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재워줘

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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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잠을 못 자서 그래. 병찬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는 다 익은 닭갈비를 죄 긁어다가 상호의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햄도 좀 먹어요. 먹고 있어. 고기가 다 나한테 왔는데. 가벼운 실랑이가 오갔다. 단백질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 병찬이 떡과 고구마 사리를 전부 골라낸 탓에 건네받은 앞접시에는 고기와 양배추만 가득했다. 어차피 밥 볶아먹을 건데. 그러나 상호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가 저를 위해 굳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덤덤한 낯 뒤에 감춘 음흉한 생각이다.

영우가 코골이가 심하거든.

아.

알아?

어… 네. 들었어요. 명재 형이 영우 형이랑 룸메였다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그랬지. 근데 명재는 괜찮았대?

글쎄요. 별말 없던데. 그리고 그 형은 잠귀가 어두워서.

그으렇구나….

병찬이 탄식했다. 상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애석함을 표했다.

하룻밤만 재워줘 上

박병찬 x 기상호

준향대학교 소속의 운동선수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그게 원칙이었다. 쾌적한 시설로 유명한 신축 선수단 기숙사는 외벽이 깨끗하고, 공용 휴게실이 널찍했으며, 무엇보다 2인 1실 배정을 고수했다. 손바닥만 한 숙소에서 부원들과 살 부대끼며 살다가 올해 준향대에 입학한 기상호에게는 호사가 따로 없었다. 룸메이트가 학기마다 랜덤으로 교체되는 탓에 재수 없으면 잘 맞지 않는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으나, 상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전부 운동선수다. 단체 생활이 몸에 배다 못해 이골이 난 족속들. 훈련 뺑이치느라 기숙사에 붙어 있을 시간도 없으니 적어도 생활 패턴 때문에 싸울 일은 없을 거다. 예상대로 기상호는 큰 불편함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다. 3학년이 된 박병찬은 그러지 못했지만.

전지 훈련 때는 괜찮았거든? 바로 옆에 눕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런데 같은 방이다 보니까, 이게….

영우 형한테 말해봤어요?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 해서 뭐해.

다음 학기까지 참아야지 어쩌겠어. 병찬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은 듯했다. 상호는 특유의 기민한 눈치로 그가 민망해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괜한 투정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학에 입학한 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어설픈 짝사랑을 시작한 기상호는 종종 마음의 거리를 가시적인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한다. 인사하면 100m, 밥을 같이 먹으면 70m, 단 둘이 조깅을 하거나 훈련을 하면 30m,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바로 1000m. 다시 800, 200, 50, 그러다가 또 1000. 상호는 그 거리를 마음대로 좁히고만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건 박병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친밀하게 굴다가도 선후배라는 이름의 선을 그어버리고, 다정하다가도 야속해지고. 병찬이 고무줄놀이하듯 자유자재로 선을 넘나들 때 태연함을 가장하거나 설레발을 치거나 후회를 곱씹는 역할은 오롯이 기상호의 몫이다. 너스레를 떨걸 그랬나.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울상을 지어 보였으면 분위기가 더 좋아졌을 텐데.

하지만 그건 기상호의 방식이 아니다. 상호는 닭고기를 느리게 씹었다. 그리고 입에 든 걸 전부 삼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침대에서 자요.

어?

기상호의 방식은, 그러니까 이런 거다.

제 침대에서 자면 되죠. 햄 수 공강 아니에요?

맞긴 한데.

저랑 명재 형은 수욜 오전 내내 수업 있어서 기숙사에 없거든요. 저희 방 와서 좀 자다가 훈련 가요.

…….

누구 들락날락 하는 방에서 자는 것 보다는 나을 걸요.

병찬은 내내 멀뚱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가, 제 몫의 수저를 만지작거리고, 물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떡과 고구마와 양배추 조각만 남은 불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돼?

당연히 되죠.

아니, 그게 아니라….

병찬이 침음했다.

너는 괜찮아?

예?

아니, 침대 위에 아무나 올라오는 거 싫어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별로… 전 신경 안 써요. 괜찮으니까 말한 건데.

