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외전1

D-DAY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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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괄호] 안의 대사는 영어입니다.

 

 

 

 

 

종수는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악몽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깬 게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종수가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어제 열한 시쯤 침대에 누웠으니, 네 시간 만에 서너 번은 깬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었으므로, 종수는 몸을 살짝 틀어 이규를 바라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이규가 잡혔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른 숨을 내쉬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종수가 꾸물대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규가 잠결에도 익숙하게 종수를 껴안았다.

고요한 밤. 종수는 조그맣게 들리는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느리게 뛰는 심장과, 두근대는 소리가 평화롭기만 했다.

종수가 나른함에 젖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더 파고들 품이 없는데도 이규의 가슴으로 조금 더 귀를 부볐다. 절로 깊은숨을 내뱉게 됐다.

이규가 좋았다. 걔가 그냥 좋기만 했다. 권태기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종수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꿈이 뭐예요. 물으면 최고의 농구 선수가 되는 거요. 하고 답했다. 그거 말고는 없어요? 또 물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래요. 하고 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되돌아보면 그 모든 걸 이룬 거였다. 종수의 마음이 다시 빠듯하게 차올랐다.

종수도 잡담에 잘 끼지 않는다 뿐이지, 팀 내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소문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장거리 연애로 헤어지는 커플이 시즌 별로 하나씩은 꼭 나왔다. 선수로써 운동에 너무 집중하느라 깨지는 커플도 참 많이 봤다.

장거리 연애나 스포츠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게 이별 사유라면, 자신은 이규와 골백번도 더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결국 10년이 넘는 연애 끝에 결혼까지 도달했다. 뿌듯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 관계에는 이규의 노력이 컸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대단함을 더 알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먹고 되돌아보니, 그때의 이규도 한참 어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다. 이규라고 불안하거나 힘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규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저를 응원하고 기다려 줬다. 덕분에 자신은 미국에서 들리는 듣는 온갖 이별 이유에 흔들리지 않은 채 올곧게 승리만을 좇을 수 있었다.

종수는 이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간 고군분투했을 이규의 모습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한국 시즌을 뛰면서도 꼬박꼬박 미국에 있는 자신까지 챙기던 이규. 여유 시간에 요리를 배우러 다니던 이규. 바쁜 와중에도 EMS로 이것저것 잔뜩 산 다음 편지까지 써 보내주던 이규. 언제 전화를 걸든 자다가 깬 목소리로도 받아주는 이규. 태평양 너머에서도 제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채 위로와 격려를 건네던 이규.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제가 원하는 대로 내내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주던 이규.

그 모든 게 흠뻑 젖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사랑이었다. 변하지 않을 애정과 지지였다.

종수는 넘실대는 이규의 사랑 안에 푹 빠져서 긴장을 풀고 평화를 누리다가도, 먼 곳에서는 그의 지지를 디디고 더 먼 곳을 향해 달려 나가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 모든 건 이규가 있어 가능했다. 물론 이규가 없었어도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긴 했겠지만, 아마 이렇게 잘 올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충만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이규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를 만나 다행이었고, 그와 연애를 시작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니 결혼까지 해야 했다. 이규가 없는 인생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이규가 했던 '여보야.' 같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운 느낌에 종수가 이규의 가슴에 이마를 콩콩 박았다. 하여간 이규는 부끄러움 같은 건 못 느끼는 사람처럼 굴었다. 싫으냐 좋으냐 물으면 당연히 좋았고, 벌써 부부라도 된 것처럼 굴어주는 것도 좋았지만, 종수가 따라가기에는 진도가 너무 빨랐다. 아직 ‘자기야’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한 호칭이 성큼 다가와 버리니 정신이 없었다.

종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나오는 건 결국 한숨뿐이었다. 종수가 답답한 마음에 이규의 가슴팍에 또 얼굴을 부볐다.

왜 이규는 매번 잘만 하는 자기야, 여보야 같은 걸 자신은 할 수 없는지 답답했다. 그런 종류의 말을 뭐라도 내뱉어 보려고 시도만 하면 목구멍이 뭐에 턱 막힌 것처럼 말이 안 나왔다. 물론 홧김에 지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도 간질간질한 분위기에서 잔뜩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고 싶었다. 불시의 공격에 당황해서 달아오른 이규의 얼굴을 보고 마음껏 귀여워하고 싶었다.

그래도 이제는 진짜 평생 같이 있을 거니까, 이렇게 밤마다 시도하면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종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10년 동안 못 했지만, 이제 결혼도 했으니까 좀 더 노력해서 진짜 좋고 사랑받는 남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정 표현을 늘려야 했다. 이규의 반은 안 되어도 그 반의 반, 혹은 그 반의 반의 반이라도 될 수 있게 노력해야 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

* * *

삐삐삐. 울리는 알람을 이규가 단번에 껐다. 품 안에 있는 단단한 몸을 다시 고쳐 안았다. 복슬복슬한 머리칼에 입술을 부비고는 종수를 불렀다.

“종수.”

종수는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여전히 색색대는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규가 푸스스 웃고는 종수의 얼굴을 매만졌다.

잠에 든 얼굴이 말랑하고 보들보들했다. 비시즌이라 조금 살이 오른 볼에 이규가 쪽쪽 입을 맞췄다. 종수가 잠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규가 킥킥대며 미간에도 꾸우욱 입술을 누르고, 종수의 감긴 눈을 조심조심 살폈다. 어제 열심히 얼음찜질한 덕에 눈가가 많이 부은 것 같지는 않았다.

“종수. 일어나야지.”

이규가 종수를 다시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종수는 여전히 으음. 같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 푹 빠져있을 뿐이었다. 잠꾸러기. 이규가 중얼거리고는 종수의 머리칼을 사락사락 뒤로 넘겼다. 잘생기고 예쁜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이규는 자느라 순하게 보이기만 하는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파란만장하던 근 일주일을 되새겼다. 역시 종수는 엉뚱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이규는 살면서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는 들어봤어도, 서프라이즈 결혼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게 분명했다.

이규는 프러포즈를 받은 후 처음으로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차분히 감상에 젖어 들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이 이규를 뒤덮었다.

결혼식 준비 같은 큰일을 혼자 해낸 종수가 대견하기도 하고, 함께하면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걸 끙끙댄 종수가 조금은 미련하게 느껴져 속상하기도 했으나, 역시 곱씹을수록 그의 마음이나 노력이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연하게 제가 응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감이 귀여웠다. 제가 종수를 잘 아는 만큼 그도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저를 향한 그의 신뢰가 사랑스러웠고, 그걸 만들어 낸 자신에게도 제법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 부부. 평생.

