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인지 홀리데이

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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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의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¹ 그리고 박병찬은 그 괄호 속 공백을 어지럽게 부유하고 있었다. 연말은 이상했다. 온 세상이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아니면 저주이거나. 암묵적으로 합의된 무질서함 속에서 사람들은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거나,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감성에 젖거나, 우울해했다. 박병찬은 생각했다. 그건 꼭 종말 직전의 모습 같다고. 그래서 이 시기에는 아무 일이나 저지를 수 있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옛 연인을, 그것도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재회하게 된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후 7시였다.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슈가 파우더처럼 보얗게 도로에 내려앉았다. 여백 위에 죽죽 그어지는 바퀴 자국은 무참히 파헤쳐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연상시켰다. 왜 선물이 아니라 시련을 주신 거죠. 저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요. 허나 존재 여부도 불분명한 산타클로스에게 하소연해봤자 견인차가 실어 간 국산 중형 세단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으므로, 박병찬은 투덜거리는 대신 기상호를 마음껏 노려보았다.

음.

…….

죄송하다니까요…. 저라고 남의 차 박고 싶었겠어요?

박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서얼마요.

기상호는 겸연쩍게 웃으며 병찬의 시선이 닿은 뺨을 긁었다. 그 행동은 기상호를 순진한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과거의 병찬이라면 사랑스럽다고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박병찬은 더 이상 기상호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병찬은 상호의 크고 투박한 몸과 어설픈 행동거지, 섬세함과 꾸준함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가 지닌 의외성을 버거워했다. 좋게 말하면 부족한 사회성, 나쁘게 말하면 음침한 기질. 그게 돌부리처럼 불거져 나올 때마다 병찬은 상호를 다그쳤고, 상호는 병찬의 고집을 지적하며 반발했다. 평소라면 금방 해소되었을 냉전이 드물게 길어지고 개선의 의지가 쌍방 완전 소실되었을 무렵 그들은 헤어졌다. 이별 사유는 '성격 차이'로 정리되었다.

요컨대 나란히 앉아서 드라이브나 즐길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병찬은 무거운 입을 뗐다.

나 휴게소에서 내려주라.

그냥 타고 가요.

데리러 올 사람 있어.

지금 차 막혀서 한참 걸려요. 연말이고, 눈도 내리고.

......

어차피 저도 부산 가는 길이니까.

상호가 매끄럽게 차선을 바꾸며 말했다. 한창 병찬과 연애할 때만 해도 끼어들기 하나를 못 해서 절절맸으면서 이제 꽤 운전이 익숙해진 듯했다. 평생 형 차만 얻어 타고 싶다고 징징대던 앳된 얼굴이 병찬의 뇌리에 둥실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병찬의 기분은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그는 별 게 다 못마땅했다.

부산에는 왜 가요?

볼 일이 있어서.

약속?

…….

말해주기 싫구나….

당연하지, 상호야. 우리 좋게 헤어진 거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는 네가 내 차까지 박살 냈어. 나 솔직히 너랑 이러고 있는 거 불편하다.

…….

병찬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상호는 금새 조용해졌다. 슬금슬금 눈치 좀 보다가 말 몇 마디 더 붙여올 줄 알았더니, 입 다물고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상호는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맥이 탁 풀린 병찬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댔다. 

남의 자동차 뒷 범퍼를 찌그러트리는 대형 사고를 쳤는데도 기상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병찬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수상쩍은 태연함을 곱씹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건 제 손을 떠난 어린 연인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해졌음을 깨달아서 느끼는 분함도 아니고, 어른스럽게 굴지 못했음을 자각했을 때 몰려오는 민망함도 아니었다. 그런 지리멸렬한 감정과는 완전히 별개인 까닭 모를 불쾌감이 박병찬의 신경을 건드렸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 잠깐 쉬었다가 가도 돼요? 그가 드디어 말을 걸었으나 병찬은 생각에 골몰하느라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상호는 방향지시등을 켰다.

임시 휴게소는 자판기 몇 개와 작은 편의점이 전부였다. 아까 지나쳐온 번듯한 휴게소는 사람이 북적였는데 여긴 한산했다. 상호는 나뭇가지가 드리워진 구석 자리에 차를 대 놓고 내릴 준비를 했다.