에이, 그리고 햄이 아무나는 아니죠. 상호는 웃었고, 병찬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조용해진 탓에 트레이를 끌고 테이블 옆을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세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상호가 되었다. 저기, 저희 밥 좀… 햄, 몇 개 볶아요? 어? 두 개면 돼요? 어어. 두 개 볶아. 저희 날치알 볶음밥 2인분만 볶아주세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판 위에 밥이 쏟아졌다. 능숙하게 볶음밥을 뒤적거리던 종업원은 하트로 모양까지 내 준 후 물러났다. 에고, 남사스러워라. 괜히 찔린 기상호는 민첩하게 하트를 반으로 갈랐다.

햄, 드세요.

…….

햄?

으응.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는지 병찬은 깨작거리기만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박박 긁은 누룽지는 결국 전부 상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2주가 흘렀다. 기상호의 일상은 쳇바퀴처럼 빠르게 굴러갔다. 일주일에 3번 있는 아침 훈련에 참석하거나 가벼운 조깅으로 몸을 풀고, 오전 수업을 들으며 졸거나 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오후 내내 훈련하고… 침대에 누워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다가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한가하게 과거를 되새김질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닭갈비집에서의 일은 자연스럽게 기상호의 기억 저편에 묻혔다. 그건 박병찬의 탓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날쌨다. 해쓱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원상 복구된 채였다. 병찬은 고된 훈련을 마치고도 기운이 남는지 물통을 건네주거나 슛 연습을 봐주거나 하며 아무렇지 않게 기상호의 순정을 뒤흔들었다. 그래, 불면을 호소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멀쩡해 보였다는 거다.

그래서 상호는 자기가 먼저 건넨 그 모종의 제안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화요일 저녁, 병찬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 까지는.

나 내일 너희 방에서 자고 가도 돼?

예?

끼익, 달칵. 캐비닛이 닫혔다. 상호는 경첩이 긁히는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을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수요일이잖아.

그, 그렇죠?

네가 수요일에는 자고 가도 된다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병찬이 작게 속삭였다. 비밀스러운 얘기라도 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순간 기상호의 머릿속 테이프가 빠르게 역재생된다. 몇주 전, 밥 먹으면서. 그랬지.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맞다, 맞아요. 하하. 회상을 마친 상호가 반 발짝 멀어졌다. 막 샤워를 마친 병찬은 살갗이 촉촉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눈을 마주하는 대신 그의 목덜미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쪽을 택한 상호는 병찬이 옷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좀 곤란한가?

네? 전혀요! 완전 괜찮아요.

진짜?

그럼요. 1층이 제 침대니까 거기 쓰시면 돼요.

고마워. 잘 쉬다 갈게. 병찬이 수줍게 웃으며 상호의 어깨를 힘 있게 몇 번 주물렀다. 그리고 발치에 내려놓은 더플백을 매고 라커룸을 나갔다. 기상호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아릿한 감각이 남은 어깨를 매만졌다. 와, 놀래라. 저 형은 맨날 훅 치고 들어온다이가…. 닫힌 문에서 겨우 시선을 돌린 상호는 가방 안에 유니폼과 빈 물통 따위를 주섬주섬 쑤셔 담으며 쿵쿵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주말에 이불과 베개 커버를 세탁해놓길 잘했다. 자기 전에 가볍게 청소를 하고, 다음 날 방을 나서기 전 페브리즈를 뿌려놓으면 박병찬에게 선보이기에 부끄럽지는 않을 테다. 상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그러나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철컥, 405호의 문이 열렸다. 저지를 입은 기상호가 들어왔다. 그는 수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온 참이었다. 바로 체육관으로 향하려다가 휴대전화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은 게 생각나 기숙사에 잠깐 들렸다. 발목을 탈탈 털어 신발을 벗어던지고, 멀티탭에서 충전기를 뽑아 가방에 넣던 기상호는 낯선 물건들이 제 책상 위에 놓여 있음을 알아챘다. 스낵 과자와 킨더 초콜릿. 병찬이 두고 간 모양이었다. 아이, 참.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상호는 실실 웃었다. 과자 봉투 위에는 파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포스트잇을 하나 뜯어 사용한 듯했다.

재워줘서 고마워.

꾹꾹 눌러 쓴 글씨.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지만 큼직하게 휘갈기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필체. 짧은 쪽지를 반복해서 읽던 기상호는 그제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박병찬이 내 침대에서 자고 갔다.