이규는 어제 내내 입에 담았던 단어들을 다시 곱씹어봤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한편으로는 후회도 됐다. 주변에 결혼한 동료들이 그렇게 있는데, 그들이 가지게 된 안정감을 내내 종수에게도 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제 견문이 부족해서 그걸 준비하는 종수를 알아채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안 해도 될 마음고생만 잔뜩 시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종수와 보냈던 나날들을 짧게 반추했다.

장거리 연애는 이규에게도 참 고난이었다. 내내 신경을 쏟던 상대가 사라지니 마음이 허했다.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데가 없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란 준비는 모두 다 하고 다녔다.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식물이 마음 안정에 좋대서 식물을 들이고 돌보는 법을 익히고, 틈날 때마다 살림하는 법 같은 걸 들여다봤다. 그렇게 바쁘게 종수의 빈자리를 채우며 지내다가도, 가끔은 종수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그냥 내내 곁에 있어 달라고 할걸. 하고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종수에게 더 넓은 천하를 누리고 오라고 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더 넓은 천하를 경험했기에 지금의 이 결과가 가능한 거였다. 자신은 좁은 천하에서 평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남자 둘이 결혼할 수 있는 미래 같은 건 그려보지도 못했고, 외국인 결혼에도 관대한 나라가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종수는 제가 못 본 곳까지 더 멀리 보며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를 내내 머릿속으로 그려온 거였다.

새삼 종수가 더 자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머나먼 서역까지 넘어가, 농구의 본고장에서 천하를 제패하고 온 그가 참으로 멋졌다. 한국에 있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커리어와 사랑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아준 게 기뻤다. 종수의 마음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런데 그 부피나 무기가 버겁기는커녕 그저 기껍게 느껴지기만 해서, 이규는 정말이지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규가 반듯한 종수의 이마에 입술을 꾹꾹 누르고는, 넘치는 사랑을 입에 담았다.

“종수.”

그의 눈을 마주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자기야.”

달콤한 말을 잔뜩 쏟아부어 그의 귀를 발갛게 물들이고 싶었다.

“여보. 우리 결혼하러 가야 되는데.”

그의 곁에서 언제까지고 그의 안정이나 평화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규가 종수에게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살짝 다물린 종수의 입술은 이규가 원하는 대로 부드럽게 벌어졌다. 이규의 혀가 그사이를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비벼지는 혀에 종수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규가 가벼운 키스를 끝내고, 다시 입을 뗐다. 여전히 눈을 떠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종수와 이마를 맞대고, 코를 부볐다.

“사랑의 키스로도 안 일어나면 어쩌지.”

으으응. 종수의 목에서 그르릉대는 소리가 나왔다.

“응? 여보야.”

종수가 드디어 팔을 들어 이규를 확 끌어당겼다. 이규가 그 힘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어주며 물었다.

“깼어?”

“…….”

이규가 코를 박게 된 종수의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췄다. 종수가 이규의 까슬한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순간, 알람이 한 번 더 울렸다. 이규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핸드폰을 더듬었다. 두 번째 알람이 울렸으니 종수를 예뻐하는 이규만의 시간도 이제는 끝이었다. 이규가 종수의 품 안에서 꾸물꾸물 자리를 다시 잡는가 싶더니, 몸을 뒤집어 종수를 제 위에다 올렸다.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볼이 손에 눌리고 입술이 톡 튀어나오게 돼서 아주 귀여웠다. 이규가 클클대며 살짝 부은 입술에 쪼오옥! 입을 맞췄다.

“종수.”

“……응.”

종수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대꾸했다. 이규가 종수의 눈곱을 살살 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진짜 여보 되러 가야 하는데.”

이규의 손에 편하게 몸을 맡기던 종수의 몸이 그 말에 바짝 굳었다.

“응? 이제 씻고 나와야 친구들 보지.”

종수가 드디어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뻑뻑한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이규였다.

“규.”

잔뜩 갈라져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응. 종수.”

이규가 평소처럼 답했다. 조금 전 여보 같은 말은 제 착각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내내 자기나 여보 같은 호칭에 대해 고민하다 잤는데, 눈을 뜨자마자 이규에게 여보 라는 말을 들으니 또 골이 났다. 하지만 그만큼 좋기도 했다. 이규의 말대로 이제 진짜 여보가 되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결혼을 확 해버릴까, 가벼운 생각을 하는 걸로 시작해 준비에만 일 년 반이 걸렸으니 당연했다.

그 긴 시간의 결실이 바로 오늘이었다. 종수가 순식간에 조급해진 마음에 몸을 벌떡 일으켜 이규의 위에 걸터앉은 뒤 침대를 벗어나려다가,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꾹꾹 입을 맞췄다.

“씻어야 돼.”

“응. 나도 아직 안 씻었어.”

이규가 종수의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들어 다시 쪽쪽 입맞춤을 남겼다. 종수가 그런 이규를 일으켜 세웠다.

“같이 씻어.”

“그럴까?”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종수의 엉덩이를 토닥거리고는 볼에 또 입술을 부볐다.

“먼저 가 있어. 나 가운만 챙기고 갈게.”

“응.”

“응~ 가서 따뜻한 물 맞고 있어.”

“빨리 와.”

이규가 키득거리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잠시라도 못 떨어져 있겠어?”

“응.”

종수가 대수롭지 않게 긍정을 표했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와락 껴안고 마구 입을 맞추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결국 질척한 키스를 하고, 손장난은 결혼 후로 미루고 난 뒤에야 ─이규는 덕분에 결혼 후 얼리 체크인을 해 호텔에서 내내 뒹굴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허둥지둥 씻고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종수의 머리까지 말리고 난 뒤, 여섯 시가 조금 지나서야 스테판과 로시가 숙소로 도착했다. 둘은 번듯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짐을 한가득 들고 있는 스테판과 로시가 한 마디씩 던졌다.

[종수. 어제는 싹싹 잘 빌었어?]

[화해 잘한 것 같은데?]

종수가 별말 없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둘은 숙소를 가볍게 둘러보는가 싶더니, 거실에 서 있던 이규를 보고 반갑다는 티를 잔뜩 냈다.

[오. 이쪽이 네 예쁜이?]

