바, 이거 설명하려면 하루 종일 해도 끝이 없으니까 구글 찾아봐."

"그게 구글에 나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영중은 삼각김밥을 입에 물고 손가락을 놀렸다. 선조귀환. 나왔다. 반류. 나왔다. 어쩌고저쩌고 흥분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동물 특성이 튀어 나온다는데... 전영중은 반사적으로 제 정수리를 짚었다. 볕을 받아 따끈해진 머리카락만 만져졌다.

"내가 선조 그거인 거랑 애들이 변한 건 무슨 상관인데?"

"반류들은 중종에 가까울수록 번식력이 떨어지는데 선조귀환은 그런 게 없거든."

"뭐... 뭐, 번식?"

"니 지금 원중고 최고 정력남이라 애들이 너한테 눈 돌아간 거야. 다산의 상징, 아프로디테 그런 거."

이게... 사람에게 해도 되는 말인가? 번식? 무슨 짐승도 아니고? 그러나 성준수는 태연하게 그런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래.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지만 일단 그건 그렇다 치는데!

"내가 어떻게 애를 낳아!"

"당연히 네가 안 낳지. 너 알파인데. 굳이 따지자면 종마?"

"종마 이러네? 미쳤냐? 알파는 또 뭐야?"

"알파는...... 알파랑 오메가인데, 반류들의 두 번째 성 같은 거니까 그것도 구글 찾아봐라."

"준수야, 나 되게 혼란스러운데 좀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안 돼?"

"너 빼고 다 아는 거라 설명하기 싫어. 얘기 늘어진다."

정말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성준수는 펩시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핀잔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비추어보면 다들 저와 섹○ 한 번 해 보려고 혈안이 돼있다는 소리니까. 당연히 이게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래도 돼? 이제 고작 고등학생밖에 안 된 것들이? 근데 한두 명도 아니고 전교생이 이러는 건 문제 있는 거 아냐? 반류라는 거 원래 이렇게 흔했어? 나만 몰랐던 거야?

혼란에 빠져 중얼거리는 모습에 성준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구글에서 찾아보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 학교에는 비밀이 있는데......."

100년 전통의 원중학원은 전신인 원중무관학교에서 명맥이 이어진다. 아직 이 땅이 일제 치하에 있던 시절, 온전히 나라를 되찾고자 원인을 비롯한 반류가 큰 꿈을 품고 만주에 독립군 양성을 위해 학교를 지은 것이

"너무 멀리 갔다. 간단하게 말해봐."

"아까는 친절하게 설명해 달라더니, 존나 까다롭게 구네. 반류 개체수 증가에 가장 크게 기여한 놈이 차기 이사장이 된다고."

"......미안한데 다시 자세하게 말해줘."

"걍 그게 다야. 반류들, 특히 중간종 이상은 보통 사람보다 체격이 좋다 보니 독립군 자원했다가 많이들 죽었거든. 그래서 반류들 모아놓고 개체수 증가에 제일 관심 많아 보이는 놈한테 나중에 재단 이사장도 시켜주고 월급 연금 넉넉하게 줘서 개꿀 빨게 해주겠다는 거야."

얼핏 들으면 동물원에서 멸종위기종 교배시키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단어 선택을 보면 딱히 다른 거 같지도 않고? 개체 수 증가라는 게 결국 그거잖아. 자식 많이 낳으라는 거. 한두 놈이 아니라 흥부네 자식처럼 농구팀도 만들고 배구팀도 만들 만큼.

"그러니까 이거...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12년짜리 '짝' 그런 거네?"

"그런 셈이지."

"'나는 솔로'?"

"합숙 비슷한 것도 하니까 뭐."

이해가 빠르네. 성준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쳐버리겠네. 빠른 학업성취도에 만족한 강의자와 달리 전영중은 혀를 콱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참담했다. 선망의 대상인 대 명문 원중학원의 정체가 반류 교배소였다니? 그걸 반류라는 인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살았고?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자식 보고 싶지 않아."

"반류들이 모럴이 좀 낮긴 하지. 그래서 다른 애들이 껄떡대지 못하게 일부러 프리즈 겸 마킹해준 건데......."

왜 자꾸 껄떡대지. 탐탁잖은 듯 중얼거린다. 네가 알파라 잘 안되나. 또 제가 모르는 말을 하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입술만 움직여 말한다. 뭐.

"그게 뭐냐고 물으면 구글 찾아보라고 할 거지."

"......어."

"......됐다."

열없는 반응에 당황한 건 성준수였다. 자각도 못 하고 발현했으니 일단 제가 응급조치해 놓고 차분히 설명하려 한 건데. 대부분 구글 찾아봐라로 끝나긴 했지만 점심시간이 짧아서 그런 거고, 정말로 나중에 붙잡고 하나씩 제대로 설명해 주려던... 건 아니고, 유튜브 교육 링크 보내주려 했지만. 답지 않게 긴 변명이 성준수의 머릿속에서 착실히 꼬여간다.

"아니, 그거, 니가 아침마다 왜 이러냐고 밀어냈던 거, 그거야. 너 혼현 컨트롤도 잘 못 할테니까 다른 놈들 못 보게 숨기면서 내 거라고 티 낸 건데."

"......뭘, 네 거?"

"마킹. 페로몬샤워라고도 하고. 그 외에 각인 안 한 알파랑 오메가가 서로 임자 있다고......."

"임자? 네가? 나의?"

"아이 씨,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임시방편으로......."

"웃긴다. 성준수 너도 개꿀빠는 인생이 탐났냐?"

대꾸하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급기야 명백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이게 화낼 일인가? 식후 농구 때려야 하는 황금 같은 시간 할애해서 제가 처한 게 무슨 상황인지 알려주는 사람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그러나 전영중은 정말 엄청난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반류가 뭔지도 모르던 녀석이 대체 뭐에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 안 하고 한 건 미안한데...."

"혀가 길다, 준수야. 언제부터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했냐?"

"사람 말 작작 잘라라. 이게 삼김만 먹어서 배가 덜 찼나, 존나 잘라먹네?"

"말 조금 잘린 게 그렇게 화나? 난 너한테 그딴 일 당했는데 고작 이 것도 못 받아줘?"

"그딴 일? 야, 내가 강간이라도 했어? 네 씨 좀 뿌려달라고 매달렸냐?"

"와, 그런 말이 술술 나오는 거 보니 생각은 했나보다?"

"이 씹...... 작작 해라. 너 좋으라고 해준 건데 내가 왜 이딴 소리까지 들어야 해?"

"내가 언제 부탁했어!?"