기상호는 고개를 들어 찬찬히 실내를 둘러본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은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은은하게 밝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상호는 제 침대로 눈을 돌렸다. 방을 나서기 전만 해도 생활감 있게 구겨져 있던 이불이 깨끗하게 펴져 있었다. 몇개월간 사용한 침대가 낯설게 느껴졌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기상호가 느리게 저지를 벗었다. 지익, 지퍼가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충전기만 챙기고 나갈 예정이었는데, 저 자신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충동이 기상호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벗은 겉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상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정리된 이불이 최대한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윽고 기상호는 이불에 삼켜진다. 길쭉한 팔다리를 접어 태아처럼 웅크린다. 피가 빠르게 돈다. 두근대는 소리가 머리까지 닿은 탓에 뇌가 있을 자리를 심장이 차지한 것 같았다. 박병찬이 스쳐 간 자리에서 다양한 냄새가 났다. 고여있는 공기의 텁텁한 냄새, 침대 프레임 틈새에 낀 먼지의 냄새, 빤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불의 다우니 향, 외출 전에 흠뻑 뿌린 탈취제 냄새. 시트에 배인 익숙한 체취를 무시하고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면 느껴지는, 베개 위에 희미하게 남은, 제 것이 아닌 게 분명한 샴푸 향기.

아, 씨발.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해요, 형.

기상호는 결국 오후 훈련에 지각했다.


4쿼터, 스코어 95 대 94, 30초가량 남은 경기. 슛 하나로 승리가 결정되고 실수 한 번이 패배로 이어진다. 고조된 분위기 속, 패스를 받은 박병찬이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코트를 가르며 달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기상호다. 그들은 팽팽하게 대치한다. 자세를 낮춘 채 확장된 동공으로 앞을 응시하는 기상호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하다. 온 몸의 신경이 눈앞의 남자에게로 쏠리자, 기상호는 박병찬과 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응원과 농구화 밑창이 끽끽 대며 마찰하는 소리가 멀어진다. 전부 흐린데 오직 박병찬만이 선명하다. 그의 호흡,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돌파할 곳을 탐색하는 새카만 눈동자. 그가 들썩일 때마다 흰 유니폼이 잔상을 남긴다. 흰색 유니폼. 박병찬이 입고 있는 흰색 유니폼. 그런데 왜 형이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지? 왜 나는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거지? 우리 학교 유니폼 색은 분명…. 뒤늦은 의문이 기상호의 머릿속에 차오르자, 박병찬이 들릴 듯 말듯 속삭인다. 기상호. 무슨 생각해.

탕, 신호탄처럼 공을 튀긴 병찬이 움직인다. 아차 한 상호가 바로 따라붙었지만 이미 늦었다. 모든 수비를 떨쳐낸 병찬은 자유롭다. 박병찬이 점프한다. 기상호도 손을 뻗으며 뛰어오른다. 박병찬이 공을 던진다. 기상호의 손끝은 아무것도 스치지 못한다. 승리의 확신에 찬 박병찬이 웃는다. 또 속삭인다.

나한테 집중해야지.

페이드어웨이슛.

철썩, 공이 림을 통과한다.

허억. 높은 곳에서 한없이 추락하는 감각을 느끼며 기상호는 눈을 떴다. 한참을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옆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아냈다. 새벽 4시. 알람이 울리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밤새 흘린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매트리스 위에 휴대전화를 던지듯 내려놓은 상호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래도 진득하게 달라붙은 불쾌함이 가시지 않았다. 순간 뇌리를 스친 어떤 깨달음에 목덜미가 선득했다. 아, 제발. 제발. 그는 탄식했다. 한숨도 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회색 트레이닝 바지의 허리춤을 조심스럽게 들췄다. 바지 속을 목격한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또 병찬을 상대로 몽정했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상호 일찍 왔네?

어, 넵. 안녕하세요….

