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선수
영화 정직한 후보 패러디
"오늘도 그 햄 만나겠지?"
"준무새?"
"응."
"안 만났음 좋겠다. 배탈 나서 화장실에 처박혔으면."
"하 씨, 그 자판기는 왜 맨날 가만있질 못하고 지랄이고."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님?"
"니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 햄 준무새 될 때면 눈깔부터 돌아있는데."
저들끼리 수군거린다고 목소리를 낮췄나 본데 다 들렸다. 벌써부터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은 모습에 진재유가 물었다.
"아들이랑 들어가 있을래? 음료수는 내 뽑아갈게."
"됐어. 시킬 거면 1학년 시켰지."
그 씨바거는 무시하면 되고. 얼굴만 맞대면 달려와 시비를 걸어대는데 이 정도면 조건반사 아냐? 생각하면 성준수도 위가 슬슬 아팠다. 나름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데 고작 전학 갔다고 제게 이 드러내는 게 달가울 리가. 학교 간의 신경전이라 하기에는 과했다. 예민한 성정에 경기 전부터 신경전은 피하고 싶었지만, 가만 놔둘 놈이 아니다.
씨바거. 그 햄. 준수준수 짖는 준무새. 자판기 앞 NPC 줄여서 자판기로 통하는 전영중은 이제 성준수만이 아니라 지상고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성준수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라임을 타고 디스하는데 매번 패턴이 달라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원중고는 하필 자판기 앞이 애착 장소인지 매번 거기서 몸을 풀고 수다 떨고 1학년 굴리고, 아무튼 별짓을 다 했다.
예선에서 또 원중고와 같은 조가 된 걸 보고 예상했지만, 자판기 앞은 만원이었다. "맨날 자판기 앞에서 지랄들이야. 음료 뽑는데 정신없게." 단출한 6인 체제의 지상고 주장은 서른 남짓의 인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요, 준수." 그리고 전영중 역시 굴하지 않았다. 자판기에 비스듬히 기대는 걸 보고 고등학교 농구부 일동은 생각했다. 또 싸우겠네.
"보고 싶었어."
땡그랑. 음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들고 있던 농구공이 떨어지며 퉁, 고요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무시로 일관하던 성준수가 돌아보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은 천천히 분노로 바뀌었다.
"아니, 뭐, 내 말은"
허둥거리며 입을 문지르던 전영중이 이내 재수 없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예쁘네."
와우. 적막 속에서 조재석이 박수쳤다. 영중이형 남자다! 조재석은 제정신이 아니다. 지국민이 조재석에게 헤드락을 걸어 끌고 갔다.
"씨발, 어디 아프냐?"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너도 몸 좁........"
텁.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지 커다란 손이 입을 막았다. 전영중의 손이 전영중의 입을. 으읍. 으으읍. 저거 뭐야. 나는 나와 싸운다? 입을 막고 몸을 배배 꼬던 전영중이 왼손으로 오른손을 뜯어냈다.
"-조심해, 준수야."
쨔악-! 그리고 전영중의 뺨이 매섭게 휘갈겨진다. 전영중의 오른손에게. 농구선수의 스매싱에 뺨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이젠 분노도 아니고 좌중 경악이다. 성준수조차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저, 저 햄 오른쪽이에게 당한 거 아이가? 그게 뭔데? 기생수요. 그게 뭐냐고 씹덕아.
".......미친놈. 얼굴에도 이거라도 대라."
"아니 씨, 사-흡"
이제는 숫제 동정이다. 손으로 입을 막은 와중에 준수가 건넨 비타파워를 낚아챈 전영중이 냅다 도망쳤다. 고교농구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디펜더다운 속도였다. "사랑해-!" 그 와중에도 미쳐버린 주둥이가 소리 질렀다. 사랑해-! 사랑해- 인적 드문 경기장에 전영중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정신 나갈 것 같은 정적을 깨트린 건 평소 찰진 욕설로 정신 수양 당한 지상고였다.