이렇게까지 말할 일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 아는데도 울분처럼 터져 나오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잔뜩 성이 난 녀석이 주먹을 말아쥐자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피부가 더 창백해졌다. 정말 치고 싶은 걸 겨우 참는 기색이었다. 한 대 얻어맞을까 순간 긴장했으나 때릴 테면 때리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뒤엉켜 싸우고 소리 지르면 뭐라도 나아질까 싶어서.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다 개 같아. 알아? 이딴 말도 안 되는 짝짓기에 멍청이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껴있던 것부터...!"

제 사랑이 시작도 전부터 비틀려있었다는 것까지. 전부 다.

울지 않으려고 씹은 혀 끝이 욱신거렸다.

"준수가 좀...... 대충 설명하긴 했네."

이야기를 들은 지국민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자신을 8반 예쁜이 취급했던 것치고 고민을 들어주는 태도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왜 그런 짓을 했냐?

어차피 같은 알파라 선조귀환이고 번식이고 자기랑 하등 상관 없는 일이니까—란다. 한 마디로, 그냥, 재밌으니까!

라는 말 뒤로 중종인 자신이 눈독 들인다고 티 내면 어중간한 놈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가 네가 좀 덜 귀찮지 않을까 싶어서, 우정 차원의 서비스였다는 변명이 따라붙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고, 소용 있었느냐 하면 그조차 전혀 없던 것 같지만.

"오해하지 말라고 말해두는데, 너 내 취향 아니다."

"넌 내 취향인지 고민할 대상조차 아니었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대화였다. 못마땅하게 팔짱 끼고 흘겨보는 녀석들 사이에서 이휘성이 눈썹을 구겼다. 이게 취향 얘기나 하자고 모인 자리가 아닐 텐데.

"어쨌든 준수 설명이 구시대적이었던 건 맞아. 요새는 뭐, 미리 반류들끼리 얼굴 익히면서 친해지라는 취지에 가깝지. 이 학교에 반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제야 제가 원인이었던 게 떠올랐다. 그러게? 반류들끼리 짝 찍자고 12년짜리 교육과정 만들어놨으면서 기껏 원인을 집어넣을 이유가? 심지어 전영중은 반류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3대가 원인인 집안이었다.

"원래는 반류만 다녔는데, 교육부 시정조치 받아서 정원 절반은 원인으로 채우게 바뀌었다고 하더라."

전영중과 달리 3대가 전부 중종이라던 순혈 중종 지국민이 덧붙인다. "그래서 반류는 무조건 합격이고, 원인은 지원자 중에 뽑기 돌린다던가?" 설립 이념에 맞지 않다고 탈락시키던 도도함은 그냥 원인들에게 로또 당첨 안 됐다고 통보해 주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전영중은 개중 운 좋게 당첨 쪽지를 뽑은 원인이었던 거고.

명문학원이라는 명성조차 반류들이 정재계 중요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자연스레 따라온 것에 불과했다. 뭐지, 이 학교. 민낯이 상당히 볼품없는데.

진실이 어찌 되었든 원중학원은 여전히 원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지금 전영중에게 중요한 건 다른 문제였다.

"애를 많이 낳으면... 이랬나? 그럴 예정이 있으면 이사장 시켜준다는 말은?"

"......그것도 맞고."

잠시 망설이던 이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시대적 발상이긴 하나 어쨌든 학원 설립 목표 중 하나였고 지금도 유효하다. 반류, 특히 중간종과 중종의 개체 수 유지. 아직도 이사회가 소집되면 신규 이사가 제일 먼저 듣는 말이 '애는 몇이나 낳았냐’ 혹은 ‘낳을 거냐'라 하니. 이휘성은 건너 들은 말을 떠올리며 이제 막 반류가 된 친구에게 그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되게 역겨운 발상이긴 한데, 내가 국민이랑 결혼하면 국민이는?"

"아 씨발, 영중아!"

"좀 쏠리지만, 선조귀환과 결혼하면 이사장 자격 프리패스긴 해."

원중학원 이사회에 들어가면 일단 55세부터 재단 연금 수령이 가능해진다. 이사장까지 하면 월급은 당연히 보장되고 연금은 따따블. 성준수의 개꿀 발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럼 진짜 준수는 이사장 자리를 노리고 나한테 그 짓을? 마킹이지뭔지 그걸 선조귀환 발현 첫날부터 해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교생에게 날 점찍었다고 광고한 셈인가?

의도가 어쨌든 간에 전영중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지국민의 예쁜이 선언과 다를 바 없는 일방적인 우정이었으니까. 생각이 흐르자 어두웠던 전영중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놈의 우정. 재미. 가볍기 짝이 없는 감정들.

"......그래도 준수한테 프리즈는 받아."

"......그건 싫어."

"싫으면 다른 중종 찾아 부탁해 봐. 아니면 혼현 감추는 법을 빨리 익히든가."

"너희가 해주면 안 돼?"

"아 진짜, 원인이었던 애한테는 뭘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줘야 하냐?"

난처하게 웃는 이휘성 옆에서 지국민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또 너무 비 반류 같은 순진한 발언을 했니? 평범하게 친구로 지냈던 세월에도 불구하고 제가 반류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된 것만으로 별종이 된 기분이었다. 당연한 상식을 배우지 못하고 살아온 야만인이 되어버린 것처럼.

“왜 너네가 해주면 안 되는데?”

"......유튜브 찾아봐."

결론은 이거였다. 구글 찾아봐. 유튜브 찾아봐. 구글이 없어지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래서 유튜브에 별거 있냐? 하면......

있었다. 왜 이런 정보가 유튜브에 떡하니 올라가 있지 싶을 정도로. 원인일 때는 찾아볼 생각조차 못 했다. 원래 원인은 반류에 대한 정보를 본능적으로 거부해서 말해도 금방 잊고 신경 안 쓰게 된다나. 하여간 반류 뉴비 전영중에게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특히 히트사이클이니 러트니 하는 말로 순화된 발정기라는 시기가 그랬다.

파란 칫솔에 치약을 짜서 화장실 앞에 내려놓는다. 비척거리며 나온 녀석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문을 잠갔다.

"야, 전영중."

쿵쿵거리며 다가온 발소리가 문고리를 돌린다. 덜걱거리며 돌아가다 말자 짜증스레 욕하는 소리도 들렸다. 명백한 거절과 거부였다. 포기하고 이빨이나 닦겠지 생각했는데 이번엔 답지않게 조심스레 노크한다.

"미안. 먼저 설명해야 했는데 내가 무신경했다. 나 진짜 딴 마음 없으니까 프리즈라도 받아."

딴마음 뭐? 겨우 눌러놓은 화가 울컥 치민다.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공표해서 일찌감치 이사회에 한 자리 잡아 개꿀빨아 보려 했던 거? 아니면 애정 없이 씨만 받아 가려던 거?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알파고 성준수가 오메가라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떻게 친구 사이에 씨를 받네 마네 그런 이야기를 대뜸 할 수 있지? 반류는 다 그래?