화들짝 놀란 상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꼭 인사를 한다기보다는 참회하는 죄인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정 하는 건 아마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작 8시간 전이었다. 불그스름한 백열등 아래에서 욕설을 짓씹으며 룸메이트 몰래 속옷 빨래를 처리한 게.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은 당시의 당혹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너무 짧았고, 들고 있던 공을 던지며 천천히 다가오는 병찬의 모습은 흰색 유니폼을 입은 꿈속의 남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상호는 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체취에 사춘기 소년처럼 흥분했던 날, 박병찬이 기상호의 꿈에 등장했다. 그가 나오는 꿈은 옛날에도 종종 꿨으므로 상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새벽, 가위에 눌린 듯한 몰골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옷 아래로 느껴지는 축축지근함의 원인이 땀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그는 자신이 병찬에게 어리석은 제안을 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자괴감을 느낀 상호는 한동안 침울했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꿈속의 병찬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반짝였다. 상호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뚫리고, 밀리고, 추월당했다. 그건 꼭 서툰 사랑의 말로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열패감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단단히 각인이라도 된 모양이다.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가 품은 마음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망주 앞에서는 너무나 하잘것없다고,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봤자 필패할 수 밖에 없노라고.

405호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병찬은 세 번을 더 방문했다. 

그리고 기상호는 꿈속의 박병찬에게 세 번 더 패배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병찬은 속 편하게 웃고 있다. 그는 상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달라붙었고, 상호는 그와 조금이라도 덜 접촉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옹송그렸다. 진짜로 벌 받을만한 상상을 해 버리기 전에 조치해야만 했다.

이제 지각 안 하기로 했어?

아, 햄! 고작 한 번 늦었던 거 가지고 대체 언제까지….

고작? 1학년이 빠져가지고는.

병찬이 키득거렸다. 그는 장난스럽게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코트 가장자리로 상호를 끌고 갔다. 거기에는 스트레칭 매트가 일렬로 깔려 있었다.

누워.

네?

기상호의 목소리가 엇나갔다.

누우라고. 너 몸 풀어야지.

저, 저는 혼자 하면 되는데요.

혼자 하긴 뭘 혼자 해. 내가 봐줄게.

지금은 안 된다. 병찬이 상대라면 곤란했다. 상호는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눈을 도르륵 굴려 체육관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두어 명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스트레칭을 끝냈는지 한참 웜업 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의무실에 감기약을 받으러 간 명재를 기다렸다가 같이 올걸 그랬다. 후회가 몰아쳤다. 그러나 더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상호는 매트 위에 똑바로 누웠다. 파란색 매트 겉면에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살이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는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병찬을 힐끔거리다가, 오른쪽 다리를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리고 허벅지 뒤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굳어있던 햄스트링이 늘어나면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병찬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허공에서 흔들리는 상호의 오른쪽 발을 덥석 잡아들었다. 헉. 놀란 기상호가 헛숨을 들이켰다. 병찬은 손아귀에 쥔 발목을 몇 번 주무른 후 부드럽게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상호의 다리를 무자비하게 찢기 시작했다.

으어억, 어억. 잠깐, 잠깐만요!

참아. 이래야 풀려.

아아아아!

어어, 반대쪽은 바닥에 붙이고 있어야지.

아아아아파요오오오…. 상호는 연신 끙끙거리며 앓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병찬은 뭐가 그리 좋은지 피실피실 웃었다. 너 방금 낸 소리 엄청 개 같았다. 어, 무릎 뜬다? 다리는 90도 유지해야지. 아니, 무릎 붙이는 거랑 다리 올리는 걸 동시에 못 해? 

됐다. 이번에는 왼쪽.

저희, 좀만 쉬었다가 하면….

응, 안 돼.

억.

무릎을 꿇은 병찬이 거침없이 상호의 위에 올라탔다. 말릴 틈도 없었다. 허벅지 위에 무게가 실리자 어정쩡하게 떠 있던 상호의 오금이 매트에 착 닿았다. 다리 올리자. 병찬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아닌데. 지금 너무 가깝지 않나? 하지만 상호는 어쩐지 그의 말을 거역하는 게 힘들었다. 기상호가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왼쪽 다리는 곧 병찬의 어깨에 걸쳐졌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당겼다. 저릿저릿했다. 그런데 저린 곳이 한 군데가 아닌 것만 같았다.

좀 낫지?

그럭저럭….

네가 하도 엄살을 피워서 살살 하는 중이야.

엄살 아니, 윽, 거든요.

확실히 아까보다는 통증이 덜 했다. 그러나 상호는 제발 다시 거칠게 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홧홧했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병찬이 전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죽을 맛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기상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다가,

햄. 그, 이제 된 것 같은….

기상호.