"저것도 트래시 토크로 쳐야하냐?"
"일단 준수 햄 멘탈은 터트린 듯?"
"자판기 멘탈도 같이 나간 거 아님?"
"그 햄은 멘탈이 아니라 대가리가 터진 거 같은데요."
눈앞에서 주전 멤버 한 명이 폄훼당했지만 원중고의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전영중은 돌았다.
의외로 성준수가 아무 말도 없었다. 제일 가까운 데서 저걸 봤으니 아무리 준수 햄이라도 충격이 큰가 보죠. 충격을 받긴 했다.
"야....... 내 기도가 이뤄졌나 본데?"
"뭐?"
아니, 근데 난 저딴 걸 빈 적 없는데? 쟤 뭐야? 성준수의 중얼거림은 듣는 이의 혼란을 가중했다. 대체 뭘 빌었는데?
새벽에 눈을 뜬 성준수는 조용히 숙소 문을 열고 나왔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저지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황령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운하게 눈이 떠져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김에 운동 삼아 산이나 탈 생각이었다. 갈미봉까지 뛰어갔다 오면 대강 아침 식사 시간에 맞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500밀리 생수 하나를 사 손에 쥐고 언덕을 올랐다. 쌍용기를 잘 마친 덕에 아득했던 입시도 윤곽이 그려졌다.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냈다면 좋았겠지만, 만년 꼴찌던 학교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도 좋은 스토리가 된다. 이번 대회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보이면 무리 없이 1군 대학에 갈 수 있겠지. 숙소에서 자는 녀석들도 너무 긴장 풀고 있음 안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빠르게 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등산로 한편에 돌무덤이 높게 쌓여있고 그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에 흰 천이 길게 걸려있었다. 뭐라고 하더라. 사당 나무? 서낭당?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돌무덤으로 부르기로 했다. 성준수는 살짝 지나쳤던 걸음을 되짚어 올라가 납작한 돌을 돌무덤 위에 살포시 얹었다. 기상호가 보던 일본 농구만화에서 기도할 때 손을 어떻게 하던데. 고민하다 합장하고 몸을 살짝 굽혀 인사한다.
돌무덤님. 등산객과 뒷산을 수호할지도 모르는 산신령님. 추계대회도 좋은 성적을 내게 해주세요. 최소한 8강은 가게 해주시고요, 기왕 도와주실 거면 우승도 시켜주세요. 날로 먹겠다는 거 아니고 저도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아, 씨바 예선에서 원중고 또 만난 건 존나 짜증 나는데 이건 소원 빌기 전에 벌어진 일이니까 넘어갈게요. 그렇지만 전영중 그 새끼 지랄은 좀 안 하게 해주세요. 왜 나만 보면 눈 돌아가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답답한 새끼. 그 새끼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으니까 할 말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가볼게요. 산신령님도 아침 맛있게 드세요.
그게 어제 아침이었다. 그리고 전영중이 이상해졌다.
"햄, 진짜 뭐라고 빌었는지 기억 안 나요?"
"몰라. 걍 생각나는 대로 대충 빌었어. 아니 근데 내가 소원 빈다고 쟤가 바뀌는 게 말이 돼? 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렇기는 한데에......."
기상호의 시선을 따라 성준수도 옆을 보았다. 반대편 코트에 있던 전영중이 눈을 마주치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그런 자기 오른손을 왼손으로 내리쳤다.
"저 햄이 정신병에 걸린 게 아니면 준수 햄이 빌었던 소원, 그것밖에 없는데요?"
"그럼 정신병이 맞나보지"
뭐라고 빌었더라. 그냥 평소에 하던 생각들을 나열했던 거 같은데. 이기게 해주세요. 대학 잘 가게 해주세요. 전영중이 지랄 안 하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신개념 지랄을 한다고?
"모여봐라!"
이현성이 외침에 흩어져 있던 6명이 모였다. 컨디션은 다들 괜찮아 보이고, 몸은 다 풀었나?