대꾸 없이 분노의 칫솔질을 하던 전영중이 거품진 치약을 뱉고 빨간 혀를 뒤집는다. 초딩 시절 혓바닥 별 모양으로 접기 유행에도 난 그런 거 못한다 해놓고 기숙사에서 몰래 거울을 보며 혓바닥을 꼬아대던 내숭을 떤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어지간해선 타인이 볼 일 없는 혓바닥 아래에 박혀있는 이름 석 자가.

성준수.

전영중이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래로 쭉 선명하게 자리했던 이름이었다.

비밀 친구처럼 은밀히 찾아온 네임은 설렘이었다. 거울을 보다 말고 달려가 혀를 뒤집어 보이자 환하게 저를 웃으며 안아주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우리 아들에게 사랑이 찾아왔네. 전영중은 그 말이 좋았다. 드물게 발현하는 네임이 저에게 찾아왔다는 것이, 저에게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사랑이 찾아왔어.

흔치 않은 성이었으니 성씨인 사람만 봐도 저 사람은 준수를 알까, 그런 생각부터 했다. 성준수가 제 이름을 가졌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나는 널 사랑할 테니까. 마침내 열한 살, 기내초로 전학 온 하얀 아이를 보았을 때 이름을 듣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뛰었다. 성의 없이 이름 석 자와 반갑다는 말로 인사를 마친 저 아이가 꼭꼭 숨겨온 이름의 주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임이라고 밝힐 생각은 없었다. 전영중은 어린 나이에 네임과 관련된 수만은 드라마와 연정 소설을 읽었다. 네임을 가졌다고 일방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다 차인 사람(엄마 저 아줌마는 왜 아저씨를 가둔 거야?), 홀로 이름을 가진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름을 파낸 사람(엄마 저 아저씨 피나 으), 자신에게 네임이 없자 온몸에 상대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사람(영중아 네임 드라마 그만 보자).

네 운명에 내가 없을 리 없다는 비틀린 사랑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네임따위 없는 것처럼, 자연스레 성준수와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다 우리가 결혼...... 하게 된다면 사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네 이름을 갖고 있었노라 밝히고 싶었다.

그런데 뭐, 씨를 받아?

씨니 번식기니, 동물에게나 쓸 단어를 스스럼없이 자신들에게 적용하던 친구들. 어린이 정보 영상에서조차 튀어나오던 개체수니 번식이니 하는 말들. 사람을 트로피처럼 가지려고 혈안이 된 녀석들. 그중에 성준수가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면 구역감이 치밀었다. 전영중은 서둘러 입안을 헹구었다.

"......전영중,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밤새도록 유튜브를 찾아본 전영중의 감상은 이랬다.

짐승같아.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다니던 의자왕의 기분을 아는가? 전영중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프리즈인지 뭔지 받지 않은 첫날이었다. 전영중은 이상할 정도로 제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선조귀환이 된 이래로 그러긴 했는데, 오늘은 유독 더 하다. 반 뒷문에 달라붙어 쳐다보는 무리라든가, 비어있는 옆자리에 대뜸 앉는 애들이라든가. 성준수 얘는 기숙사가 지척인데 뭐 한다고 아직도 안 와? 얼른 와서 제 옆자리를 무단 점거한 친구에게 호통쳐주길 바라다, 자연스레 준수의 도움을 기대하는 자신이 짜증 나 엎드렸다. 은근한 단 냄새가 가시질 않아 속이 거북했다. 얘는 당뇨인가, 왜 몸에서 단내가 나?

이현성이 들어와 출석 체크를 하고, 제 옆자리에 다른 놈이 앉아있는 걸 보고도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라는 지적 한 마디뿐이었다. 그제야 전영중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 성준수 안 왔는데요."

"안다. 몸 안 좋아서 조금 있다 온다더라."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저도 모르는 룸메이트의 소식을 담임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안 좋았으면 칫솔 받아 갈 때 말했어야지. 왜 이걸 담임을 통해 들어야 해? 바로 옆방에서 지내면서? 프리즈니 뭐니, 그런 얘길 할 게 아니라 아프니까 못 간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매점에서 레토르트 죽이라도 사다 줬을 텐데.

정말 사서 줬을 거 같아? 야속하게 이어지던 속마음 한구석이 묻는다. 서운해서 얼굴도 제대로 안 마주친 주제에 퍽이나? 자존심도 접고 배알이라곤 없는 녀석처럼 죽 사다 바쳤을까? 정말? 네가?

모르겠어. 전영중의 생각은 그랬다. 프리즈가 어떤 의미인지. 왜 말도 없이 프리즈인지 마킹인지를 한 건지.

우리가 반류인 것을 떠나, 네임인 것을 떠나 사랑하지 못한 게 그렇게 서운할 일인지. 따지고 보면 나도.......

성준수가 자신의 네임인 걸 알고 사랑하고자 했던 전영중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전영중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아마도) 짓밟힌 제 순정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조례 전에 5명이던 무리는 1교시 후 한 타, 과학실로 이동하면서는 20명, 식당으로 이동할 때... 는 무서워서 나갈 생각도 못 하고 친구들에게 삼각김밥 다섯 개만 사다달라 부탁하고 교실에 앉아있었다. 다섯 개? 다섯 개면 돼? 아침부터 틈만 나면 성준수의 자리에 앉았던 친구는 매점으로 달려가 삼각김밥과 빵, 각종 우유를 쓸어왔다. 자진해서 빵셔틀이 되어준 친구에게 고맙다 인사하며 만원짜리를 내밀어도 한사코 사양하며 방긋 웃기만 했다. 그 표정이나 시선이 꼭... 그거 먹으면 나랑 사겨야 한다? 는 듯 의미심장했다.

그래서 못 먹었다. 3교시부터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던 위장은 이제 화낼 기운도 없는지 기운 없이 꼬르륵도 아니고 꾸우우욱 소리만 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것 같아. 너무 굶으면 토할 거 같다더니 지금 딱 그 상태 같은데. 어머니 아버지, 아들 먼저 갑니다. 몸을 가누고 있을 기운도 없어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수업을 들었다. 마지막 수업은 마침 음악이고, 매점 바로 옆이었다. 수업만 끝나면 졸라 빨리 뛰어서 매점으로 달려가야지. 그런 다짐을 했더랬다.

진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고.

"야 영중... 어후, 씨!"

6교시가 음악 수업이었는지 음악실을 나오던 지국민이 나오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뒷걸음질 치다, 돌아와 멱살을 잡고 비품실로 끌고 간다. 어떤 미친 새끼가 페로몬 흘리고 다니나 했더니. 또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러니까, 사전적으로만 아는 말이었다. 어젯밤 유튜브로 본 속성교육에서 반류끼리만 맡을 수 있는 특이한 체취라고 했으니—이거 땀 냄새랑 다른 건가?