병찬에게 저지당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상호의 흉곽을 가만히 눌렀다.

네, 네?

요즘 어때? 괜찮아?

뭐가요?

그냥, 뭐… 학교생활이라든가.

괜찮은데….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뭔가 네가, 음.

병찬은 뜸을 들였다.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제가요?

상호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고민이 있다. 허나 그 원인이 전부 병찬이었다. 솔직하게 말할수는 없었으므로 상호는 얼버무렸다.

전혀 아닌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지….

틈만 나면 멍때리고, 잠수타고.

…제가 그랬어요?

밥 먹자고 부르면 나오지도 않고.

아이, 그건 햄 지갑 사정이 걱정, 아.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었으면서.

병찬은 근육이 잘 잡힌 상호의 다리를 섬세하게 주무르며 잠깐 침묵했다. 기상호는 이상하게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백 퍼센트 제 착각이겠지만.

나 자꾸 피하고.

병찬이 꼭 토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

내일 수요일이잖아.

또 너희 방에서 자고 가도 돼? 병찬이 넌지시 말하는 순간, 덜컹. 부원 몇 명이 체육관 문을 밀고 들어온다. 왁자지껄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병찬의 등 너머로 들려왔다. 하지만 박병찬과 기상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진공 상태의 공간에 단둘이 남겨지는, 꿈속에서나 겪었던 현상의 재현이다.

그리고 기상호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아뇨.

…….

그, 청소를 못 했더니 방이 많이 더러워서… 하하, 하.

…….

이번에는… 안 될 것 같아요.

…….

죄송해요.

기상호는 쥐어짜내듯 변명했고, 박병찬은 내내 덤덤했다. 천장만 바라보던 상호가 용기내어 병찬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호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려준 병찬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입을 뗐다.

그래.

그게 다였다. 병찬은 상호를 뒤로한 채 코트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체를 겨우 일으켜 매트 위에 앉은 기상호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코치가 부는 휘슬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자, 얘들아. 슬슬 모여라. 다 왔지? 명재는? 약 먹고 온대요. 걔는 감기가 안 나아서 어떡하냐. 야, 기상호! 후딱 와라. 네, 넵! 상호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매트를 밟고 주욱 미끄러질 뻔했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후다닥 뛰어간다. 

슬슬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안 좋은 일은 항상 한꺼번에 일어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머피의 법칙이다. 하나, 상호의 룸메이트인 명재가 앓아누웠다. 한동안 감기를 달고 살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밤새 갑작스러운 고열과 근육통에 시달리던 그는 날이 밝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검사 키트로 코를 몇 번 찌르고 나서야 정확한 병명을 들을 수 있었다. 코로나는 아니고 독감이네요. 일단 수액 맞고 가시고요, 타미플루 처방해드릴 테니까 12시간마다 드세요. 당분간 격리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에 명재는 바로 본가로 보내졌다. 감독은 자가 검진 키트를 두 손 가득 든 채로 전원 의무실 집합을 때렸다. 준향대학교 농구부원들이 단체로 코를 부여잡고 훌쩍거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긴 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양성이 나온 사람은 없었다.

둘, 레포트를 날려 먹었다. 목요일 오전 10시에 수강하는 '그리스 신화와 대중문화' 수업은 시험을 치지 않는 대신 종강 전에 꼭 한 번은 자유 주제로 발표를 해야만 했는데, 이는 최소 A4 5장 분량의 레포트로 대체가 가능했다. 숫기 없는 상호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틈틈이 글을 써 내려가 총 7장 분량의 레포트를 완성해냈다. 그러나 제출 마감 하루 전, 레포트 내용을 검수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친 기상호는 잘못 덮어씌워져 내용 절반이 날아간 파일을 마주하는 절망을 맞이한다. 좌절할 시간은 없었다. 머릿속을 박박 긁어 얻어낸 기억의 파편들을 필사적으로 짜 맞춘 상호는 1분을 남겨놓고 극적으로 메일 전송에 성공했다. 하마터면 성적 확인란에 F가 찍힐 뻔했다. 이런 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채로 기상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셋.