"준수, 니 전영중이랑 들이박은 건 아니지?"
"저 주먹질은 안 해요."
"맞나."
공태성과 성준수의 싸움에 끼어 기절했던 사람이 대답했다. ......웬만해선요. 뒤늦게 덧붙이는 말에 그래, 하고 만다. 준수가 입이 험할 뿐이지 쉽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것도 맞았다. 당시엔...... 대회 성적이 워낙 안 좋아 서로 민감하기도 했고. 쌍용기가 잘 풀린 후 준수는 큰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마도. 오른뺨이 퉁퉁 부어 나타난 원중 4번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진짜예요, 감독님! 저 햄은 자기 자신과 싸웠을 뿐입니다."
"뭔 소리고. 하여간 알았다."
준수가 거짓말 할 아는 아니니까.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이현성은 아이들을 가까이 당겼다. 대회 직전까지 연습했던 패턴은 아껴서 중요한 때만 쓰기로 하고....... 목소리를 들으며 흘끔 원중고 벤치쪽을 본다. 저지를 벗은 4번이 윤경택 감독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경기를 시작한 전영중은 자판기 앞에서와 달리 큰 문제 없어 보였다. 돌파도, 슛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디펜스에 기껏 받은 공을 다시 재유에게 돌리기만 몇 번이다. 짜증 나네. 밀고 나가려 해도 힘에서 지니 답이 없었다.
나도 해볼까. 트래시 토크. 평소라면 괜히 도발했다 열만 더 뻗쳤는데 오늘의 전영중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영중이, 어지간히 내가 신경 쓰이나 봐? 딱 붙어 안 떨어지네."
"준수야.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만 불러주면 설레잖아."
씨발. 전영중이 입술을 깨문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잠깐이지만 중앙으로 빠지려는 움직임에 반응이 늦었다. 뭐지. 짜증 나는데 개웃기네.
재유! 준수의 외침에 진재유는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공을 넘겼다. 괜찮아. 내가 오늘 전영중 잡는다.
공을 낮게 잡고 씨익 웃는 모습이 불길하다.
"......준수야, 하지 마라 진짜."
"뭐. 병찬 형처럼 윙크라도 해줘?
"그러면 너무 좋지아시바아아아아아악!"
기습적인 페이드어웨이. 뒤늦게 튀어 오른 전영중이 비명처럼 욕설을 뱉으며 따라왔다. 뒤로 가볍게 착지하고 한 발 늦게 전영중이 밀착해 붙었다. 뭐야, 방금 영중이 욕한 거야? 대놓고? 유독 컸던 절규에 시선이 모였다. 트래시 토크를 하긴 했는데, 전영중을 쓰레기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미안?"
"미안하면 윙크해줘."
그리고 성준수를 끌어안았다. 호각 소리가 울린다. 원중 타임아웃! 1쿼터 5분 만의 일이었다.
원중고 벤치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예정에 없는 교체에 박교진이 몸도 제대로 못 풀고 투입됐다. 윤경택 감독이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전영중을 혼냈다. 영중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혼나고 있습니다. 지금 장난칠 상황 같아? 장난 아닙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원중고의 흐름에 이현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쌍수를 들었다. 아무튼 잘됐당.
전영중이 빠진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원중이 아니지만 멘탈은 이미 박살 나 있었다. 우리 식당 정상 영업합니다. 다 무너진 건물에 플래카드만 덩그러니 붙어있던 사진이 딱 작금의 모습이다. 우리 원중 정상 영업합니다. 폐허가 됐지만.
전영중은 벤치에 앉을 면목도 없는지 서서 응원했다. 재석아 그만 놓치자! 3점 넣어야지! 전영중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재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형, 제발 다물고 있어요. 그러다 또 이상한 소리 할까 봐 겁나. 백코트! 하나 막고 흐름 가져오자! 준수야! 속공 늦었어, 천천히 해! 폐허가 된 원중이 한 번 더 와르르 무너졌다. 윤 감독이 돌아보기도 전에 전영중은 알아서 체육관 벽에 머리를 박고 퇴장했다. 준수 화이태애애애앵! 외침만 남기고.