"성준수한테 프리즈 안 받았냐?"

"안 받는다니까."

"아니, 안 내켜도 걔가 해준다면 받아야지....... 아, 진짜."

"영중아. 너 지금 혼현 다 드러내고 페로몬까지 새어 나오고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한 걸음 뒤에서 코를 막고 있던 이휘성이 말했다. 전영중은 또 제 정수리를 큰 손으로 덮었다. 혼현인지 뭔지 전혀 모르겠고, 여전히 매끈한 머리카락만 만져졌다. 아무것도 없는데?

"혼현이 보이고 냄새난다......?"

"......너를 유혹하고 있다."

"아냐."

"섹○하고 싶다."

"아니라고."

"근데 우리... 반류는 그렇게 느껴."

내가 왜 너네랑 섹○를 하냐고....... 울음기가 배인 말에 이휘성이 질색하며 답했다. 나도 싫어.

아예 모르고 있을 땐 괜찮았어도 한 번 지적받으면 그 순간부터 온 신경이 그쪽에만 쏠리게 되는 것들이 있다. 와이셔츠에 묻은 라면 국물이나, 애매한 위치에 난 양말 구멍 같은 것들. 원중재단 이사회 어르신들이 들으면 뒷목 잡을 이야기겠으나, 전영중은 혼현이나 페로몬 문제를 그것들과 비슷하게 취급했다.

학생의 절반은 반류. 그 반류 중 절반은 오메가. 제가 알파라 하니 사분의 일인 오메가들이 저와 섹○하려 혈안이 돼있다는 소리였다(제발 알파들은 아니길 바랐다). 그 사이에서 —의도는 아니었으나— 섹○어필을 하고 다닌 셈이다. 어쩐지 애들이 난리더라. 아니, 뭔 냄새인지 알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어떻게 사람이 마음대로 체취를 흘리고 잠가? 내가 왜 남고에서 섹○어필을 해....... 전영중은 음악 수업 동안 5분에 한 번씩 체취를 맡았다. 여전한 땀내만 났다.

솔직히 이쯤 되니 무서웠다. 반에서 제일 크거나 두 번째로 크거나. 줄곧 키 큰 애 포지션이었으니 동급생에게 겁먹을 일이 없었지만 이번 일은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전영중은 제가 밴드부라는 걸 핑계 삼아 비품실에서 찾아야 할 게 있다며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있었다. 이대로 청소가 끝날 때까지 숨어있다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조용히 짐을 챙겨 기숙사로 갈 생각이었다.

"어, 영중이다."

7교시가 끝난 후로도 한 시간 반을 더 비품실에 있었다. 선생님 몰래 숨겨둔 과자로 주린 배를 달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버티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밴드부 연습도 없는 날이니 음악실은 텅 비어있으리란 걸 알고도 하루 동안 시달린 끝에 나온 본능적인 경계였다.

그러나 있었다. 잠겨있어야 할 음악실 문이 개방돼 있었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그곳에.

그 짧은 말과 말간 웃음에서 전영중은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달렸다. 걸을 힘도 없다 생각했는데, 미지의 공포 앞에서는 생존본능이 먼저였다. 영중아, 너 하루 종일 굶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물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만두 사 왔어! 따끈한 레토르트 만두의 냄새가 조금도 유혹적이지 않았다. 영중아아! 걸쭉하게 제 이름을 부르며 뒤를 쫓는 발소리는 하나에서 둘로, 넷으로 늘어갔다. 다다다닥! 중앙 계단에서 동편 계단으로, 다시 서편 계단으로. 말 그대로 학교를 가로질러 전력 질주했다. 한 무리가 복도 끝에서 끝을 가로지르는 소란에 복도로 나왔던 선생조차 폭주하는 물소떼를 보는 듯한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전영중이 빠른 편이라 저를 쫓는 무리와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는 정도?

어디까지 뛰어야 하지. 밭은 숨이 점점 차오른다. 제 뒤를 따르는 이들이 딱 한 입만 먹어 보자며 쫓아오는 좀비 떼와 다를 게 없어 무작정 도망쳤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정체 모를 단내에 자꾸 발이 무거워졌다. 일단은 반으로 가자. 뭘 어쩔 생각인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무작정 1학년 8반으로 달렸다. 일단 가방부터 챙기고, 반에서 농성하든가 아니면 옥상으로 도망치자. 전영중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창문을 타고 도망칠까? 이 상황 전부가 영화에 나오는 재난과 다를 게 없었다.

그 모든 상상도 결국 성준수 앞에서는 무용無用했다.

성준수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불청객을 향해 인상만 찌푸리는 게, 이 소란에서 격리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단 바로 아래서 쫓아 올라오는 발소리에 전영중이 퍼뜩 문을 닫고 교실로 들어왔다. 잊었던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뭐야?"

"애들이, 헉, 쫓아와서."

성준수라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쩌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전영중은 성준수에게 다가갔다. 영중아아아악! 밖에서도 헉헉대는 소리가 들렸다. 킁, 반사적으로 체취를 맡은 성준수가 인상을 썼다. 아, 그러고 보면 교실에서도 단내가 났다. 이제까지 맡았던 것과 다른, 묵직하지 않은 초콜릿 냄새가.......

"야, 숨 크게 쉬어서 진정시키고 소리내지 마라."

성준수는 바로 뒤의 캐비닛의 번호키를 누르더니 전영중을 밀어 넣었다—정확히는 그렇게 하려 했다.

성준수가 전영중의 팔뚝을 잡듯, 똑같이 맞잡은 상대의 손이 풀리지 않았다. "뭐해?" 아니, 네가 잡아서....... 그렇게 변명할 틈도 없었다. 바로 앞까지 닥쳐온 발소리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아귀힘에 성준수는 혀를 차고 저도 캐비닛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삐리릭. 겨우 문을 닫자 기계음이 울리며 잠금장치가 잠기고, 어두운 캐비닛에 188센치 장정 둘의 몸이 꽉 들어찼다. 전영중은 입술을 깨물고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꽉 끼다 못해 폐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쾅!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영중이 여기로 오지 않았어? 이거 준수 페로몬 아냐? 여기 아닌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캐비닛 앞까지 다가온다. 성준수가 애매한 자세로 끼어있던 손끝만 움직여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을 눌렀다. 옥상으로 올라갔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숨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아 무작정 성준수의 머리카락 안쪽에 코와 입을 파묻었다. 제게 다가오는 얼굴을 막지 못하고 갈 곳 잃은 손이 움칠대다 목에 닿는다. 분명한 초콜릿 향이었다. 쌉싸름하면서도 혀를 대면 단맛이 날 것 같은 향이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옥상으로 갔나 보지. 아니면 서편 계단으로 돌아 내려갔을지도. 저마다 의견을 내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기척이 사라지고도 여전히 제 머리칼에 박힌 얼굴에 성준수가 머리카락 몇 가닥을 휘감아 당겼다. 따끔함에 악 소리가 나려는 걸 입술을 씹어 참았다.