끼익, 탕. 상호는 캐비닛을 닫았다. 얇은 철제 문짝이 부딪히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샤워실에서 는적거리는 사이 모두 기숙사로 가버렸는지 라커룸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기다려줬을 룸메이트는 본가에서 골골대는 중이고, 이따금 편의점에 가자며 상호를 붙잡곤 하는 병찬도 요즘은 잠잠했으니 당연했다. 그래, 박병찬. 얼핏 수면 위로 떠오른 이름이 상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호는 캐비닛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콩콩 찧어댔다. 으으으으….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애꿎은 캐비닛이 덜컹덜컹 흔들릴 때마다 덜 말린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박병찬이 기상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상호는 정말이지 병찬이 너무 어려웠다. 엉엉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얼결에 당분간 혼자 쓰게 된 405호의 내부는 썰렁했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누른 상호는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던졌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요일 밤인데 영 흥이 나지 않았다. 속도 부대꼈다. 점심으로 먹은 게 얹힌 모양이다. 오늘은 삼삼오오 모여서 학식을 먹었는데 개중에는 병찬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병찬을 의식하느라 카레라이스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상호와는 달리 그는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딱 한 번 밀어냈을 뿐인데 저만치 멀어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상호는 명치께를 몇 번 쓸어내렸다. 그러고 나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박병찬은 이제 기상호와 단 둘이 밥을 먹지 않는다. 용돈을 받았다고, 혼자 먹는 건 쓸쓸하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너만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가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장난을 쳤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병찬의 태도는 철없이 들끓던 정욕을 잠재우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막막함의 해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상호는 때때로 서글퍼졌다. 박병찬이 좋았다. 아마 계속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한때 병찬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일일이 조바심을 내던 상호는 바야흐로 소모됨에 대해 생각한다. 백 번 슛을 던졌는데 한 번도 안 들어가면 슬프지. 죽어라 노력했는데도 수비를 뚫지 못하면 화나고. 그래도 해야지 뭐 어쩌겠어. 백 한 번 슛 던지고, 어떻게든 파고들면 그만이야. 병찬이 슛 시범을 보여주며 했던 말이다. 그가 3점 라인 바깥에서 던진 공은 매끄럽게 골대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형, 전혀 읽을 수 없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해요? 여긴 코트 위도 아니고 바라는 게 반드시 이뤄지는 꿈 같은 세계도 아닌데.

당장 보답받지 못해도 계속 이어가는 건 기상호가 아주 잘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그도 지치는 마음은 어찌 할 수 없는 법이라.

침대 위에 몸을 던진 상호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피자를 시켜 먹자고 농구부 1학년 동기들이 단톡에서 상호를 연신 태그하고 있었다. 거절의 답과 함께 잉잉 우는 이모티콘을 보낸 상호는 라프텔 앱을 켜서 심드렁하게 스크롤을 내렸다. 할 일도 없고, 노닥거릴 기분도 아니어서 혼자 애니메이션이나 보다가 잘 생각이었다. 요즘 챙겨보는 신작 시리즈는 뒤로 갈 수록 재미가 없었다. 슬슬 하차하고 다른 거 봐야지. 다은 햄이 재밌다고 했던 게 이거였나? 상호는 최근 판권이 부활한 고전 애니메이션의 섬네일을 터치했다. 1화를 틀었다.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이 마음에 들었다. 곧이어 2화가 재생됐다. 오프닝 건너뛰기 버튼을 누른 상호는 슬슬 내용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3화, 4화, 5화.

상호가 저도 모르게 잠든 건 8화의 엔딩 송이 흘러나올 즈음이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상호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꿈뻑이며 부스스 일어난 그는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꽤 오래 잤는지 애니메이션 1기 마지막 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앱을 끄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똑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큼.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상호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박병찬이 서 있었다.

쾅. 화들짝 놀란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상호야. 똑똑똑. 기상호? 똑똑똑똑. 분명 병찬의 목소리다. 헛것은 아니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걸 보니 귀신도 아닌 것 같고. 꼬집은 손등이 아픈 걸 보니 꿈은 더더욱 아니다. 상호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얼어붙었다. 이 형이 왜 갑자기 찾아왔지? 내가 뭘 빌려줬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2층 방을 사용하는 병찬이 4층까지 몸소 행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를 문밖에 방치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상호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살짝 문을 열었다.

바, 바람 때문에 닫힌 거예요.

…바람이 불었어?

네. 그게, 하하. 자꾸 이러네요. 문이 망가졌나.