엄청난 트래시 토크는 양측에 데미지를 입히긴 했으나 더 피해를 본 쪽은 당연하게도 원중이었다. 변절......이라고 해야 할지 순애라고 해야 할지 다소 그의 정신건강이 걱정되는 발언에 원중의 기세는 회복되지 않았고 지상고는 이번에도 1승을 따냈다. 이 사태의 장본인은 스스로를 버스에 격리해 눈과 귀를 막았다.
윤경택은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라고 판단했다. 그 정도로 스트레스 받은 적 없습니다. 면전에서 반박하는 전영중을 쥐어박고 싶었으나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기에 참는다. 무엇보다 촐싹거리듯 한 마디씩 붙이는 전영중의 표정이 처참해서였다.
그렇게 전영중은 주말 훈련 제외라는 특혜를 받게 된다. 쉬고 돌아오라는 배려에 부산행 KTX를 탔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입이 성준수 앞에서는 아예 고삐가 풀렸다.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이 척수반사로 튀어 나갔다. 그렇다면...... 성준수에게 뭔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영영 코트에서 뛸 수 없게 되기 전에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열아홉, 입시 준비 중인 체육특기생은 마음이 급했다.
[준수. 나 부산인데 해운대로 올 수 있어?]
이것 봐. 준수를 불러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손가락이 움직여 문자를 보낸다. 미친 몸. 미친 손가락. 문자도 발송 취소가 되던가? 일단 취소하고 다시 보내자. 그러나 보낸 문자 위에서 엄지가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 1이 사라졌다.
[뭐야. 부산은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아아아아아악!"
미친 손가락. 미친 이모티콘. 저건 왜 붙여? 대합실에서 문짝만 한 남자가 절규하며 주저앉자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전영중은 찰싹찰싹 자기 오른손만 때렸다.
준수가 돌았다고 하면 어떡하지? 기분 나쁘다고 안 나오면? 텍스트 대치 오류라고 할까? 실수였다고 하면? 그렇지만 실수 아닌데. 아니, 당연히 실수지!
슬슬 진짜 미쳐가는구나 싶어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구수하게 욕 한 사발 해주겠거니 했던 준수는 문자를 읽고도 대답이 없다. 씹기로 했나? 전화할까? 핸드폰을 만지는 손이 다급해졌다. 그때, 성준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멀어. 광안리 ㄱ]
전영중은 바로 지하철을 타고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너 때문에 이상해졌어. 뭔가 이상하다. 네 앞에 서면 이상해져. 더 이상하다. 적절한 인사말을 고민할수록 청춘드라마 같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왔냐?"
"준수, 밥은 먹었어? 굶는 건 아니고? 지상고 숙소도 어머님들이 식사 챙겨주시지?"
인사말 백 개를 생각하면 뭐 하냐. 이놈의 주둥이는 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는데.
"......어, ......뭐, ......비슷한 놈은 있어."
성준수는 내민 블랙밀크티 라지 사이즈에 손을 뻗었다. 상냥한 말과 달리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받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자 전영중이 손을 들어 재촉한다. 결국 밀크티를 받고 한 입 먹자 놈의 표정은 거의 울 것처럼 보였다. 뭐야. 먹음 안됐나?
"너 괜찮냐?"
"아니. 죽고 싶어. 근데 너 만나서 너무 좋다아아악! 시발, 진짜 죽어버릴까?"
"바다 아직 들어갈 만할걸?"
"준수야, 좀 말려줘. 나 서운하다. 말이 똥같이 나와서 진짜 죽고 싶단 말이야."