"씨발 좀, 페로몬 흘리지 마, 개새끼야."

그걸 어떻게 하는데. 전영중이 고개를 비틀었다. 쥐어뜯긴 두피가 아릿했으나 손 하나 들어올릴 수 없는 자세 탓에 문지를 수도 없었다. 뜯긴 부위를 차가운 캐비닛에 비비적거리자 혀를 차더니 이번엔 손끝으로 제가 잡아당긴 머리카락 뿌리를 쓸어준다.

"이러니까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지."

초콜릿 향이 짙어졌다. 어쩌면 카카오 자체의 냄새일지도. 어찌 됐든 전영중에게는 고역이었다. 굶어서? 그보다는 그냥 향이 좋다고 생각했다. 코코아라도 마시고 왔나, 왜 이렇게 몸에서 단내가 나? 열이 오른 뺨에 혀를 내어 핥고 싶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후욱. 답답한 건 성준수도 마찬가지인지 몸을 움직여보려다 한숨 쉰다. 여분의 공간도 없는 탓에 몸을 조금이라도 비틀면 서로에게 비비적거리는 꼴이었다. 시발. 전영중은 제가 성준수와 어떤 꼴로 닿아있는지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성준수가 어깨에 기대왔다. 뺨에 닿는 느낌이 꼭 인형처럼 간지러웠다.

이게 뭐야?

옅게 들어오는 광원이 머리카락을 비춘다. 꼭 탈색이라도 된 듯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 위로 얼룩덜룩한 짐승의 귀가 솟은 게 곁눈질로 보였다. 이제 막 반류가 되었어도 알 수 있었다.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성준수의 혼현이 드러났다.

캐비닛 안, 좁은 틈을 비집고 긴 꼬리가 전영중의 팔에 감겼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쌉싸름한 코코아 향이 짙어지고, 성준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짐승처럼 형형히 빛나는 눈이었다.

네임이 있는 곳을 애무받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던데.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처럼 입이 벌어지고, 시린 눈빛을 새기며 맞댄다. 느리게 감기는 혀를 빨아올리면 안심시키듯 안쪽 곳곳을 핥았다. 진득하게 혀와 숨이 섞인다. 습한 마찰음이 비져나갈 틈 없이 뒤섞이다 가빠진 호흡에 혀가 입술을 핥으며 밀어냈다. 미약한 거부조차 참지 못하고 전영중이 보송한 꼬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기울여 쫓았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는데 조급함이 피어올랐다. 당장 품에 가두고, 내 반쪽이라고.......

"전영중, 씹, 페로몬......!"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화들짝 놀란 전영중이 무작정 몸을 젖히자 캐비닛이 요동쳤다. 제 몸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부딪히자 힘을 못 견딘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벌어진다. 꽉 들어찬 두 명이 동시에 난동을 부리자 결국 중심을 잃은 캐비닛이 넘어지고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저와 함께 캐비닛에 끼어 있던 인영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순식간에 교실 반대편 교탁 뒤에 몸을 숨겼다.

하얀 짐승이 머리만 겨우 교탁 아래 집어넣어 웅크리고 있었다.

"가."

"......준수야?"

"씨발, 꺼지라고!"

짐승의 목울음이 섞였으나 분명 성준수의 목소리였다. 제 몸에 바짝 감은 하얀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혼현은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드러내지 말고 보려 해도 안 돼요!'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유쾌한 말투의 설명이 떠올랐다. 성준수를 7년간 알고 지냈으면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제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숨겼겠지.

표범 무늬를 한 흰 짐승의 등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자존심이 상한 거다. 아니면 화가 났을지도. 함부로 그들의 규칙을 깬 전영중에게, 반류에 대해 무지해서 그랬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을 정도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아니면 최소한 사과라도. 사과할 만큼 잘못했나? 잘 모르겠다. 아직도 반류가 뭔지조차 모르는데 무슨 실수를 했는지 어떻게 알아.

근데 준수가 울잖아.

생소한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였다. 처음 듣는 소리였는데 전영중은 그게 슬플 때 내는 소리라 생각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가슴 한구석이 공허해지는 울음이었다.

전영중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버려두었던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왔다. 저를 쫓던 학생들과 마주쳤으나 이전과 달리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끈질기게 맴돌던 단내가 사라졌는데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네임이 혀를 얽고 혓바닥 아래를 문지르는 느낌이 어땠냐 하면,

좋았다. 죽고 싶을 만큼.


성준수는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밤늦게 열어본 걔 방 안은 정돈된 채로 물건 몇 개만 사라진 상태였다. 누군가 훔친 게 아니라 주인이 들고 나간 게 분명했다.

어제의 소란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찌그러진 캐비닛은 활짝 열린 채 방치돼 있었다. 캐비닛이 와 저러노....... 아연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반에 있던 학생 절반이 시선을 돌린다. 딴청 피우는 반류들을 보고 이현성은 혀만 차고 말았다.

오늘도 성준수는 오지 않았다. 선생님, 성준수 안 왔는데요. 망설이다 손을 들고 말하자 이현성은 이번에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중이는 내 좀 잠깐 보자.

"이제 혼현은 멀쩡히 감출 줄 아나 보네. 페로몬도 잘 잠갔고."

이현성의 시선이 눈에서 조금 위, 머리를 향해있었다. 어제 본 성준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짐승의 귀가 돋아났을 곳에.

고작 하룻밤 차이인데 전영중은 담임이 무슨 얘길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을 가려 제 본 모습을 감추고 침묵하듯 제 향을 숨긴다. 어떻게 하냐는 물음이 무색하게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이해했다.

"어제 일이 충격요법이 됐나 보다. 잘된 일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농담이었는지 이현성은 웃다 반응이 없자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하 씨, 어렵네. 내내 표정을 굳힌 녀석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랐다. 덩치만 컸지 한창 자라고 있는 예민한 나이의 아이인데. 왜 초임 때 이런 일이 생기는지.

"견신 중간종이라 아들 눈이 회까닥 뒤집힌 모양이더라. 선조귀환도 흔치 않은데 중간종인 경우는 더 없으니까. 새끼, 늑대 혼은 오랜만에 보네."

"저 진짜 큰일날 뻔했어요."

"안다. 그건 내 미안타. 원래 반류 일에는 선생도 끼어들지 않는 게 원칙이라 두고 봤는데, 애들이 그 지경인 줄 알았으면 내도 막았지."

"준수는요?"

"다른 기숙사 동에 있다. 넌 조만간 기숙사 옮길 거고, 준수는 반 바꿔달라 카데."