하지만 그냥 반갑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테판이 또다시 이규를 프리티 따위로 부르는 바람에, 이번에는 기어코 종수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로시는 그 모습을 익숙하다는 듯이 무시하고 이규에게 악수를 청했다.

[로시야. 스테판이 종수 동료야.]

이규가 내민 손을 맞잡고 대꾸했다. 스테판은 NBA 경기 영상에서도 봤기에 익숙한 얼굴이었으나, 로시는 확실히 초면이었다.

[이 규야.]

종수는 스테판에게 주먹을 날리다가도 이규가 제 이름을 말하자마자 다시 찰싹 붙어왔다.

“규.”

“응. 종수.”

스테판이 로시의 옆에 서서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규’가 애인 이름이었어? 나는 또 한국어로 달링 같은 게 ‘규’인 줄.]

로시가 스테판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는 ‘규’나 ‘달링’ 같은 단어를 알아들었으나,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도 없었다……. 이규가 자연스레 종수를 바라봤다. 종수는 그사이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는 다시 스테판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죽고 싶어?]

종수의 반응을 보니 듣기가 요원해 보여서 이규는 그냥 웃었다. 전화로도 제법 친하다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진짜 친한 것 같았다. 이규는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미국 생활이지만,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느낌에 숨을 한번 크게 골랐다. 이 먼 태평양 너머에 다른 친구가 생겨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 그 말만 하면 목소리가 달콤해지니까~]

투닥이는 종수와 스테판을 두고, 로시가 이규를 불렀다.

[규? 규라고 불러도 돼?]

[안돼.]

대답하는 건 종수였다. 스테판과의 우격다짐은 어느새 뒤로 한 채였다. 제가 답을 하기도 전에 안 된다고 말하는 종수를 보고, 이규가 곤란한 듯이 또 웃기만 했다. 종수가 매서운 눈을 하고서는 둘을 바라봤다.

[이규라고 부르든지, 리라고 부르든지 해.]

아주 단호한 어조로 덧붙이기까지 했다.

[성까지 붙여 부르면 혼내는 것 같잖아.]

로시가 그런 종수의 말에 눈썹을 늘어뜨리고 대꾸했다.

[그럼 리라고 부르면 되겠네.]

종수는 로시의 말에도 아주 단호했다. 둘에게 이규의 호칭을 단단히 일러둔 종수가, 스테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옷이나 내놔.]

[태도 봐라.]

스테판이 혀를 끌끌 찼다. 이런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길바닥에서 구겨져 있던 걸 주워다 술을 사 먹이고 재워주고 데려다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종수는 빈정대는 스테판의 태도에도 그를 재촉할 뿐이었다.

[빨리.]

[고맙긴 하냐?]

[어.]

스테판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캐리어를 눕힌 뒤 열었다. 로시와 종수가 안에 있는 것들을 쭉 꺼내 펼쳐 놓았다. 소파나 테이블에 올려지는 물품들이 끝도 없었다. 크게는 백 정장 두 벌과 그에 맞는 신발. 작게는 박스째로 보관되어 있던 온갖 액세서리 상자들까지, 이규는 그 모든 걸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스테판과 로시는 모든 걸 꺼내놓은 뒤, 텅 빈 캐리어를 닫고 감상하라며 뒤로 몇 걸음쯤 물러나 줬다. 이규는 그제야 멍한 표정으로 종수를 돌아봤다.

“종수……. 뭐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별로.”

“별로가 아닌데?”

“한번 봐봐.”

이규가 한 쌍씩 나란히 있는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봤다. 행커치프나 커프스까지는 이규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 상자는 아무리 봐도 하나였다. 심지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시계 브랜드이기도 했다. 이규가 상자를 열지 않은 채로 종수에게 물었다.

“시계도 있어?”

“예물로 많이 한다던데.”

“근데 왜 하나야?”

“나는 안 차니까.”

이규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결혼식 예물인데, 자기는 필요 없으니까 상대의 것만 준비했다?

이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살다 보면 가끔 격식을 차리는 때도 필요한 법이었다. 시계는 그럴 때 꾸민 티를 내기 딱 좋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오늘 탄로가 났다시피 종수가 자발적으로 시계 같은 걸 살 리가 없었다. 역시 종수의 시계는 제가 해줘야겠다. 이규가 속으로 다짐하는 사이, 종수가 이규를 재촉했다.

“빨리 열어 봐.”

“아, 어.”

안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데다가 딱 봐도 제 취향인 시계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좀 어두운 느낌의 메탈이라 어디에 차든 무난하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 이거 오늘 차?”

“그럼?”

“너는?”

“안 해.”

“같이 하지.”

“됐어.”

이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종수가 모르는 척 다른 박스를 들이밀었다. 이번 박스는 제법 큰 크기지만, 높이가 낮았다. 심지어 리본도 매어져 있었다. 이규가 종수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는, 리본을 풀고 박스 뚜껑을 열었다.

“면사포? 이건 누가 써?”

남자 둘에게는 정말이지 필요 없는 소품이어서, 이규는 종수에게 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섬세하고 예뻐서 손을 어떻게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면사포를 찬찬히 살펴보던 이규는 불현듯 깨달았다. 종수가 스스로 머리에 얹을 것에 이렇게 공을 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

얼떨떨한 이규의 목소리에 종수가 작게 답했다.

“……응.”

충동이라기에는 제일 공을 들여 고르긴 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제 맘대로 이런 걸 준비했다고 이규가 이런 걸 안 써줄 리도 없었다.

“씌우고 싶었어?”

이규의 말을 들으니 역시 제가 원하는 대로 면사포를 써줄 것만 같아서, 종수는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응. 예쁘잖아.”

다른 사람 앞에서 듣기에는 참 멋쩍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이규는 두 사람이 한국어를 못한다는 걸 위안 삼기로 했다. 이규가 괜히 까슬하게 자란 제 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말했다.

“나 머리 좀 길어서 다행이다.”

“왜?”

“빡빡이 일 때 얹었으면 웃겼을 것 같아.”

“그런가?”

“막상 씌워 놓으면 너도 웃었을걸.”

종수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서 이규의 머리를 밀어주지 않은 거긴 했다. 종수가 뜨끔한 속에 시선을 아주 조금 돌리고는 애써 부정했다.

“……아닌데.”

“아니긴.”

눈에 다 쓰여 있는데도 아니라고 해주는 종수가 귀여워서, 이규가 종수의 코를 톡 건드렸다. 종수가 고개를 뒤로 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규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걸 다 봤으니 이제 소파 위에 있는 옷을 볼 차례였다.