그래 보인다. 준수는 드물게 동정을 보였다. 예선 첫 경기에서 입으로 똥을 오지게 싸다 못해 하늘 같은 감독 앞에서도 멈출 줄을 몰랐으니. 원중에서 성실하기로 유명한 선수의 개꿀잼반항을 1열에서 보게 된 지상고 입장에서야 두 번은 없을 진귀한 컨텐츠였으나 팀을 떠나 두 사람은 농구를 같이 시작한 사이다. 멀쩡히 경력을 쌓아 가던 친구의 무너지는 모습은 보기 불편했다.
물론 통쾌한 것도 있었고.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나한테 지랄해서 천벌 받은 거 아냐?"
"내가 언제 지랄했어! 고작 간다는 게 전국 최약체 팀에 들어가서 고생하는 게 속, 흡."
전영중은 들고 있던 밀크티까지 내던지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거 효과 없지 않았냐. 언제까지 버티나 볼 요량으로 빤히 쳐다보며 음료를 마셨다. 쪼옵. 쫀득한 타피오카가 빨대를 따라 굴러들어 왔다. 빤히 마주치는 시선에 전영중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속, 헉, 상해서, 허억."
"......진짜냐."
"아니지......인짜지. 하, 씨, 별......."
주저앉은 전영중이 머리를 털었다.
나 어떡해. 병신같이 말하는 거 안 고쳐지면 앞으로 농구 어떡하지. 죽고 싶다, 진짜.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동정마저 들었다.
그래서 순순히 제 짐작을 말해주기로 했다. 이 사태의 원인이 정말 제 기도 때문이라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니까-물론 제일 큰 귀책은 시비를 털어 대던 전영중 본인에게 있지만. 부산에 왔다는 전영중에게 그럼 서울로 다시 꺼지라고 답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었다.
"나 사실 경기 전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한 거 있어."
"무슨 기도?"
"이것저것. 경기 잘 풀리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고, 네가 지랄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고."
"지랄한 적......."
"알았으니까 닥치고 들어봐. 그렇게 빈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더라."
조금 억울하지 않나? 추계대회가 이제 시작이니 대회 결과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에 소원이 단 한 개 이루어졌다면 하필 제일 후순위인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네가 솔직해졌음 좋겠다고 빌었던 것 같아."
좆도 쓸모없는 거. 일단 주둥이의 통제권은 상실한 거 같은데, 새로운 지랄이 시작됐다.
"이게 솔직한 거라고?"
"아냐?"
"그럼 내가 첫 예선부터 지껄인 말들이 내 본심이라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알지."
"맞아. 아니 씨발, 아냐. 아니 맞아."
맞다는 건지 아니란 건지. 전영중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준수한테 뭐라 그랬지? 보고 싶었어. 오늘도 예쁘네. 몸조심해. 사랑해. 너무 좋지.
슬그머니 올려다본 성준수는 언제나처럼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한심하다는 쪽이었다.
"너 설마...... 니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너도 몰랐냐?"
"어. 아니, 응, 몰랐어."
흡사 진실 판별기가 되어버린 입은 멈추지 않았다. 곧 성인인 애새끼가 자기가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설마, 내가 너 좋아...... 해."
올라가던 말꼬리가 뚝 떨어진다. 초자연적인 의지가 의문문을 평서문으로 바꿔버렸다. 스스로에게 품었던 의문은 얼떨결에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 되어버렸다.
"초딩이냐? 좋아하는 애 괴롭히게."
"그러게 누가 나 두고 전학 가래!"
버럭 소리 지르며 일어나는데 192cm의 덩치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그들은 고작 4cm 차이였고, 더 가까이서 보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모습이 위협적일 리 없었다. 턱을 잔뜩 구기고 울음을 삼키려는 얼굴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덩치만 커졌지 잘 우는 건 하나도 안 변했네.
"무슨 생각 하냐?"
"이제 너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
"솔직하니까 진짜 편하긴 하다."
"편해? 나는 다 끝장나서 가슴이 찢어질 거 같은데? 이제 너 어떻게 봐?"
"왜 끝장났는데?"