왜요? 그렇게 묻듯 눈이 커졌다. 제 안위보다 성준수의 소식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둘이 유독 친하게 지내긴 했지. 이제까진 제일 친한 친구,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반류로 엮인 이상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도 없게 됐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만.

"원래 알파랑 오메가는 같은 기숙사 사용 금지다. 번식기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또다. 짐승에게나 할법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번식기. 성욕을 참지 못하고 짝을 구하러 다니는 짐승들의 시기. 그런 짓을 사람이 하고, 필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거라 여긴다.

전영중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현성이 짐작한 듯 하하 웃었다.

"영중아. 원인 입장에서 보면 반류가 많이 징그럽지?"

"아뇨......."

"괜찮다. 내도 그랬다. 다들 그런 생각 한 번씩 해봤을 테고."

중간종인 이현성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 새끼를 봐야 하네 마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달고서도 2차로 발현되는 성별 때문에 새삼스레 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적도 있었다. 페로몬이라는 것에 휘둘리고, 정욕에 휘둘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시기를 약에 의존해 넘겨야 했다. 그걸 어떻게 정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살다 보면 별거 아이다. 세상에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해 보려는 나쁜놈도 있고, 그냥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지지고 볶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페로몬이니 하는 게 끼어들었을 뿐이지, 원인이랑 다를 거 하나 없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전보다 조금 풀어져 있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행이지. 안도하자 장난기가 슬쩍 고개를 든다.

"와, 아들이 씨 뿌려달라 카면 진짜 뿌려줄 자신은 있고?"

"아, 쌤!"

"내 보기에 전영중이가 그럴 아는 아니지."

그리고 준수 금마도.

바로 옆방에 선조귀환인 알파를 두고 있었으니 무슨 사달이 나려면 진작에 났을 텐데 지금까지 조용하지 않던가.

제가 옆에서 보살필게요. 별일 없을 거예요. 걔한테 프리즈 걸어줄 중종 필요하잖아요. 제가 할게요. 새파랗게 어린애들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줘야 할지 모르지만, 준수는 내뱉는 말을 가볍게 여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러다 뒤통수 맞으면, 내가 사람 잘 못 본 거고. 어쩌겠어.

"니 보기에는 어떨 것 같나."

저를 피해 도망친 하얀 짐승이 떠올랐다. 커다란 덩치를 감출 곳이 없어 머리만 겨우 교탁 아래 밀어 넣고 구슬피 울던 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아우욱. 우욱. 입안으로 먹먹히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달려가 안아주고 위로하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전영중은 기숙사로 뛰었다. 기숙사를 옮기기 전에 얼굴을 봐야 했다.

그러나 옆방의 룸메이트는 끝내 연락 하나 없이 제 짐을 그대로 둔 채 사라졌다.


"준수 지금 몸 안 좋은데."

기숙사 동이 나뉘는 기준이 형질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원인과 알파, 원인과 오메가끼리는 함께 방을 쓸 수 있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한 방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원인 셋과 오메가 반류 하나였던 방이었으나 전영중이 알파 반류로 발현해 버렸다. 알파들이 거주하는 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빈자리가 없다 보니 원인 중 바꿔줄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오메가 기숙사 동에 마침 자리가 남아 차선책으로 성준수가 피신했다는 게 이현성의 설명이었다. 어디까지나 임시고, 결국에는 알파인 전영중이 기숙사를 옮겨야 하긴 했다.

"어디가 안 좋은데?"

전영중의 물음에 진재유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걔한테 반류 특성에 연관된 건 절대 말하지 마.' 성준수가 신신당부한 참이다. 니 히트사이클에 혼 조절도 안 돼서 밖에 못 나온다는 걸 반류 얘기 빼고 어케 말하는데? 물어봤더니 '잘'이란다. 잘 같은 소리 하네.

"그... 왜... 사람이 몸이 안 좋은데 정신적으로 안 좋은 일 있으면 더 서럽고 아프고 그렇잖아."

"안 좋은 일? 뭐? 많이 아파?"

"많이 아픈 건 아니고, 뭐냐, 남한테 보여줄 상태가 아니라......."

"히트야?"

"니가 그걸 우예 아노."

"찍었는데."

"아."

쥐뿔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공부 좀 했나 보네. 진재유가 얼굴을 벅벅 쓸었다. 내한테 들었다고만 하지 마라....... 물론 성준수는 진재유에게 그렇게 화낸 적 없다지만, 불같은 성격을 아니 일단 걱정은 되었다.

"알면 가라. 준수 지금 니 만날 상태가 아니다."

"히트도 약 먹으면 평소처럼 보낼 수 있다며."

"그거야 애가 정상일 때고."

"약을 먹었는데 정상이 아냐?"

"반류는 좀, 원인에 비해 동물에 가깝다 보니 민감하다. 태생이 그래. 그래서 스트레스에도 약하고. 환경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학기 중 기숙사에 갇혀 사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변하지 않았으니 환경은 변화가 없었다. 그럼 정신적인 문제인데.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받을 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나."

너무 많았지. 프리즈인지 마킹인지를 거부한 것부터, 때아닌 추격전에, 캐비닛에 갇혀 온몸을 비비적거리고, 끝내 준수의 본모습을 본 것까지.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영 마뜩잖은 태도에 진재유가 대강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반쯤은 던져본 말이었는데 설마 진짜일 줄은. 성준수가 전영중 싸고도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제 방에는 안 돌아가겠다 하도 고집부리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진짜 점마 때문이었나. 반류로 따지면 신생아랑 다를 게 없는 핏덩어리 때문에 그 고생을 한다고.

"둔탱이 모지리 똘추 새끼."

"뭐, 뭐?"

"준수가 니 욕 안 해서 내가 대신 해준기다."

"걘 나한테 맨날 욕하는데?"

"그거랑은 별개고."

다를 건 뭔데? 그러나 저를 쏘아보는 재유의 눈이 제법 매서워 차마 되묻지는 못했다. 뭐 이렇게 주눅 드는 기분이지. 얘 경종이라고 들었는데.

"알았으면 가라."

"말만 전해줘. 기숙사 뒤에서 기다린다고."

"준수가 한 말 그대로 전한다. 고만 끄지라."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럼 모기들 오늘 포식하겠네."

싸늘한 말을 끝으로 동 현관이 닫혔다. 결국 말을 전해주겠다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눈치도 없이 저에게 날아오는 애꿎은 모기만 손을 저어 쫓아냈다. 에이씨.

건물 뒤로 돌아간 전영중이 돌담에 기대고 쪼그려 앉았다. 광원이라고 해봐야 멀리서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고작이라 어둑했다. 준수는 몇 층에 있으려나. 핸드폰이라도 들고나올걸. 무섭다고 엄살이라도 부리면 나와주지 않으려나? 기숙사 잠기기 전엔 나올까? 재유가 말을 전해주기는 할까? 들어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면?