그래?

하하, 하.

제발 닥쳐라, 기상호. 제발. 상호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병찬은 상호의 기이한 행동거지를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침묵하기를 택했는데, 상호가 어색한 웃음을 완전히 갈무리할 때까지도 용건을 밝히지 않고 주저거렸다. 하는 수 없이 상호는 반쯤 연 채로 붙들고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건 왜 들고 온 거예요?

병찬은 오른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뭐…언데요?

오늘만 너희 방에서 자고 가게 해줘.

네?!

상호의 입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병찬은 사뭇 비장하게 양 팔로 베개를 끌어안았다.

영우가 또 코를 심하게 골아. 잠을 못 자겠어.

아니, 잠깐만요.

한 번만 봐줘. 응? 절대 불편하게 안 할게. 죽은 사람처럼 자고 갈게. 네가 숨 쉬지 말라고 하면 숨도 안 쉴게.

진짜진짜진짜진짜로. 애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거절할 타이밍을 놓친 상호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노린 병찬이 한 발짝을 크게 내딛었다. 병찬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상호는 주춤 물러났다.

딱 하룻밤만 재워줘.

…….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 테니까….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기상호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항복선언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이불을 깔기 시작한 병찬때문에 상호는 기함했다. 그들은 병찬의 잠자리를 두고 한참 동안 옥신각신했다. 

2층에서 자라니까요.

됐어. 명재한테 허락도 안 받았잖아.

명재 형 그렇게 안 쪼잔해요. 형한테는 제가 나중에 말할 테니까….

내가 맘이 불편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바닥에서 자면 근육통 온다니까요?

병찬과 같은 팀에서 뛰게 된 상호가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가 있다. 은근히 멋을 부린다는 점, 의외로 먹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린다는 점. 그냥 고집도 아니고 쇠고집.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댄 상호는 구겨진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사람이 둘이고 침대도 둘인데 왜 굳이 바닥에서 자려고 하는 건지. 운동선수라는 인간이 몸을 좀 아껴야 하는 거 아닌가. 평소라면 못이기는 척 병찬을 따랐겠지만, 상호도 오늘만큼은 반발심이 들었다.

그렇게 불편해요?

어.

그럼 제 옆에서 자요.

어?

햄이 바닥에서 자면 제가 불편하니까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요. 그럼 괜찮죠?

아니, 상호야. 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안 괜찮으면 햄네 방으로 돌아가요. 여긴 제 방이니까 제 맘대로 할래요.

병찬이 눈에 띄게 동요했으나 상호는 꿋꿋했다. 당분간 또 습한 꿈에 시달릴 게 뻔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었다. 쿡쿡 찌르고 간지럽히고 언뜻 드러난 틈새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내서 벌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낱낱이 분해된 병찬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치면 그 산뜻한 낯 아래 감춰진 종잡을 수 없는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상호는 감히 불순한 생각을 품었다.

더 시간을 끌면 정말로 병찬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버릴 것만 같아서, 상호는 일부러 부산스럽게 바닥에 펼쳐진 이불을 끌어모았다.

저 자다 깨서 졸려요. 불 꺼도 돼요?

…….

햄?

어어, 괜찮아.

네 마음대로 해. 힘없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상호는 제 침대 위에 그의 베개를 보란 듯이 올려놓았다. 그리고 불을 껐다. 되돌아온 상호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정리하고, 벽에 딱 붙어 한 사람이 더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내내 병찬은 우두커니 바닥에 앉아있었다. 햄, 뭐해요. 잘 준비를 마친 상호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병찬은 그제야 느적느적 그 옆에 몸을 뉘었다.

침대는 장신의 남자들이 나란히 눕기에는 빠듯했다. 그러나 둘 다 모로 누우니 못 잘 정도는 아니었다. 벽을 보고 누운 상호가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지만, 아직 눈에 어둠이 익지 않아서 벽지 무늬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졸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병찬과 등을 맞대고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뜨끈한 체온과 함께 적요한 어둠을 벗겨내는 병찬의 고른 호흡이 느껴진다. 이 방에는 제대로 된 시계도 하나 없어서 상호는 초침 소리 대신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상호가 입 속으로 100까지 셀 무렵, 병찬이 말을 걸어왔다.

안 좁아?