“옷도 봐도 돼?”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옷을 감싸고 있던 비닐을 벗겨 소파 위에 가지런히 뒀다.

나란히 놓인 옷가지들은 같은 디자인에, 결혼식 복장답게 차르르 윤기가 나는 백 정장이었다. 이규가 디테일을 차근차근 훑었다. 일반적인 노치 라벨 대신 날렵하게 빠진 피크 라벨이 세련된 느낌을 물씬 더했다. 종수가 너무 야해 보이니―이규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밖에 혼자 나갈 때는 입고 다니지 말라고 하던 스타일이었다. 오늘은 같이 있을 거라 괜찮나 보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 이규는 목을 가다듬었다. 옆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종수 앞에서 웃을 수는 없었다.

“어때?”

옆에서 이규의 말을 기다리던 종수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예뻐.”

“괜찮아?”

“응. 마음에 들어.”

“빨리 입고 나와 봐.”

종수가 옷을 들어 이규에게 안겨준 후, 빨리 나오라며 재촉했다. 말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방문 앞에 이규를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그러다가도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옷걸이의 목 부분에 걸쳐있던 넥타이를 빼앗아 들었다.

“넥타이는 왜?”

“……나중에 내가 매줄래.”

이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넥타이 맬 수 있어?”

“……연습했어.”

“진짜?”

이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종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규의 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은 매번 너무 좋아서, 또 적응이 안 됐다. 저걸 곧이곧대로 마주했다가는 여기서 당장 멱살을 쥐고 입술을 부빌지도 몰랐다. 거기다 대답이라도 해주려 입을 열었다가는 또 험한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 종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이것도 나 몰래?”

이규는 그런 종수의 마음도 모르고 또 잔뜩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종수가 이규의 어깨를 슬쩍 밀쳤다.

“……빨리 입고 나오기나 해.”

이규가 그런 종수를 보고 입술을 달싹대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뽀뽀를 하고 싶었는데 뒤에 친구들이 있어서 못 하는 상황이 아쉬워서였다. 이규는 결국 종수가 밀어 넣는 대로 얌전히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는 하나하나 옷을 갈아입었다.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 역시 어머님이 데려가 주셨던 그 테일러 샵에서 맞췄구나 하는 감이 왔다.

종수는 밖에서 어디에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이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사이 소파의 빈자리를 알아서 찾아 앉은 스테판과 로시는 그런 종수를 시시덕거리며 지켜보기만 했다. 특히 스테판은 이런 종수의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 결승 전에도 이렇게까지는 떨지 않았던 놈이 애인이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그사이에 이 정도로 초조해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스테판이 그런 종수를 놀리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종수. 진정 좀 해.]

[시끄러.]

[너 그런다고 빨리 안 나와.]

종수가 여전히 방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타박했다.

[너도 로시 기다리면서 이랬잖아.]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이규는 밖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피식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흘리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스테판과 설전을 벌이던 종수가 문소리에 휙 뒤를 돌았다.

그 후엔 정적이었다. 이규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물게 들었다. 종수만 있다면 껴안기라도 하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뻔뻔하게 애정행각을 벌일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그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이규가 눈치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때?”

스테판과 로시가 등 뒤에서 서로를 툭툭 치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고, 이규는 제 대답을 기다렸지만, 종수는 입을 꾹 다물고 이규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규가 끝내주게 예뻤다.

인터넷에서 보던 웨딩드레스를 입은 연인을 보고 눈물을 터뜨리던 영상들이 다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눈물이 찔끔 나려는 걸 종수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규만 있다면 괜찮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눈물 같은 걸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 변화가 이규의 눈에는 선명하기만 해서, 결국 이규는 조심스레 다가와 종수의 얼굴을 가만히 감싸고 그를 불렀다.

“나 별로야?”

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규가 이마를 톡 맞댔다.

“마음에 들어?”

“……응.”

“예뻐?”

이규가 그렇게 물으며 눈꼬리를 잔뜩 휘었다. 종수가 괜히 더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

“잘 어울려?”

“응.”

“그치. 누가 골라준 건데.”

“……응.”

이규가 습관적으로 입을 맞췄다가, 아차 하는 마음에 눈치를 슬쩍 봤다. 종수도 이규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제야 스테판과 로시의 존재를 떠올렸다. 종수가 슬그머니 떨어지는 이규를 다시 끌고 와 입술을 꿍 박았다.

“아니, 종수……. 그래도 친구들 보는데.”

“지들도 하고 싶으면 하겠지.”

“그래도 나는 오늘 처음 보는데…….”

“이러는 게 부끄러워?”

종수가 다시 눈매에 힘을 주고 이규를 추궁했다. 부끄럽다고 해야 할지, 민망하다고 해야 할지, 제 안에 있는 유교남의 자아가 아우성을 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답했다가는 종수가 단단히 토라질 것만은 확실했다.

“그건 아닌데, 너 이러는 거 나만 보고 싶어서 그러지.”

“……흥.”

하여간 말은 잘했다. 종수는 또 못 이길 말을 하는 이규에게 입술을 삐죽댔다. 이규는 그런 종수를 살살 달랬다.

“넥타이도 매서 완성 시켜 줘야지.”

종수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에.”

“나중에 언제?”

“차에 타고 나서.”

“그건 왜?”

이규가 눈을 또 동그랗게 만들고는 물었다. 종수는 대충 얼버무리려다가 눈앞의 이규가 대답을 안 해주고는 못 배길 정도로 귀엽게 굴고 있어서, 머뭇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야만 했다.

“……매주면,”

“응.”

속삭이는 종수에게 이규가 고개를 좀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종수는 훅 가까워지는 이규의 얼굴에 살짝 움찔거렸다가, 이규에게만 들리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겨서 키스하고 싶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이규는 몸을 바짝 굳히더니, 이내 나른한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미치겠다…….”

비져나오는 탄식과도 같은 말은 덤이었다. 종수의 말을 들으니 당장에라도 그의 숨결을 탐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길이 없어 더 그랬다. 이규가 애먼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다가, 종수의 뒤에서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는 종수의 친구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려줬다. 이규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지만, 두 사람이 이쪽을 보지 않는 기회를 놓치기는 또 싫어서, 종수의 입술 위로 재빠르게 제 입술을 눌렀다 뗐다. 소리도 별로 나지 않는 아주 은밀한 뽀뽀였다.

“나도 그래.”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부끄러움을 조금 참는 대가로 이규가 이렇게 안달 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규가 종수의 얼굴을 한번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가 놓고는 또 빠르게 덧붙였다.

