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육항] 불혹과 지천명 (2019)

과거글 재업

수춘 by 건안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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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과 개연성은 옛날옛적에 손원종에게 숙청당했다





오늘따라 화창한 날이었다. 한동안 적과의 전투는 예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조정에서 뭐라고 하든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현재 오의 국경을 수비하는 것은 현 상황이 그렇다 해서 방비를 허술히 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히 오의 영토에 속하는 이 강가에 그에게 익숙한 어떤 뒷모습이 한가로이 앉아있는 것은 충분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육항은 한숨을 쉬고 따르던 이들을 모두 물린 다음 천천히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또 오셨습니까?”


인사라고 보기엔 매몰찬 말에 갑옷은커녕 칼 한 자루 차지 않은 가벼운 차림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왔는가? 그 주인의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운 인사와 함께, 마치 제 옆에 앉으라는 듯이 손마저 내밀어졌다. 재차 한숨을 쉬고 그 손을 잡고 자리에 앉되 몇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쌀쌀맞긴.”

“지금 그렇지 않게 생겼습니까? 이번엔 또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물정 모르고 소한테 풀을 먹이러 돌아다니다 헤매 들어온 농부인 척 했지.”

“그 소는 또 지금 어디 갔구요?”

“강북의 소고기는 맛있어.”


엉뚱하게만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에 육항은 집에 돌아가면 또 저쪽에서 보내온 선물이랍시고 식탁에 고기가 올라와 있을 것을 예감하고 미간을 짚었다.


“장군을 모시는 휘하 장수들도 고생이겠군요.”

“그럴 리가, 오기 전에 아주 좋은 술을 한 동이씩 안겨주고 왔는걸.”


나는 보기만큼 좋은 상사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남자는 그대로 뒤로 몸을 젖혀 손깍지베개까지 만들어 누웠다. 언제 봐도 늘 팔자 좋아 보이는 이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아는데도.


“…이 일대의 사람들 모두에게 양공이 여기 있음을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나 지금 평범한 백성처럼 보이지 않나?”

“그랬으면 제가 알아보고 내려오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대에게 나야 언제나 특별히 보이지 않는가.”


…퍽이나 그렇겠습니다. 천하에 널리 퍼진 평판에 비해 퍽 능글맞고 쾌활한 이 사내는 언제나 한 번도 제 나이다운 청년이었던 적이 없었던 육항을 이제 와서야 새침한 소년이 되도록 만들어버리곤 했다. …이제 와서야. 이 나이가 되어서야…. 무심코 또 사내에게 휘말려버린 육항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십시오. 이 땅에 오래 계셔봤자 좋을 것 없습니다.”

“예까지 찾아왔는데 술 한 잔 내어주지 않을 텐가?”

“다른 이에게 내어줄 술은 있으면서 스스로 드실 것은 없으십니까?”

“내게 가장 좋은 것은 그대와 함께 하는 술임을 왜 모르는가?”


능청스러운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보자 유려한 눈썹이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 까딱 들려올라갔다.


“…전쟁 중에 늘 가장 좋은 것만을 취할 수는 없지요.”

“참으로 매정하군. 그대와 한 잔 하며 회포라도 풀고 싶었는데. 그동안의 추억도 함께 나누고….”

“서릉에서의 추억이라면 물론 나눌 의향이 있습니다만.”

“…….”

 

말문이 막힌 사내가 이내 작게 툴툴거리는 것을 들으며 육항은 그제서야 피식 웃었다. 역시 당하고만 있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편지에서는 항상 칭찬만 하면서 왜 직접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쌀쌀맞은 말만 하나?”

“쌀쌀맞은 말이 듣고 싶어 칭찬뿐인 편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직접 찾아오시는 것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매도당하는 걸 즐기는 줄 알겠군.”

“잘 됐군요. 이참에 그 양공의 본모습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도록 널리 퍼뜨려야겠습니다.”

“쉿, 내 이런 본모습은 그대만 알고 있었으면 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게.”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으니 이쯤 하시지요.”


짐짓 몸을 떠는 척을 하니 사내가 결국 소리내어 웃었다. 나이답지 않게 청량한 웃음소리가 강바람을 타고 울렸다.


“아하하, 아하하하….”

“…무엇이 그리 우스우십니까.”


얄미운 마음을 담아 눈을 슬쩍 흘기자 사내는 곧 웃음을 거두고 육항과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유절.”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항抗.”

“…….”