네?

안 불편하냐고.

괜찮아요. 저 원래 구석에 붙어 자는 거 좋아해서.

음, 그런 것 같긴 하더라.

무슨 뜻이에요…?

병찬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너 지상고 다닐 때 우리 학교랑 합숙했잖아. 유스 캠프도 같이 갔고.

아.

얌전하게 자더라.

아….

구석에 콕 박혀서.

…….

미안. 이제 말 안 걸 테니까 자.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멋쩍은 마음을 잠재운 상호는 눈을 감고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큼, 병찬이 헛기침을 했다. 서른넷, 서른다섯, 서른여섯. 병찬이 한참 뒤척였다. 많이 불편한가. 백쉰일곱, 백쉰여덟, 백쉰아홉. 조용하다. 잠들었나?

삼백.

삼백 하나.

삼백 둘. 상호야.

상호, 자? 병찬이 소곤거렸다. 나른하게 가라앉은 상호의 의식이 둥실 떠올랐다. 기상호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미동도 않고 누워있는 그는 영락없이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자는구나. 병찬이 들릴 듯 말듯 웅얼거렸다. 상호는 당연히 그가 도로 입을 다물 거라고 생각했다.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못 자겠다고 한 거 있잖아.

…….

사실 거짓말이었어.

…….

잠깐의 침묵.

영우가 코를 심하게 고는 건 맞아. 근데 귀마개 끼니까 괜찮더라고.

…….

공업용 귀마개 껴 봤어? 좋더라….

…….

 음, 괜히 룸메 핑계 댄 것 같아서 영우한테 되게 미안하네. 그리고 너한테도.

…….

시트가 밀리면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옆 방이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

유치하게 굴기 싫었는데.

…….

심장 소리.

네 앞에서는 항상 멋져 보이고 싶어서….

또 다시 내려앉는 침묵.

벌떡, 병찬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튀어 오르는 모습이 꼭 삐죽삐죽 털을 세운 동물 같았다. 상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뉘었다. 뻣뻣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병찬을 똑바로 응시했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병찬의 단단한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굳게 다물린 입, 힘이 잔뜩 들어간 턱, 새빨갛게 물든 뺨과 귓불. 그는 꼭 화가 난 것 처럼 보였다. 

기상호.

…….

너 안 자는구나.

아니, 박병찬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왜, 왜 대답을. 야.

…….

깼으면 깼다고 말을 해야지…. 그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손 틈새로 앓았다. 붉은 기운은 이제 목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온통 벌겋게 익은 병찬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나 나갈까?

그리고 기상호는 이번에도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뇨.

…….

가지 마요.

제 옆에서 자고 가요. 말을 맺은 순간, 기상호는 제 뺨도 박병찬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라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되려 날것의 욕망이 피어올랐다. 전부 들키고 싶다고, 자신이 그를 파헤치고 싶어 하는 만큼 박병찬도 저에게 해부의 욕구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그가 저와 같은 마음이길 원한다고. 그리고 그 소원이 이뤄졌는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던 병찬이 서서히 잠잠해진다. 벅찬 숨을 토해내듯 답한다.

그래.

그날 밤, 상호는 꿈을 꿨다. 역시나 병찬이 등장하는 꿈이었는데, 그는 흰 유니폼 대신 평소 즐겨 입는 후드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기상호, 무슨 생각해. 나한테 집중해야지. 병찬이 말했다. 넌 항상 엉뚱한 것에 몰입하더라. 그런 거 말고 나만 똑바로 봐주면 안돼? 상호는 웃었다. 전 계속 형만 보고 있었는데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어요. 형은 몰랐던 것 같지만….

기상호는 문득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농구공이 덜렁 들려있었다. 상호가 병찬을 돌아봤다. 박병찬은 공을 빼앗으려 하거나 골대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퉁, 퉁. 바닥에 몇 번 공을 튀기며 워밍업을 마친 상호가 병찬을 스쳐 지나갔다. 달린다. 코트 위를 내달리는 상호의 발걸음에는 그 어떤 머뭇거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골대 밑에 도달한 그는 가볍게 점프한다. 톡, 부드럽게 공을 밀어 올리듯 던진다.

그리하여, 레이업 슛.

철썩, 공이 림을 통과한다.

고대하던 기상호의 첫 번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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