“지금은 이걸로 참고, 나중에 이어서 하자. 알겠지?”

이규답지 않은 조급한 말투에 종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밉지 않게 한번 흘겨본 뒤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 하고 종수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규는 스테판과 로시에게 민망하다는 듯 눈인사를 한번 한 이규는 이내 옷을 챙겨 들고 종수에게로 향했다. 종수가 했던 것처럼 넥타이는 빼놓은 채였다. 차에 타서 종수가 제 넥타이를 매준 뒤에 한번, 제가 종수의 넥타이를 매준 뒤에 한번, 이렇게 두 번은 키스해야 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진정될 것 같았다.

“빨리 갈아입고 오자. 응?”

이규가 그 속내를 삼키며 종수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하지만 종수는 친구들과 이규만을 두고 가는 게 불안했는지, 옷을 건네받고도 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쟤네가 뭐라고 해도 듣지 마.”

“나 영어도 못 하는데?”

“그래도 알아듣는 것도 있잖아.”

“나쁜 말 하겠어?”

이규가 종수의 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달랬다. 하지만 종수는 여전히 걱정이 됐다. 스테판은 물론이고 로시도 저를 놀리고 싶다면 어떻게 해서든 쉬운 영어만을 써서 말을 붙이고도 남았다. 종수가 이규 뒤로 보이는 스테판을 노려봤다. 스테판은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기만 했다.

결국 종수는 이규가 등을 떠밀어서야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스테판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감탄과 함께였다.

[와우. 저 자식은 애인 앞에서도 성깔이 아주…….]

로시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근데 진짜 좋아하나 봐.]

[그러게.]

스테판이 답을 하고는 덧붙였다.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얌전해졌잖아.]

[저런 얼굴도 처음 본다.]

[그러니까 결혼하겠다고 이 난리를 쳤겠지.]

이규는 뭐라 뭐라 얘기하는 둘을 두고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고는 아차 싶은 마음에 짧은 영어로 물었다.

[미안. 물? 커피? 차?]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서였다.

[커피로 부탁해.]

스테판의 답을 듣고 걸음을 옮기던 이규가, 중간에 멈춰 서고는 질문을 추가했다.

[따뜻한 거, 아니면 차가운 거?]

[따뜻한 거로 괜찮아.]

이번에는 로시가 답했다.

[오케이.]

대답한 이규가 정장 재킷을 벗어둔 뒤, 곧장 주방으로 향해 잔을 꺼내 들었다. 종수를 깨우기 전 한잔씩 내려 마셔 익숙해진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아래에 머그잔을 가져다 댔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 내음이 주방이며 거실을 채웠다. 이규는 둘에게는 커피를 내어주고, 저와 종수의 몫으로는 생수병을 두 개 들고 왔다.

종수가 마침 문을 열고 나왔다. 이규는 소파에 앉으려던 어정쩡한 자세로, 문을 열고 나온 종수를 마주했다.

그리고 왜 종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를 깨달아버렸다.

멋쩍어하면서 나온 종수가 너무 멋지고 예뻐서였다. 이규는 또다시 코끝이 찡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규가 단숨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뒤에 있을 종수의 친구들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큼 다가간 것 치고는 섣불리 손을 뻗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까지 하얀 옷을 입은 종수는 처음 보는 것 같았는데, 빈말이 아니고, 진짜 천사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예쁜데 멋지고 잘생기기까지 할 수 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역시 사람이 아닌가. 천하 제일인이 되려거든 역시 보통 인간으로는 좀 무리인가. 근데 내가 이런 사람이랑 결혼을 한다고?

말도 안 됐다.

종수가 미국에 있던 시절, 나라가 있었으면 팔아서 종수를 데려왔다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이번 생에 종수를 만나 사랑을 하는 거였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멋진데 잘생기기까지 한데다 사랑스러운 사람과 평생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이규의 머릿속은 끝을 모르고 펼쳐지는 종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게 멈출 줄을 모르고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진짜 예쁘다.”

“괜찮아?”

“진짜 예쁘다.”

“다행이다.”

“진짜 예뻐.”

고장이라도 난 듯이 그 말만 반복하는 이규 덕에 종수는 드물게 민망했다. 종수가 그만하라는 듯 이규를 가볍게 툭 쳤다.

“……그만해.”

“근데 진짜 예쁜데.”

“예쁜 건 너고.”

“나 예뻐?”

다행히 그 말에 이규는 정신을 좀 차린 듯했다. 드디어 예쁘다는 공격에서 벗어난 종수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나왔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이규의 차림새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서였다.

“응. 재킷은 왜 벗었어.”

“커피 내리느라.”

“커피?”

“친구들 대접은 해야지.”

종수가 그제야 이규의 뒤에 있는 둘을 바라봤다. 이규의 말이 맞긴 했다. 친구의 결혼을 도와주겠다고 꼭두새벽부터 온 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셔츠 하나만 입은 이규의 탄탄한 몸매가 드러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눈앞의 친구들이 부부 사이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이규.”

“응?”

“재킷 빨리 입어.”

“응? 왜? 셔츠만 입고 있으면 별로야?”

종수가 차마 이규의 멱살을 잡을 수는 없어서, 그의 팔을 잡아서 확 끌어당기고는 귓가에 짓씹듯이 속삭였다.

“당장 벗기고 싶으니까 하나 더 걸치라고.”

이규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종수를 바라보더니, 이내 또 허물어지듯 웃었다. 종수는 씨근대는 숨을 내뱉으며 그런 이규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예쁘게 웃기만 하는 이규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종수.”

“응.”

종수가 삐죽삐죽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답했다. 이규가 종수의 허리를 감싼 채 그를 끌어당겼다. 종수가 했듯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실 나도.”

종수가 그 말을 듣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규가 킥킥대고는 또다시 속살댔다.

“빨리 결혼하고 호텔 갔으면 좋겠다. 그치.”

종수는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괜히 좋은 마음에 이규를 살짝 밀쳤다. 이규가 반 발짝쯤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손을 뻗어 재킷의 옷깃이나 셔츠를 매만지며 종수를 불렀다.

“근데 종수.”

“응?”

“우리 밥도 안 먹고 옷 입어버렸는데.”