애애앵. 야속한 모깃소리만 들렸다. 성가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새 팔뚝이 뜯겼는지 간지러워 보지도 않고 벅벅 긁었다. 기숙사를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기는 소리도.

몰라. 아무 데도 안 가고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성준수가 와서 안아줄 때까지.

정말 밤이라도 샐 작정이었다. 해가 저물었다고 쌀쌀해지는 날씨에 전영중은 몸을 더 웅크렸다. 이러다 감기 걸리면 성준수 탓이나 해야지. 아니다. 탓하지 않을 테니 그냥 준수가 아프지나 않았으면.

"귀 집어넣어, 병신아."

익숙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자 3층에서 성준수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쯧. 거리가 있는데도 혀를 차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니 혼현 컨트롤할 줄 안다는 거 구라였냐?"

정수리를 두드리는 동작에 전영중은 머리 위를 문질렀다. 머리가 뭐... 어?

보송하게 솟은 귀... 같은 것이 만져졌다. 털을 헤집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걸 보면 귀가 맞았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이런 게 생겼어? 저를 올려다보며 당황해서 입도 못 다물고 귀를 만지는 모습에 성준수가 웃었다. 얼빵한 표정이 웃겼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성준수가 창틀에 발을 디뎠다. 어어? 낮게 숙인 몸을 튕기듯 펴내며 건너편 고목에 올라탄다. 가지를 한 번 밟고, 위험한 행동에 저도 모르게 팔을 뻗은 전영중 앞에 착지했다. 흡사 고양이 같은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설표가 이거 하나 못 내려올까 봐?"

보통 사람은 못 내려오지....... 놀란 표정에 성준수는 오히려 의기양양해져서는 하얀 꼬리를 높게 살랑였다.

"왜 보자고 했는데."

물론 거기까지였다. 성준수는 더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나무에 기댔다.

"......몸은 괜찮아?"

"괜찮아졌어."

"약 안 듣는다며."

"조금 전부터 효과 있더라. 그래서 나온 거고."

"많이 힘들어?"

"오메가가 히트사이클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서 나와보라고 한 거냐?"

그건 아니지. 난 그냥 걱정돼서....... 감추지 못한 귀와 꼬리가 처량하게 축 처진다. 성준수는 무조건반사처럼 튕겨 일어나려다 아닌 척 팔짱을 끼며 자세를 바꿨다. 하마터면 달려가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사과하고 싶었어. 너한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흑심을 품었다면 이사회니 뭐니 하는 것들을 아예 말하지도 않았겠지. 안다. 성준수는 자신이 궁금해하니까 아는 걸 말해줬을 뿐이다. 학교 사람들이 왜 돌변했는지 이해하는 데는 충분히 도움이 됐다. 적당히 예쁜 말로 포장할 줄 몰라서 그렇지.

"내가 선조귀환이라 잘해준 건가, 그런 생각에 서운해서 실수했어. 미안."

"너는 시발, 내가 늘 잘해준 것 같은데?"

"다른 애들보다 욕 많이 해주긴 했지."

"나 도로 올라간다?"

"아니, 아냐. 농담이야."

정말 올라갈 것처럼 굵은 가지를 움켜쥐자 전영중이 손을 내저었다. 성준수는 한다면 하는 놈이라, 정말 저 나무를 타고 훌쩍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 것만 같았다. 돌아가겠다는 말이 진심은 아니었는지 성준수가 다시 삐딱하게 기댔다.

"......네가 그렇게 우는 게 마음에 걸렸어."

머리를 숨기고 서럽게 울던 짐승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감추려 아무렇게나 도망치던 성준수. 반류는 몸이 좋지 않으면 개체에 따라 혼현을 감추기 힘들어하고, 심하면 본신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얘기를 봤다.

지금도 혼현을 제대로 숨기지 못해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는데. 전영중은 성준수의 약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히트사이클이랍시고 문 걸어 잠근 적 한 번 없는 건강 체질 아니던가. 기내중 때 개근상도 받았는데.

그렇게 터프한 녀석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그게 내 탓이기를 바란 적은 더더욱 없고.

"반류니 형질이니 하는 거, 천천히 알려주려고 했어. 너 뭐가 갑자기 변하는 거 싫어하잖아."

모자를 벗자 눌러놓았던 동그란 두 귀가 솟아올랐다. 하얗게 변한 머리색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답답한지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모자를 다시 쓰는 대신 손에 쥐었다.

"너한테 괜한 오해 사기 싫었어."

"오해?"

"내가 너....... 선조귀환이라 좋아하는 거라는 오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축 처져있던 귀가 쫑긋 섰다. 쟤가 지금, 뭐라고?

"너 나 좋아해?"

"......귓구멍 네 개나 뚫렸으면서 그것도 제대로 못 들었냐? 니 견신인 맞아?"

"나 좋아하는 거 맞냐니까?"

"아니, 시발...... 어."

"진짜?"

"좋아해! 좋아한다고 이 씹새끼야! 좋아하니까 니 안 죽이고 그 지랄을 떨었지!"

"왜?"

"뭐, 왜?"

아니, 정말로. 뭐지? 왜? 이거 꿈인가? 깜짝카메라야? 쟤가 날? 이렇게 갑자기?

전영중이 생시인지 분간 못 하는 사이 분한 듯 노려보는 성준수가 어금니를 짓이겼다.

"죽여버릴까."

"죽이고 싶을 만큼 좋아?"

"저 새끼를 왜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지? 나 등신인가?"

날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다고? 내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얼빠진 표정에 성준수는 금방이라도 집어 던질 것처럼 모자를 구겨 쥐었던 손을 풀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 원인일 때부터 좋아했어. 이사장 자리는 무슨, 반류고 뭐고 처음부터 상관없었다고."

피곤함과 체념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있었다. 볼품없는 고백인데도, 전영중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고백을 들은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나도."

"나도는 또 뭐야?"

"......나 보여줄 거 있어."

손을 까닥여 부르자 성준수는 되려 한 걸음 물러났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일 텐데 왜 도망가지. 한 걸음 다가가자 냉큼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털을 잔뜩 세우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가지에 올라앉아 저를 내려다본다. 갑자기 이제 와서 경계를?

"나 아직 페로몬 조절 잘 안돼."

"내가 참을게."

"반류 좆도 모르는 새끼가 참을게 이러네."

"나 반류에 좆도 있으니까 빨리."