영중아. 생각을 해봐.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뭘 빌었는지 겨우 다 떠올렸단 말이야. 내가 새대가리도 아니고 고작 이틀 전에 들었던 말을 까먹었을까. 너도 기억하는 말들을. 그런데 몸소 광안리까지 나와줬잖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생각 많은 누구는 알아들었다.
"전영중. 요 며칠 네 주둥이에서 나온 말들이 본심이라고 인정하냐?"
마지막 선고 전 기회를 주듯이 나긋한 목소리에 손끝이 저릿했다. 단단히 묶여있던 손이 풀리듯 피가 우르르 몰리며 화끈해진다. 아. 이 기회도 놓치면 나는 진짜 등신 머저리구나. 전영중은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무릎 꿇기로 했다.
"응. 좋아해, 준수야."
"내가 영원히 고등학생인 것도 아니고. 대학 가서 만나면 될 거 아냐."
"응."
"알았으면 늦기 전에 올라가. 예선 준비 마저 해야지."
"응. 근데......."
쿨쩍. 눈물을 훔친 전영중이 손을 잡았다.
"나랑 냉채족발 먹고 배웅해줌 안돼?"
"아, 씨바거 귀찮게......."
솔직해진 전영중은 다른 의미로 성가셨다.
과연 프로리그를 경험한 감독은 다르다. 윤경택 감독의 휴식 처방은 효과가 기가 막혀 스트레스로 미쳐버린 고3 하나를 갱생시켰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어쨌든 문제는 해결됐고, 고등부 디펜더 순위권의 전영중은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슛 좋고, 디펜스 좋고. 뿌듯하게 이긴 원중고는 관중석에 앉아 다음 경기를 참관했다. 다만 그곳에 부활한 전영중은 없었다.
"저 햄 그냥 자판기의 화신 아니에요?"
다다음 경기가 지상고라는 걸 알고 온 건지, 아니면 성준수 자판기 사용 센서라도 달린 건지. 그는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자판기에 기대있었다. 지겹다 진짜. 저 햄 또 무슨 정신 공격을 하려고 저러고 있나. 재석 햄이 저 햄 완전 멀쩡해졌다던데요. 구라 아니고?
"준수. 지금 왔어?"
"어. 너는 자판기 전세 냈냐?"
"아니. 너 음료 뽑아주려고 기다렸지."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인데. 과연 원중의 넘버원 디펜더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트래시 토크를 던졌다. 넘치는 간지러움에 면역력 없는 부산 남자 다섯이 동시에 팔뚝을 긁었다. 와, 소름.
제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으로 비타파워를 뽑아 준수에게 건넨다. 진짜가? 그걸 또 성준수는 받아서 마신다. 점마도 돌았나? 지난번에 비타파워를 뽑아줬으니 갚은 셈이지만 지적하지 않기로 한다. 간지러운 분위기에서 전영중이 느리게 본론을 꺼낸다.
"그...... 부산 가서 한 얘기 있잖아."
"어."
"대답을 제대로 못 들었는데 오늘 해줄 수 있을까?"
뭐더라. 아. 좋아한다고. 성준수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남은 비타파워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전영중의 멜로눈깔을 버티지 못한 다섯 명은 바람같이 도망갔다.
와작. 한 손으로 캔을 구긴 성준수가 입구가 좁은 쓰레기통에 캔을 던져 넣었다. 슛감 좋고.
"입시해야 하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
이른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조용히 숙소를 나온 전영중은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저지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버스를 타고 일원역에서 내려 대모산으로 향한다. 불 켜진 24시간 무인 편의점에서 생수와 바나나 하나를 사서 빠르게 산을 올랐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봐두었던 큰 바위에 멈춰 바나나를 올려놓는다.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등산객과 강남의 아들딸들을 굽어볼지도 모르는 산신령님. 부산 촌동네 산신령님도 소원을 기가 막히게 들어주셨는데 제 소원도 들어주세요. 딱 하나만. 성준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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