편의점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없어.

그래요, 그럼.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은 상호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겅중거리며 걸어갔다. 병찬은 창문 밖으로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편의점 내부에 들어선 기상호는 기묘한 행태를 보였다. 그는 물건을 살 생각은 안 하고 입구 근처를 서성거렸는데, 고개를 길게 빼고 주차장을 힐끔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제 차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어둡고, 눈도 펄펄 내리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 차를 처박아놔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뭐가 그리 걱정되어서 용을 쓰는지. 그게 우스워서 박병찬은 코웃음을 쳤다.

한참을 기웃대다가 편의점 안쪽으로 쏙 사라진 기상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에 물과 커피 따위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음료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카운터 앞 매대에서 뭔가를 이것저것 더 집어 들어 바코드를 찍는 점원 앞에 슥 밀어 넣은 다음, 값을 치른 후, 봉투에 구매한 것들을 담았다.

그 일련의 과정에 특별함은 없었다. 그러나 박병찬의 심장에는 벼락이 내리꽂혔다. 모골이 송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 저릿했다. 꿰뚫리는 듯한 통렬한 감각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들이닥치는 건 절절 끓는 분노다. 박병찬은 흉곽을 옥죄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런 다음 차에서 내렸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든 기상호가 박병찬에게 다가왔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요?

상호야.

네.

넌 진짜 안 되겠다.

네?

이 악물어.

박병찬의 주먹이 기상호의 뺨을 강타했다.

터엉, 텅. 손아귀를 벗어난 봉투 속에서 튕겨 나온 페트병이 바닥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을 크게 휘청인 상호 또한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병찬은 깊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상호는 영 정신을 못 차렸다. 그가 작게 앓으며 꿈틀거릴 때마다 눈밭에 궤적이 남았다. 꼭 눈 천사처럼.

아, 씨발….

기상호.

말로, 말로 좀 하지….

너 내 차 일부러 박았지.

…….

왜?

지랄이란 지랄은 다 떨었는데도 사방은 야속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상호는 고개를 들었다. 코안 쪽이 터졌는지 그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병찬의 맥이 순간 크게 튀어 올랐다. 병찬은 얼어붙은 손을 느리게 펼쳤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맞은 건 기상호인데 병찬은 제 손이 더 아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좆같아서? 엿 먹이고 싶었어?

설마요.

그럼 왜 그랬는데.

그냥….

말끝을 흐린 상호가 패딩 소매로 느리게 뺨을 문질렀다. 닦이기는커녕 잘못 칠한 페이스 페인팅처럼 얼룩덜룩해지기만 했다. 그런 형편없는 꼴로, 기상호는 말했다.

그렇게까지 안 하면.

......

붙잡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휘잉, 칼바람에 비닐봉지가 날아가고, 그 밑에 숨겨져 있던 너절한 잡동사니가 드러난다. 뭉개진 껌과 졸음 방지 사탕. 그리고 콘돔 박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아, 이… 골 때리는 새끼. 병찬은 허파에서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상호도 따라 웃었다. 핏물이 번진 얼굴로, 아주 수줍게.

봐주면 안 돼요?

크리스마스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박병찬의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났다. 병찬은 상호의 아가리에 한 번 더 주먹을 꽂아 넣는 대신, 멱살을 잡고 그를 뒷좌석에 처넣는 쪽을 택했다. 비좁은 차 내부에 억지로 몸을 구겨넣은 병찬은 개처럼 끙끙거리는 상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곧 입술과 입술이 부딪혔다. 헉. 어헉. 병찬의 묵직한 몸에 짓눌린 상호가 가쁜 숨을 뱉어내며 허리를 들었다. 허벅지에 문질러지는 두툼한 이물감을 느끼며 박병찬은 멍하게 생각했다.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그러나 기이한 일주일 동안에는 아무 일이나 저지를 수 있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옛 연인과의 충동적인 섹스 정도는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닐 테다.


¹ 미셸 투르니에, 『외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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