이규도 커피를 내리며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심장이 벅찰 만큼 종수가 좋은 덕에 그에게 사랑을 퍼붓느라 바빴고, 그 덕에 시간이 지체된 탓에 허둥지둥 준비하느라 식사를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 같았다. 컵라면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새하얀 옷을 입고 라면을 먹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좋은 색시가 되어주겠다고 했는데 첫날부터 아침을 까먹다니, 이규는 조금 상심했다.

“…….”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종수도 눈이 뱅글뱅글 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규가 삼시세끼에─가끔은 네다섯 끼까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아서였다. 간단하게라도 뭔가를 먹고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새벽까지만 해도 했었는데, 이규가 예복을 입은 걸 너무 보고 싶어서 그걸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다시 벗기기도 싫었다. 벗긴다면 지금이 아닌, 결혼식이 끝난 후 호텔 객실에 들어섰을 때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요리를 하느라 이규의 옷에 음식 냄새가 배는 것도 싫었고, 이 옷을 다시 벗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굶는 게 답이었다. 하지만 이규가 그렇게 쉽게 끼니를 포기할 리도 없었다. 종수가 머리를 팽팽 돌렸다.

순간, 종수의 머릿속으로 결혼식 후기 하나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이거라면 이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줄 것만 같았다. 종수가 비장하게 이규를 불렀다.

“이규.”

“응?”

“결혼식 날 누가 밥을 먹어.”

“응?”

의아한 듯 되묻는 이규에게도 종수는 단호하게 답했다.

“끝나고 먹어.”

“음…….”

하긴,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 녀석들을 보면 다들 물 한 모금도 못 마신 채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뛰어다니긴 했던 것 같았다. 신부도 드레스 때문인지 식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간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지만, 그래도 우리는 갈 수 있지 않나……? 빵이라도 먹으면 안 되나. 종수 밥 먹여야 되는데.

도르륵 굴러가는 이규의 눈동자를 보고 종수가 눈매에 힘을 줬다.

“지금 밥이 중요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종수에게는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규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종수가 준비해 온 일 년 반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이규는 대신 어제 챙겨둔 일상복 가방에 초코바나 넛츠바를 몇 개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수는 매번 대수롭지 않게 끼니를 거르겠다고 했지만, 배가 고프면 누구보다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입에다 단 걸 물려주는 것만이 답이었다. 속으로 다짐한 이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또 뭐 해야 돼?”

오늘의 결혼식은 몽땅 종수가 준비한 거라 이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로시가 설명 해줄 거야.”

하지만 종수에게서는 의외의 대답과 인물이 흘러나왔다. 이규의 고개가 느리게 옆으로 기울었다.

“로시가? 왜?”

이규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이건 종수와 저의 결혼식이었다. 친구들은 잠시 옷을 맡아줬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의아한 이규의 얼굴을 보고도 종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사진 찍어야 돼.”

“……응?”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이규에게 종수가 한 번 더 말했다.

“결혼식 하니까 사진도 찍어야지.”

“응?”

“로시 사진작가야.”

그렇구나. 로시가 사진작가고, 결혼은 우리가 하는 거니까, 유추하자면 로시가 우리의 결혼사진을 찍어주겠구나.

라고 생각하기에는 이것조차 서프라이즈였다!!!

이규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과부하에 걸린 것만 같은 뇌를 애써 호흡으로 가다듬었다. 이틀 사이에 놀랄 일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뭔가가 더 있다면, 놀라는 데 에너지를 다 써서 정작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규는 이 모든 순간을 내내 곱씹고 기억해서 죽기 전까지 떠올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이규가 종수를 불렀다.

“……종수.”

“응.”

“나 모르는 거 또 뭐 있어?”

“…….”

종수는 이규의 반응에 당황했다. 제가 이규에게 이 사실을 안 전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거라 자신에게는 뼈에 새겨질 수준으로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이규는 이걸 모르고 있었나? 종수가 다시 고장이 났다. 그가 몸을 바짝 굳히고 뚝딱대는 게 이규의 눈에도 빤히 보였다.

이규도 그사이 조금 차분해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사실 종수와 사귀면서 꽤 잦은 빈도로 겪게 되는 일이었다. 종수는 제가 라멘이 먹고 싶다고 하면 곧바로 비행기표를 끊어 옆 나라인 일본으로 전국 삼대 라멘 같은 걸 먹으러 계획을 짜고 통보하는 남자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이규도 그런 일들을 이벤트로 생각하고 제법 즐기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걸 결혼식에서까지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돌발 상황에 휩쓸리는 건 종수와의 연애에서 아주 당연하게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고, 이규는 그 태풍의 영향권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쪽이었다. 이규에게는 자신이 너무 좋아서 몰래 준비한 다음 짠! 하고 들고 오는 애인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것도, 그 뒤에 기다렸다는 듯 밀려드는 애정을 그에게 퍼붓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규도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끌려다니기보다는, 이 계획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상황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종수는 세워뒀던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이 뒤의 계획을 들은 뒤 돌발 상황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여기까지 준비한 건 종수의 노력이 다였으니, 자신도 하루 정도는 신경을 써서 오늘을 완벽하게 행복한 날로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규는 질문을 좀 바꿔보기로 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종수는 뭘 말하고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일 년 반은 준비했다고 했으니 종수의 성격상 시뮬레이션을 몇백 번은 돌려봤을 거고, 그래서 제가 뭘 모르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종수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답을 했다.

“8시 좀 전까지 시청으로 가서 8시 15분에 라이센스 발급 신청하고, 9시에 식 올려.”

“라이센스 발급에 준비해야 할 건 없고?”

“예약증은 내가 뽑았고, 증인도 왔어.”

이규는 그제야 종수의 친구들이 왜 번지르르하게 양복을 입고 왔는지 이해했다. 이 둘을 증인으로 데리고 갈 예정인 듯했다.

“사진은 남는 시간에 찍어?”

“응.”

“식은 몇 분 진행인데?”

“15분? 빨리 끝나.”

“사진은 그럼 끝나고도 찍겠다.”

“응. 근데 10시부터 단체 관광 시작이거든. 그래서 그때는 위층에서 사진 찍거나 하려고.”

이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체 관광 일정까지 조사해서 계획을 짠 게 너무 종수 같아서 웃음도 좀 났다. 그 미소 덕분에 종수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규가 종수의 귓불을 톡 건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늦어도 11시쯤에는 끝나겠네. 그러고 나면 호텔 가고?”

“응.”

“호텔은 1박이야?”

“……2박.”

“끝나고 다시 숙소 와서 짐 챙기고 다음 날 글램핑 가?”

“……응.”