저질스러운 대답에 성준수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막 반류가 된 알파가 벌써부터 저딴 아저씨 같은 말을....... 반류 얘기만 하면 아주 질색팔색 하던 주제에 누구보다 잘 적응한 것 같아 어처구니없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성준수는 다시 나무에서 내려왔다. 천천히, 전영중의 반응을 살피며 걸어오더니 팔이 뻗으면 겨우 닿을 거리에서 멈췄다. 어김없이 초콜릿 향이 났다. 전영중은 품에 가두고 취할 때까지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혀를 뒤집었다.

"뭐야, 더럽게 혓바닥은 왜."

"더럽...... 양치했으니까 잘 봐봐."

"뭘 보라고......."

고양잇과 짐승의 눈이 어둠 속에서 집중해 살피느라 동공이 확장된다. 이내 발간 혀 밑에서 무언가 발견한 성준수가 양손으로 뺨을 움켜쥐었다.

"......이거 나냐?"

손에 감긴 뺨이 동그랗게 부푼다. 눈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사실 널 좋아했다고. 우리의 사랑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운명적이었다.

뺨을 감싼 손에 힘이 강해졌다. 뚫어져라 보던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부드럽던 향이 날카롭게 폐부를 할퀴고. 둥글던 손톱 끝이 꼭 짐승의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뺨을 움켜쥐었다.

"아악!"

“지는 네임때문에 날 좋아했으면서, 뭐? 선조귀환이라 좋아했을까 봐 서운해?"

"아냐! 네임 때문이 아니라, 악! 준수야 진짜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지새끼야! 시팔, 니 순정만 순정이냐?"

"볼살 뜯긴다고!"

씹, 만두 같은 거, 이참에 아예 뜯어버려야지. 쥐어짜 비트는 힘이 강해질수록 전영중의 비명도 높아졌다. 아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날카로워진 손톱이 끝내 뺨을 파고들지는 않는 게, 성준수가 봐주고 있는 게 분명하긴 했다. 전영중은 몰랐지만.

"학생들 거기서 뭐 해!"

비명 소리에 달려온 경비 아저씨가 두 사람을 떼어낼 때까지 전영중은 뺨을 뜯겨야 했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 와중에도 낯선 사람의 등장에 후다닥 서로의 귀를 눌러 감췄다.

그 와중에도 긴 꼬리가 허벅지에 감겨 전영중은 잔뜩 꼬집혀 열이 오른 뺨을 슬쩍 비볐다.

기숙사 현관 폐쇄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밖에 있던 둘은 벌점을 먹고 들어올 수 있었다. 전영중은 페로몬을 온전히 갈무리하지 못하는 성준수를 품에 안고 방에 들어갈 때까지 잔뜩 경계한 채였다. 이 동에 오메가밖에 없으니까 꼴값 떨지 말고. 성준수의 핀잔에도 딱 붙은 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며칠을 싸운 것처럼 내외하더니 어느새 러브버그처럼 한 몸이 되어 등장한 두 사람을 본 원인 룸메이트들만 날벼락이었다.

"전영중, 자냐?"

거실 불이 꺼지고, 아무런 소리 없이 방문이 열렸다. 아니. 작게 답하자 문을 닫고 들어온 인영이 곧 네발로 변해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뭐해?"

"조용히 해. 나 아직 히트 안 끝났으니까."

"근데 왜 내 방에 와?"

그것도 알파 방에....... 성준수는 듣지 못한 것처럼 매트리스를 둥글게 돌며 자리를 고르더니 전영중과 벽 사이에 비집고 누웠다. 커다란 덩치에 밀려 반쯤 굴렀는데 커다란 머리가 팔 아래를 파고든다.

"페로몬 조금만 풀어봐."

"그래도 돼?"

"끝물이라 괜찮아. 그게 더 편하고."

조금이 어느 정도지. 그런 섬세한 컨트롤을 할 수 있으려나. 걱정하면서도 영 안 되겠으면 그만하라고 말하겠지 싶어 전영중은 가둬놓았던 페로몬을 풀었다. 제 아래 길게 누운 몸이 살겠다는 듯 숨을 터트리더니 축 늘어졌다.

발정기에 페로몬을 나눠 안정시키는 건 짝을 맺은 경우에나 한다는 건 전영중은 아직 모른다. 저 새끼도 날 좋아한댔으니까 괜찮겠지. 큰 욕심도 아니고 페로몬 정도잖아. 약으로 진정시키지 못한 옅은 욕망이 알파의 페로몬을 만나 누그러진다.

"......아직도 몸 많이 안 좋아?"

"아니, 많이 좋아졌는데."

"근데 왜 아직도 동물 모습이야?"

성준수가 작게 웃었다. 유튜브를 보다 말았는지 지식이 반쪽짜리다. 아니면 어린이 유튜브라 이건 안 알려줬나?

"몸이 안 좋을 때도 동물 모습으로 돌아가긴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 마음 편히 있어도 그래."

"......아."

맥없이 대답한 전영중이 힘을 빼고 눈표범에게 기댔다. 닿은 부분이 짐승의 체온만큼이나 뜨끈했다. 좋아한다고.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 말이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나도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재차 확인한 마음에 어느 때보다도 안심됐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가늘게 뜨자 잠옷을 꿰고 있던 제 팔이 짐승처럼 검은 털과 뭉툭한 발로 변해있었다.

더 이상 이 변화가 혐오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두려워해도 곁에서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은은한 카카오 향. 이게 준수의 페로몬이구나. 생소하면서도 가슴께를 간질이는 향이었다. 내키는 대로 들이마시면 까슬한 혀가 콧잔등을 핥고 가슴털에 머리를 묻었다.

"각인할래?"

털 사이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뭔지 모르지만 설레는 걸 보니까 좋은 거 같아. 전영중은 반류인 자신의 본능에 온전히 의식을 맡겼다. "좋아." 잠에 빠진 듯 느린 목소리였는데, 털이 풍성한 꼬리는 그와 별개인 듯 기분 좋게 살랑였다. 만족한 것처럼 웃는 바람에 가슴털이 한껏 헤집어졌다.

"근데 각인이 정확하게 뭐야?"

"......유튜브나 마저 보고 와라."

하여간 갈 길이 멀었다.


원래 후기 안 적는데 이런걸 써놨으니 아무래도 적어야 할 것 같죠?

편식도 안 하는데 이게 뭔가 싶어 읽었다가 지옥비빔밥 체험판을 접하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소재 편식한 건 저였는데 함께 지옥 투어 다녀오셨네요. 이렇게 저와 운명공동체가 되셨습니다.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무료잖아요. 피해보상청구 안 됩니다.

온라인 온리전으로 관심 받을 수 있는 김에 안 써본 세계관, 소재, 패러디, 아무튼 뭐라도 다 비벼보자! 는 생각으로 시작된 글입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껄껄껄. 그래서 어땠나요? 저는 좀 더 편식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벼먹기 재밌네...... 시간과 기력이 허락한다면 더 비벼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빵준
  • ..+ 4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