순간 턱 막혀오는 숨을 억지로 들어내고 그는 간신히 그러지 마십시오, 하고 중얼거렸다. 목구멍이 좁은 바위틈이라도 되는 것마냥 간신히 삐져나온 말은 입술을 겨우 넘고 그 자리에 턱 엎어졌다. 스무 해도 더 전에나 들었던 호칭, 고작 제 이름일 뿐인데, 듣는 순간 이젠 이미 흐릿해진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적국의 장수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까지 끌어와서야 그는 가까스로 한 번 더 말할 수 있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유절.”


이름보다는 자가 나았다. …혹시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꽤 지독한 술수구나 싶어 미간을 찡그리자 사내가 눕혔던 상체를 일으키고 다가와 미간의 주름을 누르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마치 얼굴에 손을 대어도 좋냐고 허락받는 듯한 모양새라 육항은 이제 와서 눈치를 보십니까, 하고 톡 쏘아 주었다. 아직 그럴 기력은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사내는 그저 웃었다.


“그대나 나나 불혹不惑은 훨씬 넘은 나이인데. 우리 모두 어찌 이리 휘둘리는지.”

“…그야 옛날 사람들과 같은 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전히 야박하기 짝이없군그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둘은 상대의 미간을 꾹꾹 누르고, 또 그런 손길을 밀어내지 않은 채 가만히 두고 있었다. 사내의 손길에서 힘이 거의 사라질 무렵, 아까보다 가까워진 거리 사이에서 속삭임에 가까운 말이 눌러붙어 왔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언제나 한 번이든 좋으니 이곳에서 그대와 시간을 보고 싶었다네.”

“…….”

“이 땅의, 이 강의 바람이 너무나 좋아서… 이렇듯 함께 즐기고 싶었지.”


방금 전, 급작스레 이름으로 불린 탓에 방벽이 깎여나가 버린 탓인가. 육항은 저도 모르게 세 치 혀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유로이 드나드실 수 있게 될 텐데요.”

“유절, 나는 그대와 함께 즐기고 싶다 말했어.”


사내는 육항이 스스로 조른 제 목에 굳이 힘을 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충분히 비참했다.


“그러니 이렇게 온 것 아닌가. 그대는 내가 시도때도 없이 그대를 찾아 이 땅을 밟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올 수 있었던 경우는 열 손가락에 꼽을만큼 적었고, 특히나 이 장소에 함께 앉은 것은 오늘이 처음 아닌가? 미간을 만지던 손은 어느새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육항은 순간 웅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서, 대신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으로도 충분히 많습니다, 하고 논점에서 엇나간 말이나 툭 내던졌을 따름이었다. 사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날이나 잡을까.”

“…장군.”

“그러지 않으면 아래에서 멋대로들 습격이라도 할 것 같으니까. 나는 그대를,”

“양공.”

“마지막까지…”

“…호祜!”


몇 단계를 건너뛴 호칭을 입에 담은 육항은 이젠 숫제 씩씩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했던 일이었으므로 스스로에게도 퍽 낯선 상황일 법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저를 동정하지 마십시오.”

“그대라면 그런 동정마저 이용할 줄 알았는데.”

“공께서 그런 식으로 이용당할 분이십니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이용해봤자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언제 이름을 불렀냐는듯이 어느새 멀어진 거리감으로, 그러나 평소와는 같지 않게 저를 부르는 육항을 보며 사내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아직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채 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하늘이 내린 그의 명命을 안 듯했다. 그야 당연한가. 그 어떤 표정으로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저리 완연한 것을. 사내는 제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줄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저를 동정하지 마시라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니, 나는 지금 내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었다네.”


이 땅에서 아직은 떳떳이 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내는 그사이 조금 어두워진 강가에서 다시금 찌푸려진 미간을 쓰다듬었다.


“천하의 일 중 뜻대로 되지않는 것이 일고여덟이니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나?”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펜슬 이용하는 독자가 많지 않다→조회수가 높지 않은게 당연하다→조회수 신경 안써도 됨→공개적인 곳에 글 올려도 우울증 악화될 가능성 낮음

이거다 싶어서 과거 우울증 이슈로 다 내려뒀던 글들 중 지금 제가 봐도 ㄱㅊ은것들 골라서 좀만 수정하고 올려놓으려구요(당연히 장르 뒤죽박죽)

삼국지 배경 콘텐츠가 아닌 오로지 정사를 가지고 쓴 글은 이게 유일하기때문에 삼국지 글 찾으시고 이 계정…? 스페이스?(아직 시스템 잘 모르겠음) 둘러보시는 건 비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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