이규가 말하는 걸 듣고 보니 너무 일정이 빡빡하다 싶긴 해서, 종수가 이규의 눈치를 흘끔 봤다. 하지만 이규는 다시 흐물흐물하게 풀린 얼굴로 종수의 볼을 조물조물하기만 했다.

“우리 여보가 너무 수고했는데.”

심지어 여보 같은 소리까지 해댄 덕에 종수는 또다시 몸을 바짝 굳혔다. 이규가 손을 내려 딱딱하게 굳은 종수의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응? 나는 뭘 해줘야 하지.”

“너는 몸만 와.”

종수가 그 말에는 냉큼 답했다. 이규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자신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종수의 모습에 이규가 이마를 콩 맞대고는 코앞에서 속삭였다.

“몸만 가?”

“응.”

이규가 갑자기 짓궂게 웃었다. 그러더니 더 은밀한 목소리를 냈다.

“몸으로 갚을까?”

터무니없는 대꾸에 종수의 눈이 또 뱅글뱅글 돌았다. 몸만 오라는 말에 몸으로 갚는다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규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야한 말이나 해대는 게 너무, 너무, 꼴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평소에 그러지 않는 성정이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이건 저기 있는 두 사람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하는 게 분명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까?”

문제는 이규의 말에 혹하는 자신이었다.

“배 터지게 싸 주고.”

상상만으로도 좋았다. 이규는 서서히 빨개지는 종수의 귀를 매만지며 또 야살스레 속살댔다.

“우리 여보 취향에 내가 맞춰줘야지. 그치?”

“……너는.”

하지만 종수도 이규의 취향은 상냥하고 다정하며 간질간질한 잠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무 자신에게만 맞춰주는 건 아닌지 슬쩍 걱정이 됐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봤던 수많은 썰 중에서, 한쪽이 너무 맞춰주기만 하면 헤어지기 쉽다는 말을 본 게 생각이 나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규는 그 물음에도 망설임 없이 만점짜리 답을 내놓았다.

“나는 우리 자기가 좋다고 하면 좋지~ 위험한 것만 아니면.”

사소한 불안 따위는 몽땅 씻겨나가는 대답이었다. 거기에 만족한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규는 자기를 좋아했다. 이건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이규가 너무너무 좋았다.

그 마음이 또 금세 넘쳐 턱밑까지 차올랐다. 종수가 침을 꼴깍 삼키고, 이규를 살짝 밀친 뒤 소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이규를 보고 있다가는 식도 올리기 전에 그를 덮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새빨개진 종수의 얼굴을 보고 스테판이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봐도 놀리는 게 다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애정행각은 다 끝났고?]

[조용히 해.]

종수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규는 주방으로 가더니 의자를 가져와, 종수의 옆쪽에 두고 앉았다. 로시가 직전의 대화에서 제 이름이 언급된 걸 기억하고 있다가 종수에게 물었다.

[종수. 리한테는 사진 찍는다고 말 안 했어?]

[……그런가 봐.]

종수가 작게 답했다. 스테판이 낄낄대며 충고했다.

[너 남편한테 그런 거 말 안 하고 혼자 맘대로 다 하면 사랑 못 받는다. 시시콜콜한 것도 다 말해야 돼.]

[너는 너무 많이 말해.]

로시가 으스대는 스테판의 모습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너무하다.]

스테판이 대꾸했지만, 로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종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종수. 이제부터 얘기하는 건 잘 전달해 줘야 돼. 남자친구 영어 못한다고 했으니까.]

[응.]

종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가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다. 종수와 이규가 고개를 모으고 함께 화면을 들여다봤다.

[시청은 다녀와 봤지?]

[어.]

로시가 배경 사진과 사람 사진이 이리저리 붙여진 페이지들을 띄우며 설명을 덧붙였다.

[입구랑 로툰다에서 찍고. 식 중간에도 찍을 거야.]

[응.]

[포즈는 생각해 봤어?]

[이규 사진 잘 찍어.]

로시도 종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인스타 멋지더라.]

[……그걸 어떻게 알아?]

[어제 검색해 봤지.]

종수가 눈을 부릅떴다. 로시와 함께 스테판도 낄낄댔다. 로시는 내친김에 핸드폰을 꺼내 이규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리. 이거 너 인스타 맞지?]

이규가 로시의 화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팔로우했어. 너 완전 유명한 인플루언서더라.]

[음. 고마워.]

이규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인스타 계정 얘기는 제법 듣는 것이었지만, 종수의 미국 친구들에게 들으니 제법 쑥스러운 것도 같았다.

[너도 나 팔로우할래?]

[그럴까?]

[응. 종수는 인스타 잘 안 하니까.]

로시의 말에 이규가 낮게 웃었다.

[맞아.]

그런 이규를 종수가 툭 쳤다. 이규가 종수를 돌아봤다. 종수가 조금 불퉁해진 얼굴로 이규를 바라봤다. 옆에 자신이 있는데도 로시한테 수줍은 얼굴을 보여주는 게 불만이라서였다.

“응. 종수.”

“팔로 빨리 해.”

“응? 응.”

이규가 핸드폰을 로시에게 내밀었다. 로시가 [실례.] 하고는 짧게 말하더니. 제 계정을 검색하고, 팔로우까지 한 뒤에 돌려줬다. 종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규가 제가 함께하지 못하는 취미생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어 보이는 게 싫었다.

[다음은? 어디서 또 찍는데?]

로시가 다시 패드를 꺼내 들었다. 화면이 휙휙 바뀌었다. 이번에는 다른 장소였다. 종수도 눈여겨본 곳이었다.

[3층이랑 4층에서도 찍어야 되고.]

[응.]

[면사포는 어디서 쓸 거야?]

[햇빛 예쁜 데.]

[창가가 좋겠다.]

로시가 사진을 몇 번 더 넘기며 창가 쪽을 보여줬다. 종수도 그 사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 3, 4층에 있는 창 앞에서 찍으면 돼.]

로시가 사진을 보여주다 말고 종수를 보고 물었다.

[시청 가서 보고 왔어?]

[어. 거기서 많이 찍더라고.]

[잘 보고 왔네.]

종수가 또다시 고개만을 끄덕였다. 로시가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 화면을 확인하고는 아이패드를 내려뒀다.

[이 정도면 됐어?]

[어. 가서 찍어보면 될 것 같은데.]

종수는 이전부터 나눈 얘기가 있어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이규는 여전히 아닌 것 같았다. 로시가 내려둔 패드를 들어 이규에게 내밀었다.

[더 봐도 돼.]

[고마워.]

아이패드를 건네받은 이규가 다시 한번 사진들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로시가 그런 이규를 보고, 종수를 향해 말했다.

[리한테도 설명 좀 해 줘. 영어 잘 못한다고 했잖아.]

종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규를 불렀다.

“이규.”

“응.”

영어를 하는 종수는 역시 멋지구나. 목소리도 좀 달라져서 더 섹시하고……. 같은 생각을 하며 사진을 보고 있던 이규가 종수의 부름에 냉큼 답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 로시가 사진 찍어줄 거야.”

“응.”

“보여준 사진들 봤지? 그거 참고하면 돼.”

“응.”

이규가 이어질 종수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종수는 그런 이규를 향해 눈꺼풀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결국 이규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로시와 나눈 대화가 짧지 않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야?”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면사포도 쓸 거야.”

“끝?”

로시도 마찬가지로 너무 짧은 종수의 대답에 의문을 가지며 둘이 나누는 대화를 살피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규의 마지막 말은 한국어를 모른대도 의아함이 가득한 게 느껴졌기에, 로시가 다시 종수를 불렀다.

[종수. 설명 다 해준 거 맞아?]

종수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찍는다고 했어.]

[그게 다야?]

[너가 보여준 사진 참고하라고 했어.]

[끝이야?]

로시의 얼굴이 이규와 비슷했던 탓에, 종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가 더 필요해?]

[좀 더 설명을 해줘야지.]

종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눈썹을 더 찡그리고는 대답했다.

[사진 찍는 거 말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데.]

로시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 이러는 거 보면 진짜 스테판 친구 같아.]

[뭐야. 욕이야?]

옆에 앉아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스테판이 발끈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가, 로시의 손에 금세 제지당해 소파에 다시 등을 붙였다.

[욕이지.]

그런 스테판을 본 종수가 심드렁하게 동의를 표했다. 그 태도에 스테판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야?]

[너 섬세하지 못하잖아. 나도 그렇고.]

[야. 나 꽤 섬세해.]

로시가 그런 스테판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스테판이 억울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거기에 반응해 주는 건 어색하게 웃어주는 이규밖에 없었다. 로시가 시계를 흘긋 보더니 아예 말을 돌렸다. 여기서 종수를 더 닦달해봤자 그가 이규에게 설명을 더해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좀 있다가 넉넉하게 출발하자.]

[응.]

[체크 한 번만 더 할까?]

[좋아.]

로시와 종수는 금세 머리를 맞대더니 결혼식에 필요한 준비물을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여권이랑 예약증 챙겼고? 프린트는 해 왔어?]

[응. 한국에서.]

[증인은 우리 둘이면 되고.]

[어.]

로시가 옆에 둔 가방을 뒤적이더니 접힌 종이를 몇 장 꺼내 내밀었다.

[여기. 호텔 바우처. 메일로 전달하긴 했는데, 뽑아오기도 했어.]

종수가 말없이 건네진 종이를 받았다.

[너 이름으로 스위트룸 예약해 뒀으니 확인해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종수의 귓가가 조금 붉어졌다. 로시가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 되게 좋아.]

[……응.]

그의 말대로 결혼 선물로 예약해 준다던 호텔 룸은 사진과 후기만으로도 정말 좋아 보였다. 룸 컨디션은 물론이거니와, 호텔 내 시설도 단연코 좋았고, 통창으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 곳에서 이규와 단둘이 하루만 갇혀 있기는 아쉬울 게 분명해 연박이 가능하도록 예약을 추가했다는 사실을, 종수는 둘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이규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내심 다짐했다.

종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스테판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너 되게 수줍어하네?]

[시끄러.]

대꾸하는 종수의 귓가가 너무 새빨개서 스테판은 그냥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무시하는 걸 택했다. 싸가지 없는데 신경만 쓰여서 재수가 없는 친구 놈이 사랑에 빠져 안달복달 행복해하는 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속이 좀 메스껍긴 해서였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외전으로 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완결을 겨우 어제쯤… 낸 것 같은데 벌써 2주가 지났더라고요?! ㅋㅋㅋ 우째 이럴 수가… 저는 그 사이에도 꾸준히 외전을 쓰고 있었는데🤦‍♀ 완결을 내고 나면 뇌가 굳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와버리는 탓에! 진도를 팍팍 나가지는 못했네요🥲ㅋㅋㅋ 하지만 정말 매일매일 원고를 했습니다…ㅠ(결백함을 주장하는 손짓발짓)

이부분도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또 왕창 길어져버렸습니다ㅋㅎ 하지만… 저도 쓰다가 깨달았지 뭐에요… 이 결혼식에 대해 아는 것은 종수 밖에(그리고 종수의 입장에서 함께 결혼 준비를 함께 한 저밖에) 없다는 것을요… … … … !!! 이규든 독자님들이든 이 결혼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쫑수는 작중시간에서 1년 반을 준비했지만, 저도 이 결혼식을… 작년 10대운이 끝나자마자 준비했기에ㅋ 벌써 한 반년쯤 되어가다보니 제가 뭘 썼는지 안 썼는지도 모르겠어서… 한문단씩 쓸 때마다 제가 제 원고를 엄청나게 뒤져봐야했어요😇! 장편 연재는 이런 것이… 문제군요… 제가 뭘 썼는지가 정말 기억이 안납니다…🤦‍♀!!

사실 이 글에 쓰인 규라는 말이 한국으로 달링인 줄 알았지 뭐야~ 같은 대사는 디푸님이랑 이것저것 썰을 풀다가 디푸님이 해주신 이야기인데,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셔서! 이렇게 귀여운 대사를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후 넘 귀엽지 않나요… 이 독점욕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만 태풍에서 봄바람이 되어주는 거에요…ㅜㅜ~!

암튼 매번 저와 이런저런 썰을 풀어주시며 원고 소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시는 디푸님께… 이자리를 빌어 또다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실 넘 마니 얘기애서 뭐가 제 생각이고 뭐가 디푸님 생각인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냥 소장본 젤 첫장에 스페셜 땡스투로 박을라고요 흑흑!

아무튼! 다음주에도 열심히 써서 가져오겠습니다 ^^)7!!! 목표는… 쓰읍… 23일까지 두편은 더 올리는 건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넌 할 수 있 어 . . . !!! 약 한 소 리 하 지 마 . . . .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은 댓글 스핀 인용 모두 감사히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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